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미학 - 묘사 기법과 예술 표현
김용훈 지음 / 일진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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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미학>을 읽게 된 동기는 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읽은 것이 아니라 사진 그 자체에 담겨진 이미지를 읽기 위해서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앞으로 우리는 이미지를 읽지 못하면 문맹인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은 글자라는 텍스트보단 영상과 그 영상에 어울려진 소리로서 접한다. 처음부터 우리가 접하는 것은 책 속에 있는 글자일까? 아니면 TV, PC, 핸드폰 같은 전자기기들인가? 부모의 선택에 의한 교육방법에 따라 책을 먼저 읽을 수 있겠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문자를 읽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책을 주어도 그저 미로와 퍼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책이나 또는 영상은 다르다. 하다못해 어린아이들은 글자를 읽지 못해도 자기 동공에 맺혀진 상이 이미지로서 받아들인다. 2D의 영상이 아니라 3D의 공간조차도 사실 이미지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실에서 3D이나, 사실 우리 눈이 원근감을 인지하고 있기에 3D로 보일 것이다. 3D로 보이는 세계를 화폭에 옮기면 원근법과 명암에 따라 멀고 가까움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눈은 모든 정보를 공간을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에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

 

눈이 인간의 정보력 습득에서 약 87%라고 한다. 거의 대부분을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답답할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더 답답할 것이다. 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고, 귀로 받아들이는 정보는 결국 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눈은 자신이 선택하여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귀는 그렇지 못하다. 귀를 막고 눈을 감긴 채 있을 경우 사람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게다가 귀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듣는 소리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해야 한다.

 

선택과 판단 사이에 시각은 선택과 판단이 가능해도 소리는 선택의 방법이 없다. 자신이 듣기 위한 대화내용도 주변 소음에 의해 그대로 묻히기 때문이다. 시각의 정보는 빛의 반사에 의해 좌우되나 소음은 움직임이 있는 모든 생명과 사물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눈이 보는 어느 대상이 단지 보는 사람의 눈에 의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사진이란 정보적으로 혹은 기록적인 기능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 모든 정보는 글과 그림으로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매체에 의한 정보에서 인간의 기억력은 정확하지 않다. 인간의 눈에 맺혀진 상은 어느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뇌로부터 소거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눈에 비추어진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손을 이용하여 그림으로 남긴다. 그림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의 관점, 그리는 시간과 위치 그리고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나마 우리가 옛날 사람들의 의복과 생활양식을 알 수 있는 이유 역시 그림에 의해서다. 그림으로 기록된 점에서 글로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것보다 이미지라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더욱 정확하게 정보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저장과 기록을 유지하던 매체인 회화가 이제는 카메라 등장에 의해 그 기능을 잃고 만다. 몇 시간 동안 어느 인물의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단지 카메라 1대가 사진을 촬영하는 게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효과적이다. 게다가 더 정확하고 보관도 용이하다. 불과 몇 십 년 전에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이용할 시기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서 모든 사물을 담을 수 있다. 사진파일을 jpg, bmp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장할 수 있고, 또한 복사와 수정까지 가능하다. 얼마든지 원본의 사진이 이제는 사본으로 제작되고, 그 사본조차 하나의 원본으로 가능하다. 사본이 원본이 되고, 원본 그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는 그 순간 simulacre의 세계에서 현실이 아닌 새로운 가상적인 현실, 파생실재를 만들어낸다.

 

그 파생실재를 만들어내는 카메라는 그 모든 것을 담아둔다. 시간의 흐름으로 따라 그 사진에 찍힌 대상 자체가 지금 현재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 기록을 유지함으로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사진에서 보여주는 사실성과 우연성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여 미쳐 우리가 볼 수 없었거나 모르던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로서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이란 것은 사실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서 승화시킬 수 있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진이 많다. 네이팜탄 소녀라는 것으로 베트남전쟁에서 어린 소녀가 나체로 길가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소녀가 옷을 다 벗은 이유는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는데, 네이팜탄이 옷에 붙었고, 그 네이팜탄은 계속 옷이나 사람의 살에 붙어 연소를 한다. 따라서 네이팜탄에 맞은 사람은 심한 화상으로 인해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심각할 경우 사망에 이른다. 네이팜탄을 맞아 옷을 다 벗은 채 대피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종식을 요구했다. 이런 사진들은 많이 존재한다. 특히 종군기자에 의해 찍혀진 사진들은 죽음의 순간을 항상 그리고 있으며, 이런 사실과 우연을 사진가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이 곧 세계 모든 사람들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저널리즘을 입각하여 공정한 것이어야 말로 진실을 담은 것처럼 카메라의 시선은 결국 관점과 입장을 달리한다. 따라서 <사진의 미학>을 읽는 것은 그 사진이란 매체로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사진가들의 작가의식 내지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작가 본인조차도 사진작가로서 예술을 논하며, 또는 저널리즘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야기한다. 단지 조금 난해한 요소는 그는 이 나라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있다는 점이고, 그것은 화해하기보단 어긋난 모순처럼 뒤섞여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 받는 조선인을 위해 또는 가혹한 착취에 고통 받는 노동자를 위해 사진은 참혹한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술이 되기도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어렵다. 서적을 저술한 김용훈 사진작가는 약간 모더니스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2010년에 제작된 책으로 현재 이미지를 사진으로 촬영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없는 존재를 컴퓨터로서 만들어낸다. 사진가의 손에서 세상의 이미지가 탄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가상에 존재하던 것이 현실에 있는 것처럼 증강하거나 또는 현실을 침범하고 있다. <사진의 미학>은 리얼리티 이미지를 예술로서 승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시대는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작가의 눈에 시대의 흐름은 숨길 수 없었다.

