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미학 - 묘사 기법과 예술 표현
김용훈 지음 / 일진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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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미학>을 읽게 된 동기는 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읽은 것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에 담겨진 이미지를 읽기 위해서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앞으로 우리는 이미지를 읽지 못하면 문맹인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은 글자라는 텍스트보단 영상과 그 영상에 어울려진 소리로서 접한다. 처음부터 우리가 접하는 것은 책 속에 있는 글자일까? 아니면 TV, PC, 핸드폰 같은 전자기기들인가? 부모의 선택에 의한 교육방법에 따라 책을 먼저 읽을 수 있겠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문자를 읽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책을 주어도 그저 미로와 퍼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책이나 또는 영상은 다르다. 하다못해 어린아이들은 글자를 읽지 못해도 자기 동공에 맺혀진 상이 이미지로서 받아들인다. 2D의 영상이 아니라 3D의 공간조차도 사실 이미지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실에서 3D이나, 사실 우리 눈이 원근감을 인지하고 있기에 3D로 보일 것이다. 3D로 보이는 세계를 화폭에 옮기면 원근법과 명암에 따라 멀고 가까움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눈은 모든 정보를 공간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에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

 

눈이 인간의 정보력 습득에서 약 87%라고 한다. 거의 대부분을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답답할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더 답답할 것이다. 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고, 귀로 받아들이는 정보는 결국 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눈은 자신이 선택하여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귀는 그렇지 못하다. 귀를 막고 눈을 감긴 채 있을 경우 사람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게다가 귀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듣는 소리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해야 한다.

 

선택과 판단 사이에 시각은 선택과 판단이 가능해도 소리는 선택의 방법이 없다. 자신이 듣기 위한 대화내용도 주변 소음에 의해 그대로 묻히기 때문이다. 시각의 정보는 빛의 반사에 의해 좌우되나 소음은 움직임이 있는 모든 생명과 사물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눈이 보는 어느 대상이 단지 보는 사람의 눈에 의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사진이란 정보적으로 혹은 기록적인 기능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 모든 정보는 글과 그림으로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매체에 의한 정보에서 인간의 기억력은 정확하지 않다. 인간의 눈에 맺혀진 상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뇌로부터 소거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눈에 비추어진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손을 이용하여 그림으로 남긴다. 그림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의 관점, 그리는 시간과 위치 그리고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나마 우리가 옛날 사람들의 의복과 생활양식을 알 수 있는 이유 역시 그림에 의해서다. 그림으로 기록된 점에서 글로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것보다 이미지라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더욱 정확하게 정보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저장과 기록을 유지하던 매체인 회화가 이제는 카메라 등장에 의해 그 기능을 잃고 만다. 몇 시간 동안 어느 인물의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단지 카메라 1대가 사진을 촬영하는 게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효과적이다. 게다가 더 정확하고 보관도 용이하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이용할 시기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서 모든 사물을 담을 수 있다. 사진파일을 jpg, bmp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장할 수 있고, 또한 복사와 수정까지 가능하다. 얼마든지 원본의 사진이 이제는 사본으로 제작되고, 그 사본조차 하나의 원본으로 가능하다. 사본이 원본이 되고, 원본 그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그 순간 simulacre의 세계에서 현실이 아닌 새로운 가상적인 현실, 파생실재를 만들어낸다.

 

그 파생실재를 만들어내는 카메라는 그 모든 것을 담아둔다. 시간의 흐름으로 따라 그 사진에 찍힌 대상 자체가 지금 현재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 기록을 유지함으로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사진에서 보여주는 사실성과 우연성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여 미쳐 우리가 볼 수 없었거나 모르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서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이란 것은 사실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서 승화시킬 수 있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진이 많다. 네이팜탄 소녀라는 것으로 베트남전쟁에서 어린 소녀가 나체로 길가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소녀가 옷을 다 벗은 이유는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는데, 네이팜탄이 옷에 붙었고, 그 네이팜탄은 계속 옷이나 사람의 살에 붙어 연소를 한다. 따라서 네이팜탄에 맞은 사람은 심한 화상으로 인해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심각할 경우 사망에 이른다. 네이팜탄을 맞아 옷을 다 벗은 채 대피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종식을 요구했다. 이런 사진들은 많이 존재한다. 특히 종군기자에 의해 찍혀진 사진들은 죽음의 순간을 항상 그리고 있으며, 이런 사실과 우연을 사진가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이 곧 세계 모든 사람들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널리즘을 입각하여 공정한 것이어야 말로 진실을 담은 것처럼 카메라의 시선은 결국 관점과 입장을 달리한다. 따라서 <사진의 미학>을 읽는 것은 그 사진이란 매체로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사진가들의 작가의식 내지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작가 본인조차도 사진작가로서 예술을 논하며, 또는 저널리즘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야기한다. 단지 조금 난해한 요소는 그는 이 나라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있다는 점이고, 그것은 화해하기보단 어긋난 모순처럼 뒤섞여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 받는 조선인을 위해 또는 가혹한 착취에 고통 받는 노동자를 위해 사진은 참혹한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술이 되기도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어렵다. 서적을 저술한 김용훈 사진작가는 약간 모더니스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2010년에 제작된 책으로 현재 이미지를 사진으로 촬영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는 존재를 컴퓨터로서 만들어낸다. 사진가의 손에서 세상의 이미지가 탄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가상에 존재하던 것이 현실에 있는 것처럼 증강하거나 또는 현실을 침범하고 있다. <사진의 미학>은 리얼리티 이미지를 예술로서 승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시대는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작가의 눈에 시대의 흐름은 숨길 수 없었다.

