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사전적 의미와 환경과학적 고찰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가르간티아의 의미를 찾아보니 스페인어로 gargantilla로 나타내며, 사전적 해석은 목 주변에 두르는 여성의 장식품, 목걸이, 염주 등이다. 즉 여자가 목에 두를 수 있는 장식품을 의미한다. 그리고 취성(翠星)이란 푸른 별이라는 의미다. 취라는 한자어는 푸른색과 물총새(조류) 등을 의미한다. 결국 <취성의 가르간티아>이란 의미는 푸른 별의 여성의 목에 장식하는 목걸이를 의미한다. 그럴 이유를 생각하면 취성은 푸른 별인데, 지구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푸른색의 공처럼 보인다.

 

물론 중간에 녹색과 황새 그리고 흰색이 보인다. 녹색은 숲이고, 황색은 모래의 사막, 흰색은 구름과 얼음이다. 대규모로 조성된 도시지역에서 불빛이 가득해 보이나, 기본적으로 지구는 푸른 별이라고 한다. 그것은 태양에서 빛을 지구로 보내면 다른 색들은 전부 흡수할지어도 파란색의 파장은 반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태양의 프리즘에서 푸른색을 반사하는 지구는 푸른 별로 보이는 것이다. 푸른색은 결국 지구의 생명이 넘쳐나는 생태계적인 별이라는 점이다. 물과 생명이 어울려진 생명의 푸른 별 지구, 그것만으로 지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자연주의자 내지 환경론자들의 입장에서 지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인간의 존재는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식량과 물 부족, 에너지자원부족, 환경오염 등과 같은 자연적 재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자연재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운동에 의해 발생되는 태풍이나 해일이 존재하나, 그것은 하나의 자연적 법칙에 의한 운동으로 볼 수 있다면, 이제는 인간의 지나친 개발에 의해 자연의 법칙과 운동은 무너지게 되어 지구는 각종 환경재난으로 가득하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지구에는 인간이란 생명체가 존재한다. 하지만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이에 따른 환경오염이 가중되고, 언젠가는 자원의 고갈로 인한 전쟁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구에 심한 자연재해가 닥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환경과학적으로 지구환경시스템을 본다면, 우선 현재 우리는 지구대기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상승하고, 지구의 온도를 컨트롤하는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있으며, 지나친 산림파괴로 숲과 나무들이 사라진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밀림, 그런 밀림들이 조성된 곳에 대해 마구잡이로 벌목을 하고, 지나친 개간과 화전은 지구의 대기오염을 가중시킨다.

 

이런 연쇄적인 환경적 작용으로 인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담수의 상당히 많은 양을 차지하는 극지방의 빙하가 사라지면, 그 작용으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한다. 매해 해수위를 측정하면 계속 상승 중이며, 그로 인해 군도와 같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해수로 인해 육지부가 사라지고, 해수위의 상승으로 인해 바다의 파도의 힘이 강력해지기 때문에 그 만큼 해일에 의한 피해도 가중된다. 실제 미국 플로리다주에 닥친 해일피해나 동남아시아권의 쓰나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2. 분쟁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가?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도 그런 분쟁적 동기가 바로 지구환경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온난화가 지속되면 지구의 기온이 계속 상승하기도 하나, 간빙기라는 빙하기도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지구의 미세먼지가 계속 대기권을 가리거나 또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운동, 내지 자전축의 기울기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심지어 지구의 기온이나 기상학적 조건은 달의 인력이나 태양의 흑점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거대한 에너지가 지구 내만 아니라 지구 외부에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는 바로 그런 지구환경시스템이 인간에게 좋은 환경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벌어지는 것이 사건의 시초다.

 

발단의 원인에서 처음에 인류은하동맹이란 인류가 만든 조직에 속한 레드 소위라는 청년은 오로지 동맹의 적인 히디어즈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그는 오로지 히디어즈를 멸살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다. 그가 히디어즈와 대규모 전투 도중에 조난당하여 우연히 지구라는 별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에 사는 인간들은 문명사회(레드소위)의 거주자인 레드 소위 입장에서는 미개한 수준의 문명이었다. 레드 소위는 첨단화된 정보통신체계의 체임버를 조종했고, 그가 도착한 가르간티아라는 배는 디지털로 통해 자동으로 운영하기보단 인간이 직접 몸과 정신으로 노동하는 문명이었다.

3. 레드 소위가 바라본 가르간티아

문명적 수준으로 본다면 항공기는 없었고, 선박으로 해양을 이동하면서 물고기나 해산물을 낚시하여 생존하고 있었으며, 체임버라는 첨단기기보단 윤보로라는 인간이 직접 운전하는 로봇이 있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모두 문명의 혜택보단 자연의 공간에서 문명의 소유물로 통해 살고 있었다. 자연이란 인간에 대해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추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레드 소위는 가르간티아와 조우하면서 그들이 오랜 전에 자신과 같은 인류였고, 그들은 지구에 계속 남아 오랫동안 거주한 것을 알았다.

 

결국 진화라는 관점에서 레드 소위는 문명이 진화한 세계에 있었고, 가르간티아의 사람들은 문명이 진화보단 퇴화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미개했던 것이다. 가르칸티아이란 것은 대규모 선박들이 하나로 연결하여 선단을 꾸민 공동체로서 가르칸티아가 여성의 목걸이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배는 여자의 이름을 붙인다.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에서 안개라고 불리는 배들의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 보여준 모습은 모두 미소녀 내지 미녀였다. 그들이 여성이 나온 이유는 인간은 선박을 여성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적인 요소로서 모자, 신발은 여성성을 의미하는데, 배도 역시 담을 수 있는 그릇이란 점에서 여성으로 본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승무원으로 여자를 태우지 않은 이유는 배 자체가 여성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태우지 말아야 하는 관념(터부)이 있었다. 하지만 물질적 조건으로 여성은 주기적으로 배란에 의해 생기는 월경이 원인이었는데, 그 이유는 옛날 선박은 모두 엔진이 아닌 인력이나 풍력, 조류에 의해 움직이므로 해상 위에서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만약 바다로 출항하면 상어나 위험한 바다동물이 월경으로 인해 배출된 혈액의 냄새를 맡고 찾아와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자면 문화인류학적(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으로 이슬람문화가 돼지고기를 혐오하는 것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관념이나, 오랜 고문서에는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던 만큼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 물질적 조건에 의해 되었으며, 그것이 하나의 금단의 조치가 된 것이다. 생각하면 간단한 것이, 돼지는 건조하고 마른 곳보다는 축축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 살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사막지역에는 습기가 부족하기에 돼지를 키우기가 어렵고, 실제 키운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경제적 비용은 막대하고,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조성되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가르칸티아는 레드 소위가 보기에 매우 비효율적인 연합이다. 많은 배가 같이 있으면 행동하기 어렵고, 강한 무기도 없으며, 해적이 나와도 멸살하지 않고 최대한 희생을 줄이려고 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싸운 히디어즈와 비슷한 고래오징어가 나와도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레드 소위가 고래오징어를 죽이면 주변 사람들이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레드 소위를 바라본다.

