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스 - 세상에 마음을 닫았던 한 소년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행복한 육아 1
버지니아 M. 액슬린 지음, 주정일.이원영 옮김 / 샘터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딥스>를 읽을 동안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과 주제를 다룬 서적인 이 도서에서 뭔가 모르게 큰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딥스>라는 책은 실제 미국에 딥스라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치료한 경험을 정리한 도서로 아동정신 및 심리에 대한 연구, 치료 그리고 아동학에서 큰 역할을 하는 도서다. 이번에 내가 우연히 읽을 때 2판 39쇄라는 점에서 국내에서 상당히 많이 팔린 도서고, 미국을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준 도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생각하자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다수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시작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의 서곡에 대한 결과는 새로운 사실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요구한다. 내가 <딥스>라는 책에서 어린 소년인 딥스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저자인 버지니아 교수에 의해 치료를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과정에 대한 노력과 고생을 부정하거나 비꼬고 싶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어서이다. 19세기 중후반의 내용과 20세기에 후반부 정도에 있었던 실제사건은 아무런 연계성을 없을 수가 있다. 단지 내가 조금 가십감이 드는 이유란 딥스라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부분이었다. 딥스는 어머니는 외과의사이고, 아버지는 천재적인 과학자다. 가정에 시중을 드는 관리인이 배치되어 있고, 상당히 좋은 집에 사는 아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인 중에 딥스라는 아이는 그 많은 어린아이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 책에서는 전형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이 녹아있다. 마치 미국 영화의 히어로 장르를 보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우연하지 않은 실수와 사건으로 마음을 가두고 세상과 벽을 쌓았다. 하지만 어느 계기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리한 아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 대한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대중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진부적인 스타일, Cliche로 가득한 현실의 이야기다. 사실에 입각한 에세이적인 내용이라고 하나, 그 딥스의 결말은 영재학교로 간 똑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로 된 것이다.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이 보여주는 이야기구조다.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해소 구조가 잘 보여주었다. 물론 딥스는 처음부터 위기의 절정이었을 뿐이나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내용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나두고 비교한 점을 내가 말하고 싶은 이유는 딥스라는 아이가 놓인 환경이었다.

 

어린 시절 어느 화재사건에 휘말려 문밖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내지 어머니가 원하지 않은 출산에 대한 후회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충분히 부유했고, 그가 가진 마음의 상처만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기에 심리치료가 가능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얻고 가질 수 있었다. <자본>을 읽을 쯤에 나는 어린 소년이 아침 6시에 일어나 밤까지 일하고 평균 노동시간이 12~15시간(!)이란 지옥 같은 환경이었고, 공장감독관이 그들을 만나 상담할 때 이미 어느 아이는 잠을 자지 못한 채 30시간 넘게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두운 방에 좁은 공간에 숨 쉬기도 어려운 조건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딥스>를 보는 순간, 딥스보단 <딥스>라는 책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드림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딥스는 가정환경이 어려워가 아니라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고, 정신치료를 담당하는 A선생님으로 통해 놀이치료로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될 수 있던 것도 충분히 가정 내에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딥스는 만으로 6살이 되어간다. 그리고 <자본>에 있는 가여운 아이들도 6살짜리도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딥스지만, 그는 그럴 기회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소년들도 있었고, 그런 점은 미국 현재에도 많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신의 언어인 영어문법조차 제대로 숙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런 조건에서 과학자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를 둔 영재인 딥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처음 책을 펴는 순간 정해진 스토리란 점이다.

 

딥스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통해 다른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너무 위기와 역경을 극복하는 미국인(그것도 백인) 엘리트들의 화려한 부활을 제시한 것 같다. 책 속에 저자는 그런 의도를 비추지 않았겠지만, 의도와 달리 무의식 속에 깊숙하게 박힌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용은 이미 시작한 것처럼 판에 박힌 이야기다. 마음을 굳게 닫은 아이가 있는데, 그는 총명하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구원자가 나타나 그를 재기할 수 있도록 조력해주며, 그는 결국 그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스토리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해하기 쉽도록 에세이 방식으로 기록한 것은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란 그 대상자의 상황과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점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소년 중에 특히 후천적인 영향에서 부모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경우는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부모가 너무 일방적인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가 하나가 없거나 혹은 멀리 일을 하러 가야 하거나, 또는 심한 병을 앓고 있든가 하는 다양한 사례 및 케이스가 필요한 것이다. 하다못해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학대를 받으면서 일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란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읽으면 큰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딥스가 말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6살 소년이 보는 세계란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노래하였다. 그것도 아직 완전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이고, 이제 반 정도 되는 분량에서 딥스는 아름다운 말을 구사한다. 이게 과연 보통 6살인가? 딥스는 천재적인 판단력과 탁월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내용이란 점에서 내 가슴에 들어올 수 있는 여운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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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에반게리온 14 - 완결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드디어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완결되었다. 내 인생에서 만화애니메이션 세계에 빠져든 이유를 무엇이 계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후 애니메이션에 빠졌고, 이후 계속 애니메이션을 감상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나에게 큰 동기나 지속성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미 전에도 혹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3가지로 구분된다.

