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Paolo Bonacelli - Salo, or the 120 Days of Sodom (살로 소돔의 120일) (1975)(한글무자막)(Blu-ray)
Various Artists / Criterion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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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일>에서와 달리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기본적으로 가학성을 띄고 있으나, 그 주제가 다른 것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1784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약 37일 동안 혼자 깨알 같은 글씨로 소설을 만든 것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저술한 도서를 영화로 각본하여 만든 것이다.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제작한 <살로소돔의 120일>은 분명 <소돔의 120일>에서 가지고 온 모티브나 등장인물 요소에서 유사한 점은 있으나 다른 점도 있다.

 

마장의 역할, 즉 4인의 무자비한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뽑은 성기가 아주 큰 남성이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선 도락자를 위해 선발이라면,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파시스트의 부하라는 점이다. 총을 들고 있어서 억울하게 잡힌 사람들에게 위협적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4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기도 한다. 아니 그들도 즐기기도 한다. 소돔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성적 윤리를 배신한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한 다소의 거부감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 역시 인간적 권리를 부여 받을 자격이 그들을 탓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관계없이 DNA, 즉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본인들도 힘겨워 하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악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등장한 남색을 즐기는 4인방은 자기만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생명력을 인정하기보단 그 생명력을 부정하는 신적 모독에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가톨릭 내지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기에 딱히 무엇이라 말하기가 어려우나 적어도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국 정서적으로도 <소돔의 120일>과 <살로소돔의 120일>은 금기를 위반한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20대 아름다운 여성, 그들은 남자 4인방들의 딸들로 그 딸들은 그 상대 남자에 대한 아내로 삼아진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근친상간에 남색까지 인정되므로 어느 사회에서 금기로 다루던 인간의 윤리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민족과 국가에서는 딸이 아버지와 혹은 아들이 어머니와 성적관계를 갖는 것이 허용된다고 하나 보편적으로 근친상간은 크나큰 죄악이 성립된다. 동성연애라도 고대그리스도 <소돔의 120일>처럼 하지 않는다.

 

에로스란 단어가 사실은 남녀 간의 사랑보단 오히려 늙은 현학적인 남자와 그 남자를 흠모하는 젊은 소년이 같이 자리를 하는 것이다. 고대그리스 사회에서는 동성연애가 하나의 문화적인 권력의 유지인 셈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로스의 위치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고 또한, 에로스는 1968년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에선 하나의 생명력으로 폭발한다.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봐도 그렇지만, 결국 에로스는 생명을 이어가려고 하는 생존욕구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에로스적인 욕구는 인간의 번식에 대한 요건도 중요하다. 생명의 연계성에서 에로스야 말로 우리 인류는 보존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Libido 즉 무의식적인 성적 에너지가 원천적이라고 하여도 에로스란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그 에로스라는 것을 모조리 부정한다. 그저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파괴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다. <소돔의 120일>나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귀족 역할을 한 포악한 자는 역시 어머니를 저주한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나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큰 죄고, 자신의 생명력은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관계로 통한 성적쾌락으로 만족했기에 보상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따라서 이미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창부보다 못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런 4인의 포악한 행위를 4명의 늙은 창부의 이야기로 통해 몰고 간다.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1부가 희생자들의 모아 저택에 가는 것과 2부는 변태적 성욕, 3부는 분비물과 고문에 대한 이야기, 4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성적쾌락을 위해 1부에서 4부까지를 다룬다면, <살로소돔의 120일>은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대한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남색을 하고 어린 소녀의 순결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분뇨를 먹이거나 자기 얼굴에 소변을 뿌리라는 이상한 도락에서 벗어나 채찍질과 가학적인 폭력, 그리고 4부에서 보인 육체적인 가해는 영화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은 당시 루이16세 즉 앙시앵 레짐이란 구체제 속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감옥의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인물은 다미엥이다. 다미엥은 주군인 루이15세를 살해하려다 체포된 하급관리로 그의 사형은 물리적인 신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왕의 신성성을 내세워야 한다.

 

다미엥의 죽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 상처를 내고 수은 같은 것을 붓고, 최후에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에도 매우 잔혹한 처벌방법이 있었다. 사드의 원작을 봐도 4부에 나온 잔혹한 고문과 처형방법은 프랑스에서 기존에 있던 방법이다. 4부를 보면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 성욕을 해결하는 미치광이 도락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그 4인방은 희생자를 대상으로 눈을 도려내거나 손톱과 발톱을 뽑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며, 최후에 팔과 다리를 자른다.

 

그들이 베어버린 사람의 몸이란 그저 자신들이 자연적으로 물러 받은 생명에 대한 고귀함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연적이란 죽음을 선사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로스가 아닌 타나토스, <소돔의 120일>의 미학적 요소는 바로 타나토스의 극치이다. 파괴와 죽음의 욕망을 희생자에게 전가하여 성적 쾌락을 느낀다. 물론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도 고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4인방은 성적욕망을 느낀다. 법원장은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만든 여자가 형을 집행 받는 순간 사정을 한다고 한다.