 

4. 레드가 보는 가르칸티아의 삶

레드 소위는 단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헤게모니, 즉 히디어즈를 모두 섬멸하는 것만이 전부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는 전사이다. 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고, 오로지 전투를 수행하는 전투요원이었다. 하지만 레드가 가르간티아에 오자, 전투가 전부인 그에게 여기는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야 했다. 그것은 레드라는 인간이 오로지 전투를 위해 살았다면, 여기서는 전투가 아니라 삶이란 자체를 위해 살아갔다. 모두가 서로 돕고, 될 수 있는 한 모두가 자신만의 일을 하여 그 노동의 가치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여자주인공인 에이미의 경우 그녀의 남동생인 베벨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베벨은 심장이 매우 약한 소년으로 조금만 무리하면 생명에 큰 지장을 줄 수 있을 만큼 약하다. 그래도 바벨을 위해 에이미는 열심히 일을 하고 그를 돌본다. 레드 소위는 그런 에이미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베벨을 보면서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레드 소위의 가족들은 연맹의 판단 아래 필요성이 없다고 여겨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은하동맹은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행동한다.

 

즉 그곳은 인간이란 존재란 서로 간의 교류에 의해 존립되는 곳이 아니라 상하체계가 명확하고 오로지 명령과 복종만 강조되는 사회다. 문명발전 수준은 현재 과학기술과 비교조차 되지 않으나, 정치제도를 보면 전형적인 군국주의 내지 전체주의이다. 군국주의는 국가나 국가의 부속원인 국민이 모두 군대에 있는 것과 같은 사회체계이다. 그러므로 레드 소위는 계속 전쟁을 수행하며, 그의 가족들은 전쟁에 필요 없는 존재이기에 폐기처분 되었다. 인간의 존재적 가치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 여부에 따라 삶과 죽음이 나누게 된다.

베벨은 그런 레드 소위에게 보자면 새로운 존재였다. 베벨은 육체적 노동을 할 수 없으며, 군인으로 살아온 레드에게 군인은 적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육체적 노동력이 없는 베벨에겐 전투력이 없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인간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이어야 하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으로서 인간의 가치가 정해진다. 베벨은 사회적 가치 내지 노동력이 없으므로 어떻게 보면 에이미에게 짐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에이미는 오히려 자신이 여기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베벨이란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마음을 의지하고, 도움을 나누며, 내가 아닌 타인과의 공존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레드 소위에게 인류은하동맹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거기서 죽으면 끝이고, 살아남으면 전투 중에 진급하고, 또는 그의 상관처럼 사라져갈 수 있다. 레드 소위가 본 가르칸티아에는 분명 신분적 차이는 있었다. 그래도 그 신분은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기보단 선단을 운영하기 위해 선단장과 각 선주들이 모여 있으며, 이들 각 선주에게는 자치적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대규모 선단에서 각 선박 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이들 역시 사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5. ​가르칸티아라는 코뮌(Commune)

이런 사회적 공동체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프랑스어로 ​코뮌(Commune)이라 한다. 코뮌(Commune)이란 단어가 유명해진 시기는 1871년 코뮌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루이왕정을 붕괴한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 이후로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코뮌이 발발했다. 역대혁명 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많이 희생당한 혁명이었으며, 당초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달리 부르주아 지식인보단 일반 시민들이 주축이 된 혁명이었다. 그런 코뮌이란 단어는 결국 공동체이고, 서로 경쟁하기보단 공존의 길을 선택한다.

 

그런 코뮌이란 체계와 유사한 선단이니 공존의 대상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에게도 마찬가지다. 히디어즈의 동족이던 고래오징어에게 위협 내지 공격하지 않으면 고래오징어가 공격할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 해적이 습격해도 방어하여 도망치거나 물리칠 뿐이지 그 이상의 희생을 내지 않은 이유도 그렇다. 결국 공존을 잃게 되면 어느 한쪽이 무너질 경우, 단순히 그것이 무너진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해가 막대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전쟁과 같은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생존조건상 육상이 아닌 해상이기에, 해상 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살아갈 터전조차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경쟁이란 대립이 아니라 공존이란 방법이 우선인 것이다. 공존의식이 레드 소위에게 없는 것은 사회라는 조직이 그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라면 그 조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에서 차이점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평화적으로 그리고 가장 민주적으로 생존할 수 있던 시기는 열악한 환경에 일정 무리만 존재하던 원시시대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이야 냉장고와 같이 음식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도구도 있고, 의약품이 보급되어 심한 질병이 아닌 이상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원시시대에는 파상풍이나 이질 등과 같은 질병에 죽거나, 또는 어떤 충격에 의해 부상당하면 생존이 불가피하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였으며, 인간수명이 길지 않았기에 연장자들의 경험이나 지식이 없으면 많이 곤란할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부족이나 씨족단위로 서로 뭉쳐 같이 무리를 지어 식량도 나누어 먹고, 다치면 서로 돌봐주기도 했었다. 단 조건은 다른 씨족과 부족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로 활동범위가 넓고 자유로워야 했다.

설사 서로 조우해도 서로 공격해보았자 희생만 늘어날 뿐이므로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가르칸티아의 선단은 그런 점을 보면 다른 선단과 조우할 기회도 적고, 설사 조우한다고 해도 서로 가진 물건을 물물교환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도태될 뿐이고, 정보력이 부족하면 바다 위에서 생존이 힘들어진다. 선단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기 위해 누군가의 정보가 필요하고, 태풍이나 해일 등과 같은 자연재해의 정보도 알려면 누군가의 정보가 필요하다. 특히 마실 물이 귀중하기에 기상정보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6. 야생의 사고의 <취성의 가르간티아>

왜냐하면 <취성의 가르간티아>에서 육지부가 나오는 장면을 제대로 못 보았기 때문이다. 레드 소위와 피니언이 고래오징어의 서식처가 있는 해저로 갈 때 거기는 어느 연구시설과 같이 보였으며, 주변에는 온갖 잔해물이 보였다. 환경과학적으로 보면 대기기상의 이변으로 처음에는 간빙기가 닥쳐 인류가 서로 갈등이 생겼다면, 그 후 지구는 온난화로 인해 해수위가 상당히 높아졌을 것이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의상을 보면 대부분 여름에 입는 옷이고, 베벨이나 에이미의 의상은 남미 전통복장이 생각나는 의상을 입고 있다.

