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원본과 사본의 차이가 없는 오히려 사본이 원본보다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그런 점에서 sub-culture에서 코스튬 플레이 문화는 원본이 사본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코스프레 다이어리>의 저자이면서도 아주 유명한 코스튬 플레이어인 키르아라는 사람을 보자. 그 사람의 본명은 박유송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순간 키르아라는 존재로서 연기하는 것이지 결코 박유송으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 연기 대상이 헌터헌터X에 나오는 캐릭터(키르아라는 이름이 여기서 연유)가 아니라 다른 캐릭터로 된다.
그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와 아스카가 될 수 있고, 마르크스의 란카나 쉐릴이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보면 실존적인 이름과 지어낸 가명이 실제적으로 코스튬 하는 시기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그 캐릭터라는 존재만이 여기에 존재한다. 그래서 코스튬 플레이야 말로 최근 한국에서 담론하려는 pata-phycisc와 가장 가까울 것이다. pata란 것은 meta 뒤에 나오는 것이다. 즉 mata-physics란 형이상학이란 것이다. 물리적인 피직스 너머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 화학식에서 H20 구조를 가진 물을 실제로 수소와 산소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보통 공유결합과 다른 구조로서 물은 연결되어 있다. 물은 그저 물리적으로 보면 액체로 되어 있어 있고, 인간의 신체비율에서 약 70%에 가까운 물질이다. 그러나 물 안에 산소와 수소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안 것은 오래 되지 않은 사실이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더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산소와 수소는 전자와 중성자, 양성자와 같은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미립자 역시 또 다른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meta-physics로 본다면 과학은 고대에서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관계이나, 현대로 오면서 과학기술은 오히려 그것을 내파 즉 경계를 없앴다. 생물학에서 인간의 피부에 조직이 있고 세포가 있고, 세포 안에 핵이 있으며, 핵조차도 산소, 질소, 인, 탄소와 같은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meta-physics는 과학기술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고 meta-physics에서 철학 역시 시대적으로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역시 철학 서적이다.
코스튬 플레이와 meta-physics의 관계의 해석에서 코스튬 하는 대상이 현실 속의 존재가 아니라 가상 속의 존재이다. 그러나 가상이기에 그 너머에 있는 존재가 현실에서 현상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오로지 구현하는 것은 이미지의 연출이었다. 가령 고대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는 그림이나 혹은 지금 moe라고 하는 자신(들)만이 원하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상상의 대상을 그려 넣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욕망을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을 타인이 욕망하는 것이란 점이다.
코스튬 플레이가 왜 pata-physics 적인가? 그것은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현실에 존재할리 없는 존재가 존재해야 한다. 시뮬라크르 세계의 존재가 다시 현실에서도 시뮬라크르로서 재현되고, 심지어 그것을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으면 다시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은 본인인가? 아니면 본인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보면 실존적으로 본인이나 본인이 아니다. 분명 박유송이란 사람이 쉐릴을 연기하면 그것은 쉐릴이 되기 위함이지 박유송이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pata-physics의 코스튬 플레이 세계라도 결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함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sub-culture에서 코스튬만큼 놀이에 가까운 문화가 없다. 예술이란 것은 하나의 상징적 요소를 부여받기에 하나의 숭고함을 지니게 된다. 숭고함에서 인간은 자신을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집단의 가치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거대한 조류에 저항하기 위해 아방가르드란 반-예술이 태어났으나, 그것 역시 대중들에 의해 그저 대중문화로 소비되던지 혹은 숭고함을 부여받아야 했다.
코스튬 문화에서 인간은 항상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고,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소비문화가 맞물리게 된다. 지금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코스튬 자체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디메이드처럼 되었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을 보면 웃기기 그지 없다.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을 했는데, 그것을 예술품이라 올려놓다가 큰 소동이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방가르드 예술과 네오-다다에서 중요한 요건이 된다. 공장에서 찍은 생산품이 오히려 인간에게 가장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ART라는 예술은 상징적 요소로 보기보단 고대 그리스에선 하나의 테크닉인 기술이다. 과학적 실용성에서 오히려 예술이란 장인적 면모를 보았다.
