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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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은 아직 나에게 참 먼 책인 것 같았다. 나름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신화에 대한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백년의 고독>은 신화적인 요소를 이리저리 끌어온 작품이다. 번역자의 부연설명에서처럼 길가매쉬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여행, 연금술사, 성배 찾으러 가는 기사단의 여정, 영원함을 추구하는 점이라든지 더 나아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디오니소스적인 모습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이 복선적인 요소로서 계속 운명이 돌고 돌지만, 한편으로 너무 갑작스레 상황이 변화된다. 그 변화의 공간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계속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돌고 돌아 마지막에는 파멸이란 이름으로 그 마무리를 주어진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실제 저주받은 인간의 역사는 백년이 아니라 백년이 넘어 버렸다. 아마 100년의 고독을 지닌 자는 우르술라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호세 아르끼디오 부엔디아의 아내이면서 사촌인 그녀를 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촌인 부엔디아계의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그녀는 남편인 부엔디아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마꼰도로 온다. 오게 된 동기는 남편이 마을의 남자에게 남자구실하지 못한다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와 대결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서 그 남자를 죽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아직 20세기 이전이고 콜롬비아 배경인 점에서 국가적인 정치체계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콜롬비아 역시 이전에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로 통치 받았을 나라일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어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에 흑인과 백인 혼혈인, 집시들, 원주민들이 있는 점을 본다면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가 독립을 했더라도 그 이전의 역사적인 흔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늘이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역자의 부연에서 마꼰도라는 것은 거울로 만든 환상의 도시다. 거울이란 것은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만든 도구다.

 

하지만 거울 너머에 비추는 자신은 분명 실존하나, 거울 그 자체에 보이는 존재는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고, 그 존재는 단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 너머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단 거울 그 자체로 보려 한다. 거울을 보는 것은 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거울은 어둡거나 혹은 밝거나 또는 황혼이나 새벽의 언저리에서 비추어지는 모습이 다르다. 거울이 보이는 것을 다 반사한다고 해도, 그 거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정말 그 자체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빛을 굴절을 직접 볼 수 없으나, 거울은 빛의 굴절을 볼 수 있게 한다.

 

굴절로 어긋난 모습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아니라 어긋난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사실이란 진실처럼 바로 일어난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Fact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모호하고, 그 경계 내에서 사실이란 것은 결국 만들어진 존재이란 것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허구, 그 교묘한 눈속임 내지 은밀함이 아마 <백년의 고독>을 오묘한 세계로 인도했을 것이다. 사실주의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나, 내가 본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너무 달랐다.

 

과장이 넘치는 표현력, 문장의 연결성이 전혀 부드럽지 못한 배치, 게다가 초과학적인 현상들은 과연 이것이 사실주의라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때마침 사실주의적인 만화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아이러니한 맛을 느꼈다. 심지어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물로 표현되지만, 작품의 설정과 전개에서 보여준 나치 아래의 잔혹함에서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인정받았다. 즉 만화적 표현과 묘사에서 의인화로 통해 사실적이지 못한 등장인물로 통해 당시의 사실들을 표현하였기에 사실주의라는 것을 인정받은 점이다.

 

그런데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 요소, 즉 당시 시대적 배경도 어느 정도 관여는 하나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사건으로 변화하게 되더라도, 그 자체가 사건의 중심이 아니었다. 모든 중심은 마꼰도로 시작하여 마꼰도로 마무리하고, 마꼰도 안의 부엔디아 가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비극의 탄생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도 인간의 예술은 아폴론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더 찬양한다. 정지된 아폴론보다는 계속 죽음과 삶을 반복하여 광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말이다.

 

<백년의 고독>에선 사치와 향락적 요소에서 포도주가 자주 거론된다. 갑자기 부자가 된 부엔디아 남자는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향략을 즐기기 위해 포도주를 욕실에 부어넣고 목욕을 한다.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인 점을 본다면, 술은 인간을 아주 기쁘게 하나, 때로는 미치게 하여 인간의 모조리 빼앗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낸다. 디오니소스의 향기로운 포도주야 말로 인간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마법과 같은 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법의 약을 마시지 않고, 이미 마법이 시작된다. 번역자가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처럼 마술적인 주술효과가 이미 걸린 셈이기 때문이다.

 

초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자신을 모욕한 남자를 죽이고 마꼰도로 온 것은 소설의 설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죽은 남자는 분명 묘안에 묻혔는데도 부엔디아 앞에 유령처럼 등장하고, 때로는 대화도 하고, 나중에 서로 화해까지 한다.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습이 이 작품에서 하나의 설정으로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에서 이것이 사실주의 작품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런 사실주의적 요소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마꼰도라는 마을을 만들고 발전시키면서 거기가 쇠퇴하는 과정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꼰도는 콜롬비아 영토 내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 속 내지 오지의 마을이다. 그곳에 온 부엔디아 가문은 마꼰도를 발전시키고 자식을 낳고, 주민들이 올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마꼰도는 부엔디아 가문만의 왕국이고 세계이며, 그리고 무덤이기도 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던 신생마을에 죽음이란 없었고, 단지 마을은 크게 성장하고, 이윽고는 집시들이 그 마을을 오게 된다. 그러면서 호세 아르까디오의 성욕, 그리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모험은 점차 평화로운 세계를 혼돈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혼돈은 자신들의 내부에서 온 게 아니라 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형인 호세는 세계를 돌고, 동생인 대령은 전쟁터를 누빈다. 그들의 동기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마을을 모조리 흔들었던 사건이 된다. 그로부터 아르까디오의 죽음, 아르까디오의 쌍둥이 아들, 미녀 레메디오스 승천,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서로 애인으로 차지하거나, 열렬한 가톨릭 신앙자인 페르난다의 시집 등에서 부엔디아 가문은 번창과 쇠퇴의 길을 걷는다.