 

남미권의 기후가 열대성을 띄고 있고, 인간의 몸에 열이 쉽게 빠져 나가기 위한 점과 더불어 작품 내 여성캐릭터의 모에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노출도 높은 편이다. 대기기상을 생각하면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은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상조건, 고래오징어의 정체성, 지난 인류의 역사 등을 현재의 가르칸티아의 선단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레드 소위가 보기엔 그들의 행동이 너무 무의미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체임버를 사용하면 효율적인 전투, 효율적인 어류공급, 잃어버린 보물인 과거의 문명까지 쉽게 습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레드 소위의 방법이 더 이상하고 바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가르칸티아 선단사람들에게 문명이 없는 것은 아니나, 레드 소위에는 야만 내지 미개한 종족으로 보았을 것이다. 특히 에이미가 레드 소위에게 처음 건네준 생선을 보고, 레드 소위는 어류의 시체로 여겼다. 어류의 시체를 먹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먹고 난 뒤에 그것이 제법 먹을 수 있는 식량인 것을 알았다. 결국 그들은 레드 소위에게 있어서 야생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가르칸티아라는 선단은 문명이나,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인 바다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문명이 아니라 인간이 부유하고 있는 자연이란 거대한 존재다. 레드 소위 기준의 이성적인 사고에서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무의미한 행동들이 알고 보면 오히려 그것에 대한 의미가 있었다. 무의미에 대한 의미에서 선단의 생활양식은 인간의 의식으로서 행동하기보단 무의식적인 생활양식에 의해 행동한다. 그러나 가르칸티아 선단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생활양식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과학적인 요소가 담긴 것이다.

 

7. 쿠겔 중령의 망령

그런 공동체적인 코뮌 대신 다른 생활조건을 갖춘 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가르칸티아에 사는 사람들처럼 모두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행동양식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트라이커라는 인류은하동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처음 인류가 간빙기의 도래로 인류의 멸망을 두려워하여 일류과학자들은 인간의 지능과 생존력이 높은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히디어즈와 고래오징어의 시작은 인간의 유전자조작으로 탄생이었다. 그것을 만든 자들과 반대하는 자의 대립이 시작되고, 결국 반대하는 자들은 우주로 나가 인류은하동맹을 만들었다.

 

그리고 쿠겔 중령과 레드 소위는 인류은하동맹 지휘아래 전쟁을 수행하였고, 2사람 모두 지구로 불시착했다. 지구로 온 레드는 운 좋게 살았지만, 쿠겔 중령은 목숨을 잃고, 그의 머신 캘리버가 쿠겔의 유령이 되어 스트라이커를 지휘한다. 스트라이커는 이른바 계몽이란 이름 아래 그들을 전체주의적인 광신도로 만들었으며, 계몽은 스스로 깨달아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억압이란 이름으로 스트라이커를 지배했다. 그 결과 스트라이커들은 이상한 의례로 사람들을 강제로 물에 빠지게 하여 수장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누군가의 희생, 그리고 그 희생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의 위안과 조직의 결성은 전형적인 전체주의국가 형태였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 조직을 결속하고 지배하며 이끄는 행위에서 가르칸티아의 생활과는 전혀 달랐다. 가르칸티아는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이 없었다. 하지만 스트라이커의 쿠겔 중령의 유령은 인간 위에 인간이 있기 보단 인간 위에 신이라는 존재로 있으려 했다. 인간의 집단에서 발생되는 군중심리는 논리적 이성이 사라지고, 군중심리로 작용되는 폭력적 성향조차도 하나의 정의와 도덕으로 변질된다. 유럽의 광기이던 나치의 잔인한 행위와 대동아공영이란 이름을 내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하는 잔인한 행위와 폭력은 부당한 것이나, 그들에게 부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스럽고 당연하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내보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망령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상징성이 필요했다. 그 상징으로 쿠겔 중령이었고, 쿠겔 중령의 망령은 그의 머신 캘리버가 조종석을 여는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쿠겔 중령은 병으로 사망하였고, 시체마저 부패되지 못했다. 이미 인류은하동맹의 정치구조가 군국주의 내지 전체주의이기 때문에 쿠겔 중령의 유령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스트라이커를 지배했고, 그들은 다시 다른 선단의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했다.

8.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작품적 의의

<취성의 가르간티아>은 작품성으로 보면 13화로 끝내기에는 조금 짧았다고 판단된다. 거기에는 다양한 담론이 숨어있다. 처음으로 인류의 위기에서 그 위기를 대처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유전자조작이란 윤리적 문제가 처음이다. 과학의 윤리성이 현재 큰 문제로 부상하는 것이 유전자조작에 의해 탄생되는 생명체다. 복제되는 동물들이 탄생하고, 시험관아기도 이제 이슈에서 낯선 존재가 아니다. 생명의 윤리성에서 동물을 넘어 인간의 탄생까지 넘보게 되었다. 인간이란 신이 만든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영혼이란 진짜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정신세계가 있는지 혹은 인간의 기억이란 단지 데이터이고, 그 데이터조차 위조 및 조작할 수 있는 것에서 인간의 존재성이 이 작품에서 큰 의의로 다가온다.

 

또한, 인류은하동맹과 히디어즈의 관계이다. 히디어즈의 유년 모습은 마치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 고래오징어의 어린생명이 처음 레드 소위를 볼 때, 그들은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손인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레드 소위는 두려움으로 그들을 죽인다. 붉은 피가 흐르는 순간, 레드 소위는 자신이 멸살시킬 괴물 히디어즈를 물리쳐서 임무를 수행 중인지, 아니라면 인류의 후손으로서 또 다른 인류를 파괴하고 있는가에서 심한 동요를 느낀다. 또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반대되는 것이라도 결국 그들이 가진 존재성과 의지를 무조건 부정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가르칸티아의 선단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점이라고 볼 수 있다. 코뮌이란 말은 공동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럽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가르칸티아의 선단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거기에서도 갈등과 문제점이 없을 리가 없다. 세상에서 완벽한 정치제도를 가진 국가나 사회는 없다. 단지 그런 이상적 가치를 삼아 끊임없이 노력하고 이끌어갈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인류가 닥친 자연적 재앙이다. 히디어즈가 탄생한 원인도 가르칸티아의 선단들이 바다를 떠돌며 살아가는 것도 자연적 조건에 의해서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의 대립관계를 살펴보면 ① 유전자조작으로 통한 인류의 진화론자 ↔ 그것을 반대하는 도덕론자, ② 히디어즈 ↔ 인류은하동맹, ③ 명령과 임무에 의해 사는 레드 소위 ↔ 공존을 위해 자연적 조건과 평화적으로 살아가는 가르칸티아, ④ 가르칸티아를 지켜려는 레드 소위 ↔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만들려는 쿠겔 중령의 망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간의 가르칸티아의 선단과 해적의 전투, 피니언이 유물을 찾으러 갈 때 싸우던 고래오징어의 다툼도 있었지만, 중요한 대립은 위의 4가지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자연적 조건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누가 강제로 해야 하는지 다소 난감한 선택에 봉착한다. 인간이 자신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있 결국 인간 모두 태어날 때 자연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물론 태어나면서 인간에겐 쇠사슬이란 억압을 받게 되나, 그 대안으로 인간들은 사회계약론을 맺게 된다.