 

5․16을 두고 쿠데타와 혁명의 갈림길에서 혁명이라 했지만, 5․18 당시 사진과 국민의 정부 시절 북한과의 수교를 하던 대통령의 모습을 걸어놓은 점에서 시대의 모순과 아픔이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 본인이 625전쟁 중에 위협에 처해있었고, B29 폭격기의 폭격에 죽음의 손결을 피했고, 빨치산의 총알에 상이군경이 되었다. 오히려 동족상잔의 비극과 아픔을 논하던 그의 문장에서 진실한 사진작가란 곧 시대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게 결국 예술이 되는 것 같았다. 예술은 현실을 광학적으로 본다고 했다.

 

회화를 그리던 화가들도 화폭에 담긴 인물과 사물은 있는 그대로인 정물화로만 그리지 않는다. 인상주의자나 초현실주의자의 그림을 보면 전혀 우리는 그것이 바로 그 사물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을 준다. 그렇지만 예술이란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혹은 있는 그 자체의 사실성과 우연성에 의지하기도 한다. 예술이란 전달력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전쟁이란 이름은 이미 그로테스크로 가득하다. 과거의 신화나 역사에선 전쟁에 나가는 장군과 영웅 그리고 전사에게 영광의 이름으로 가득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시로서 전해온다. 그중 비극시라는 것은 그리스의 대표적인 예술문화로 내려온다. 그렇지만 거기에 동원된 병사와 도중에 피해를 본 민중들의 삶은? 예술이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게 하고, 때에 따라서 충격을 주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게 해준다.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요소가 강하기에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판단력도 가지고 있다.

 

바로 사진의 힘이란 그런 리얼리티 속에 존재하던 가려진 일상 내지 사건을 예술 내지 저널리즘으로 승화되게 해준다. 작가정신으로 왜 교양과 철학, 그리고 신념이 필요한 이유는 사진은 보는 이의 눈이고, 보는 이의 생각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의 미학>은 내가 원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책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하나의 정신적 수련이 되는 책이지, 사진으로 통해 세상과 현실을 읽어내기 위한 비평적인 도서가 아니다. 미학에서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가른다는 것처럼 어째보면 예술 자체가 진실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저 그런 무관심으로 지나가나, 그 무관심이던 대상이 하나의 예술이 되는 순간 우리 삶과 밀접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자신의 옆에 있더라도 그 자체를 각인하고 인지하고 보여주고 싶다는 순간적인 포착은 사진기를 잡고 있는 자의 몫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작가나 그 작가 주변 사람들은 현재 사진기를 들고 폼만 재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다. 카메라는 기계적인 조건에서 물질적으로 기계의 성능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개인적 자본력에 따라 좌우된다. 하지만 사진의 가치는 카메라의 자본력이 아니라 그 자본력조차 올릴 수 없는 내용의 가치이다. 사진기로 비추어 촬영된 이미지는 곧 그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 그 자체다. 그 시선은 의식적으로 드러나거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그 사진으로서 사진 찍는 사람이 그 사진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진에 대하여 생각하면 왠지 형식에 의해 좌우되는 사진들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물론 단순히 깔끔히 예쁘게 재단된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나 미적인 가치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사진의 미학>을 저술한 김용훈 교수는 제법 연로하신 사진예술가이나, 예술의 혈기에서 나이보다는 그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다. 그냥 디카 수준만 들고 있는 나에게 <사진의 미학>에서 요구하는 카메라는 무리다. 난 말 그대로 사진미학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기를 사랑하고, 사진에 대한 뭔가 유달리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카메라의 기초이론부터 시작하여 카메라 촬영으로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계속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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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위문화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본의 하위문화에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접하고 만다. 대부분 한국에서 방영하고 드라마 중에서 일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원작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들이 몇몇 존재한다. 하위문화라는 설정에 우리는 이른바 오타쿠문화, 즉 오덕 내지 덕후로서 경멸하나 사실 일반 대중조차도 그 오타쿠 문화에 어느 순간 휩말려 자신조차 오타쿠 문화 일부에 신세지고 있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대중문화의 대다수로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무지한 자들의 박식함이란 칭호를 부여하고 싶다.

 

특히 대중들은 이른바 문학에 대해 자주 감수성을 느끼려고 한다. 베스트셀러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원고를 찍으면 거기에 열광하여 마치 자신이 문화교양인 것처럼 책을 사서 본다. 하지만 정작 그 책에 적혀있는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고, 작품 내의 주인공에게 몰입한다. 물론 즐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자신이 뭔가 있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째 보면 이런 대중문화현상을 두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나 역시 그런 우월감에 젖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는 많은 대중들은 근본의 진실과 원인을 찾아가기 보다는 그저 겉 테두리에 묻어진 빛나는 상표를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잘 깊이 들어가는 사람도 충분히 많을 것이다. 단지 얼마나 깊이 접근하고 이해하고 관심 있게 보는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차이가 그래도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나 더 본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나 더 본 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선생님의 가방>에서 이런 거창한 문장을 주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선생님의 가방>에는 쓰키코(아마 한자로 월자, 月子인듯)라는 여자가 바로 일본 특유의 하위문화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이 하위문화에 접했는지 아니면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지 모른다. 하위문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대중들이 바라보는 시선 중에 하나인 경멸, 모멸, 우스운, 또는 즐거움 혹은 새로운 경험 등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위문화는 단순히 대중문화 아래에 있는 별다른 세계의 문화가 아니라 대중문화라는 상부구조가 존재하기 위해 하위문화라는 하부구조가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평소 드러나지 못한 영역이 하위문화 콘텐츠에서 엄청난 폭풍과 쓰나미를 일으킨다.