 

결국 생명을 부수는 것으로 성적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파괴적이고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쾌락을 추구함이 <소돔의 120일>이다. 그렇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은 다르다. 그런 요소를 쾌락으로 즐기는 것도 있으나 오히려 파괴와 변태적인 가학으로 통해 파시스트의 미학을 추구한 점이다. 폭력의 미학이란 결국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파시스트이면서 본인이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폭력의 미학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정의의 미학으로 여길 것이다.

 

오히려 폭력으로 실행되는 의지가 오히려 정의라는 명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폭력의 이면에는 진실의 은폐와 권력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렇다.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폭력성에서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누가 직접 고문과 살해했는지 모르나, 아마 4인방이 직접 할 가능성이 높으나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마장을 비롯한 파시스트 군대가 직접 그 행위를 돕는다. 그 의미는 그들의 폭력성에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폭력의 무질서야 말로 오히려 질서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정치적 의미를 목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도락자 내지 미치광이 변태들이 성직자, 귀족, 상인들과 같이 당대 상류계층이란 것이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에서 당시 사드가 워낙 방탕한 생활을 공개적으로 즐긴 것을 생각해보면 사드는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뒤에서 변태적 성욕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을 비꼬는 것이다. 영화는 상류계층에 대한 비꼬는 것보단 오히려 파시스트들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에 왜 살육의 현장을 망원경으로 보면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폭력을 일으키는 자들이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면 조장하는 것이다. 폭력이어야 말로 오히려 정치적으로 정의를 두는 것이 파시즘에서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수단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공포이다. 상대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거나 혹은 폭력을 가해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만큼 큰 쾌락이 없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통한 공포로서 인간의 통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만들며, 그 공포의 정치로 지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사디즘이란 성적 쾌락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타나토스의 미학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우월주의를 폭력이란 수단으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왠지 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 퍼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폭력이 정의라고 믿는 하나의 광기에서 그것이 곧 사회적 미학으로 이어지는 것이 파시스트적 요소다. 가십거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한 각종 폭력적 수단(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이 용인되기에 저런 영화가 지금 봐도 다소 공감되었다.

 

영화가 1975년에 제작된 점에서 최신영화와 비교하여 화질이나 카메라 앵글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도 영화배우의 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소돔의 120일>의 1부에서 이야기꾼으로 나오는 뒤클로 역을 바까리 부인이 맡았는데, 그녀를 비롯한 이야기꾼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춤도 춘다. 하나의 음률로 통해 마치 뮤지컬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4부에서 분위기가 조금 어두울 때 만담형식을 가진 이야기꾼의 재능은 그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맛인 것이다. 화면의 구도가 세련되지 못함에도 연기를 하는 배우의 연기력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추악하고 잔혹하고 변태적이며 불결한 요소를 어김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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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위대한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인류를 뒤흔드는 책을 창간했다. 하나는 <사회계약론>이고, 하나는 <에밀>이다. <사회계약론>이란 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을 중심으로 대한 정치체에 대한 서적이다. 민주주의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통용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사회계약론>을 고려하지 않음은 민주주의국가에서 담론조차 꺼내지 못할 수준이라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 정도로 삼권분할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로운 존재였으나, 사회에 종속되면서 그 자유가 박탈되기에 자연주의자인 루소의 관점에서 인간의 인위적인 문명이야 말로 인류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다. 

 

그런 논리로 따지면 틀린 말이 아니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이익과 행복을 준 만큼 그 이상의 댓가를 치르게 했다. 전쟁이나 질병 그리고 환경오염은 늘 우리에게 생존위기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에밀>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과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철학서적이고 교육학 도서이기도 하나, 그렇게 딱딱하지 않고, 하나의 소설처럼 꾸며진 책이다.

 

에밀이란 소년은 가상의 고아로 등장하며 글쓰이는 에밀의 가상의 후견인으로서 에밀을 어릴 때부터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 같이 동고동락한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누굴까? 에밀에겐 저자의 역할은 아저씨 정도나, 그 책에서는 제일 좋은 선생님은 아버지고, 그래 따지자면 부모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바로 가족과의 단절감이고, 인간이 인간으로 갖출 교양이 가정보단 학교라는 집단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집단주의적 성향이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만들게 된다.

 

