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이이 제국 일본 - 세계를 제패한 일본‘귀요미’미학의 이데올로기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장영권 옮김 / 펜타그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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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화를 알려고 한다면 단순히 대중문화나 또는 유명명소를 보기보단 차라리 하위문화로 보는 것이 좋다. 인간의 근본이 나오고 사소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하위문화로서 상위문화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새로운 바람에서 그 결정적인 계기가 나오는 것 은 대중문화에서 나올 수 없다. 이미 고정된 클리셰와 매너리즘에 의한 방법은 새로운 것을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유지되기만 한다. 그런 점에서 고급문화 내지 저급문화 또는 하위문화에 들어있는 다양성은 새로운 히트의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대중문화를 넘어 거기에 숨어있는 문화적 의미를 알려면 결국 하위문화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하위문화로 간다고 하여 하위문화만 보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기존문화와 전통문화 그리고 외래문화까지 결합된 하나의 콤플렉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와이이 제국 일본>을 읽는 것은 단순히 일본 내의 하위문화를 알아가는 과정일까? 전혀 아니다. 그것은 하위문화로 통해 보는 일본인들의 문화적 특성과 그 속에 숨어있는 그들의 성향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형적인 성향을 밝힘으로서 현대 일본인들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 뒤에 나와 있는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교수로 계시는 이택광 교수의 소개추천이 인상적이다. “‘가외이이’를 알면 일본이 보인다. ‘가와이이’ 현상이 일본을 대표하는 상품미학으로서, 그리고 글로벌화한 세상에서 강력한 신화로서 군립하게 된 사정과 그것이 지닌 이면을 역사적, 정치적, 성적 맥락에서 천착한 이 책은 한국의 대중문화 연구자에게 뛰어난 전범이 되리라 확신한다. 물론 일본 하위문화에 열광하는 수많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문제의식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서이면서도 내용에 저도 모르게 빨려들게 하는 지은이의 필력 또한 매력적이다.”

 

책을 읽는 순간 모에라든지 가와이이라든지 그런 말이 여기저기 튀어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모에는 결국 가와이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든다. 미소녀에 빠지게 되면 그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인 요모타 이누히코는 인문학자로 일본의 전통문학과 근대문학, 일본의 태평양전쟁 이후의 이야기까지 풀어 넣는다. 그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문화라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느 기회로 통해 계속 변화해 가기 때문이다.

 

가와이이라는 것은 과연 어느 것인가? 일본에서 가와이이라는 단어가 귀엽다는 것도 되나 일본어를 전문적으로 구사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가와이이의 발언을 잘 못 들으면 귀여운 것이 아니라 불쌍한 것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최근 2014년 일본애니메이션 중에서 <우리 모두 카와이장>이란 작품이 있는데, 가와이라는 것이 귀여운 것인지 아니면 불쌍한 것인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카와는 강을 의미하는 하(河)로 나온다.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귀여워 보인다. 그것이 가와이이의 시작인 것처럼 보였다.

 

가령 우리는 너무 완벽한 사람에 대해 심적으로 부담스럽고 친해지기가 어렵다. 너무 깔끔한 결벽증이 다소 강한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기 어렵다. 뭔가 인간으로서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소의 약점이 필요한 것이다. 약점이 많은 인간이기에 그 공간을 틈새로 같이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사람이 때로는 안타까워 보이고 거기에 대해 뭔가 잘 해주고 싶다는 생각, 그것이 가와이이의 시작이고, 모에요소의 하나이다. 너무 완벽하면 다가서는 것도 부담스럽고,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 것도 없어진다.

 

가와이이에서 왜 미소녀 캐릭터가 좋은 것일까? 그들은 어딘가 약해보이고 부족해보이며, 너무 강한 여자라도 어느 부분에서 매우 약하면 그게 하나의 모에요소로 될 수 있다. 모에요소는 애니메이션, 만화,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이 현실적에서 존재하지 않은 존재에 대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이 그 캐릭터에게 마음을 품는 것이다. simulacre 즉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것처럼 모에 대상은 현실에는 없는 존재나 마치 현실에 있는 존재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형성한다.

 

미소녀 캐릭터에 보이는 가와이이는 결국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그 부족함이 일본의 미학과 무슨 관계인가? 미학에서 일본은 유미주의적인 것도 있으나 빈틈의 미학이 있다. 즉 가득 차는 것보다 다소의 빈 공간을 만들어 여유라는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국화와 칼을 지나 소우주적인 공간을 추구함에서 화(和)라는 사상을 위해 여유적 공간을 만드는 것은 미백의 미학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일본 다실에 작은 다다미방에서 있는 것은 작은 꽃병 하나에 다구와 몇 권의 책이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작은 방에 창문을 열면, 햇살이 따듯하게 비추고 시원한 바람이 불며 새소리가 지저기는 아름다운 화음에 곧 방을 채우게 된다. 아무 것이 없기에 채울 수 있는 미학, 가와이이 미학은 부족한 대상에 대하여 채워주고 싶은 마음, 즉 그것이 하나의 상품전략이라 볼 수 있다. 일본 소녀들에 대해 이런 말이 기억난다. 일본에서 여고생은 최고로 높은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여고생들의 문화에서 가와이이적인 요소로서 그들은 자신을 꾸민다. 귀여우면서도 뭔가 마음에 이끌릴 수 있도록 말이다.

 

모든 여고생들은 아니겠지만 여고생들이 자주 구매하는 인기잡지의 콘텐츠를 보면 여고생이 원하는 것과 혹은 하나의 스펙타클로서 그들을 상품적 전략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서적들이 계속 발매되는 점에서 일본의 가와이이 문화는 나이와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초반 소녀들은 최대한 귀엽게, 20대는 자기중심의 사랑인 나르시시즘 자세, 50대는 여유라는 것으로 통한 포용력에서 각자의 나이에 맞는 가와이이를 실천한다. 가와이이 문화는 나의 주도적인 개성보다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쉬운 도서가 아닌 점을 밝혀두는 이유는 중간마다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의 이론이 등장하는 점이다. 가령 이 책을 본다면 가와이이 현상에서 보이는 일본 여성들에 대한 점은 자크 라캉이 말하는 “우리가 사물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욕망은 정지하지 않고 움직인다. 욕망은 끊임없이 부인될 수 있지만 지속되는 것이다.”, “욕망은 몸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인간적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욕망되기를' 원한다면, 아니, 그의 인간적 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가치를 위한 욕망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진정 '인정(recognition)'을 욕망하는 것이다.”

