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황봉모.박진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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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너무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 그의 저서엔 <게공선>은 1930년 실제 게잡이 공선의 일을 토대로 계속 연구하고 조사하여 만든 소설이다. 그 안에서 누구의 이름은 없다. 오로지 아사카와라는 감독이란 이름만 나온다. 몽둥이를 들고 혹은 권총을 들고 무력으로 선원들을 잡아대는 무법자, 그런 무법자는 자신에게 밀어준 권력에 빌붙어 마치 자신이 제왕으로서 군림한다. 그는 제왕보다는 그저 독재자고, 폭력만 추구하는 불한당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세계에선 이런 불한당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된다. 여러 곳에 글을 적을 때마다 하는 말이나 나는 개인적으로 정의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정의실현, 정의를 위해라는 슬로건만큼 쓰레기 같은 것은 없다. 정의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나 모든 것을 다 외면하고 박대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의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편할 때 얼마든지 우려먹을 수 있는 좋은 단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수재들에게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존 롤즈의 <정의론>을 읽는 순간 정의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정의는 오히려 상대적인 가치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가치란 즉 상대편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을 넘어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가치가 무너지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보통 나는 베스트셀러라는 도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무나 읽고, 소장하여 그 책의 본심과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찾을 수도 없는 책에 얽매이는 부류에 대하여 그냥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이 책 <게공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일본에서 150만부가 팔린 이 도서, 처음 나오던 때도 3만 이상 팔린 이 도서가 베스트셀러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것은 이 책이 그만큼 잘 만든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에 보이는 색깔은 전혀 밝은 빛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비참한 분노를 보여주는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이외에 그의 다른 서적이 읽고 싶어졌다. 그의 책에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전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분노에 찬 작가의 본인이었다. 후기를 읽어봐서 더욱 심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자신과 친하게 지낸 동료들이 경찰서에 가서 무척이나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심한 고통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 <게공선>이 <게잡이공선>으로 나온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 제1권은 그야말로 악의가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 보인다.

 

<방설림>이란 작품을 보면 모든 것을 잃은 겐키치의 분노도 선하고, <1928년 3월 15일>에는 고문취조실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운동가들의 비명소리도 들린다. <게잡이공선>은 순수하게 게를 잡아 가공하는 배에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방설림>은 삿포르에 떠난 연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아버지가 일꾼 땅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는 겐키치의 분노가 보였다. <1928년 3월 15일>에는 일본에서 군군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다나카가 총리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들에게 반대되던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이 나온다.

 

안 그래도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적으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 성우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유키노 사츠키라고, 40대의 여자성우가 있다. 한국에서 흔히 <이누야사>라는 작품의 카고메나 <풀메탈패닉>의 치도리의 목소리로 유명하다. 그 성우가 일본의 유사법제라는 것이 2003년에 일본 국회에서 통과할 때 치안유지법에서 국가총동원법이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글을 찾으면서 국가총동원법은 일본이 1938년에 만든 법으로 일본에서 가장 부끄럽고 더러운 역사인 위안부 및 강제징용의 근거가 되는 법이었다.

 

일본에서도 그런 암울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 시대에 대한 반민주적 반평화적 반자유적인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일본 역시 그런 문제가 되는 법에 대한 심각성을 잘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다. 바로 그러한 것이 <1928년 3월 15일>이란 작품에서 저런 내용이 생각나는 문구가 있었다. 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류키치가 순사에 의해 잡혀갔을 때 하던 이야기가 인상 깊다.

 

‘류키치는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보라구 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 헌법에 말이다. - 일본 신민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심문,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말이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정신 법률 수속을 밟아 체포, 감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나? - 이 속임수와 순 거짓말!”

 

실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사실적이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고문 기술자나 또는 고문을 하는 기술이 마치 독립군을 고문하던 일본 순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얼굴표정이 마치 내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 오는 기분이었다. 고문에 대한 이야기에서 얼마나 심하게 구타했으면, 정신상태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었고, 고문을 할 때 사람의 목을 졸라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비단 우리만 아니라 일본의 자국민까지 이어지고, 특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이어진 것이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책을 보는 순간 그들과 왠지 모를 공감이 형성되었다. 암울한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비참함에 시달렸나? 우리나라에서 산업화의 일꾼이라고 하던 자들은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시간과 끔찍한 근무환경에 병들었다. 잠도 못자고 일하다 재봉틀 바늘이 손가락에 찔린 여공, 프레스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에 왠지 모르게 송곳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기서도 안타까운 내용이 소설에 나온다. 작가가 괜히 아픈 신음소리를 내며 만든 소설이 아닌 이유는 롤링에 2사람이 끼여 배출구에 나온 사람들은 아주 얇은 쥐포처럼 나온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하나, 그 소설 자체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인간에게 철학이란 말은 여기서 바로 나오는 것 같았다. 일본의 1920~30년대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1960~70년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해 외국의 문물을 본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일본의 30년 후의 모습을 우리가 밟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깐 지금 우리는 1980년대의 일본이라고 할까나?

 

부동산 투기와 버블경제로 인해 침체된 서민경제, 그리고 국가는 부유하나 국민은 가난하며, 여전히 권력은 못사는 사람을 위해가 아니라 못사는 사람을 쥐어짜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설림>에서 겐키치의 연인이던 오요시의 죽음은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삿포르에 일하러갔으나 처음에 일을 하려고 했으나 어느 부자 아들의 애인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임신하자 버림받았다. 집에 와서도 제대로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고, 만삭의 배로 추운 겨울 창고에서 잠을 청하다 산통이 오자 이내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의 편지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겐키치를 떠나온 그녀는 삿포르 도시에서 부자 아들에게 있는 그대로 다 버림받은 것도 한이 맺히나 자신이 사랑하던 겐키치와 결혼하지 못한 것이 더 한이었다는 점이다. 삿포르를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입을 챙길 수 있는 가정형편이 못 된 것이었다. 훗카이도의 무서운 추위를 이기고 개척하러 간 농민들이었으나, 그 농민이 만든 땅을 모두 지주가 채가고, 그들의 지주의 농노로 전락했으며, 이제 그 소작조차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심지어 강가의 연어조차 모두 독차지한 장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어떻게 그 상황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푸성귀에 된장을 넣고 끓인 국은 먹다가 토할 것 같고, 쌀은커녕 감자와 호박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들의 식단,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해지는 그 시간까지 일만 하는 농민들의 얼굴을 까맣게 타들어가고, 손은 소나무 껍질보다 더 거칠었다. 가지지 못한 자에게 어디에 가서 호소할 수 없는 것만큼 더 서러운 것은 없었다. <게공선>도 그렇고 <방설림>도 그렇다. 선원과 농민이 있는 힘을 다해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비참한 생활일 뿐 더 나은 미래는 없었다. 단지 일하고 일해 오직 해방되는 순간은 죽음이란 말처럼 너무 끔찍했다.

 

<1928년 3월 15일>에서 개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강가에 빠져죽을지 알면서도 향한다고 한다. 그 미래를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희생하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얼마나 한이 맺힐까?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암울한 상황과 거기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아무리 고문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노동운동가들은 실제 일본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역사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 인간의 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피로 끝난다.

 

물론 그 당시보단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비정규직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2개 내지 3개를 하는 바이트족도 생겼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이며, 그렇게 일하는 자리도 서로 경쟁자가 몰리는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게공선>이나 <방설림>에서 그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 가혹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흘러온다는 사실이다.

