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9일 김해 명예의 전당에서 개최된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우연히 국내 만화 및 애니메이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부천에 위치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만드는 것과 운영하는 것, 게다가 한국 근현대만화역사에서 원로이신 조관제 화백을 비롯하여, 한국 만화가 중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최규석 작가,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장형윤 감독까지 있었다. 세미나를 관람한 후, 우연히 세미나 발제자 및 행사를 주관한 분들과 같이 식사할 기회가 있었고, 식사 뒤 뒤풀이로 맥주를 마실 시간이 있었다.

 

그런 자리에 우연치 않게 내 왼쪽에는 최규석 작가가 오른쪽에는 장형윤 감독이 앉게 되었다. 이 두사람의 정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셀마의 단백질 커피>라는 작품이다. 최규석 작가는 같은 대학 출신 친구인 연상호 감독과 더불어 <내사랑 단백질>을 장형윤 감독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이란 작품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최규석 작가, 연상호 감독, 장형윤 감독 작품을 접해본 것은 바로 그 인디 애니메이션인 <셀마의 단백질 커피>이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과 스토리 전개에서 색다른 요소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유아 내지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작품만 나오기에 청소년 내지 성인들을 위한 작품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이 만화책이고, 최근에 라이트노벨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 시장을 열게 되었으며,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에서 그나마 한국에서 제작된 작품을 겨우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성인들이 감상하기 좋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 시장이 형성된 공간을 고려한다면 유아계층과 더불어 성인들도 같이 볼 수 있는 가족적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 여긴다.

 

그 중에서 이번에 내가 감상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전체 관람이 가능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고, 장형윤 감독 작품 중에 <아빠가 필요해>와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다시피 그렇게 강한 충격과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보단 잔잔한 요소로서 관객에게 다가온다. 처음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았을 때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인간여자와 늑대남자 사이에 비추어진 긴장감은 인상적이었다.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상영시간이 10분밖에 되지 않은 단편애니메이션이고, 캐릭터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동물처럼 생겼고, 그들은 동물이나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우화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에서 장형윤 감독 작품은 <아빠가 필요해>와 같이 작품 내의 이름이 동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점은 뒤에 <셀마의 단백질 커피> 중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주인공인 진영영은 원래 무림고수였으나, 죽은 후 환생하여 커피자판기로 되었고, 우연히 알게 된 혜미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피자판기인 진영영의 모습은 영락없이 동화 속에 등장할만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런다고 자판기라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미묘한 배치 속에 그의 작품은 뭔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게 있다.

 

인간과 비인간적인 등장인물로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보낸다. 그 정답은 아마 사랑일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아빠가 필요해>는 제목 그대로 아빠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고, 어느 여자가 나와 늑대에게 아이를 건네는 모습에서 가족의 재결합이란 독특한 모습이 나온다. 늑대와 같이 사는 사슴은 애인인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위험에 빠진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러면서도 늑대는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가족이란 관계에서 늑대와 사슴, 토끼와 거북이,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이고 서로 같은 조건에 있을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늑대는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다. 그는 자신의 일보단 결국 자기에게 맡겨진 영희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이 일을 하고 꿈을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가나, 결국 그 끝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그런 점에서 장형윤 감독이 제시하는 작품적 가치에서 잘 알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문학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로 작성된다. 물론 실존했던 일들을 기록한 작품도 있으나, 소설 안의 여전히 허구적 이야기다. 사실이 아니라서 허구인 게 아니라 소설로 작성되는 그 순간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말하듯 소설은 하나의 시가 될 수 있고, 시라는 것은 그 누구의 이야기로 될 수 있는 하나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삶 그 자체가 오히려 소설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기에 그 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대하여 과연 인간에게 자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것이다. 사랑에 대해 내가 잘 말하기란 어렵다. 사랑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하며, 그 사랑이란 개념을 단순히 정의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아빠가 필요해>는 가족의 구성이 이질적인 존재라도 같이 모이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이고, 가족이 없이는 자신이 어떤 출세나 성공을 하더라도 행복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가족 관계에서 모든 것이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빠가 필요해> 이후 등장한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조금 다른 사랑의 이야기다. 차가운 몸으로 태어난 무림고수는 그저 싸우기 위해 살아왔고, 전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혜미를 만나 자신의 생에 대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다른 점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혜미라는 소녀는 원래 인간이고, 검객인 진영영은 인간이었으나 커피자판기로 환생한 존재라는 점이였고,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주인공 경천이는 뮤지션 지망생이었으나 얼룩소로 변한 인물이고, 우리별 일호는 본래 인공위성이었으나 소녀로 변신한 존재다. 본래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자로 변한 경천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으로 변한 점에서 변신이란 소재가 서로 역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경천이가 얼룩소로 변한 이유는 인간인 그는 인간의 마음을 상실해서이고,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기계이면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경천이는 노래를 하는 가수지망생이었고, 예전에 나름 실력이 뛰어나 오디션에서 최종심사까지 간 실력자다. 그러나 그는 점차 음악에 대한 진심이 사라지고, 그가 좋아하던 여자인 은진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게다가 그녀는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서 상심에 빠지게 된다. 인간인데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이유, 그것은 경천이는 좋아하는 여자를 눈앞에서 그저 보낼 수밖에 없는 좌절감이었다.