 

1가지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가이낙스 재직시절 TVA 26편과 극장판 2판을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그가 가이낙스에서 퇴사하여 카라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에 제작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마지막으로 가이낙스부터 카라까지 계속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제작한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각각의 에반게리온이란 이름으로 어느 점은 유사하고, 어느 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점에서 우리는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의 묘미를 각각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이카리 신지 육성계획>, <학원 타천록>과 같은 번외적인 작품이 있으나, 메인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3번째의 붐을 일으킨 이 작품은 이미 하위문화를 지나 대중문화에 큰 여파를 주었다. 우리가 모르지만 이 작품에 사용된 장면 내지 OST가 대중방송에서 종종 나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미사토의 테마송은 많은 CM송으로 나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매체가 단순히 하위문화로 볼 것만 아니라 하위문화 내에서 대중문화를 자극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작용된 셈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효과는 애니메이션은 단지 애니메이션일 뿐이다.”라는 고정관념과 틀을 깨고 하나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내용이 기존의 작품들과 큰 방향성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와 똑같은 주제에 지겨움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며 문화소비를 해왔다. 문화소비의 문제점은 바로 유행에 대한 부분인데, 유행이란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기존의 자신과 맞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작품적 특성은 인간의 이중적 잣대로서 판단할 수 없는 주제로 다가왔다.

 

기성세대에 대한 복종과 긍정보다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했고, 언제나 아이들은 순종적이거나 활발한 요소를 강조하기보단, 오히려 불안함으로 매일 괴로워했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삶의 활력을 잊어버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신지의 경우, 그는 이제 중학생에서 어른도 아닌 그런다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청소년이었다. 불안한 성장과정과 생활환경,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지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회 청소년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신지의 어머니는 실험으로 인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현실에 남아있었다. 가족의 죽음이란 상당히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잔혹한 사건이다. 이카리 사령관이 왜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하고 사람의 마음이 사라졌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지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자신과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는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만화책을 보면 오히려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 역시 불쌍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카리 유이가 대학교 시절, 그녀는 매우 우수하고 아름다운 대학생(대학원생)이었다. 거기서 만난 이카리 사령관은 조용하고 조용한 학생에 불과했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 그에게 가자,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에게 바꾸어 먹자고 권한다.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였으나, 유이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에서 말이다. 유이는 후유츠키 부사령관이 자신의 교수이던 시절, 교수에게 이카리 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는 아주 귀여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왜 귀여운 것일까? 외모로 보면 이카리 사령관은 표정이 어둡고 깔끔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이에게 자신이 받은 음식을 교환하는 것과 교환 후 괜히 부담스러울까봐 피하려는 모습에서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이 상당히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란 점을 알았다. 겉으로 활발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주기보단 실제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그가 좋은 사람인 점을 알았다. 자신의 벽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유이에 손길에 있는 힘과 용기를 다해 유이와 가까워지는 이카리 사령관을 두고 귀엽다고 할 것이다. 아마 일본적인 표현으로 가와이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가와이이란 귀엽다란 말이 되나, 단순히 영어의 cute 내지 pretty 같은 의미가 아니라 왠지 보호해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곁에서 같이 지켜주고 싶은 그런 대상을 가와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남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후유츠키 교수가 그를 처음 만날 때 매우 불쾌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그의 인상은 호감을 얻을 수 없었다. 단지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로 통해서만 모든 인생의 구원과 의미를 부여받았다. 아들인 신지에게 그토록 질투하는 이유는 유이에게 남겨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듯 남편과 아내는 분리된 존재이지만, 아들과 어머니는 원래 하나의 동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초호기 조종사로 가능한 것은 오직 신지이었다. 초호기 실험가동 중에 죽은 유이의 몸과 마음이 초호기에서 잠들고 있었다.

