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14 - 완결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드디어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완결되었다. 내 인생에서 만화애니메이션 세계에 빠져든 이유를 무엇이 계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본 후 애니메이션에 빠졌고, 이후 계속 애니메이션을 감상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때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나에게 큰 동기나 지속성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미 전에도 혹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3가지로 구분된다.

 

1가지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가이낙스 재직시절 TVA 26편과 극장판 2판을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그가 가이낙스에서 퇴사하여 카라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에 제작한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마지막으로 가이낙스부터 카라까지 계속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제작한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각각의 에반게리온이란 이름으로 어느 점은 유사하고, 어느 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점에서 우리는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의 묘미를 각각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이카리 신지 육성계획>, <학원 타천록>과 같은 번외적인 작품이 있으나, 메인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3번째의 붐을 일으킨 이 작품은 이미 하위문화를 지나 대중문화에 큰 여파를 주었다. 우리가 모르지만 이 작품에 사용된 장면 내지 OST가 대중방송에서 종종 나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미사토의 테마송은 많은 CM송으로 나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매체가 단순히 하위문화로 볼 것만 아니라 하위문화 내에서 대중문화를 자극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작용된 셈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효과는 애니메이션은 단지 애니메이션일 뿐이다.”라는 고정관념과 틀을 깨고 하나의 예술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내용이 기존의 작품들과 큰 방향성을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와 똑같은 주제에 지겨움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며 문화소비를 해왔다. 문화소비의 문제점은 바로 유행에 대한 부분인데, 유행이란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기존의 자신과 맞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작품적 특성은 인간의 이중적 잣대로서 판단할 수 없는 주제로 다가왔다.

 

기성세대에 대한 복종과 긍정보다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했고, 언제나 아이들은 순종적이거나 활발한 요소를 강조하기보단, 오히려 불안함으로 매일 괴로워했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삶의 활력을 잊어버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신지의 경우, 그는 이제 중학생에서 어른도 아닌 그런다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청소년이었다. 불안한 성장과정과 생활환경,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지는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회 청소년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신지의 어머니는 실험으로 인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현실에 남아있었다. 가족의 죽음이란 상당히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잔혹한 사건이다. 이카리 사령관이 왜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하고 사람의 마음이 사라졌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지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자신과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는 자신의 입장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만화책을 보면 오히려 아버지인 이카리 사령관 역시 불쌍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카리 유이가 대학교 시절, 그녀는 매우 우수하고 아름다운 대학생(대학원생)이었다. 거기서 만난 이카리 사령관은 조용하고 조용한 학생에 불과했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 그에게 가자,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에게 바꾸어 먹자고 권한다. 별로 말이 없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였으나, 유이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에서 말이다. 유이는 후유츠키 부사령관이 자신의 교수이던 시절, 교수에게 이카리 사령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는 아주 귀여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왜 귀여운 것일까? 외모로 보면 이카리 사령관은 표정이 어둡고 깔끔하지 못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이에게 자신이 받은 음식을 교환하는 것과 교환 후 괜히 부담스러울까봐 피하려는 모습에서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이 상당히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란 점을 알았다. 겉으로 활발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여주기보단 실제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그가 좋은 사람인 점을 알았다. 자신의 벽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유이에 손길에 있는 힘과 용기를 다해 유이와 가까워지는 이카리 사령관을 두고 귀엽다고 할 것이다. 아마 일본적인 표현으로 가와이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가와이이란 귀엽다란 말이 되나, 단순히 영어의 cute 내지 pretty 같은 의미가 아니라 왠지 보호해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곁에서 같이 지켜주고 싶은 그런 대상을 가와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남에게 제대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후유츠키 교수가 그를 처음 만날 때 매우 불쾌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그의 인상은 호감을 얻을 수 없었다. 단지 이카리 사령관은 유이로 통해서만 모든 인생의 구원과 의미를 부여받았다. 아들인 신지에게 그토록 질투하는 이유는 유이에게 남겨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듯 남편과 아내는 분리된 존재이지만, 아들과 어머니는 원래 하나의 동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초호기 조종사로 가능한 것은 오직 신지이었다. 초호기 실험가동 중에 죽은 유이의 몸과 마음이 초호기에서 잠들고 있었다.

 

신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육체와 정신이 모두 에바 초호기에 흡수되어도 강력한 힘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신지를 차갑게 구는 이카리 사령관은 오직 인류구원계획으로 유이를 만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이용하던 이카리 사령관은 마지막 순간에 유이를 만나 깨닫게 된다. 유이의 몸에서 태어난 신지의 작은 손을 만질 때, 생명의 경이함과 사랑스러움을 말이다. 유이는 이카리 사령관에게 신지는 우리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카리 사령관은 이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자신이 가장 질투하던 신지를 사랑했다는 사실과 이때까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신지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신지를 나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자신들이 있어야 할 그 곳으로 가고, 유이는 신지를 영원히 지켜 봐줄 것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이나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은 인류보완계획에서 수많은 레이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은 LCL 용액으로 변하게 만든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End of Eva>에서 아스카는 양산형 에바의 공격에 의해 죽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그녀가 가장 바라는 카지의 품에 안겨 LCL 용액으로 변한다. 신지가 미사토의 의지를 이어받아 최후에 괴롭고 힘들고 아무도 잡아주지 않을 냉정한 현실에 남아있길 바랄 때 그 옆에는 오직 아스카만이 누워있었다.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며 죽이려고 할 때, 아스카는 신지의 얼굴을 쓰다며 주면서 기분 나빠란 말과 함께 끝이 난다. 결론이 아주 불안정하고, 마무리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채 끝난 가이낙스 시절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두고 생각해보면 만화책은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진다. 신지가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자신 안의 꿈을 꾸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레이는 전학생, 아스카는 소꿉친구, 아버지는 과묵하나 하지만 어머니를 무척하는 애처가, 어머니 유이는 활달한 정치인으로 나온다.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신지에게 자신의 꿈은 많은 사람들과 웃는 얼굴로 하루 일상을 보낼 수 있는 평범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에서는 신지는 그런 꿈을 꿀 수 없다. 모두가 LCL 용액을 변한 후 신지의 선택이 결국 다른 세계로 이어져 마무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신지에게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의 기억과 신지의 기억은 전혀 다르고, 신지가 가진 시간적 축척과 타인이 가진 시간의 축척은 다르다. 원래의 세계에서 신지는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고독을 느꼈을 것이나, 이제는 아무도 그 치열한 세계를 모르고 자신만이 알기에 고독할 것이다.

