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비평지 엇지 1 - 창간호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엮음 / 팬덤북스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라이트노벨이란 서브컬처 콘텐츠를 즐기는 입장에서 항상 많은 고민에 놓여있다. 내가 서브컬처에 흥미를 느끼고 빠져있다고 하여 대중문화에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물론 대중문화에 특별히 관심은 없지만, 적어도 문학소설이나 인문사회 도서 정도는 챙겨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는 게 타당한가? 라는 의문은 예전에도 그러하거니와 지금도 그렇다. 철학과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을 도서관에서 두 번이나 빌려 읽으면서 과연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우리가 아는 유치한 세계로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혹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기존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저렇게 낮은 대우를 받을 이유가 있는가?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만화라는 것이 단지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을 바라지 그 이상으로 상상으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2013년 8월 부천에서 BICOF라는 국제만화축제가 열렸다. 당시 나는 VIP로 새겨진 표찰을 차고 만화규장각을 돌아다녔다. 만화규장각에서 각종 학술세미나 내지 전시회에 참석했고, 당시 행사에서 가장 큰 <설국열차>를 영화로 보았다.

 

감독을 맡은 봉준호와 <설국열차>의 원작가인 프랑스 만화가 2분이 오셨다. 실상 만화와 영화를 보면 조금 다르지만, 추운 빙하기에 열차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동일했다. 만화라는 것이 영화로 대두되고, 그 영화가 성공하면 원작인 만화는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그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사람들은 복잡하게 어렵게 깊게 생각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된 영화도 그러하지만 소설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 이야기를 듣고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러 말이다.

 

Story-Telling의 도입에 따라 인간은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위해 생각한다. 관념 속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인가? 언어로 나오는 그 단어에서 관념으로 쏟아져 나오는가? 이야기라는 게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달되나 한편으로 무의식적인 사고에 의해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그런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다시 돌아보는 것이야 말로 인간 그 자체를 알아가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에 대한 담화에서 만화는 인간의 입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나 인간의 상상력에서 기반하여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등장하고, 그 세계는 우리하고 너무나 멀어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만화라는 환상적 공간은 바로 현실의 세계를 다른 식으로 왜곡하여 그 자체로 현실이 아닌 것처럼 속여 현실을 고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만화분서갱유사건은 우리의 상상력을 죽이고, 더나가 지금의 문화산업을 죽이는 역사적 기록이 되었다. 문화산업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 이상 기계화로 이룩한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한계점이 도달한 것이다. 이 많은 상품들은 단지 소비되고 생산되나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상품에 스토리를 입히기 시작했으며, 상품은 곧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재창조된다. 이야기의 창조는 인간의 상상력이다. 단지 그 상상력은 자유로운 표현력에서 시작되고, 독자는 상상력을 소비함으로 즐거움을 찾는다. 하지만 즐거움만을 찾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작품에 대한 사유와 판단 역시 즐거움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한국 만화를 어찌하면 좋고, 더 나아가 한국의 만화비평 어찌하면 좋을까 라는 만화비평지 <엇지>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여 이때까지 만화비평 관련 도서를 몇 권씩 읽었기는 했으나, 최근 <엇지>만큼 다양하게 심도 있는 책은 많이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전에 읽은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학부에서 제작한 <만화비평> 시리즈와 뭔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다소 아까운 점은 <만화비평>이나 <엇지>나 모두 만화가 내지 만화학과 교수들의 관점이 중심적이고, 소비자의 관점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나 역시 리뷰를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 입장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비평은 비평일 뿐, 비평의 가치에서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모범답안만 추구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하나의 강의한다는 기분으로 주제를 정하여 작품이 가지는 의미와 목적을 찾아 하나씩 풀어가는 것이 글 적는 방향으로 전환했지만, 기본적으로 작품의 근본을 찾아가는 것이 내 목표다. 그런 점에서 <엇지>에선 상당히 공감 가는 말이 나온다. 만화이론가이신 박세현님 사회를 주관하는데, 이때 사회자의 의견이 참 와 닿았다.

 