 

신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육체와 정신이 모두 에바 초호기에 흡수되어도 강력한 힘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신지를 차갑게 구는 이카리 사령관은 오직 인류구원계획으로 유이를 만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이용하던 이카리 사령관은 마지막 순간에 유이를 만나 깨닫게 된다. 유이의 몸에서 태어난 신지의 작은 손을 만질 때, 생명의 경이함과 사랑스러움을 말이다.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에게 신지는 우리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자신이 가장 질투하던 신지를 사랑했다는 사실과 이때까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신지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신지를 나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그 곳으로 가고, 유이는 신지를 영원히 지켜 봐줄 것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이나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은 인류보완계획에서 수많은 레이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은 LCL 용액으로 변하게 만든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End of Eva>에서 아스카는 양산형 에바의 공격에 의해 죽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그녀가 가장 바라는 카지의 품에 안겨 LCL 용액으로 변한다. 신지가 미사토의 의지를 이어받아 최후에 괴롭고 힘들고 아무도 잡아주지 않을 냉정한 현실에 남아있길 바랄 때 그 옆에는 오직 아스카만이 누워있었다.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며 죽이려고 할 때, 아스카는 신지의 얼굴을 쓰다며 주면서 기분 나빠란 말과 함께 끝이 난다. 결론이 아주 불안정하고, 마무리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채 끝난 가이낙스 시절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두고 생각해보면 만화책은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신지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자신 안의 꿈을 꾸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레이는 전학생, 아스카는 소꿉친구, 아버지는 과묵하나 하지만 어머니를 무척하는 애처가, 어머니 유이는 활달한 정치인으로 나온다.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신지에게 자신의 꿈은 많은 사람들과 웃는 얼굴로 하루 일상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에서는 신지는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모두가 LCL 용액을 변한 후 신지의 선택이 결국 다른 세계로 이어져 마무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신지에게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의 기억과 신지의 기억은 전혀 다르고, 신지가 가진 시간적 축척과 타인이 가진 시간의 축척은 다르다. 원래의 세계에서 신지는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고독을 느꼈을 것이나, 이제는 아무도 그 치열한 세계를 모르고 자신만이 알기에 고독할 것이다.

 

미사토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신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스토리에 대해 상세히 논하기보단 작품이 의미하는 요소를 서술했으나, 만화책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전혀 다른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인류보완계획 실시 이후 TVA25~26화에서 자신의 껍질 안에서 벗어난 신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으나, <End of Eva>에선 모든 것이 파괴에 이르렀다. 그런데 만화책은 모든 것이 파괴한 것도 지금의 상황에서 새롭게 신지가 새롭게 (자신의 자아로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세상이 리셋이 되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가는 신지가 있을 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품적 배경에서 4계절이 없고, 단지 여름만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겨울이 시작되어 봄이 오기 전에 신지는 중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살아가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아이도 아니요, 아이도 어른의 중간적인 경계점에서 어른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자신에 대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힘든 여정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알 수 있을 사람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신지를 모르고, 신지는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게 단절되어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 자신의 과거의 어둠을 모두 벗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리셋도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인류보완계획이란 수단은 인간에게 태어나는 것은 결국 고통과 괴로움의 시작이므로, 삶의 시작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작한 프로젝트다. 제레의 의지는 바로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난 이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선택이고 목적이다. 그 어느 인간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라고 할 권리는 없으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늘 불행한 삶과 마주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다른 세계에 있더라도 조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세계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본래부터 불리하고 부조리하기에 새로운 조건 제로베이스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여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현실의 냉혹함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다고 그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게 아니라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세상은 자신의 의지로서 만나고 접촉하고 마주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고 하여도 우리 사회는 그 개인 당사자의 의지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위치란 내가 옆에서 이야기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에 불과하다. 그런 상대방에 대해 마음을 나누고, 위안이 되어주며, 서로가 이해해줄 때 우리는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그 모든 인간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다. 인간 내면에 가려진 무의식이란 세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부여된 성품 내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주어진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 신지처럼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을 고려하면 당연히 그의 무의식공간에 내재된 불안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누적된 그 시간만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과 방법 역시 길고도 어려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보완계획이란 거대한 사건은 신지의 인생을 전환하게 해준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그럴 시간 혹은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흔히 에바 시리즈가 루프물이란 이야기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해보았다.

