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병 데이즈 4 - Seed Novel
김월희 지음, nyanya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중2병 데이즈 4권>은 지금 일어나는 일보단 지금보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던 시리즈였다. 전에도 예상을 했지만, 흑련의 어머니가 조직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연오의 선배인 자오, 그리고 그 자오의 선대의 갈까마귀왕이란 사실을 인지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인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이란 모든 것이 현재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그 현재라는 존재적 구성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시간적 축척이 필요하다. 인간이 가진 물질적, 정신적, 심리적 조건과 재산들은 모두 과거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현재 자신이 어느 것을 소유한다고 하여 방금 1분 1초 만에 갑자기 태어나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1분 1초가 수 없이 쌓이고 쌓여 구성해온 하나의 시간의 축척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시간에 의해 형성된 자신이 결국 앞으로도 이루어질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순간적으로 바꾸는 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버리거나 혹은 그 이상의 반란을 일으켜야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혁명(revolution)이란 단어는 evolution에서 r의 단어가 붙은 것이다. 진화와 혁명에서 진화는 단지 그 자체적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혁명은 앞에 나가는 것을 위해 모조리 뒤엎는 것이다.

 

혁명이란 말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지배계급이 무너뜨리는 행위로서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혁명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반드시 그런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다. 혁명은 자기만의 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연오가 처음 기관에서 린을 데리고 세상으로 나온 것과, 한아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흑련을 발견할 때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혁명적인 삶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생활을 깨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간부로서 명성을 날리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니라면 조직과 기관하고 아무 상관없이 자기 자신은 오직 스스로 행동하기를 살아갈 것인가? 인간이란 어려운 존재다. 단순히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그것도 아직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는 중2병(물론 그들 나름 세계는 아니겠지만)들을 소재로 만들었으나, 여기에는 엄청난 숨은 의미가 있다. 작가인 김월희 씨의 작품 중에서 <세계 최고의 여동생님>을 읽은 후에 <중2병 데이즈>를 읽었지만, 라이트노벨이란 재미위주의 스토리텔링 안에도 그 어떤 담론이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이번 편에서도 작가는 은근 어려운 말과 단어를 꺼내 놓는다. Meta-physics, 형이상학(形而上學)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도서제목이고, 거기에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요소를 탐구한다. 물리학인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physics에서 meta라는 것을 어두에 붙임으로서 우리가 눈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혼이란 것도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던 플라톤이,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만들면서 철학을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고, 육체는 소멸하나 영혼은 영원하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그런 후에 질료라는 단어를 제시하여 어떤 이데아로서 추구하는 형상 내지 사물에서 그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리적 도구(그러니깐 조각품을 만들기 위한 나무, 돌, 금속 등등)를 언급한 점이다. 린이 연오와 같이 임무를 맡으면서 심한 부상을 입자, 연오는 자신의 영혼의 일부를 린에게 부여한다. 원래 2사람은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니었고(아니 원래 인간이었는데, 개조되었는지도 모른다.), 연오의 몸은 기계로 된 골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에게 혼이 있다는 점이다. 혼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고, 그것이 정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늘 의문이나, 우리(모두는 아니지만)는 신의 존재성을 있다고 믿는 관념적인 종교관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연오와 린에게 자신이 존재하는 삶이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육체는 소멸하나 영혼은 살아있다. 린에게 연오의 혼이 이식되자, 린의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단지 린이 연오에게 많은 애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지했다. 그들은 친남매가 아닌데도, 린은 연오의 친남매처럼 느꼈고, 가족의 인연이란 육체적인 동질성인가? 아니면 영혼의 공유성인가?

