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수주의자가 법원 판결을 받았는데, 유죄를 선고 받았다. 문제는 그의 언질이었다. 헌법이나 형법을 찾아보면 공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 명예훼손에서 공공의 이익이 해당될 경우 충분히 면죄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결국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그 사회의 공공성에 문제가 발생될 경우 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공공성을 무너뜨리는 인간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공공의 이익인데도 공공의 이익이 아닌 것처럼 떨어지고 있다. 

 

그래 되어버리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먼저 개인적으로 자신이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당하는 사람이 본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친구, 그리고 가까운 몇몇 사람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행태는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의 비인식성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타인에게 가겠지만,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란 안일한 사고가 문제다.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큰 명제를 남겼는가?

 

역사적인 사건은 개인의 서술이라고 해도, 그 개인은 역사적으로 보면 큰 정치적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정치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치적 인물 뒤에 숨은 이름 없는 희생자들은 시로서 나타낼 수 있다. 영화 (허무)<명량>에서 성웅 이순신은 역사적 존재고, 정치적인 행위자이기도 하다. 전쟁은 정치적인 입장을 국가가 무력을 동원한 자국내에서 합법적인 폭력이다. 그 폭력이 수반되는 무서운 전투에서 장군의 죽음이 전쟁의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다.

 

전쟁의 지휘관은 작전의 수립과 진행 그리고 종결로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장수가 아무리 제갈공명이라고 해도 수중의 병사가 100명만 있다면 적의 만명의 어떻게 이길 것인가? 전장은 숲이나 성과 같은 매복이나 장기전이 불가능한 평평한 곳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제갈공명은 아무 필요가 없다. 그 병사 100명의 무술능력과 판단력에 의해 좌우된다. 그 이름 없는 병사 100명 하나하나가 무장의 빛을 발휘하면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병사 갑을병정을 두고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를 지어내고 만들 수가 있고, 그 것이  전쟁의 당락과 국가의 운명조차 넘어갈 수 있는 플롯이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거대한 서사 앞에 놓인 작은 존재이나, 그 서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개인적으로 힘들지만, 가치관의 부합으로 통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이름 없는 병졸이나 현재 이름 없이 살아가는 국민이라도 살아있는 존재다.

 

이들의 죽음 내지 혹은 몰락 또는 억압은 지금은 어둠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것이 밝혀지고 세상에 드러날 때 그들의 가려진 이름은 알려지게 된다. 이미 죽은 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온 자나 그 살아온 자에 의해 남겨진 자에 대해서는 정신적 보상이 따른다. 그 공공적인 가치를 위해서 말이다. 문제는 그 공공적인 가치가 아니라 공공의 이름으로 공공성을 망치는 존재들은 어떻게 하는 가이다.

 

첫 번째로 개인에게 닥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은 항상 우린 망각한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며, 인간은 항상 이성적일 수 없고, 무의식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도 높고, 감정의 기복에 휩말려 자신의 현재를 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당연히 인간이란 점을 인정하고, 그 문제점을 인식해야 그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문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순간 인간은 고쳐진다. 문제는 그것이 개인에게 한정된다면 모르지만 타인의 영역에서 곤란한다.

 

가령 내가 운전하고 가는데, 좌회전을 해야 하는 순간, 나는 1차선, 옆 차는 2차선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좌회전 하는 도중, 2차선에 있던 차량이 내가 가는 1차선의 넘어 좌회전을 한다면 누가 문제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사고와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만의 노력과 판단만으로 넘어갈 수 없다. 결국 사회적인 문제는 개인 혼자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길가다가 갑자기 도로가 꺼지거나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지하철에서 불이 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가? 

 

두 번째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 공공의 영역의 문제다. 그런데 그 공공의 문제를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근본을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가령 철학을 왜 배우는가에서 철학은 문제의 답을 주지 않지만, 그 문제가 되는 원인 그 자체의 결과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재발의 방지라는 예방적 차원이다. 인간은 항상 망각하는 존재이므로 그 망각의 샘으로부터 숨겨진 상처와 환부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찢어진 상처나 병으로 물든 환부를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라면 분명 외면할 터이다. 하지만 그 문제가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전반으로 일어난다면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충분히 시각적으로 감지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명제가 될 수 있고, 그것은 어느 대상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비판이 되는 대상은 인간의 형체가 없는 것으로 되나, 그 인간의 형체가 없는 것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결국 어느 누군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왜 공공의 이익에 대한 부분에서 명예훼손이 가능해도 그것이 아닌 경우 불가능한 것은 공공성이 아니라 개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판결받은 국수주의자는 자신이 말하는 공공성이란 이름 아래 그것이 정의라는 명제로서 비난했지만, 그 비난은 결국 거짓이었고, 조작된 것이다. 그의 특징은 전체 중에 작은 부품이 있다면 그 부품 하나 자체를 전체로 확대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논리나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한 오류라는 것도 있지만, 역으로 그것이 도리어 그 발언을 최초로 실시한 국수주의자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국수주의자의 똑똑하다고 여기고 싶은 어리석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부여된 또는 지지하는 세력을 두고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그 세력은 바로 국민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거나 또는 연결된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거나 혹은 옹호 내지 지지 또는 못본 척하며 기만하고 있을 존재다. 그런데 그 국수주의자가 그토록 비방과 비난을 날려 이때까지는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 내지 이슈로 되었다가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법원에서 판사의 결정은 거짓된 정보로 공공과 상관없이 고의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 명예훼손한 것은 명백한 죄고, 게다가 반성의 기미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 내지 예방적 태도가 없다는 것으로 6개월의 징역을 내린다. 예전에 부당한 국가권력에 징역살이하던 자들은 추후에 그 누명과 부당한 권력에 대한 보상으로 명예로 이어지나, 그런 식으로 남을 비하하거나 모독한 자에게 어떤 대우가 내릴까? 그저 혼자 미쳐 날뛰는 돈키호테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편하다.