 

루프란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하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가역적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면서 에반게리온은 루프물이기보단 어느 한 동일한 조건에서 여러 가지 분기점을 나누어지는 병렬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 부록 편에서 등장하는 마리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와 똑같은 이름과 외모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신캐릭터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인류보완계획이 만화책에서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에 등장한 마리가 존재하려면 역시 루프의 결과보단 병렬적인 세계관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이미 신지는 자신이 살아가야할 세상에 대해 인지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 시점에 <End of Eva>의 파국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보여준 Second impact 이후에 등장한 Third impact<End of Eva>에서 보여준 파국과 맞먹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신지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루프되어 갈 필요는 없다. 이미 1<End of Eva>에서 맞이한 파국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되풀이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이 시기적으로 <End of Eva>를 기본으로 이야기로 제작되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제작년도로 하나씩 정리한다면 루프물이란 것은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리의 등장에서 그녀가 안경을 착용한 점이 유이를 동경한 한 여학생이라면, 병렬적인 흐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만화책에서 마리의 등장 없이 인류보완계획이 끝난 시점에서 루프의 원인이 되어야 할 사건이나 배경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대학교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두고 TVA 25~26화와 <End of Eva>를 두고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로 분리된 것으로 본다. 실재하지 않은 것의 복제 내지 또는 실재했던 것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로 구성된 시뮬라크르(simulacre)이고, 그것이 동사형으로 되면서 시뮬라시옹(simulation)로 되었을 뿐이다. 물론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 역시 시뮬라크르로서 다가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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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게 아직까지 연재돼고 있었다니!!!! 마지막권이네요...이거 티비판 애니 마지막편 보고 멘붕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게 엊그제 같은데...
엔날 생각납니다. 글 잘봤어요~

근데, 베르세르크 완결은 언제나 날런지...1년에 한권 나오다가 이제는 소식도 감감...헐~

만화애니비평 2014-12-11 17:3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이란 언제나 촉을 세우고 대기를 타야 하는 거지요..
아 아스카짜응이...흑흑
 
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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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에서 신해철은 그를 두고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라 했다. 이제 그 역시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그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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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9일 김해 명예의 전당에서 개최된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우연히 국내 만화 및 애니메이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부천에 위치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만드는 것과 운영하는 것, 게다가 한국 근현대만화역사에서 원로이신 조관제 화백을 비롯하여, 한국 만화가 중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최규석 작가,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장형윤 감독까지 있었다. 세미나를 관람한 후, 우연히 세미나 발제자 및 행사를 주관한 분들과 같이 식사할 기회가 있었고, 식사 뒤 뒤풀이로 맥주를 마실 시간이 있었다.

 

그런 자리에 우연치 않게 내 왼쪽에는 최규석 작가가 오른쪽에는 장형윤 감독이 앉게 되었다. 이 두사람의 정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셀마의 단백질 커피>라는 작품이다. 최규석 작가는 같은 대학 출신 친구인 연상호 감독과 더불어 <내사랑 단백질>을 장형윤 감독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이란 작품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최규석 작가, 연상호 감독, 장형윤 감독 작품을 접해본 것은 바로 그 인디 애니메이션인 <셀마의 단백질 커피>이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과 스토리 전개에서 색다른 요소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유아 내지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작품만 나오기에 청소년 내지 성인들을 위한 작품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이 만화책이고, 최근에 라이트노벨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 시장을 열게 되었으며,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에서 그나마 한국에서 제작된 작품을 겨우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성인들이 감상하기 좋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 시장이 형성된 공간을 고려한다면 유아계층과 더불어 성인들도 같이 볼 수 있는 가족적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 여긴다.