 

당장에는 국가적으로 부를 축척하고, 기업가들에겐 큰 이익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나라에는 미래와 희망을 죽이고, 스스로 살을 깎는 일로 되는 것이다. 단지 살이 깎는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는가? 아니면 덜 폭력적으로 해결하는가이다. 물론 비폭력적이라고 해도 그 상황에서 처한 약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국가에서 국민은 헌법 위에 있어야 하나 헌법이든 인간이든 모두 돈이 위에 있다는 점에서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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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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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변증법을 다룬 내용이 기억난다. 양이 일정량에 도달하면 질로 변화하는 것을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물론적으로 사회적 현상을 하나의 과학적인 연구로서 접근했다. 바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분야는 매우 크며, 사회과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다소 마음속으로 꺼리는 말일 수 있으나 사회과학은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심리학, 지리학, 법학 등이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이란 단어는 결코 낯선 단어는 아니나, 마르크스의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회과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사회라는 인간이 모인 공간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인 논리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도 나온다. 그런 요소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이다. 예전에 내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던 중, 공장법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령 영국에서 하루에 노동자에게 권고하는 노동시간은 10시간이나, 사실 실제 노동시간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이고, 때에 따라서는 9시를 넘고, 더 심하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일을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깐 아침 7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다.

 

사람이 하루 노동시간을 두고 말할 때 과연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까? 참고로 이 소설의 토대가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하쿠아이호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게공선이란 이름처럼 게를 잡아 가공하는 이 선박은 해양관련법규나 또는 공장관련법규에 전혀 저촉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2가지 법에 해당되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중간으로 빠져 나갔다. 이런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법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근무하는 장소가 육지가 아닌 바다라는 점이다. 바다에서 근무하게 되면 교통수단의 문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누가 어쩌다 죽게 되어도 그저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사고사 내지 의문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멈추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게공선>처럼 어류를 잡는 선원이 아닌 화물을 나르는 선원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을 넘을 경우도 있고, 선박이 워낙 노후 되어 가스배관에서 연기가 새어나와 일과를 마치고 나서 정리할 쯤에 세수하다보면 코에는 그을음이 생기고, 목은 가래로 가득하다. 게다가 악독한 노동환경으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고, 온 몸에는 상처와 화상이 가득하다. 이것이 내가 본 우리나라 노동자 1명에 대한 시선이다.

 

그만큼 선박에 타고 있는 노동자, 선원들은 매우 가혹한 환경에서 일을 한다. 허먼 멜빌이 만든 소설 <모비딕>을 보면 알겠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버림 받거나 또는 갈 곳이 없어서 몰려든 사람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비참함을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심한 노동 뒤에 아무리 대가가 온다고 해도 과중한 노동에 의한 육체적 손상, 기계적인 일상과 비인간적 대우는 인간의 가치관을 긍정적이지 못하게 바꾼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부조리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까울 분이다.

 

그런 점에서 <게공선>에서 보인 일본 게 낚시 선원들은 비참함을 넘어 죽음과 마주보고 있다. 선박의 환경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바닥은 언제나 악취로 가득하며, 감독이란 자는 고용주에게 직접 고용되었다는 것만 믿고 횡포를 부린다.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도가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흰색의 토끼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언제나 위험으로 가득하고, 특히 기상조건은 재해사고로 이어진다. 폭풍이 불어오면 배는 육지 근처에 정박하거나 혹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나 감독인 아사카와는 무리하게 배를 움직인다. 그리고 게공선에 달린 통통배를 보내어 그 배들이 폭풍에 휘말려도 배 안의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 대신 배들이 없어지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취급당하며, 그것도 고정적인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의 베어링 내지 벨트로 취급당하면 매우 심각해진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고 있다면 차 그 자체는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차 안의 타이어나 와이퍼는 쉽게 바꾸고 버릴 수 있다. 그런 자동차의 부품처럼 인간이 동원된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 상황에서 계속 인간은 참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증오를 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증오가 일정 라인을 돌파할 경우 인간은 자신의 인내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말하던 질과 양의 교환법칙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몰리면 성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단지 그 바뀌는 순간까지 관성의 법칙이라는 습성으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계속 비관하면서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착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되며, 그 상황은 다른 상황과 전재로 이어진다. <게공선>에서 잔혹한 노동착취로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진행시켜주지 않은 아사카와에 대한 분노가 결국 선박 내부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사카와가 해군전투함에 신고하여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두 번째는 파업이 성공하여 배가 다시 항구로 돌아오자, 파업을 하던 선원은 경찰서에 수감 후 풀려났으나, 아사카와와 그의 일당들은 돈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 결국 권력의 앞자리가 된 자 역시 그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버림 받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보면서 권력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권력에 충성하여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는 소수이고, 권력을 찾으러 오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찾으러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가는 실처럼 이어진 권력의 끄나풀을 잡기 위해 달려들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도 계속 인간들은 달려든다. 아니 오히려 그 끄나풀이 잘리면 그것을 대신할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는 아사카와 같은 인간들이 넘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권력에 아부하여 자신보다 불리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말이다. 작가인 코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노동자의 현실만 고발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고통 받는 대만과 한국도 같이 거론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겪는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기술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포인 일본인 중에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일본은 전쟁을 멈추고, 다른 민족을 자유로이 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데올로그가 결국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게공선> 내에서 처음 일본군함을 보던 선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외치나, 처음 아사카와 감독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일본군함에서는 무장한 일본수병을 보트로 태워 보내 파업을 주도한 9인을 체포하였다.

 

결국 군함이란 국가라는 권력은 약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게공선의 사장인 국회의원에게 협조한 것이다. 게공선의 선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훗카이도 위의 소비에트연방 국경으로 향하고, 일본군함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게공선과 같이 동행한 이유는 선박보호 차원도 있지만, 해양측량 및 기상관찰이란 명목으로 첩보를 펼친다. 결국 군함이 보호하는 것은 게공선의 선원이 아니라 게공선의 게가 든 통조림인 셈이다. 초반에 하쓰코호가 근처에 있던 다른 게공선이 선박이 너무 노후 되어 침몰하자, 하쓰코호에게 구조요청을 보내지만 아사카와 감독은 반대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악마 따위나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어이 도대체 이게 누구 배지. 회사가 돈 내고 빌린 배잖아. 뭐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회사대표 스다님과 여기 있는 나뿐이야. 당신, 선장이라고 잘난 척을 하는데, 그 까짓 건 똥간 종이만도 못해. 알기나 해. 그런 일에 상관하지 마. 일주일을 허비할 수 있어. 하루라도 늦기만 해봐. 게다가 지치부호는 과분할 정도로 큰 보험에 들어 있어. 다 낡은 배야. 가라앉으면 오히려 이익이야.”

 

생각하면 아사카와 감독이 타던 배도 매우 오래되어 언제 침몰 되도 이상하지 않은 배인데도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되는지 상관 없다와 오히려 그런 일로 보상금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왠지 요새 우리 사회를 보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착각에 빠진 게 우리 사회의 모순처럼 아사카와 같은 인간은 국가와 기업에 충성심에 빠져 그것을 망각한다. 물론 소실이지만 치지부호라는 게공선은 SOS가 닿지 않은 채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왠지 이 모습을 보면 2014년 대한민국 최고의 악몽인 세월호 사건이 생각난다. 아마 선장이나 선주 그리고 정부기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에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아사카와의 말로처럼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게공선의 하쓰코호를 만든 자들은 아직도 근엄하게 큰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억눌린 자들은 매일 힘들게 일을 하나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늘 병마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타락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고통과 착취가 가해지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시킨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바꾸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서 <게공선>에선 연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폭력적 방법으로 되어서도 안 되고, 그 자체도 불가능하다. 결국 작은 변화를 꾸준히 모아 해결갈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상징하는 인물로 의사가 있는데, 그는 아마 인도주의적인 자일 것이나, 결국에 현실의 모순을 바꿀 수 없었다.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법학자, 의사, 언론인 등과 같은 엘리트 들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에 속하는 이들의 인도주의는 번역가의 지적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인도주의자조차도 참 드물지 않나 싶다. 아직까지 인간이 대체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 도구가 없다면 사회조차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다. 재생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이길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변증법이란 질과 양의 관계처럼 단순히 한 번에 모든 것을 뒤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바꾸어 가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아야겠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거부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확신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일까? 매년 자살로 또는 산업재해로 또는 혼자 외로이 죽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현실에서 <게공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시라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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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 2014-07-2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작 중에 [게어선]이란 영화가 있어서 메모해 두고 있었는데 읽어보니 이 책이 그 원작이겠군요. 가능하면 책을 읽도록 해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3 15:34   좋아요 0 | URL
게어선이면 딱 그렇군요

lmicah 2014-07-2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다룬 TV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이 책의 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쿠사이의 작품에는 후지산이 등장하고 이 책의 표지에는 게공선이 등장하지요.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출간된 지 80년이 지난 책임에도 현실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책입니다. 리뷰도 기가 막히게 잘 쓰시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7-24 22:39   좋아요 0 | URL
호쿠사이의 그림이 저 책 표지로 사용하였지요. 리뷰는 다들 도움이 주시니깐 이렇게 적는 것이죠.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직장을 어서 서울로 옮기시지요 !

