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건달 (1disc)
조진규 감독, 박신양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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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의 저급한 3류틱한 조폭영화라는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3류 이상의 재미있는 요소와 학술적인 요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론적인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점은 역시 3류는 그렇고 2류에 머물고 2류 중에서도 약간 떨어지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보이는 중요한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건달이 하고 있는 박수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 고전이나 혹은 주요한 전통문화를 찾아가면 무속신앙에 대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神壇樹(신단수)라는 것에서 신단에 해당되는 나무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박달나무는 檀이란 단자이고, 한국의 최초 국가라는 고조선을 건립한 단군의 단자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그래서 한국의 최초의 왕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의 의미에서 현대에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나 미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이유는 그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신앙 내지 문화에서 우리민족의 자화상 내지 존재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분으로 그의 저서인 <슬픈열대>와 더불어 명작인 <야생의 사고>를 읽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야만인을 대하는 어리석은 문명의 야만을 반성해야 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야만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 문명인들은 알 수 없는 미스테리 내지 혹은 미신 내지 미개한 문화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오랫동안 살아온 문화의 소산이다.

 

오히려 야생의 사고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문명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도리어 미개인들이 훨씬 웃돌고 있을 수 있다. 린네가 발견한 식물분류법보다 더 세분화된 지식으로 알아보는 원주민들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원주민에서 문명의 식물학자와 원주민 중에서 누가 식물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원주민들의 에믹의 요소보단 에틱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화유물론적인 요소에서도 물질이 문화를 구성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지리적, 기후적인 요소로서 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박수건달이란 영화로 돌아보면 한국의 문화적, 자연적, 지리적 특성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박신양 씨는 작품에서 조폭건달로 나온다. 그런 그가 무병에 걸려 무당이 되는 것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부산의 어느 어촌마을의 어항을 이전하여 그 자리에 큰 건물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지금도 부산의 어항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모여 용왕제를 열고 한다. 용왕제에 무당을 부르고 어민과 마을주민이 모여 한데 어울려 술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민중문화에서 굿이란 하나의 문화는 공동체적인 문화형성과 더불어 집단의 공동체 정신을 재확인 후에 더 견고하게 다지는 계기라는 것이다.

 

굿이란 것과 혹은 제사를 지낸 이유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무속신앙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이다. 위로를 하는 대상이 죽은 자에 대한 위로가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인 것이다. 제사문화에서 한국의 정신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정신이다. 그런다고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그 소수의 부족과 씨족 혹은 마을주민이 어울리는 작은 공동체로 이루기 때문이다. 박수건달에서 무당이란 자는 결국 그런 의식행사를 진행하고 만들어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제사장과 더불어 임금이란 군장을 맡는다. 그가 왕으로서 제정일치를 추구한 것은 왕권이 결국 주종관계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오이디푸스(거세공포와 더불어 죽은 아버지 죽음에 대한 위로와 슬픔,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적인 부자관계로서 국가와 부족을 이끈다. 기본적으로 한국이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고, 어민이라고 해도 100% 물고기를 잡지만은 않았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가축도 기른다. 농경문화의 자급자족인 생활요소가 결국 공동체의식을 키운 것이다.

 

놀이라는 문화가 노동이 수반되기에 특히 농민과 더불어 어민도 민요를 부르며 고기를 낚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발달로 좋은 장비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도, 결국 여러 사람들이 많은 배를 동원하여 집단으로 고기를 낚는 방법도 존재하고, 바다에 나가면 풍랑과 재해로 사고를 당할 수 있으므로 서로간의 연락망을 항시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친분을 유지한다. 그래서 용왕제 굿판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좋은 볼거리라는 점이다. 작중에서 박신양 씨도 박수건달이 되어 최종적인 위기 전편이 굿판의 모험이다.

 