 

득이 되는 자들은 교묘히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고, 자신의 입과 손을 더럽히지 않고 알아서 처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더러운 말과 더러운 글을 만드는 입과 손을 가진 자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거나 혹은 자기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만약 법적인 처벌로 간주되어 그가 궁지에 몰릴 때 예전에 그의 활약으로 득본 자는 그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대신할 것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와 엮인다는 것만으로 분명 마이너스가 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계속 나오고, 집단적인 커뮤니티 활동자들은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 커뮤니티 회원이 구속되거나 잡혀가도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잡혀가는 사람들이 자기와 가까운 자도 아니고, 그가 잡혀간다고 해서 그들은 위기의식보단 겉으로 부당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조소를 날리기 때문이다. 국수주의자들은 부지런히 활동하여 애국한다고 하나, 그들이 애국한다고 생각하여 그 대상이 되는 국가라는 존재는 실존의 존재가 아니라 가상의 존재다.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그 자리에서 운영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그 애국이란 이름 아래 이익을 보는 자다. 그런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게 결국 법의 집행에 걸릴 경우 어떻게 대응할까? 도와줄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할 것인가? 도와줄리가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이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자에 대해 옹호하는 것에서 여론이나 미디어에 의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실추된 명예는 자신의 이익으로 연결된다.

 

프로테메우스는 인간에 불을 주어 늘 자신의 간을 독수리에게 뜯어 먹히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인류의 번영을 위해 불을 준 자는 인간에게 문명이란 이름을 가진 양날의 검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검을 받은 인류는 그 문명을 옳게 쓰는 것보다 옳지 않은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옳지 않은 일로 이익을 받는 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처음에 이익(돈, 명예, 허영심만 남는 자존심)을 노리지만, 막상 어느 기회로 위기가 찾아오면 그들은 신속하게 버림을 받는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잡이공선>에서 총을 잡고 폭군처럼 군림하던 십장 같은 남자는 결국 선원의 반란에 의해 고용주에게 잔인하게 내쳐진다. 이때까지 받을 돈도 못 받고, 빈털털이가 되어 비참하게 내쫓기게 된다. 결국 이런 일도 저 <게잡이공선>처럼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국수주의자는 충분히 재기가 가능할 수 있으나, 일을 계속 크게 만드는 그의 모습에서 불리한 자신의 상황을 여론으로서 재반격하려 하지만, 상황은 너무 늦었다. 없는 것은 이미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조작하여 비난한 것은 기록에 남겨진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반성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살아가는 이유일 터이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책들은 한 때 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이며, 지금 가장 저주하는 대학교 선배의 책을 넣어두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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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아리러니입니다. 정말 롤모델로 생각했던 이를 이제는 적이 되어 만날 싸우니...
하여튼 네 무덤에 침을... 이 책 읽었을 때 신선했던 생각이 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09-05 11:25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이란 사람이 참 대단하다고 여겼습니다. 어째 이런 날카로운 패러디의 조소가 나올 줄이야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고, 한길사에서 발간된 정식완역본입니다. 예전에 읽은 돋을새김에서 나온 <에밀>과 다르게 상당히 내용이 깊이가 있고, 읽는 내내 감탄이 멈추지 않는다. 괴테가 손에는 셰익스피어지만, 왜 영혼은 <에밀>인가에 대해 보면, 셰익스피어는 대문호로서 세상에 큰 이름을 남기나, 루소의 <에밀>은 문학을 떠나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철학, 역사 등 모든 인문사회학에서 두루두루 섭렵할 수 있는 깊이가 존재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조차도 <에밀>을 읽은 것에 대한 효과였다.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 이성이 아니라 감각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인간은 이성 이전에 감정이 존재한다. 관념이란 것에 대해 가지는 것보다 그 관념을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이성이 가능하려면 모든 개인적인 역사주의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 태어난 아이가 억지로 지식에 물들일 경우 순수이성을 가지기란 어렵다. 오히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몸으로 익히는 순간 순수이성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주의자인 롤즈나 그 롤즈의 후예인 마이클 샌델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전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큰 히트를 쳤다. 내가 읽기 전에 풍문은 별 5개 중에 5개면, 처음 읽고 나서 별이 4개로 줄고, 롤즈의 <정의론>, <만민법>,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으면서 별이 3개로 줄고, 현재 루소를 읽으면서 별이 2개로 줄어들었다.

 

내가 <정의란 무엇인가> 내지 또는 여기에 덧붙이어 강신주 교수의 서적 같은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족하거나 불량하거나 또는 미숙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의 책을 읽는 것에 끝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 책을 읽은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독자의 편향성이다. 강신주 교수의 책을 보면 그가 다학박식한 분이란 점은 확연하다. 하지만 그의 책을 보고 그의 책에 나온 다른 도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강신주 교수는 다른 책을 추천한다. 루소의 <에밀>과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추천하는 것이 생각난다. 철학적 시 읽기 시리즈에서 나온 <스펙타클의 사회>는 강신주 교수만이 아니라 진중권 교수나 이택광 교수 뿐만 아니라 외국 철학가조차도 추천하는 도서다. 하지만 이 책을 잡아드는 국내 독자는 얼마 없을 것이다. 책을 읽음으로서 다른 책으로 넘어가게 하는 것이 지식의 전파에서 중요하다. 

