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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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게마츠 기요시의 <십자가>란 작품은 모두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생각들을 만들게 하던 작품이었다. 책을 읽으면 난이가 높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제의 관건은 우리는 항상 주변에 있는 문제들이 익숙해지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된다. 즉, 사람의 감수성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능력이 저하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의 문제와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기 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지나치려는 기만성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남의 일은 엄청난 사고라도 그냥 별반 의미 없이 지나가겠지만, 그 남의 남인 내가 그 상황에 닥칠 경우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이번에 읽어봤던 <십자가>란 소설 역시 그렇다. 무너진 교권이 최근 뉴스로 접하게 되었다. 학교 교사들이 예전에는 정규직이 되다가 비정규직 내지 임시직으로 되면서 반영구적으로 근무하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들은 언제라도 학부모의 클레임에 의해 자리에서 나가야 할 사태가 올 수 있다. 언제나 사회적으로 뭔가를 희생시키는 대상이 이제는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된 것이다.

 

그런 학교 교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왜 교권이 무너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도구화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처음 시작은 후지슌이라는 중학생이 자살하면서부터다. 유서에는 4명의 이름, 2명은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청소년, 1명은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고, 또 다른 1명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다. 자신을 괴롭힌 2명은 원래 불만이 있었다고 하나, 친한 친구와 좋아하던 여학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도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들은 자살한 중학생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죽은 학생의 부모, 그리고 후지슌의 남동생은 달랐다. 왜 도와주지 못했나? 왜 알아주지 못했나?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위로했었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리가 없지 않았는가? 라고 말이다. 솔직히 어떤 문제를 두고 그런 엄청난 일들을 중학생에게 책임여부 자체를 묻는 게 잘못된 일이고, 그런다고 그들을 방치하거나 억지로 잡아두는 것도 문제다. 결국 어느 중학생의 자살은 그 학교와 사회, 더 나아가 일본이란 나라조차 넘어선다.

 

학교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후지슌을 괴롭히던 2인방 중에 하나가 오토바이를 타던 중에 사고로 죽었다. 살아남은 학생의 부모는 죽은 아들의 어머니에게 심한 불평과 원망을 듣는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자신의 아이가 저지른 죄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아이는 문제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이중성이 사회적으로 하나의 의식이 되고, 그 의식이 공동체들의 하나의 가치가 되는 순간, 그 세상은 점점 망해가는 징조인 것이다. 후지슌의 편지에 적힌 친구와 소녀에게 끊임없이 따라는 신문기자, 그는 계속 그 사건들을 잊지 않고 상기시키려 한다.

 

중학생들이 무슨 깊은 생각이 있겠는가? 그때는 오로지 무섭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오면 현실에서 눈을 돌릴 뿐이다. 그러나 더 심한 문제가 있었다. 눈을 돌려도 그 문제는 자신이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의 앞에 언제나 마주하고 있고, 길을 떠나 도망쳐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지나간 역사는 흘러간 시간이지만, 인간에게 지나간 역사와 시간은 결국 자신이란 존재를 형성하게 해준 하나의 토대다. 그 토대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부정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소설 제목처럼 <십자가>란 자신의 등에 평생 업고 다녀야 하는 숙명의 속죄의식이다. 칼은 상처를 내고 끝나고, 찔리면 아프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피해의식이 되어 상대방에 대해 원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나, 십자가란 그런 선택지는 없다. 단지 자신의 마음에 담고 살아갈지 아니면 눈을 돌리는 것이다. 눈을 돌려도 왜 다시 그것은 자신을 돌아오는 것일까? 후지슌은 매우 어린 나이에 죽었다.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옛 친구로 둔 유군의 경우 어릴 때는 몰랐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우리 형의 말이 생각난다. 만약 결혼에 대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이 단순히 연애의 의미로 둔다면 그 순간 결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결혼에서 가치관이 없어지는 경우 그 가치관을 유일하게 맺어주는 것은 자신의 자녀다. 결혼하면 처음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다가, 어느 순간 눈을 돌리게 된다. 인간은 간사하게도 지루함과 한가한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집안의 모든 관심사는 아이에게 간다. 아이가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자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말이다.

 

유군의 아이가 어린이집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좋고 누군가는 싫다고 한다. 유군은 왜냐고 묻자, 유군의 아이는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그때 유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때까지 마음속에서 억지로 잡아둔 눈물이 이제야 터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왜 친구가 좋은지 물어보면 그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이나 이익의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친구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후지슌의 죽음에서 그가 남긴 이름에서 유군은 상처를 받고, 원망을 했지만, 그런 자신에 대한 후회와 원망이 따라오는 것이다.