오이가 위에 떨어지는 바로 두 동강이 나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역에서 위기에 봉착하나, 무당의 신기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현대과학기술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칼 위에서의 무당의 춤이다. 본래 무당이란 용어에서 샤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샤먼은 미친듯이 춤을 추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초자아적인 세계에 보이는 현실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무당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망정, 그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인은 2가지로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하여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정이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불안과 고민이 무당의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혼의 존재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기적의 이야기는 신화와 설화로서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당의 문제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망의 대변인이란 점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또한 개인 대 개인으로서 보자면 어느 개인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주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 현대인이나 과거에 살던 사람이나 정신적 불안을 영원히 떨친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말이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중세시대 유럽시대에 광인들이 나오면 그들을 분리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억압이나 혹은 표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정신병원이 생긴 이래로 그런 자들은 더 이상 거리를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광인 중에서 물이 어는 추운 날에도 덥다는 말을 하고 속옷만 입는 자도 있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모두 무시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당 역시 현대에서 보면 그저 굿만 하고, 점만 치는 사람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에서 진정 무당의 존재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건달이고, 무당 남성은 박수라고 하기에 박수건달이란 작명은 분명 어울린다. 박신양 씨가 하는 행동을 보면 죽은 자가 빙의하여 살아있는 자를 만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살아있는 자가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억압되어 그것이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말을 표출하게 하거나 혹은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마음의 병이 있는 인물들은 박신양 씨의 이야기에 모두 울고 통곡을 한다. 하지만 박수건달인 박신양 씨도 같이 울고 통곡을 한다. 무당이란 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가는 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은 무의식적 공간에 깊숙하게 들어가 공유하는 자라는 것이다. 박수건달에서 보이는 한국인의 恨이란 것으로 통해 원래는 무속문화가 인간을 넓리 이롭게 하는 단군신앙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시작되나, 현실은 그저 자기만족에 취하려는 고객과 더불어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이 존재하는 게 대부분이다.

 

구복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무속신앙의 한계점이고, 지금은 기독교, 불교, 수많은 종교들이 대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란 존재로 통해 넓리 사랑을 전파하는 박애사상이나, 혹은 불교의 부처님이 자비로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박애정신에서 종교의 시작과 교리 및 기타 문화적 조건을 달라도 철학적 베이스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급격하게 신격화 된다. 보살과 부처를 모신 무당의 집에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도 영원하다고 하여 그 무당은 예수님의 조각상을 보살과 부처님과 같이 모셨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살과 부처 이전에 무속신앙은 도교신앙과 결합하여 장군상과 신선, 동자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은 자신(들)만이 가지는 불안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인에게 간다. 그리고 진짜 무속인을 만나면 그들은 울고웃고, 그저그런 무속인을 만나면 웃거나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진짜 무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항을 개발하려고 조폭을 투입하여 이전하고, 그러기 위해 굿을 했다는 점은 폭력조직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래서 <박수건달>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재밌게 다른 점은 높게 인정하나, 그 전개가 한계라는 점이다.

 

집필시간 :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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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 휴 잭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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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에서 보여주는 어두운 현실과 더불어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프랑스혁명을 찾아보면 총 5번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프랑스혁명은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 함락과 더불어 앙시앵레짐(구체제)의 해체를 만든 프랑스대혁명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혁명은 더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일어난 것이 1830년, 이후가 1848년, 잔혹하고 안타까운 1871년 파리꼬뮌, 이후로 1968년 5월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사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사상과 20세기의 사상은 조금 차이가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혁명의 정신적 지주는 장 자크 루소였다면, 20세기의 프랑스혁명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승계자라고 보는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처럼 장 자크 루소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여와 더불어 프랑스라는 나라 그 존재성마저 기여한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영화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프랑스의 상징인 3가지 색이 블루, 화이트, 레드이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공화국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랑스공화국의 그 시초를 이룬 것은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이것을 읽지 않고 프랑스를 말하는 것조차가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삶의 철학까지 인간 그 자체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추구하기 위해 투쟁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그런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대한 투철한 반사의식이 보인다.

 

영화라는 2시간 조금 넘는 런닝타임에서 충분히 만끽할 수 없으나, 장발장이 감옥에 투옥되어 힘들게 살아온 것에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다. 선천적인 것은 인종과 성별이란 생물학적 요소로 볼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건 그리고 정치적 입장이다. 구체제에서 저술한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리고 이후에 나온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무척 위험한 도서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상에서 지금도 루소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루소가 물어보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비참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 레미제라블에서 레란 res라는 것으로 다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미제라블은 비참하다는 말이다. 레미제라블은 다시 비참해진다는 의미이다. 비참한 역사적 되풀이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역사는 2번 되풀이 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으로(소극으로), 희극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나, 루이 16세를 단두대 아래에서 하나를 이슬로 만들었던 프랑스가 다시 왕정군주제로 변모했다.

 

당초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하고, 국민공회를 설치하여 세계민주주의역사에서 큰 획을 긋은 자코뱅당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잠시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죽음 이후 테르미도르당의 부패한 정치행위와 무능함은 결국 프랑스를 힘들게 만들었고,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루소에 대해 경배했거만, 추후에는 루소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레미제라블에서 황제가 있는 프랑스는 결국 나폴레옹이 집권시절이다.

