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2disc)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 대원DVD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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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타 이사오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활동하는 감독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작품을 내논 감독이다. 그의 작품으로 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바람계곡의 나우사카, 천공의 성 라퓨타, 엄마 찾아 삼만리 등 주로 어린이나 어린 청소년들이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미야자키 감독과 같이 만든 바람계곡의 나우사카와 이번에 필자가 리뷰하려는 평성 너구리전쟁 폼포코는 자본주의 사상에 따른 환경문제와 인간의 가치론적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필자가 이 애니메이션을 리뷰하게 된 동기는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는 애니메이션을 인문사회학적 관점에서 만든 서적을 보고 결심하였다,




우선 이 애니메이션의 발단을 알아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다.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은 부흥하지만 그 반대로 인간이 밥벌이가 가능한 공장과 인간이 잠을 잘 수 있는 아파트가 들어서면 설수록 기존에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인간의 욕구로 인해 망가져 간다.

  

자연과 공존이 무너지면서 도시가 개발 되는 곳에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너구리들에게도 닥치기 시작했다.  너구리 무리들은 인간의 지나친 개발활동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가 무참하게 사라지는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작품 내의 배경은 도쿄시가 거대한 도시로 가면서 도시 밖의 있던 사람들까지 몰려오게 되자 도시개발이 가속화된다.




이런 가속화된 도시개발에 국가정부에서는 개발사업을 국책사업으로 내세우면서 이 이야기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것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너구리들은 기존에 자신들의 생태계에서 만족하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터전인 산을 개발하자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과 자연파괴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변화에 대한 대사가 나온다.




"인간은 예전에 우리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하느님이나 부처님보다 위대하구나"라고 말이다. 여기서 인간은 예전에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은 원래 인간은 너구리와 같이 자연 안에 머물고 살아가는 단순한 생명체라는 것인데, 어느 순간 하느님이나 부처님보다 위대하다는 뜻은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닌 그 이상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민속신앙은 토테미즘, 애니미즘과 같은 동물신 숭배와 샤머니즘과 같은 눈메 보이지 않는 정령을 숭배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풍습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물론 한국도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사상으로부터 시작했다,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은 샤머니즘, 어머니 웅녀는 토테미즘 종교를 가진 부족이고 두 부족이 연합하여 생긴 것이 고조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서양종교철학은 인간은 신의 대리 혹은 신이란 존재 아래라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깐 신의 전지전능 다음으로 인간이 탁월한 이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합리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이를 위해서라면 자연은 희생 되도 상관없다는 논리나 사고이다. 그래서 그런 사고는 고스란히 동양의 국가와 민족으로 넘어오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사상에서 경제지배논리사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동물 중에서 너구리일까? 필자는 솔직히 일본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애니메이션 보는 것과 애니메이션 관련 서적을 보는 것과 대학교 시절 우연히 신화학을 듣고 나서 약간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너구리는 한국이나 일본의 전설에서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동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동물인 것이다. 전설에서 둔갑술이 유능한 동물로는 여우, 학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나 한국 고대전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로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컴플렉스에서 주인공의 코스프레 동호회에서 산으로 수련 갈 때 그림병풍에서 학의 사랑이야기가 나오는데, 학이 사람으로 둔갑하는 것이나 한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전설이 존재하는 것과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이나 한국에서의 구미호전설을 생각해보면 일본과 한국의 전설은 겉은 다르나 속 내용이나 흐름이 비슷한 점이 많다. 너구리와 같은 경우 예전에 개그맨이 나온 영화에서 여자배우가 너구리요괴가 인간으로 둔갑하여 나온 이야기가 있듯이, 필자는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에서는 많은 동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에서 필자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경제개발에 따른 기존 사상과 마찰이다. 아무리 너구리들이 힘을 모아서 인간의 개발행위를 저지하여 오늘 일하고 있는 인부가 떠날지는 몰라도 다시 새로운 인간들이 산으로 찾아온다.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아무리 막아하고 멈추려 해봐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개발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너구리들은 신적인 힘을 가진 너구리원로 3마리를 초대하는데, 이 신적인 힘을 너구리는 기존 일본인들이 가진 전통적인 사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호이다.