 

단지 그것으로 읽어서 나는 이 책을 읽어 있어로 만족하는 부류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내가 좋다 나쁘다로 구분짓을 수 없으나, 그런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책에서 나온 철학자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간단하게 말하는 온오프라인 상의 사람들을 보면 다소 걱정이 든다. 실제 그들의 철학이나 사상은 쉽지가 않다. 단지 쉽게만 보이려고 적은 것이지 그들의 오묘한 철학적 명제가 그래 간단히 읽혀질 것이라면 왜 계속 사람들이 꾸준히 연구하고 고민하는가?

 

독서모임에 어느 분이 스피노자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아직 스피노자를 읽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스피노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사상을 남긴 것보단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다. 자신의 모든 이익을 포기하고, 타인의 보편적 윤리를 위해 평생 고통으로 살아간 실천하던 지식인 그 정도다. 스피노자에 대해서 더 추가할 만한 것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가 그 자신을 두고 스피노자주의라고 밝힌 것이다.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말하는 범주가 거기까지다. 그렇지만 알튀세르의 서적은 몇 권을 읽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재생산에 대해 어느 정도 내 의견을 전달이 가능하다. 그런 서적을 읽음으로서 전달하는 것과 그런 서적을 읽은 사람이 그 책과 자신 생각을 넣은 서적은 당연히 다르다. 다른 임시적 모임에 제일 짜증나던 부분은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칸트주의를 강조한 것에 대해 칸트가 최고라고 말하던 학생들이었다. 나이도 20~30세 사이이니, 대학생과 대학원생, 또는 졸업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그 책을 읽으면서 실제 칸트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칸트의 서적은 1페이지도 읽지 않고서 칸트가 좋다 만다를 논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칸트는 독일인이고, 샌델은 미국인다. 미국인의 서적을 번역한 도서는 원래의 서적 즉 독어로 번역한 제목과 차이가 있었다. 번역자조차 원전을 안 읽고 모르는 상태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원전을 자신이 찾아 1번이라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저런 이유다. 정확한 명제를 모르고 말하는 것과 설사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지만, 판단력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선택은 추후에 잘못된 선택을 지정하게 된다.

 

그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그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나 엑세사리만 보는 사람들로서 그 손가락이 지칭하는 점 그 자체는 작겠지만, 가리키는 방향의 각도나 넓이는 가늠할 수 없다. 책이 책을 부른다는 말처럼 그 책을 읽어 모든 것이 알았다고 생각하는 판단은 위험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런 책에는 쉬운 책이 절대 들어가 있지 않는다. 

 

여담으로 최근에 강준만 교수가 낸 서적을 두고 생각하나, 2000년 전후 그의 서적은 유용하나, 지금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진보의 문제점은 있지만, 그 트렌드나 성향이 잘못 잡았다. 이번 6·2 지방선거나 선박침몰 피해자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지지하던 인물을 살펴보면 전혀 제대로 한 게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리는 진보의 길이라니, 덧붙이자면 그가 지지한 사람은 진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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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배우가 선박침몰사고로 죽은 희생자의 가족에게 막말을 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참 답답하기 짝이 없다.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글을 인용하면서 정작 중요한 점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헌법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제외했다. 즉 문학적으로 말하면서도 정치철학적으로 배제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는 우리는 역사가 시보다 철학적인 상황이 도래했다.


하지만 역사라고 해도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대부분이 그 현장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세계라는 이미지로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는 이미지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은 결국 문맹인으로 되는 것처럼 가상세계의 이미지가 제 아무리 실재하는 현실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가상이다. 우리의 현실은 역사적 가상이란 시로서 움직이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 배우의 문제점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도 그만의 논리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국가의 기본법률은 헌법이고, 헌법에 명시된 국가정부와 행정기구가 과연 그렇게 제대로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적인 기록을 본다면 인간이 극단적으로 몰리는 것에 대한 비관찰성이다. 타인의 관찰은 넘어가도, 결국 자신의 개인적 내력으로서 자신의 비극적 삶을 관찰하게 해준다.

 

단지 실수는 자신의 형님이 돌아가신지 10일이 지났다면, 그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고, 그 원인과 배경을 상세히 나열해야 한다. 선박사고는 정해진 용량초과, 안전도구 미비, 선원들의 직무자각인식(비정규직 내지 근로조건 열악도 포함), 해경과 해수부의 관료조직의 부패, 거기에 연류된 정경유착과 암묵적인 비리가 원인이다.

 

누군가 분명히 약속을 하고, 그렇게 해준다고 선언했지만, 전혀 뒤에 일어난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약속을 먼저 했다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 물론 피해자 측의 과도한 발언을 문제삼는다면, 그것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인물에 대해 과오가 있다면 인정해야 하나, 그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욕을 해서 욕을 했다는 어리석은 판단이다.

 

부모의 죽음에서 그것은 자신의 배우인생이란 개인적 책임이지, 사고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어린 생명과 다르다. 병으로 죽은 것과 사고로 죽은 것에서 무엇이 같을까? 만약 형님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그 과정과 원인, 상황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위대하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위대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작품 그 자체를 비평한다. 