 

그러나 주인공 장발장이 갇힌 것은 영화배경이 되는 1815년에서 19년 전에 잡힌 1796년이란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빵 하나를 훔친 것이 큰 죄가 된 것처럼 여전히 프랑스의 하층민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에서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가 있으나, 결국 혁명의 원인은 대의를 가진 마리우스 같은 인물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빈곤한 농민과 피지배계층의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장발장이 가진 것은 처음에 오로지 분노였으나, 어느 성당의 신부님의 구원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도시의 시장이었고, 탁원한 공장의 운영자였다. 만약 신부님의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계속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혁명 시기나 혹은 장 자크 루소의 관련 서적을 봐도 프랑스 성직자의 부패와 비리는 여전했다는 점이다. 신의 운명에 점찍어 모든 것을 정하는 방식이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신의 은총을 내린 것은 장발장과 코제트, 마리우스라는 일부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든 소설이나 주인공 위주 서사는 결국 주인공만을 보게 되는 한계점에서 주변 인물의 운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한계성이 있다. 그래도 영화는 충실하게 그 비참한 서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일반적인 대사보다 오페라 내지 뮤지컬적인 요소로 통해 감정의 기복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에서 그런 진지한 요소는 처음에 장발장이 노예로서 죄수생활을 할 때 24601번으로 가석방 나오는 모습이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에게 깃발을 들고 오라고 한다. 깃발은 프랑스의 삼색기, 마지막에 장발장이 죽고 나서 그의 꿈은 역시 삼색기가 흔들리는 광장이다.

 

자유, 평등, 박애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처럼 공화국의 상징은 보평, 포병, 기병에 의해 무참히 밟힌다. 그래도 붉은 색의 깃발은 잊을 수가 없다. 검고 어두운 불운한 현실에서 붉은 색의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색이란 영화 중간에 혁명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들의 붉은 눈물처럼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나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들은 총과 칼을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 혁명의 기본적 문제에서 장발장과 코제트의 어머니 판틴처럼 그들은 현실이 아닌 미래를 잡아가길 원한 것이다.

 

장발장은 자기의 어린 조카가 굶주려서 빵을 훔쳤으나, 결국 수감되고, 조카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판틴은 어린 코제트를 살리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몸을 팔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었다. 희망이란 단어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박애정신만큼 위대한 정신이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에서는 개인적인 부분에서 존재할 수 있으나, 프랑스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가 군중에게 외친 것처럼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지 자신의 자유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자유란 결국 박애정신이 되는 것이다. 마리우스 친구가 그렇게 죽어갔으나 삼색기와 더불어 붉은 색의 깃발을 흔든 것은 박애정신이다. 그 박애정신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냉혹한 자베르 경감마저 경의로서 자신의 훈장을 어린 소년에게 바친다. 그 소년의 모습이 동서출판사에 나온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서적표지와 어울리지 않은가?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틀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결국 1830년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혁명 이후 사라지는 별들이었으나, 위대한 민중들의 의지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레미제라블은 소설이므로 배경은 1832년으로 되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바리케이트 너머라는 웅장한 노래처럼 그 너머를 향해 죽음이란 것을 택한 이들의 절대적 신념에 그저 가슴이 쓰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 친구들은 모두 죽으나, 마리우스가 장발장에 의해 구출되고, 후에 코제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문제는 마리우스는 귀족의 집안이란 점에서 프랑스혁명가로서 마리우스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남자인 마리우스만 성공한다. 영화에서 혁명은 실패해도 사랑은 성공했다는 스토리라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판틴이 죽어가는 장발장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에서 장발장의 영혼은 사랑에 대한 노래에서 혁명을 일으킨 민중들의 노래와 합류한다.

