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위문화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본의 하위문화에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접하고 만다. 대부분 한국에서 방영하고 드라마 중에서 일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원작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들이 몇몇 존재한다. 하위문화라는 설정에 우리는 이른바 오타쿠문화, 즉 오덕 내지 덕후로서 경멸하나 사실 일반 대중조차도 그 오타쿠 문화에 어느 순간 휩말려 자신조차 오타쿠 문화 일부에 신세지고 있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대중문화의 대다수로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무지한 자들의 박식함이란 칭호를 부여하고 싶다.

 

특히 대중들은 이른바 문학에 대해 자주 감수성을 느끼려고 한다. 베스트셀러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원고를 찍으면 거기에 열광하여 마치 자신이 문화교양인 것처럼 책을 사서 본다. 하지만 정작 그 책에 적혀있는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고, 작품 내의 주인공에게 몰입한다. 물론 즐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자신이 뭔가 있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째 보면 이런 대중문화현상을 두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나 역시 그런 우월감에 젖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는 많은 대중들은 근본의 진실과 원인을 찾아가기 보다는 그저 겉 테두리에 묻어진 빛나는 상표를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잘 깊이 들어가는 사람도 충분히 많을 것이다. 단지 얼마나 깊이 접근하고 이해하고 관심 있게 보는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차이가 그래도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나 더 본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나 더 본 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선생님의 가방>에서 이런 거창한 문장을 주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선생님의 가방>에는 쓰키코(아마 한자로 월자, 月子인듯)라는 여자가 바로 일본 특유의 하위문화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이 하위문화에 접했는지 아니면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지 모른다. 하위문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대중들이 바라보는 시선 중에 하나인 경멸, 모멸, 우스운, 또는 즐거움 혹은 새로운 경험 등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위문화는 단순히 대중문화 아래에 있는 별다른 세계의 문화가 아니라 대중문화라는 상부구조가 존재하기 위해 하위문화라는 하부구조가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평소 드러나지 못한 영역이 하위문화 콘텐츠에서 엄청난 폭풍과 쓰나미를 일으킨다.

 

폭풍과 쓰나미 같이 강한 힘도 있지만 때로는 산들바람이나 밀물처럼 물러가는 경우도 있다.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 그렇다. 중년남성에 대해 소녀가 가지는 연정, 혹은 중년여성이 가지는 노년남성에 대한 연정, 이것이 조금 새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면 착각일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문학이 아니라 이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생님의 가방> 역시 만화책 상하권으로 출판된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인 <토끼드롭스>를 보면 알겠지만, 주인공 남자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딸과 같이 사는 모습이 나온다.

 

문제는 할아버지는 죽을 때 그 따님은 초등학교 정도 소녀라는 점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형제이면서도 나이는 그 남자주인공보다 어리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남자주인공 연배와 비슷하다. 그러면서 그 소녀의 어머니는 주인공 남자에게 조금 더 나이 들면 자신이 사랑하던 그 노인과 비슷해 보이겠다고 한다. 물론 여기만 아니다. 일본 만화책으로 나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최근에 일본 내에서 실사영화판으로 제작된 <해파리 공주>에서도 여자 오타쿠들이 모인 여관장에 미중년 내니 미노년을 좋아하는 여성도 있었다. 다른 여자 오타쿠들은 삼국지에 아주 빠져 있거나 히로인 본인은 해파리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을 토대로 만든 작품에서 <선생님의 가방>에서 보이는 쓰키코와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단지 위 작품과 다른 점은 전자는 로맨틱한 분위기보단 개그요소로 반영하거나 혹은 가족 간의 사랑으로써 관계를 보여준다. <선생님의 가방>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같이 데이트하는 모습은 없다. 물론 전자나 후자 역시 모두 소박한 일상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현실적으로 전혀 낯설지 않을 모습이란 점이다. 국내 TV에서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어느 택시기사의 아내가 여고생이었다. 택시기사는 거의 40에 가까운 아저씨, 그러나 2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충격적인 현실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정도 현실적 기반을 둔 리얼리즘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의 가방>을 읽어보며 생각하던 바는, 소설 제목이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듯이 그 가방이란 존재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해본다. 가방이란 무엇을 담아둘 수 있어 급할 때 보관하여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 쓰키코가 처음에는 선생님인 마쓰모토 하루쓰나라는 인물에 대해 단지 고교 시절에 국어선생이란 점만 기억한다. 그러나 2사람은 계속 선술집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잔을 나누며, 2년 동안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2년이 다 된 시점에 정식교제를 한다. 선생님과 쓰키코는 행복한 애인으로서 시간을 보내지만, 시간의 흐름이란 그 어떤 인간을 비켜나가지 못한다.