 

그러나 가장 착각하고 있는 것은 배우가 배우로서 셰익스피어를 말한다면,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헌법을 논해야 한다. 국가의 주인이 누군인가부터 시작하여 아무리 간접의회민주주의 정치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헌법정신을 두고 발언해야하는 점이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법은 법을 위해 존재하는가? 법을 만든 자를 위해 있는가? 법 그 자체를 초월해 있는 자를 위한 것인가? 노모스 법 위의 군림하는 자 즉 정치적으로 통치하려는 자인가? 대한민국은 절대왕정의 군주제가 아니다.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처럼 그 나라의 정치를 보면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희생자라는 약자를 궁지로 모는 현실에서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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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8-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만애비 님, 이 회색톤다운 주황은 으아앗
부디 친절한 색으로 바꿔주시기를요!

만화애니비평 2014-08-28 15:44   좋아요 0 | URL
교체했습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 - J Novel
마미야 나츠키 지음, 시로미소 그림 / 서울문화사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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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서평을 나열하기 말하자면, 나는 정의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는 윤리라는 가치관이 없다. 단지 정의라는 이름은 힘과 권력이란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악적인 수단이다. 어느 작품에서 나온 것처럼 정의라는 이름은 악이란 이름을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일까? 아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정의라고 말하는 자와 정의라는 것에 매달리는 자는 자신의 정의론에 대해 생각해 볼 의무가 있다. 문제는 그런 자신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성찰 없이 단순히 정의는 그 자체로서 의문을 가지게 해서 안 될 극단의 성역인 것이다. 성역이란 이름이 되어버린 정의가 하나의 관념처럼 돌아다녀 눈에 보이지 않은 대기 중에 떠다니는 공기라면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그것은 인간의 관념 안에 숨을 쉬고, 때로는 인간의 숨을 끊어주게 만든다.

 

그런데 그 정의라는 이름은 분명히 어떤 조건 안에서 타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의 정의로운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것만큼 가장 큰 착각과 오만, 그리고 편견이란 인간이 가진 그 어떤 죄보다 더 무겁고 지독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정의라고 믿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가치관이나 도덕관이 옳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점이다. 가령 최근에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과 총격은 두고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논하는가? 물론 정의의 철퇴라고 말하는 부류도 있지만, 국제연합 UN에서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두고 비인간적인 처사고,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정의라는 가치를 두고 저 사건을 생각하면 무엇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 그 갈림길 속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마이클 샌델이 강의하는 하버대학교 정치철학과에서 강의하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선 이렇게 인간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논한다.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손해나 피해가 적은 것으로 선택한다고 말이다. 정의에 대한 가치는 결국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의라는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이고 사회 관념에 따른 힘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다수결, 문제는 다수결이란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이기도 하나, 그 보편적 사고를 지배하는 인간의 사고방식 역시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왜 라이트노벨 1권을 읽으면서 이런 정의와 도덕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란 난해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가? 이번에 읽은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라는 라이트노벨은 그런 인간의 딜레마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고, 그 딜레마를 어렵지 않게 그저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이란 장르에 맞게 재미로서 이끌어 간다. 중간마다 보여주는 플롯과 또한 그 플롯을 배치하기 위한 복선은 기본적으로 암시하거나 또는 생략하기도 했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1권에서는 카미우치 유우진의 자살심리에 대한 저지에 반해 2권에서는 사나 엔마에 대한 성정체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복선의 구조가 어디서 나오는가에서 1권에서 이미 사나 엔마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2권에서 검도부 1학년이 목격한 엔마의 몸은 단순히 발화의 시작점에 지나지 않았다. 1권부터 사나 엔마는 이미 밀폐된 공간에 방치된 가스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스위치가 눌러지면 폭발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2권에서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통해 리코와 리코 일행들이 보여주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투쟁을 보여준다.

 

왜 정의와 도덕 그리고 선택이 따를까? 기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히 생각하면 아직 미성년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훈육기관이다. 학교 그 자체적인 기능을 생각하자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은 학교라고 하여 그 자체로 분리된 공간이기도 하나, 때로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는 학생이란 존재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학생이란 이름 뒤에는 사회적인 배경과 조건이 따른다. 학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회구조로서 움직이는 조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구조 속에서 정치적인 맹점과 정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투표라는 것은 결국 참여에 대한 인간의 권리다. 그 참여라는 것이 하나의 선택지점을 지정하고, 그 선택은 그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나 엔마가 처해진 상황은 바로 그 정치적 상황 그 자체였다. 따라서 리코는 1권에서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이름과 이론을 내세웠다면, 2권에서는 왜 니체의 이름과 그의 말을 따라 했는가? 리코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보낸 강력한 도전장을 두고 니체의 말을 인용하였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지. ‘정의는 거의 동등한 힘의 상대를 전제로 하는 보상과의 교환이다.’라고, ‘정의’는 정정당당하게 부를 때가 아름답지 않은가? 적어도 약한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철퇴를 내리려는 행동은 삼류 행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군. 그런데 하라 사이토 군, 자네는 몇 류지?”