만화애니비평 2014-07-25 08:19   좋아요 0 | URL
일자리가 없고, 집도 문제고!!..ㅠ.ㅠ
 

이번 3분기 애니메이션 중에 <아키메가 벤다>가 주목받고 있다. 그 작품을 처음 1화만 봤을 때 쳅터편 제목이 "어둠을 베다"이다. 2화와 3화는 각각 "권력을 베다"와 "응어리를 베다"로 나온다.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자면 칼로서 베다라는 것으로 통해 무엇을 어떻게 베고 싶은가라는 목적의식이 드러난다. 그것은 1화부터 등장한 타츠미의 수도에 오면서이다. 수도라는 곳은 황제가 사는 곳으로 거대한 도시이며,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다. 그곳에는 왕족부터 시작하여 귀족들이 살고 있으며, 거리에는 하층민들이 주로 돌아다닌다.

 

타츠미는 처음 도성에 와서 나이트레이드 멤버인 레오네에게 돈을 털린 후 길거리에서 노숙하던 중 귀족아가씨의 도움으로 신세를 지게 된다. 문제는 그 귀족의 집에 가면서부터다. 귀족의 집안은 화목하고, 친절한 분위기로 타츠미는 안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타츠미가 머물던 다음날 밤, 나이트레이드가 침범하여 맨 처음으로 그 집안의 안주인을 칼로 베고, 다음으로 파수병과 귀족남자를 베어버린다. 그 뒤로 귀족의 딸을 베려고 할 때 타츠미는 그녀에게 죄가 없다며 말리지만, 알고보니 그 집안 전체가 시골에서 올라온 나그네들을 집으로 유인하여 약 탄 음식을 먹인 후 잔인한 고문을 한 것이었다.

 

작품에서 보이는 광기는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일> 3편과 4편에 나올 정도로 잔인했다. 그 가족들은 타인에게 고문과 생체실험으로 쾌락을 가진 것이다. 이런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에 인류는 그동안 이런 잔혹한 일들을 계속 했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731부대 마루타 실험이나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광기는 인간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고 회의감을 가질 정도다. 물론 <소돔의 120일>에도 그런 잔인한 살인마도 있었다.

 

부패한 정권과 각료 그리고 거기에 동화되어버린 국민들, 프랑스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국민들은 귀족과 성직자의 과중한 세금과 향략에 시달렸으며, 그 분노가 촉발되어 바스티유감옥이 함락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이트레이드란 존재는 폭력과 불관용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된 사회다. 정의와 도덕에서 도덕은 윤리와 다르다. 윤리는 상대방의 입장과 조건 그리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필요하나, 이와 다르게 도덕이란 하나의 법과 제도적인 요건이다.

 

법과 제도는 권력층에 의해 조직되며, 법과 제도가 과연 하층민이나 대다수 국민에게 효율적으로 다가오는지 아니라면 역으로 고통과 분노를 전달한다면 그 사회의 도덕과 정의는 타락한 것이다. 타락한 윤리가 하나의 정의와 도덕이 되었기에 타츠미는 사디즘에 빠진 소녀의 파수병에게 도성의 현실을 듣는다. 어린 왕은 무력하고, 주변의 신하들이 권력을 조작하는데, 요괴보다 더 요괴같은 존재들이 그들이며, 만약 이런 애기가 밖으로 새게 될 경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기에 그 어떤 협의나 토론으로 그 사회는 구제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그대로 썩어들어가 결국은 내부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 정치적인 상황이다. 그런 어두운 권력이 만든 정의를 다시 정화시키려면 방법은 그 사회 자체를 붕괴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것은 바로 그렇게 피지배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는 계급을 전복하여 사회구조를 변모시키는 행위다. 문제는 혁명이란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세력이기에 기존의 지배계급에겐 강력한 공권력 내지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사람들이며, 무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렇다. 무력을 소유한 곳은 대부분 국가권력기관과 왕족, 귀족들이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들은 그들에 대해 대항할 능력이나 조건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면 혁명이란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그런 혁명을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반영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반영웅이라 칭한 것은 국가에 대해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로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테러로서 혁명적 행위를 하기에 칭한 것이다.

 

영웅과 반영웅은 같은 존재이나 시점과 세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타츠미가 사는 국가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반역자고, 작품 내의 시점에서 정의를 가진 처형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대해 정치적인 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테러리즘으로 대항하므로, <아카메가 벤다>라는 작품은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 중에서 단재 신채호와 이회영 선생이 유명한데, 그들의 방법은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목표대상에게 몰래 접근하여 암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그렇게 테러리즘에 의해 입각한 것이다.

 

<아카메가 벤다>는 바로 반국가적 테러행위로 어두운 권력과 부패를 베려고 하는 것이다.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는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조금 의아하나 제작사는 <슈타인즈 게이트>와 <슈퍼 소나코>를 제작한 업체로, <슈타인즈 게이트>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통치한 것에 대하여 2CH에서 거기에 대한 조롱하는 내용을 작품 내에 그렸으며, <슈퍼 소나코>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고 하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작품을 만든 제작사인데, <아카메가 벤다>는 위 2작품과 다른 관점으로 제작되었기에 조금 의아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에서 아나키스트로 고토쿠 슈스이가 있으며, 그의 저서인 <장광설>은 단재 신채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1911년 천황 암살기도로 처형을 당한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안중근 의사를 칭송했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나 1930년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모임에서 각 국가별 대표가 나올 때 일본인도 있었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아키메가 벤다>는 작가 스스로가 아나키스트는 아니겠지만, 작품 그 자체적으로 아나키스트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가 작품으로 통해 일본이란 현실을 보는 것은 부조리와 부패로 가득한 것이고, 그런 문제점을 일반인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약한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사회인만큼 <아카메가 벤다>처럼 누군가 그런 현실을 바꾸어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담겨있다. <아카메가 벤다>에서 나이트레이드는 국가라는 조직은 철저히 부정하며, 그 국가조직의 권력인 귀족들에 대해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다. 그래도 일본에 대해 국화와 칼이라고 말할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칼에 대한 일본인의 집착을 볼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유혈되는 하드 고어한 설정 속에서 칼로서 적을 베어 어두운 현실을 타파한다는 설정은 칼(도쿠가와 이후 메이지시대~현재)로 만든 일본이 이제는 칼로서 다시 베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심리가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로 조선에 대한 강제통치시절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요인사의 후예들이 여전히 일본정치계의 거물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 총리 아베의 경우 역시 그런 점범들의 후예들이고, 전범들의 후예들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보단 오히려 영광의 역사로 알고 있다.

 

그들은 일본 정계에 진출하면서 각종 경제인사들과 유착하고, 거기에는 야쿠자 조직도 관여하고 있다. 과거 칼로서 지배하고 칼로서 침략하던 이들이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칼(일본 자위대 군사조직화)을 세우는 현실에서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그런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에 사는 만큼 <아카메가 벤다>는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아카메를 벤다>에서 아카메가 속한 나이트레이드는 무장테러를 감행하는 혁명조직이다.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처럼 일본이 점령당한 것도 아니고, 기존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개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주인공이 속한 국가를 부정하는 작품은 드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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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icah 2014-07-1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메이션 쪽은 완전히, 100% 문외한입니다. 당시 누구나 읽던 <슬램덩크>가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입니다. 그건 애니는 아니죠?^^ 애니와 만화조차 구분 못하는^^;;
페이퍼의 수준이 대단하세요. 애니메이션에서 사회정치 구조적인 전반에 흐르는 문제제기 까지. 잡지에 실린 칼럼 읽는 것 같아요. 곰곰발님 서재 방문해서도 깜짝 놀랐었는데, 만애비님도 만만치 않으시군요. 진심으로 후덜덜입니다.
종종 들러 배워갈게요.