 

어찌보면 지금은 구체제에 순응할 수 없는 코제트(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와 마리우스이나, 언제가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것을 모두에게 전해주는 박애정신이 넘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후 제일 비참한 1871년 파리꼬뮌에서는 당시 몇 만명이 넘는 파리시민이 싸우다 전사하고, 포로로 잡혀도 살해당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3세는 결국 파리시민을 무참하게도 배반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잔혹하고 급박했을까? 13~14세 소년소녀들이 총과 대포를 나르고, 팔이 하나 없어져도 저항하는 모습이 나온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 코제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슬픈 이야기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게 아니라 죄를 계속 만들 수밖에 없는 비참한 환경을 말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을 무조건 지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역사의 뿌리인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3가지 체계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서 입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오로지 잘못된 법을 바꾸는 것은 입법에서 가능하고, 민주주의는 입법에서 시작하는 점에서 말이다. 입법에서 잘못된 관례나 법규를 바꾸고 새로운 제도는 정비하는 것은 법이란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국가의 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한 것은 법이란 결국 힘이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 점이다. 자베르에게 자비를 베푼 장발장에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나, 그것의 기반은 박애정신이다. 자베르 경감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만의 정의라는 법이 결국 박애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처음 자베르경감이 장발장을 그저 죄인으로 보았을 뿐이었으나, 장발장이 누구보다 더 박애정신이 넘치는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죄인으로 보자니 그에게 받은 자비는 자신의 양심을 찌르고, 그를 인정하자니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존재적 의미에서 모순을 겪는다. 2명이 존재할 수 없다면 1명은 물러나야 한다. 결국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신이 주는 정의가 법인 자베르경감, 신이 주는 정의는 결국 사랑이란 장발장에서 현실은 자베르경감에 가까우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장발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쉽지 않다. 낭만주의 문학인 점에서 낭만주의란 목숨을 걸고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주인공에게 펼쳐진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 되는 소극이 된다. 물론 소극에서 당하는 자들은 비극이나 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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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미학 에세이 - 예술의 눈으로 세상 읽기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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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놈들이 책도 안 읽고 별이나 세는 잉여짓하는 애들이 도서사이트에 퍼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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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문제적 인간 7
리오 담로시 지음, 이용철 옮김 / 교양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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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1조와 더불어 세계 헌법의 모태와 모든 자유주의, 민주주의, 심지어 사회주의까지 기초가 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로 묶여 있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이미 자유롭게 태어난 몸이라고 하나, 그가 태어난 순간 우리는 사회의 일부 구성원으로 등록된다. 태어나자말자 병원이란 기관에서 관리를 받고, 동사무소와 구청으로 통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고, 평생 국가에 의해 통제받는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는 감옥의 역사를 다룬 내용으로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감시를 받아야 하며, 그것은 구조적인 하나의 체계라는 것을 폭로한다.

 

생각해보면 <감시와 처벌>에서 아주 인상적인 젊은 하급관리 이름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다미엥, 다미엥은 루이15세를 암살기도한 범인으로서 암살실패와 더불어 엄청난 고통 속의 사형처벌에서 죽어간다. 그의 죽음을 보자면 살아있는 자에 대한 폭력으로서 전제주의 봉건왕국의 위험을 보여준다. 그는 왕의로서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 다미엥의 이름이 루소의 전기에서 등장할 줄은 몰랐다. 다미엥의 암살미수사건에서 장 자크 루소를 옭아매려 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사실 비단 이 문제가 결부된 것은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인간불평등기원론>, <에밀>과 같은 정치, 철학, 사상, 교육, 사회학적인 도서만 아니라, <고백록>,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와 같이 철학적 요소와 더불어 인간의 이성 안에 있는 무의식과 감정을 변증법적으로 다룬 도서도 있다. 최초의 정신분석도서가 바로 <고백론>이라고 소개한 점에서 이 책에서 나는 예전부터 내가 품은 생각을 확신했다. 근대 철학이나 사상에서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추가로 소쉬르를 추가한다면 이들의 기원은 모두 루소에게 있다는 점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 그가 처음에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보단 처음에는 자유주의자였다고 한다. 그의 정신적 지주로 피히테, 칸트, 셰익스피어,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같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막상 그의 서적에서 보인 도서내용과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보이는 점은 비슷하다. 일을 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일을 하지 않은 자는 부유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 요건의 차이가 결국 빈부격차를 나타내고, 칸트의 <판단력비판(대우아카넷)>에서도 루소의 생각이 전해져온다.

 

“사치는 수백 명의 도시인을 먹여 살리지만, 수천 명의 농부는 농촌에서 죽어가게 한다. 사치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주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의 손 사이를 오가는 돈은 농부들의 삶에 아무 쓸모도 없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장식 줄이 필요하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의복이 모자란다. 사람들의 양식으로 이용되는 물질을 낭비하는 일은 사치를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내 반대자들은 우리말이 어려워 그들이 뻔뻔스럽게 옹호하는 주장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내가 조목조목 따지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행복해한다. 우리의 부엌에는 주스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환자에게는 수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농부들은 물만 마신다. 가발에는 밀가루가 필요하고, 바로 그 때문에 그토록 많은 가난한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한다.”