 

저 말은 어렴풋이 내 기억에서 돋아났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출판사 책세상)>에 나오는 문구 중에 하나일 것 같다는 점이다. 니체의 서적은 당시 도덕관이나 정의관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고 깨부수려고 했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다보면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가 왜 유치한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니체는 본래 민주주의를 혐오하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대다수의 군중으로 이루어 있으며, 그들은 충분한 판단력과 이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중심리에 의해 자행되는 일들은 그것이 분명히 틀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인간이 가진 광기의 폭발이 정당화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도덕과 정의라는 이름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발췌했던 글 중에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라고 한다. 결국 집단과 시대라는 특성 아래 사이키델리코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하나의 집단이 구성된 조직이고, 현대적인 상식이란 이름을 가진 시대적 요건도 갖추어져 있다. 학생회는 학교학생들의 대표이기도 하나, 그것은 정말로 대표인지 아니면 하나의 권력을 가진 존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조직과 집단 또는 국가조차도 법과 제도가 있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공정하고 공평해야 하나, 그 공정성과 공평성의 이름을 가진 법과 제도는 자신의 이름으로 집행하지 않는다. 어느 특수한 인간으로서 공정성과 공평성을 실행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 개인에게 공정성과 공평성이 완벽하지 않을 경우 어느 특정한 이해관계나 사적인 감정이 녹아들어가는 순간 이미 법과 제도라는 자체는 공정성과 공평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스트레인지 러브 사이키델릭> 2권에서 바로 그 공정성과 공평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에서 결국 권력이란 이름의 도덕과 정의는 정당한가라는 리코의 반격이 시작되는 점이다.

 

1권부터 복선을 깔라놓은 사나 엔마, 그는 아니 그녀는 원래 여자지만,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여자인데도 남자로 살아가야할 이유는 단순히 엔마가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녀가 자라온 환경이었다. 즉 학교라는 것이 사회구조고,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건 아래 성장할 수 없고, 같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없다. 바로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압적인 조건에 의해 자신의 현재가 갖추어지는 점이다. 엔마의 아버지는 뛰어난 무술가이고, 게다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여행을 다니는 방랑무술가였다. 어머니도 없이 아버지 아래 아버지 같은 생활을 했다면 분명 평범한 여성으로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라는 생물학적인 조건에서 엔마는 키도 크고 날씬한 소녀였지만, 젠더적인 요소에서는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 살아야 했다. 결국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엔마의 집안사정에 따른 문화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분명히 여자가 여자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자라는 존재로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하라 사이토는 엔마의 약점을 두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퇴학을 내리려 한다. 퇴학의 조건에서 일반적으로 학교 내 교무위원들이 의론을 걸치고 나서 결정해야할 사안이나, 먼저 학생회에서 의론을 결정하였기에 학생회의 대회의로서 결정지으려 했다.

 

그 목적은 엔마의 퇴학이나, 그 이면에 학생회에서 눈에 가시거리로 비추어지는 리코의 기압제선이었다. 학교에서 기인으로 소문난 리코에게 리코의 주변인들을 쳐내는 것으로 충분한 반격이 될 것이고, 리코가 학교 내에서 유명인이지만 확실한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리코의 약점을 노려 리코를 눌러 버리는 것이 하라 사이토의 목적이다. 하지만 리코가 분명히 특이하고 단정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단지 리코가 어느 특정인에 대해 특별한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말이다.

 

하라 사이토와 같이 결백증이 강한 입장에서 리코는 자신의 미적인 감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예전부터 계속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방법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선 하라 사이토의 방법이 매우 치사하게 보이겠지만(물론 치사하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편집자의 후기에서 분명 나타냈기도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여론으로 통해 마녀사냥하기가 참 용이한 곳이다. 더구나 학교는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군중심리를 자극하기가 참 좋다.

 

왜 리코가 메이드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대중은 왜 그런 리코를 기대하는가? 한 마디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나, 또는 학교 내의 대의회 역시 하나의 쇼라는 점이다. 쇼라는 이유는 이미 학생회에서 엔마에 대한 불리한 판결이 내리도록 사전에 수를 쓴 것과 동시에 정의라는 이름을 들먹인 것으로 모든 학생들을 피해자처럼 만들었다. 특히 검도부 1학년 후배는 그때 엔마의 모습을 본 것으로 큰 충격을 받아 더 심각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조용하고 정체된 사회에서 어느 외적인 침략자 내지 혹은 내적으로 반역자가 나올 경우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결력이 강해져 더 큰 결속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흔히 서사에서 말하는 Narrative적인 요소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는 나쁜 사람이 필요하고, 그 나쁜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으로 인식되어, 그 적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대중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그게 바로 니체가 가장 증오하는 모습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에서 또 인상적인 말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라고 한다. 양심 그것은 무엇일까? 이미 대회의 이전부터 대회의 진행 도중까지 엔마는 자신의 초라하고 나약함에 두려움을 떨었고, 그는 사나운 염라대왕이 아니라 그저 연약한 남장여자였다.

 

이미 전교생에게 알려진 마당에 계속 학생회로부터 내려오는 비수 같은 폭언은 그녀로 하여금 심한 정신적 붕괴를 유도했다.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존재는 세상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물론 그들에 대해 다소의 불쾌감 내지 이질감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그들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은 이상 그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렇게 사는 것 자체에 대해 우리는 방관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단지 성별을 속이고 부활동을 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자숙과 근신을 처하는 것이 옳다.

