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대종교 - 한국인의 종교경험
차옥숭 지음 / 서광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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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란 참 묘한 것이다. 당신의 가치관보다 당신의 그 자체를 무엇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국가 중에서 프랑스를 좋아한다. 프랑스라고 하여 모든 게 척도인 게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나온 철학과 사상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 자크 루소의 서적들은 나에게 삶의 관점을 부여한 중요한 사상가이다. 그의 철학자적인 모습에서 개인적 삶은 불우하고 강박관념에 시달린 광인이었을 것이다. 계몽주의사상이 꽃이 피던 18세기 프랑스와 유럽, 그 공간에서 루소는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계몽철학자로 등장했으나, 한편으로 반계몽주의자로도 나왔다.

 

루소가 그토록 대립해야했던 볼테르는 지금 프랑스 판테옹 사원에 루소의 무덤을 서로 마주보고 있다. 루소의 철학에 내가 깊이 동의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나 본래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억압이란 사슬에 묶인다. 그러지만 인간이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야할 운명이라고 하여도 인간 그 자체가 자연과 친화되지 마란 법이 없다. 서양의 근대철학은 지금의 민주주의 정치체계를 만든 근본이 되던 시기다. 헌법의 모든 요소가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온 점을 생각하면 3세기 이전의 사상이 결국 지금도 통용된다. 계속하여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철학과 사상이 발전해도 근본은 변함이 없다.

 

단지 자유주의 철학은 사상에서 비롯되어야 하나 경제적 이권에 의해 분리되는 기묘한 현상에 따라 왜곡되어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사상구조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만든 사상은 없었는가? 그런 보완점을 생각하면 한국 근본적인 철학과 사상에 대해 한 번 관심을 가지는 방법도 좋다고 여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지만, 다른 국가에서 나는 프랑스를 좋아하고, 그 프랑스의 상징은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을 침공한 것이다. 억압에 대한 저항이 곧 프랑스의 정신이고, 자유와 평등이 곧 프랑스의 정신이고, 인간애에 대한 고귀한 정신 역시 프랑스의 정신이다.

 

그런다고 모든 프랑스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 극우청년이 좌파계열에서 운동하는 학생을 무참히 살해했다. 프랑스 옆에는 나치독일의 정신을 살린다고 하는 네오나치가 기어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식 민주주의에서 그것이 민주주의인지 아닌지 참 미묘하다. 토크빌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 정체가 가장 전체주의적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곧 전체주의의 표상으로 등장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없다. 헌법에 우리는 민주공화이나, 어느 누구는 주군을 말하고 있다. 주군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사라진 존재다.

 

주군을 다시 살린다면 이성계의 혼을 다시 찾는 것이 옳을 것이고, 그것은 조선을 다시 찾는 것과 같다. 조선이란 말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조선시대의 풍습을 많이 받고 있다. 서양의 사상이나 일제에 의한 탄압이 있어도 주자에 의한 유교문화는 살아있고, 사대부란 계급제도에서 사라지고, 그 계급 대신 자본의 대소로 결정짓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가문의 내력은 존재한다. 집안의 족보나 문중행사도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문화적 잔재를 두고 전통문화로 받아들이고, 서구방식으로 하는 것이 예전의 진보라면, 이제는 그런 진보적 가치가 보수적 가치로 변모되었다. 시간의 흐름에서 과거의 진보가 지금의 보수고, 때에 따라 과거의 전통이 현재의 진보로 돌아올 수 있다.

 