 

소비주의적 사회에서 분명 올바른 소비는 국력을 증가하고, 국민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은 사실이나, 지나친 사치는 오히려 빈곤을 만들고, 특히나 화폐의 지나친 유통으로 인플레이션이 증대되는 역기능이 있다. 트리클다운이란 낙수효과를 말하는 경제적 논점이 이미 한국정치계 여야 모두 벗어나 역트리클 다운을 모색한다. 기본적으로 생각하면 TV,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 역시 필요 이상의 기능을 구매하면 과소비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비의 사회에서 이미지의 소비로 통해 필요 이상의 제품을 구매한다. 문제는 자기의 경제적 여유에 맞는 선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르나, 그렇지 못한 점이 많다는 점이다.

 

어떤 자원에 국한된 한정량에서 분명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도 있지만, 그것이 필요의 요구보단 개인적 취향에 의해 요구된다면 그 자원은 분명 후자에게 갈 것이다. 필요의 요구성보다 취향의 요구성을 가진 자에게 훨씬 구매능력이 뛰어난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필요의 요구를 가진 자들은 어떻게든 구해야 하기에 그들의 경제적 여유에서 큰 박탈감을 지닌다. 루소가 어린 시절 홀로 길을 가다가 농장에 들려 밥을 달라했는데, 처음에 농민들은 맛 없는 빵과 간단한 음료만 주었지만, 루소가 허걱지걱 급하게 먹자 루소에게 고기를 주었다고 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물론 식량에 필요의 요구는 물리적으로 해결되어 있으나, 그렇게 숨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왕정, 귀족, 성직자들이 계속 이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의 모든 알레고리적인 연결에서 루소로 연결된다. 판테옹 프랑스 사원에 안치된 루소의 유해나 프랑스 어느 곳이든 기념된 루소의 상징물, 게다가 루소의 섬과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에서 루소의 가치는 엄청 대단하다. 솔직한 말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분짓기>와 철학이론서에 나온 데리다의 해체적 관점 역시 루소의 사상에 상당히 근접하다.

 

1968년 파리의 5월혁명을 주도한 상황주의자인 기 드보르의 경우도 그렇다. 스펙타클이란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에서 인간은 결국 이미지에 의해 조성되는 하나의 존재인 점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사회적 풍조)와 단절을 한 루소에게 상황주의자적 요건이 보인다. 루소가 인간 개인적 그 자체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철학자보단 대단한 것은 아니나, 그가 사유하고 만든 사상이란 이미 200년을 지나 300년을 지난 지금도 큰 충격과 공감을 준다.

 

그는 비도덕적인 행동도 하였고, 아이를 고아원에 보낸 비정한 아버지이었다. 덕분에 루소는 비난을 면치 못했고, 평생 꼬리를 물고 다녔지만, 그는 그것을 오히려 참회하는 심정으로 자기의 모순과 약점을 도리어 드러낸 점에서 위대할 수 있다. 위대하게 보이기보단 스스로 깎아내리는 그의 마조히스트적인 요소는 자아성찰이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그는 자기의 아이러니하기에 오히려 더 큰 발전을 보았다. 비정한 아버지로서 <에밀>을 저술하여 그의 죄를 인정하고, 아이에게 제일 좋은 선생님은 아버지고, 어머니의 모유를 마신 아이들이 훨씬 좋은 성장을 한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의 모유에 의한 효능은 입증된 바이고, 그의 교육철학은 현대교육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귀족들의 찬양을 좋아해도 귀족의 지원과 살롱생활을 혐오하고, 오히려 가난하고 빈곤한 자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인 루소에서 인간의 자유정신보다 박애정신의 좋은 예를 본다. 루소가 사는 곳에 가난한 주민이 있으면 그들에게 식량을 주고,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그들과 대해주었다고 한다. 명성이 높을 수록 자만해져, 아랫사람들을 깔보는 풍조에서 루소는 왕이나 귀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히 했다.

 

시대적 흐름은 앙시앵레짐 즉, 구체제라는 봉건사회다. 루소의 명성은 루이16세의 결혼식에서 루소의 극본으로 오페라를 하고, 루소의 말년에 벌어진 사건이 루이16세의 재미거리였다. 길 한복판에서 거대한 사냥개와 부딪히어 기절한 루소가 마치 죽은 것처럼 소문난 것이 당대의 이슈인 점에서 루소는 시대적 불운과 명성을 같이 간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은둔적 요소를 끊임없이 추구한 그였기에 그의 진리적 탐구는 이상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사회계약론>의 담긴 내용은 민주주의국가의 헌법에서 당연하게 여기나, 당시에는 불법도서였다.

