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한길그레이트북스 5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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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을 예전에 돋을새김 출판사에서 나온 보급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처음 내가 <에밀>을 읽었을 때는 어렵지 않고 매우 이해가 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도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읽는 내내 <에밀>이란 책을 소개한 부분이 상당히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 혁명의 진원지 된 교육서”라고 말이다. 사실 돋을새김에서 출간된 <에밀>을 읽는 내내 어떻게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이에 대한 교육을 매우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루소가 가진 철학적 문학적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돋을새김에서 나온 도서들은 물론 가격도 저렴하고 읽기가 수월한 편이나, 사실 깊이 들어가고자 할 때, 그 서적들 일부는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게 아니라 편집자와 번역자로 하여금 쉽게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든 서적이다. 따라서 이 서적들은 처음 독서를 시작한 분들 중에 조금 심도 있는 서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겠지만, 만약 그 이상의 깊이와 사고를 요구한다면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도서가 좋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원전을 그대로 번역한 한길사의 <에밀>을 읽었다.

 

이전에 읽은 <에밀>과 달린 한길사에서 출간된 <에밀>은 상당히 책이 두꺼우며(거의 900페이지에 이름), 편집자의 작업 시에 책 안의 편집용지 여백공간이 매우 좁다. 따라서 보통 같은 사이즈의 A5 도서에 비해 본문 한 페이지 내의 글자 수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차가 같은 5가지라고 하더라도 전개방식이 조금 달랐다. <에밀>은 다소 소설과 같은 형식이 취해져 있지만, 소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혀 있다. 문학적으로 적힌 것이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철학, 사상,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등 수많은 학문적 소양이 담겨있다.

 