   

사회계약론으로서 인간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더 나아가 박애정신으로 통해 서로 간의 공존과 평화를 도모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을 구속하고 착취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이제 인간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욕구는 일시적으로 해소가 가능하나, 욕망은 끊임없이 그 이상의 요구하게 된다. <취성의 가르간티아>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자연까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에서 자코뱅당 출신으로 국민공회의 위원을 맡았던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이 생각난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닌 타인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만일 타인이 자유가 없게 되면, 그 타인은 다른 자의 자유를 박탈하려고 하는 점이다. 만일 누군가의 희생을 강조하는 사회라면 이 작품의 각본을 맡은 사람이 만든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처럼 계속 희생을 더 큰 희생으로서 씻어져 나갈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3-2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진짜 대단합니다.
일단 밥 먹고 읽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3-25 12:26   좋아요 0 | URL
이게 바로 오덕력이란 심오한 세계인 겁니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을 보면서 문득 최근에 김월희 작가가 저술한 <2병 데이즈> 4권의 후기편이 생각난다. 김월희 작가는 <2병 데이즈> 1권 발매당시 여주인공 흑련과 린의 대화에서 괴벨스의 부분으로 인해 엄청나게 큰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것이 정말 옳은 게 아니라 단지 작품 전개상 중2병이란 속성에 대한 강화를 맞추기 위한 하나의 모티프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나 그의 고충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인지해야 했다. <세계제일의 여동생님> 종료 이후 계속 진행 중인 <2병 데이즈>로 통해 자신이 내놓은 작품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보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책임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쓰는 글이란 조심스러운 부분이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타인의 의견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 감상과 혹은 비평적인 관점으로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에 대해 읽은 소감, 즉 라이트노벨을 직접 구매하고 읽으면서 서평까지 쓰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번 편은 유감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비평이나 감상적인 요건은 개인의 입장에서 나온다. 그 개인의 입장이 되는 사고와 판단은 물론 모든 것이 그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지식적 조건 등에 의해 좌우된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적 논평에서 나오는 부분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1권에 비해 재미, 감동, 의미 등과 같은 요소들이 전혀 와 닿지 않은 느낌이었다. 라이트노벨이 경소설이라고 하여 재미 내지 즐거움을 준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라이트노벨 역시 일반 소설과 같은 서사구조를 지닌 문자서사이므로 소설과 비교하면 안 된다는 점은 없다.

 

개인적 비평적 관점에서 보자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은 내 기준으로는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라이트노벨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라이트노벨이란 장르와 소재에 대한 기본적인 성향과 요건을 생각하면서 서평을 쓰지만, 그런다고 그것은 그 조건일 뿐이지 다른 소설과 비교하는 연장선상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2권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번 편은 작품의 주인공인 에프 킬러의 주인공보다는 에프 킬러의 지역 점장에서 문제였다. 이야기 2편 전체의 주제는 에프 킬러 점장의 과거와 그녀를 찾으러 온 붉은 이리의 과장이 오면서다. 2사람은 자매이었고, 언니 쪽인 점장은 납치되어 10년 전에 에프 킬러 총장에게 구출 후에 계속 이 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때 쌍둥이 자매인 붉은 이리의 간부 시현은 이래저래 팔린 채 돌아다니다가 조직의 일원이 되어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악의 조직이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2권은 너무 클리셰적인 요소가 강했다. 뭔가 안 봐도 알 것 같은 느낌, 게다가 점장의 아버지가 조직의 두목인 것까지는 좋으나, 자매의 어머니가 어떤 정식부인이 아니라 숨겨놓은 애인이란 설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소녀?”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볼 것인가? 소녀라는 기준을 명사적 의미로 살펴보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여자 아이. 그렇다면 성숙이란 기준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해당되겠지만, 어린 여자 아이라면 어느 기준으로 맞추는 것이 올바른가?

 

차라리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이제 갓 아가씨의 향기가 풀풀 나는 그녀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어린 소녀의 티가 벗어나 있었는지 얼굴의 볼 살의 흔적이 보였고, 아직 마음이 어린지 눈가에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라는 표현이 조금 나아보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2권은 점장을 찾으러 온 시현이 쌍둥이자매의 상봉이란 명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언니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고, 그녀를 자신의 보호아래 두기 위해 에프 킬러를 자본력으로 와해하는 것에서 차라리 자본에 대한 부족을 우회적으로 돌리는 게 좋았겠지만, 속성이 빈곤 코미디이기 계속 그것을 고수했다.

 

물론 그런 점을 고수한 점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작가의 본래 설정한 의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설정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글을 쓰면서 생각해야할 조건이다. 어차피 서사에서 어느 문제가 나오고,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과업의 부여는 이미 정해진 틀이다. 그 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조합하고, 어떻게 이끌어가는 것이 작가 내지 스토리텔링의 숙제다. 조직의 살림을 궁핍하게 만들어 데려오는 것과 마지막에 점장을 두고 펼친 결투가 너무 클리셰인 점에서 신선한 맛은 없었다.

 

라이트노벨이 환상적 요건과 비일상적인 요소를 반영했으면, 그 자체로서 진행한다면 모르나, 적어도 현실적 요건인 등장한다면 그것에 대한 요건을 충족해야 하나, 그 조건이 어울리지 않으면 당연히 이야기 흐름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연은 주인공과 하춘식이나, 하춘식의 등장은 그다지 나오지 않고, 마지막 부분 결투에서 사신처럼 보이는 모습, 그리고 주인공이 길거리에서 방황할 때 자신의 집에서 재워준 것 말고는 큰 활약은 없다. 물론 그것도 이야기 속에서 작은 이야기에 해당되므로 나쁘다는 점은 아니다.

 

하지만 마법소녀 하춘식이 사는 집은 혼자서 자기에는 큰 집이란 점이 조금 어긋난 것이다. 하춘식이 밤이 되자 잠을 자야 하는데, 자기 방이 아니라 거실이나 남는 방에 주인공을 재우면 그만이다. 굳이 자신의 방에서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밑에 주인공을 재워줄 이유는 없다. 그래서 작가의 설정 자체가 너무 흐름 속에서 어긋난 것이 문제였다. 재미요소는 여전히 같은 방식이 계속 나오는 점에서 이 라이트노벨 이외에도 다른 라이트노벨도 비슷한 내용이 매권마다 다른 상황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권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설정이라면 지겨운 것은 분명하다.