이 원로 너구리 3마리 중에 하나는 붉은 후광에 칼은 들고 있는 것은 마치 부처님을 호위하는 사천왕처럼 보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절간에서 중생을 너그러이 바라보는 석가모니 부처님 보이며, 마지막 하나는 칼집 안에 칼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치 고대부족의 수장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 일본의 기존 종교사상이 도교, 불교, 애니미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인듯하다. 원로 너구리 3마리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작품 초반에 너구리들이 “인간은 하느님이나 부처님보다 위대해졌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사를 인용하여 부처 모양을 한 너구리는 인간에게 대항하다가 법력을 너무 사용하여 죽게 되는 점다. 이 죽음의 의미는 인간의 경제지향주의에 따른 파괴는 자연에게만 영향 준 것이 아니라 기존 일본인들의 가치관마저도 변하게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칼을 차고 있던 원로너구리는 본래 신사에 머물고 있는 신관너구리로 작중 대화에서 기존에 그는 인간들에게 존경심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어깨를 숙이게 된다. 하지만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를 보면 과연 너구리를 통해 자연생태계 파괴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 그 이하가 존재할까? 사실 이 너구리전쟁 폼포코가 7세 이상이라고 하지만 내용적인 해석을 하려면 17세 이상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건 작품 내에 담은 그냥 보기 쉽게 등장하나 막상 이 이야기들을 지켜보면 매우 깊이가 있고 의미심장하다. 작품 내에서 자연세계에서 쫓겨나는 너구리가 이런 말을 한다. “원래 인간은 너구리였지만, 너구리가 될 수 없었다고” 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내용인가? 인간은 원래 인간인데, 그런데 그 인간이 처음에 너구리라니?




사실 너구리는 인간과 친숙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본래 인간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본래 너구리가 너구리인데 너구리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건 우리 인간들이 자연에 대한 존중심과 더불어 우리 마음 즉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너구리가 살아갈 장소가 없어지는 것은 자연생태계 파괴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치관까지도 상실했다는 뜻이다. 경제성장 중심 사고로 인해 인간은 일정한 척도와 기준을 정해 거기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불순물이나 인간이하로 취급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인간을 소외하는 근본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모든 인간의 가치와 기준을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경계로 구분하여 달성되지 못할 경우 거기서부터 분류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육정책을 보면 공부 못하면 선생이나 학우, 부모님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부를 잘하는 어떤 사람이 사실 인격이나 성격 등이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공부만 잘하면 뭐든지 좋다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건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무한 경쟁사회 패배하는 순간 인생의 낙오자로 만들어버리는 이 냉정한 세계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간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결론부로 진행되면서 너구리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살아갈 터전도 공간도 상실한 채 그냥 여기서 죽어야 하는지 아니면 새롭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런 상황에서 너구리들의 산을 개발하는 대표적인 회사 원더랜드 쪽에서 너구리에게 접촉을 시작한다. 여기 원더랜드 사장 옆의 유능한 비서가 한명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실 인간으로 둔갑한 여우였다.




여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으로 둔갑하여 인간 세상에 적응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구조에서 말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기존 가치관을 두고 있는 너구리(기존 일본인)에게 어려운 선택이겠지만, 살아남는 방법은 그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우리나 너구리들이 알고 있던 것이다. 생각나는 장면 하나가 만약 너구리들이 다 둔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우들은 어떻게 했는가?




여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변신하지 못하면 그대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만약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버리면 과거의 도태된 여우처럼 죽게 되거나 혹은 은밀한 곳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가야할 운명이 된다고 말이다. 이 잔혹한 운명은 너구리도 거쳐야 할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




결국 너구리들은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하여 인간세계에 들어가서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너구리무리에서 할머니너구리는 식당에서 일하고, 어느 젊은너구리는 셀러리맨,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힘들게 이 세상에 살아간다. 결국 너구리들(기존 자연과 융화하며 살아가는 가치관을 지닌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현실사회에 맞추며 살아간다.




하지만 둔갑하지 못한 너구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즈 먼 산으로 들어가 은둔하거나 혹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 너구리는 인근 농장에서 닭을 훔쳐 먹거나 혹은 훔쳐 먹다가 덫에 걸려 최후를 맞이하기도 한다. 또한 길거리를 서성이다가 지나가는 차에 부딪혀서 즉사하기도 한다. 짐승들이 도로에 배회하다가 차에 치어 죽는 것을 로드킬(load kill)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너구리들이 로드킬로 죽어가고 있는가? 그런 너구리로 통해 우리 인간은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내었는가? 인간 문명사회는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죽이고 그 동물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인간성마저도 죽이고 있다.



