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위대한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인류를 뒤흔드는 책을 창간했다. 하나는 <사회계약론>이고, 하나는 <에밀>이다. <사회계약론>이란 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을 중심으로 대한 정치체에 대한 서적이다. 민주주의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통용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사회계약론>을 고려하지 않음은 민주주의국가에서 담론조차 꺼내지 못할 수준이라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 정도로 삼권분할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로운 존재였으나, 사회에 종속되면서 그 자유가 박탈되기에 자연주의자인 루소의 관점에서 인간의 인위적인 문명이야 말로 인류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다.
그런 논리로 따지면 틀린 말이 아니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이익과 행복을 준 만큼 그 이상의 댓가를 치르게 했다. 전쟁이나 질병 그리고 환경오염은 늘 우리에게 생존위기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에밀>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과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철학서적이고 교육학 도서이기도 하나, 그렇게 딱딱하지 않고, 하나의 소설처럼 꾸며진 책이다.
에밀이란 소년은 가상의 고아로 등장하며 글쓰이는 에밀의 가상의 후견인으로서 에밀을 어릴 때부터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 같이 동고동락한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누굴까? 에밀에겐 저자의 역할은 아저씨 정도나, 그 책에서는 제일 좋은 선생님은 아버지고, 그래 따지자면 부모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바로 가족과의 단절감이고, 인간이 인간으로 갖출 교양이 가정보단 학교라는 집단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집단주의적 성향이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만들게 된다.
문명의 사회라는 집단에서 지식을 가르쳐주는 학교는 지식만 가르쳐주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에밀>이란 서적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적는다. 자연에서 나무를 베거나 물고기를 낚거나 혹은 각종 물건을 만든다. 자신의 노동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매기는 점에서, 루소의 살던 시절인 유럽에선 사실 어린이란 어린이보단 작은어른에 가깝다.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노동의 시작은 결국 정식교육절차를 밟은 중고등학교 이상이란 점이다. 최근엔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들에게 노동의 시작은 20대 후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근대이전이나 혹은 근대라도 아이들은 일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생계의무를 부여했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을 했다. 어른의 1명의 노동량을 채우지 못해도, 노동의 1인이란 개념은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억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찾을 수 있게 한다. 사실 프랑스 절대왕정 사회에서 루이 16세는 루소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었으나, 루이의 아버지는 루이에게 열쇠와 자물쇠를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루이 16세는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을 왕이란 계급에서도 루이의 자물쇠란 취미는 루소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루소의 교육철학의 소중한 부분은 모유의 수유다. 아이의 영양분을 어머니의 유방에서 나오는 젖이 아니라 유모나 혹은 우유에 의지하나, 사실 최근 의학계에서도 모유로 성장한 아이들이 튼튼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과학적 근거보다 하나의 교육철학관념인 <에밀>이나 우리의 교육철학에서 루소의 사상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가두는 게 아니라 스스로 땅을 달리고, 물을 헤치며, 하늘을 보며 자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최근에 나온 <논논비요리>와 <은수저>는 루소의 교육철학과 부합된다. 고등학생이 노동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은 아니나 집안일이나 혹은 학교교육과정에서 이론적인 것보단 실제 농축산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보여준다. 학생 스스로가 농축산품을 만들어 팔기도 먹기도 하며, 그것을 토대로 가사일을 돕거나 이어간다.
<논논비요리>에서는 4명인 소녀들이 작은 학교에서 자연과 친구하며 보낸다. 도쿄에서 전학온 소녀가 시골에 와서 직접 자연과 체험하고, 산에 들나물을 캐어 그것을 먹는 것은 삶의 경험이란 교육이다. 지식과 소비에 의해서 우리는 먹는 음식물이 아니라 직접 생산과 생활에서 나오는 음식물이다. 삶의 자리에서 얻어지는 교육에서 인간의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타인의 교류를 활발하게 해준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모두와의 세상에서 말이다. 학교에서는 지식만 알려주고 좋은 학교에 가기를 원하지 어느 인간이 되고 어떻게 살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비겁하나 냉정하고 흉폭한 인간으로 키워지도록 만드는 하나의 시스템만 제공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직장은 하나의 감시체제를 만든 통제기구라고 한다. 우리는 통제된 세상에 살며, 타인의 눈에 의지한다. 물론 타인과의 공존과 공감이 중요하나, 그것이 아닌 통제라는 공동적인 감시는 우리의 자율성을 떨어지게 한다. 타성에 젖은 시기에 <논논비요리>나 <은수저>와 같은 작품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익보단 모두의 즐거움을 바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아찾기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