문명의 사회라는 집단에서 지식을 가르쳐주는 학교는 지식만 가르쳐주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에밀>이란 서적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적는다. 자연에서 나무를 베거나 물고기를 낚거나 혹은 각종 물건을 만든다. 자신의 노동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매기는 점에서, 루소의 살던 시절인 유럽에선 사실 어린이란 어린이보단 작은어른에 가깝다.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노동의 시작은 결국 정식교육절차를 밟은 중고등학교 이상이란 점이다. 최근엔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들에게 노동의 시작은 20대 후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근대이전이나 혹은 근대라도 아이들은 일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생계의무를 부여했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을 했다. 어른의 1명의 노동량을 채우지 못해도, 노동의 1인이란 개념은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억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찾을 수 있게 한다. 사실 프랑스 절대왕정 사회에서 루이 16세는 루소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었으나, 루이의 아버지는 루이에게 열쇠와 자물쇠를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루이 16세는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을 왕이란 계급에서도 루이의 자물쇠란 취미는 루소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루소의 교육철학의 소중한 부분은 모유의 수유다. 아이의 영양분을 어머니의 유방에서 나오는 젖이 아니라 유모나 혹은 우유에 의지하나, 사실 최근 의학계에서도 모유로 성장한 아이들이 튼튼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과학적 근거보다 하나의 교육철학관념인 <에밀>이나 우리의 교육철학에서 루소의 사상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가두는 게 아니라 스스로 땅을 달리고, 물을 헤치며, 하늘을 보며 자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최근에 나온 <논논비요리>와 <은수저>는 루소의 교육철학과 부합된다. 고등학생이 노동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은 아니나 집안일이나 혹은 학교교육과정에서 이론적인 것보단 실제 농축산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보여준다. 학생 스스로가 농축산품을 만들어 팔기도 먹기도 하며, 그것을 토대로 가사일을 돕거나 이어간다.

 

<논논비요리>에서는 4명인 소녀들이 작은 학교에서 자연과 친구하며 보낸다. 도쿄에서 전학온 소녀가 시골에 와서 직접 자연과 체험하고, 산에 들나물을 캐어 그것을 먹는 것은 삶의 경험이란 교육이다. 지식과 소비에 의해서 우리는 먹는 음식물이 아니라 직접 생산과 생활에서 나오는 음식물이다. 삶의 자리에서 얻어지는 교육에서 인간의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타인의 교류를 활발하게 해준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모두와의 세상에서 말이다. 학교에서는 지식만 알려주고 좋은 학교에 가기를 원하지 어느 인간이 되고 어떻게 살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비겁하나 냉정하고 흉폭한 인간으로 키워지도록 만드는 하나의 시스템만 제공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직장은 하나의 감시체제를 만든 통제기구라고 한다. 우리는 통제된 세상에 살며, 타인의 눈에 의지한다. 물론 타인과의 공존과 공감이 중요하나, 그것이 아닌 통제라는 공동적인 감시는 우리의 자율성을 떨어지게 한다. 타성에 젖은 시기에 <논논비요리>나 <은수저>와 같은 작품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익보단 모두의 즐거움을 바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아찾기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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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1-1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수저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데 예정대로라면 올해엔 개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런데 워낙 농사짓고 가축 사육하는 모습이 자세하여 이걸 어떻게 영상으로 담을지 염려되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1-15 21:50   좋아요 0 | URL
저도 참 기대되는 소식이군요. 가축을 키우는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하기 어렵겠죠. 말이 연기지만, 연기라도 기본이 있어야 하는법, 궁금합니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원본과 사본의 차이가 없는 오히려 사본이 원본보다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그런 점에서 sub-culture에서 코스튬 플레이 문화는 원본이 사본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코스프레 다이어리>의 저자이면서도 아주 유명한 코스튬 플레이어인 키르아라는 사람을 보자. 그 사람의 본명은 박유송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순간 키르아라는 존재로서 연기하는 것이지 결코 박유송으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 연기 대상이 헌터헌터X에 나오는 캐릭터(키르아라는 이름이 여기서 연유)가 아니라 다른 캐릭터로 된다.

 

 

그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와 아스카가 될 수 있고, 마르크스의 란카나 쉐릴이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보면 실존적인 이름과 지어낸 가명이 실제적으로 코스튬 하는 시기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그 캐릭터라는 존재만이 여기에 존재한다. 그래서 코스튬 플레이야 말로 최근 한국에서 담론하려는 pata-phycisc와 가장 가까울 것이다. pata란 것은 meta 뒤에 나오는 것이다. 즉 mata-physics란 형이상학이란 것이다. 물리적인 피직스 너머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 화학식에서 H20 구조를 가진 물을 실제로 수소와 산소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보통 공유결합과 다른 구조로서 물은 연결되어 있다. 물은 그저 물리적으로 보면 액체로 되어 있어 있고, 인간의 신체비율에서 약 70%에 가까운 물질이다. 그러나 물 안에 산소와 수소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안 것은 오래 되지 않은 사실이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더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산소와 수소는 전자와 중성자, 양성자와 같은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미립자 역시 또 다른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meta-physics로 본다면 과학은 고대에서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관계이나, 현대로 오면서 과학기술은 오히려 그것을 내파 즉 경계를 없앴다. 생물학에서 인간의 피부에 조직이 있고 세포가 있고, 세포 안에 핵이 있으며, 핵조차도 산소, 질소, 인, 탄소와 같은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meta-physics는 과학기술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고 meta-physics에서 철학 역시 시대적으로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역시 철학 서적이다.

 

 

코스튬 플레이와 meta-physics의 관계의 해석에서 코스튬 하는 대상이 현실 속의 존재가 아니라 가상 속의 존재이다. 그러나 가상이기에 그 너머에 있는 존재가 현실에서 현상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오로지 구현하는 것은 이미지의 연출이었다. 가령 고대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는 그림이나 혹은 지금 moe라고 하는 자신(들)만이 원하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상상의 대상을 그려 넣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욕망을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을 타인이 욕망하는 것이란 점이다.