조선이란 국가가 대한민국 최후의 왕국이었으니 그 조선의 이름을 가진 고조선이란 국가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집안 분위기가 어머니, 형, 형수, 형수가족이 불교계통에 가깝고, 나는 천주교를 믿지 않으나 대학시절 성당에 대한 인연이 있다. 종교를 믿지 않은 이유는 종교에서 가장 앞세우는 좋은 일을 함으로 타인에 대한 인간애를 실천하는 것은 합당하나, 단순히 종교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심이 싫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카를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아편의 경우 불치병이나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멈출 수 있게 하는 약이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악이다. 종교란 그런 것일까? 최근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건을 보면서 종교인이 운영하는 업체로 통해 대한민국과 그동안 있었던 망언의 꼬리를 찾아가면 마르크스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교 자체가 없어야 하나? 라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루소의 경우 그는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의 가치로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해야 하고, 그가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종교는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데,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다고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 게 옳은가? 종교란 어느 국가와 민족, 더 나아가 개인과 인간관계, 이와 반대로 세계와 인류에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가? 예전에 나는 종교는 믿지 않으나, 우리나라는 단군신앙이 상당히 뿌리 깊게 있다고 생각했다. 산신 할매나 또는 제사문화가 그렇다. 본래 불교의 고향이 인도에선 조상에 대해 제사가 없고, 공자의 유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 죽으면 죽었다고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내지 하늘로 갔다고 한다. 땅에 매장하는 풍습에서도 양지바른 곳보단 산으로 올라간다.

 

우리는 하늘로 간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곧 산으로 돌아가 신령이 되는 것과 같다. 한국인은 인간이 신으로 되는 종교관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 보면 신은 절대적 1인자이고, 고대 그리스라면 인간이 신으로 되기 때문에 Daimon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종교가 샤머니즘이란 속성도 있지만, 만물의 자연을 아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처음에 루소를 언급한 이유는 루소는 자연주의자였고, 한국의 전통종교사상은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게다가 자연주의자로서 유명한 존 러스킨과 같은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가를 본다면 자연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생존을 넘어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는 존재이고, 대자연이란 생명은 하나의 신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전공이 환경 쪽인지 자연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현실의 종교는 믿지 않으나 산이나 강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다. 물론 영적인 존재가 현실에 존재할리 없다고 과학적으로 생각되나, 위대한 자연이야 말로 우리 인간의 정신을 치유하고, 어긋난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다의 파도를 보고, 높은 산의 안개를 보면 우리 인간이 이토록 작은 존재구나 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한국의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는 그렇게 진행되지 못한다. 동학이란 것은 수운 최제우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종교로 서양의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서학 대신 동학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김수환 추기경님이 훌륭하신 점과 지금의 교황님을 존경한다. 내가 가톨릭을 믿지 않으나 그분들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다. 동학이 생길쯤에 국가지도자나 종교지도자가 지금의 교황님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제사문화를 천주교에서 인정하지 않아 마찰이 있었고, 18세 후반에는 남인을 비롯한 신서파 양반들이 받아들였으나, 19세기로 오면서 민중으로 보급된다. 이른바 메시아주의에 의한 구원신앙에서 의해서다. 기복신앙은 한국종교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요소이다. 불교나 유교나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나, 우리는 귀신이 신으로 모시고, 그 귀신은 살아있는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죽음 자체를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란 점에서 내세를 기원하기보단 다시 돌아간다고 하기에 이승에서 죽은 자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로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할아버지라는 개념에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할아버지도 존재하거니와 죽어있는 할아버지를 우리는 다시 찾는다. 만약 2대조와 3대조를 넘어 몇 대조에 계신 분들에 대해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조상에 대해 우리는 모두 돌아가신 분들을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부른다. 그들은 우리에게 신이란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공통적인 정체성을 찾는다면 역시 그 민족과 국가를 상징할 수 있는 무엇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단군할아버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에서 하느님과 대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존재는 다른 듯하다. 천도교는 인내천으로 하늘과 인간이 통하기에 평등하다고 하나, 대종교에서는 신 자체를 할아버지로 본다. 신의 존재 아래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이 토크빌이 바라보는 가치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다른 점은 신이란 존재는 인간과 분리된 게 아니라 인간과 동일하게 이어져 오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신화를 토대로 만든 그리스비극에서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아버지이신 위대한 제우스”라고 말이다. 원래 고대종교에서 인간과 신은 분리되기보단 분리되었던 존재로 본다. 단지 서양에서 분리된 이상 다시 인간이 신이 될 수 없고, 동양에선 인간이 신으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동학의 태아에서 태어난 천도교는 인내천이란 구원주의가 강한 종교로 보이고, 이에 반해 대종교는 구원주의적인 요소보다는 항일투쟁에서 시작한 실천주의가 강한 것 같다. 물론 천도교가 만들어진 일제강점기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대종교에 그 철저한 투쟁의식에 비하면 빛을 보지 못했다.

