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고, 한길사에서 발간된 정식완역본입니다. 예전에 읽은 돋을새김에서 나온 <에밀>과 다르게 상당히 내용이 깊이가 있고, 읽는 내내 감탄이 멈추지 않는다. 괴테가 손에는 셰익스피어지만, 왜 영혼은 <에밀>인가에 대해 보면, 셰익스피어는 대문호로서 세상에 큰 이름을 남기나, 루소의 <에밀>은 문학을 떠나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철학, 역사 등 모든 인문사회학에서 두루두루 섭렵할 수 있는 깊이가 존재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조차도 <에밀>을 읽은 것에 대한 효과였다.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 이성이 아니라 감각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인간은 이성 이전에 감정이 존재한다. 관념이란 것에 대해 가지는 것보다 그 관념을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이성이 가능하려면 모든 개인적인 역사주의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 태어난 아이가 억지로 지식에 물들일 경우 순수이성을 가지기란 어렵다. 오히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되어 몸으로 익히는 순간 순수이성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주의자인 롤즈나 그 롤즈의 후예인 마이클 샌델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전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큰 히트를 쳤다. 내가 읽기 전에 풍문은 별 5개 중에 5개면, 처음 읽고 나서 별이 4개로 줄고, 롤즈의 <정의론>, <만민법>,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으면서 별이 3개로 줄고, 현재 루소를 읽으면서 별이 2개로 줄어들었다.
내가 <정의란 무엇인가> 내지 또는 여기에 덧붙이어 강신주 교수의 서적 같은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족하거나 불량하거나 또는 미숙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의 책을 읽는 것에 끝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 책을 읽은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독자의 편향성이다. 강신주 교수의 책을 보면 그가 다학박식한 분이란 점은 확연하다. 하지만 그의 책을 보고 그의 책에 나온 다른 도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강신주 교수는 다른 책을 추천한다. 루소의 <에밀>과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추천하는 것이 생각난다. 철학적 시 읽기 시리즈에서 나온 <스펙타클의 사회>는 강신주 교수만이 아니라 진중권 교수나 이택광 교수 뿐만 아니라 외국 철학가조차도 추천하는 도서다. 하지만 이 책을 잡아드는 국내 독자는 얼마 없을 것이다. 책을 읽음으로서 다른 책으로 넘어가게 하는 것이 지식의 전파에서 중요하다.
단지 그것으로 읽어서 나는 이 책을 읽어 있어로 만족하는 부류들에 대해 그 자체로서 내가 좋다 나쁘다로 구분짓을 수 없으나, 그런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책에서 나온 철학자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간단하게 말하는 온오프라인 상의 사람들을 보면 다소 걱정이 든다. 실제 그들의 철학이나 사상은 쉽지가 않다. 단지 쉽게만 보이려고 적은 것이지 그들의 오묘한 철학적 명제가 그래 간단히 읽혀질 것이라면 왜 계속 사람들이 꾸준히 연구하고 고민하는가?
독서모임에 어느 분이 스피노자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아직 스피노자를 읽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스피노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사상을 남긴 것보단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다. 자신의 모든 이익을 포기하고, 타인의 보편적 윤리를 위해 평생 고통으로 살아간 실천하던 지식인 그 정도다. 스피노자에 대해서 더 추가할 만한 것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가 그 자신을 두고 스피노자주의라고 밝힌 것이다.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말하는 범주가 거기까지다. 그렇지만 알튀세르의 서적은 몇 권을 읽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재생산에 대해 어느 정도 내 의견을 전달이 가능하다. 그런 서적을 읽음으로서 전달하는 것과 그런 서적을 읽은 사람이 그 책과 자신 생각을 넣은 서적은 당연히 다르다. 다른 임시적 모임에 제일 짜증나던 부분은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칸트주의를 강조한 것에 대해 칸트가 최고라고 말하던 학생들이었다. 나이도 20~30세 사이이니, 대학생과 대학원생, 또는 졸업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그 책을 읽으면서 실제 칸트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칸트의 서적은 1페이지도 읽지 않고서 칸트가 좋다 만다를 논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칸트는 독일인이고, 샌델은 미국인다. 미국인의 서적을 번역한 도서는 원래의 서적 즉 독어로 번역한 제목과 차이가 있었다. 번역자조차 원전을 안 읽고 모르는 상태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원전을 자신이 찾아 1번이라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저런 이유다. 정확한 명제를 모르고 말하는 것과 설사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지만, 판단력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선택은 추후에 잘못된 선택을 지정하게 된다.
그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그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나 엑세사리만 보는 사람들로서 그 손가락이 지칭하는 점 그 자체는 작겠지만, 가리키는 방향의 각도나 넓이는 가늠할 수 없다. 책이 책을 부른다는 말처럼 그 책을 읽어 모든 것이 알았다고 생각하는 판단은 위험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런 책에는 쉬운 책이 절대 들어가 있지 않는다.
여담으로 최근에 강준만 교수가 낸 서적을 두고 생각하나, 2000년 전후 그의 서적은 유용하나, 지금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진보의 문제점은 있지만, 그 트렌드나 성향이 잘못 잡았다. 이번 6·2 지방선거나 선박침몰 피해자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지지하던 인물을 살펴보면 전혀 제대로 한 게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리는 진보의 길이라니, 덧붙이자면 그가 지지한 사람은 진보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