 

 

코스튬 플레이가 왜 pata-physics 적인가? 그것은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현실에 존재할리 없는 존재가 존재해야 한다. 시뮬라크르 세계의 존재가 다시 현실에서도 시뮬라크르로서 재현되고, 심지어 그것을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으면 다시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은 본인인가? 아니면 본인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보면 실존적으로 본인이나 본인이 아니다. 분명 박유송이란 사람이 쉐릴을 연기하면 그것은 쉐릴이 되기 위함이지 박유송이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pata-physics의 코스튬 플레이 세계라도 결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함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sub-culture에서 코스튬만큼 놀이에 가까운 문화가 없다. 예술이란 것은 하나의 상징적 요소를 부여받기에 하나의 숭고함을 지니게 된다. 숭고함에서 인간은 자신을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집단의 가치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거대한 조류에 저항하기 위해 아방가르드란 반-예술이 태어났으나, 그것 역시 대중들에 의해 그저 대중문화로 소비되던지 혹은 숭고함을 부여받아야 했다. 

 

코스튬 문화에서 인간은 항상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고,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소비문화가 맞물리게 된다. 지금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코스튬 자체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디메이드처럼 되었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을 보면 웃기기 그지 없다.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을 했는데, 그것을 예술품이라 올려놓다가 큰 소동이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방가르드 예술과 네오-다다에서 중요한 요건이 된다. 공장에서 찍은 생산품이 오히려 인간에게 가장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ART라는 예술은 상징적 요소로 보기보단 고대 그리스에선 하나의 테크닉인 기술이다. 과학적 실용성에서 오히려 예술이란 장인적 면모를 보았다.

 

 

생각해보면 고대시대의 예술품은 왠지 모르게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주로 실질적으로 왕이나 관료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또는 전장에서 휘두르는 칼과 방패 등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가끔 고대 내지 중세의 갑주나 칼, 방패가 발견되면 상당한 가치를 받는다. 당시로서는 그것은 장인이 만들어낸 생존의 도구다. 기사가 전장에서 죽지 않으려면 왜만한 무기에 견딜 수 있는 방패와 갑주가 필요하고, 적을 빨리 죽이기 위해서는 좋은 칼이 필요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장인이란 존재는 없고 공장이 등장한다. 1차 산업인 농업사회는 인간이 직접 수공예로서 생산했다면 2차 산업은 공장에서 돌아가고, 3차 산업인 정보화 시대는 2차 산업의 기반으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공장에서 나온 변기가 가장 흔해서 너무 잘 사용해도 고대 그리스처럼 인정받지 못할 물건이 되었다. 아마 고대 그리스에선 변기 하나도 장인이 손수 제작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공장에 나온 물건을 기술자가 그저 시멘트와 모르타르로 연결할 뿐이다.

 

 

똑같은 모습들이 나오니 그 차이점은 없다. 단지 차이점은 변기가격이 얼마나 비싼가? 혹은 얼마나 디자인에 신경 쓰고 있는가이다. 내가 이런 샘이란 주제로 코스튬 문화와 접목하는 이유는 지금의 코스튬 문화는 레디메이드의 천지이다. 인간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존재는 아니나, 현대사회의 인간은 직접적으로 조우하기보단 다른 방식으로 조우한다. 그것은 생산과 소비양식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인간의 거래관계에서 물물교환이 아니라 자본을 통한 매개교환이다.

 

 

즉 화폐가 매개로 되어 인간의 가치를 나누는 것이다.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악질적 부분이면서 한편으로 발전적으로 되는 부분이 바로 금전적인 투자이다. 코스튬의 질적 가치가 가끔 자본력이란 사실이 불편한 문제를 일으킨다. 자본력이란 사실만으로 문화가 물화되어 버린다. 물화되어 버린 인간관계에서 코스튬의 가치가 자본력이 되는 점은 코스튬 플레이어의 의상과 사진가의 사진기가 되어버린다. 물론 도구의 능력은 기계적 성능에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나 물화되어버린 관계는 분명한 것이다.

 

 

다시 레디메이드로 가보자. 코믹행사에 가면 너무 똑같은 존재가 많다. 마치 공장에서 찍은 옷을 입은 사람이 레디 메이드처럼 보인다. 단지 차이는 마르셀 뒤샹이 어느 변기에 서명을 함으로서 <샘>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서명을 부여받은 사람, 즉 자신의 아이디나 존재적 각인을 부여받은 인정받게 된다. 똑같은 모습과 의상이니 결국 차이점은 외모이다. 따라서 바비 인형에 가까운 존재일수록 가치를 부여받는다. 바비 인형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을 타자가 명령하는 것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멈춰있는 것처럼 큰 감화가 없다. 코스튬에서 플레이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상이지, 그 대상의 겉만 묘사하고 일정한 주문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라 미적 감각을 판단하는 경우 외재적 미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외재적 미와 더불어 내재적 미가 공유하지 않으면 그것은 미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다.