 

자신의 친구조차 자신이 나온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아이도 과거의 자신처럼 혹은 후지슌처럼 살아가는 날이 올 것이다. 소설은 죽은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유군의 눈을 통해 가족들을 바라본다. 관계는 있지만, 마치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은 삶처럼 말이다. 유군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비겁할까? 아니면 너무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나,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얼굴과 생각을 한 인간이다.

 

너무 특별하거나 잘난 것도 아니라, 그저 그런 인간 중에 하나이다. 현실에 무력한 인간이었고, 그저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다. 학교도 자신이 사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왜 도쿄로 가는 것인가?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무게는 벗어날수록 그 공백 기간을 채웠다. 신문기자가 그렇게 자신들을 향하여 비난을 했지만, 사실 그 비난조차도 하나의 위로였다. 그런 비난조차 듣지 못하고 성장하면 더 심한 죄의식이 자신을 눌러버린다는 점이다. 뭐든지 처음에 맞는 매가 편하다고 한다. 처음에 맞는 매는 때리는 사람의 완력이 있기에 맞는 사람에게 불편하나, 저 뒤에서 자신의 차례가 늦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눈치를 보는 것보다 훨씬 속이 편할 것이다.

 

단지 속죄해야 하는 깊이가 너무 깊으면 생각을 할 수 없다. 죽음이란 단어는 너무 무겁고, 입에 내놓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한다. 만약 십자가란 죄의식이 없고, 그 고통의 무게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움직이는 인형이다. 자신의 양심과 의지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살아가는 존재에게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편한 게 좋다. 그러나 최근에 생각나는 게 있다. 유럽의 고전주의 시대 "Memento mori"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에게 “죽음을 기억해라!”란 의미를 담은 말이다.

 

고전주의 시대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Memento mori를 구시대적인 종교관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점에서 인간의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 불청객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 그 자체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점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하고, 절대적 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그것보단 차라리 기만하지 말자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보단, 삶이 마지막이 도래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마지막 모습을 우리가 경험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면서 깊은 후회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후회조차 하지 않을 단순한 인간들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에 후회하는 인간과 후회하는 것조차 모르는 인간, 어느 누가 행복할까? 제일 행복한 것은 마지막에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맹세할 수 있는 인간이다. 죽음에 대해 인간들은 죽음 그 자체보단 죽어가는 그 순간, 죽음 이후의 세계가 두렵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항상 일치한다는 실존적인 관념만큼 우리 삶이 자기 자신에게 기만적인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을 느끼는 우리는 어떻게든 십자가를 안고 가야 한다. 십자가를 안고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 인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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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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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저번주에 산업재해로 죽었다. 안전보호구의 미재, 안전관리자의 부재, 이 모든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내 친구를 빼앗겼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생각났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정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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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0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괜찮을 지란 생각도 들구요. 저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해 친구들도 공사현장에서 죽은 친구도 있습니다. 노무사 공부를 하면서 판례나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지만 `낙수효과`라는 이름 아래 모든 노동자들은 희생을 강요당하더군요.

요즘 발생한 구의역 사건이나 이런 면들이 모두 젊은이의 죽음을 담보로한 자본들의 생명 연장이라는 점에서 무지하게 화가 납니다.

전 노무사가 되어 미약하게라도 자본가들 면상을 찡그리게 만들고 싶은 각오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6-09 08:38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 구의역 사건을 보면서 또한 지하철공사 붕괴사건을 보면서도 생각하면 참 답이 없는 나라입니다. 노동자의 삶이 비참한 사회만큼 지독한 병폐가 있다는 것이죠.

어이 없이 죽은 것도 열받지만, 마치 당사자가 아무런 조치나 예방사항은 보지 않았다고 몰아가는 식이 더 열받더군요. 그렇게 일하게 만들어 놓고 돈을 아끼려다, 보상금조차 깍자고 하는 저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친구분의 죽음 참 아프시겠습니다....

트리클다운, 사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에서 트리클다운의 만능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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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 로드>를 읽는 순간, 전에도 지금도 <에반게리온>에 빠져있는 내 모습을 생각했다. 물론 소설에서 박종현이란 인물은 현실에 존재하던 에바 로드 완수자 2명을 합친 가상의 존재이나, 기본적으로 그 현실의 2사람을 토대로 만든 인물이다. 에바로서 가는 세계와 그리고 나의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지 않고서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한 파일럿 이카리 신지군을 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금 보게 된다.