 

일단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모든 발단은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그것을 아는 딥블루, 그리고 총장이란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2권을 전부를 먹어버린 시현의 등장과 주인공의 대립과 화해는 너무 질질 끄는 느낌이었다. 새로 등장한 인물이 1명인데, 그 등장으로 1권을 통째로 차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예전에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서 엔들리스 에이트가 방송에서 그 반복에 해당되는 편만큼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다. 애초부터 설정부터 그렇다면 반복적인 요소와 그것에 대한 가십감은 작품 내의 주인공만 아니라 보는 관객들도 충분하다.

 

라이트노벨 원작에도 그런 반복이 있어서 지겨움을 느끼게 만든 것과 그렇지 않은데도 지겨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엄연하게 다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초반에 빈곤을 소재로 한 코미디지만, 어느 순간 하렘구조가 성립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 자체가 생김새나 행동이 여자라고 하나 적어도 주변적 인식에서(모르는 사람 제외) 남자라는 것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진행된다. 3권은 조금 더 나은 이야기로 다가오면 좋은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그 제목이 나온 것은 페이지 258~259 사이였다. 그것은 이 소설인 마리암과 더불어 전형적인 아랍미인이던 라일라에 대한 이야기에서였다. 그녀는 매우 지적이고, 의식 있는 아버지와 매우 격정적인 어머니를 둔 어린 시절에서 자신의 아버지 바비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하루 종일, 카불에 관한 한 편의 시가 머리에 떠돌더구나. 사이브에타브리지라는 시인이 17세기에 썼던 시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고 /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으리.’ 전에는 전체를 다 외웠었는데 지금은 두 줄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란 제목적 의미를 생각하면, 지금은 비록 어렵고 힘들고 괴로웠지만 언젠가는 좋은 날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숫자적 의미로서 천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 보통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할 때, 천군만군이란 말도 사용하고, 백과사전이란 말과 백가지를 의미하는 사전도 있다. 결국 백(百)이란 숫자는 매우 많고 많은 것을 의미하고(서양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디드로 위주로 저술한 백과사전도 그런 의미), 천과 만도 결국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천과 만은 높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인간의 수명이 길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구수가 많지 않았기에 숫자적인 관념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태양은 지구에서 하나 뿐인 존재이고, 천 개의 태양은 1,000일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에서 나오는 지붕 위의 희미하는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다는 것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어두운 현실 앞에 언제까지나 그것만이 되풀이 되는 게 아니라 분명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소설에서 첫 부분은 주인과 하녀에서 태어난 마리암이란 소녀로 시작하여, 마리암이 반강제적으로 결혼하면서 정착된 장소 인근에 살던 라일라를 만나고, 이 둘은 서로 이웃이었으나, 잔인하고 끔찍한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라일라는 마리암과 함께 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난 사람이 있었는데, 에릭 홉스봄이란 영국 사상가 겸 역사학자로 그 저술한 서적 중에서 <극단의 시대>라는 도서가 있고, 또 뒤에 <폭력의 시대>라는 서적이 나왔다. 극단의 시대는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로 위장한 관료주의와 비밀경찰국가, 자유주의라는 이름 앞에 시장지상주의의 대립이었다.

 

특히 이 둘의 대립된 이데올로기는 각종 민폐를 일으킨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쿠바와 남이의 피바람,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인 아프카니스탄도 피할 수 없다. 그곳은 소련에 의해 침공되었고, 소련의 저지를 위해 민족중심적 이슬람 세력과 더불어 자유주의 진영에서 무기와 세력을 지원받았다. 그래서 처음에 이슬람에 의해 지배되던 아프카니스탄에서 여성이 사회생활하고,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자신의 의지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여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소련의 침공으로 인해 여성들에게 교육과 직업 그리고 사회적 참여권이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대신 이슬람 세력과 소련군의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가고, 그런 과정에서 1990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소련군은 모조리 그 땅에서 흩어진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무기가 쥐어져 있고, 자신들이 전쟁에서 했던 것만큼 현실에서 이상적 가치 대신 실리적인 욕망으로 가득했다. 여자들의 얼굴을 가리고, 여자들이 어디를 갈 때 혼자서 가지 못하며, 병원에서 임산부가 출산하는데도,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반시대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시계는 21세기로 가고 있는데, 이슬람 탈레반의 행동들은 구시대로 가고 있다.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어렵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면 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남편 라시드의 폭행과 학대행위를 참을 수 없어 도망치려 했지만, 붙잡혀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결국에는 라시드를 살해하는 경지에 이른다. 마리암의 서명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처음에는 억지로 끌려 결혼하여 혼인증명서에 사인하는 모습을, 다음은 감옥에서 재판받고 사형선고에 사인하는 것을, 그녀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하라미라는 천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어머니 나나가 자살 후에는 라시드의 폭행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자신의 인생에서 즐거움이 없었다.

 

그런 마리암이 유일한 희망인 라일라의 딸 아지자였다. 아지자만이 마리암을 따라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기에 마리암은 라일라가 처음에는 미웠지만, 라일라와 아지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라시드를 죽였고, 그녀는 AK47 소총이 자신의 머리에 겨냥되는 것을 인지한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살면서 제대로 좋은 인생을 살지 못했다. 그저 나나하고 살던 때가 제일 행복한 편이다. 그런 고된 생활에서 죽음은 최악의 고통이며,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 나는 신이란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 유신론적인 가치는 인정하나, 신이란 결국 오만한 인간에 의해 멋대로 이름이 팔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리암에게 알라신은 무엇을 주었는가? 차라리 나나와 살 때 친절한 늙은 파이줄라의 가르친만이 진실한 알라신이 존재했다. 알라신은 모두에게 자비롭고 위대하다고, 그러나 현실의 알라신은 파괴와 암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가면이었다. 사실 그런 점은 이슬람만 아니라 십자군 원정과 레바논 전쟁, 나치의 행위들처럼 거대한 종교가 거대한 파시즘의 자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슬람권의 그런 비참한 이야기는 이미 사트르피 마르챤의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어느 정도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문당하여 죽고, 여자들은 억압당하고, 어린 아이들은 이슬람과격 테러조직에 가서 자살요원이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프카니스탄의 비극적 이야기를 다룬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보면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나름 이렇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고, 그런 것이 소설 속에 이루어진 점이 씁쓸했다. 그래도 제목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만큼 마지막은 불행 중에서 찾는 행복은 있었다. 천 개만큼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나, 그것을 만들려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911 미국 테러사건이 생각났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같은 소설을 읽을 때 조금 아픔이 아프고, 불편한 이유는 항상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되는 보복과 가해행위는 본래의 당사자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들에게 간다는 것이다.