“한국 만화계에서 비평가, 평론가를 찾아본다면 누가 있을까? 채 몇 명을 꼽기 어렵다. 영화나 문학 등 다른 예술 장르의 비평에는 - 흔히 말하는 데뷔나 비평가로서 등단하는 - 길이 많다. 하지만 우리 만화계는 공식적인 체계가 없어졌다. 1990년대 중반에는 <스포츠서울>의 만화평론상이 만화평론가의 공식등단을 마련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애기하는 걸로 스스로 평론가가 되거나 소수매체를 통해 몇 개의 리뷰를 게재하는 것이 전부다. 이제 만화비평문화를 돌아볼 때가 됐다. 자칭 비평가나, 타칭 평론가나, 귀위의 문제나, 또는 제도권이나 비 제도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만화비평문화에 대한 체계화의 문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학생들에게 만화를 가르치는 교수님이 다른 분들에게 나를 만화평론가라고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는 아니나, 만화리뷰를 적은지가 이제 5년이 넘고, 만화리뷰를 단순히 리뷰 하는 사람으로 지나 하나의 비평으로 접어든지 3년이 넘었다. 서브컬처 콘텐츠에 대한 리뷰를 적기도 하지만 서브컬처라는 문화에 대해서도 적어보기도 한다. <엇지>에서 보면 참 공감 가는 것이 만화라는 매체가 단순히 아이들 놀이나 Killing-Time 용이 아니라 미학으로서 충분히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부분은 여러 차례 강연이나 도서로 통해 확인한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어떻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단지 인터넷에 몇 개의 글을 올리는 것을 두고, 평론과 비평이란 말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점이고,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만화 안에서 갇혀있는 게 아니라 만화로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만화 안에 담론할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많다. 환상으로 가려진 세계이기에 그 환상의 눈 뒤로는 은밀한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는 여러 가지 단면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만화가 종이책이 아닌 인터넷으로 통해 웹툰으로 등장하면서 만화는 재미만 보는 어린 학생들을 위한 장르가 아니라 전 국민이 즐기는 오락물이 되었다.

 

하지만 조금 걱정하는 것은 웹툰 작가의 현실이다. 그들의 웹툰은 공공성이란 이름 아래 제대로 된 대가를 받을 수 없고, 그들의 어려운 여건은 다양한 만화문화에 벽으로 가리게 한다. 웹툰의 가능성이 누구나 그리고 올리고 누구나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만화라는 것이 어느 순간 일상적인 공간에 우리에게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리뷰는 잘 올라와도 만화는 그렇지 못하다. 만화가 너무 간단하고, 다른 매체에 비해 그 정보전달력의 난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화에 대하여 비평한다는 것은 쉽게만 보이는 것에 가려진 의미를 찾는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숨바꼭질 놀이에서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만화평론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사철학>의 내용에도 나온 것처럼 어떤 유치한 이야기도 찾아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없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혹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점점 생장해 가는 작품을 비유적으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라고 본다면, 해설자는 마치 화학자처럼 그 앞에 서 있고 비평가는 마치 연금술사처럼 그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설자의 경우에는 다지 나무와 재만이 그의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비평가의 경우에는 그 불꽃 자체만이 하나의 수수께끼,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의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따라서 비평가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지나간 것)의 무거운 장작더미와 체험된 것의 재위에서 아직도 살아서 타오르고 있는 생생한 진리를 물어 보는 데 있다(372~373페이지 <비평개념과 예술개념>).”

 

만화는 죽어 있는 존재가 나오는 곳이고 만화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은 살아있지 않은 존재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인다. 만약 만화평론을 한다면 애니메이션 역시 비평을 하는 것이 바르고, 그것은 마치 살아있지 않은 생물에 대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듯 그것이 계속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듯 활력을 넣어야 하는 것이다. 도저히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가려진 인식과 틀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전에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해외의 유명한 영화감독이 작품을 내면 비평가 10명이 붙어 같이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0명의 감독이 작품을 내도 소수의 비평가들만 의견만 낼 수 있다. 그 만큼 비평문화라는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다. 비평이란 것은 어느 대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통해 의견을 내는 것이다. 그런 비판의 기초가 되는 것이 세상을 보는 힘일 것이다. 만화를 계속 연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자리 잡은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그것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성과 지성을 펼치는 것도 쉬운 세상도 어렵지만, 자유로운 표현조차 과거의 만화분서갱유라는 악령이 다시 찾아올 것 같은 시대인 것 같다.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학과에서 제작한 <만화비평> 2번째에서 이한열 만화상에서 수상한 작품을 실었다.

 

이한열이란 사람은 본래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연세대학교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는 지난 6월 항쟁을 촉발이 되게 한 인물이다. 이한열의 민주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만화라는 매체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것도 그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엇지>에서 만화평론가 박석환 교수님이 웹툰에 대한 편을 집필하면서 영화 <변호인> 장면이 나온다. 영화 <변호인>의 감독은 웹툰작가 양우석이고, 영화 <변호인>을 보면 마지막에 송변호사가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두고 집회하는 모습이 나온다. 만화와 민주주의라는 설정에서 부자연스러우나 만화라는 매체는 항상 억압을 받은 매체다. 만화비평 <엇지>에서도 그런 사회적 억압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만화문화와 만화비평체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만화문화 <엇지>하오리까라는 의문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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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5-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한열 열사가 만화동아리 학생이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엇지'라는 잡지가 잘되었으면 합니다. 한국 만화가 좀 살았으면 좋겠어요.

만화애니비평 2014-05-27 13:51   좋아요 0 | URL
오덕으로 그러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