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스 - 세상에 마음을 닫았던 한 소년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행복한 육아 1
버지니아 M. 액슬린 지음, 주정일.이원영 옮김 / 샘터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딥스>를 읽을 동안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과 주제를 다룬 서적인 이 도서에서 뭔가 모르게 큰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딥스>라는 책은 실제 미국에 딥스라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치료한 경험을 정리한 도서로 아동정신 및 심리에 대한 연구, 치료 그리고 아동학에서 큰 역할을 하는 도서다. 이번에 내가 우연히 읽을 때 2판 39쇄라는 점에서 국내에서 상당히 많이 팔린 도서고, 미국을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준 도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생각하자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다수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시작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의 서곡에 대한 결과는 새로운 사실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요구한다. 내가 <딥스>라는 책에서 어린 소년인 딥스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저자인 버지니아 교수에 의해 치료를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과정에 대한 노력과 고생을 부정하거나 비꼬고 싶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어서이다. 19세기 중후반의 내용과 20세기에 후반부 정도에 있었던 실제사건은 아무런 연계성을 없을 수가 있다. 단지 내가 조금 가십감이 드는 이유란 딥스라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부분이었다. 딥스는 어머니는 외과의사이고, 아버지는 천재적인 과학자다. 가정에 시중을 드는 관리인이 배치되어 있고, 상당히 좋은 집에 사는 아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인 중에 딥스라는 아이는 그 많은 어린아이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 책에서는 전형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이 녹아있다. 마치 미국 영화의 히어로 장르를 보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우연하지 않은 실수와 사건으로 마음을 가두고 세상과 벽을 쌓았다. 하지만 어느 계기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리한 아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 대한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대중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진부적인 스타일, Cliche로 가득한 현실의 이야기다. 사실에 입각한 에세이적인 내용이라고 하나, 그 딥스의 결말은 영재학교로 간 똑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로 된 것이다.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이 보여주는 이야기구조다.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해소 구조가 잘 보여주었다. 물론 딥스는 처음부터 위기의 절정이었을 뿐이나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내용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나두고 비교한 점을 내가 말하고 싶은 이유는 딥스라는 아이가 놓인 환경이었다.

 

어린 시절 어느 화재사건에 휘말려 문밖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내지 어머니가 원하지 않은 출산에 대한 후회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충분히 부유했고, 그가 가진 마음의 상처만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기에 심리치료가 가능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얻고 가질 수 있었다. <자본>을 읽을 쯤에 나는 어린 소년이 아침 6시에 일어나 밤까지 일하고 평균 노동시간이 12~15시간(!)이란 지옥 같은 환경이었고, 공장감독관이 그들을 만나 상담할 때 이미 어느 아이는 잠을 자지 못한 채 30시간 넘게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두운 방에 좁은 공간에 숨 쉬기도 어려운 조건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딥스>를 보는 순간, 딥스보단 <딥스>라는 책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드림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딥스는 가정환경이 어려워가 아니라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고, 정신치료를 담당하는 A선생님으로 통해 놀이치료로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될 수 있던 것도 충분히 가정 내에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딥스는 만으로 6살이 되어간다. 그리고 <자본>에 있는 가여운 아이들도 6살짜리도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딥스지만, 그는 그럴 기회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소년들도 있었고, 그런 점은 미국 현재에도 많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신의 언어인 영어문법조차 제대로 숙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런 조건에서 과학자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를 둔 영재인 딥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처음 책을 펴는 순간 정해진 스토리란 점이다.

 

딥스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통해 다른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너무 위기와 역경을 극복하는 미국인(그것도 백인) 엘리트들의 화려한 부활을 제시한 것 같다. 책 속에 저자는 그런 의도를 비추지 않았겠지만, 의도와 달리 무의식 속에 깊숙하게 박힌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용은 이미 시작한 것처럼 판에 박힌 이야기다. 마음을 굳게 닫은 아이가 있는데, 그는 총명하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구원자가 나타나 그를 재기할 수 있도록 조력해주며, 그는 결국 그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스토리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해하기 쉽도록 에세이 방식으로 기록한 것은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란 그 대상자의 상황과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점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소년 중에 특히 후천적인 영향에서 부모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경우는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부모가 너무 일방적인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가 하나가 없거나 혹은 멀리 일을 하러 가야 하거나, 또는 심한 병을 앓고 있든가 하는 다양한 사례 및 케이스가 필요한 것이다. 하다못해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학대를 받으면서 일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란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읽으면 큰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딥스가 말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6살 소년이 보는 세계란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노래하였다. 그것도 아직 완전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이고, 이제 반 정도 되는 분량에서 딥스는 아름다운 말을 구사한다. 이게 과연 보통 6살인가? 딥스는 천재적인 판단력과 탁월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내용이란 점에서 내 가슴에 들어올 수 있는 여운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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