 

가와이이 문화에서 현존하는 여성들에게 욕망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함을 보여주기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런 여성들에 대해 환상적인 요소를 극대화로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기에 상상적 존재로서 현실을 대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부족함에 대한 동정심 내지 혹은 거리감이다. 이 책에서 일본 근대문학가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인용하는 게 인상적이다.

 

방과 후에 ‘나’는 친구인 긴코와 함께 미장원에 몰래 간다. 그런데 새로 한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아무래도 귀엽지(가와이이)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친구 긴코가 들떠서 “이대로 맞선에라도 나가볼까나”라는 식으로 말을 하기에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귀여운(가와이이) 사람”이라는 느낌을 품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저녁노을이 진 하늘을 물끄러니 바라보다 아버지 생각이 났고, 기분이 고양되어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라고 읊조린다. 집에 돌아와 보니 키우는 개 자피가 우물가에 떨어진 보리수 열매를 먹고 있기에 “갑자기 깨물어 주고 싶어질 정도로 자피가 사랑스러워(가와이이)”진다. 이번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대목은, 그 뒤 자기 방에 돌아간 ‘나’가 거울 보고 말하는 감상이다. 그 뒤에는 ‘나’는 부엌에서 쌀 일며 “어머니가 애처롭고(가와이이) 안타까워서 소중하게 대해 드려야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한다” 그녀가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드는 대목에서 이 단편은 끝난다. <여학생>은 짤막한 단편이지만 “가와이이”와 관련된 다양한 용례가 등장한다.

 

결국 가와이이란 단지 귀여운 것일까? 보기 좋은 것이 아닌 그로테스크적인 요소에서도 가와키모로서 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가령 한스 밸머의 작품에서 무참히 부서진 인형들을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가와이이란 미의 미학과 더불어 추의 미학이 동시에 숨어 있다. 왜 이런 것일까? 일본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하다. 강한 만큼 개인에 대한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나, 집단적인 생활에서는 매우 예의바르고 튀지 않은 행동을 하려 한다. 그런 집단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벽은 하나의 욕망적인 대체물로서 가와이이라는 문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즉 가질 수 없는 인간관계에 대한 대체물로서 가와이이라는 단어적 현상이 생기고, 거기에 맞게 문화를 조성해 가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격식에서 일본에선 같은 동급생이라도 여자에겐 성씨 뒤에 상(氏)을 붙이고 남자 뒤에는 군(君)이란 단어를 붙인다.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성으로 부르지 아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친분이 생기면 이른 뒤에 Chang이란 단어를 붙이지만 어른의 세계에서는 정말 위험한 일이다. 결국 누군가에게 마음을 쉽게 열어줄 수 없는 사회적 문화인 점에서 가와이이 현상은 자신만 열어주고 싶거나 또는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자리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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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세계에서 과연 몇 위나 될까? 예전에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하시는 한창완 교수의 <애니메이션 경제학>이란 도서를 보았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2004년 정도였고, 2003년까지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진 도서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경제학인 만큼 책의 내용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과 더불어 경제학적인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왜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2004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14년에 오면서 세계 애니메이션시장 규모가 달라졌지만, 당시 한국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애니메이션 시장규모는 3위였다.

 

3위라는 규모를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하다. 왜 3위인데 이렇게 힘든 것일까? 애니메이션영화 <고스트메신저>를 극장에서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생각으로부터 버릴 수가 없었다. 우선 <고스트메신저>가 예전에 OVA로 출매 되었을 때 나는 DVD-CD를 구매하여 감상하였다. 감상하면서 느낀 점은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유아 내지 아동용이었고, 그 외는 인디애니메이션 내지 블랙코미디라는 성인용으로 제작되는 흐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토리텔링으로 보아도 너무 뻔해 보이는 설정 내지 혹은 현실에 대한 강한 염세적인 비판이 녹아 들어간 것이다.

 

물론 후자에 대해서는 좋은 작품이 많았다. 예술이란 것은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서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인용한 것처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라 하여 보기가 거북한 그로테스크를 연출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들 이상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는 성적인 요소보단 폭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 폭력성에는 이른바 현실적으로 도저히 쾌감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추의 미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추의 미학에서 보일 수 있는 미적인 영역이란 우리가 볼 수 없거나 보지 않으려한 것에 대한 성찰이다.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란 헤겔이 말한 변증법인 부정과 부정에 대해 결국 틀어진 것에 다시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것, 즉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안이란 딱히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만든 자나 보는 자나 다 같이 생각하고 찾아가야 할 또 다른 방향이다. 우리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바로 부정의 부정이 긍정으로 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부정으로 가고 있었다. 지난 1970년대 만화분서갱유부터 시작하여 2000년대 애니메이션 시장의 몰각에서 시장경제는 좋아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런 어둠의 시기에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도전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인 만큼 우리 주변은 대부분 일본 만화애니메이션과 혹은 미국 애니메이션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시장규모는 누구의 문제일까? 독자의 선택권이란 결국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고, 그 물건을 구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구조와 여건이다. 사실 작품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한국애니메이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담론을 꺼내는 것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과정적인 현상에 대해 논하려면 결국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현재를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고스트메신저>를 OVA로 보고 난 뒤 극장에서 보면서 매우 놀란 것이 있다. 처음 바리낭자가 나오면서 그녀가 손에 잡고 있던 신문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신문은 다른 신문도 아닌 바로 한겨례신문이었던 것이다. 한겨례신문은 한국 언론문화에서 진보성향이 강한 신문사이다. 굳이 신문사의 이름을 표기할 필요가 없고, 하다못해 다른 신문사를 만들어 이름을 내세우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겨례라는 검정글씨가 녹색 사각형 안에 명확히 새겨진 것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의 의도? 아니면 감독의 지시? 분명히 편집과정에서 그것을 놓칠 리가 없을 터이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여전히 탄압을 받고, 철저히 검열을 받았던 매체다. 최근에 발매된 만화비평지 <엇지>에서도 다루고,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에서 나온 <만화비평>에서도 그런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화문화에 대한 비평과 성찰에서 한국 애니메이션문화가 같이 엮이는 것은 당연하다. <고스트메신저>를 보면서도 이런 상황을 열외로 둘 수가 없다. <고스트메신저>에 대해 내가 내놓는 평이 나오는 이유도 다 이런 연유에서 발생된 하나의 과정이다.