 

언제나 로봇이 나오는 전쟁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항상 강한 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적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우리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강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벽이란 보이지 않은 투명한 유리 앞에 부딪힌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건물의 유리창이 막힌 곳도 모른 채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선택은 정해져 있다. 그런 벽에 부딪혀서 몸이 박살나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벽을 피해 영원히 그 사선을 넘지 못할 것인가.

 

우리에게 벽을 둘러갈 수 없는 현실이다. 사실 벽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유리 너머의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처음부터 유리의 장갑수준도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라도 어느 정도 각오를 다지고, 준비성을 갖춘 채 한 발씩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판단조차 잴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길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바로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의 또 다른 이야기다. 최근 한국 소설계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작가 장강명 씨의 소설에서 그런 현실을 다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전에 읽은 <한국이 싫어서>는 평균 정도의 학교를 나온 20대 중반여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모습이 없는 자신에게 지쳐, 결국 호주로 유학가고 거기서 정착하는 일대기를 보여준다. 호주라고 하여도 별 수 없는 낯선 곳이오,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단지 그 정도가 한국보다 덜한 것밖에 없었다. 적어도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이 유학 간 남학생은 요리 실력이 좋아도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호주에서는 나름 인정받는 요리사로 된다.

 

자신에게 꿈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꿈이란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란 책은 자신의 성공이 가로막힌 한국을 떠난다면,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자신의 성공을 출세로 여기지 않고,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취미생활이나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할 게 없다. 가령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내가 어느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대부분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요.”, “저는 음악을 좋아해요.”, 혹은 “TV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해요.”,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해요.” 등등 식상한 말만 나온다.

 

영화라도 장르가 매우 세분화되어 나누어지고, 영화감독에 따라 관람해보는 감독주의 혹은 작가주의적인 요소도 찾을 수 있다. 음악이라면 재즈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저 댄스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뮤지션에서 누구를 좋아하고, 어떤 부분에서 와 닿는지가 없다. 즉 타인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이 없다는 것은 자신만의 개성과 표현성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느낌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옳은 것인가? 가족 안의 행복, 사회생활에서의 안정 등이란 너무 속보이는 답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의 삶에 아무런 목표의식이 없는가? 주변에서 들으면 집이 어느 동네 35평 내외, 차는 2000CC 이상, 돈은 얼마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만 들린다. 물론 부의 재력이 있으면 좋다. 자본주의시장경제구조에서 돈의 이동이 없다면 무역이나 교역, 심지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조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고착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본으로 매기고, 자신의 존재는 돈에 의해서만 말할 밖에 없는 인간이 된다.

 

자신이 그렇게 되는 순간, 그는 평생 외적인 삶이 아니라 내적인 인생에서도 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열심히 뛰고 뛰어 마지막에 그의 삶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바로 그런 시대에 젊은 청춘이 과연 자신의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단지 그 여정은 <한국이 싫어서>와 다르게 진행된다. 벽이 높고 높지만, 그 벽이라도 여러 가지 벽이 있다. 자신이 둘러싼 벽 사이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이란 말도 안 되는 벽을 선택할 것이다. 단지 벽을 넘어갈 수 있는 기회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책제목만 보듯이 에바, 즉 EVA라는 <신세가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때까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다, 어느 순간 일본애니메이션을 접하고, 그때 에반게리온을 만났다. 에바에서 보는 주인공은 처음에 못났고 겁쟁이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만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 주인공 파일럿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가 늘 외면해오던 익숙한 자신이었다. 너무 익숙하기에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점도 많았다. 늘 도망치고 싶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은 가혹했다. 거기에 맞선다고 뭔가 새로운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늘 우리는 강요받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 인생을 강요하던 어른들 역시 과거에 그런 부조리에 굴복했다. 인간의 부조리한 모습에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면 결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박종현처럼 전혀 있지 않을 벽을 찾아서 그 벽을 넘어 가는 것이다. 박종현은 어릴 때부터 불우한 삶을 산다. 가난한 집안, 무능한 아버지, 가출하는 어머니, 형과의 불화, 학교생활의 마찰, 어느 곳이든 그가 벗어날 구멍이란 없다. 사람에게 가끔 미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이 사는 세계는 언제나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박종현은 버림받은 인생처럼 살다, 시장에서 일하고, 학교에 다녀보고, 컴퓨터를 배워 늘 야근과 잔업에 시달렸다. 그리고 섬광처럼 드러난 에바 로드, 일본과 미국, 중국과 프랑스를 경유하여 마지막에 일본에서 가이낙스(카라)의 선물을 받는 것, 어찌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박종현이나 혹은 실제 현실 속의 2명의 남자들이 보여준 결실은 일반인에게 본다면 정말 무단한 일일 것이다. 왜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지, 그 먼 곳까지 시간과 돈은 얼마나 걸리는가? 게다가 말은 어째 할지 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 나 같이 제대로 일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간단한 회화정도는 구사할 수 있다. 한자도 조금 읽으면 혼자 간신히 목적지까지 찾을 수 있다. 불어와 중국어의 경우 조금 다르다. 중국어는 우리가 아는 한자와 다르다. 한국, 일본, 중국 모두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맞으나 한자의 표기와 사용방식이 조금씩은 다른 것이다. 낯선 땅에 아무런 지식이나 도움 없이 꿈을 향하여 달려간 젊은 친구들의 무모함에 분명 모두가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녕 비웃는 자들은 이때까지 자신이 어떤 허황된 꿈일지라도 거기에 목숨까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스스로 떳떳하게 설 수 있을 때까지 그 길을 찾아갔는가?