 

그 중에서 이번에 내가 감상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전체 관람이 가능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고, 장형윤 감독 작품 중에 <아빠가 필요해>와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다시피 그렇게 강한 충격과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보단 잔잔한 요소로서 관객에게 다가온다. 처음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았을 때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인간여자와 늑대남자 사이에 비추어진 긴장감은 인상적이었다.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상영시간이 10분밖에 되지 않은 단편애니메이션이고, 캐릭터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동물처럼 생겼고, 그들은 동물이나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우화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에서 장형윤 감독 작품은 <아빠가 필요해>와 같이 작품 내의 이름이 동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점은 뒤에 <셀마의 단백질 커피> 중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주인공인 진영영은 원래 무림고수였으나, 죽은 후 환생하여 커피자판기로 되었고, 우연히 알게 된 혜미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피자판기인 진영영의 모습은 영락없이 동화 속에 등장할만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런다고 자판기라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미묘한 배치 속에 그의 작품은 뭔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게 있다.

 

인간과 비인간적인 등장인물로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보낸다. 그 정답은 아마 사랑일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아빠가 필요해>는 제목 그대로 아빠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고, 어느 여자가 나와 늑대에게 아이를 건네는 모습에서 가족의 재결합이란 독특한 모습이 나온다. 늑대와 같이 사는 사슴은 애인인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위험에 빠진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러면서도 늑대는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가족이란 관계에서 늑대와 사슴, 토끼와 거북이,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이고 서로 같은 조건에 있을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늑대는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다. 그는 자신의 일보단 결국 자기에게 맡겨진 영희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이 일을 하고 꿈을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가나, 결국 그 끝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그런 점에서 장형윤 감독이 제시하는 작품적 가치에서 잘 알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문학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로 작성된다. 물론 실존했던 일들을 기록한 작품도 있으나, 소설 안의 여전히 허구적 이야기다. 사실이 아니라서 허구인 게 아니라 소설로 작성되는 그 순간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말하듯 소설은 하나의 시가 될 수 있고, 시라는 것은 그 누구의 이야기로 될 수 있는 하나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삶 그 자체가 오히려 소설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기에 그 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대하여 과연 인간에게 자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것이다. 사랑에 대해 내가 잘 말하기란 어렵다. 사랑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하며, 그 사랑이란 개념을 단순히 정의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아빠가 필요해>는 가족의 구성이 이질적인 존재라도 같이 모이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이고, 가족이 없이는 자신이 어떤 출세나 성공을 하더라도 행복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가족 관계에서 모든 것이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빠가 필요해> 이후 등장한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조금 다른 사랑의 이야기다. 차가운 몸으로 태어난 무림고수는 그저 싸우기 위해 살아왔고, 전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혜미를 만나 자신의 생에 대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다른 점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혜미라는 소녀는 원래 인간이고, 검객인 진영영은 인간이었으나 커피자판기로 환생한 존재라는 점이였고,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주인공 경천이는 뮤지션 지망생이었으나 얼룩소로 변한 인물이고, 우리별 일호는 본래 인공위성이었으나 소녀로 변신한 존재다. 본래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자로 변한 경천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으로 변한 점에서 변신이란 소재가 서로 역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경천이가 얼룩소로 변한 이유는 인간인 그는 인간의 마음을 상실해서이고,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기계이면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경천이는 노래를 하는 가수지망생이었고, 예전에 나름 실력이 뛰어나 오디션에서 최종심사까지 간 실력자다. 그러나 그는 점차 음악에 대한 진심이 사라지고, 그가 좋아하던 여자인 은진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게다가 그녀는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서 상심에 빠지게 된다. 인간인데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이유, 그것은 경천이는 좋아하는 여자를 눈앞에서 그저 보낼 수밖에 없는 좌절감이었다.

 

그가 처음 느낀 그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불렀을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래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오직 그 노래를 쫓아 온 우리별 일호라는 인공위성만이 있었다. 인공위성이었던 우리별 일호는 이미 수명을 다하였고, 그저 우주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고철덩어리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면서 일호가 발견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고, 피아노 반주였다. 그 주인공은 경천이었고,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경천을 찾아 지구로 내려온다.

 

하지만 지구로 온 일호는 저주에 걸린 얼룩소를 만나고, 얼룩소는 소각자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져있고, 오사장이란 밀렵꾼은 얼룩소의 간을 노리며 공격해온다. 여기서부터 위기에 빠진 얼룩소 경천이를 일호는 만나게 되고, 단지 그의 노래만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천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사랑도 잃고, 가난한 뮤지션인 경천에겐 아무런 미래와 희망이 없었고, 그저 현실 앞에 무력하고, 이제는 얼룩소의 모습으로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소각자는 마음을 잃은 인간이 동물로 변하면, 그 동물을 찾아 자신의 소각로 안에 넣는 괴물이다.

