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세계에서 과연 몇 위나 될까? 예전에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하시는 한창완 교수의 <애니메이션 경제학>이란 도서를 보았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2004년 정도였고, 2003년까지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진 도서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경제학인 만큼 책의 내용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과 더불어 경제학적인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왜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2004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14년에 오면서 세계 애니메이션시장 규모가 달라졌지만, 당시 한국의 세계에서 차지하는 애니메이션 시장규모는 3위였다.

 

3위라는 규모를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하다. 왜 3위인데 이렇게 힘든 것일까? 애니메이션영화 <고스트메신저>를 극장에서 보기 전부터 나는 이 생각으로부터 버릴 수가 없었다. 우선 <고스트메신저>가 예전에 OVA로 출매 되었을 때 나는 DVD-CD를 구매하여 감상하였다. 감상하면서 느낀 점은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유아 내지 아동용이었고, 그 외는 인디애니메이션 내지 블랙코미디라는 성인용으로 제작되는 흐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토리텔링으로 보아도 너무 뻔해 보이는 설정 내지 혹은 현실에 대한 강한 염세적인 비판이 녹아 들어간 것이다.

 

물론 후자에 대해서는 좋은 작품이 많았다. 예술이란 것은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서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인용한 것처럼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라 하여 보기가 거북한 그로테스크를 연출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들 이상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에는 성적인 요소보단 폭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 폭력성에는 이른바 현실적으로 도저히 쾌감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추의 미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추의 미학에서 보일 수 있는 미적인 영역이란 우리가 볼 수 없거나 보지 않으려한 것에 대한 성찰이다.

 

부정의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이란 헤겔이 말한 변증법인 부정과 부정에 대해 결국 틀어진 것에 다시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것, 즉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안이란 딱히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만든 자나 보는 자나 다 같이 생각하고 찾아가야 할 또 다른 방향이다. 우리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바로 부정의 부정이 긍정으로 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부정으로 가고 있었다. 지난 1970년대 만화분서갱유부터 시작하여 2000년대 애니메이션 시장의 몰각에서 시장경제는 좋아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런 어둠의 시기에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도전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인 만큼 우리 주변은 대부분 일본 만화애니메이션과 혹은 미국 애니메이션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시장규모는 누구의 문제일까? 독자의 선택권이란 결국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고, 그 물건을 구매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사회적 구조와 여건이다. 사실 작품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한국애니메이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담론을 꺼내는 것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과정적인 현상에 대해 논하려면 결국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현재를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고스트메신저>를 OVA로 보고 난 뒤 극장에서 보면서 매우 놀란 것이 있다. 처음 바리낭자가 나오면서 그녀가 손에 잡고 있던 신문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신문은 다른 신문도 아닌 바로 한겨례신문이었던 것이다. 한겨례신문은 한국 언론문화에서 진보성향이 강한 신문사이다. 굳이 신문사의 이름을 표기할 필요가 없고, 하다못해 다른 신문사를 만들어 이름을 내세우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겨례라는 검정글씨가 녹색 사각형 안에 명확히 새겨진 것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의 의도? 아니면 감독의 지시? 분명히 편집과정에서 그것을 놓칠 리가 없을 터이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여전히 탄압을 받고, 철저히 검열을 받았던 매체다. 최근에 발매된 만화비평지 <엇지>에서도 다루고,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에서 나온 <만화비평>에서도 그런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화문화에 대한 비평과 성찰에서 한국 애니메이션문화가 같이 엮이는 것은 당연하다. <고스트메신저>를 보면서도 이런 상황을 열외로 둘 수가 없다. <고스트메신저>에 대해 내가 내놓는 평이 나오는 이유도 다 이런 연유에서 발생된 하나의 과정이다.

 

애니메이션이란 것은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어야 만들어지는 하나의 노동집약적 산물이다. 한국에 대다수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은 자국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아니라 OEM 방식으로 일본에서 외주를 받아 작화하는 것이다. 가끔 일본 애니메이션 엔딩 자막을 보면 한국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청으로서 활발한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스트메신저의 엔딩장면에서 일본 TVA에서 나오는 제작팀과 비교가 가능할 정도의 인원이고,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인원과 작업규모는 비교조차 힘들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인력이 있어도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 없고, 제작해도 자본의 융통성에 대해 지지해줄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시장규모가 조성되지 않은 점이다. 작품을 보면서 제일 아쉬운 부분은 더빙과 스토리 전개에서의 부드러운 흐름이었다. 대사와 입 모양이 거의 일치하지 못했다는 점은 기본적인 설정방향이 많이 아쉬웠다. 작화에서 입모양을 못 맞출 리가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전투하는 모습은 참 잘 짜진 플롯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도령의 권총과 강림도령의 칼을 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은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보여주는 전투장면이 생각날 정도다. 정확하게 상대를 향하여 타격하나, 그것을 피하고 연속적인 격투의 장면은 정말 작화가 깨끗하게 잘 되었다. 2D와 3D 영상, 셀 영상과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적절히 조화했을 것이다. 그런 전투 장면에 대한 강력한 스펙타클화는 성공했으나 정작 스토리 진행에서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맺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이다. 장점이 분명히 많고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좋은 인상으로만 남기기 어렵다.