 

아마 대부분 없을 것이다. 그 열정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한 길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과의 외로움 싸움이다. 그 외로움 싸움에서 얻은 것은 물질적으로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돈은 많이 들어갔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황금보다 더한 보물을 얻었다. 우리에게 황금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은 있는가? 88만원 세대가 나오고, 경제적으로 소외된 청춘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그 공간에서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

 

성공의 꿈이란 이룰 수도 없이 너무 머나먼 곳에서 나를 비웃고, 그 꿈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걸어가야 하는가? 성공의 꿈은 현실세계에 있어도 비현실적 영역이고, 에바 로드는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해 현실의 인간이 그 꿈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진정한 진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에서만 오로지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에바를 향한 그 머나먼 로드가 끝이 났다면 또 다른 여정이 박종현을 아니 현실의 2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허무하고도 엉뚱한 에바 로드를 완주한 그들에게 현실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은 언제나 스스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과연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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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종속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4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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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시설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건물 다른 사무실의 사병 하나가 간질 발작으로 새벽에 죽은 일이었다. 원래 지병이 있었지만, 자대에서 안타깝게도 젊은 삶을 마감한 것이다. 부대에 사망한 사병의 어머니가 오시고, 듣기론 화장까지 해서 장례를 마쳤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상한 숙제가 있었다. 그 사병이 죽고 난 후 그의 앞으로 택배가 왔다. 사병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에게 물건을 보냈던 것이다. 수취인은 분명 이름이 적혀 있지만, 그 수취인은 영원히 그 택배를 받을 수 없었다. 주임원사가 나를 부르더니, 나보고 그 택배를 다시 집으로 보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수취인의 이름 대신 발송인의 이름은 나로 하여 그의 집으로 다시 택배를 보낸 기억이 난다. 진중권의 <레퀴엄>이란 책을 보면, 군대에서 자살한 사병이 차가운 군병원 영안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사병의 어머니가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몸을 보자 오열을 하기 시작한다. 진중권 교수가 사병 시절과 그는 옆에 있던 사병들과 같이 욕을 했다고 한다. 왜 자살 하냐고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 간 문제를 거론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여자는 임신, 남자는 군대다. 남녀사이에 갈등에서 내가 가장 불만을 느끼는 것은 남녀갈등의 사회적인 영역에서 갈등을 겪는 부류는 미혼 중심으로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10년 전인가? 어느 유명 명문여대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군대에서 복무 중인 남성들은 여성들을 언제라도 성폭행할 수 있는 잠재적 예비범죄인이라 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 여대에 다니는 분들이니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군대에서 남자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면 누가 가장 힘들어하는가? 그의 학교친구나 군대 안의 동료들일까? 아니다. 그의 가족들이다. 특히 그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가장 괴로워하신다. 한국에서 남녀문제는 기혼여성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기혼여성과 미혼여성에서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인간이다. 기혼여성의 문제가 사회적 등장하면 남녀문제보단 오히려 가정문제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에 남녀문제 해결을 보는데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가정에 속한 기혼여성, 그리고 그녀와 같이 사는 기혼남성에 대한 사회적 함의를 배제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화성에 사는 남자 금성에 사는 여자라는 방식으로 남녀문제를 보는 한국사회의 감정적 방식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갈등만 증폭시킨다. 작년 가을, 서울과 부산에서 어느 한 여성과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분에게 내가 가진 책으로 매릴린 옐롬(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인문학자로 저명한 페미니즘 학자다)의 <유방의 역사>와 그 뒤에 <아내의 역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한국 사회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사회적 입장에서 그분은 나에게 한국의 여성은 참 불리하고 불쌍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불리한 남성이 불쌍하고, 불리한 여성이 불쌍하다고 말이다. 즉 불리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 불쌍한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하지만 물론 여성이 불리한 것은 많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대상은 미혼의 여성이 아니라 기혼의 여성이다. 예전에 <4천원 인생>이란 비정규직과 식당식모 아줌마들의 생활을 보여준 책이 있었다. 한국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1시간당 몇 천원도 안 되는 일당으로 10~12시간 정도 일하는 수백만 기혼여성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남녀문제에서 미혼여성의 입장에서 남녀문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선 상당히 답답하게 여긴다. 남녀가 사회생활하기에 필요한 것은 가정과 학교의 교육과 지원이다. 만약 가정에서 어머니보고 자식이 남자가 좋냐 여자가 좋냐? 라고 묻는다면 무엇이겠는가? 이미 어머니에게 모든 자신의 아이들은 소중한 존재다.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에서 대립되는 미혼남녀의 입장은 첨예하게 다르다. 서로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찾기 위해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 라이벌은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속한 가정의 조건에서 달라진다. 가정이 부유하고 여유가 있다면 학업을 유지할 수 있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생계수단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물론 그런 와중에 우등생은 존재하나, 그것은 확률적으로 아주 낮고, 그것이 될 가능지수는 아주 낮다. 로또복권을 샀으니깐 1등에 당첨될 기회가 있다고 해서 된다는 보장은 없다. 막연한 가능성에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만큼 오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인 성공에서 남녀는 서로간이 적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속해져 있는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어째 보면 이런 말은 당연할지도 혹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하나, 이번에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에서는 이런 내 생각에 상당히 닿아있는 맥락이었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은 한창 영국의 공업화시대였고,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세계의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군사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이때 19세기 때 영국의 통치자는 빅토리아 여왕이었고, 영국에서 가장 통치를 오래한 왕이었다. 그 앞에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이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로 옹립된 시기다.