이런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너구리들은 끝까지 좌절하거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가 되어 버린 자신들의 터전에 모여 다시 모이고 만나 모두 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이 모습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망가진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인간의 진실한 가치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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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 아웃케이스 없음
오리 시완, 아리 폴만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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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영화나 혹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분노를 느낀 적이 있었는가? 그 분노에 지나치다 못해 이런 일들을 저질른 인간들을 정말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보았는가? 나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 죽이다 못해 인간의 사지마저 찢어 버려 불로 태우고 싶을 정도로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낀 것이다. 바로 이번에 내가 적어 보려고 하는 애니메이션이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바시르와 왈츠라는 말도 웃기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작품에서는 왈츠 춤을 추는 것일까?

 우선 이 작품의 계기가 되는 시기적 배경이 있다. 1982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을 실제로 확살한 일들을 일종의 다큐멘터리 식으로 제작하였다. 이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결코 재미나 작화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나 이 작품 내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전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이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매기기는 정말 어렵고도 난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지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광기에 의해 미쳐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쳐가고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이 무차별적으로 행동하는 광기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광기를 부려 미치광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들이 미쳐 있지만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미친 사람이 미치지 않았다는 집단적인 합리성에 의해 그들은 자신의 합리성 즉 집단의 광기에 어긋나거나 비켜가는 존재가 등장할 경우 아주 사납고 잔인하고 비겁한 응징의 철퇴를 가격한다. 그 응징의 대상은 아주 강력한 군에서 비록하여 아무 힘도 없는 여자, 아이, 노인들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광인들이 만들어논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광인들이 너무 많고, 그 광인을 뒤에서 조장하는 존재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광기어린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보단 오히려 거기에 대해 옳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광기의 역사중에서 중세유럽시대에 마녀사냥이란 유명한 미친광이들의 향연이 있었다. 아무 죄없는 인간들을 마녀나 마도사로 몰아넣어 아주 가혹하고 처절한 고문으로 통해 거짓자백을 받아 무참하게 죽인 사건들이 있었다. 

이런 미친광이 사건들은 권력이라는 존재가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결탁하여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 마녀사냥 사건으로 인헤 수십만명의 평범한 인간들이 고문장의 고기나 화형장의 고기로 변해 버렸다.

아주 잔인하고 처참하여 고대 문헌자료를 보면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목, 발에서 떨어져간 발목, 얼굴에서 나온 눈알이 고문장 주변을 채워 있었고, 가시가 달린 신발, 의상, 허리띠 들로 인간을 학대하였으며, 잠도 재우지 않고 계속 고문만 하여 인간을 인간이 아닌 죄악덩어리로 만들었다.

이렇게 고문에 지친 죄없는 인간은 자신이 편안한 죽음을 위해 아무 죄없는 이웃 2명을 거명하고, 다시 그 이웃 2명은 잡혀와서 고문당하고 2명은 4명이 된다. 그렇게 거짓자백을 하게 될 경우 마녀인 사람은 화형대에서 아주 편안하게 죽는다고 한다. 인간이 죽는 것 중에서 불에 타서 죽는 것이 아주 괴로운데, 왜 불타는 것이 행복할까? 얼마나 인간이 광기로 가득차서 이런 미친일들로 이어질까? 

더욱 문제는 이런 미친짓을 저지른 인간들이 아무런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등장하는 주인공은 그런 광기어린 전쟁터에 참가하면서 광기어린 현장에 있었으나, 그 사실은 망각해 버린다. 전쟁이란 소용돌이와 전쟁에 일어나는 참극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양심만 아니라 자신의 기억마저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리(실제 감독이름이 아리 폴만, 화면 상에 안경끼지 않은 남자)는 잠을 잘때마다 계속 이상한 악몽을 꾸게 된다. 그런데 그 악몽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아리는 친구와 계속 만나면서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하고 했으며, 어디에서 있었으며, 무엇을 보았는지 계속 자신의 과거를 찾아 떠난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찾는다는 것은 2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망상이고 하나는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판단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기준이 혼자가 아닌 단체라면 그것은 하나의 진리와 이념으로 정립되며, 이 진리와 이념은 곧 모든 것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광기의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광기가 빠진 인간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발하기 시작한다. 어느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진군하기 시작하는데, 상황이 계속 폭격, 총격전 등이 발발하여 작은 인기척과 반응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군인들은 어느 지나가는 승용차가 보이자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차량안에는 적군이나 테러범이 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 민간인들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여 무차별 사격만 가할 뿐이다. 이런 극단적인 배타적인 심리는 인간의 잔인함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이런 심리상태는 잔인함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 보면 어느 시내 총격전이 보이는데, 여기서 어느 병사가 기관총을 들고 건물 중앙 사이에 있는 도로에서 혼자 총을 들고 목표도 없이 사격을 시작한다. 