 

괴물의 등장, 그리고 오사장의 밀렵행위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 이미지로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을 잃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현실에 놓인 상황이 전혀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은 것이고,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지 혹은 나를 위해 누가 미소를 지어주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그런 것이다. 삶의 의지가 나를 위해서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그 질문에서 경천이는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동물로 되어버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성으로서 자신 안의 세계만 아니라 자신 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만물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경천이의 경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 세계란 오직 자신안의 세계고, 남에 대한 마음을 없었다.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보통의 동물들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북쪽의 마녀가 경천에게 찾아와 만약 살고 싶다면 자신을 따라 인간의 손길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렇다면 소각자와 오사장으로부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될 경우 경천이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하다못해 인간의 기억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려 인간의 모습을 잃은 경천이는 자신이 인간인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인간, 우리별 일호와의 사랑이었다. 우리별 일호는 사랑이란 단어를 모르고 감정도 모르는 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남자가 사랑을 모르는 여자와 만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다. 게다가 우리별 일호는 수명이 이미 다 되었기 때문에 언제 멈추지 모른다. 일호의 목적은 오로지 경천이의 노래를 듣는 것, 음악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어가 서로 다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소통이 어렵다. 그렇지만 오로지 음악으로 통해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으며, 같이 어울릴 수 있다. 음악의 힘이란 바로 서로 통할 수 없는 존재라도 통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음악의 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넘어 기계인 우리별 일호까지 마음을 가지게 했다. 마음을 가지게 된 일호에게 서로 의지가 가능한 존재는 얼룩소였고, 얼룩소인 경천이는 이때까지 남들에게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진다. 자신만 생각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일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런 애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얼룩소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일호와 마주하면서 일호는 자신이 로봇인데도 괜찮은지? 아니라면 가슴과 등이 거의 붙어 여자다운 매력이 부족해도 괜찮은지 묻는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으나 현실에서 보자면, 일호는 자신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어도 좋은지? 그리고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도 좋은지 물어보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질적이고 부족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경천에게 물어본 것이다. 나란 존재, 너란 존재 있는 그대로, 그 모든 것에서 좋은 점과 더불어 불편하거나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과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조금 다른 식으로 전개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상대방에 가진 부족한 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족한 것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나, 인간 그 개인은 타인에 대해 척도가 될 수 없다. 단지 인간이 다른 동식물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에 척도가 되는 것이지 어느 인간 하나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누군가 서로 드러내어 그것을 서로 용인하여 상대방을 아낄 수 있는 게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경천이가 은진에게 바라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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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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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은 아직 나에게 참 먼 책인 것 같았다. 나름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신화에 대한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백년의 고독>은 신화적인 요소를 이리저리 끌어온 작품이다. 번역자의 부연설명에서처럼 길가매쉬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여행, 연금술사, 성배 찾으러 가는 기사단의 여정, 영원함을 추구하는 점이라든지 더 나아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디오니소스적인 모습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이 복선적인 요소로서 계속 운명이 돌고 돌지만, 한편으로 너무 갑작스레 상황이 변화된다. 그 변화의 공간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계속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돌고 돌아 마지막에는 파멸이란 이름으로 그 마무리를 주어진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실제 저주받은 인간의 역사는 백년이 아니라 백년이 넘어 버렸다. 아마 100년의 고독을 지닌 자는 우르술라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호세 아르끼디오 부엔디아의 아내이면서 사촌인 그녀를 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촌인 부엔디아계의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그녀는 남편인 부엔디아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마꼰도로 온다. 오게 된 동기는 남편이 마을의 남자에게 남자구실하지 못한다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와 대결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서 그 남자를 죽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아직 20세기 이전이고 콜롬비아 배경인 점에서 국가적인 정치체계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콜롬비아 역시 이전에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로 통치 받았을 나라일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어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에 흑인과 백인 혼혈인, 집시들, 원주민들이 있는 점을 본다면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가 독립을 했더라도 그 이전의 역사적인 흔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늘이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역자의 부연에서 마꼰도라는 것은 거울로 만든 환상의 도시다. 거울이란 것은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만든 도구다.