 

위에서 나온 나의 의견, 그리고 밀이 살던 시절, 빅토리아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등장에서 연계성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에서 여성도 역시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추면 남성 이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밀이 살던 시절에 아직까지 노예제도 흔적이 있었으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다. 20세기에 도래해서 서구사회에도 여성에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게 강요된 인생만 있었고, 그런 시대에 밀은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보여준 게 <여성의 종속>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에게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것은 부당하고, 단지 그에게 공평하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기능이 있기 때문에 남녀 간의 생리적인 구별은 필요하다. 가령 여성들이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데, 남자도 인간이니 남자보고 착용하라는 논리도 이상하고, 남자들이 전쟁에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니, 여자들도 인간이니 무거운 갑옷을 입고 싸우라는 논리도 이상하다. 인간의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은 분명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밀의 지적한 것처럼 영국의 빅토리아나 엘리자베스나 훌륭히 통치할 수 있는 것은 그녀들이 여자이든 혹은 남자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녀가 태어난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글자를 배울 수 있던 중세 내지 근대 초기 시대의 여성은 거의 드물었고, 일반 평민 남성들도 드물었다. 단지 여성에게 열린 길이 더 적었다.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여왕이라 가능했지 평민여성뿐만 아니라 평민남성도 역시 어렵다.

 

밀의 자유주의적 관점은 <자유론>에서 드러난다. <자유론>에서 자유란 자신의 이성으로서 선택하는 것이고, 이성의 의지로서 타인과 조우하는 것이다. 자신만이 모든 권리를 누리는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도 누리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자 벤담과 친분이 깊었다. 밀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에 큰 공헌을 한다. 밀의 자유주의는 만일 타인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을 도와주고, 누가 잘못했다면 그 자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변에서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밀의 자유주의는 철저히 이성과 논리로서 대했기 때문에 만일 이성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었다. 단지 이성적 능력이 없는 자가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성적 영역에서 윤리적 가치관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 가치관에 여자 역시 동참이 가능한 점에서 <여성의 종속> 번역자는 밀의 대표작인 <자유론>보단 오히려 <여성의 종속>을 우위에 두는 것 같았다. 사실 밀은 자신의 아내 헤리엇 테일러를 만난 후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천재적인 지식인이던 밀에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헤리엇의 만남은 운명 같을 것이다. 밀은 영국사회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자유주의 가치관을 보여주었으나 현실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대학의 문을 가는 것은 극히 일부 부잣집 영애만 가능했고, 일반 남성조차 가난에 의해 대학은커녕 중고등학교 문도 못 가신 분도 많았다. 지금에 와서 여성보고 대학에 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정신병원에 먼저 가라고 할 것이다. 밀도 역시 그런 시대를 겪었다. 밀이 죽고 난 뒤 몇 십 년이 지난 후 영국에도 여성에게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참여에서 문화인류학 영역에서는 전쟁이 원인이라 한다. 국가기관에서 경찰, 소방, 의무 같은 시스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에서 남성이 주도했지만, 전쟁이 일어난 남성들이 참전하여 그 체계들이 무너지거나 손실되었다. 과거 구식무기를 사용하던 시대는 농민들이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어느 순간 징집되어 칼과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하지만 산업사회 도래 후 농민들은 대거 축소되어 도시로 가게 되었고, 공업화와 서비스 직업에 몰리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남성이 있다면 그 옆에 같이 살던 가족에서 여성도 있다. 그 남성의 빈자리를 여성이 대체하는 방식이 20세기에서 여성의 권리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는 유지되었고, 여성의 능력은 결코 남성에 못지않고, 어떤 분야에서는 더 탁월한 성과를 보인다. 여태까지 보일 수 없던 이유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던 점, 그런 기회가 없으므로 어떻게든 활동할 수 없었다. 기껏 해보았자 옆에 있던 남성이 그럴 기회가 주었다면 가능했다. 남성의 힘으로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면 그 수준의 정도는 한계점이 다다른다.