이 사격을 보는 감독은 자기는 마치 왈츠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시르라는 인물이 폭탄테러로 죽게 되어 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바시르의 왈츠를이란 제목을 가진듯 하였다. 어느 인물의 죽음이 불러온 죽음의 전쟁, 그리고 전쟁에 빠져 자신의 이성과 인간성을 상실한채 전쟁의 먹이로 되버린 인간들, 총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미친듯이 총을 겨누는 인간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이 작품 말기에 흐르면 전쟁상황이 종료되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팔레스타인 민간인마을을 접수하게 된다. 본래 민간인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그러나 과격한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은 민간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방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광기어린 모습으로 힘없는 팔레스타인 민간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거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모두 부서버리고 살아있거나 움직이는 존재는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극악적인 광기를 말리는 것이 정상이나 오히려 방관하기 시작한다. 

이 레바논의 공습과 학살에서는 어떤 상당한 배후세력이 숨어있었다.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를 보면 테러리즘에 대해 매우 강한 비판을 보여주는 사적으로 이슬라엘 과격분자가 저지른 범죄 뒤편에는 누군가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암묵적인 동의를 한 국가는 이스라엘이 실행한 인종청소를 위해 군사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전문으로 파는 이 국가에서는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작품과 약간 비슷한 속성을 가진 작품이 있다. 그것은 화씨911이다. 미국 911테러가 끝난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 상처와 아픔은 당시 희생자로 하여금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한다. 왜 우리는 이런 극단적이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거기에 희생된 인간들은 얼마나 슬퍼해야 하는지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광기 그리고 그 광기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권력자들 역사는 언제나 이런 광기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가끔 보면 spectacle이란 단어를 여기저기 보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면 스펙타클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정작 스펙타클은 영어 look on, remain a spectator, 즉 방관(하다)의 의미이다. 

방관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능동이 아닌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 어느 일이 발생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뭔가 멋지면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내뱉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컬 하지만, 바시르의 왈츠를이란 영어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보여주는 방관적인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감상에서 내가 정말 분노한 장면이 있는데,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영상만이 아니라 실제 카메라로 녹화하여 그 실제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영상에는 무차별 폭격과 사격으로 인해 죽어버린 죄없는 인간들과 힘없이 무너져버린 건물잔해를 볼 수 있었다. 이미 인간이 저지른 잔혹사극은 오래전 일이지만. 그 일들을 보는 내내 나를 분노의 화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과연 자신이 똑바로 살고 있고 제대로 판단하는 이성의 동물일까? 나는 그 대답에 NO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정말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이다. 단지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역사와 국가, 민족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뿐이다. 인간이 추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희생과 각오,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게 일깨우친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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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메틱 Vol.1~6 전편 세트 - 할인행사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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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매틱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마호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원래 인간이 아니다. 단지 명령에 의해 싸우고 죽이고 파괴하는 그저 하나의 병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기계인간 즉 안드로이드임을 자각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마음이 바르고옳고 상냥했다.

어떻게 보자면 우리 지금 살아가는 인간보다 더욱 더 인간적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마호로는 한가지 슬픔과 한가지 절망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호로의 슬픔은 자신이 존경했던 미사토 사령관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사실이고, 절망은 사령관을 죽인 속죄로 사령관의 아들 스구루군과 여생을 보내며 자기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음에 대한 절망이었다.