 

천도교의 죽음은 순교로 볼 수 있지만, 대종교는 순교와 더불어 순국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독립군이 대종교였고, 민족의 얼과 혼, 그리고 역사와 전통을 이어주는 가치관을 대종교에서 시작한 점이다. 일제에서 벗어나 막 새로 시작한 무렵 전쟁이 일어날 때 한국의 언어와 역사를 누군가 제대로 전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종교에 몸담은 독립군이 노력하여 홍익대학교와 단국대학교를 만들었지만, 독재자의 권력에 의해 대종교 인사들은 적출되고, 그것도 모자라 한국교과서에 대종교의 인물을 계속 축소시켰다.

 

대종교 인물의 인터뷰에서 듣던 중에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김구 선생이나 혹은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과 같이 독립운동 사람의 후손이 해방 후에 돌아오니 일제 치하에 앞잡이 하던 사람이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것이었다. 천도교나 대종교의 종교탄압이 심하게 받았으나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유독 대종교를 억압했고, 1942년 임오교변으로 인해 10인의 대종교인들이 서거했고, 그들 대부분은 독립투사였다.

 

어떻게 보면 천도교는 동학이 처음에 농민운동에 시작하여 점점 종교운동으로 흘러가 신비한 종교체험이 중심으로 간다면, 대종교는 독립운동으로 시작하여 한국민족 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종교가 흥미로운 것은 대종교는 파시즘이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항하던 종교다. 그래서 민족주의적인 종교인 점에서 당연히 보수적인 가치가 있으나, 대종교는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적대심을 품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를 같이 양립해도 무관하고, 다른 종교인과의 살아도 문제없이 지내려한 점과 제일 인상 깊은 점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홍익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자.”라고 한 점이다.

 

교황 아래의 추기경이란 자리와 한국에서 천주교인에서 가장 어른이신 분이 홍익인간이 다시 태어나자를 크리스마스 메시지란 점에서 인상이 깊었다. 대종교란 종교가 다소 관념론적인 요소가 강하나, 다르게 본다면 현실적 투쟁을 한 점에서 유물론적인 요소도 있다. 자연과 만물에 대한 사랑은 산과 강을 좋아했던 지난 선조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어 사람들조차 숨쉬기가 어렵고 물마시기도 곤혹스러워지는 이런 시대로 오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홍익인간 정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조심할 점은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만의 가치가 있고, 주관과 목표가 있다. 공동체 주의라는 점은 칸트주의자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제창한 롤즈의 철학에서 볼 수 있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도 볼 수 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철학에서 볼 수 있다. 공동체사상이란 것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처럼 정언명령, 즉 자신의 의지로서 타인에 대한 선(goods)을 전해 주는 것으로 인간애적인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본래 불교나 크리스트교 역시 그렇지만, 종교적인 가치에서 철학적 방향이 잃어버렸기에 아편이 되었던 것이다. 대종교를 특혜를 주는 것이 옳지 않으나, 적어도 한국에서 10월 3일 개천절은 의미 있는 날이야 한다.

 

일본의 예전 왕이던 히로히토라는 천황이라고 하여 신으로 모셔지고 있지만, 그는 엄연히 말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전범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이 신으로 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물론 일본이란 나라에서 많은 국민들은 죄가 없고 그들은 자신만의 인생에 충실하며, 한국과의 관계에 긍정적으로 대하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왕이 있다는 것만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신사에서 제문을 외우는 신관의 입에서는 일왕의 존재성이 드러난다. 그것이 결국 전쟁광으로 이어지는 열쇠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단결력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문제는 공동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만이 공동체로 이어지고, 타 민족과 타 국가는 배타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문제다. 인류애적인 요소에서 루소의 사상과 유엔인권보장에서 대종교의 가치가 어느 정도 부합되는 것부터 놀라게 했다. 책에서는 천도교가 앞에 나오나 후반부의 대종교에 강한 인상이 남은 이유는 대종교의 활동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대종교도인 독립군들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투쟁하기를 원했다. 물론 군사독재에 의한 국가에 대한 충성은 국민에 대한 억압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제와 독재에 억압받는 국민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대종교가 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은 그나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이름아래 누군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울려 지내야 하는 이화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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