 

책 제목처럼 <선생님의 가방>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가지는 선생님이 사용했던 물건이라는 물질적인 조건 ①, 다른 1가지는 선생님이 그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니면서 선생님이 운명한 후 그 가방이 쓰키코가 보관한다는 것은 가방이 곧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적인 조건 ②, 마지막으로 정신분석적으로 가방이란 것은 모자나 구두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성적인 요소 ③이다. 선생님이 들고 다닌 가방은 선생님의 것이나, 이제는 쓰키코의 것이 되고, 쓰키코의 것이 되었기에 쓰키코는 2사람의 시간을 그 가방으로서 되새길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방>에서 가방이 쓰키코의 것이 되었지만, 다르게 본다면 쓰키코 자체가 선생님의 가방이 되어주었다. 과거의 스승과 제자,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서 가방의 주인이 누가 되었는가? 이 작품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쓰키코의 심정이다. 2사람은 여행을 가고,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은 쓰키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았던 선생님, 그 섬의 여행은 아주 특별했다. 쓰키코는 집에 가면 아버지가 안 계시고, 늙은 어머니만 계시며, 오빠는 결혼하여 조카까지 두고 있다. 쓰키코는 예전에 사귀던 애인이 있었으나 뭔가 맞지 않아 헤어진다.

 

쓰키코라는 여자, 아니 여성작가로 통해 보는 인간의 욕망은 어머니를 근친상간하고픈 오이디푸스의 욕망이 있다면, 반대로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두고 엘렉트라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보였다. 아버지 없는 중년에 가까운 여성,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방황하나, 오직 선생님만이 자신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 성욕을 느낀 것은 츠키코였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면 부드럽지도 아니 딱딱하지도 않은 그 어중간한 상태, 복부를 지나 아래를 더 내려가니 자신의 손으로 만지기가 어색한 그녀에게 선생님의 손길이 필요했다.

 

처음 선생님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정식교제에서는 그것을 오히려 나누어야지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다. 사랑의 조건은 정신이 우선이고 육체는 따라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젊은 남성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젊은 남성이 아니 노년의 남성이다. 아마 그런 세월의 연륜에서 비롯되었을까? 적어도 그 힘든 고비를 맞은 이유는 선생님을 떠나간 사모님이 묻힌 섬을 찾아서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 내지 상처, 그리고 과거의 흔적이다. 그것과 마주하고 부딪히지 않은 이상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과거의 흔적들과 앞으로 맞이해야할 앞 현실의 상황이 서로 부딪히는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새로운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쓰키코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약간 특이한 말과 행동을 하던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은 쓰키코를 배려하여 아주 섬세하게 그녀의 주변을 받아준다. 쓰키코를 예전에 좋아했다던 남자동창, 그는 분명 멋진 남성일 것이나, 선생님보다 못했다. 육체적으로 남자동창의 어깨가 넓었을 것이나, 정신적으로 선생님의 어깨를 무한의 세계이니 말이다.

 

왠지 누군가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응석을 받아달라고 원하는 것인지 쓰키코의 행동은 분명히 응석을 당장 부르지 않아도 어느 순간 응석을 부린다. 그런 응석을 받아주는 선생님의 행동은 여태까지 엉뚱했다. 그런 만큼 여유와 침착함, 당당함이 있었다. 책 안에 다쇼라는 말이 있다. 다생(多生)이란 말에서 많은 삶을 사는 것이란 말도 있지만, 불교적인 철학에서 윤회로 통해 그 이전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이렇게 스승과 제자지만, 그 이전에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 몰라도 다른 형태로 서로를 만났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인연이란 운명에서 쓰키코의 과거의 남자친구는 쓰키코의 친한 친구와 만나 결혼한다. 그것도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말이다. 이때 결혼식장에서 친구와 옛날 애인의 결혼은 마치 운명이라고 나온 말이 쓰키코에게 운명이란 그저 어디에 갖다 붙이면 그대로 되는 편한 이름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운명은 갑자기 번개처럼 오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운명처럼 되어버린 하나의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웠던 사랑하던 이는 자연의 진리처럼 자연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도 쓰키코는 선생님을 자연의 영원한 품에 보내도 마음은 보내지 아니했다. 가방 안의 어두운 빈 공간을 보며 다시 쓰키코는 되새긴다.

 

[“선생님, 하고 부르면 천장 근처에서 가끔 쓰키코 상,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일이 있다. 유도후에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대구랑 쑥갓을 넣게 되었어요. 선생님, 언젠가 또 만납시다. 내가 말하면 천장의 선생님도 언젠가 꼭 만납시다. 하고 대답한다.” 그런 밤이면 선생님의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본다. 가방 안에는 텅 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저 망망한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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