마호로는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분명 그녀 스스로가 옳은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책한다.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아는 누군가를 죽이야 한다는 슬픔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지만 결국 스구루는 아버지를 잃었다. 스구루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붙들고 우는 모습에서 마호로는 진정 자신이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으로 가고자 함은 많은 갈등과 시련을 안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마호로는 마음은 바르나 평범한 인간의 기분과 감정을 가지지 못한 점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 스스로 스구루의 메이드로 살아가며 남은 여생을 보내면서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느끼고 비로소 자신도 한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안드로이드가 인간 흉내내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혼란을 겪는 마호로는 인간으로 범접하면 할수록 행복과 더불어 슬픔도 커진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은 1년 전후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스구루가 마호로에게 아버지 묘 참배에 다시 오자는 말과 스구루가 내년에도 마을축제에 다시 오자고 할때 마호로는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마호로는 내년이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여생을 받치면서 오히려 그곳에서 여생을 더 보내고 싶은 마호로는 인간의 가치를 느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마호로의 모습과 스구루의 모습에서 슬픈 감동도 짜아낸다. 물론 시키죠 선생과 옆에 친구들이 즐거운 재미도 안겨주지만, 사실 마호로에게 이 슬픈도 즐거움도 모두 소중한 인생임을 확인한다. 

인간과 기계 결코 연결될 수 없는 다른 존재랄지도 그 존재의 외적인 가치인가 아니면 그 존재에 대햔 내적인 가치인가는 이 작품으로 통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강함은 인간이 가진 물리적인 위력이 아니라 상대방을 진심으로 감동시키는 정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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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걸 마호로 1
디타마 보우, 나카야마 번즈로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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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매틱은 만화책 사이버걸 마호로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원작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만화가가 그림을 입혀 만든 하나의 만화책이 된 게 사이버걸 마호로이다. 그런 다음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제작하여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 오타쿠 문화에 한 획을 이은 가이낙스가 차기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물론 가이낙스가 마호로매틱을 만들기 전에 다른 작품을 만들었으나, 이 마호로매틱이야 말로 가이낙스적인 코드와 흐름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마호로매틱 1기와 마호로매틱 2기인 더 아름다운 것에서는 인조인간 안드로이드인 마호로로 통해 새롭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마호로매틱과 만화책인 사이버걸 마호로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많이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다. 그것은 마호로매틱을 감독한 가이낙스 대표이사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과의 관점 차이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이낙스 대표감독 중의 하나인 야마가 히로유키는 원작에 충실하기 보다는 그 작품 내에 자신이 반영하고자 하는 담론에 충실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어째든 만화책 사이버걸 마호로은 애니메이션 마호로매틱과 동일한 가치관은 인간에 대해서이다. 물론 그 많고 많은 만화책 중에서 인간이 등장하지 않거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도서는 많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이버걸 마호로는 그런 부분과 조금 다른 관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면서 오히려 인간보다 인간다운 마호로로 통해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호로는 기계인간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이 겨우 1년 이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투에서 물러나서 여생을 마무리해야한다. 물론 기계로 된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그녀에겐 인간이 가진 이성과 감성을 지녔다. 그리고 마호로의 이성은 그 어떤 인간보다 옳았으며, 그런 행동으로 자신의 기관인 베스퍼에도 인정받는다.

하지만 모든 세상일은 이성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기분과 양심을 외면해가면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자신의 고뇌와 그런 고뇌 아래서 산화된 미사토 사령관의 기억은 마호로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모두라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한 상관을 죽여야 했던 마호로,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그 여생을 자신이 작전 중에 죽일 수밖에 없던 미사토 사령관 아들인 스구루에게 찾아가 스구루의 메이드로서 살아가려 한다. 죽기 전에 자신의 죄책감을 속죄하지만 그 속죄하면 할수록 자신이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이 되어감을 느낀다. 분명히 그녀는 인간의 유전자가 아닌 기계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은 정말 인간을 볼 때 그 사람의 인간성이나 윤리적인 부분보다는 선입관이나 혹은 자신의 입장만 앞세워 볼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은 자기 개인에게 충실하고 그 충실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 되돌아 보면 그런 개인이란 존재는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란 존재도 있다. 그 타인이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인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소한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사이버걸 마호로이지만, 막상 다시 생각하면 조금 면이 보인다. 한번 이 사이버걸 마호로와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마호로매틱 1, 2기를 보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다고 마호로매틱은 너무 어렵거나 난해한 작품이 아니다. 작품 전개상으로 재미도 있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재미와 슬픔 속에 담긴 담론은 조금 깊이 파고보는 것도 하나의 작품 감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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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다나카 유코 외 목소리 / 대원DVD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모노노케히메는 기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보여주던 여성캐릭터와 상당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미야자키 감독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 키워드는 하늘, 자연, 그리고 여성이다. 단지 미야자키 감독이 만들어낸 여성은 대부분 상당히 이성적이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강한 사람이란 게 특징이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대부분 강인하고 아름다움을 내세운다. 이런 점은 미야자키 감독이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는 한 가지의 비판대상이 되기도 한 요소로도 보였다.