 

발전과 쇠퇴에서 과학적 기술이 등장하는데, 가령 아주 아름답고 천사 같은 레메디오스의 죽음에서 부엔디아 가족들은 그녀의 모습이 담긴 은사진을 가진 점, 아마란따가 사랑한 남자가 가지고 온 자동피아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본 기나긴 기차, 그의 딸이 결혼한 남자는 비행기를 몰았던 사람이다. 중간에도 과학의 산물이 등장하고, 문명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 유입, 그로 인해 바나나농장 노동자의 파업과 죽음이 비극처럼 등장한다. 단순히 부엔디아의 가문의 발전과 몰락은 마꼰도의 역사이면서 한편으로 콜롬비아 역사를 비극적으로 보여준 점이다.

 

오히려 그런 비극이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부엔디아 가문이 겪은 일 중에 하나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령의 전쟁이 참전한 이유는 자유파와 보수파의 가치관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모든 집이 하늘색으로 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은 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벌인 전쟁은 분명 내전의 기나긴 슬픈 역사이었을 것이고,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겪은 200량이 되는 기차는 내전에 이어 노동운동의 슬픈 비극일 것이다.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항의하자 군인들이 와서 무참히 사격한 점에서 마꼰도 마을은 이제 삶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죽음이 존재하는 곳으로 변한다.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에서 봄이 부엔디아가 처음 올 때라면 아우랠리아노 세군도는 죽음으로 변해진 가을이고, 마지막 정점은 고모와의 근친상간으로 가문이 파멸되는 아우렐리아노의 슬픔에서 볼 수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욕망, 외부에서 오는 이방인에 대한 배척(메메와 마우라시오 바빌로니아), 다른 여자에 대해 서로 집착하는 형제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과연 그렇게 만든 것인가?

 

그렇다면 콜롬비아의 역사에서 100년이란 시간에서 계속 이어지는 마꼰도 부엔디아 가문은 영원히 그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고뇌로 끝나야 하는가? 첫 단추가 틀리면 뒤에 단추도 어긋나고, 심지어 더 어긋날 수 있을 것이다. 어긋난 운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아우렐리아노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에 혼자 있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근친상간의 욕망에서 초대는 사촌이었으나, 끝은 고모와 아들이다. 하지만 고모는 어머니와 형제이기 때문에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할아버지의 자손, 즉 고모이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인 이모이다. 고모와 이모인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결국 자신의 아들과 같은 아우렐리아노와 몸을 섞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이유로 아름다운 여왕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2남2여를 슬하에 두나,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란 점을 알고, 두 눈을 찌르고 평생 방랑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2남2여 모두 비참한 죽음과 결말을 맞이한다. 근친상간이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으로 보여주는지, 또한 그런 근친상간되도록 만들어내는 배타성이 결국 인간은 계속 돌고 도는 시간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 두고 보면, 우리는 근친상간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도, 아니 근친 적으로 다수 촌수가 멀다면 인정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점에서 배타적인 요소는 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년의 고독> 못지않은 사회적 갈등과 배타적 관계로 멍이 든 것은 분명하다. 그 결말은 부엔디아의 가문 몰락처럼 우리 역시 그런 배타적인 집단주의에 말려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제목이 일단 <백년의 고독>이란 말처럼 인간의 수명은 현재 대략 80년 이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100년 이상을 살은 사람도 나온다. 100년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수명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이상을 살아가든지 아니라면 그 이하를 살아가든지 항상 외로운 법이다. 그 외로움은 연애적인 요소도 다분할 것이고, 아니라면 인간적 요소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대령의 인생에서 그는 혼자만의 고독을 찾아 방에 은거하였으며, 많은 가족들도 어둠에서 고독을 영원한 반려로 삼았다. 외로움이 싫은 것이 인간이나, 그 외로움만이 자기에게 남은 것임을 알아낸 자들의 말로가 오히려 우리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고독을 느낀다. 고독이야 말로 실존주의자 내지 혹은 루소가 자기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시작이나, 그 고독이 지속되면 결국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로서 통해 자신을 볼 때 알 수 있다. 사회적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적인 요소이므로 고독에게 선택된 인간들을 보자면, 그들은 영원히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는 벽으로 가려진 존재다. 하지만 고독이 사람을 선택하든, 사람이 고독을 선택하든 그 기점에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원하지 않은 운명이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운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상 그대로라면 항상 그대로 비극은 이어진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분명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것이 다시 비극으로 몰아넣고, 고독의 영원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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