 

물론 기회가 있다면 능력을 충분히 보일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남자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귀부인과 애인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수많은 귀부인이 젊은 남성을 이끌고 있는 것이 파리의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귀부인 귀족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란 점이다. 18~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책 1권이면 어느 평범한 식구가 2주 동안 생계비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는 것에 엄청난 재원이 필요한 점에서 결국 밀의 서적을 다시 생각해도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남녀가 태어난 사회적 조건이란 점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때까지 지구역사상 가장 용맹한 남자는 스파르타의 전사라고 한다. 그들은 그 누구의 명령을 듣지 않는 불굴의 전사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부인에게만 복종한다고 했다고 한다. 세상을 지배한 것은 남성인지 아니면 그들이 진정 복종시키는 부인인지는 보는 관점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밀도 남성이 가지는 미개한 이성적 수준이 인류의 진보와 문화를 파괴하고 퇴보시킨다는 점이다. 그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심한 착취행위다. 제도적으로 재산은 여성에게 주지 못하고, 여성이 가진 모든 것은 남성이 갈취한다. 어느 순간 아내를 버린 남자가 어느 날 다시 와서 그 여자가 혼자 힘으로 얻은 성과품을 갈취하던 게 과거의 산물이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밀은 자유주의자이나 페미니즘은 밀과 동시에 살던 마르크스에 의해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후에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과격하고 급변적인 사이보그 페미니즘도 등장한다. 밀의 시대적 환경과 후대의 상황의 변화는 다양한 의견과 사상으로 발전했으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단지 그렇게 태어난 이유로 노예 같은 삶을 강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자에겐 그 삶에서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다. 본래 페미니즘은 소외된 계층에 대한 해방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만 인간이고, 이방인과 외국인, 노예와 아이들에겐 인간적인 권리가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논쟁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논하는 게 아니라 이익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조건은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의 도서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 사회가 경제적인 빈곤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해야지 남녀문제가 해결되는데, 그 문제의 본질을 내버려두고 서로간의 입장만 내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가끔 이상한 나라에 왔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페이스 북에서 나를 아껴주시는 영화학 여교수님이 올린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글은 여자가 남자들에게 알려둘 점으로, 여자를 그냥 단순히 즐기기 위해 대상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감성과 이성을 존중하고 서로 뜻을 나누고, 그렇게 하기 위해 남자들에게 좀 더 자신을 향하여 성찰을 하고, 상대 여자를 위해 남자가 되라고 하는 내용이다. 딱히 덧글을 남기지 않았으나, 내가 하고픈 말은 그것이 만일 거대사회의 남녀라면 그럴 수 있으나, 남녀관계가 그런 거대한 사회에서 거대한 틀로 만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생활에서 만난다. 남자 역시 자신을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나, 처음부터 그런 남자를 선택했던 것은 여자란 점이다.

 

만일 상대 남자의 인격이나 가치관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인줄 모르고 계속 만난 것이라면 그 여자가 남자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대한 점이고, 설사 알았다면 그것은 엄청난 기만이다. 누가 누구보고 노력하란 점이 아니라 둘 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밀의 <여성의 종속>처럼 남성이 억지로 만든 야만적인 사회체계도 문제지만, 그런 문제적 사회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남성에게 억지로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도 문제다. 하지만 생각해본다면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지만, 이성보단 오히려 감성과 무의식에 의해 더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을 서로 감수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분쟁만 일어날 뿐이다.