 

폭풍과 쓰나미 같이 강한 힘도 있지만 때로는 산들바람이나 밀물처럼 물러가는 경우도 있다.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 그렇다. 중년남성에 대해 소녀가 가지는 연정, 혹은 중년여성이 가지는 노년남성에 대한 연정, 이것이 조금 새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면 착각일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문학이 아니라 이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생님의 가방> 역시 만화책 상하권으로 출판된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인 <토끼드롭스>를 보면 알겠지만, 주인공 남자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딸과 같이 사는 모습이 나온다.

 

문제는 할아버지는 죽을 때 그 따님은 초등학교 정도 소녀라는 점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형제이면서도 나이는 그 남자주인공보다 어리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남자주인공 연배와 비슷하다. 그러면서 그 소녀의 어머니는 주인공 남자에게 조금 더 나이 들면 자신이 사랑하던 그 노인과 비슷해 보이겠다고 한다. 물론 여기만 아니다. 일본 만화책으로 나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최근에 일본 내에서 실사영화판으로 제작된 <해파리 공주>에서도 여자 오타쿠들이 모인 여관장에 미중년 내니 미노년을 좋아하는 여성도 있었다. 다른 여자 오타쿠들은 삼국지에 아주 빠져 있거나 히로인 본인은 해파리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을 토대로 만든 작품에서 <선생님의 가방>에서 보이는 쓰키코와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단지 위 작품과 다른 점은 전자는 로맨틱한 분위기보단 개그요소로 반영하거나 혹은 가족 간의 사랑으로써 관계를 보여준다. <선생님의 가방>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같이 데이트하는 모습은 없다. 물론 전자나 후자 역시 모두 소박한 일상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현실적으로 전혀 낯설지 않을 모습이란 점이다. 국내 TV에서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어느 택시기사의 아내가 여고생이었다. 택시기사는 거의 40에 가까운 아저씨, 그러나 2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충격적인 현실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정도 현실적 기반을 둔 리얼리즘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의 가방>을 읽어보며 생각하던 바는, 소설 제목이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듯이 그 가방이란 존재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해본다. 가방이란 무엇을 담아둘 수 있어 급할 때 보관하여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 쓰키코가 처음에는 선생님인 마쓰모토 하루쓰나라는 인물에 대해 단지 고교 시절에 국어선생이란 점만 기억한다. 그러나 2사람은 계속 선술집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잔을 나누며, 2년 동안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2년이 다 된 시점에 정식교제를 한다. 선생님과 쓰키코는 행복한 애인으로서 시간을 보내지만, 시간의 흐름이란 그 어떤 인간을 비켜나가지 못한다.

 

책 제목처럼 <선생님의 가방>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가지는 선생님이 사용했던 물건이라는 물질적인 조건 ①, 다른 1가지는 선생님이 그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니면서 선생님이 운명한 후 그 가방이 쓰키코가 보관한다는 것은 가방이 곧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적인 조건 ②, 마지막으로 정신분석적으로 가방이란 것은 모자나 구두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성적인 요소 ③이다. 선생님이 들고 다닌 가방은 선생님의 것이나, 이제는 쓰키코의 것이 되고, 쓰키코의 것이 되었기에 쓰키코는 2사람의 시간을 그 가방으로서 되새길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방>에서 가방이 쓰키코의 것이 되었지만, 다르게 본다면 쓰키코 자체가 선생님의 가방이 되어주었다. 과거의 스승과 제자,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서 가방의 주인이 누가 되었는가? 이 작품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쓰키코의 심정이다. 2사람은 여행을 가고,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은 쓰키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았던 선생님, 그 섬의 여행은 아주 특별했다. 쓰키코는 집에 가면 아버지가 안 계시고, 늙은 어머니만 계시며, 오빠는 결혼하여 조카까지 두고 있다. 쓰키코는 예전에 사귀던 애인이 있었으나 뭔가 맞지 않아 헤어진다.

 

쓰키코라는 여자, 아니 여성작가로 통해 보는 인간의 욕망은 어머니를 근친상간하고픈 오이디푸스의 욕망이 있다면, 반대로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두고 엘렉트라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보였다. 아버지 없는 중년에 가까운 여성,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방황하나, 오직 선생님만이 자신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 성욕을 느낀 것은 츠키코였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면 부드럽지도 아니 딱딱하지도 않은 그 어중간한 상태, 복부를 지나 아래를 더 내려가니 자신의 손으로 만지기가 어색한 그녀에게 선생님의 손길이 필요했다.

 

처음 선생님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정식교제에서는 그것을 오히려 나누어야지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다. 사랑의 조건은 정신이 우선이고 육체는 따라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젊은 남성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젊은 남성이 아니 노년의 남성이다. 아마 그런 세월의 연륜에서 비롯되었을까? 적어도 그 힘든 고비를 맞은 이유는 선생님을 떠나간 사모님이 묻힌 섬을 찾아서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 내지 상처, 그리고 과거의 흔적이다. 그것과 마주하고 부딪히지 않은 이상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과거의 흔적들과 앞으로 맞이해야할 앞 현실의 상황이 서로 부딪히는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새로운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쓰키코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약간 특이한 말과 행동을 하던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은 쓰키코를 배려하여 아주 섬세하게 그녀의 주변을 받아준다. 쓰키코를 예전에 좋아했다던 남자동창, 그는 분명 멋진 남성일 것이나, 선생님보다 못했다. 육체적으로 남자동창의 어깨가 넓었을 것이나, 정신적으로 선생님의 어깨를 무한의 세계이니 말이다.