 

1762년 <사회계약론>이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자르게 한 시초라고 당대 사람들은 생각했는가? 어째든 이 책에서는 루소의 서적과 당시 문헌을 인용하여 매우 객관적으로 적어내려가고 있다. 루소라는 인간이 엄청난 인물이고 위대한 철학자임은 분명하나, 그는 광기와 우울에 시달리고, 건강이 위험하여 간질증세로 고통받았다. 인간관계가 어설프고, 바랑부인에게 목매어 있었으나 그녀의 진짜 모습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다르고, 당대 명사인 볼테르와 디드로에게 공격을 받는다. 계몽주의 철학이 등대한 시기에 오히려 계몽주의에서 반계몽주의로 대항한 점에서 그의 세계관은 도미노 1개를 빼면 무너지는 도미노의 탑과 같았다.

 

모든 것을 전복해버리는 루소의 사상이 오히려 지금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남았으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또한 테레즈에 대한 기록이 인상깊은데,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마지막 10장을 미완성으로 하여 서거한다. 미망인 테레즈가 루소에게 매우 깊은 성찰과 더불어 루소 자신에게 어머니, 누이, 아내는 아니었으나 이 모든 것을 가진 여자가 테레즈라고 했다. 본래 결혼하지 않기로 했으나 결혼을 하였으며, 테레즈는 1801년 극빈의 상태에서 죽었지만, 루소의 명예를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루소가 죽자 사람들에게 "만약 그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성자라는 것인가?"에서 루소는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진정한 성자가 되었으며, 이후 계속 프랑스혁명 때부터 그의 의지는 반복된다. 사실 루소의 서적을 보면서 내 가슴이 뜨거운 것을 느꼈다. 인간에게 필요한 일반의지는 프랑스인권선언문에 그대로 올라간 단어이다. 개인의 사심이 아니라 인간의 공적이성으로 통해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여 자유공화주의적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를 실천하는 것이다. 루소가 없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없다. 미국독립의 아버지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토머스 페인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봉건왕족사회에서 민주주의사회로 이전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물론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이 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그 길을 걷게 해주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에서 그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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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루소 하면 만애비 님 전공이군요..

만화애니비평 2013-11-29 17:30   좋아요 0 | URL
루소 빠도리입니다..ㅎㅎ

루쉰P 2016-06-0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ㅎ 루소 빠도리시라니 서재를 잘 찾아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유리한 리뷰자 시길래 질문하나 드리고 싶어서요. ㅎ
제가 이번에 목돈이 좀 마련되어 이 책을 사고 싶어서요. 그런데 저는 굵은책은 번역이 잘 되지 않거나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제가 뭐 번역이 잘 되었다 아니다를 따질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지만 읽는 데 있어서`어?` `어?`그러는 책들이 있거든요.

뭐 `동서문화사`나 이런 류의 책들이 두꺼운 데 반해 읽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책을 읽어 보셨는데 어떻게 읽을 만한 지 물어보고 싶어서요 ㅎ

제가 루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게된 것은 톨스토이가 루소 메달을 하고 다녔을 정도로 루소 빠도리(?)인 것도 그렇고, 헌법을 배우며 프랑스의 사상이 거기서 특히나 루소의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배워서 도대체 루소란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 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그래서 다른 것보다 저는 평전을 통해 루소의 사상도 같이 느끼고 싶어요 ㅎ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루쉰 빠도리에요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03 17:59   좋아요 0 | URL
이 책도 사실 기본적으로 조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루소만이 아니라 마르크스나 프로이드 관련 내용이 나오죠 현대 철학사상에서 칸트 역시 루소의 초상화를 뒤에 걸고, 미국 20세기 최고의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롤즈의 <만민법>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많은 것을 들고 왔지요.

루소의 사상을 접하려면, 그의 도서 하나를 찾아서 하나씩 읽어보는 편이 좋습니다. 루소는 워낙 다양한 서적과 역설적인 존재이기에 추천하는 도서로는 사실 <인간불평등기원론>인데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것이라 비싸지 않습니다.