 

미사토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신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스토리에 대해 상세히 논하기보단 작품이 의미하는 요소를 서술했으나, 만화책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전혀 다른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인류보완계획 실시 이후 TVA25~26화에서 자신의 껍질 안에서 벗어난 신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으나, <End of Eva>에선 모든 것이 파괴에 이르렀다. 그런데 만화책은 모든 것이 파괴한 것도 지금의 상황에서 새롭게 신지가 새롭게 (자신의 자아로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세상이 리셋이 되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가는 신지가 있을 뿐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품적 배경에서 4계절이 없고, 단지 여름만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겨울이 시작되어 봄이 오기 전에 신지는 중학생이란 신분을 벗어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살아가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아이도 아니요, 아이도 어른의 중간적인 경계점에서 어른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자신에 대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힘든 여정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디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 알 수 있을 사람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신지를 모르고, 신지는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게 단절되어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 자신의 과거의 어둠을 모두 벗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리셋도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인류보완계획이란 수단은 인간에게 태어나는 것은 결국 고통과 괴로움의 시작이므로, 삶의 시작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작한 프로젝트다. 제레의 의지는 바로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난 이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선택이고 목적이다. 그 어느 인간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라고 할 권리는 없으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늘 불행한 삶과 마주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다른 세계에 있더라도 조건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의 세계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본래부터 불리하고 부조리하기에 새로운 조건 제로베이스적인 요건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여 스스로 노력하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하여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현실의 냉혹함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다고 그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게 아니라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세상은 자신의 의지로서 만나고 접촉하고 마주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고 하여도 우리 사회는 그 개인 당사자의 의지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위치란 내가 옆에서 이야기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에 불과하다. 그런 상대방에 대해 마음을 나누고, 위안이 되어주며, 서로가 이해해줄 때 우리는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그 모든 인간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다. 인간 내면에 가려진 무의식이란 세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부여된 성품 내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주어진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 신지처럼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을 고려하면 당연히 그의 무의식공간에 내재된 불안과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누적된 그 시간만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과 방법 역시 길고도 어려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보완계획이란 거대한 사건은 신지의 인생을 전환하게 해준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그럴 시간 혹은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흔히 에바 시리즈가 루프물이란 이야기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해보았다.

 

루프란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하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가역적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면서 에반게리온은 루프물이기보단 어느 한 동일한 조건에서 여러 가지 분기점을 나누어지는 병렬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 부록 편에서 등장하는 마리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와 똑같은 이름과 외모로 등장한다. 그녀는 아마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에서 등장한 신캐릭터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약 인류보완계획이 만화책에서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고, 신극장판에 등장한 마리가 존재하려면 역시 루프의 결과보단 병렬적인 세계관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 25~26화에서 이미 신지는 자신이 살아가야할 세상에 대해 인지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 시점에 <End of Eva>의 파국과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보여준 Second impact 이후에 등장한 Third impact<End of Eva>에서 보여준 파국과 맞먹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신지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루프되어 갈 필요는 없다. 이미 1<End of Eva>에서 맞이한 파국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Q>에서 되풀이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 14권이 시기적으로 <End of Eva>를 기본으로 이야기로 제작되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제작년도로 하나씩 정리한다면 루프물이란 것은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리의 등장에서 그녀가 안경을 착용한 점이 유이를 동경한 한 여학생이라면, 병렬적인 흐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만화책에서 마리의 등장 없이 인류보완계획이 끝난 시점에서 루프의 원인이 되어야 할 사건이나 배경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양대학교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두고 TVA 25~26화와 <End of Eva>를 두고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로 분리된 것으로 본다. 실재하지 않은 것의 복제 내지 또는 실재했던 것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로 구성된 시뮬라크르(simulacre)이고, 그것이 동사형으로 되면서 시뮬라시옹(simulation)로 되었을 뿐이다. 물론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시리즈 역시 시뮬라크르로서 다가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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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게 아직까지 연재돼고 있었다니!!!! 마지막권이네요...이거 티비판 애니 마지막편 보고 멘붕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게 엊그제 같은데...
엔날 생각납니다. 글 잘봤어요~

근데, 베르세르크 완결은 언제나 날런지...1년에 한권 나오다가 이제는 소식도 감감...헐~

만화애니비평 2014-12-11 17:35   좋아요 0 | URL
오덕력이란 언제나 촉을 세우고 대기를 타야 하는 거지요..
아 아스카짜응이...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