 

왠지 누군가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응석을 받아달라고 원하는 것인지 쓰키코의 행동은 분명히 응석을 당장 부르지 않아도 어느 순간 응석을 부린다. 그런 응석을 받아주는 선생님의 행동은 여태까지 엉뚱했다. 그런 만큼 여유와 침착함, 당당함이 있었다. 책 안에 다쇼라는 말이 있다. 다생(多生)이란 말에서 많은 삶을 사는 것이란 말도 있지만, 불교적인 철학에서 윤회로 통해 그 이전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이렇게 스승과 제자지만, 그 이전에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 몰라도 다른 형태로 서로를 만났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인연이란 운명에서 쓰키코의 과거의 남자친구는 쓰키코의 친한 친구와 만나 결혼한다. 그것도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말이다. 이때 결혼식장에서 친구와 옛날 애인의 결혼은 마치 운명이라고 나온 말이 쓰키코에게 운명이란 그저 어디에 갖다 붙이면 그대로 되는 편한 이름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운명은 갑자기 번개처럼 오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운명처럼 되어버린 하나의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웠던 사랑하던 이는 자연의 진리처럼 자연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도 쓰키코는 선생님을 자연의 영원한 품에 보내도 마음은 보내지 아니했다. 가방 안의 어두운 빈 공간을 보며 다시 쓰키코는 되새긴다.

 

[“선생님, 하고 부르면 천장 근처에서 가끔 쓰키코 상,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일이 있다. 유도후에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대구랑 쑥갓을 넣게 되었어요. 선생님, 언젠가 또 만납시다. 내가 말하면 천장의 선생님도 언젠가 꼭 만납시다. 하고 대답한다.” 그런 밤이면 선생님의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본다. 가방 안에는 텅 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저 망망한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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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간 -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옮김 / 교양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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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에 남들처럼 맛있는 음식도 먹고, 보고 싶은 애니메이션도 보고, 그리고 주어진 논문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런 추석연휴를 남들보다 더 잉여적으로 보낸 나에게 이번에 서평을 적은 책 마지막에서 무척 놀랄만한 사진 1장이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홍범도 장군의 사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하면 김좌진 장군과 더불어 대한민국 항일운동에서 큰 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전쟁사를 만든 투사다. 독립군 투사 대부분이 민족종교인 대종교 일원 중에 하나이었으나, 그는 전형적인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내가 읽고 있던 <혁명의 시간>이란 책에 나올 줄 몰랐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부분, 즉 번역자인 상명대학교 류한수 교수가 개인적으로 적을 글에서 나온 사진이다. 홍범도 장군은 1919년 삼일운동을 확인하고 만주와 러시아 이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36~1938년 스탈린의 모스크바재판 기간 중에 강제로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되었다. 까레이스키, 러시아어로 조선인을 의미하는 바로 그 슬픔을 간직한 명칭이 생기고 말았다. 오늘 낮에 카자흐스탄 한국인들의 후예가 나온 것을 보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내지 또는 조선말기 잔혹한 가렴주구를 피하여 먼 이국땅으로 밟은 해외동포들, 그들은 까레이스키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

 

이미 한국어를 잊어도 벌써 잊을 해외교포 후손들, 그런 후손들을 보면서 <혁명의 시간>에서 나타난 홍범도 장군은 모습을 참으로 기이했다. 그는 러시아혁명사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했고, 그를 위시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볼셰비키혁명에 가담했거나 또는 그 혁명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홍범도 장군은 볼셰비키당원으로 분명 1920년 “극동의 볼셰비키 정치 지도위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게다가 홍범도 장군의 사진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연방 최초의 총수이며, 볼셰비키혁명을 지휘한 레닌에게 권총을 직접 받았다는 점이고, 그 권총은 평생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예전에 러시아혁명에 대한 공부로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도중 코민테른이란 제3 인터내셔널 모임에서 조선인이 참여한 것을 보았고, 일제에 의해 지배받던 제3국인 조선의 독립을 위해 레닌이 원조하기로 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로 홍범도 장군이 1920년 잊을 수 없는 국군 전쟁사 청산리 전투에서 이미 볼셰비키로서 활동했다는 점은 참으로 기이하고 씁쓸한 일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좌우이데올로기 문제점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모순은 사회구조적으로 큰 문제를 보여주었다. 어느 유명한 대학교의 명예교수는 당시 중산층은 대부분 친일파라는 말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당시 중산층의 기준은 어느 정도로 재산을 가졌고, 사회적 지위는 무엇이고 자신은 그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천재적인 독문학자인 전혜린 교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대표적인 악독한 친일파란 사실에서 고통스러워했고, 그런 부분에 대해 젊은 시절 양심에 대한 가책을 느낀 모양이다. 양심의 가책마저 보이지 않고, 지나간 오점에 대한 반성하여 새로운 길을 찾기보단, 그것을 두고 하나의 터부적인 속성을 넘어 이제는 보편타당한 논리로 이끌어내는 현실을 보면 과연 역사란 왜 중요한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분명 러시아혁명사에서 1905년 피의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1917년 2월과 10월은 잊을 수 없는 세계사이다. 서양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 분명 근대이전 사회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고, 근대사회부터는 러시아혁명일 것이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을 읽지 않고서는 오늘날 존재하는 나 자신만 아니라 우리 모두, 더 나아가 세계라는 큰 영역조차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프랑스혁명에 대한 개념과 원인 그리고 그것을 발동하게 된 사상조차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의 맹신은 오히려 독이라는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 장 자크 루소가 거론했지만, 그런다고 지식의 맹신조차 없이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론의 허영심만큼 더 위험한 것을 없으리라.