 

그가 처음 느낀 그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불렀을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래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오직 그 노래를 쫓아 온 우리별 일호라는 인공위성만이 있었다. 인공위성이었던 우리별 일호는 이미 수명을 다하였고, 그저 우주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고철덩어리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면서 일호가 발견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고, 피아노 반주였다. 그 주인공은 경천이었고,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경천을 찾아 지구로 내려온다.

 

하지만 지구로 온 일호는 저주에 걸린 얼룩소를 만나고, 얼룩소는 소각자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져있고, 오사장이란 밀렵꾼은 얼룩소의 간을 노리며 공격해온다. 여기서부터 위기에 빠진 얼룩소 경천이를 일호는 만나게 되고, 단지 그의 노래만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천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사랑도 잃고, 가난한 뮤지션인 경천에겐 아무런 미래와 희망이 없었고, 그저 현실 앞에 무력하고, 이제는 얼룩소의 모습으로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소각자는 마음을 잃은 인간이 동물로 변하면, 그 동물을 찾아 자신의 소각로 안에 넣는 괴물이다.

 

괴물의 등장, 그리고 오사장의 밀렵행위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 이미지로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을 잃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현실에 놓인 상황이 전혀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은 것이고,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지 혹은 나를 위해 누가 미소를 지어주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그런 것이다. 삶의 의지가 나를 위해서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그 질문에서 경천이는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동물로 되어버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성으로서 자신 안의 세계만 아니라 자신 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만물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경천이의 경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 세계란 오직 자신안의 세계고, 남에 대한 마음을 없었다.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보통의 동물들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북쪽의 마녀가 경천에게 찾아와 만약 살고 싶다면 자신을 따라 인간의 손길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렇다면 소각자와 오사장으로부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될 경우 경천이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하다못해 인간의 기억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려 인간의 모습을 잃은 경천이는 자신이 인간인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인간, 우리별 일호와의 사랑이었다. 우리별 일호는 사랑이란 단어를 모르고 감정도 모르는 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남자가 사랑을 모르는 여자와 만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다. 게다가 우리별 일호는 수명이 이미 다 되었기 때문에 언제 멈추지 모른다. 일호의 목적은 오로지 경천이의 노래를 듣는 것, 음악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어가 서로 다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소통이 어렵다. 그렇지만 오로지 음악으로 통해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으며, 같이 어울릴 수 있다. 음악의 힘이란 바로 서로 통할 수 없는 존재라도 통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음악의 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넘어 기계인 우리별 일호까지 마음을 가지게 했다. 마음을 가지게 된 일호에게 서로 의지가 가능한 존재는 얼룩소였고, 얼룩소인 경천이는 이때까지 남들에게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진다. 자신만 생각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일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런 애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얼룩소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일호와 마주하면서 일호는 자신이 로봇인데도 괜찮은지? 아니라면 가슴과 등이 거의 붙어 여자다운 매력이 부족해도 괜찮은지 묻는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으나 현실에서 보자면, 일호는 자신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어도 좋은지? 그리고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도 좋은지 물어보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질적이고 부족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경천에게 물어본 것이다. 나란 존재, 너란 존재 있는 그대로, 그 모든 것에서 좋은 점과 더불어 불편하거나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과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조금 다른 식으로 전개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상대방에 가진 부족한 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족한 것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나, 인간 그 개인은 타인에 대해 척도가 될 수 없다. 단지 인간이 다른 동식물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에 척도가 되는 것이지 어느 인간 하나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누군가 서로 드러내어 그것을 서로 용인하여 상대방을 아낄 수 있는 게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경천이가 은진에게 바라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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