 

중요한 점은 연오가 자신이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삶을 인지할 수 있게 된 동기는 린의 등장이다. 그녀는 아직 어리고, 세상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위에 죽음을 면치 못할 부당함에 연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켰다. 만약 그런 계기가 없다면 계속 마술사킬러로 활동하다가 자기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조직기관 내의 임무일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행복할까? 형이상학이란 단어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읽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그 인간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연오는 자신의 조직에서 갈까마귀왕으로서 매우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염없는 허무함과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것은 연오 이전에 자오가 그랬으며, 자오 이전의 한아도 그렇다. 그래서 그들이 거기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시간의 축척만이 해결되지 않았다. evolution처럼 연오와 자오 역시 모두 진화했다. 신체적 능력과 경험이 없을 때에는 모두 초짜였으나, 어느 순간 킬러로서 진화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진화라는 시간적 축척에는 삶의 의미가 없었다. 다시 진화의 진화라는 반복에서 revolution이 되어야 했다.

 

그게 바로 연오의 고교데뷔이고, 한아는 기관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만약 연오가 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 한아가 흑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흑련과 한아의 만남은 최악의 사건이었고, 연오와 린의 만남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흑련은 한아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고, 린은 연오의 방패막이로 죽을 뻔했다. 죽음이란 극단적 상황에서 이들이 찾은 길은 죽음과 삶은 같이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이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삶을 찾거나 또는 삶을 주는 것이야 말로 이들이 택한 새로운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 택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바뀌어도 그 상황 자체가 좋아지거나 조금 더 희망적이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연오는 한아의 말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온다. 잿빛 투성이 세상,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자신이 발버둥을 쳐도 계속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그런 곳, 그렇지만 흑련에 대해 연오는 “언제까지고 세상이 반짝거릴 거란 믿음을 잃지 않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그 녀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게만 느껴졌다.”라고 생각한다.

 

찾을 수 없는 세계, 그리고 결코 닿을 수가 없던 세계, 예전에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라는 작품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 작품의 여자주인공은 경력이 오래된 영화배우이다. 작품 시작시점이 이미 머리에는 흰머리로 가득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져있지만, 왠지 모르게 우아한 기품과 따뜻한 분위기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은 배우였다. 그 배우는 자신의 첫사랑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결국 그 첫사랑은 형사에게 추적당하다가 결국 운명을 달리한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비보를 접하고도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를 향해 찾아가는 자신을 더 사랑했다고 말이다. 닿지 않은 것에 대해 하염없이 찾아가는 것은 왠지 슬프고 허무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닿지도 못한 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비효율적인 형태이며, 결국 그것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 물론 <중2병 데이즈 4권>에서는 그렇다고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아가 살해했던 흑련의 친부모가 고급마술사 아버지와 평범한 여성이란 점에서 그녀가 흑련에게 저지른 죄악은 흑련을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의 과거라는 시간에서 숨길 수 없다.

 

그래도 흑련에 대한 애정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보일 새로운 빛을 만들려 했다. 전에도 <중2병 데이즈> 시리즈를 리뷰하면서 인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괴로움을 맛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적인 조건에서 그것을 눈치 채기도 어렵고, 아니라면 너무 그런 자신들의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려 떠오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결부지어 판단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자신의 길은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중2병 데이즈 4권>에서는 그런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이야기해준다. 잿빛으로 가득한 세상에 그냥 그렇게 우리는 세월이 흘러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중2병 데이즈>에서는 우리의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거기에다가 연오가 처음 고교생활의 꿈을 준 <두근두근 스쿨 라이프>라는 왠지 미소녀 연애를 소재로 한 만화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참고로 작품 내에서도 그 만화책의 작가가 “정작 고등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 하지만 환상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연오가 자오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나, 막상 자오를 뛰어넘어 갈까마귀왕으로 되는 것과 자오가 한아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나, 막상 한아를 뛰어넘어 갈까마귀왕으로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란 자신의 목적이 정해져 있어 어느 순간 되어버리면 자신의 목적이 없다.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행복인지 아니라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그 길이 행복인지 어느 것이 정답일까 생각하기 어렵다. 적어도 연오나 자오나 그들이 동경한 자가 되기 전에 그들을 향하여 힘겹게 살아간 것은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했을 뿐이지 그것은 단 한 번의 과정이다. 두 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 처음 도시로 나와 추운 아파트에서 연오가 린과 서로 안아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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