 

<혁명의 시간>을 읽으면서 볼셰비키의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문화적 현상은 무엇에 의해 이루어져 지는가? 그것은 경제적인 조건이란 물질적인 조건만 아니라 환경적인 조건까지 덧붙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밝히다시피 처음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의 힘은 아주 미약했다. 단순히 1917년 2월에 발발한 혁명은 차르체제를 무너뜨리게 한 일이었으나 그 원동력은 볼셰비키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르닐로프 장군과 정치적인 라이벌로 되어야 했던 케렌스키도 처음에 정치범으로 고발당한 혁명가를 위해 변호해주던 법조인이었다. 2월 혁명 후 그는 법무장관에 임명되다가 7월 사태를 맞이하면서 총리로 된다. 그러면서 한쪽에는 볼셰비키, 그리고 한쪽으로 코르닐로프와 같은 능력도 없는 전쟁지휘관에 위기를 맞이한다. 국내에 어떤 경제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토대로 정치학에 대하여 글을 작성하는데, 그 글에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하던 볼셰비키에 대한 비판이 아닌 근거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은 비난 같은 글이 있었다.

 

그 책에서는 코르닐로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무능하고 거만한 멍청한 장군이 케렌스키와 임시정부를 타도하여 군사정권을 내세우려 했던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드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구성해야 하며, 되지도 않은 어설픈 지식을 인용하여 일방적이고 편견만 사로잡힌 글을 작성한다면 그것만큼 자신이 지식인이란 이름을 내걸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내용을 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혁명의 시간>을 읽기 전에 류한수 교수가 번역한 <러시아혁명, 1917에서 네프까지>를 읽어보면 안다.

 

외국의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토대로 전문가의 판단으로 작성한 글과 철학적 깊이도 없이 어설프게 진영논리를 대놓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따라서 <혁명의 시간>을 읽어보는 것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화제인 러시아혁명이 어떻게 일어나고 그 배경이 무엇인지 잘 봐야 한다는 점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을 읽다보면 사회적인 현상을 두고 그 원인과 배경을 알았고 하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요소도 확인해야 한다. 러시아혁명에서 단순히 볼셰비키혁명을 두고 군사쿠데타라고 하는 자도 있지만, 솔직한 말로 군사쿠데타로 되려면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한 집단이 있어야 한다.

 

볼셰비키는 물론 그들에게 군사력이 있었지만, 적어도 장교와 같은 지휘관보단 아래에서 지휘 받는 병사들, 농민들, 노동자들 같은 일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지지 세력은 강력한 국가기구가 아니라 강력하지 못하나 그 무엇보다 더 강하고 위대한 민중이 있었다는 점이다. 볼셰비키혁명이 된 것은 단순한 군사쿠데타로 본다면 페트로그라드 같이 거대한 도시는 물론이고, 그 도시를 이어주는 많은 교통과 정보를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에게 지지하는 무리가 생겼는가?

 

이 책의 저자인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는 처음부터 볼셰비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자다.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난 저자는 본래 자신의 아버지가 러시아 물리학자이었으나, 볼셰비키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증오를 품었지만, 러시아혁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 할수록 기존 러시아혁명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했다. 러시아혁명을 연구하면 자꾸 프랑스혁명사에 대해 연계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당통이 외국군대가 프랑스를 침입한 것에 대해 연설한 것이 인상적이다.

 

당통은 “우리는 대담하고 대담해야 하며, 더 대담해야 합니다.”라는 강력한 언변술로 프랑스 의용병들이 자국을 보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던 인터내셔널가만 부른 것이 아니라 현재 프랑스의 국가이기도 하면서도 1792년 프랑스대혁명 기간 중에 만들어진 라 마르세예즈를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불렀다는 사실이다. 하다못해 루이 보나파르트의 관료정치, 1871년 파리 꼬뮌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러시아혁명사를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계속 혁명사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볼셰비키가 대중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대중을 잘 지휘한 것보단 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은 케렌스키 정부의 무능함과 2월 혁명 이후 인민을 위해야 하나 인민을 위하기보단 그저 1차 세계대전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 전에는 러시아제국의 국민인 병사와 러시아 사람들이 이제는 혁명 이후에는 봉건군주의 신민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주권자로서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개념은 본래 국가가 존재하던 곳에 살았던 사람보다는 새롭게 탄생한 국가 내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케렌스키 정권 실수는 2월 혁명이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과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을 망각한 점이다. 그가 내각의 총리로 부임하면서 전쟁에서 빠져나와 휴전을 하고 병사들을 어서 빨리 집으로 보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전장이나 혹은 러시아 내의 장군들은 전쟁의 종료보단 전장으로 더 나아가 승리하기를 원했다. 전장의 총알받이가 되는 것은 병사들의 운명이다. 고위 장교들은 후방에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앉아 포도주나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냐고 계속 부하를 닦달하고, 도망치는 탈영병에 대해 무자비하게 총살을 집행했을 것이다.

 

물론 탈영병에 대한 처우는 그러하나, 처음부터 전쟁에서 가지는 의의조차 파악하지 않고, 단지 부하로 하여금 목숨을 버리게 하여 거기서 얻는 영광의 훈장만 바란 지휘관들에게 볼셰비키혁명의 씨앗은 이미 볼셰비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힘을 부여한 것이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수립된 소비에트연방은 어느 순간 독재와 공포정치의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고, 하다못해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가 탄생한 것도 그렇고, <1984>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비판적 3대 소설인 <수용소군도>, <한낮의 어둠>이 괜히 탄생한 것은 아니다.