 

애니메이션 역시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갖춘 서사라는 점이다. 서사에 대하여 음악과 영상이란 멀티플레이가 조합되어야 좋은 미디어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스트메신저>가 아까운 이유는 이야기 흐름만 잘 조절했으면, 정말 재미있을 작품이란 점이다. 플롯의 구조에서 복선이 되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 점과 기존 한국에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살리려 했던 것이다. 현대사회가 21세기 정보화시대라는 점을 이용하여 저승사자의 무기가 핸드폰이란 것이고, 영들을 봉인당할 때 디지털 화면을 상징하는 사각박스처럼 변하는 것이다.

 

저승사자가 소환한 것들을 보면 조선시대의 양반의 모습을 한 로봇이 나와 악령을 끌어당기는 모습은 <고스트메신저>에서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유령이 디지털화 되어 잡을 수 있다는 발상은 쉽지 않을 터이다. 영화 <고스트버스터>에서 유령을 잡는 기계라도 그것은 아날로그적인 방법이면 <고스트메신저>는 디지털의 방법이다. 한국인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세계의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추어질까? 한국 역시 서구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침투하면서 동양의 고전적인 문화가 그대로 유지될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외국에 가면 한국인에 대해 Do you from Japan(or china?)라는 말을 얼마 전까지 계속 들어야 했다.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방향을 애니메이션에 담아 그것도 세련한 디지털 문화로 복합적인 영상을 보여준 것은 정말 좋은 방향이다. 등장인물의 무기에서 바리낭자의 핸드폰은 부채처럼 되고, 마고는 곰방대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곰방대는 단순히 무기기능만이 아니라 암호를 모두 해제하는 해킹도구로 나오는 것도 역시 좋은 소재다. 등장인물에서 바리낭자는 저승과 이승을 주관하는 신이고, 마고는 한국의 땅을 만들어낸 여신 중에 하나로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에서 인간과 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던 자가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 채 저승으로 가게 되어 신이 된 점은 한국의 전통문화사상에 매우 부합된다. 애니메이션이란 Anima라고 불리는 영혼에서 시작된 용어다. Animate 혼이 없는 대상에 혼을 넣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존재성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무한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동경심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무한성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다. 유한한 존재에 의해 연속되어 갈 뿐이다. 신화라는 존재가 결국 인간의 유한성의 연속성에 태어난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고스트메신저> 첫 번째 극장판은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하나의 끝은 하나이란 의식이 강림이란 소년으로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이 들여서 안 될 공간을 계속 들어가려고 한다.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망,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인 저승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죽으면 저승에 가서 삼도천이란 곳을 밟게 된다. 과거 인간이던 시절에 시간적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마 죽을 위험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종종 주마등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강림소년이 강림도령과 만남에서 실제 한국 신화에서도 강림도령은 정상적인 죽음에 의해 저승사자로 발탁된 게 아니라 사고에 의해 죽게 되어 저승사자가 되었다. 강림소년, 꼬마 강림의 경우에도 삼도천을 지나는 모습은 죽지 말아야 할 자가 죽게 되면서 그의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림은 그런 선택을 해야 할까? <고스트메신저>에서는 단절된 가족에 대한 보상심리 내지 피해의식이 나온다. 꼬마 강림이 학교 내에서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과 필요 이상으로 할아버지에 대하 보호의식, 그리고 죽은 어머니에 대한 악몽은 끊임없이 꼬마 강림을 궁지로 몰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 사회라는 공간은 학교와 직장 같은 하나의 커뮤니티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처음 시작하는 사회는 곧 가족이 존재하는 가정이다. 가정의 해체는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큰 문제점을 안겨준다. 심각한 우울증 내지 과민반응 또는 무관심이다. 꼬마 강림이 선택은 그가 정상인이 아니라 비정상의 영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사의 시작에서 등장인물은 모두 비정상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이어야 정상으로 가야 하는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꼬마 강림과 비밀이 있는 저승사자의 강림도령의 만남은 비정상인 두 인물로 통해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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