 

하지만 거울 너머에 비추는 자신은 분명 실존하나, 거울 그 자체에 보이는 존재는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고, 그 존재는 단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 너머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단 거울 그 자체로 보려 한다. 거울을 보는 것은 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거울은 어둡거나 혹은 밝거나 또는 황혼이나 새벽의 언저리에서 비추어지는 모습이 다르다. 거울이 보이는 것을 다 반사한다고 해도, 그 거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정말 그 자체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빛을 굴절을 직접 볼 수 없으나, 거울은 빛의 굴절을 볼 수 있게 한다.

 

굴절로 어긋난 모습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아니라 어긋난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사실이란 진실처럼 바로 일어난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Fact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모호하고, 그 경계 내에서 사실이란 것은 결국 만들어진 존재이란 것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허구, 그 교묘한 눈속임 내지 은밀함이 아마 <백년의 고독>을 오묘한 세계로 인도했을 것이다. 사실주의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나, 내가 본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너무 달랐다.

 

과장이 넘치는 표현력, 문장의 연결성이 전혀 부드럽지 못한 배치, 게다가 초과학적인 현상들은 과연 이것이 사실주의라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때마침 사실주의적인 만화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아이러니한 맛을 느꼈다. 심지어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물로 표현되지만, 작품의 설정과 전개에서 보여준 나치 아래의 잔혹함에서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인정받았다. 즉 만화적 표현과 묘사에서 의인화로 통해 사실적이지 못한 등장인물로 통해 당시의 사실들을 표현하였기에 사실주의라는 것을 인정받은 점이다.

 

그런데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 요소, 즉 당시 시대적 배경도 어느 정도 관여는 하나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사건으로 변화하게 되더라도, 그 자체가 사건의 중심이 아니었다. 모든 중심은 마꼰도로 시작하여 마꼰도로 마무리하고, 마꼰도 안의 부엔디아 가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비극의 탄생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도 인간의 예술은 아폴론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더 찬양한다. 정지된 아폴론보다는 계속 죽음과 삶을 반복하여 광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말이다.

 

<백년의 고독>에선 사치와 향락적 요소에서 포도주가 자주 거론된다. 갑자기 부자가 된 부엔디아 남자는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향략을 즐기기 위해 포도주를 욕실에 부어넣고 목욕을 한다.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인 점을 본다면, 술은 인간을 아주 기쁘게 하나, 때로는 미치게 하여 인간의 모조리 빼앗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낸다. 디오니소스의 향기로운 포도주야 말로 인간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마법과 같은 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법의 약을 마시지 않고, 이미 마법이 시작된다. 번역자가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처럼 마술적인 주술효과가 이미 걸린 셈이기 때문이다.

 

초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자신을 모욕한 남자를 죽이고 마꼰도로 온 것은 소설의 설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죽은 남자는 분명 묘안에 묻혔는데도 부엔디아 앞에 유령처럼 등장하고, 때로는 대화도 하고, 나중에 서로 화해까지 한다.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습이 이 작품에서 하나의 설정으로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에서 이것이 사실주의 작품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런 사실주의적 요소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마꼰도라는 마을을 만들고 발전시키면서 거기가 쇠퇴하는 과정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꼰도는 콜롬비아 영토 내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 속 내지 오지의 마을이다. 그곳에 온 부엔디아 가문은 마꼰도를 발전시키고 자식을 낳고, 주민들이 올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마꼰도는 부엔디아 가문만의 왕국이고 세계이며, 그리고 무덤이기도 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던 신생마을에 죽음이란 없었고, 단지 마을은 크게 성장하고, 이윽고는 집시들이 그 마을을 오게 된다. 그러면서 호세 아르까디오의 성욕, 그리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모험은 점차 평화로운 세계를 혼돈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혼돈은 자신들의 내부에서 온 게 아니라 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형인 호세는 세계를 돌고, 동생인 대령은 전쟁터를 누빈다. 그들의 동기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마을을 모조리 흔들었던 사건이 된다. 그로부터 아르까디오의 죽음, 아르까디오의 쌍둥이 아들, 미녀 레메디오스 승천,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서로 애인으로 차지하거나, 열렬한 가톨릭 신앙자인 페르난다의 시집 등에서 부엔디아 가문은 번창과 쇠퇴의 길을 걷는다.