 

리코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엔마의 탈의모습을 목격한 1학년 여학생이 큰 충격을 받아, 그것으로 인해 엔마가 퇴학을 당하여 학교에서 떠나면, 과연 그 1학년의 충격은 모두 없어지는 것인가? 뒤에 가서 분명 자신 때문에 엔마가 퇴학당하여 불우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학할 것이다. 대신 그녀가 자학할 순간에는 정의와 도덕을 외치는 자들은 무관심하게 그녀는 방치하고, 오히려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그녀를 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을 보여주면 그 후에 일어나는 남의 일은 그저 개인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리코가 엔마의 퇴학을 막은 이유는 3가지다. 1번째 엔마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친구를 위해서고, 2번째 엔마가 자신의 처음 친구이기에 엔마가 없으면 외로워지므로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고, 3번째는 검도부 여학생이 나중에 겪게 된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였다. 그 1학년 소녀는 자신의 괴로움과 검도부를 위해 검도부장과 상담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했으나, 한편으로 그 이유로 어느 개인이 비참한 상황에 맞이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쇼가 이루어지는 대회의 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란 없다. 단지 이분법적인 대립관계에서 어느 한 쪽 세력을 지지하여 잘나지도 않은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이유는 윤리는 약자의 입장과 더불어 소수자의 상황을 고려하지만, 도덕이란 이름은 절대적인 대다수의 입장만 견지한다. 엔마 같은 소수자들은 어느 사회에서 환영하지 못할 존재다. 또한 리코나 유우진 역시 그렇다. 리코는 부모가 없고, 유우진은 부모 없이 살다가 누나마저 눈앞에서 자살했다. 인간이 비틀어지는 이유는 처음부터가 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비틀어지는 이유가 있다. 어느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결과론적인 요소로서 사람들은 판단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원인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결국 어리석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에서 리코의 반론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학생회의 하라 사이토에게 “윤리의 중요성을 부장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도덕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정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천차만별, 시대와 문화, 이들은 외적 요인에 쉽게 좌우되는 애매한 가치관이거든, 획일적인 가치관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다니까?”라고 말이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사회적인 요소가 인간의 개인을 지배한다. 결국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지배하고, 문화로 통해 하나의 사회적 양상까지 좌우되는 것이다.

 

문화적인 요건에서 상대방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번역자인 MOEX의 후기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과거 시대라면 인간을 나누는 것이 조선시대에 사농공상, 군주정인 유럽에는 왕족, 귀족, 평민, 농민, 노예라면 이제는 자본의 소유다. 자본이란 것은 단순히 경제학적으로 말하는 화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사회적 조건, 그리고 문화적 자본까지 고려해야한다. 문화자본이란 개념이 존재하듯이 사나 엔마의 문화자본은 여성의 삶을 강탈된 삶이었고, 그런 삶에서 고교생이 되는 순간 억지로 여자로서 삶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질과 양의 변증법에서 사나 엔마라는 존재가 살아온 시간에서 그녀는 여자보단 남자로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여고생이란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회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원인이던 비밀의 노출, 사나 엔마는 대회의라는 계기가 하나의 통과제의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통과제의 과정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생각을 옭아매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큰 편견과 고정관념이 되는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식이란 것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는 사고방식이나 그 사고방식이 되는 기본적인 정보가 일방적이거나 획일적인 가치라면 인간의 판단은 올바른 길보다 어긋난 길로 간다는 점이다. 사나 엔마가 마녀사냥 당해야하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2권까지 읽다보면 분명 리코는 기인이고, 특이한 인물이다. 절대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에 그 사회구조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틀에 갇힌 인간이 가진 사고방식으로 그 사회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그곳에서 벗어나는 인간이어야말로 그 사회의 틀을 보거나 바꾸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도 리코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는 있었다. 친구는 소중하다고 말이다. 단지 상식적인 시선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리코는 사나 엔마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정의와 도덕이란 이름으로 무장한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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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비평의 쟁점 - 잃어버린 만화 문화의 자리찾기
김성훈 지음 / 니들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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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구한말 아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만화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같이 단순히 애들이나 보거나 또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이용되는 오락도서만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오락적 기능도 중요하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즐길 수 있는 휴식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다고 만화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만화라는 것은 단지 그림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 안에는 엄연히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 내에는 상대방에게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기호적인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만화문화는 단순히 재미와 오락을 생겨나기 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서 생긴 문화다. <한국 만화비평의 쟁점>에서 처음 소개된 대한민보에 실린 최초의 만화가 나온다. 긴 모자에 양복과 구두, 그리고 지팡이를 잡고 있는 중년남성을 보면 무엇인가에 대해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만화는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로서 만화의 역사와 더불어 만화라는 매체로 통한 비판적인 요소, 그리고 민중적인 요소를 반영하여 그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그래 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이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지식인이며 언론인이던 최성수는 만화로 통해 언론적 기능을 강화하고, 만화라는 매체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프랑스혁명사에 관심이 많지만, 그 혁명적 배경에는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한 정보와 홍보 수단으로 만화가 중요한 수단이었다. 최성수 언론인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통치와 나폴레옹 이후 다시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또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 이른다. 이런 와중에 권위적이고 비자유적인 통치에 대해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반발하자, 프랑스 만화작가 오노레 도미에는 시민들의 편에서 만화를 그린다. 그의 작품 중에 <봉기>는 분명 만화라기보다는 혁명을 위한 그림에 가까우나 그래도 만화가라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들이 대부분 시대적 문제를 풍자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하면 만화라는 매체가 효과적인 이유는 억압받는 민중계급 부류들은 대부분 글자를 몰랐으며, 글자를 모르는 것은 그런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판단력 내지 그런 개념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가령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의 불꽃과 심지어 전 세계의 헌법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개념을 알려면 받아들이는 상대방에게 정보력을 각인 시키야 하는 점이다. 정보의 각인에서 기표가 되는 그림이 상대방에게 이해가지 못한다면 정보매체로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화라는 그림은 상대방에게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만화가 가진 언론적인 기능은 곧 누구나 보고 이해할 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점에서 만화는 민중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민중에 의한 문화라는 것처럼 매우 민주주의적인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보는 이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시사만화의 경우, 누가 보더라도 이해가 빠르면서 한편으로 미소와 더불어 씁쓸한 맛을 베어나게 만든다. 그렇지만 시사만화라는 것은 시대적 문제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이슈를 부각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관심을 유도하므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국의 만화역사에서는 결국 시사만화 내지 민중의 삶에 스며든 민중의 대변자라 볼 수 있다. 그런 만화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비평적 쟁점이 되고, 만화로 통해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고찰로서 만화비평은 성립된 점이다.