 

911 테러사건에서 죽은 사람들과 피해 받은 사람은 모두 민간인이고, 대부분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기의 생활에 충실하게 보내려던 시민이었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주의로서 합리를 넘어 합당한 가치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그 본인에게 충실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 자들이 테러를 당했고, 항공기 안의 승객들도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인간의 극단성은 결국 폭력으로 변질되고, 인간의 폭력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하나의 정의라는 것이다. 정의의 실현은 결국 폭력에 의해 수반되는 것이다. 폭력을 멈추기 위한 폭력이 진정한 폭력을 위한 명제이나, 우리는 폭력으로서 이익이나 이권 그리고 명제로서 사용한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아쉬운 점은 바로 그런 요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사람들, 로켓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사람들, 총을 맞는 사람들, 남편에게 가혹하게 맞는 여자들,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가 슬픈 비극이다. 하지만 비극의 씨앗은 결국 어디인가? 물론 작가의 입장서 난감한 입장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과격테러리스트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폭력적 지배행위를 저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어디서부터인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단지 이런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동조하는 것보다 왜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역사는 두 번 반복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2병 데이즈 4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중2병 데이즈 4권>은 지금 일어나는 일보단 지금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던 시리즈였다. 전에도 예상을 했지만, 흑련의 어머니가 조직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연오의 선배인 자오, 그리고 그 자오의 선대의 갈까마귀왕이란 사실을 인지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인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이란 모든 것이 현재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 현재라는 존재적 구성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시간적 축척이 필요하다. 인간이 가진 물질적, 정신적, 심리적 조건과 재산들은 모두 과거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현재 자신이 어느 것을 소유한다고 하여 방금 1분 1초 만에 갑자기 태어나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1분 1초가 수 없이 쌓이고 쌓여 구성해온 하나의 시간의 축척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시간에 의해 형성된 자신이 결국 앞으로도 이루어질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순간적으로 바꾸는 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버리거나 혹은 그 이상의 반란을 일으켜야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혁명(revolution)이란 단어는 evolution에서 r의 단어가 붙은 것이다. 진화와 혁명에서 진화는 단지 그 자체적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혁명은 앞에 나가는 것을 위해 모조리 뒤엎는 것이다.

 

혁명이란 말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지배계급이 무너뜨리는 행위로서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혁명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반드시 그런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다. 혁명은 자기만의 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연오가 처음 기관에서 린을 데리고 세상으로 나온 것과, 한아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흑련을 발견할 때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혁명적인 삶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생활을 깨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간부로서 명성을 날리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니라면 조직과 기관하고 아무 상관없이 자기 자신은 오직 스스로 행동하기를 살아갈 것인가? 인간이란 어려운 존재다. 단순히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그것도 아직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는 중2병(물론 그들 나름 세계는 아니겠지만)들을 소재로 만들었으나, 여기에는 엄청난 숨은 의미가 있다. 작가인 김월희 씨의 작품 중에서 <세계 최고의 여동생님>을 읽은 후에 <중2병 데이즈>를 읽었지만, 라이트노벨이란 재미위주의 스토리텔링 안에도 그 어떤 담론이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이번 편에서도 작가는 은근 어려운 말과 단어를 꺼내 놓는다. Meta-physics, 형이상학(形而上學)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도서제목이고, 거기에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요소를 탐구한다. 물리학인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physics에서 meta라는 것을 어두에 붙임으로서 우리가 눈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혼이란 것도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던 플라톤이,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만들면서 철학을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고, 육체는 소멸하나 영혼은 영원하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그런 후에 질료라는 단어를 제시하여 어떤 이데아로서 추구하는 형상 내지 사물에서 그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리적 도구(그러니깐 조각품을 만들기 위한 나무, 돌, 금속 등등)를 언급한 점이다. 린이 연오와 같이 임무를 맡으면서 심한 부상을 입자, 연오는 자신의 영혼의 일부를 린에게 부여한다. 원래 2사람은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니었고(아니 원래 인간이었는데, 개조되었는지도 모른다.), 연오의 몸은 기계로 된 골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에게 혼이 있다는 점이다. 혼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고, 그것이 정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늘 의문이나, 우리(모두는 아니지만)는 신의 존재성을 있다고 믿는 관념적인 종교관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연오와 린에게 자신이 존재하는 삶이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육체는 소멸하나 영혼은 살아있다. 린에게 연오의 혼이 이식되자, 린의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단지 린이 연오에게 많은 애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지했다. 그들은 친남매가 아닌데도, 린은 연오의 친남매처럼 느꼈고, 가족의 인연이란 육체적인 동질성인가? 아니면 영혼의 공유성인가?

 

중요한 점은 연오가 자신이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삶을 인지할 수 있게 된 동기는 린의 등장이다. 그녀는 아직 어리고, 세상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위에 죽음을 면치 못할 부당함에 연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켰다. 만약 그런 계기가 없다면 계속 마술사킬러로 활동하다가 자기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조직기관 내의 임무일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행복할까? 형이상학이란 단어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읽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그 인간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연오는 자신의 조직에서 갈까마귀왕으로서 매우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염없는 허무함과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것은 연오 이전에 자오가 그랬으며, 자오 이전의 한아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이 거기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시간의 축척만이 해결되지 않았다. evolution처럼 연오와 자오 역시 모두 진화했다. 신체적 능력과 경험이 없을 때에는 모두 초짜였으나, 어느 순간 킬러로서 진화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진화라는 시간적 축척에는 삶의 의미가 없었다. 다시 진화의 진화라는 반복에서 revolution이 되어야 했다.

 

그게 바로 연오의 고교데뷔이고, 한아는 기관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만약 연오가 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 한아가 흑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흑련과 한아의 만남은 최악의 사건이었고, 연오와 린의 만남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흑련은 한아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고, 린은 연오의 방패막이로 죽을 뻔했다. 죽음이란 극단적 상황에서 이들이 찾은 길은 죽음과 삶은 같이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이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삶을 찾거나 또는 삶을 주는 것이야 말로 이들이 택한 새로운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 택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바뀌어도 그 상황 자체가 좋아지거나 조금 더 희망적이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연오는 한아의 말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온다. 잿빛 투성이 세상,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자신이 발버둥을 쳐도 계속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그런 곳, 그렇지만 흑련에 대해 연오는 “언제까지고 세상이 반짝거릴 거란 믿음을 잃지 않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그 녀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게만 느껴졌다.”라고 생각한다.