 

악덕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유언으로 남긴 <동물농장> 메이저 영감의 가르침에서 오직 악덕만 본받아 끔찍한 사건을 탄생하게 되었다. 이 서평 본문 위에 홍범도 장군 역시 볼셰비키에서 활동한 인물이고, 레닌에게 권총을 받을 정도면 그가 레닌에게 얼마나 많은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한 대이주 그리고 대숙청이란 사건은 역사의 비극으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찾아내지 못한 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부터 시작하여 어째서 그렇게 길을 꼬였는지 우리는 항상 다시 생각해야 한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자인 만큼 그는 지금도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로 인정받는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슬로부터(사슬의 이름은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부터 나온다.) 모두 자유롭게 되고자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으킨 볼셰비키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오히려 어긋난 길로 가버렸다.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주의자인 레닌의 거대한 도전이 문제보단 그 사회시스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정치제도나 혹은 사상을 들고 와도 그 사회 구성원 자체가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 말이다. 겉만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존재해도 그 시스템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자각하지 못하면 결국 관료주의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의 도화선이 되게 해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은 프랑스 사람들이 과연 몇 %인지 혹은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를 제외한 수많은 군중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사람이 과연 %인지 생각해보면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한민국 내에서 헌법을 찾아보고 읽은 자 역시 과연 몇 %나 되는 것인가? 역사의 가르침을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료로서 판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역사의 위조는 결국 그 사회의 인간의 정체성마저 기만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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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9-1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아직도 만애비 님이 준 정의론을 아직도 읽지 않고 있네요. 이거 빨리 읽어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9-10 21:41   좋아요 0 | URL
아직 저도 쥐를 읽지 않았습니다~! ㅎㅎㅎㅎ
도서관에서 꼭 빌려볼 도서를 보고 난 뒤에 바로 보려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9-11 00:08   좋아요 0 | URL
아니, 그재미있는 쥐를 아직 안 읽으셨다니 실망이지만, 셈셈이니 대만족이네요.. ㅎ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4-09-11 08:35   좋아요 0 | URL
어느 인물이 생각나서..ㅋㅋㅋ

어제 집 근처 대학교에서 산책 및 운동하러 가는데

거기 학교입구부터 학교정문까지 그분이 그려져 있더군요.

국부와 레닌의 서적
 
에밀 한길그레이트북스 5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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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을 예전에 돋을새김 출판사에서 나온 보급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처음 내가 <에밀>을 읽었을 때는 어렵지 않고 매우 이해가 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도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읽는 내내 <에밀>이란 책을 소개한 부분이 상당히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 혁명의 진원지 된 교육서”라고 말이다. 사실 돋을새김에서 출간된 <에밀>을 읽는 내내 어떻게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이에 대한 교육을 매우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루소가 가진 철학적 문학적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돋을새김에서 나온 도서들은 물론 가격도 저렴하고 읽기가 수월한 편이나, 사실 깊이 들어가고자 할 때, 그 서적들 일부는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게 아니라 편집자와 번역자로 하여금 쉽게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든 서적이다. 따라서 이 서적들은 처음 독서를 시작한 분들 중에 조금 심도 있는 서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겠지만, 만약 그 이상의 깊이와 사고를 요구한다면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도서가 좋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한길사의 <에밀>을 읽었다.

 

이전에 읽은 <에밀>과 달린 한길사에서 출간된 <에밀>은 상당히 책이 두꺼우며(거의 900페이지에 이름), 편집자의 작업 시에 책 안의 편집용지 여백공간이 매우 좁다. 따라서 보통 같은 사이즈의 A5 도서에 비해 본문 한 페이지 내의 글자 수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차가 같은 5가지라고 하더라도 전개방식이 조금 달랐다. <에밀>은 다소 소설과 같은 형식이 취해져 있지만, 소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혀 있다. 문학적으로 적힌 것이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철학, 사상,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등 수많은 학문적 소양이 담겨있다.

 