당초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 내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밝힌 것처럼 지나친 학문에 빠진 인간들을 대해, 그 학문과 예술에 너무 의존하여 인간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더 나아가 그런 형식적인 틀에 얽매여 지나친 과소비와 악덕을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고 했다. 루소가 가지고 있는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에밀>에 와서 더욱 증폭된다. 왜냐하면 루소는 자기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속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반계몽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그 계몽주의에 대한 지식의 맹신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진 것은 대부분 일부 사람들이고, 그 외의 농민이나 도시의 평민들은 글을 읽고 쓰는 지식이 없다. 따라서 글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방도로 사용할 것이며, 예술이란 것은 일련의 사치품으로 그 예술품 하나를 구경하기 위해 예술가를 고용하여 무수히 많은 자원과 금전을 소모하게 한다. 그 소모에서 가난한 농민과 도시의 빈민들이 먹어야할 밀가루나 음식조차도 필요하게 된다. 그토록 가난한 사람들은 빵 하나를 먹기 위해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나, 부자들은 그 빵을 만들 수 있는 밀가루를 자신을 위한 놀이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밀가루가 필요했다. 밀가루의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기보단 밀가루가 취향에 의해 가져가는 부류가 더 많았다. 생계를 위한 사람은 가난으로 구매할 수 없지만, 취향에 의해 구매하는 자들은 경제적 부를 소지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저렴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식량이다. 하지만 루소가 보던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이 매겨진 것은 인간의 생명이었다. 이 얼마나 슬프고도 분노가 넘치는 말이란 말인가! 루소가 인간의 생명을 저렴하게 취급한 게 아니라 당시 그런 사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글로서 잘못된 것이란 점을 남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은 모두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인 불평등에 의해 고통 받는다고 말한다. 후천적인 불평등 가난과 신분이란 사슬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비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군가 이익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그 이익으로부터 멀어져만 했다. 사회생활하면서 가장 인간의 자기당착에 빠지는 경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루소도 인정한 것처럼 인간의 제1의 사랑은 자기보존에 대한 자기애다. 하지만 그 자기보존이 이루어지 위해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조차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모조리 부정하고, 그들을 존재성을 인식하지 않으나, 그들이 가진 부나 명예들을 갉아먹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증가시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가장 몰려있고 서로 악취와 오물을 내뿜는 도시는 그야말로 악의 소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자연적인 존재이지만, 도처에 있는 사회적 굴레와 제약에 의해 사슬로 묶여있다. 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모두 펼칠 수는 없다. 오로지 그 사회적 계약 안에서만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에밀>은 바로 위와 같은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살아가야하는지 알려주는 도서이다. 그토록 <에밀>이 당시 프랑스사회나 현재 지금에 와서도 권력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경계되는 도서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사회라는 큰 사슬에서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슬로부터 자유로이 살 수 있거나 그 사슬조차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지배할 수 없기에 그런 것이다. 이미 <에밀>은 현대 모든 인문학의 구심점처럼 보일 정도로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전에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란 도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상당히 어려운 도서이면서도 그 책에서는 아이들로 하여금 무지한 스승이 필요한 것처럼, 학생들로 하여금 강제로 주입하는 교육체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무지한 스승> 이전에 이미 <에밀>이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어린 시절의 자신이 없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이란 존재조차 자신에게 어린아이라는 육체를 가진 적이 있었다. 어른이 가진 가치관은 모두 어린 시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 성장해가지만, 그 성장의 토대가 되는 영양분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좌우된다. 즉 그 인자는 부모, 스승, 주변 사람에 의해 결정되게 만든다. 문제는 그것은 상당히 편향되어 있으며, 아이에게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아이들이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보다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가기 전에 말이다.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강요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 강요는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론이란 여론몰이로 결정된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아니라 세상이 결정되어지는 구조는 한 마디로 스펙타클한 사회라는 점이다. 루소가 살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세론이나 여론이 결국 미디어로서 전달되어 그 미디어가 이미지라는 형태로 제작되므로, 우리는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로서 스펙타클을 구축하고 또 구축한다. 자신의 존재는 소외되고 결국 남의 욕망에 의해 살아간다.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사회적인 입지를 높이려 한다. 물론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목표로 삼는 것도 인생의 큰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좁은 시선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목표가 완수되면 어떻게 할 것이고, 그 것보다 규모가 더 큰 목표를 달성하여 더 이상 무엇을 찾아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뭐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원하게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자기의 의도를 무시한 채 결국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걸어온다. <에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알기도 전제 죽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인생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메여있기에 루소는 늘 자연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그 자체를 포기하고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원래 물리적인 요건에서 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문명발전에 의해 호흡할 때마다 매연과 먼지가 내 코를 찌르고 내 목을 아프게 하며, 내 눈은 탁해진다. 마시는 물은 정수기를 놓아도 안심하지 못할 경우도 있으며, 땅에서는 각종 오염물질로 가득하다.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연, 그 자연을 인간이 부수고 망가뜨리고 정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종적으로 정복된 것은 인간 바로 자신이었다. 인간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육체를 나약하게 만들었으며, 정신은 온갖 사악한 정신으로 가득하다. 인간이 바라고 있는 것은 가장 자신의 이익이고, 다음으로 타인의 파멸이다. 자신의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익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루소가 그래서 약자의 재물을 강자가 삼키는 이유는 강자들은 자신의 쓸데없는 권위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로부터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어쩌나? 루소는 분명 18세기 인간이나 21세기 역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에밀>을 읽는 순간, 당대 사회에도 파장을 일으키나 지금도 파장을 주는 이유는 <에밀>에서는 인간은 주어진 것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동하라는 점이다. 자연적으로 키워진 에밀, 그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란 불리는 아버지 친구로부터 같이 성장한다. 그 스승은 에밀은 자신의 학생이지만, 그를 학생으로 대하기보단 같은 시선으로서 친구로 대한다. 스승과 제자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인 것이다. 학생에 대한 인격과 자유의 존중은 결국 그 제자 역시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부모나 사회적 세론에 의해 아이들에게 닦달하듯이 교육하고 억지로 강요하는 모습은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는 지름길이며, 아이들로 하여금 눈치만 보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어 어른이 되어서 비굴한 행동을 일삼게 하는 패악 질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처럼 자라고, 뭐든지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와 지금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서 루소의 사상이 모두 옳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루소가 주장한 것처럼 한 사람의 인간을 만드는 것만큼 정말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오덕 내지 덕후라고 불리는 오타쿠라는 사람이다. 오타쿠라는 나라도 인간사회에서 보이는 모순과 문제점을 모르거나 단시 구경만 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좋다는 것 역시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판단력이란 것이다.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우리는 인간 본인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하지 않은 채 단지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왜 내가 오타쿠라는 점을 여기서 아무 망설임 없이 밝혔을까?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그 요소를 알 수 있다.

 

주인공 파일럿 소년에게 세상의 어른들은 그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그 소년에게 원하는 것은 어른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행동하기를 바란다. 소년은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그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을 원망하고 책망하여 심지어 자신을 파멸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아이의 고민을 알아주지 않은 어른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어른들이란 존재 역시 지난 어린 시절에 힘든 삶을 살아온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인생을 배운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인간이란 자신과 혹은 그 집단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자유롭고 관대한 어른만이 오로지 자유롭고 관대한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게 <에밀>을 보던 마지막 모습인 것 같았다. 아이는 어른들의 거울과 같은 존재다. 아이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게 해준 어른의 책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자신의 기대나 목적을 바라고, 그 이면에 가려진 책임과 의무는 회피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인간이라 되라고 말만 하면서 정작 좋은 인간이 되는 방법과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틀과 형태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이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적 관념들은 결국 현실의 육체적인 요소까지 아이들에게 작용한다. 아이들에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배내옷이나 침대를 주지 않고, 그대로 온 몸은 감싼 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좁은 침대에 그를 감옥의 죄수처럼 나둔다. 아이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움직일 자유도 주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인형처럼 꾸며대기만 한다. 또한 루소의 시대만큼 지금의 시대에 아이들에게 자연이란 공간을 제대로 알게 해주지 않는다. 농촌이란 시골에 살기는 어려우나 아이들에게 농촌이란 흙을 어촌이란 바닷물을 알게 해줘야 한다. 인간의 강인한 신체와 정신은 단순히 성능 좋은 약과 조기교육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자립성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면 결국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의는 결국 어떻게 죽는 것인가라는 양면적인 의문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름은 너무 두렵고 무서우며 때로는 공허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태어나서 자라고 병들어 죽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린 죽음에 대하여 진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단 그저 그 죽음에 대해 어떻게 도망치려다 결국 두려움과 좌절에서 사라져간다. 물론 죽는 것은 두렵지만, 그 두려운 마음을 줄이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육체는 죽어도 그에 대한 기억은 주변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애를 가져야 할 이유는 자신의 생명이 끊어져도 주변사람들에게 그가 베풀었던 진실한 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조선시대에 가난한 백성을 위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위해 노력하던 지식인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이 되어 좋은 교육의 본보기로 활용된다. 자신의 창고에 쌀이 쌓이는 것보다 주변사람들의 가마솥에 쌀이 들어가 있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것이다.