만화애니비평 2014-07-18 20:57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제가 곰곰발님이 인정한다는 그 오덕입니다. 오덕을 위해 이 한몸 불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열심히 잉여적으로 글을 적고 있습니다.
슬램덩크 기억나는군여. 소년챔프 매화마다 본 기억이...형집에 애장본이 있어서 가끔 형집(멀리있지만)에 가면 오덕력을 보강하지요.
애니메이션으로 하나의 언어로서 글을 적고 있습니다. Imicah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당~!

2014-07-20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1 08:35   좋아요 0 | URL
오오 기사도 쓰시다니 대단한 분이 오셨군요! 반가워요!
저는 오덕이라고 자부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오덕을 즐기기 위해 오덕으로 살아가는 오덕입니다. 모든 오덕의 권리는 오덕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할까요~
서재활동은 저도 이제 2년차입니다. 하다보니 쏠쏠한 재미도 보고 있죠. 곰발님이 네이버블로그를 떠나 알라딘에 정착하면서 어떻게 하다가 활동중인데,
아이디가 만애비처럼 네이버 역시 만애비입니다. 애니메이션 리뷰하는 것이 취미다보니 이렇게 바꾸었죠.

최근 애니메이션을 주로 TV로 많이 봅니다. 애니플러스와 같은 정액제 사이트에서 실시간 동영상을 즐기는 편이죠. 물론 최근 빨간머리 앤과 같은 극장판도 보았죠.

참고로 제게 제시한 쓰르라미 울적에는 거의 다 보았습니다. 인간의 심리묘사(특히 성우의 연기력이 압권!)가 탁월한 작품이죠. 괭이갈매기 울적에라고 용기사07의 작품 역시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죠.....

게가 페인과 에르고 프록시 나중에 새겨야겠군요.
에우레카 세븐은 물론 보았지요. 프레이져 경의 황금가지가 그대로 써먹는 애니가 있다는 것을 보니 깜짝하고 놀랐습니다. 어째든 자주 들려주세용..우후후후

뷰리풀말미잘 2014-07-2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심으로 대동단결!! 즐찾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2 22:11   좋아요 0 | URL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아니라
스즈미야 하루히의 SOS단 선언!!!
 

1. 추억의 애니메이션 or 애니메이션의 고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처음 보던 것은 언제인가? 예전에 분명 본 기억은 있으나, 너무 어린 시절에 보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아이돌 가수 린 민메이라는 소녀다. 그리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애니메이션보다는 팩을 게임기에 꽂고 실행하던 시절, <마크로스>라는 게임이 있었다. 단 1기의 로봇으로 변신할 수 있는 전투기 1대가 나와 일직선으로 날아가면서 적들과 싸운다. 그 당시 들었던 노래제목은 몰랐으나 알고 보니 노래제목이 소백룡(小白龍)이었다. 작은 백룡을 의미하는 이 노래제목은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에서 린 민메이와 그녀의 사촌 오빠인 린 카이훈이 등장한 영화 OST이다. 게임에 몰두할 때 머리에 춘권 모양을 한 소녀가 나온 것은 기억이 난다.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는 추억의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추억의 게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전설적인 고전이기도 하다.

 

2. 오타쿠의 용어 탄생

오타쿠란 용어가 있다. 일본에서는 오타쿠라는 의미는 한자로 御宅로서 발음으로 보면 おたく(otaku)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이른바 오덕후로서 간단히 줄여 말하여 오덕 내지 덕후로서 불린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주인공 파일럿인 이치죠 히카루가 하야사 미사라는 상관에게 중위 내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보단 오타쿠라고 처음 말한다. 즉 상대방의 칭호를 부를 때 그 사람의 댁이라는 의미를 높이 부르는 오타쿠가 이제는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튬 플레이, 밀리터리를 비롯한 수많은 하위문화에 집착하는 매니아들에게 적용되었다. 현재는오타쿠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조금 맞지 않은 부류로 만화, 애니메이션, 코스튬플레이, 게임 등에 흥미가 많은 사람으로 이어졌다. 본래의 오타쿠는 소비만이 아니라 생산의 영역에 직접 뛰어든 사람들에게 적용된 말이었다. 그러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등장한 오타쿠란 말은 이제 한국에서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언어가 되어버렸다. 이런 단어를 파생하게 만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란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3. 시대적 흐름과 탈(脫)자국주의적인 작품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나오던 시절은 1982년이다. 당시 세계는 미소 냉전시대였으며, 중공에는 모택동 사후 등소평이란 인물이 등장하여 개방화 정책을 펼치려던 시대다. 얼어붙은 냉전의 시기가 조금씩 풀리던 시절이다. 그런 점에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시대적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른바 자유주의 시장국가에서 적대시 여기던 공산국가와 무역과 교류가 일어나던 시기다. 먼저 히로인이면서 여자주인공인 린 민메이는 일본인으로 나오지만, 본래 자신의 집과 그녀가 일을 도와주던 삼촌댁 모두 중화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린 민메이는 차이나스타일의 의상을 입었으며, 가게 일을 돕고 있을 때는 차이나 스커트에 헤어스타일 역시 춘권으로 만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과거 태평양전쟁의 앙금은 남아있었지만, 서로간의 교류가 점점 활발해지고 있던 것이다.

 

또한 당시 1980년대 일본만화의 흐름을 보면 중국이 배경이 되거나 또는 중국무술이 상당히 차용된 시기가 있었다.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란마 1/2>이 있으며, <쿵후 소년 친미>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란마 1/2>에서 란마와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 무술수행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란마의 의상은 일본의상보다는 중국 무술인들이 입는 복장이었고, 란마의 집에 찾아오는 불청객들 대부분 중국인들이란 점이었다. 미국 일본문화 전문가인 수전 J. 네피어 교수의 <아니메, 인문학으로 읽는 저패니메이션>에서 <란마 1/2>에서 작품배경이나 소재가 중국이 많은 이유가 과거 일본이 중국에 저지른 만행(난징대학살, 731부대 마루타실험, 만주국 괴뢰정부 등등)에 대한 죄의식이 깔려 있다는 내용이 있다.

 

중공과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그 당시 일본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에서 중공은 적대적 관계보단 하나의 모티브 내지 설정이 되기도 했다. 중국무술의 경우 이소룡의 <용쟁호토>를 비롯하여 성룡의 <취권>이 흥행하면서 중국이란 국가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보이는 중국의 모습이란 린 민메이라는 아이돌가수가 도와주는 가게이고, 그녀가 중국식 의상을 입고 있는 점을 본다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상당히 자국주의 요소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주인공인 린 민메이와 하야세 미사, 그리고 남자주인공인 이치죠 히카루는 일본인이지만, 주변의 주요인물들은 다양한 국가와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크로스 함장이 브루노 J. 글로벌이란 장군처럼 지구에서 떠나 우주공간에 머무는 마크로스함이지만, 그 함의 선장이 흑인이고, 히카루의 상관과 더불어 조종선배인 포커 역시 동양인이 아니란 점이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일본인 특유의 문화적 요소가 많이 배제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사쿠라라는 이름은 많이 등장하는 법이다. 물론 등장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사쿠라라고 하는 벚꽃을 최대한 강조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마크로스함의 함장 이름이 처음부터 글로벌이고, 글로벌은 세계이다. 하지만 그 글로벌의 함장의 이름처럼 세계화라는 것은 지구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통합이란 점이 아쉬울 뿐이다.