 

 

너무 같은 존재들이 넘치면 인간의 시야에선 결국 외재적 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노출되고, 결국 외재적 미를 가진 자들이 레디메이드 세계에서 우위를 점지한다. 문제는 점지하더라도 같은 느낌만 나온다는 점이다. 만약 다른 역할의 부여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인상만 주지 않는다. 남에게 보기 좋은 떡만 찾는 것은 한계가 오는 점이다.

 

 

미의 미학이 아닌 추의 미학을 조금씩 건드려 보는 점에서 다양한 개성이 나온다. 혹은 기존의 모던의 미, 즉 일정한 요건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포스트모던의 미인 자신의 개인적 연출로 통해 새로운 연출이 좋은 연출인 것이다. 레디 메이드적인 연출은 개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죽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코스튬은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존재를 현실이고자 하는 pata-physics적인 놀이다. 즉 상상력이 우선이 되는 놀이라는 점이다. 상상력이야 말로 미래의 윤리학이란 것처럼 상상력을 죽이는 코스튬 문화는 인간의 개성을 죽이는 것에 동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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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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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이 책을 본 후에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나는 그다지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고, 게다가 소설 중에서 추리물은 더 읽지 않는다. 추리물이란 탐정물 내지 성룡이란 유명한 배우가 연기한 <폴리스스토리>라는 영화도 있다시피 결국 범인이 잡히든지 안 잡히든지 혹은 경찰이나 탐정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추리물이나 심리적인 요소가 강한 경찰이야기란 패턴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와 같은 것은 오히려 범인이 가려진 것보다 범인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범인이란 존재가 원래 있음으로 하여 범인 자체에 타켓을 맞추는 설정에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벽을 놓치게 된다. 이전에 우로부치 겐이란 아주 실력 좋은 소설가 겸 각본가의 명작인 <psycho-pass>를 보는 순간 말이다. 작품 내의 범인은 정신분석적인 스캐너에 의해 돌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위험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살인을 하고, 그 살인은 충동적이기보단 하나의 이성적인 자유에 의해서 실행된다. 자유라는 이성의 절대적인 의지는 결국 자유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진행되어 그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인 반응 내지 혹은 순간적인 행동은 결국 하나의 미학을 관찰할 수 없다. 미학적인 요소에서 이성이란 광기로 통해 하나의 승화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죄 없는 여자의 목의 대동맥을 베고, 그것도 모자라 살인을 옆에서 시키려는 그의 범죄가 말이다. 스노우맨도 마찬가지다. 스노우맨의 범죄는 상당히 미묘하다. 한국과 같이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보다는 포괄적 자유주의에서 더 나아가 한국식 자유주의가 존재한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아주 적합하더라도 솔직히 개인의 자유권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한국식 자유주의는 옆에서 오덕질을 하거나 코스프레를 하면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을 할 수 있는 신기한 자유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대다수 남들이 어느 특정인을 신나게 깔보고 놀릴 수 있는 자유를 말이다. 따라서 <스노우맨>에서의 한국식 자유주의는 참으로 어렵다. 근본적 이유를 생각하면 소설을 종점이 되어 다시 의미를 찾아가면 안다.

 

예전에 이슬람 문화권에서 어느 여자가 다른 남자와 풍문이 돌아 그 집안에서는 명예살인을 거행했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보면 남편 잃은 여편네에게 자살을 권고하여 열녀탄생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스노우맨>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당신의 아이에게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가 진짜 친부일 가능성은 15~20%일 것이다! 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친자소송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피가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저기 15~20%를 지나 0.15~0.2%도 힘들 것이다. 나하고 결혼하기 전에 어느 인간에게 그 다리를 벌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스운 사실은 내가 다른 여자의 다리에 들어가도 오케인 게 수컷의 본능이고, 남이 오는 것은 싫은 것 역시 수컷의 욕심이다. 소설에서 물범인가? 바다에 사는 포유류 육식동물이 자신의 새끼를 출산한 암컷을 죽이는 이유가 바로 암컷이 또 다른 수컷이란 교미를 한다는 점이다. 내 옆에 생물학 석사를 졸업한 동료를 입을 빌리자면, 인간도 역시 동물적 기관을 지니기에 동물이나 짐승이나 남자들은 같다고 한다. 단지 그 같다는 점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불안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에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나, 이성의 자유에서 이성 자체가 완벽한 이성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 중에 속한 것이다. 인간의 질투가 정당한 진리와 정의로서 철퇴를 내린다. 정의의 칼을 외치는 영화나 만화에서는 가능하나, 현실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최악의 쓰레기들이다. 그런 점에서 <스노우맨>은 최악의 쓰레기가 가장 도덕군자인척 하여 더러운 짓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버럴 잡지 사장놈이나 혹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른 남자하고 성행위로 자신이 태어난 이유로 살인마가 되는 합리적인 정신병자도 말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납득을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분리된 존재이나, 아들과 어머니는 본래 함께인 존재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였던 존재에 대한 배신과 분노에 모자라 자신에게 쏟아진 신체적 낙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책에서 정말 북유럽은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참으로 남자나 여자나 가볍게 성행위를 하고, 파티에서 그냥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와서 대화를 나누고, 여자가 남자 허벅지를 만진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이 소설은 한국의 정서에서 동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이를 죽일 생각도 없이 오히려 잘 키운다. 한국이라면 아마 낙태하거나 고아원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시점으로 따라가면 아마 Sex는 자유롭게 그러나 태어나는 애들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요나스의 아버지에서 요나스가 남의 씨앗으로 태어났으나, 그래도 요나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으로 키울 것을 맹세한다. 한국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보면 가치관이란 기준에서 한국은 가족을 혈연이라면 유럽은 친분인 것이 강할 것 같다.