 

밀은 연애관보단 결혼관에서 밝히나 남녀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었다. 여성이 처음에 젊고 예쁠 때는 남성은 정력을 당하여 그녀를 위해 행동하나, 그것이 다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성이 사치와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허황된 망상만 추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밀의 조건은 여성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전제를 둔 것이다. 솔직히 생각하여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말처럼 쉬운 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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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2-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게 있는데 간질 정도면 군 면제가 아닐까요 ? 이상하네.....
그나저나 멜클스마스입니다.. 아 지났구나...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12-29 23:30   좋아요 0 | URL
아 고옴발님도 새해복많이요. 간질기질이 있어도 자원입대해었다군요. 전역후 거기 사병이 죽은자리에ㅡ 자며는 심령현상이 일어나는 전설이...
 
빌헬름 텔.간계와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7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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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의 중심은 프랑스였다면, 19세기는 독일이라고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19세기를 풍미하고, 철학자 중에 헤겔과 니체, 사회경제학자로는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등장했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토크빌이 등장하고, 영국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과 벤담이 존재했다. 그러나 문학, 철학, 경제학 전반의 인문학에서 19세기는 분명 독일이 강력했다. 이때 독일의 문화사조는 다소 프랑스보다 늦게 시작한 감이 들지만, 그 효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번에 읽은 도서는 괴테와 더불어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 <빌헬름 텔, 간계와 사랑>이다.

 

실러라는 이름은 솔직히 처음 들으면 낯설다. 실러라는 이름은 미학 관련 도서를 볼 때 종종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사실 이번에 처음 봤다. 하지만 실러의 작품은 낯설지 않고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빌헬름 텔>은 매우 유명한 작품이며, 빌헬름 텔이 자신의 아들인 발터와 보여준 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빌헬름 텔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영주가 벌인 악독한 함정에 빠진다. 광장에 걸린 영주의 모자에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경죄에 걸린 셈이다. 한국이라면 예전에 오후 5시가 되면 음악이 나오면 모든 사람이 길에서 멈추어 차렷 자체를 취해야 했던 것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던지 혹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이익이 있었다. 그런 불이익은 빌헬름에게도 닥친 것이다. 영주는 자신에게 반항적인 빌헬름을 함정에 빠지도록 했으며, 그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 만약 빌헬름이 사과를 맞추지 못할 경우 부자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만약 성공 하면 풀어준다는 것이다. 거리는 100걸음 정도 떨어진 곳이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런 장면은 수 없이 패러디와 페스티쉬 되어 광고나 엔터테인먼트에서 종종 보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 작품을 읽으면 희곡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고, 연극과 영화로 만들기 좋은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감상에서 권력에 집착하는 영주와 예전에 거기를 다스리는 영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괴테와 더불어 실러가 루소의 낭만주의 문학관을 이어받은 것을 잘 보여주는데, 루소는 <에밀>로 통해 인간은 도시로 가면 타락하게 되고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시의 타락에서 현대사회의 도시는 환경오염과 경제적 갈등, 공적 인프라(교통, 상하수도, 병원, 교육시설 등) 분배에서 님비현상과 핌비현상이 오고간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주변의 영향에 의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계속 표류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에밀>은 바로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자연성을 찾으라는 것이다.

 

루소는 분명 (볼테르가 비아냥거린 것처럼) 인간은 숲에서 곰과 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자연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인생관에서 자신의 선택지점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교육과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식의 전수와 사회적 인간이기보단 그 시스템에 종속되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빌헬름 텔>에서 마을주민들은 그런 수동적 삶이 아니라 능동적 삶을 추구한다. 자신의 왕을 믿고 따르는 것은 자신들이 자유민으로서 명예와 자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왕이 위험에 빠지면 언제라도 무기를 들고 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지키는 것부터 가능했다. 빌헬름은 그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나이로 등장한다. 처음 장면부터 부패한 권력자는 남의 아내를 강제로 추행하려 했고, 그 아내의 남편은 성폭행 미수범을 도끼로 내려찍어 두개골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나 정당방위라고 할지라도, 계급의 차이는 도덕과 제도의 타당성을 훼손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군주의 의무를 대리 수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군주라는 입장에서 정치적 통치는 자유민을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국가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후손을 남기고, 그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국정을 운행하는 것이 옳다.