당초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 내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밝힌 것처럼 지나친 학문에 빠진 인간들을 대해, 그 학문과 예술에 너무 의존하여 인간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더 나아가 그런 형식적인 틀에 얽매여 지나친 과소비와 악덕을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고 했다. 루소가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에밀>에 와서 더욱 증폭된다. 왜냐하면 루소는 자기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속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반계몽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그 계몽주의에 대한 지식의 맹신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진 것은 대부분 일부 사람들이고, 그 외의 농민이나 도시의 평민들은 글을 읽고 쓰는 지식이 없다. 따라서 글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방도로 사용할 것이며, 예술이란 것은 일련의 사치품으로 그 예술품 하나를 구경하기 위해 예술가를 고용하여 무수히 많은 자원과 금전을 소모하게 한다. 그 소모에서 가난한 농민과 도시의 빈민들이 먹어야할 밀가루나 음식조차도 필요하게 된다. 그토록 가난한 사람들은 빵 하나를 먹기 위해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나, 부자들은 그 빵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를 자신을 위한 놀이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밀가루가 필요했다. 밀가루의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기보단 밀가루가 취향에 의해 가져가는 부류가 더 많았다. 생계를 위한 사람은 가난으로 구매할 수 없지만, 취향에 의해 구매하는 자들은 경제적 부를 소지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저렴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식량이다. 하지만 루소가 보던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이 매겨진 것은 인간의 생명이었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분노가 넘치는 말이란 말인가! 루소가 인간의 생명을 저렴하게 취급한 게 아니라 당시 그런 사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글로서 잘못된 것이란 점을 남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은 모두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인 불평등에 의해 고통 받는다고 말한다. 후천적인 불평등 가난과 신분이란 사슬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비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군가 이익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그 이익으로부터 멀어져만 했다. 사회생활하면서 가장 인간의 자기당착에 빠지는 경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루소도 인정한 것처럼 인간의 제1의 사랑은 자기보존에 대한 자기애다. 하지만 그 자기보존이 이루어지 위해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조차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하고, 그들을 존재성을 인식하지 않으나, 그들이 가진 부나 명예들을 갉아먹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증가시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가장 몰려있고 서로 악취와 오물을 내뿜는 도시는 그야말로 악의 소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자연적인 존재이지만, 도처에 있는 사회적 굴레와 제약에 의해 사슬로 묶여있다. 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모두 펼칠 수는 없다. 오로지 그 사회적 계약 안에서만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에밀>은 바로 위와 같은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살아가야하는지 알려주는 도서이다. 그토록 <에밀>이 당시 프랑스사회나 현재 지금에 와서도 권력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경계되는 도서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사회라는 큰 사슬에서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슬로부터 자유로이 살 수 있거나 그 사슬조차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지배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다. 이미 <에밀>은 현대 모든 인문학의 구심점처럼 보일 정도로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전에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란 도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상당히 어려운 도서이면서도 그 책에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무지한 스승이 필요한 것처럼,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주입하는 교육체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무지한 스승> 이전에 이미 <에밀>이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이 없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란 존재조차 자신에게 어린아이라는 육체를 가진 적이 있었다. 어른이 가진 가치관은 모두 어린 시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 성장해가지만, 그 성장의 토대가 되는 영양분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좌우된다. 즉 그 인자는 부모, 스승, 주변 사람에 의해 결정되게 만든다. 문제는 그것은 상당히 편향되어 있으며, 아이에게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아이들이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보다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가기 전에 말이다.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강요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 강요는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론이란 여론몰이로 결정된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아니라 세상이 결정되어지는 구조는 한 마디로 스펙타클한 사회라는 점이다. 루소가 살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세론이나 여론이 결국 미디어로서 전달되어 그 미디어가 이미지라는 형태로 제작되므로, 우리는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로서 스펙타클을 구축하고 또 구축한다. 자신의 존재는 소외되고 결국 남의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사회적인 입지를 높이려 한다. 물론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목표로 삼는 것도 인생의 큰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좁은 시선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목표가 완수되면 어떻게 할 것이고, 그 것보다 규모가 더 큰 목표를 달성하여 더 이상 무엇을 찾아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뭐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원하게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자기의 의도를 무시한 채 결국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걸어온다. <에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알기도 전제 죽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인생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메여있기에 루소는 늘 자연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그 자체를 포기하고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원래 물리적인 요건에서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문명발전에 의해 호흡할 때마다 매연과 먼지가 내 코를 찌르고 내 목을 아프게 하며, 내 눈은 탁해진다. 마시는 물은 정수기를 놓아도 안심하지 못할 경우도 있으며, 땅에서는 각종 오염물질로 가득하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연, 그 자연을 인간이 부수고 망가뜨리고 정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종적으로 정복된 것은 인간 바로 자신이었다. 인간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육체를 나약하게 만들었으며, 정신은 온갖 사악한 정신으로 가득하다. 인간이 바라고 있는 것은 가장 자신의 이익이고, 다음으로 타인의 파멸이다. 자신의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익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루소가 그래서 약자의 재물을 강자가 삼키는 이유는 강자들은 자신의 쓸데없는 권위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로부터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쩌나? 루소는 분명 18세기 인간이나 21세기 역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에밀>을 읽는 순간, 당대 사회에도 파장을 일으키나 지금도 파장을 주는 이유는 <에밀>에서는 인간은 주어진 것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동하라는 점이다. 자연적으로 키워진 에밀, 그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란 불리는 아버지 친구로부터 같이 성장한다. 그 스승은 에밀은 자신의 학생이지만, 그를 학생으로 대하기보단 같은 시선으로서 친구로 대한다. 스승과 제자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인 것이다. 학생에 대한 인격과 자유의 존중은 결국 그 제자 역시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부모나 사회적 세론에 의해 아이들에게 닦달하듯이 교육하고 억지로 강요하는 모습은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는 지름길이며, 아이들로 하여금 눈치만 보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 어른이 되어서 비굴한 행동을 일삼게 하는 패악 질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처럼 자라고, 뭐든지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와 지금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서 루소의 사상이 모두 옳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루소가 주장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간을 만드는 것만큼 정말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오덕 내지 덕후라고 불리는 오타쿠라는 사람이다. 오타쿠라는 나라도 인간사회에서 보이는 모순과 문제점을 모르거나 단시 구경만 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좋다는 것 역시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판단력이란 것이다.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우리는 인간 본인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하지 않은 채 단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왜 내가 오타쿠라는 점을 여기서 아무 망설임 없이 밝혔을까?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 요소를 알 수 있다.

 

