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그 제목이 나온 것은 페이지 258~259 사이였다. 그것은 이 소설인 마리암과 더불어 전형적인 아랍미인이던 라일라에 대한 이야기에서였다. 그녀는 매우 지적이고, 의식 있는 아버지와 매우 격정적인 어머니를 둔 어린 시절에서 자신의 아버지 바비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하루 종일, 카불에 관한 한 편의 시가 머리에 떠돌더구나. 사이브에타브리지라는 시인이 17세기에 썼던 시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고 /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으리.’ 전에는 전체를 다 외웠었는데 지금은 두 줄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란 제목적 의미를 생각하면, 지금은 비록 어렵고 힘들고 괴로웠지만 언젠가는 좋은 날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숫자적 의미로서 천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 보통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할 때, 천군만군이란 말도 사용하고, 백과사전이란 말과 백가지를 의미하는 사전도 있다. 결국 백(百)이란 숫자는 매우 많고 많은 것을 의미하고(서양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디드로 위주로 저술한 백과사전도 그런 의미), 천과 만도 결국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천과 만은 높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인간의 수명이 길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구수가 많지 않았기에 숫자적인 관념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태양은 지구에서 하나 뿐인 존재이고, 천 개의 태양은 1,000일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에서 나오는 지붕 위의 희미하는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다는 것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어두운 현실 앞에 언제까지나 그것만이 되풀이 되는 게 아니라 분명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소설에서 첫 부분은 주인과 하녀에서 태어난 마리암이란 소녀로 시작하여, 마리암이 반강제적으로 결혼하면서 정착된 장소 인근에 살던 라일라를 만나고, 이 둘은 서로 이웃이었으나, 잔인하고 끔찍한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라일라는 마리암과 함께 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난 사람이 있었는데, 에릭 홉스봄이란 영국 사상가 겸 역사학자로 그 저술한 서적 중에서 <극단의 시대>라는 도서가 있고, 또 뒤에 <폭력의 시대>라는 서적이 나왔다. 극단의 시대는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로 위장한 관료주의와 비밀경찰국가, 자유주의라는 이름 앞에 시장지상주의의 대립이었다.

 

특히 이 둘의 대립된 이데올로기는 각종 민폐를 일으킨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쿠바와 남이의 피바람,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인 아프카니스탄도 피할 수 없다. 그곳은 소련에 의해 침공되었고, 소련의 저지를 위해 민족중심적 이슬람 세력과 더불어 자유주의 진영에서 무기와 세력을 지원받았다. 그래서 처음에 이슬람에 의해 지배되던 아프카니스탄에서 여성이 사회생활하고,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자신의 의지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여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소련의 침공으로 인해 여성들에게 교육과 직업 그리고 사회적 참여권이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대신 이슬람 세력과 소련군의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가고, 그런 과정에서 1990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소련군은 모조리 그 땅에서 흩어진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무기가 쥐어져 있고, 자신들이 전쟁에서 했던 것만큼 현실에서 이상적 가치 대신 실리적인 욕망으로 가득했다. 여자들의 얼굴을 가리고, 여자들이 어디를 갈 때 혼자서 가지 못하며, 병원에서 임산부가 출산하는데도,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반시대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시계는 21세기로 가고 있는데, 이슬람 탈레반의 행동들은 구시대로 가고 있다.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어렵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면 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남편 라시드의 폭행과 학대행위를 참을 수 없어 도망치려 했지만, 붙잡혀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결국에는 라시드를 살해하는 경지에 이른다. 마리암의 서명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처음에는 억지로 끌려 결혼하여 혼인증명서에 사인하는 모습을, 다음은 감옥에서 재판받고 사형선고에 사인하는 것을, 그녀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하라미라는 천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어머니 나나가 자살 후에는 라시드의 폭행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자신의 인생에서 즐거움이 없었다.

 

그런 마리암이 유일한 희망인 라일라의 딸 아지자였다. 아지자만이 마리암을 따라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기에 마리암은 라일라가 처음에는 미웠지만, 라일라와 아지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라시드를 죽였고, 그녀는 AK47 소총이 자신의 머리에 겨냥되는 것을 인지한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살면서 제대로 좋은 인생을 살지 못했다. 그저 나나하고 살던 때가 제일 행복한 편이다. 그런 고된 생활에서 죽음은 최악의 고통이며,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 나는 신이란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 유신론적인 가치는 인정하나, 신이란 결국 오만한 인간에 의해 멋대로 이름이 팔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리암에게 알라신은 무엇을 주었는가? 차라리 나나와 살 때 친절한 늙은 파이줄라의 가르친만이 진실한 알라신이 존재했다. 알라신은 모두에게 자비롭고 위대하다고, 그러나 현실의 알라신은 파괴와 암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가면이었다. 사실 그런 점은 이슬람만 아니라 십자군 원정과 레바논 전쟁, 나치의 행위들처럼 거대한 종교가 거대한 파시즘의 자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슬람권의 그런 비참한 이야기는 이미 사트르피 마르챤의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어느 정도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문당하여 죽고, 여자들은 억압당하고, 어린 아이들은 이슬람과격 테러조직에 가서 자살요원이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프카니스탄의 비극적 이야기를 다룬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보면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나름 이렇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고, 그런 것이 소설 속에 이루어진 점이 씁쓸했다. 그래도 제목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만큼 마지막은 불행 중에서 찾는 행복은 있었다. 천 개만큼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나, 그것을 만들려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911 미국 테러사건이 생각났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같은 소설을 읽을 때 조금 아픔이 아프고, 불편한 이유는 항상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되는 보복과 가해행위는 본래의 당사자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들에게 간다는 것이다.

 

911 테러사건에서 죽은 사람들과 피해 받은 사람은 모두 민간인이고, 대부분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기의 생활에 충실하게 보내려던 시민이었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주의로서 합리를 넘어 합당한 가치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그 본인에게 충실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 자들이 테러를 당했고, 항공기 안의 승객들도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인간의 극단성은 결국 폭력으로 변질되고, 인간의 폭력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하나의 정의라는 것이다. 정의의 실현은 결국 폭력에 의해 수반되는 것이다. 폭력을 멈추기 위한 폭력이 진정한 폭력을 위한 명제이나, 우리는 폭력으로서 이익이나 이권 그리고 명제로서 사용한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아쉬운 점은 바로 그런 요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사람들, 로켓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사람들, 총을 맞는 사람들, 남편에게 가혹하게 맞는 여자들,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가 슬픈 비극이다. 하지만 비극의 씨앗은 결국 어디인가? 물론 작가의 입장서 난감한 입장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과격테러리스트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폭력적 지배행위를 저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어디서부터인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단지 이런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동조하는 것보다 왜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역사는 두 번 반복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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