 

이혼과 재혼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여자에게 사회적인 불리함도 없고, 남자도 아이가 있는 여자와 만나 그 여자의 아이들까지 같이 놀거나 친하게 지낸다. 작가 본래가 개방적인 인물인가?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음악적 지식이 필요하다. 슬립 낫이란 이름이 나올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LA메탈밴드에서 Gun's & Roses 멤버인 기타리스트 건이 속한 밴드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거기에 슬레이어 같은 스래쉬메탈, 레드제플린과 같은 브리티쉬하드락을 듣지 못한다면 그 느낌을 모른다.

 

섹시한 몸매를 지닌 카트리네 경관이 짝 달라붙는 가죽의상에서 스모키한 화장을 한 것을 보면 작가가 좋아하는 여자스타일이 그 경관이 분명하다. 물론 나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개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나름 지성을 갖춘 사람이기에 지성과 개성을 다 재미있게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가 뮤지션이고, 게다가 글을 보면 미국의 부시나 레이건을 싫어하는 느낌이 강하다. 1980년이나 혹은 2004년 부시나 레이건 대통령 당선을 왜 그렇게 왜치는가?

 

어째든 <스노우맨>은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추리적 요소에서 과학적 근거를 많이 인용한다. 어느 탐정물도 그러하나 사람의 혈액과 정액 그리고 타액들은 DNA라는 생물학에서 펼칠 수 있는 과학수사를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너무 의학적인 요소로 갔기 때문에 중간에 대략 범인이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란 스스로가 나라고 떠벌리지 않은 이상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 수사극이나 탐정극은 처음부터 끝이다. 아니라면 범죄의 추적으로 통해 국가나 사회의 병폐를 찾아 근본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스노우맨>은 그런 내용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자유로운 성행위를 인정하되, 그곳에서 자라나오는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여자의 부도덕만 잡는 게 아니라 그 부도덕은 혼자만 나온 게 아니라 합작이다. 어떤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가 저술한데로 모든 아이들의 부모는 모든 성인남녀다란 명제가 좋을지도 모른다. 대신 철인군주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공부와 운동, 때에 따라서는 동성애(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자면 아이가 태어나나 남자와 자면 지혜가 탄생한다고 하니)도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인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그 아이에게 더러운 창녀 같은 어머니는 필요 없다고 하나, 어머니 없는 아이는 매우 비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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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대중문화에 대한 주변의 압력을 불편하게 여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의 취향과 취미 그리고 판단력과 사유의 자유를 가지고 싶으나, 한국에서는 가지기가 어렵다. 가령 요새 무슨 영화를 하는데 본 적이 있느냐? 아니면 요새 어느 드라마가 잘 나가고, 배우가 나오고, 가수가 나오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의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진다. 조금 특이하거나 또는 괴짜, mania 세계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

 

한국에서 이른바 오타쿠라 불리는 자들에서도 속하는 나이지만, 그런다고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다. 나는 goods와 같은 상품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그 goods의 상품으로 나오기 전에 방영된 작품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담론을 펼치는 것을 좋아하기에 다소 현학적 요소가 많다. 사람들은 현학적인 요소에 대해 생각하기 싫으나, 그런다고 현학적인 요소가 없다고 하면 상당히 화를 낸다. 무식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도 무식함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 요새 사람들의 공통된 관점이다.

 

왜냐고? 1년에 책을 보는 것에서 과연 몇 권을 읽고, 그 책이라도 무슨 책을 보는가에서 대답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차라리 요새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연애소설까지도 보는 것도 제법 독서가이시군요.”라고 말이 튀어 나온다. 1권을 한 달에 보는 것도 어려운 사람들, 게다가 철학이나 사회학 같은 도서는 아예 취급조차 않는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깊은 지식보단 얇고 흔하고 흔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대중문화에서는 아주 흔하고 흔해 cliche가 넘치고 넘친다.

 

인간들은 패턴주의를 참 좋아한다. 새로운 것이라고 해도 결국 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돌 여자가수들이 얼굴과 이름만 바뀌지 타켓이 되는 몸매와 의식은 돌고 돈다. 모두 남자가 당장이라도 성적 욕망만을 자극하기 좋은 것에 말이다. 그것이 코드라면 코드이고 흐름이라면 흐름이다. 문제는 가수 박지윤 씨가 성인식의 음란한 가사와 댄스를 원하지 않았으나 기획사의 압력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대중들은 열광하고, 그 당시 많은 여자들이 노래와 춤을 따라했다. 결국 대중문화란 기본적 명제와 상관없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다. 문제는 거기서 이질감이란 존재가 있어도 어느 것은 받아들인 반면 그러지 못한 게 많다.