주인공 파일럿 소년에게 세상의 어른들은 그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그 소년에게 원하는 것은 어른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행동하기를 바란다. 소년은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을 원망하고 책망하여 심지어 자신을 파멸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아이의 고민을 알아주지 않은 어른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어른들이란 존재 역시 지난 어린 시절에 힘든 삶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인생을 배운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인간이란 자신과 혹은 그 집단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자유롭고 관대한 어른만이 오로지 자유롭고 관대한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게 <에밀>을 보던 마지막 모습인 것 같았다. 아이는 어른들의 거울과 같은 존재다. 아이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게 해준 어른의 책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자신의 기대나 목적을 바라고, 그 이면에 가려진 책임과 의무는 회피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인간이라 되라고 말만 하면서 정작 좋은 인간이 되는 방법과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틀과 형태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이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적 관념들은 결국 현실의 육체적인 요소까지 아이들에게 작용한다. 아이들에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배내옷이나 침대를 주지 않고, 그대로 온 몸은 감싼 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좁은 침대에 그를 감옥의 죄수처럼 나둔다. 아이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움직일 자유도 주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인형처럼 꾸며대기만 한다. 또한 루소의 시대만큼 지금의 시대에 아이들에게 자연이란 공간을 제대로 알게 해주지 않는다. 농촌이란 시골에 살기는 어려우나 아이들에게 농촌이란 흙을 어촌이란 바닷물을 알게 해줘야 한다. 인간의 강인한 신체와 정신은 단순히 성능 좋은 약과 조기교육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자립성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면 결국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의는 결국 어떻게 죽는 것인가라는 양면적인 의문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름은 너무 두렵고 무서우며 때로는 공허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태어나서 자라고 병들어 죽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린 죽음에 대하여 진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단 그저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도망치려다 결국 두려움과 좌절에서 사라져간다. 물론 죽는 것은 두렵지만, 그 두려운 마음을 줄이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육체는 죽어도 그에 대한 기억은 주변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애를 가져야 할 이유는 자신의 생명이 끊어져도 주변사람들에게 그가 베풀었던 진실한 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조선시대에 가난한 백성을 위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위해 노력하던 지식인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이 되어 좋은 교육의 본보기로 활용된다. 자신의 창고에 쌀이 쌓이는 것보다 주변사람들의 가마솥에 쌀이 들어가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것이다.

 

<에밀>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인간 본인은 그렇게 대단하고 뛰어난 존재이기보단 그저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해 보여도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자유로운 영혼과 따듯한 인간애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에밀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의 일상에서 주변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은 행복함으로 이어지고, 그 행복함을 나누는 것으로 그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와 잘 지낼 수 있는 에밀은 그렇게 사람들과 잘 지내라는 교과서적인 도덕관념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러고 싶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능하다. 정언명령이 되는 그 근본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에서 발견된다. 인간은 윤리적 가치는 타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나, 그 최종적인 이익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큰 고통이고 상처가 될 것이고, 길가에 괴로운 사람들이 넘치면 그 마을과 도시는 점점 쇠퇴하여 온갖 범죄와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애적인 가치는 타인의 이익이 아니라 결국 자신도 같이 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이익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타인의 삶까지 박탈하고 그 생명까지 앗아가 버린다. 정말 두렵고도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인간들이 있고, 그런 인간들을 허용하는 사회가 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도록 허락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강요된 삶으로 얼룩진 그들은 단체와 조직에 속하면서 오로지 거짓과 위선을 배운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진 어른 같은 아이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어른들이 되면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이 된다.

 

그래서일까? <에밀>은 종착편은 에밀이 소피를 만나 결혼하여 그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에 대한 맹약과 복종이 보여준다. 에밀과 소피가 애를 낳아 에밀의 아이를 맡는다면, 에밀은 분명 그 에밀을 만들어준 친구 같은 스승처럼 애를 키울 것이다. 하지만 에밀에 대한 교육은 끝나지 않는다. 에밀에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키운 스승은 필요 없을지 모르나, 에밀이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그 아버지로서 가져야할 자세를 에밀은 또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배움은 무리하게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서적은 모순 아닌 모순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편견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자연적으로 살아가게 하여 그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을 지키는 어른은 누구로부터 방어책을 얻을 수 있을까? <에밀>이란 책은 쉬운 책이 아니다. 특히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은 그야말로 인간의 종교와 철학이 그대로 담겨진 내용이다. 아마 지금 21세기에 본 나라도 루소의 관찰력에 감탄을 숨길 수 없다. 종교는 간단해야 하며, 어려워서는 안 되며, 종교는 그 나라와 문화 그리고 인종에 따라 다르면 그 차이에 그 자체로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그것은 존중해야하며, 절대적으로 자신의 종교만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신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선을 베푸나, 그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인간이고, 어떤 종교가 있더라도 그것을 강요하면 안 되며, 신의 가르침은 오직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를 돕는 것임을 알기에 루소의 <에밀>은 당시 종교인들에 의해 박해받는다. 루소의 박해는 <대화>편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힘들었다. 루소는 광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누가 남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그 망상적인 피해의식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던 실존주의 선구자이며, 가난하고 배고픈 농부를 사랑하던 인도주의자였다.

 

<에밀>은 바로 루소의 사상이 모두 담긴 서적이다. 왕이나 귀족, 농민이나 노예 상관없이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으며,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에밀>은 <사회계약론>을 적는 밑바탕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에밀>의 마지막 부분은 <사회계약론>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나온다. <에밀>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가 되어 이기심과 시기심으로부터 멀어져 인간 그 자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린다면, <사회계약론>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할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아가지 못하여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안내한 도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루소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 대상은 언제나 억압받고 가난함에 지친 약자의 편에 있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개인의 의지, 집단의 의지, 그리고 일반의지로 나운다. 인간은 자기애가 1번째이기에 그렇고, 국가라는 조직을 이루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 공공의 이익을 원하는 일반의지, 하지만 일반의지가 가장 실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루소는 안다. 개인들의 이기심이 하나가 되는 전체의지가 너무 강력하고,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는 결코 남이 강조하는 것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아래 탄생하기 때문이다. <에밀>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하나 살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본연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윤리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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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4-09-0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만화애니비평 2014-09-05 19:14   좋아요 0 | URL
오덕력은 모든 걸 돌파합니다!

카스피 2014-09-0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축하드립니당^^

만화애니비평 2014-09-05 19:14   좋아요 0 | URL
캄사하옵니당..후후훙

봄밤 2014-09-06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만화애니비평 2014-09-06 10: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오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