 

애니메이션이란 것은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만들어지는 하나의 노동집약적 산물이다. 한국에 대다수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은 자국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아니라 OEM 방식으로 일본에서 외주를 받아 작화하는 것이다. 가끔 일본 애니메이션 엔딩 자막을 보면 한국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청으로서 활발한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스트메신저의 엔딩장면에서 일본 TVA에서 나오는 제작팀과 비교가 가능할 정도의 인원이고,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인원과 작업규모는 비교조차 힘들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인력이 있어도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 없고, 제작해도 자본의 융통성에 대해 지지해줄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시장규모가 조성되지 않은 점이다. 작품을 보면서 제일 아쉬운 부분은 더빙과 스토리 전개에서의 부드러운 흐름이었다. 대사와 입 모양이 거의 일치하지 못했다는 점은 기본적인 설정방향이 많이 아쉬웠다. 작화에서 입모양을 못 맞출 리가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전투하는 모습은 참 잘 짜진 플롯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도령의 권총과 강림도령의 칼을 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은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보여주는 전투장면이 생각날 정도다. 정확하게 상대를 향하여 타격하나, 그것을 피하고 연속적인 격투의 장면은 정말 작화가 깨끗하게 잘 되었다. 2D와 3D 영상, 셀 영상과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적절히 조화했을 것이다. 그런 전투 장면에 대한 강력한 스펙타클화는 성공했으나 정작 스토리 진행에서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맺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이다. 장점이 분명히 많고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좋은 인상으로만 남기기 어렵다.

 

애니메이션 역시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갖춘 서사라는 점이다. 서사에 대하여 음악과 영상이란 멀티플레이가 조합되어야 좋은 미디어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스트메신저>가 아까운 이유는 이야기 흐름만 잘 조절했으면, 정말 재미있을 작품이란 점이다. 플롯의 구조에서 복선이 되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 점과 기존 한국에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살리려 했던 것이다. 현대사회가 21세기 정보화시대라는 점을 이용하여 저승사자의 무기가 핸드폰이란 것이고, 영들을 봉인당할 때 디지털 화면을 상징하는 사각박스처럼 변하는 것이다.

 

저승사자가 소환한 것들을 보면 조선시대의 양반의 모습을 한 로봇이 나와 악령을 끌어당기는 모습은 <고스트메신저>에서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유령이 디지털화 되어 잡을 수 있다는 발상은 쉽지 않을 터이다. 영화 <고스트버스터>에서 유령을 잡는 기계라도 그것은 아날로그적인 방법이면 <고스트메신저>는 디지털의 방법이다. 한국인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세계의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까? 한국 역시 서구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침투하면서 동양의 고전적인 문화가 그대로 유지될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외국에 가면 한국인에 대해 Do you from Japan(or china?)라는 말을 얼마 전까지 계속 들어야 했다.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방향을 애니메이션에 담아 그것도 세련한 디지털 문화로 복합적인 영상을 보여준 것은 정말 좋은 방향이다. 등장인물의 무기에서 바리낭자의 핸드폰은 부채처럼 되고, 마고는 곰방대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곰방대는 단순히 무기기능만이 아니라 암호를 모두 해제하는 해킹도구로 나오는 것도 역시 좋은 소재다. 등장인물에서 바리낭자는 저승과 이승을 주관하는 신이고, 마고는 한국의 땅을 만들어낸 여신 중에 하나로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에서 인간과 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던 자가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 채 저승으로 가게 되어 신이 된 점은 한국의 전통문화사상에 매우 부합된다. 애니메이션이란 Anima라고 불리는 영혼에서 시작된 용어다. Animate 혼이 없는 대상에 혼을 넣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존재성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무한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동경심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무한성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다. 유한한 존재에 의해 연속되어 갈 뿐이다. 신화라는 존재가 결국 인간의 유한성의 연속성에 태어난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고스트메신저> 첫 번째 극장판은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하나의 끝은 하나이란 의식이 강림이란 소년으로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이 들여서 안 될 공간을 계속 들어가려고 한다.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망,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인 저승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죽으면 저승에 가서 삼도천이란 곳을 밟게 된다. 과거 인간이던 시절에 시간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마 죽을 위험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종종 주마등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강림소년이 강림도령과 만남에서 실제 한국 신화에서도 강림도령은 정상적인 죽음에 의해 저승사자로 발탁된 게 아니라 사고에 의해 죽게 되어 저승사자가 되었다. 강림소년, 꼬마 강림의 경우에도 삼도천을 지나는 모습은 죽지 말아야 할 자가 죽게 되면서 그의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림은 그런 선택을 해야 할까? <고스트메신저>에서는 단절된 가족에 대한 보상심리 내지 피해의식이 나온다. 꼬마 강림이 학교 내에서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과 필요 이상으로 할아버지에 대하 보호의식, 그리고 죽은 어머니에 대한 악몽은 끊임없이 꼬마 강림을 궁지로 몰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 사회라는 공간은 학교와 직장 같은 하나의 커뮤니티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처음 시작하는 사회는 곧 가족이 존재하는 가정이다. 가정의 해체는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큰 문제점을 안겨준다. 심각한 우울증 내지 과민반응 또는 무관심이다. 꼬마 강림이 선택은 그가 정상인이 아니라 비정상의 영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사의 시작에서 등장인물은 모두 비정상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이어야 정상으로 가야 하는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꼬마 강림과 비밀이 있는 저승사자의 강림도령의 만남은 비정상인 두 인물로 통해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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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대종교 - 한국인의 종교경험
차옥숭 지음 / 서광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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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란 참 묘한 것이다. 당신의 가치관보다 당신의 그 자체를 무엇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국가 중에서 프랑스를 좋아한다. 프랑스라고 하여 모든 게 척도인 게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나온 철학과 사상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 자크 루소의 서적들은 나에게 삶의 관점을 부여한 중요한 사상가이다. 그의 철학자적인 모습에서 개인적 삶은 불우하고 강박관념에 시달린 광인이었을 것이다. 계몽주의사상이 꽃이 피던 18세기 프랑스와 유럽, 그 공간에서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계몽철학자로 등장했으나, 한편으로 반계몽주의자로도 나왔다.