 

모두가 같아야 하고, 같은 모습이 아니면 모두가 무서워하거나 짜증내하거나 회피하기 시작한다. 이런 대중문화의 파시즘의 요소들은 나라는 사람의 얼굴을 상대방의 얼굴을 그대로 이식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의 얼굴을 보고 맞는지 틀렸는지 구분하지 못할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상은 정의라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정의라는 기본적 상황이 있다면 정의의 부재란 단어도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불가침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신성함은 그 누구도 범하지 못할 수준이다.

 

내가 왜 이런 대중문화와 파시즘,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Cliche를 언급했냐고? 최근에 노회찬 의원에 대한 일에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법정 심판에서 패소당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는데, 그 승소자가 삼성이란 대기업이다. 우리나라의 신화는 바로 삼성을 보면 딱 알 수 있다. 원래 삼성을 사카린 밀수를 하여 성공했고, 지금은 불굴의 대기업이다. 참고적으로 내 폰은 갤럭시라는 삼성에서 만든 핸드폰이고, 자가용은 2005년 수동 SM5 모델이다. 삼성자동차를 몰고 삼성폰을 사용한다.

 

내가 아예 삼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삼성에 대한 국민적 욕망과 신화적 은폐, 어리석은 현실의 외면에서 비웃고 싶다. 내 자가용이 SM 시리즈인데, 그 단어처럼 한국은 정말 SM의 관계가 삼성과 국민, 그리고 국민 내부의 SM이 존재한다. 왜 그런 것인가? 삼성은 자기 스스로 sadist가 된 게 아니라 국민들이 sadist가 만들어주었다. 곧 국민 자체들이 masochist로 되길 바란 것이다. 자 예를 들어볼까? 나는 누가 공부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든 대기업이든 연구소든 어딜 가도 자신의 노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기업과 국가적 시스템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상부조직이 있는 만큼 하부조직 역시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부경제가 돌아가기 위해 하부경제구조가 있어야 한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인류학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고의 모던걸은 지하경제라고 한다. 지하경제? 어디에 학술적 단어로 나온 단어인가? 그러나 다행히도 대중문화에 의해 철저한 하나가 된 파시스트적 민주주의에서는 가능한 발언이다.

 

말이란 어떻게든 갖다 붙이면 완성된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langue가 사회적 약속이 담긴 언어라도 푸코처럼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기에 권력에 의해 언어가 새롭게 생산되고 정립된다. 이 얼마나 언어적으로 생산력이 높은 나라인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황금을 캐기 위해 거위를 배를 갈라 황금 대신 살코기를 먹는 행위가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 masochist로 되기 바란다. 우리 집에 가족이 모르는 친구가 왔는데, 이 녀석이 공장이 많은 동네에 살았는데, 우리 엄마에게 그냥 공장서 일한다고 했다.

 

일은 다른 곳에서 일할 예정이고, 업종이 전혀 다르다. 공장이 많은 지역이라 어머니는 삼성에서 일하니? 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물론 아니라고 했으나, 속으로 어머니의 한심함에 짜증이 났다. 물론 부모님에 대해 공경하는 것은 맞으나 이런 속내를 가지는 한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참고적으로 그 녀석은 삼성보단 현대가 가깝다. 대략 짐작하겠는가? 어째든 삼성하면 모두가 가야할 곳이거나 가고싶은 곳이다. 내 고교 동창 녀석이 르노삼성에서 일하는데, 다른 고교동창 결혼식에서 만나 명함을 받아서 그것에 대해 이래저래 말하는 어머니의 한심한 작태가 바로 우리 국민들을 masochist로 만든다.

 

정말 웃긴 이야기는 골목상권이 죽어간다고 푸념하는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삼성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E-mart, 홈플러스에 대해 욕하는가? 당신네들 자식들이 일할 곳은 그런 계열사들이 있는 곳이다. 본사에 갈 수 있는 인원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나라 국민들 착각들은 우리 자식 모두 삼성에 갈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가면 %? 가도 정규는 %? 정상적으로 퇴직 %? 그들이 노력해서 간 것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나, 가면 매일 야근과 주말 잔업에 업무성과에 시달린다. 지역이나 협력 혹은 말단직은 몰라도 정규직은 당연히 그렇지 않은가?

 

물론 비정규직 역시 만만치 않다. 삼성에서 감추는 백혈병 이야기, 사람이 죽는데, 그것이 감춘다고 해결될 부분이 아니다. 내가 회사 다른 부서의 부서장과 말다툼한 적이 있는데, 잔업할 게 있어서 내가 그만하자고 했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삼성이 우리를 먹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먹이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의 제일 한심한 작태는 소비자 주권의식이 없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내용을 정리하여 내가 다시 말하자면 근로자가 곧 소비자고, 소비자가 곧 근로자인 것이다.