 

5․16을 두고 쿠데타와 혁명의 갈림길에서 혁명이라 했지만, 5․18 당시 사진과 국민의 정부 시절 북한과의 수교를 하던 대통령의 모습을 걸어놓은 점에서 시대의 모순과 아픔이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 본인이 625전쟁 중에 위협에 처해있었고, B29 폭격기의 폭격에 죽음의 손결을 피했고, 빨치산의 총알에 상이군경이 되었다. 오히려 동족상잔의 비극과 아픔을 논하던 그의 문장에서 진실한 사진작가란 곧 시대에 대한 관점이 필요하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게 결국 예술이 되는 것 같았다. 예술은 현실을 광학적으로 본다고 했다.

 

회화를 그리던 화가들도 화폭에 담긴 인물과 사물은 있는 그대로인 정물화로만 그리지 않는다. 인상주의자나 초현실주의자의 그림을 보면 전혀 우리는 그것이 바로 그 사물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을 준다. 그렇지만 예술이란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혹은 있는 그 자체의 사실성과 우연성에 의지하기도 한다. 예술이란 전달력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전쟁이란 이름은 이미 그로테스크로 가득하다. 과거의 신화나 역사에선 전쟁에 나가는 장군과 영웅 그리고 전사에게 영광의 이름으로 가득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시로서 전해온다. 그중 비극시라는 것은 그리스의 대표적인 예술문화로 내려온다. 그렇지만 거기에 동원된 병사와 도중에 피해를 본 민중들의 삶은? 예술이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게 하고, 때에 따라서 충격을 주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게 해준다.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요소가 강하기에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판단력도 가지고 있다.

 

바로 사진의 힘이란 그런 리얼리티 속에 존재하던 가려진 일상 내지 사건을 예술 내지 저널리즘으로 승화되게 해준다. 작가정신으로 왜 교양과 철학, 그리고 신념이 필요한 이유는 사진은 보는 이의 눈이고, 보는 이의 생각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의 미학>은 내가 원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책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하나의 정신적 수련이 되는 책이지, 사진으로 통해 세상과 현실을 읽어내기 위한 비평적인 도서가 아니다. 미학에서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가른다는 것처럼 어째보면 예술 자체가 진실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저 그런 무관심으로 지나가나, 그 무관심이던 대상이 하나의 예술이 되는 순간 우리 삶과 밀접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자신의 옆에 있더라도 그 자체를 각인하고 인지하고 보여주고 싶다는 순간적인 포착은 사진기를 잡고 있는 자의 몫이다. 물론 이 책에서 작가나 그 작가 주변 사람들은 현재 사진기를 들고 폼만 재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다. 카메라는 기계적인 조건에서 물질적으로 기계의 성능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개인적 자본력에 따라 좌우된다. 하지만 사진의 가치는 카메라의 자본력이 아니라 그 자본력조차 올릴 수 없는 내용의 가치이다. 사진기로 비추어 촬영된 이미지는 곧 그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 그 자체다. 그 시선은 의식적으로 드러나거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그 사진으로서 사진 찍는 사람이 그 사진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진에 대하여 생각하면 왠지 형식에 의해 좌우되는 사진들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물론 단순히 깔끔히 예쁘게 재단된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나 미적인 가치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사진의 미학>을 저술한 김용훈 교수는 제법 연로하신 사진예술가이나, 예술의 혈기에서 나이보다는 그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다. 그냥 디카 수준만 들고 있는 나에게 <사진의 미학>에서 요구하는 카메라는 무리다. 난 말 그대로 사진미학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기를 사랑하고, 사진에 대한 뭔가 유달리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카메라의 기초이론부터 시작하여 카메라 촬영으로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계속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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