 

찾을 수 없는 세계, 그리고 결코 닿을 수가 없던 세계, 예전에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라는 작품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 작품의 여자주인공은 경력이 오래된 영화배우이다. 작품 시작시점이 이미 머리에는 흰머리로 가득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져있지만, 왠지 모르게 우아한 기품과 따뜻한 분위기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은 배우였다. 그 배우는 자신의 첫사랑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결국 그 첫사랑은 형사에게 추적당하다가 결국 운명을 달리한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비보를 접하고도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를 향해 찾아가는 자신을 더 사랑했다고 말이다. 닿지 않은 것에 대해 하염없이 찾아가는 것은 왠지 슬프고 허무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닿지도 못한 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비효율적인 형태이며, 결국 그것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 물론 <중2병 데이즈 4권>에서는 그렇다고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아가 살해했던 흑련의 친부모가 고급마술사 아버지와 평범한 여성이란 점에서 그녀가 흑련에게 저지른 죄악은 흑련을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의 과거라는 시간에서 숨길 수 없다.

 

그래도 흑련에 대한 애정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보일 새로운 빛을 만들려 했다. 전에도 <중2병 데이즈> 시리즈를 리뷰하면서 인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괴로움을 맛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적인 조건에서 그것을 눈치 채기도 어렵고, 아니라면 너무 그런 자신들의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려 떠오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결부지어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자신의 길은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중2병 데이즈 4권>에서는 그런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이야기해준다. 잿빛으로 가득한 세상에 그냥 그렇게 우리는 세월이 흘러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중2병 데이즈>에서는 우리의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거기에다가 연오가 처음 고교생활의 꿈을 준 <두근두근 스쿨 라이프>라는 왠지 미소녀 연애를 소재로 한 만화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참고로 작품 내에서도 그 만화책의 작가가 “정작 고등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 하지만 환상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연오가 자오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나, 막상 자오를 뛰어넘어 갈까마귀왕으로 되는 것과 자오가 한아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나, 막상 한아를 뛰어넘어 갈까마귀왕으로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란 자신의 목적이 정해져 있어 어느 순간 되어버리면 자신의 목적이 없다.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행복인지 아니라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그 길이 행복인지 어느 것이 정답일까 생각하기 어렵다. 적어도 연오나 자오나 그들이 동경한 자가 되기 전에 그들을 향하여 힘겹게 살아간 것은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했을 뿐이지 그것은 단 한 번의 과정이다. 두 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 처음 도시로 나와 추운 아파트에서 연오가 린과 서로 안아주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추천받은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보면서, 모두 이런 말을 했다. 결코 1번 보고 이해되지 않으며, 보는 순간 다시 되돌이표를 찍기 위해 한 번 더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확실하게 말하여 1번 보고 100% 이해하기란 어려운 내용이다. 여러 가지 숨은 작품 내의 설정도 그렇겠지만, 용어자체와 그리고 용어 중에서 지명이나 음식, 가게 등과 같은 문화적인 배경에서도 그렇다. 특히 펍(Pub)이란 Public House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에 아예 이해할 수도 없었고, 단지 그곳에서 무얼 하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단순히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알기까지도 마지막 부분에 가서 대략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광장이나 거리, 교량과 학교(그런다고 캠브리지대학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 많으며, 전에 내가 읽어본 도서인 <극단의 시대>의 저자가 에릭 홉스봄이 캠브리지대학 출신이다)들도 그러하고, 음식문화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하천이 지형학적, 기상학적, 달의 만유인력 등의 자연적 조건에 따라 갑자기 높은 파도가 일어나 서핑을 좋아하는 mania들이 타러 오는 것조차 말이다.

 

그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여기는 한국이고, 그곳은 분명히 영국이며, 영국 중에서 수도인 런던이라는 점이다. 영미문학을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나, 이번 문학을 영미소설을 읽어본 것들 중에서 가장 현대적이었으나, 가장 현대적인 감각이 오지 않았다. 예전에 읽어본 <스노우 맨>이란 소설은 북유럽 소설이었으나, 그래도 북유럽 특유의 기상과 지형, 그리고 조건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읽는데 그렇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영국이란 나라가 한국에게 그렇게 낯선 국가인가?

 

영국이란 나라는 영어를 사용하고, 거리상으로 상당히 먼 곳에 있으나, 한국과 많은 교류를 나누고 있는 국가 중에 하나다. 개인적으로도 영국의 old pop song을 좋아하며, 유럽에서는 역사학이나 철학, 경제학에 대해서 매우 깊이 있는 학자들을 배출하기에 영국이란 나라가 반드시 동떨어진 국가라는 생각을 하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보면서 이렇게 영국의 영어가 한국어로 번역되어도 어렵게 느꼈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도중에 나온 대사는 너무 짧고, 1인칭 주인공이 토니 웹스터의 독백과 사유로 통해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서 시작하여 대학에 들어가고, 그리고 결혼하여 수지를 놓고, 수지를 놓은 마거릿과 이혼을 해도 가끔 종종 만나 식사와 대화를 나누고, 그런 동안에 수지는 결혼하여 토니의 손자를 놓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토니와 같은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딱히 생각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명제가 딱하고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 명제가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상당하게 복잡하다. 상황적 서술이 친절하지 않고, 토니는 계속 의문을 갖고 혼자 생각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예전의 여자 친구인 베로니카 포드에게 찾아간다.

 

베로니카를 찾는 것은 이 문학에서 가장 활발한 시절의 토니가 아니라 머리가 모두 빠져버려 흰색의 머리카락이 빠져 대신 흰색이라고는 침침한 눈 위의 눈썹이었을 토니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베로니카는 예전의 헤어스타일이 많이 변함없는 흰색머리를 가진 노인이다. 서로 만난 노년의 2사람에게 그 어떤 달콤한 로맨스나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힘든 기대감이다.

 

결론은 2사람이 서로 메일을 주고받고, 다시 40년 만에 만났던 점에서 이 문학은 결코 좋은 이야기로 끝맺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주인공 토니는 고등학교 친구인 에이드리언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에이드리언의 여자 친구이던 전 여자 친구 베로니카에 대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작가가 옥스퍼드대학교 현대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그런지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토니카 처음 에이드리언을 만날 시점에서 친구 4인방이 즐겨 읽던 책에 대해 나는 생각해보았다.

 

논리적인 사고와 차가운 말을 할 수 있었던 앨릭스는 버트런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존재감이 떨어지는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작품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찾아가던 토니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 마지막으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에이드리언은 알베르 카뮈와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었다. 문제는 이들이 읽은 서적 중에서 대부분 대학전공자들도 처음에 어렵게 생각하는 책들이 많다. 이미 고등학교부터 기라성과 같은 근현대 철학자를 읽은 시점에서 작가가 많이 어려운 생각을 하는 점을 느꼈다.