 

4. 환영받지 못한 공동체 마크로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장 처음 전투는 젠트라디인들이 지구 마크로스함을 공격하면서부터다. 젠트라디인들은 지구인들이 고대 프로토 컬처라는 문화를 가진 존재로 각인하고, 지구를 침범하지 않는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우주감시관의 배였던 마크로스였고, 그 마크로스를 파괴하기 위해 지구를 침공하고, 마크로스함은 우주로 향하여 워프하게 되고, 그 뒤에 젠트라디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투를 벌이게 되면 전쟁영웅이 등장하고, 영웅의 활약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포커의 후배였던 이치죠 히카루는 전쟁에서 큰 전환점을 바꾸고, 젠트라디와 전투를 계속 유지하면서 지구에 다시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지구로 돌아온 마크로스함은 환영받지 못하게 된다. 마크로스함이 젠트라디의 목표물이고, 그들이 외부로 나가준다면 지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며, 젠트라디들은 프로토 컬처에 대한 공포로 지구를 함부로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지구에 오게 되면서 마크로스함에 붙어있던 거주민들은 모두 사망 내지 실종자로 처리되어야 했으며, 그들의 생존이 알려지면 지구연합조직의 주요 권력자들에게 좋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조금 양보하여 같이 젠트라디와 동맹을 맺기보단 위험인자를 추방하거나 은폐함으로서 안위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지구로 침공한 젠트라디군에 의해 그 목표는 사라지고, 오히려 마크로스함과 젠트라디군의 전투로 인해 지구가 큰 타격을 받고 만다. 지구인인데도 지구에서 환영받지 못한 마크로스함,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물론 지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함 불시착으로 대규모 전쟁 후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하나, 그 기나긴 전쟁의 구심점이던 마크로스함이 계속 머물 수 있는 것은 편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의 원인이 마크로스함이었고, 그 전쟁의 종료 이후 마크로스 재건은 전쟁의 고통을 넘어 새롭게 시작하려 하던 상징이나, 젠트라디의 공격으로 무산된 것이다. 게다가 우주로 혼자 떠나버린 마크로스함은 지구방위사령부의 그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며, 지구로부터 돌아온 연락은 혼자서 알아서 돌파하라는 것이다. 결국 지구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이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공동체로부터 외면 받은 점이고, 마크로스라는 공간은 지구가 아닌 또 다른 지구가 되어야 했다.

 

5. 화합의 공간 <마크로스>

마크로스는 처음에는 젠트라디와 전투를 위해 존재하던 우주선이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버림을 받고 나서 젠트라디와 계속 교전을 하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크로스에 젠트라디 요원들이 침투하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젠트라디에 의해 이치죠 히카루와 아야세 미사가 강제로 끌려오기도 하였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젠트라디는 우수한 전투력과 강한 육체를 가진 종족으로서 매우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젠트라디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투가 아니라 프로토 컬처라는 것이었다. 과거 아주 우수한 문화였으나, 그 문화로 인해 과거 인류가 망했다는 전설이 유래되어 모든 젠트라디들은 프로토 컬처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오직 몇몇 중요참모들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프로토 컬처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이치죠 히카루와 하야세 미사 일행이 엑세돌이 탑승한 전투함에 오게 되면서다. 포로로 잡힌 이치죠 일행들에 대해 심문하려던 젠트라디 참모들인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으며, 게다가 프로토 컬처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란 점을 알게 된 이치죠와 아야세는 서로 내키지 않았으나 키스를 나눈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서 젠트라디인들을 혼란에 빠지고, 프로토 문화라는 것은 남녀 간의 연애가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마크로스에 마이크론화하여 침투한 거인들은 처음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점점 마크로스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특히 린 민메이의 노래에 빠지자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린 민메이의 노래에 의해 병사들은 마크로스에 투항하게 되고, 심지어 젠트라디 내에서 여자거인이 밀리아는 그녀가 이길 수 없는 발키리 조종사를 찾기 위해 침투할 정도였다. 발키리에 침투한 밀리아는 젠트라디 내에서 아주 우수한 전투요원으로 그 어떤 전투에서 패배한 적도 없을 정도로 용감무쌍한 전사였으나, 오직 맥시밀리언 지너스에게 이길 수 없었다. 맥시밀리언을 찾아 자신의 원수를 갚으려던 밀리아 이었으나, 맥시밀리언을 직접 만나 칼을 휘둘러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맥시밀리언에게 패배를 시인하고 전사다운 죽음을 원했지만, 맥시밀리언이 밀리아에게 보여준 행동은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품에 안고 키스를 나누게 된다.

 

마이크론화 된 밀리아, 그리도 엘리트 파일럿 맥시밀리언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며, 최초로 인간과 젠트라디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기존의 지구에게서 추방당한 마크로스였으나, 새로운 상대방을 만나면 처음에 다투더라도 결국은 서로 화합의 길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크로스가 새로운 가치라고 본다면, 기존 지구방위사령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구시대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그 구시대적 발상을 가진 지구방위사령부는 젠트라디에 의해 파괴되고, 새로운 가치를 내세운 마크로스는 단 1척의 우주선과 발키리 부대로 거대한 젠트라디를 맞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승리의 여신 린 민메이의 노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이치죠 히카루의 활약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단순히 무력투쟁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가 존재하였다. 그것은 바로 린 민메이의 노래였다. 1982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애니메이션 안의 히로인으로서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린 민메이라는 이름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이어 <마크로스 7>과 <마크로스 프론티어>까지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모든 가수의 동경대상은 린 민메이라는 점이고, 마크로스 선단이 존재성은 린 민메이의 노래덕분이었다. 왜 노래라는 것은 그토록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것일까?

 

20세기에 들어와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투쟁의 역사였다. 20세기의 끔찍한 전쟁으로 1차 내지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란전쟁,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지금도 중국에서 일어나는 티베트 분쟁 등이다. 전쟁과 분쟁의 현장에서 인간은 서로 정의라는 이름 아래 상대방을 무차별 살해한다. 죽음의 폭력을 가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들의 정의 아래 실천하는 행동이고, 하나의 절대적 가치이인 반면, 그들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자들은 고통과 증오의 씨앗이다. 서로 간의 적대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까?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보여준 린 민메이의 노래가 바로 그 순간에 등장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인간과 인간이 가진 갈등과 마음의 벽에서 노래로서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에서 이른바 히피문화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카운터 컬처라는 반문화 역시 기존의 권위적인 문화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가령 국가 내의 분쟁에서 아직까지 미국은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행위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했으며, 20세기 킹 목사와 말콤 엑스의 살해는 20세기 미국이 보여준 아주 폭력적인 사건이었다.

 

킹 목사나 말콤 엑스가 활동하던 20세기 경우 19세기 남북전쟁 이후로도 계속 인종차별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그런 시대에도 흑인과 백인 또는 많은 유색인종이 서로 화합하려고 했다. 그 중심에 바로 음악이 있었고, 특히 재즈음악이 있었다. 재즈음악은 본래 흑인들의 음악이며, 재즈는 스탠다드 재즈부터 시작하여 퓨전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나누어져 있으며, 음악스타일이 아주 격조 있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매우 자유롭다. 재즈음악이 연주되면 젊은 남녀들이 서로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무 상관없이 같이 그 자리를 즐겼다. 미국의 유명한 우드스톡 락페스티벌은 베트남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인종차별, 남녀차별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거론될 때 젊은 사람들끼리 그 문제를 뛰어넘고자 만든 하나의 문화다.