그런 점에서 모노노케히메 즉 원령공주에서 등장하는 산의 모습은 상당히 도발적이고 기존 미야자키 감독 작품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에 큰 변화를 준 건 사실이다. 그래도 미야자키 감독은 이성적인 여성을 배제하고 감성적인 존재인 산을 대신하여 반대되는 캐릭터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산과 같이 여성이나 그 마을사회에서 하나의 지도자인 에보시를 보면 여전히 미야자키가 이성적이고 육체적으로나 혹은 정신적으로 강한 여성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2명의 여성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자연의 세계인 산과 인간문명사회의 에보시로 통해 자연과 문명사회의 비극적인 소통불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존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나우시카 공주로 통해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의 구심점으로 작용하여 오염된 그 세계에서 인간의 파괴행위를 저지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러나 모노노케히메는 반대였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은 소통이 불가한 채 그대로 서로 배제해 버렸다.




작품 서사 내의 발단이 되던 아시타카는 그런 자연과 문명사회의 비소통에서 발생된 왜곡현상으로 팔에 큰 병을 얻었다. 그 병은 신적인 영력을 가진 멧돼지가 재앙신으로 변해 아이타카의 손에 죽으면서 그에게 저주를 걸은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재앙신은 재앙신이 아니었다. 그 재앙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의 손으로 탄생된 문명의 철탄총알이었다.




결론은 아무런 죄도 없는 자연부락인 아시타카 마을이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사회에서 희생된 자연에 의해 재앙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반드시 이 작품세계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일어난다. 가령 우리 한국의 경우 봄철 황사현상으로 고생하는데, 예전의 황사는 단지 황하강의 모래와 분진으로 이루어진 입자였다면 최근에는 중국의 공업화로 인해 황사모래 안에 다양한 환경오염물질이 함유된 점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 한국에서 일어나서 생긴 폐해라기 보단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우리가 피해보는 것이다. 자연이란 것은 아주 작은 소규모로 오염되어 어느 정도 정화되어 그 환경오염에 대한 위해성을 비켜갈 수 있으나, 어느 일정 수준이 누적이 되기 시작하면 소규모이던 환경오염이 대규모적인 현상으로 바뀌어 그 지역만이 아닌 다른 지역까지 죽음의 손길을 뻗친다.




그런 점에서 모노노케히메는 에보시의 철광산업으로 통한 자연파괴가 당연히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여자, 병자, 어디로부터 쫓겨 온 사람 등등,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에보시의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고 살았다. 작품 내에서 야마토 왕조에게 버려진 자들이 유일하게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곳이 에보시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무력이라는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총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고, 철을 생산하여 경제력을 키웠다. 그런 에보시와 마을주민의 협력으로 그 마을은 무사히 지켜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한 희생과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자연에 대한 농락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신이었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종교사상 역시 애니미즘(Animism)으로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고 무형의 존재라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봤다. 자연의 위대함은 동양국가에서는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에보시는 그런 전통적인 사상과 달리 자연을 파괴하고 짐승들을 멀리 보내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짐승들은 총탄으로 숨을 끊게 하였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의 희생을 합리화한 것이다. 그것은 환경윤리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문명의 행동이었다. 그런 내용을 이 모노노케히메에서 다룬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작품 마지막까지 자연과 문명사회는 조화로이 살 수 없었다. 오히려 인간이 지나친 자연정복욕구로 인해 문명 스스로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 의해 먹힐뻔 했던 것이다.




지나친 인간의 욕구 거기에 대한 문명사회와 기술발전, 그것은 인간에게 풍요와 안락함을 제공하나 한편으로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게 하는 자살행위와 같다. 자연은 공생이 가능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은 그저 대답만 해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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