 

루소가 그토록 대립해야했던 볼테르는 지금 프랑스 판테옹 사원에 루소의 무덤을 서로 마주보고 있다. 루소의 철학에 내가 깊이 동의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나 본래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억압이란 사슬에 묶인다. 그러지만 인간이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야할 운명이라고 하여도 인간 그 자체가 자연과 친화되지 마란 법이 없다. 서양의 근대철학은 지금의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만든 근본이 되던 시기다. 헌법의 모든 요소가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온 점을 생각하면 3세기 이전의 사상이 결국 지금도 통용된다. 계속하여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철학과 사상이 발전해도 근본은 변함이 없다.

 

단지 자유주의 철학은 사상에서 비롯되어야 하나 경제적 이권에 의해 분리되는 기묘한 현상에 따라 왜곡되어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사상구조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만든 사상은 없었는가? 그런 보완점을 생각하면 한국 근본적인 철학과 사상에 대해 한 번 관심을 가지는 방법도 좋다고 여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지만, 다른 국가에서 나는 프랑스를 좋아하고, 그 프랑스의 상징은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을 침공한 것이다. 억압에 대한 저항이 곧 프랑스의 정신이고, 자유와 평등이 곧 프랑스의 정신이고, 인간애에 대한 고귀한 정신 역시 프랑스의 정신이다.

 

그런다고 모든 프랑스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 극우청년이 좌파계열에서 운동하는 학생을 무참히 살해했다. 프랑스 옆에는 나치독일의 정신을 살린다고 하는 네오나치가 기어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식 민주주의에서 그것이 민주주의인지 아닌지 참 미묘하다. 토크빌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 정체가 가장 전체주의적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의 표상으로 등장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없다. 헌법에 우리는 민주공화이나, 어느 누구는 주군을 말하고 있다. 주군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사라진 존재다.

 

주군을 다시 살린다면 이성계의 혼을 다시 찾는 것이 옳을 것이고, 그것은 조선을 다시 찾는 것과 같다. 조선이란 말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조선시대의 풍습을 많이 받고 있다. 서양의 사상이나 일제에 의한 탄압이 있어도 주자에 의한 유교문화는 살아있고, 사대부란 계급제도에서 사라지고, 그 계급 대신 자본의 대소로 결정짓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가문의 내력은 존재한다. 집안의 족보나 문중행사도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문화적 잔재를 두고 전통문화로 받아들이고, 서구방식으로 하는 것이 예전의 진보라면, 이제는 그런 진보적 가치가 보수적 가치로 변모되었다. 시간의 흐름에서 과거의 진보가 지금의 보수고, 때에 따라 과거의 전통이 현재의 진보로 돌아올 수 있다.

 

조선이란 국가가 대한민국 최후의 왕국이었으니 그 조선의 이름을 가진 고조선이란 국가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집안 분위기가 어머니, 형, 형수, 형수가족이 불교계통에 가깝고, 나는 천주교를 믿지 않으나 대학시절 성당에 대한 인연이 있다. 종교를 믿지 않은 이유는 종교에서 가장 앞세우는 좋은 일을 함으로 타인에 대한 인간애를 실천하는 것은 합당하나, 단순히 종교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심이 싫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카를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아편의 경우 불치병이나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멈출 수 있게 하는 약이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악이다. 종교란 그런 것일까? 최근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건을 보면서 종교인이 운영하는 업체로 통해 대한민국과 그동안 있었던 망언의 꼬리를 찾아가면 마르크스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교 자체가 없어야 하나? 라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루소의 경우 그는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의 가치로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해야 하고, 그가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종교는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데,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다고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 게 옳은가? 종교란 어느 국가와 민족, 더 나아가 개인과 인간관계, 이와 반대로 세계와 인류에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가? 예전에 나는 종교는 믿지 않으나, 우리나라는 단군신앙이 상당히 뿌리 깊게 있다고 생각했다. 산신 할매나 또는 제사문화가 그렇다. 본래 불교의 고향이 인도에선 조상에 대해 제사가 없고, 공자의 유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 죽으면 죽었다고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내지 하늘로 갔다고 한다. 땅에 매장하는 풍습에서도 양지바른 곳보단 산으로 올라간다.

 

우리는 하늘로 간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곧 산으로 돌아가 신령이 되는 것과 같다. 한국인은 인간이 신으로 되는 종교관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 보면 신은 절대적 1인자이고, 고대 그리스라면 인간이 신으로 되기 때문에 Daimon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종교가 샤머니즘이란 속성도 있지만, 만물의 자연을 아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처음에 루소를 언급한 이유는 루소는 자연주의자였고, 한국의 전통종교사상은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게다가 자연주의자로서 유명한 존 러스킨과 같은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를 본다면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생존을 넘어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는 존재이고, 대자연이란 생명은 하나의 신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전공이 환경 쪽인지 자연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현실의 종교는 믿지 않으나 산이나 강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다. 물론 영적인 존재가 현실에 존재할리 없다고 과학적으로 생각되나, 위대한 자연이야 말로 우리 인간의 정신을 치유하고, 어긋난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다의 파도를 보고, 높은 산의 안개를 보면 우리 인간이 이토록 작은 존재구나 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한국의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는 그렇게 진행되지 못한다. 동학이란 것은 수운 최제우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종교로 서양의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서학 대신 동학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김수환 추기경님이 훌륭하신 점과 지금의 교황님을 존경한다. 내가 가톨릭을 믿지 않으나 그분들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다. 동학이 생길쯤에 국가지도자나 종교지도자가 지금의 교황님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제사문화를 천주교에서 인정하지 않아 마찰이 있었고, 18세 후반에는 남인을 비롯한 신서파 양반들이 받아들였으나, 19세기로 오면서 민중으로 보급된다. 이른바 메시아주의에 의한 구원신앙에서 의해서다. 기복신앙은 한국종교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요소이다. 불교나 유교나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나, 우리는 귀신이 신으로 모시고, 그 귀신은 살아있는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죽음 자체를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란 점에서 내세를 기원하기보단 다시 돌아간다고 하기에 이승에서 죽은 자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로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할아버지라는 개념에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할아버지도 존재하거니와 죽어있는 할아버지를 우리는 다시 찾는다. 만약 2대조와 3대조를 넘어 몇 대조에 계신 분들에 대해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조상에 대해 우리는 모두 돌아가신 분들을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부른다. 그들은 우리에게 신이란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공통적인 정체성을 찾는다면 역시 그 민족과 국가를 상징할 수 있는 무엇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단군할아버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에서 하느님과 대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존재는 다른 듯하다. 천도교는 인내천으로 하늘과 인간이 통하기에 평등하다고 하나, 대종교에서는 신 자체를 할아버지로 본다. 신의 존재 아래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이 토크빌이 바라보는 가치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다른 점은 신이란 존재는 인간과 분리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일하게 이어져 오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신화를 토대로 만든 그리스비극에서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아버지이신 위대한 제우스”라고 말이다. 원래 고대종교에서 인간과 신은 분리되기보단 분리되었던 존재로 본다. 단지 서양에서 분리된 이상 다시 인간이 신이 될 수 없고, 동양에선 인간이 신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동학의 태아에서 태어난 천도교는 인내천이란 구원주의가 강한 종교로 보이고, 이에 반해 대종교는 구원주의적인 요소보다는 항일투쟁에서 시작한 실천주의가 강한 것 같다. 물론 천도교가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대종교에 그 철저한 투쟁의식에 비하면 빛을 보지 못했다.