 

카운터 컬처의 형태는 결국 기존 세대의 반항과 더불어 상대방과의 교감을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장이었다. 우리가 만약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여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자막과 영상을 의존하여 감상하여도, 그 작품 속에 나오는 노래의 멜로디와 반주만큼은 쉽게 익히고 따라할 수 있다. 노래의 흥얼거림, 그리고 노래로서 전달되는 감정은 민족과 국가가 달라도 서로 공유하고 느낄 수 있던 것이다. 린 민메이의 노래는 바로 그런 인간이 가진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노래로 통한 화합을 이룩할 수 있던 것이다. 모두가 즐기는 자리를 마련하여 폭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서로 같이 연대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

 

그 결과가 젠트라디에 대한 전략을 단순히 폭력보다는 노래로서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서로간의 친목은 서로 다툴 필요가 없기에 희생을 줄일 수 있으며, 희생을 줄이는 것으로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폭력적으로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간 스스로 동물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연적 존재로서 자연 그 자체로 살아가는 동물이라면 그 자체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으나, 문명화된 사회에 감정이 메마르고, 삶의 목적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의 의지아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명령 내지 혹은 타의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인간 본연의 가치를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에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중심이 아니라 조직사회에 모든 것을 충성하게 되면 인간은 인간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그저 부품에 불과한 소모품이 되고 만다. 특히 전쟁에서 인간의 개인성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가 얼마나 더 많이 적을 제거할 수 있는지가 평가될 뿐이다. 그래서 린 민메이의 노래는 전쟁에 참전하여 오로지 적을 더 죽일 수 있는 것만 생각하던 젠트라디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 취미생활을 가질 수 있었으며, 맛있는 요리를 서로 나누어 먹게 되며, 더 나아가 타인과 교류하면서 우정과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는 감수성을 가져야 하며,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노래라는 것이다. 인간은 눈으로 보는 시각적 매체보단 귀로 듣는 청각적 매체에 더 많은 감정을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노래를 귀로 들음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활발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을 느껴야 즐거움도 알고 슬픔도 알고,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 혹은 싫은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면 인간은 인간이기보단 단지 유기물질로 구성된 살아있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린 민메이는 바로 그런 기계 같은 삶을 살던 젠트라디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7. 새로운 갈등을 보여주는 마크로스 남녀관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는 단순히 인류의 내부적 갈등, 인류와 젠트라디의 갈등을 거대한 서사 안에서 보여주고 있으나, 한편으로 개인과 개인적 사이에서도 보여준다. 이치죠 히카루가 가장 많이 오타쿠라고 부른 하야세 미사의 관계는 남녀관계가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선 이치죠는 하야세를 처음 무선으로 통신할 때 아줌마라고 불렀으며, 하야세는 자신을 아줌마 취급하는 이치죠에게 상당히 불쾌감을 느낀다. 게다가 하야세와 그 주변 동료들은 이치죠를 단순히 에이스 파일럿보단 어린아이로 취급했다. 이치죠는 나이가 하야세보다 어리며, 계급조차 낮았다. 하야세는 사관학교 출신인 장교고, 이치죠는 민간비행조종사에서 전투기조종사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하야세는 중위부터 시작할 때 이치죠는 하사부터 시작했다. 물론 이치죠는 계속 전투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하사관직위에서 정식장교로 임명되고, 추후에는 비행편대를 이끄는 영관급 장교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이치죠가 진급하여도 여전히 하야세는 상관이었고, 마크로스가 최후의 젠트라디의 내전을 지구에서 마친 후, 글로벌 함장이 미래에도 외계인들이 지구에 침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민선단을 꾸릴 때 그 이민선단의 최고지휘관으로서 하야세로 지목한다. 결국 기존 사회적 지위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된다는 점이고, 특히 이치죠와 연인을 맺은 하야세의 경우 이치죠보다 나이나 계급이 높은 점에서 남녀의 성적인 영역이 생물학적으로 달라도,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별 차이점이 없는 것으로 드러낸다.

 

특히 발키리 조종사가 기존에 남성이었으나. 맥시밀리언과 결혼한 밀리아 역시 발키리 조종사로 출전하여 전투는 남자만의 세계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일본사회에서 본다면 기존에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역을 남성이 주도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점차 그 자리에 여성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남성도 직급이나 상황에 따라 여성 아래 놓이게 되었다. 현재 21세기에서 본다면 여성CEO 내지 정치인 그리고 많은 사회 인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20세기에서는 지금보다 여의치 않았다. 점점 남성들의 세계가 여성들이 들어오면서 남성은 이치죠처럼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전장의 파일럿과 전투함의 작전장교라는 상하체계가 연상인 여자와 연하의 남자의 관계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위에 있어도 그 여성은 그 남성에 대해 받아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 하야세는 이치죠에 대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문제 파일럿에 버릇 없는 아이로 취급했으나, 몇 번이나 자신을 구해주었으며, 마크로스가 위기에 처하면 가장 먼저 해결해 주었다. 아무리 직급이 낮고 어려도 이치죠가 보여준 활약은 상관으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치죠가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은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

가와이이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귀엽다는 말이다. 하지만 귀엽다는 말은 단순히 귀여운 대상을 보면서 우리가 귀엽다고 해주는 것과 다르다. 즉 가와이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말하자면 cute, pretty로 대체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가와이이는 귀여워도 왜 귀여운지를 생각해야 한다.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에서 이치죠 히카루가 삼각관계에 놓인 린 민메이와 하야세 미사의 모습으로 생각해야 한다. 린 민메이는 아주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기분에 맞추어 행동하는 소녀다. 때에 따라서는 이치죠 히카루에게 매우 매력적인 여자아이로 보여주기도 하나, 때에 따라서는 이치죠 히카루가 잡히지 않는 존재와 같았다.

 

린 민메이는 평소 애교를 잘 보여주며, 이치죠 히카루가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고도 자신의 사촌인 린 카이훈과 사이좋게 지낸다.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노래하는 린 민메이는 화려한 아이돌가수다. 이에 반해 하야세 미사는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로 군인집안의 영애(아버지가 지구방위사령부의 고위참모)로서 항상 규칙과 약속을 중시하며, 평소 행동을 조심히 하는 어른스러운 여성이다. 그래서 하야세 미사는 린 민메이와 달리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지 않은 존재로 나온다. 즉 가와이이 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와이이에 대한 미학적 정의에서 린 민메이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손에 넣고 싶은 존재라면, 하야세 미사는 역으로 잡히지 않고 싶은 존재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와이이 미학은 여자가 남자에게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것보다 여자가 남자에게 애교 내지 변덕으로 보여준다. 처음 린 민메이가 히카루를 만날 때 2사람은 조난을 당한 상태이며, 린 민메이는 마크로스 낯선 방에 갇히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겠다며, 이치죠에게 눈물을 보인다. 이때 이치죠의 마음에는 린 민메이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했으며, 언제나 이치죠는 린 민메이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난에서 구출되고, 미스 마크로스에 당선되며, 가수로서 활동할 때 린 민메이는 생명의 은인인 이치죠에 대해 성심껏 대하기보단 그저 친구로서 대한다.

 

출격하더라도 린 민메이를 생각하던 이치죠가 린 민메이의 미스 마크로스 콘테스트 우승은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린 민메이에 대한 히카루의 미련은 쉽게 버릴 수가 없었으며, 린 민메이에 대해 미련을 남길수록 히카루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가와이이에 대한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미학을 린 민메이에게 적용한다면 가와이이한 존재란 가질 수 없는 존재를 가지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가와이이에 대한 요소는 자신이 지켜주고 싶거나 혹은 뭔가 자신보다 능력이 상황이 낮은 대상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감정이다. 즉 내가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카와이이 요소가 반영된 애니메이션과 린 민메이에 대한 요소가 다른 점은 린 민메이는 히카루와 친구라는 점이고, 지금 애니메이션에선 가와이이 대상이 되는 여성캐릭터가 대부분 어리거나 또는 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존재인 점이다. 즉 동경하고 싶은 상대보단 동정하고 싶은 상대로 바뀌어버린 모에 요소라고 보면 된다. 린 민메이와 달리 하야세 미사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잘 생활할 수 있는 현대적 여성이며, 직장인 마크로스함대 내에서도 매우 우수한 작전장교다. 하아세 미사를 보면 확실히 히로인은 맞으나, 그녀에 대해 뭔가 소유하여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보단 뭔가 같이 서로 의지하면 살아가고 싶다는 감정이 앞선다.