톨스토이가 루소의 메달을 단 이유는 아마 <에밀> 때분일 겁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다른 독서감상문을 직접 옆에서 들으니 안나 카레나너에서, 톨스톨이의 추가사상은 농촌에서 부지런한 노동생활 그리고 자연적 인간인 것입니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보면 18세기 프랑스 파리 살롱문화에 대하여 비판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1세기 후의 러시아라고 보시면 됩니다. 루소의 평전으로 이 책은 좋으나 많은 텍스트를 접하야 하므로, 간단히 얇은 책이 좋습니다.

동서출판사 <사회계약론, 인간불평등기원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그것 저희 집에도 있지만, 제대로 된 책은 김중현 교수님의 번역이나 책세상의 루소전집이 좋습니다. 그러나 책세상 루소전집 양장본은 가격이 비싸므로 펭귄클래식을 추천하는 바이죠.

루쉰, 예전에 어느 여성분이 저에게 루쉰평전을 빌려주기로 했는데, 그분이 다시 상경하는 바람에 한 번도 그자에 대한 책을 읽지 못했군요..ㅎㅎㅎ


루쉰P 2016-06-03 18:08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빠도리의 역량이 느껴집니다 ㅋㅋ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지만 <에밀>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은 읽어 보았습니다. 전 루소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를 않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루소는 저런 생각들을 했을까? 저런 혁명적 사상을 루소는 어떻게 발견한 것일까?
마치 석존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것이 대체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었냐는 궁금증이 큰 것 같아요. ㅎ
뭐랄까? 신비한 인간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전체적인 정보가 담긴 책을 좀 읽고 싶었는데 저 평전이 눈에 걸리더군요 ㅎ

소개해 주신 역자와 책들은 너무나 감사합니다. 다시 구입을 해서 읽어 봐야 할 것 같아요 ㅎ 한 명의 인물을 자세히 안다는 것은 참 힌든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정보가 쏟아지는 속에서 말이죠 ㅋ

루쉰평전을 안 빌려준 여성분 ㅋㅋㅋ 정말 센스 꽝이세요 ㅋㅋㅋㅋ

소중한 답변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ㅎ

만화애니비평 2016-06-03 18:21   좋아요 0 | URL
루소라는 인간이 조금 궁금하면, 박아르마님이 번역한 <고백> 2권을 읽으면 압니다. 사실 루소를 알면 알수록 놀라운 것은 그가 20~30대 상당히 병약했고, 초면에 실례나, 수음(남자들의 자위)으로 너무 몸이 약해져서 유언을 쓰고, 현대판 바바리맨처럼 우물가 여자들 앞에서 과감하게 쇼를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읽으면 당시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 가진 루소를 바라보는 시선, 인간이 가진 가증스런 요소를 잘 알 수 있죠.

시간나면 루쉰의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덕질한다고(지금까지 게임하고 애니메이션 보는 충실한 오덕이라) 조매 그렇지만, 님 아이디를 보니 한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경한 그 여자분, 스타일적으로 센스는 넘치는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것이 넌센스였죠..ㅎㅎ

루쉰P 2016-06-03 18:35   좋아요 0 | URL
오! <고백>이라는 책 감사합니다. ㅎ 젠장 루소 ㅋㅋㅋ 우물가에서 나체쇼, 자위 매니아라니 ㅋㅋㅋ 아 정말 루소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당황스럽네요 ㅋㅋㅋ 위대한 사상가는 분명한데 뭔가 알 수가 없네요 ㅋ

루쉰 선생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차간지입니다. ㅎ 죽는 그 날까지 적들과 논쟁을 끊임없이 햇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비평가들이 그런데 힘을 쏟을 시간에 작품을 더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평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루쉰 선생 입장에서는 눈 앞의 적과 싸우지 않고서, 평생을 남는 문학을 써서 무슨 소용이냐며 권력에 아첨하는 글쟁이들이나, 민중을 우습게 여기는 권력자들에 대해 쉬지 않고 글을 썼습니다. 특히나 <무덤>의 서문 중에서 자신이 이런 쓸데없는 글을 쓰는 이유가 자기 뜻데로 세상을 살아가는 권력자들이 조금이나마 얼굴을 찡그리게 하고 싶어 쓴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루쉰 선생은 우리나라에는 <아Q정전>만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잡문이라고 불리는 날카로운 단편 글들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박홍규 교수님이 쓰신 <루쉰 문학 선집>과 <자유인 루쉰>이 참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쓴 <루쉰>도 평전으로 조금은 가치가 떨어지지만 루쉰을 통해 일본 군구주의를 뚫고 나가려고 했던 젊은 일본 중문학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작품이라 아름답다고 할까요? 읽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애니나 만화의 덕후 정도는 아니지만 굉장히 좋아하고 즐겨 보고 있습니다. <이나중 탁구부> <크레이지 군단>를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후루야 미노루와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리어>을 최고의 만화로 삼고 있습니다. ㅎ
요즘은 <모브 사이코 100>도 보고 있습니다. ㅋ 작품이 좋더라구요. ㅋㅋㅋ 대세인 <원피스>나 <나루토>는 여태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전 좀 약간 소수의 만화를 좋아하는 듯 싶습니다.
애니로는 <NHK에 어서오세요>를 진짜 감명 깊게 보았고, <에덴의 동산>이라는 잉여 덕후로 혁명을 가하는 애니 역시 재미지게 봤습니다. 재미난 애니도 너무 많은데 능력이 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덴마>도 무척 좋아하는 데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ㅋㅋㅋ
아! 뭔가 만화애니비평님과 대화를 하니 이야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ㅋㅋ