 

<에밀>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인간 본인은 그렇게 대단하고 뛰어난 존재이기보단 그저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범해 보여도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자유로운 영혼과 따듯한 인간애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에밀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의 일상에서 주변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은 행복함으로 이어지고, 그 행복함을 나누는 것으로 그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와 잘 지낼 수 있는 에밀은 그렇게 사람들과 잘 지내라는 교과서적인 도덕관념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러고 싶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능하다. 정언명령이 되는 그 근본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에서 발견된다. 인간은 윤리적 가치는 타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나, 그 최종적인 이익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큰 고통이고 상처가 될 것이고, 길가에 괴로운 사람들이 넘치면 그 마을과 도시는 점점 쇠퇴하여 온갖 범죄와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애적인 가치는 타인의 이익이 아니라 결국 자신도 같이 이익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이익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타인의 삶까지 박탈하고 그 생명까지 앗아가 버린다. 정말 두렵고도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인간들이 있고, 그런 인간들을 허용하는 사회가 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도록 허락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강요된 삶으로 얼룩진 그들은 단체와 조직에 속하면서 오로지 거짓과 위선을 배운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진 어른 같은 아이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어른들이 되면 아이들보다 못한 어른이 된다.

 

그래서일까? <에밀>은 종착편은 에밀이 소피를 만나 결혼하여 그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에 대한 맹약과 복종이 보여준다. 에밀과 소피가 애를 낳아 에밀의 아이를 맡는다면, 에밀은 분명 그 에밀을 만들어준 친구 같은 스승처럼 애를 키울 것이다. 하지만 에밀에 대한 교육은 끝나지 않는다. 에밀에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키운 스승은 필요 없을지 모르나, 에밀이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그 아버지로서 가져야할 자세를 에밀은 또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 배움은 무리하게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서적은 모순 아닌 모순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편견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자연적으로 살아가게 하여 그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을 지키는 어른은 누구로부터 방어책을 얻을 수 있을까? <에밀>이란 책은 쉬운 책이 아니다. 특히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은 그야말로 인간의 종교와 철학이 그대로 담겨진 내용이다. 아마 지금 21세기에 본 나라도 루소의 관찰력에 감탄을 숨길 수 없다. 종교는 간단해야 하며, 어려워서는 안 되며, 종교는 그 나라와 문화 그리고 인종에 따라 다르면 그 차이에 그 자체로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그것은 존중해야하며, 절대적으로 자신의 종교만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신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선을 베푸나, 그 선을 실행하는 것은 인간이고, 어떤 종교가 있더라도 그것을 강요하면 안 되며, 신의 가르침은 오직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를 돕는 것임을 알기에 루소의 <에밀>은 당시 종교인들에 의해 박해받는다. 루소의 박해는 <대화>편이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힘들었다. 루소는 광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누가 남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그 망상적인 피해의식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던 실존주의 선구자이며, 가난하고 배고픈 농부를 사랑하던 인도주의자였다.

 

<에밀>은 바로 루소의 사상이 모두 담긴 서적이다. 왕이나 귀족, 농민이나 노예 상관없이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으며,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에밀>은 <사회계약론>을 적는 밑바탕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에밀>의 마지막 부분은 <사회계약론>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나온다. <에밀>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가 되어 이기심과 시기심으로부터 멀어져 인간 그 자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린다면, <사회계약론>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할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아가지 못하여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 안내한 도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루소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 대상은 언제나 억압받고 가난함에 지친 약자의 편에 있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개인의 의지, 집단의 의지, 그리고 일반의지로 나운다. 인간은 자기애가 1번째이기에 그렇고, 국가라는 조직을 이루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 공공의 이익을 원하는 일반의지, 하지만 일반의지가 가장 실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루소는 안다. 개인들의 이기심이 하나가 되는 전체의지가 너무 강력하고,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가치는 결코 남이 강조하는 것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아래 탄생하기 때문이다. <에밀>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살아가야하나 살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본연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윤리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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