 

두 여자의 차이는 린 민메이는 기존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라면 하야세 미사는 기존 남성이 원하지 않은 여성상인 셈이다. 그러나 히카루는 린 민메이 대신 하야세 미사와 같이 길을 걷기로 한다. 처음에 어리라고 놀림 받던 히카루가 성장하면서 한 사람의 몫을 수행하면서 남성에게 필요한 여성은 처음에는 귀엽고 애교가 넘치는 가와이이 속성을 가진 여성이었다면, 최후에 필요한 여성은 본인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인 점이다. 글로벌 장군이나 이치죠의 선택한 사람이 하야세 미사라는 점은 일본사회가 점차 여성에 대하여 그 여성이 가진 능력과 책임감으로 볼 수 있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가와이이 요소를 가진 린 민메이는 모두의 아이돌로서 팬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변덕은 결국 남성에게 사랑받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사랑받는 여자는 가와이이 요소를 지닌 여자가 아니라 가와이이 요소가 부족해도 자신의 위치에서 충실한 여자인 셈이었다.

 

9. 엔딩 이후의 세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서사의 시작은 평화로운 세계에 어떤 외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그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원래로 복귀하는지 혹은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그래서 서사의 시작은 서사의 종료로 이어지고, 그 종료는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보여준 서사적 특성은 바로 서사완료 후의 서사의 연결이다. 극장판인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라는 작품을 보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TVA의 축소판이기도 하나 조금 다른 서사적 방향을 보여준다.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이야기의 종료는 린 민메이가 프로토 컬처의 노래를 복원하여 그 노래를 우주로 보내 젠트라디와 멘트라디, 그리고 마크로스의 전쟁을 평화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런 서사적 패턴은 최근에 만든 TVA <마크로스 프론티어>에서 그대로 반영했다. 그러나 본래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는 인류가 젠트라디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서로 동맹을 맺고 같이 공존하나, 젠트라디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내전으로 계속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젠트라디인들이 마이크론화하지 못하면 많은 음식과 생활재료가 필요하고, 그것을 나누어줄 형편이 마땅하지 못했다. 전쟁 이후 지구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했으며, 인류가 젠트라디와 화합을 하려고 해도 모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일부 젠트라디인 중에서 호전적인 자는 반란을 도모하고, 테러를 일으킨다.

 

그때는 안타깝게도 린 민메이의 노래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으며, 린 민메이 역시 자신의 노래에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방황한다. 린 카이훈이란 사람은 평화주의자라고 하나, 평화를 위해서 무조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은 중요하나, 그 신념을 일방적으로 따르게 된다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린 카이훈이 린 민메이를 이용하여 돈벌이에 고민하고, 린 민메이에 대해 심하게 간섭하고, 결국 2사람은 갈 길을 달리하게 된다. 린 민메이는 린 카이훈과 활동하면서 예전에 자신을 좋아해주던 이치죠를 생각하게 되고, 이치죠에게 찾아가나, 결국 이치죠는 하야세 미사와 같이 길을 걷는다.

 

어떻게 보자면 전쟁이 끝난 후의 마크로스와 지구의 모습은 보통 애니메이션에 보여주지 않은 에피소드다. 그저 절정의 위기상황을 넘게 되면 그것으로 결말이라는 해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와 젠트라디의 연합을 만든 것과 동시에 뒤에 일어나는 내전에서 평화는 쉽게 가지지 못했으며, 평화라는 관념조차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서로 공감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회가 구조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체계가 정비 되어야 하는 점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처음에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다른 것을 대체되어도 결국에는 다시 본래 원하는 바를 찾기 마련이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엑시돌 참모가 마크로스 내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중요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인류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아니라면 인간은 평화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원하지 않은지 말이다. 답은 둘 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본래 젠트라디인들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프로토 컬처 사람들이 서로 싸우기 위해 만들어낸 인조인간들이었다. 그리고 프로토 컬처 인류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했다. 그런 인류간의 전쟁과 투쟁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마크로스함이 건재되기 전에 10년 동안 인류는 전쟁을 벌였고, 그 전쟁이 끝난 후에 젠트라디군과 전투를 했고, 그 후에는 인류와 연합하려는 젠트라디인이 연합을 반대하는 젠트라디인과 싸우게 되었다. 인간은 계속 전쟁과 투쟁에 의해 살아오던 존재이고, 그런 만큼 평화를 찾기를 바란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결국은 인간은 스스로에게 정의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이 필요한 점이다. 물론 그 소통과 공감은 단순히 인간의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도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왜 글로벌 장군이 하야세 미사에게 우주이민선단을 만들어 지구를 떠나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결국 서로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사는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

 

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이 지구에 사는 존재인데도,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인류는 전쟁을 계속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계속하기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다르게 보면 평화를 위해서다. 인간이 결국 전쟁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평화를 위해 인간이 사는 곳을 포기한다는 점은 다르게 해석하자면 지구 현실에서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다면 지구를 떠나지도 않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평화는 결국 나 혼자 혹은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그것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며, 누구는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워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런 정의와 합리화가 정당한 세상이라면 마크로스함대는 계속 우주를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지구인류로부터 버림받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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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7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17 15:54   좋아요 0 | URL
으아~! 곰발님이 이토록 밀다니...요새 일에 찌들려 책을 많이 읽지 못함이 부끄럽군요

Mephistopheles 2014-09-2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장판 마크로스 마지막 전투에서 발키라가 쏟아붓는 미사일을 슬로우모션로 보며 박장대소 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9-26 08:30   좋아요 0 | URL
아니 전투를 보고 박장대소라니~!!!

Mephistopheles 2014-09-26 15:01   좋아요 0 | URL
그게 말이죠.....회심의 소나기 미사일을 퍼부을 때...슬로우 모션으로 보면..미사일이 아닌 오만가지 별 잡다한 물건들이 튀어나간답니다.(예를 들면 맥주캔이라던지..) 이타노 서커스로 검색해보시면 내용이 나옵니다.
 
교육사유 - 실천하는 교사,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함영기 지음 / 바로세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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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것은 참 어렵다. 왜 어려운 것일까? 사실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키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란 인간에 의해 사회적 그룹으로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현재 21세기가 과거 조선시대 내지 봉건사회였다면 농경산업으로서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히려 어린아이 내지 청소년들을 가리켜 작은 어른이라고 했다. 단지 몸이 작을 뿐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업무나 책임을 이미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서 요리를 하는 소녀나, 논과 밭에서 추수하는 소년들이 있었고, 심지어 10살 내외의 아이들도 나름 잔잔한 심부를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가장 행복은 그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아이였던 청소년들은 지금의 청소년처럼 단순히 보호받고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나름대로 삶의 한 영역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중세유럽부터 근대유럽까지 학교라는 곳은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귀족이나 왕족, 그리고 일부 부유한 사람에 한하여 가능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산업구조는 농경사회가 아니라 경공업으로 변모되면서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공업이란 특성에 인간을 맞추어야 했다.

 

가령 옷감을 만드는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물과 석탄 그리고 재료의 배합을 알아야 했으며, 장거리 수송을 위한 교통에서도 말과 소보단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도구를 다루거나 수리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 기술이 요구되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 산업체계에서 지식은 농업을 하는 것과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가 능률이 좋아지는 만큼 세분화된 작업구조와 그 기계에 대한 작업능력이 요구되므로 공장에서 근로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시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글이 되었는데, 사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서 감옥의 역사에서 감옥은 단순히 법적인 조치로 만들어진 물리적 감옥 즉 교도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학교, 병원 등 다양한 공간에 머무는 인간 역시 감옥 같은 감시체제로 이루어진 셈이다. 제레미 벤담의 일망감시탑인 판옵티콘에서 감시와 통제로서의 기능은 결국 인간에게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라기보단 그저 그 감시와 통제로서 이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교육이 교육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교육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인 권력에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기존의 노동인력이 빠지면 새로운 노동인력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대체되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그 사회는 계속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조직이란 하나의 구조에서 본다면 국가의 운영과 존립에서 하나의 토대를 이루는 하부구조로 되는 것이고, 국가라는 전체적 틀에서 떠나 개인으로 본다면, 교육으로 통해 인간의 자아성찰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그저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제시스템으로 이어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교육사유>로 생각해보는 한국의 교육이란 항상 위기의 연속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근대에서 넘어 탈근대로 이어져야 할 단계이나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려 있다. 이른바 계몽이란 것이 진실한 계몽이 아니라 계몽이란 이름의 새로운 억압으로 등장한 것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으로 되는 것일까? 우리는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자유와 민주주의는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같이 좋은 삶을 살아가야할 가치관이다. 민주공화국이란 단어에서 공화국은 결국 그 나라의 국민이 전쟁이나 위험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단순히 국가외부의 적이나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등장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이 나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비행청소년 내지 각종 왕따 사건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도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은 결국 교육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의 재해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원래 인간으로 된 게 아니라 인간은 후천적인 요건에 의해 인간이란 존재로 사회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태어날 때 두뇌가 우수한 아이나 또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할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은 교육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교육사유>를 읽기는 했지만, 먼저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한국사회에 전반에 일어나는 교육문제를 다룬 것은 맞다. 그 문제에 대한 원인 역시 언급한 것까지도 인정하다. 그러나 깊이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사례에 대해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면 적용이 가능한 사례를 들어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존 듀이라는 미국 교육사상가에 대한 거론은 좋으나, 존 듀이의 이론을 어느 정도 구체적인 설명보다 일반적인 설명으로 끝난 것이 아쉬우며, 차라리 존 듀이의 서적들과 그 연구결과 그리고 존 듀이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사상가들을 소개하여 우리가 어떤 서적을 보는 것이 좋은가 하는 안내가 없던 게 아쉬웠다.