 

발전과 쇠퇴에서 과학적 기술이 등장하는데, 가령 아주 아름답고 천사 같은 레메디오스의 죽음에서 부엔디아 가족들은 그녀의 모습이 담긴 은사진을 가진 점, 아마란따가 사랑한 남자가 가지고 온 자동피아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본 기나긴 기차, 그의 딸이 결혼한 남자는 비행기를 몰았던 사람이다. 중간에도 과학의 산물이 등장하고, 문명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 유입, 그로 인해 바나나농장 노동자의 파업과 죽음이 비극처럼 등장한다. 단순히 부엔디아의 가문의 발전과 몰락은 마꼰도의 역사이면서 한편으로 콜롬비아 역사를 비극적으로 보여준 점이다.

 

오히려 그런 비극이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부엔디아 가문이 겪은 일 중에 하나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령의 전쟁이 참전한 이유는 자유파와 보수파의 가치관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모든 집이 하늘색으로 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은 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벌인 전쟁은 분명 내전의 기나긴 슬픈 역사이었을 것이고,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겪은 200량이 되는 기차는 내전에 이어 노동운동의 슬픈 비극일 것이다.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항의하자 군인들이 와서 무참히 사격한 점에서 마꼰도 마을은 이제 삶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죽음이 존재하는 곳으로 변한다.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에서 봄이 부엔디아가 처음 올 때라면 아우랠리아노 세군도는 죽음으로 변해진 가을이고, 마지막 정점은 고모와의 근친상간으로 가문이 파멸되는 아우렐리아노의 슬픔에서 볼 수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욕망, 외부에서 오는 이방인에 대한 배척(메메와 마우라시오 바빌로니아), 다른 여자에 대해 서로 집착하는 형제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과연 그렇게 만든 것인가?

 

그렇다면 콜롬비아의 역사에서 100년이란 시간에서 계속 이어지는 마꼰도 부엔디아 가문은 영원히 그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고뇌로 끝나야 하는가? 첫 단추가 틀리면 뒤에 단추도 어긋나고, 심지어 더 어긋날 수 있을 것이다. 어긋난 운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아우렐리아노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에 혼자 있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근친상간의 욕망에서 초대는 사촌이었으나, 끝은 고모와 아들이다. 하지만 고모는 어머니와 형제이기 때문에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할아버지의 자손, 즉 고모이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인 이모이다. 고모와 이모인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결국 자신의 아들과 같은 아우렐리아노와 몸을 섞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이유로 아름다운 여왕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2남2여를 슬하에 두나,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란 점을 알고, 두 눈을 찌르고 평생 방랑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2남2여 모두 비참한 죽음과 결말을 맞이한다. 근친상간이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으로 보여주는지, 또한 그런 근친상간되도록 만들어내는 배타성이 결국 인간은 계속 돌고 도는 시간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 두고 보면, 우리는 근친상간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도, 아니 근친 적으로 다수 촌수가 멀다면 인정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점에서 배타적인 요소는 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년의 고독> 못지않은 사회적 갈등과 배타적 관계로 멍이 든 것은 분명하다. 그 결말은 부엔디아의 가문 몰락처럼 우리 역시 그런 배타적인 집단주의에 말려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제목이 일단 <백년의 고독>이란 말처럼 인간의 수명은 현재 대략 80년 이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100년 이상을 살은 사람도 나온다. 100년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수명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이상을 살아가든지 아니라면 그 이하를 살아가든지 항상 외로운 법이다. 그 외로움은 연애적인 요소도 다분할 것이고, 아니라면 인간적 요소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대령의 인생에서 그는 혼자만의 고독을 찾아 방에 은거하였으며, 많은 가족들도 어둠에서 고독을 영원한 반려로 삼았다. 외로움이 싫은 것이 인간이나, 그 외로움만이 자기에게 남은 것임을 알아낸 자들의 말로가 오히려 우리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고독을 느낀다. 고독이야 말로 실존주의자 내지 혹은 루소가 자기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시작이나, 그 고독이 지속되면 결국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로서 통해 자신을 볼 때 알 수 있다. 사회적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적인 요소이므로 고독에게 선택된 인간들을 보자면, 그들은 영원히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는 벽으로 가려진 존재다. 하지만 고독이 사람을 선택하든, 사람이 고독을 선택하든 그 기점에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원하지 않은 운명이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운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상 그대로라면 항상 그대로 비극은 이어진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분명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것이 다시 비극으로 몰아넣고, 고독의 영원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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