 

그나마 토니의 조지 오웰은 나은 편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나 <동물농장>은 많은 유명한 도서고, <동물농장>은 중학생에게 추천하는 책일 정도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의 조지 오웰은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토니가 읽은 도서 중에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있다는 점을 간주해보면, 토니는 확실히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1960년대 영국에서 자신이 하던 행동 중에는 베로니카와 헤어진 이후 미국에 가서 애니라는 여자와 만나 여행 동료와 더불어 침대 위에서 같이 땀을 흘리던 사이인 점을 보면 말이다.

 

그런 작가와 토니의 입장에서 1960년대 말에는 이른바 월남전이 발발했으나, 소설에서는 월남전 이야기는 없고, 시간이 흘러 다시 귀국할 때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말만 나온다. 그가 캠브리지대학의 우수한 학생이고, 게다가 전공이 윤리학이란 점을 말이다. 에이드리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토니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았고, 왜 죽었으며, 그 원인은 찾아보면 결국 자신의 여자 친구였으나, 마지막의 에이드리언의 여자 친구인 베로니카가 원인이었을 것이라 여겼다. 고등학교 시절 우수한 모범생과 뒤틀린 없는 심보 없는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살은 에이드리언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었다. 손목을 가로가 아닌 대각선으로 베어 과다출혈사로 사망하고, 목욕실 문에 친구들이 들어오지 말고, 경찰을 불러오기를 바랐으며, 혹시나 자신의 자살로 다른 이에게 피해가지 않도록 유언장 같은 것도 만들었다.

 

빈틈없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것이 토니에게 엄청난 충격이고, 그 원인은 누구에게 있냐는 점이다.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가면서 토니의 모습을 보면, 그가 단순한 성격은 아니나 그렇게 감이 좋은 인물이 아닌 자를 알 수 있다. 대학시절 베로니카의 집에 가서 베로니카가 야한 꿈을 꾸라는 말을 듣고 1분도 안 되어 손님용 방에 있는 세면대에 자위하여 사정하던 토니가 노년에는 그런 혈기왕성하기보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해 작은 봉사활동을 한다.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하던가? 인간은 자기의 과거와 다르게 살아갈 선택이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현재는 나는 과거의 나로 인해 형성된 시간적 축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토니의 그런 과거의 모습에 대한 성찰과 분석, 현재는 그런 과거에 의해 축척된 주변 사람들과 현상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여 베로니카를 만난다. 왜 에이드리언은 자살을 했었는가? 처음에는 잭이란 베로니카 오빠에게 메일을 보내고, 다음에 운 좋게 베로니카와 만나게 된다. 그 원인은 500파운드라는 유산이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죽고 나서 자신에게 유산이 왔다. 그런데 그 유산 중에는 에이드리언이 일기가 있을 터인데, 일기는 베로니카가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러니 토니는 베로니카에 대한 과거 자신의 감정과 더불어, 친구이던 에이드리언의 죽음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유일한 증거이고, 재산인 일기장이 없어진다는 것은 시간을 기록한 매체가 사라지고, 에이드리언의 죽음은 영원히 자신의 의문 속에서 끝내 자신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거를 찾는 것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깊은 아픔과 고통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베로니카는 계속 포드라는 성을 따라했는지?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죽음을 무엇을 말하는지 말이다.

 

마지막에 가면 토니는 과거 에이드리언과 유사하게 생긴 남자를 발견한다. 키가 크고, 눈 밑에 뭔가 생기가 없는 남자를 말이다. 나이는 대략 에이드리언과 죽은 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말이다. 그는 정상인이 아니라 약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다가간 토니는 그의 어머니와 친구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면 토니는 포드 성을 가진 베로니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물론 그 남자의 이름은 상세하게 나오지 않아도 아버지가 사망할 경우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유럽의 이름 짓기이니 말이다.

 

그러나 생각은 다르게 되었다. 아니 제목과 더불어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와 다르게 예감은 오히려 다른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 남자의 어머니가 베로니카가 아니라 베로니카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에이드리언의 죽음은 결국 베로니카가 원인이 되었지만, 그 직접적 원인은 베로니카의 어머니에 의해서다. 젊은 여자가 아이를 임신한 게 아니라 젊지 않고 중년의 여성이 아이를 임신했다면, 아이의 건강상태는 매우 위험했을 것이고, 또 생각하면 에이드리언 죽음 이후 베로니카의 아버지 역시 술을 지나치게 마셔 몸에 문제가 일어나 사망한 점을 보면, 계산은 맞아 떨어진다.

 

윤리학을 전공한 에이드리언이 왜 그런 자살을 선택했는지 말이다. 그는 전형적인 윤리학을 전공한 모범적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왜 자살을 하도록 만든 그런 행위를 했을까? 에이드리언에게 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았다는 과거경력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같이 사는 에이드리언에게 어머니와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은 에이드리언이 있기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 가면서 그에게 제대로 맞이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은 베로니카의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 에이드리언에게 따뜻하게 해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작품의 요지와 작가의 의지가 나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친구가 수학과 물리학을 잘 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수학과 물리학의 정답은 오로지 1개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국어 중에서 문학과 과학 중에서 비전형적인 사회과학의 경우에는 답이 하나가 아니다. 문학소설에서는 관점을 다르게 볼 수 있고, 사회과학은 관점과 사회적 조건까지 달라붙으면 답은 그 이상으로 복잡해진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죽음에서 보이는 것은 그가 느낀 죄책감이고, 그는 자살로서 마감한다. 문제는 그의 도덕군자 요소에서 그의 자살은 비겁한 도망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아들은 장애를 안고 태어나, 계속 어른이 될 때까지 타인의 보호와 요양을 필요로 하나, 예산이 부족하여 봉사자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피가 묻은 돈”에서 만약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사귀지 않았다면? 그런 전제를 형성하려면 베로니카에 대해 토니가 에이드리언과 만나지 않게 했다면? 아주 미묘하고 단순한 일들이 하나의 거대한 풍파로 이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오이디푸스도 길거리를 가다가 시비로 라이오스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그는 두 눈을 찌르고 방랑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와 그의 어머니에서 태어난 4남매도 비참한 운명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 윤리, 도덕, 규칙, 정의 등과 같은 깨끗하고 좋은 말을 외치나, 오히려 우리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고, 심지어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경우가 참 많다.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는 토니가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서로 사귄다는 편지를 받고, 이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에 의한 증오가 하나의 글이 되어 편지로서 그들에게 갔다. 온갖 멸시와 증오, 그리고 다시는 친구들과 재회하지 못할 것 같은 악의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 편지의 악의가 담긴 내용은 이미 현실에서 더 심한 비극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악의가 담긴 편지가 오히려 토니에게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행한 악의도 결국 그 순간만큼은 자신에겐 정의로 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조차 인지하여 반성하고 사과할 수 있는 것도 큰 용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예감을 틀리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