생각해보면 고대시대의 예술품은 왠지 모르게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주로 실질적으로 왕이나 관료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또는 전장에서 휘두르는 칼과 방패 등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가끔 고대 내지 중세의 갑주나 칼, 방패가 발견되면 상당한 가치를 받는다. 당시로서는 그것은 장인이 만들어낸 생존의 도구다. 기사가 전장에서 죽지 않으려면 왜만한 무기에 견딜 수 있는 방패와 갑주가 필요하고, 적을 빨리 죽이기 위해서는 좋은 칼이 필요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장인이란 존재는 없고 공장이 등장한다. 1차 산업인 농업사회는 인간이 직접 수공예로서 생산했다면 2차 산업은 공장에서 돌아가고, 3차 산업인 정보화 시대는 2차 산업의 기반으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공장에서 나온 변기가 가장 흔해서 너무 잘 사용해도 고대 그리스처럼 인정받지 못할 물건이 되었다. 아마 고대 그리스에선 변기 하나도 장인이 손수 제작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공장에 나온 물건을 기술자가 그저 시멘트와 모르타르로 연결할 뿐이다.
똑같은 모습들이 나오니 그 차이점은 없다. 단지 차이점은 변기가격이 얼마나 비싼가? 혹은 얼마나 디자인에 신경 쓰고 있는가이다. 내가 이런 샘이란 주제로 코스튬 문화와 접목하는 이유는 지금의 코스튬 문화는 레디메이드의 천지이다. 인간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존재는 아니나, 현대사회의 인간은 직접적으로 조우하기보단 다른 방식으로 조우한다. 그것은 생산과 소비양식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인간의 거래관계에서 물물교환이 아니라 자본을 통한 매개교환이다.
즉 화폐가 매개로 되어 인간의 가치를 나누는 것이다.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악질적 부분이면서 한편으로 발전적으로 되는 부분이 바로 금전적인 투자이다. 코스튬의 질적 가치가 가끔 자본력이란 사실이 불편한 문제를 일으킨다. 자본력이란 사실만으로 문화가 물화되어 버린다. 물화되어 버린 인간관계에서 코스튬의 가치가 자본력이 되는 점은 코스튬 플레이어의 의상과 사진가의 사진기가 되어버린다. 물론 도구의 능력은 기계적 성능에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나 물화되어버린 관계는 분명한 것이다.
다시 레디메이드로 가보자. 코믹행사에 가면 너무 똑같은 존재가 많다. 마치 공장에서 찍은 옷을 입은 사람이 레디 메이드처럼 보인다. 단지 차이는 마르셀 뒤샹이 어느 변기에 서명을 함으로서 <샘>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서명을 부여받은 사람, 즉 자신의 아이디나 존재적 각인을 부여받은 인정받게 된다. 똑같은 모습과 의상이니 결국 차이점은 외모이다. 따라서 바비 인형에 가까운 존재일수록 가치를 부여받는다. 바비 인형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을 타자가 명령하는 것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멈춰있는 것처럼 큰 감화가 없다. 코스튬에서 플레이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상이지, 그 대상의 겉만 묘사하고 일정한 주문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라 미적 감각을 판단하는 경우 외재적 미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외재적 미와 더불어 내재적 미가 공유하지 않으면 그것은 미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다.
너무 같은 존재들이 넘치면 인간의 시야에선 결국 외재적 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노출되고, 결국 외재적 미를 가진 자들이 레디메이드 세계에서 우위를 점지한다. 문제는 점지하더라도 같은 느낌만 나온다는 점이다. 만약 다른 역할의 부여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인상만 주지 않는다. 남에게 보기 좋은 떡만 찾는 것은 한계가 오는 점이다.
미의 미학이 아닌 추의 미학을 조금씩 건드려 보는 점에서 다양한 개성이 나온다. 혹은 기존의 모던의 미, 즉 일정한 요건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포스트모던의 미인 자신의 개인적 연출로 통해 새로운 연출이 좋은 연출인 것이다. 레디 메이드적인 연출은 개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죽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코스튬은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존재를 현실이고자 하는 pata-physics적인 놀이다. 즉 상상력이 우선이 되는 놀이라는 점이다. 상상력이야 말로 미래의 윤리학이란 것처럼 상상력을 죽이는 코스튬 문화는 인간의 개성을 죽이는 것에 동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