 

천도교의 죽음은 순교로 볼 수 있지만, 대종교는 순교와 더불어 순국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독립군이 대종교였고, 민족의 얼과 혼, 그리고 역사와 전통을 이어주는 가치관을 대종교에서 시작한 점이다. 일제에서 벗어나 막 새로 시작한 무렵 전쟁이 일어날 때 한국의 언어와 역사를 누군가 제대로 전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종교에 몸담은 독립군이 노력하여 홍익대학교와 단국대학교를 만들었지만, 독재자의 권력에 의해 대종교 인사들은 적출되고, 그것도 모자라 한국교과서에 대종교의 인물을 계속 축소시켰다.

 

대종교 인물의 인터뷰에서 듣던 중에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김구 선생이나 혹은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과 같이 독립운동 사람의 후손이 해방 후에 돌아오니 일제 치하에 앞잡이 하던 사람이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것이었다. 천도교나 대종교의 종교탄압이 심하게 받았으나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유독 대종교를 억압했고, 1942년 임오교변으로 인해 10인의 대종교인들이 서거했고, 그들 대부분은 독립투사였다.

 

어떻게 보면 천도교는 동학이 처음에 농민운동에 시작하여 점점 종교운동으로 흘러가 신비한 종교체험이 중심으로 간다면, 대종교는 독립운동으로 시작하여 한국민족 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종교가 흥미로운 것은 대종교는 파시즘이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항하던 종교다. 그래서 민족주의적인 종교인 점에서 당연히 보수적인 가치가 있으나, 대종교는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적대심을 품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를 같이 양립해도 무관하고, 다른 종교인과의 살아도 문제없이 지내려한 점과 제일 인상 깊은 점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홍익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자.”라고 한 점이다.

 

교황 아래의 추기경이란 자리와 한국에서 천주교인에서 가장 어른이신 분이 홍익인간이 다시 태어나자를 크리스마스 메시지란 점에서 인상이 깊었다. 대종교란 종교가 다소 관념론적인 요소가 강하나, 다르게 본다면 현실적 투쟁을 한 점에서 유물론적인 요소도 있다. 자연과 만물에 대한 사랑은 산과 강을 좋아했던 지난 선조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사람들조차 숨쉬기가 어렵고 물마시기도 곤혹스러워지는 이런 시대로 오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홍익인간 정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조심할 점은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만의 가치가 있고, 주관과 목표가 있다. 공동체 주의라는 점은 칸트주의자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제창한 롤즈의 철학에서 볼 수 있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도 볼 수 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철학에서 볼 수 있다. 공동체사상이란 것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처럼 정언명령, 즉 자신의 의지로서 타인에 대한 선(goods)을 전해 주는 것으로 인간애적인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본래 불교나 크리스트교 역시 그렇지만, 종교적인 가치에서 철학적 방향이 잃어버렸기에 아편이 되었던 것이다. 대종교를 특혜를 주는 것이 옳지 않으나, 적어도 한국에서 10월 3일 개천절은 의미 있는 날이야 한다.

 

일본의 예전 왕이던 히로히토라는 천황이라고 하여 신으로 모셔지고 있지만, 그는 엄연히 말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전범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이 신으로 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물론 일본이란 나라에서 많은 국민들은 죄가 없고 그들은 자신만의 인생에 충실하며, 한국과의 관계에 긍정적으로 대하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왕이 있다는 것만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신사에서 제문을 외우는 신관의 입에서는 일왕의 존재성이 드러난다. 그것이 결국 전쟁광으로 이어지는 열쇠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단결력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문제는 공동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만이 공동체로 이어지고, 타 민족과 타 국가는 배타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문제다. 인류애적인 요소에서 루소의 사상과 유엔인권보장에서 대종교의 가치가 어느 정도 부합되는 것부터 놀라게 했다. 책에서는 천도교가 앞에 나오나 후반부의 대종교에 강한 인상이 남은 이유는 대종교의 활동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대종교도인 독립군들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투쟁하기를 원했다. 물론 군사독재에 의한 국가에 대한 충성은 국민에 대한 억압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제와 독재에 억압받는 국민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대종교가 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은 그나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이름아래 누군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울려 지내야 하는 이화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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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지 엇지 1 - 창간호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엮음 / 팬덤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라이트노벨이란 서브컬처 콘텐츠를 즐기는 입장에서 항상 많은 고민에 놓여있다. 내가 서브컬처에 흥미를 느끼고 빠져있다고 하여 대중문화에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물론 대중문화에 특별히 관심은 없지만, 적어도 문학소설이나 인문사회 도서 정도는 챙겨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는 게 타당한가? 라는 의문은 예전에도 그러하거니와 지금도 그렇다. 철학과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을 도서관에서 두 번이나 빌려 읽으면서 과연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우리가 아는 유치한 세계로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기존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저렇게 낮은 대우를 받을 이유가 있는가?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만화라는 것이 단지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을 바라지 그 이상으로 상상으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2013년 8월 부천에서 BICOF라는 국제만화축제가 열렸다. 당시 나는 VIP로 새겨진 표찰을 차고 만화규장각을 돌아다녔다. 만화규장각에서 각종 학술세미나 내지 전시회에 참석했고, 당시 행사에서 가장 큰 <설국열차>를 영화로 보았다.