 

기본적으로 교육에 대해 생각하자면, 교육학이나 교육철학을 직접 공부하거나 수업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정치․사회학․철학․문학 등을 접하면 교육에 대한 사유와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교육의 기회에서 균등배분은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등장하는 내용이다. 롤즈의 경우 최소수혜자로 하여금 그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혜택이 경제적인 문제로 배제되는 것이 안 되며, 그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그렇다면 교육사유에서 그런 부분이 등장하고, 그런 중요한 사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학생과 교사 개인적인 영역에서 학교와 사회 그리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로 이어간다.

 

교육이란 것은 누가 임의로 정하여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육행정에 의해 이루어진 체계이며, 아쉽게도 우리는 교육을 인간의 성장으로 통한 미래투자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는 투자라는 점이다. 그런 투자가 인간의 성장에 대한 투자가 아닌 경제적 조건으로 연결되니 학생들은 인격이 아니라 자본적 가치로 보는 것이다. 국가는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큰 효율을 보는지, 혹은 학교는 얼마나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보는지, 부모는 얼마나 애들이 성적이 올라 좋은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업하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말이다.

 

아니라면 공무원 중에서 고위직이나 또는 전문직으로 수익이 월등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국가에서 돈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이 돈으로 보기에 인간을 돈에 대한 효율성으로 따지므로 학생들 역시 효율적인 것만 따지고, 그 효율적인 요소는 이기심에 의해 조성된다. 왕따 내지 폭력문제가 발발하는 것은 바로 그런 조직사회라는 은폐공간에서 학생들 스스로 인격체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도구로 보기에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에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목표는 좋은 대학과 일자리, 없으면 오늘 하루 어떻게 견뎌 무사안일하게 지나가는 것이다.

 

이런 학교구조 누가 만들었나? 학교는 그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라는 규모에서 국가가 가장 큰 규모이니 학교는 그 나라의 현재 상태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학교는 보이지 않은 은폐공간에 계속 집단적으로 격리되어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지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어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은폐 및 조작으로 이루어진다. 최근에 자살한 어느 중학생의 경우 집단폭행에 괴로워 다른 곳으로 전학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교사와 어른들이 학생들끼리 잘 지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수수방관에 그 피해학생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단지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오는 것부터 걱정하는 것이다.

 

안심하지 못하고 학교강단에 서는 선생, 그리고 그 선생을 믿을 수 없는 학생, 집에 가면 학생들은 더 감옥이 된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라보는 교육이란 시험 후에 돌아오는 통지표로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가정이 평온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가시바늘이 돋는 감옥처럼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을까? 물론 돈 잘 벌고 좋은 직장에 가면 좋겠지만, 모든 학생에게 그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든 누군가는 덜 좋거나 더 힘든 일을 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좋은 조건으로 보이는 자리가 과연 몇 %가 되는가?

 

아무리 바득바득 따라가도 갈 수 없다면 제3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학생의 자유고, 그것을 유도하는 것이 선생이고, 그것을 배려해주는 것이 부모다. 안 그래도 프랑스대혁명 발생 225주년인 올해 7월, 나는 다시 루소의 서적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에밀>이 너무 생각났다. <에밀>이란 서적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함께 세계적인 도서이며,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존재하게 만든 정치사상도서다. 그런 <에밀>에서 교육에 의한 방법론적인 요소를 단순히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인 요소로 이끌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은 부모고, 부모가 아니더라도 그 어른은 아이에게 너무 미리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자연과 어울리게 하여 그 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아이에게 자유의지를 불어넣는 것보다 강제로 의자에 앉히기를 바란다. 교육을 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나 오히려 인간의 폐쇄성과 이기심만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위인과 문호들은 왜 루소의 <에밀>을 보고 큰 전환점을 얻었을까? 아이에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또 다른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이고, 그들이 아직 인격적으로 부족해도 그것을 억지로 누르는 게 아니라 그 인격을 새롭게 이끌어가게 해주는 것이 진실한 교육이다. 예전처럼 1인의 천재가 10,000인의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10,000인의 사람이 10,000 인을 먹여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세계야 말로 진실한 교육의 가치가 드러나고, 그것이야 말로 헌법과 교육법에서 말하는 민주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민주적인 인격체로서 성장하는가? 결국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른이 되기 전에 그 당사자가 어떤 가치관을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가치관은 누가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관점과 아이들이 보는 관점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항상 기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풍조에서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20세기 산업은 레드오션이라고 하면 21세기는 블루오션이란 말이 있다. 게다가 21세기는 이미 문명적으로 개발이 다 되었기에 새로운 산업은 문화라는 거대한 인간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1달에 책을 얼마나 읽는지, 그리고 그 책은 어느 종류인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책은 단시간 내에 성과를 내려는 자기계발서 내지 주식투자서 등과 같은 도서다. 그런다고 모두 그 책을 보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는 그 본인의 역사이지 우리 모두의 역사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하는데, 개인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게 해줄 가능성은 과연 0.01%나 될까? 아니라면 주식투자 역시 주식시장의 변화, 국제사회의 변동, 시시각각 움직이는 정국에서 그 흐름조차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 계속 주식투자에 집착해보았자 결국은 망하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조금 더 느리게 생각하고 판단해야하는 것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어차피 21세기는 다양한 업종과 다양한 사회가 조성되어 있기에 어느 일정한 것으로 모두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나 주입식 교육만 추구하는 현실에서 사교육은 언제나 공교육의 앞에 전제되었고, 사교육의 부담은 가정살림에 부담이 오며, 가정의 살림이 압박이 오면 인구까지 감소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맞이했다. 국가적으로 교육이 중요하나, 그 교육정책과 흐름이 역으로 한국에서 젊은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이다. 재생산적인 가치로 따지자면 우리 사회 역시 또 다른 모순과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는 당장 실적이 이어지지 않겠지만,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교육 실태는 차가운 복도와 막혀있는 창문, 그리고 숨 막히는 경쟁의식에 학생들은 깊은 나락에 삼켜지고 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청소년 자살이 많은 국가로서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이들의 비명에 우리의 미래는 과연 빛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그 나라의 정치적 흐름에 맞물려 있다. 교육에 대한 사유는 비단 내 아이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 대한 문제다. 내 아이는 다르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어차피 그 아이도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와 사회 안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할 줄 모른다. 내가 피해가고 싶어도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공간적 안식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전에 지방자치단체 투표하기 전에 우리 회사 직장동료에게 이 말을 들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당은 그다지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자신은 거기에 투표할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거기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가 자신의 친척이 되는 것이란 점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무슨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나는 참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도움이 되는 일이 몇 번인지 혹은 그 도움을 준다고 해도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지, 제일 중요한 것은 진짜 도와주는 지였다. 나라면 그런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의 자식이나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진짜 교육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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