 

한국의 만화비평문화는 결국 언론의 기능으로서 즉 민족독립에 대한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일제로부터 착취와 억압에 시달린 민중의 한을 내보인 것이다. 최성수의 그런 가치는 그가 남긴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첫째는 조선의 저널리즘이 먼저 만화를 알고 또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만화와의 동반성을 잘 인식하는 동시에 세계 저널리즘과의 만화대세를 거울삼아 거기서 조선 저널리즘이 가져야 할 위치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하루바삐 이루어져 할 것과 둘째로는 민중이 만화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져야겠고 마지막으로 만화가는 좀 더 만화다운 만화를 창작하여야 할 것이다.”

 

만화이기에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에서 만화 역시 예술의 한 범주에 들어간다. 미학에서 예술이란 것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만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해 작가로 눈으로 통하여 새롭게 해석하여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이 만화작가의 소임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만화의 가진 가치를 논하는 정신이기에 한국만화는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내재한 근대적인 문화였다. 그렇지만 만화는 그 누구에게 열린 세계이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로는 그 대상이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게 된다.

 

아마 만화가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은 군사독재정권 이전에 한국전쟁 전후로 근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닥치면 어른들은 밖에서 일을 하게 되면, 집에는 어린 아이들이 남게 되고, 또한 전쟁고아와 같이 누군가를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만화였고, 새로운 만화가 나오면 아이들의 손에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며,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는 만화에 대한 작품적 가치를 다루기보단 대량적으로 만들고, 재미위주로 가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만화에서 물론 시대적인 배경과 시사정신이 빠질 리는 없지만, 만화가 그런 가치에만 몰입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쇠퇴하고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란 문구를 보았다. 문학평론가와 언론인에 의해 우리나라 만화문화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만화는 여전히 자유로운 사고와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해줄 수 있는 매체였다. 그런 만화에 대한 평론은 만화가 단지 저속한 문화로 인식되는 것에서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김현, 오규원 선생 같은 문학도의 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인 점이다. 만화규장각에서 발행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에서 김현 선생은 자신이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가진 민중예술성을 재발견했다.

 

위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문구처럼 지식이 없다면 자신이 처해진 위치나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지식을 축척할 수 있는 방법이 어렵다는 것이고, 지식의 축척은 곧 지식이 없는 대상으로 하여금 우월한 위치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따라서 지식은 권력으로 이어지고, 권력은 지식은 생산하는 것처럼, 만화의 기능은 지식이 없는 자에게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만화를 보고 그는 처음에 자신인지 모르지만, 그 만화를 보고 나서 뭔가 잘못된 점을 느끼고, 그 만화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가치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화가 예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시학(詩學)처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다. 하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과 그 생각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를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억압하거나 은폐, 조작, 위조를 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에 대표적인 만화분서갱유는 유신체계에 대한 권력독재화의 산물이다. 만화가 자유로운 사고로서 그것을 제작하고 보는 이들은 매우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다. 따라서 만화의 검열과 제한된 이야기, 그리고 사유의 폭을 제공하는 만화를 억압함으로 만화문화는 그저 아이들이나 보는 단순한 오락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로 오게 되면서 만화비평에 대한 도서도 나오고, 1990년대에는 신춘문예에서 만화비평도 하나의 비평가의 등단기회로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만화비평으로 통해 정식으로 만화평론가로 등단할 수 있는 신춘문예에 만화부문은 빠져있다. 그렇지만 만화가 가진 이야기의 전달력은 신춘문예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만화비평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화비평의 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1990년 국내 최초로 공주대학교에서 만화학과가 창립되어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오락이 아니라 학문적 기능을 유지하며, 만화에 대한 평론가협회 내지 만화를 연구하는 만화학회를 창립하여 만화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적,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가 지금처럼 하위문화로 간주된 게 아니라 만화가 차지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여가생활에서 TV의 보급과 극장의 설립이 멀티미디어매체로 인해 만화가 한국 대중으로부터 저절로 멀어지게 되었다. 하위문화가 된 만화가 계속 대중문화와 그것을 이용하는 대중으로부터 저질문화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만화 그 자체에 대한 가치를 올릴 수밖에 없다. 만화비평은 처음에는 시대정신과 저항의식, 그리고 민주화 열기로서 발전해왔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도 역시 하위문화라고 해도 대중문화에 포함되므로, 만화가 보급되면서 만화라는 위치가 영화나 문학과 같이 예술성,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인 조건에서 유리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만화비평가인 위기철의 글에서는 만화의 대중성을 결국 사회적으로 보급되면서 자본과의 관계를 제외할 수 없다. 그래서 위기철가 남긴 글로 “한 작품이 성실히 작가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상업성의 산물일 때 그 비평적 접근은 당연히 작품 생산의 동력이 되는 ‘상업성’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되며, 또한 이 상업성이 비단 만화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일 때 비평의 접근방식은 당연히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는 만화책, 최근 그 만화책의 토대가 되어가는 게임과 라이트노벨, 위의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 역시 상업적인 요소가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중에 대한 상품적 가치로서 만화관련 콘텐츠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지 않을 수가 없고, 대중에게 만화가 전달되는 것 역시 자본을 매개로 하기에 만화비평 역시 사회적인 구조와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단순히 보자면 작품적인 가치 높고 낮고를 떠나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할 때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과 정치적 현황 또한 사람들이 최근 가지고 있는 인식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점이다.