 

감독을 맡은 봉준호와 <설국열차>의 원작가인 프랑스 만화가 2분이 오셨다. 실상 만화와 영화를 보면 조금 다르지만, 추운 빙하기에 열차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동일했다. 만화라는 것이 영화로 대두되고, 그 영화가 성공하면 원작인 만화는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그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사람들은 복잡하게 어렵게 깊게 생각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된 영화도 그러하지만 소설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를 듣고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러 말이다.

 

Story-Telling의 도입에 따라 인간은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위해 생각한다. 관념 속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인가? 언어로 나오는 그 단어에서 관념으로 쏟아져 나오는가? 이야기라는 게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달되나 한편으로 무의식적인 사고에 의해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그런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다시 돌아보는 것이야 말로 인간 그 자체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에 대한 담화에서 만화는 인간의 입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나 인간의 상상력에서 기반하여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등장하고, 그 세계는 우리하고 너무나 멀어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만화라는 환상적 공간은 바로 현실의 세계를 다른 식으로 왜곡하여 그 자체로 현실이 아닌 것처럼 속여 현실을 고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만화분서갱유사건은 우리의 상상력을 죽이고, 더나가 지금의 문화산업을 죽이는 역사적 기록이 되었다. 문화산업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 이상 기계화로 이룩한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한계점이 도달한 것이다. 이 많은 상품들은 단지 소비되고 생산되나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상품에 스토리를 입히기 시작했으며, 상품은 곧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재창조된다. 이야기의 창조는 인간의 상상력이다. 단지 그 상상력은 자유로운 표현력에서 시작되고, 독자는 상상력을 소비함으로 즐거움을 찾는다. 하지만 즐거움만을 찾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작품에 대한 사유와 판단 역시 즐거움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한국 만화를 어찌하면 좋고, 더 나아가 한국의 만화비평 어찌하면 좋을까 라는 만화비평지 <엇지>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여 이때까지 만화비평 관련 도서를 몇 권씩 읽었기는 했으나, 최근 <엇지>만큼 다양하게 심도 있는 책은 많이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전에 읽은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학부에서 제작한 <만화비평> 시리즈와 뭔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다소 아까운 점은 <만화비평>이나 <엇지>나 모두 만화가 내지 만화학과 교수들의 관점이 중심적이고, 소비자의 관점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나 역시 리뷰를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 입장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비평은 비평일 뿐, 비평의 가치에서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모범답안만 추구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하나의 강의한다는 기분으로 주제를 정하여 작품이 가지는 의미와 목적을 찾아 하나씩 풀어가는 것이 글 적는 방향으로 전환했지만, 기본적으로 작품의 근본을 찾아가는 것이 내 목표다. 그런 점에서 <엇지>에선 상당히 공감 가는 말이 나온다. 만화이론가이신 박세현님 사회를 주관하는데, 이때 사회자의 의견이 참 와 닿았다.

 

“한국 만화계에서 비평가, 평론가를 찾아본다면 누가 있을까? 채 몇 명을 꼽기 어렵다. 영화나 문학 등 다른 예술 장르의 비평에는 - 흔히 말하는 데뷔나 비평가로서 등단하는 - 길이 많다. 하지만 우리 만화계는 공식적인 체계가 없어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스포츠서울>의 만화평론상이 만화평론가의 공식등단을 마련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애기하는 걸로 스스로 평론가가 되거나 소수매체를 통해 몇 개의 리뷰를 게재하는 것이 전부다. 이제 만화비평문화를 돌아볼 때가 됐다. 자칭 비평가나, 타칭 평론가나, 귀위의 문제나, 또는 제도권이나 비 제도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만화비평문화에 대한 체계화의 문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학생들에게 만화를 가르치는 교수님이 다른 분들에게 나를 만화평론가라고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는 아니나, 만화리뷰를 적은지가 이제 5년이 넘고, 만화리뷰를 단순히 리뷰 하는 사람으로 지나 하나의 비평으로 접어든지 3년이 넘었다. 서브컬처 콘텐츠에 대한 리뷰를 적기도 하지만 서브컬처라는 문화에 대해서도 적어보기도 한다. <엇지>에서 보면 참 공감 가는 것이 만화라는 매체가 단순히 아이들 놀이나 Killing-Time 용이 아니라 미학으로서 충분히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부분은 여러 차례 강연이나 도서로 통해 확인한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단지 인터넷에 몇 개의 글을 올리는 것을 두고, 평론과 비평이란 말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점이고,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만화 안에서 갇혀있는 게 아니라 만화로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만화 안에 담론할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많다. 환상으로 가려진 세계이기에 그 환상의 눈 뒤로는 은밀한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는 여러 가지 단면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만화가 종이책이 아닌 인터넷으로 통해 웹툰으로 등장하면서 만화는 재미만 보는 어린 학생들을 위한 장르가 아니라 전 국민이 즐기는 오락물이 되었다.

 

하지만 조금 걱정하는 것은 웹툰 작가의 현실이다. 그들의 웹툰은 공공성이란 이름 아래 제대로 된 대가를 받을 수 없고, 그들의 어려운 여건은 다양한 만화문화에 벽으로 가리게 한다. 웹툰의 가능성이 누구나 그리고 올리고 누구나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라는 것이 어느 순간 일상적인 공간에 우리에게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리뷰는 잘 올라와도 만화는 그렇지 못하다. 만화가 너무 간단하고, 다른 매체에 비해 그 정보전달력의 난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화에 대하여 비평한다는 것은 쉽게만 보이는 것에 가려진 의미를 찾는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숨바꼭질 놀이에서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만화평론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사철학>의 내용에도 나온 것처럼 어떤 유치한 이야기도 찾아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없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혹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점점 생장해 가는 작품을 비유적으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라고 본다면, 해설자는 마치 화학자처럼 그 앞에 서 있고 비평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설자의 경우에는 다지 나무와 재만이 그의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비평가의 경우에는 그 불꽃 자체만이 하나의 수수께끼,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의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따라서 비평가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지나간 것)의 무거운 장작더미와 체험된 것의 재위에서 아직도 살아서 타오르고 있는 생생한 진리를 물어 보는 데 있다(372~373페이지 <비평개념과 예술개념>).”

