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Salo Or 120 Days Of Sodom (살로, 소돔의 120일) (Criterion Collection) (한글무자막)(Blu-ray) (1975)
Criterion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일>에서와 달리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기본적으로 가학성을 띄고 있으나, 그 주제가 다른 것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1784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약 37일 동안 혼자 깨알 같은 글씨로 소설을 만든 것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저술한 도서를 영화로 각본하여 만든 것이다.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제작한 <살로소돔의 120일>은 분명 <소돔의 120일>에서 가지고 온 모티브나 등장인물 요소에서 유사한 점은 있으나 다른 점도 있다.

 

마장의 역할, 즉 4인의 무자비한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뽑은 성기가 아주 큰 남성이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선 도락자를 위해 선발이라면,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파시스트의 부하라는 점이다. 총을 들고 있어서 억울하게 잡힌 사람들에게 위협적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4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기도 한다. 아니 그들도 즐기기도 한다. 소돔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성적 윤리를 배신한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한 다소의 거부감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 역시 인간적 권리를 부여 받을 자격이 그들을 탓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관계없이 DNA, 즉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본인들도 힘겨워 하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악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등장한 남색을 즐기는 4인방은 자기만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생명력을 인정하기보단 그 생명력을 부정하는 신적 모독에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가톨릭 내지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기에 딱히 무엇이라 말하기가 어려우나 적어도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국 정서적으로도 <소돔의 120일>과 <살로소돔의 120일>은 금기를 위반한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20대 아름다운 여성, 그들은 남자 4인방들의 딸들로 그 딸들은 그 상대 남자에 대한 아내로 삼아진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근친상간에 남색까지 인정되므로 어느 사회에서 금기로 다루던 인간의 윤리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민족과 국가에서는 딸이 아버지와 혹은 아들이 어머니와 성적관계를 갖는 것이 허용된다고 하나 보편적으로 근친상간은 크나큰 죄악이 성립된다. 동성연애라도 고대그리스도 <소돔의 120일>처럼 하지 않는다.

 

에로스란 단어가 사실은 남녀 간의 사랑보단 오히려 늙은 현학적인 남자와 그 남자를 흠모하는 젊은 소년이 같이 자리를 하는 것이다. 고대그리스 사회에서는 동성연애가 하나의 문화적인 권력의 유지인 셈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로스의 위치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고 또한, 에로스는 1968년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에선 하나의 생명력으로 폭발한다.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봐도 그렇지만, 결국 에로스는 생명을 이어가려고 하는 생존욕구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에로스적인 욕구는 인간의 번식에 대한 요건도 중요하다. 생명의 연계성에서 에로스야 말로 우리 인류는 보존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Libido 즉 무의식적인 성적 에너지가 원천적이라고 하여도 에로스란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그 에로스라는 것을 모조리 부정한다. 그저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파괴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다. <소돔의 120일>나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귀족 역할을 한 포악한 자는 역시 어머니를 저주한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나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큰 죄고, 자신의 생명력은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관계로 통한 성적쾌락으로 만족했기에 보상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따라서 이미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창부보다 못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런 4인의 포악한 행위를 4명의 늙은 창부의 이야기로 통해 몰고 간다.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1부가 희생자들의 모아 저택에 가는 것과 2부는 변태적 성욕, 3부는 분비물과 고문에 대한 이야기, 4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성적쾌락을 위해 1부에서 4부까지를 다룬다면, <살로소돔의 120일>은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대한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남색을 하고 어린 소녀의 순결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분뇨를 먹이거나 자기 얼굴에 소변을 뿌리라는 이상한 도락에서 벗어나 채찍질과 가학적인 폭력, 그리고 4부에서 보인 육체적인 가해는 영화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은 당시 루이16세 즉 앙시앵 레짐이란 구체제 속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감옥의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인물은 다미엥이다. 다미엥은 주군인 루이15세를 살해하려다 체포된 하급관리로 그의 사형은 물리적인 신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왕의 신성성을 내세워야 한다.