 

물론 만화 혹은 서브컬처로 같이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등과 같은 부류는 그 역할과 기능을 인정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문제로는 대중문화는 획일적인 가치관을 강요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낯설게 되는 것이다. 만화비평이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성이다. 만화가 만화라는 부류에 갇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고립된 부류로 낙인찍히고, 당초 만화는 즐거움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교감이란 목적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점이다.

 

예술이란 것은 정치적인 요소와 멀어져 보이겠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동물, 곧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말하여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 앉아있는 고위관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정치다. 아니라면 자신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조차 정치적이다. 그 정치성을 논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것으로 통해 자신의 삶을 윤택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 역시 정치적인 논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료로 보는 웹툰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작가들과 출판사들의 수익을 거두게 하는 출판만화의 무관심 내지 편견은 어떻게 보면 만화를 즐기는 부류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만화비평이 필요한 점은 만화가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란 말처럼 그 예술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즐기는 부류가 스스로 앞장을 서야 하는 점이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에 대해 풍자를 날린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먼저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알렸고, 대중들은 그 그림으로 통해 시대적 현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에서 영원히 군왕을 추방한다. 물론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이 된 후 의회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계속 저항을 하던 그들이 있었다. 근현대적으로 저항이 있는 곳에 풍자만화 내지 시사만화가 뒤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

 

만화비평은 단순히 만화를 보고 비평을 남긴 것으로 만화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 자체에서 만평을 통한 비평일까? <한국만화비평의 쟁점>에서 다루고 있는 사안에서 기존에는 엘리트들이 만화비평문화를 이끌어왔다면 21세기 온라인 문화에서는 대중들이 만화비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단순한 리뷰 내지 감상에 머물러 있기에 그 작품에 대한 활발한 논의에서 깊이를 논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소개된 만화비평가들 중 최근에 소개된 사람들은 만화작가 내지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화는 분명 하위문화인 서브컬처이다. 그렇기에 가장 밑자락에서 즐길 수 있다. 만화를 즐기는 점에서 단순히 보다는 개념에서 읽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시도되어왔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문학평론가와 문학도 혹은 만화전문비평가 내지 교수들에 의해 주도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다. 대중 스스로 만화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화의 기능이 이제 만화만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점차 번지기 때문이다. 만화는 대중문화이기도 하나 하위문화이기에 다양한 이야기와 소재들이 위로 떠오른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계속 대중의 대다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반복한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점이나 가치관의 정립이 매우 어렵다. 만화라는 것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처럼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분야다. 작가의 개인적 특성을 반영하므로 어느 특정 개인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점이다. 물론 한국의 만화작가를 보면 열악하다. 사회적 인식, 생계에 대한 부담, 그리고 이 어려운 여건 속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열망, 실제 만화작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쉬운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만화비평적인 요소에서 그들과 대화하면, 자신의 작품에 들어오는 의견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평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작품을 열심히 보고 생각했다는 점이 그리는 입장, 즉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결과일 것이다. 만화비평은 만화문화의 저질성이란 인식개선에 큰 전환점도 되나,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만화비평은 단순한 리뷰쓰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을 함으로써, 일반적인 문학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조건 아래 시작해야 한다. 영화나 문학이나 다 좋은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영화, 문학, 만화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화비평이 어려운 점은 이런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역량의 향상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만화를 그리는 것은 작가에게 이윤을 남기지만, 만화비평은 이윤이 오지 않은 것이 한계성이다.

 

대학교단이나 또는 문화관련 단체에 소속된 일부인사들을 제외하면 만화비평을 한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취미생활로만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한국처럼 대중들에 의해 수행되는 비평문화가 거의 전무한 곳에서는 만화비평을 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만화를 좋아한다면 그 만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즐거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 남는 시간에 여가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으나 만화만큼 짧은 시간에 즐거움을 주는 매체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는 만화 내지 애니메이션이란 문화를 단순히 위해요소로 되거나 또는 아동이나 유아용으로 사용하려고 하며, 특히 교육자재로서 기능을 수행하려 한다. 만화작가와 만난 시간에서 많은 만화작가들이 교육자재에 필요한 그리는 것으로 수익을 본다고 한다. 물론 교육을 위한 교육자재에 만화를 그리는 것 역시 만화를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나, 만화작가가 본래 원하는 목적은 아니다. 결국 만화문화의 밝은 미래는 자유로운 창의성과 깊은 토론이 오갈 수 있는 문화정착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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