 

만화는 죽어 있는 존재가 나오는 곳이고 만화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은 살아있지 않은 존재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인다. 만약 만화평론을 한다면 애니메이션 역시 비평을 하는 것이 바르고, 그것은 마치 살아있지 않은 생물에 대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듯 그것이 계속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듯 활력을 넣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가려진 인식과 틀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전에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해외의 유명한 영화감독이 작품을 내면 비평가 10명이 붙어 같이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0명의 감독이 작품을 내도 소수의 비평가들만 의견만 낼 수 있다. 그 만큼 비평문화라는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다. 비평이란 것은 어느 대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통해 의견을 내는 것이다. 그런 비판의 기초가 되는 것이 세상을 보는 힘일 것이다. 만화를 계속 연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자리 잡은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그것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성과 지성을 펼치는 것도 쉬운 세상도 어렵지만, 자유로운 표현조차 과거의 만화분서갱유라는 악령이 다시 찾아올 것 같은 시대인 것 같다.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학과에서 제작한 <만화비평> 2번째에서 이한열 만화상에서 수상한 작품을 실었다.

 

이한열이란 사람은 본래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연세대학교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는 지난 6월 항쟁을 촉발이 되게 한 인물이다. 이한열의 민주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만화라는 매체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것도 그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엇지>에서 만화평론가 박석환 교수님이 웹툰에 대한 편을 집필하면서 영화 <변호인> 장면이 나온다. 영화 <변호인>의 감독은 웹툰작가 양우석이고, 영화 <변호인>을 보면 마지막에 송변호사가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두고 집회하는 모습이 나온다. 만화와 민주주의라는 설정에서 부자연스러우나 만화라는 매체는 항상 억압을 받은 매체다. 만화비평 <엇지>에서도 그런 사회적 억압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만화문화와 만화비평체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만화문화 <엇지>하오리까라는 의문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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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5-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한열 열사가 만화동아리 학생이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엇지'라는 잡지가 잘되었으면 합니다. 한국 만화가 좀 살았으면 좋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4-05-27 13:51   좋아요 0 | URL
오덕으로 그러하옵니다!
 
세가지색 : 화이트 - 아웃케이스 없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줄리 델피 출연 / 대경DVD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세 가지의 색에서 첫 번째는 블루, 즉 자유라는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1993년 제작한 자유를 의미하는 blue가 이제 white로 넘어간다. 평등을 상징하는 화이트란 단어로 말이다. 이 작품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의 색에서 가장 코미디 속성이 강한 작품이다. 유쾌하기보단 하나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이 작품은 프랑스인 여자와 폴란드인 남자의 이야기다. 본래 폴란드인이던 카롤은 아내인 도미니크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하여 집에서 내쫓긴다. 그는 폴란드인이므로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고, 가진 재산이 없어서 추운 날에 당장 먹는 것과 자는 것부터 걱정해야 했다.

 

폴란드인이던 카롤은 아내인 도미니크를 매우 사랑했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그러지 않았다. 언어적인 요소에서 폴란드인이던 카롤은 이혼재판과정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고, 심지어 이혼 이후에는 자신이 들고 있던 카드마저 사용불가로 되었다. 사랑하는 도미니크를 두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공중전화에 가서 자신에게 있는 동전 1개를 넣고 통화하는 순간,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아내인 도미니크는 다른 남자와 Sex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음 소리는 매우 행복하고, 이때까지 카롤이 듣지도 못할 정도로 열기에 가득했다.

 

카롤은 거기에 망연자실한 모습이 나오는데, 폴란드인으로서 프랑스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에 스스로 자학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내의 가게에 몰래 가서 잠을 자다가 우연히 아내가 들어와서 두 사람은 키스를 하고, Sex를 하려고 했으나, 이내 카롤은 무기력한 남자로 변하고 아내에게 내쫓긴다. 아무 희망이 없는 카롤이었다, 카롤은 더 이상 프랑스에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인 폴란드로 가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와 폴란드인데,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는 본래 프랑스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었다. 그 역시 폴란드 공산당과 업무를 했으나 공산진영의 모순과 부패로 그는 프랑스로 오면서 자유주의적인 영화를 촬영했다.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를 보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주의하고 큰 차이가 있다. 그의 세 가지의 색이란 말 그대로 프랑스의 국기인 삼색기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에서 평등의 가치란 무엇인가? 화이트는 바로 그런 의문을 상징적인 존재보다는 블루에서 나온 졸리 처럼 아주 평범한 인간으로 나온 셈이다. 카롤이 아내를 만난 동기는 그가 헤어디자이너로 활약할 때 우연히 아내를 만나 한 번에 반하여 결혼하였다. 언어도 다르나,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언어의 장벽에 가려지면서 카롤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다.

 

카롤은 프랑스를 떠나 폴란드 고향으로 가기로 한다. 우연히 위험한 일을 할 것 같은 남자를 만나 비행기를 타게 된다. 자신은 비행기 표도 살 수도 없고, 강제이혼을 당해 프랑스국민이 아니기에 여권도 소지할 수 없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이나 사회적으로 죽어있는 인간인 호모 사케르였다. 그가 프랑스에서 죽어도 그의 죽음은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다. 카롤이 삶과 죽음을 다 가지기 위해서는 프랑스국민이 아니라 폴란드국민이어야 했다.

 

그래도 역시 프랑스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였고, 카롤은 프랑스에서 나오기 위해 그 위험한 남자에게 부탁하여 그 남자의 짐에 자신의 몸을 넣었다. 답답한 가방 안에 몇 시간이나 갇혀 하늘을 통해 폴란드로 온 카롤, 합법적 결혼에서 이제는 불법적 이민자가 되어야 했다. 아마 이런 일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고, 카롤이 온 폴란드는 그가 예전에 알고 있던 폴란드가 아니었다. 폴란드도 역시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공산진영에 속했으나 소비에트 연방 해체이후 자본주의가 침투했고, 자본주의는 공산진영과 다르나 새로운 부패와 투기가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일했던 미용실로 와서 화려한 복귀를 하였고, 이전에 오던 손님들이 단골로 계속 찾아온다. 하지만 그는 충분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 아내인 도미니크에 대한 분노와 애정이 같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불법적인 일을 시작한다. 총을 들고 어느 수상한 남자들이 모인 곳에 서 있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의 위험한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땅 투기까지 고려하여 거부가 된다. 과거 국가자본주의이던 공산진영에서 볼 수 없었던 시장경제의 자유에서 카롤은 더 이상 불법보단 합법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고, 그의 명성은 넓리 퍼지고, 우연히 카롤은 자신을 도와준 위험한 남자에게 부탁한다.