 

이 점에서 빌헬름 텔은 낭만주의적인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고, 브루노라는 처녀가 말하듯이 민중이란 자유민들과 함께 해야 올바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에 의지하고 않고, 오로지 합당한 가치관으로 쇠사슬을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실러의 서적은 낭만주의라고 해도 군주정치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았다. 군주는 분명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기에 자신들은 군주를 믿는 점이고, 군주를 대신한 영주의 문제점과 그의 죽음이 단순히 폭력이 아니라 군주의 자유민으로 존재하기 위해 행동한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에 충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민족성을 중시한 낭만주의 문학인 점이다. 괴테는 루소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소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주의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물길을 열어놓은 인물이다. 사실 루소도 애국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단지 그 애국심의 조건은 얼마나 나라가 올바르게 움직이는가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시민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나라가 어떻게 망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플라톤과 루소의 차이는 국가라는 대상이 플라톤에게 형이상학적 미를 갖춘 철인군주라면, 루소는 일반 민중에 대해 시선을 돌린 셈이다. 실러의 작품을 보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여주는 국가적 의미에 루소가 제시하는 자유민들의 의지를 묘하게 줄 달리기를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줄 달리기는 <간계와 사랑>에서 보여준다. 실러의 소개를 보니 그는 루소 이전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간계와 사랑>은 정치적 갈등과 연애갈등이 묘하게 섞인 작품이다. 영주의 아들 소령은 악사 밀러의 딸을 사랑했다. 하지만 밀러는 평민의 집안이고, 자신은 귀족의 집안이다.

 

아버지는 시종장과 사이가 좋으며, 밀포드 부인에게 자신의 아들을 장가보내어 더 좋은 권력을 잡으려 했다. 사랑과 권력의 이중 모순에서 소령은 간계에 스스로 걸려 마지막에 모든 것이 파멸된다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대치할 만한 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좋을 것이다. 단지 <로미오와 줄리엣>은 귀족의 아들과 딸이 서로 적대하는 집안인 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소령과 밀러의 딸에게 적용했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집안의 원한이 아닌 권력과 계급인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반영했다.

 

계급과 권력을 틀에서 벗어나 사랑을 원하는 소령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주변인물은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과 문화적 요소를 본다면 아직까지 로코코양식이 반영된 것 같았다. 밀포드 부인의 의상을 보면 가슴이 다소 강조된다는 점에서 로코코의상에서 여성의상이 가슴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 윗부분의 형태가 드레스 사이로 드러나게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로코코시대의 귀족부인 의상이다. 또한 결혼한 부부가 서로 다른 애인을 찾아 즐긴다는 점도 그렇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보면 파리에서 많은 귀부인들은 젊은 남자들의 애정을 받고 있었고, 파리의 사교계에서 귀부인을 통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출세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로코코시대 말기에 보여준 고전주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야기가 더해지고, 소령과 밀러의 딸이 사랑과 배신에게 파괴되어가는 모습에서 귀족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실러의 2작품을 보면서 실러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사회 그 자체를 바꾸자는 것(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그 사회에 있는 모순과 부조리를 개선하자는 수정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 사회의 모순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런 모순과 부조리는 현명한 군주가 존재하지 않으면 실행이 어렵다.

 

책에서는 인과응보의 관계를 잘 배치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어렵다. 실러의 작품을 본다면 확실한 길을 찾아가는 것보단 은근슬쩍 비켜간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추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희극작가 뷔히너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은 사실주의 미학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영화 <당통>의 원래 작품이던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대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대한 당통의 비극적 관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친구이며 동지인 당통을 단두대로 보내야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비극과 모순, 부르봉왕가에 대한 절대주의를 부정하던 그가 오히려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던 현실에서 <당통의 죽음>에서 보여준 사실주의적인 허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교훈을 남기게 된다.

 

Strum und Drang이라는 독일의 질풍노도의 문학은 괴테와 실러에게 큰 바람을 불어준다. 그래서 실러의 작품을 읽게 되면 등장인물의 대사가 부드럽지 못하다. 상당히 딱딱하게 끊어지고, 열정적인 대사를 퍼붓는다. 때로는 사랑의 노예가 된 자가 간계로 속아 배신의 충격 때문에 자신의 연인을 독약으로 죽게 만든다. 이 모든 게 간계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자신의 칼을 뽑아 이승이 아닌 무덤 속에서 영원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삶이 아닌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부분은 분명히 낭만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서 찾기 어려울 것 같으나 은근히 현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현실에 도래하지 않은 자신만의 이상적 세계, 사실 프랑스혁명처럼 모든 것을 뒤집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만 제거하는 것에도 좋은 가치관이 될 수 있지만, 실러가 은근히 비켜가면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쇠사슬이란 단어처럼, 쇠사슬로 타인이 묶고자하는 이는 오히려 더 강한 쇠사슬에 묶여 그 자신조차 망각하게 된다. 실러의 쇠사슬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쇠사슬에 묶였다는 것보다 단지 일정하게 어디에만 쇠사슬이 묶여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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