 

우리가 만든 재화나 상품 등을 일부 계층이 아니라 모두 다른 직종의 일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한다. 가령 자동차공장의 근로자는 밥을 만들어먹는가? 음식점에서 먹거나 가게에서 재료를 사서 요리한다. 식당 종업원이 차를 만들어 타는가? 아니다. 공장에서 만들어 놓은 레디메이드를 이용한다. 그런 삼성이 먹여주는가? 아니면 소비자가 먹여주는가? 삼성이 우리 국민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상품을 팔아 월급을 나누어준다. 그래서 삼성에 대한 우리 국민의 권리행세는 당연하나, 삼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나오면 촉각을 밝히고, 삼성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누가 삼성제품 사용하지 말란 것도 아니고, 삼성에 들어가지 마란 것도 아니고, 삼성 망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에게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 라고 한 그 부서장의 말에서 자기 자식 삼성에 보내고 싶어 하나, 과연 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고, 그런 생각은 남들은 하지 않는가? 라는 것에서 결국 제로섬 게임을 즐기는 masochist로 된 것이다. 확률 구분상으로 1% 정도 갈 수 있는가? 아니 그 이하일 것이다. 내 자식만 가면 되라는 생각에 삼성이 마치 절대적인 군주로 받드는 게 아닌가?

 

그러니 E-mart 같은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안전사고 문제나 기본적인 근로수칙마저 어기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 어김없이 감시와 처벌이 따르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삼성편이다. 삼성에 대한 문제점을 굳이 일일이 나열할 생각도 없으나, 노회찬 의원에 대한 일을 보면 토크빌이 말한데로 그 나라의 정치의 수준은 그 국민들의 수준에서 볼 수 있으니 결국 자기 스스로 삼성의 개가 되는 masochist를 선택한다. 그들이 masochist를 선택한 이유는 sadist가 되기 위해서다.

 

실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이 삼성과 업무하면서 삼성에서 업무하는 태도가 속된 말로 양하치다. 그런 게 있지 아니한가? 금요일 오후 4시에 메일을 보내, 이 프로젝트 월요일 11시에 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상대 업체의 직원들은 퇴근하란 것인지 마란 것인지? 6시 퇴근하여 주5일제를 생각하면 그 프로젝트가 간단하면 모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라면 편안한 주말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양하치 짓거리를 많이 본다는 말에 우리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삼성에 일하면 사람들을 이렇게 구분한다. 삼성맨과 NO 삼성맨, 그들은 원래 masochist에서 sadist로 전환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삼성에 대해 masochist에 매달린 이유는 sadist로 되기 위한 과정이다. samsungsadist는 같은 S가 아닌가? M에선 masochistmass라는 대중인 것이다. 대중문화를 왜 언급했냐고? 삼성은 대중매체에 큰 힘을 싣고 광고와 이미지 마케팅을 한다. 삼성이 원래 사카린 밀수로 했는데도, 그 진실이 은폐되어 최고의 대기업이 되었다. 결론은 미디어의 은폐와 프로파간다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거기서 얽매인 masochist같은 mass, 다행히도 sadist 같은 samsung man이라도 되면 다행이나 그들은 과연 몇 %나 될까 모른다.

 

결국 이들은 삼성에 대해 masochist이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겐 sadist로 되고자 한다. 아직 현실에 대해 파악하지 않고, 언젠가는 될 것이란 메시아주의에 물 들은 것이다. 나는 항상 삼성 제품 사용하고, 삼성이 제대로 외국에서 활동하기 바란다. 삼성의 기업이 국내에 영향을 미치니깐, 그러나 그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소비자 주체자인 국민이란 사실을 놓칠 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바보가 될 것이다. 노회찬 의원이 삼성에 패소한 것은 소비자주권 수준이 17897월 프랑스 대혁명 이전보다 못한 한국인의 수준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 중고등학교 나오면 사회시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프랑스혁명 정도 배울 것이나, 그것이 국내외 헌법의 기초라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다. 모르면 모를수록 그들이 많으면 사실 대신 이상한 논리가 사실로 된다. 그러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들도 타인의 머리 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신화적 욕망이다. 바보 같으나 그렇게 될 확률은 너무 낮다는 점이다. 그렇게 영원히 SM 관계를 맺으면 된다. 대신 나는 SM5를 타고 출퇴근한다. 내 의지로 운전하고 싶기에 수동기어로 한다. 적어도 운전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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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11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주장하는 거지만, 삼성은 국민을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죠.
삼성 나부랭이 하나 망한다고 국가가 망한다고 하면
그런 나라는 차라리 망하는 게 낫습니다. 국가가 기업 하나와 비스무리하다는 것은
국가로써 수치죠. 삼성 비판할 때마다 듣는 소리가
삼성 망해서 좋을 거 뭐 있냐 ? 고 묻는데
아니 비판하는 것이 왜 삼성 망하라는 저주처럼 들리는지 이해가안갑니다.
노조 인정하고, 몇 가지 개선해라, 라는 게 왜 망하라는 논조인지.....

만화애니비평 2014-01-11 10:31   좋아요 0 | URL
멍청한 것들의 생각은 자신들은 절대로 그렇게 도태되지 않을 것이란 희망적인 망상이죠. 결국 소모품이 되는 것은 자신이지 남이 된다는 것만 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