 

자신이 죽었다고 광고를 내어 아내가 오면 거기에 대한 조치를 해달라는 점이다. 엄청난 거부가 된 카롤은 자신의 재산을 유언에 따라 아내에게 주라고 하였고, 전 남편의 죽음을 들은 도미니크는 카롤을 찾아온다. 도미니크는 카롤의 죽음에 슬퍼했고, 실의에 빠졌지만, 남편인 카롤은 죽지 않았고, 시체로 있어야 카롤 대신 어느 부랑자의 시체가 시체보관소에 보관되었다. 시체상태는 매우 심각하여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폴란드의 공산진영의 해체나 자본주의의 도입에서 각각의 장단점은 있으나 자본주의 도입은 결국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는 풍조를 다소 비웃기도 하였다.

 

아내 도미니크 앞에 나온 카롤은 이제 자신만만한 남자가 되었다. 프랑스에선 무기력한 남자가 이제 도미니크에게 최고의 Sex를 해주었고, 도미니크는 만족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해피엔딩처럼 보일 듯하였다. 문제는 카롤은 이미 사망신고처리가 된 것이고, 카롤의 살인범으로 아내인 도미니크를 지목한 것이다. 도미니크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자신은 프랑스인이기에 폴란드인의 언어를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변론조차 못하고 폴란드의 어느 감옥에 5년 동안 갇혀야 하였다.

 

카롤은 그런 그녀를 보기 위해 감옥에 찾아오고, 그녀는 말 대신 제스쳐로 카롤에게 대답한다. 여기서 나오면 카롤과 다시 재결합하여 다시 사랑하겠다고, 카롤은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보이면서 영화는 막이 내린다. 그런 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화이트를 본다는 것은 아주 평범한 두 남녀의 이야기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적 여건을 블랙 코미디로 보여준다. 소비에트 연방 이후의 국가들은 긍정적인 요소와 더불어 돈에 의해 결정되기에 사람들의 성향이 바뀐 것을 말이다. 카롤이 성공한 이유도 도로건설이 되는 곳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자본력이 얼마나 늘어 가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시체도 어떻게 입수가능한지도 마찬가지다. 경찰에선 시체매매나 투기보다는 카롤에 대한 살인범에 집착한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 블랙코미디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에서 평등은 바로 카롤과 도미니크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카롤은 프랑스에서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차별을 당했고, 특히 언어가 통하지 않은 점은 그에게 치명적인 요소가 되었다. 아내인 도미니크 역시 프랑스에서 폴란드로 오면서 살인범 용의자로 몰려도 결국 언어가 통하지 못해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려도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평등이란 단어는 참 독특한 색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남과 똑같이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조건이 동일하여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야 진정히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조건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평등이란 무조건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 조건이 균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누가 단지 가난하거나 혹은 병을 안고 있거나 또는 지역적, 민족적, 인종, 성별로 인해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불평등이다. 프랑스의 모든 것은 1789714일 바스티유감옥 습격한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다. 매년 714일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광장에서는 그 날의 영광을 위해 행사를 거둔다.

 

프랑스혁명을 소개하면 그 중심은 장 자크 루소가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더불어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이 작품에서 같이 두고 봐야 한다. 인간은 2가지의 불평등이 있다. 1가지는 선천적인 불평등이고, 다른 1가지는 후천적인 불평등이다. 카롤과 도미니크의 관계는 아마 처음에는 선천적인 불평등인 인종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으나, 결혼하고 나서는 후천적인 불평등에 의해 갈라진 것이 보는 게 타당하다. 이혼하고 나서 도미니크는 카롤에게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였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불평등이 이제 사회적인 불평등으로 카롤에게 전가된 것이다.

 

영화를 보면 다시 화이트란 사실은 영화배경이 겨울이란 점이다. 추운 프랑스보다 더 추운 폴란드는 눈으로 가득하다. 눈이 내린 공황에서 카롤은 항공기 승객의 짐을 훔치는 도둑에게 심한 꼴을 당한다. 예전의 폴란드와 다르게 강도들이 여기저기 출몰하는 것이다. 하얀 눈이 내리는 폴란드에서 화이트라는 것은 순수의 색보단 다른 색이 들어오면 바로 물들어가는 색이기에 어떤 색이 들어가도 화이트는 그 색으로 변해야 했다. 즉 어떤 부당함이 오더라도 그 부당함은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을 남기는 셈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 중 화이트는 우리 사회에서 잘 생각해야 한다.

 

타인에 대해 자신이 일방적으로 우세하다고 하여 타인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태도는 결국 다시 본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점은 분명하다. 전에 어느 선박의 침몰에서 죽은 가족을 그리워하여 절규하는 사람들에게 비수의 칼날처럼 비난하던 자들에게 이 영화를 떠오른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도 이 영화처럼 같은 대우를 받고 자신이 상대방의 고통을 충분히 느껴야 진정한 평등이 아닐까 싶다. 조금 더 생각하건만 세 가지의 색의 화이트를 적고 있지만, 박애를 상징하는 레드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은 분명하다. 하지만 평등이란 것은 기회의 균등과 더불어 상대방에 대한 부조리를 가한다면 그 부조리를 자신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진짜 평등이 아닌가?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몰아넣는 것과 몰아넣도록 하는 것은 역시 불평등하기 때문일 것이다.

 

끝으로 영화 포스터 메인장면을 보면 남자주인공이 검지 손가락으로 빗을 잡고 입에 대는 모습이 나온다. 그는 이발사로서 빗을 가지고 하모니카처럼 불어대는 재주가 있다. 어쩌면 그의 매력은 아주 뛰어난 헤어디자이너보다는 작은 재주로 상대방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랑스에 온 그는 프랑스어가 되지 않아 자신의 능력을 살리지 못해 저 재주조차도 부리지 못한다. 그래도 그런 카롤을 보고 뒤에서 미소 짓는 도미니크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로 답을 해주고 있다.

 

아가페적인 사랑(박애)을 의미하는 레드는 아니지만, 적어도 도미니크의 마음은 카롤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메라 앵글은 두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이 되나, 위치적으로 어깨너머 샷으로 도미니크의 뒷모습에서 카롤의 뒷모습을 잡으려는 것은 역으로 배치한 것 같다. 사실 카롤이 크게 보이나, 카메라를 뒤로 하면 카롤이 왜소한 남자로 나오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정면에 보인 카롤의 표정은 도미니크를 생각하면서 걱정하고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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