 

다미엥의 죽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 상처를 내고 수은 같은 것을 붓고, 최후에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에도 매우 잔혹한 처벌방법이 있었다. 사드의 원작을 봐도 4부에 나온 잔혹한 고문과 처형방법은 프랑스에서 기존에 있던 방법이다. 4부를 보면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 성욕을 해결하는 미치광이 도락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그 4인방은 희생자를 대상으로 눈을 도려내거나 손톱과 발톱을 뽑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며, 최후에 팔과 다리를 자른다.

 

그들이 베어버린 사람의 몸이란 그저 자신들이 자연적으로 물러 받은 생명에 대한 고귀함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연적이란 죽음을 선사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로스가 아닌 타나토스, <소돔의 120일>의 미학적 요소는 바로 타나토스의 극치이다. 파괴와 죽음의 욕망을 희생자에게 전가하여 성적 쾌락을 느낀다. 물론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도 고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4인방은 성적욕망을 느낀다. 법원장은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만든 여자가 형을 집행 받는 순간 사정을 한다고 한다.

 

결국 생명을 부수는 것으로 성적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파괴적이고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쾌락을 추구함이 <소돔의 120일>이다. 그렇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은 다르다. 그런 요소를 쾌락으로 즐기는 것도 있으나 오히려 파괴와 변태적인 가학으로 통해 파시스트의 미학을 추구한 점이다. 폭력의 미학이란 결국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파시스트이면서 본인이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폭력의 미학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정의의 미학으로 여길 것이다.

 

오히려 폭력으로 실행되는 의지가 오히려 정의라는 명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폭력의 이면에는 진실의 은폐와 권력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렇다.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폭력성에서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누가 직접 고문과 살해했는지 모르나, 아마 4인방이 직접 할 가능성이 높으나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마장을 비롯한 파시스트 군대가 직접 그 행위를 돕는다. 그 의미는 그들의 폭력성에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폭력의 무질서야 말로 오히려 질서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정치적 의미를 목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도락자 내지 미치광이 변태들이 성직자, 귀족, 상인들과 같이 당대 상류계층이란 것이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에서 당시 사드가 워낙 방탕한 생활을 공개적으로 즐긴 것을 생각해보면 사드는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뒤에서 변태적 성욕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을 비꼬는 것이다. 영화는 상류계층에 대한 비꼬는 것보단 오히려 파시스트들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에 왜 살육의 현장을 망원경으로 보면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폭력을 일으키는 자들이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면 조장하는 것이다. 폭력이어야 말로 오히려 정치적으로 정의를 두는 것이 파시즘에서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수단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공포이다. 상대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거나 혹은 폭력을 가해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만큼 큰 쾌락이 없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통한 공포로서 인간의 통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만들며, 그 공포의 정치로 지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사디즘이란 성적 쾌락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타나토스의 미학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우월주의를 폭력이란 수단으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왠지 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 퍼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폭력이 정의라고 믿는 하나의 광기에서 그것이 곧 사회적 미학으로 이어지는 것이 파시스트적 요소다. 가십거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한 각종 폭력적 수단(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이 용인되기에 저런 영화가 지금 봐도 다소 공감되었다.

 

영화가 1975년에 제작된 점에서 최신영화와 비교하여 화질이나 카메라 앵글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도 영화배우의 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소돔의 120일>의 1부에서 이야기꾼으로 나오는 뒤클로 역을 바까리 부인이 맡았는데, 그녀를 비롯한 이야기꾼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춤도 춘다. 하나의 음률로 통해 마치 뮤지컬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4부에서 분위기가 조금 어두울 때 만담형식을 가진 이야기꾼의 재능은 그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맛인 것이다. 화면의 구도가 세련되지 못함에도 연기를 하는 배우의 연기력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추악하고 잔혹하고 변태적이며 불결한 요소를 어김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