만화애니비평 2016-06-03 18:49   좋아요 0 | URL
NHK 어서오세요. 저도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습니다. 동쪽의 에덴도 보고 심지어 리뷰까지!!! 했다죠. 나루토, 윈피스, 블리치 같은 전형적인 내러티브 요소를 가진 작품들은 안 좋아합니다. 너무 뻔하고, 우리는 착하고, 우리 편이 아닌 놈들은 나빠! 식만큼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없으니 말이죠.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에 매도되어 가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죠.

덕후분이 숨어 있다니. 저는 최근 애니메이션은 거의 다봅니다. 만화책은 공간이 없고, 애니메이션은 실시간으로 보고 가끔 리뷰도 적죠. 우후후훗~~

제법 만화책은 많이 아십니다. 슬램덩크 작가 이름까지 외우고 그의 작품까지 안다면 열정이 있네요. 좋은 알라딘 블로거를 알게 된 겁니다~앙..

추천도서를 지금 읽을 책들을 다 읽은 후 도서관에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한명명기 교수님 책 위주로 광해군-인조 시대 때 책을 읽는 중이라 말이죠.우후후

루쉰P 2016-06-03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ㅋㅋ 이거 덕후 인증 된건가요 ㅋㅋㅋㅋ 푸하하하

전 <NHk에 어서오세요>를 너무 감명 깊게 봐서, 원작 노벨 소설과 만화본까지 구해서 봣습니다. 그 작가의 세계관이 너무나 재밌어서 말이죠 ㅋ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작가는 후속작도 썼으나 그리 큰 평가를 받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ㅋ

맞습니다.<동쪽의 에덴>이죠!!! 제가 잘못 썼네요. 그 작품 역시 보고서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지 몰릅니다. 저 역시 너무 뻔한 만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후루야 미노루처럼 아예 병맛이거나 이노우에 타케히코처럼 아예 진지하게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 세계를 아시다시피 작품을 감싸는 것은 병맛 키워드 이지만 <심해어>나 그 이후 지금 작품들까지 보면 인간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고뇌하며 그리고 있습니다.

전 만화 역시 하나의 어떤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고 뭔가 아 정말 느낌이 오는 그 맛! 그것으로 확 감동 먹거든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 역시 그런 류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ㅎ

아 뭔가 덕후가 된 거 같아 뿌듯합니다. ㅋ 제 덕질이 다 의미가 있었네요 ㅋ 기회가 되시면 애니 리뷰도 손 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ㅎ
 
장르 만화의 세계 살림지식총서 120
박인하 지음 / 살림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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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가 논문을 정식 논문을 적어본 일을 생각하면 3번인 것 같았다. 첫 번째는 대학교 학부시절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것이 아니라 학과 자체적으로 실시한 세미나 발표를 위한 논문이었고, 두 번째 논문은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기 위한 논문이었다. 출신대학과 전공이 공과대학인 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논문의 주제가 다르더라도 기본적인 성향과 맥락은 서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다른 논문으로 되었다. 그 논문은 공학석사와 전혀 무관한 논문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2011년 작업한 이 논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중점으로 연구하고, 국내 각종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행사가 있을 경우 주관하고 운영하는 학회에 제출했다.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아마 학회 중에서 사람들에게 상당히 낯설고 신기한 학회가 아닌가 싶다. 가끔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로 통해 보면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있는 대학이나 고등학교가 있는 것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인지하는 반면, 학회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그 대부분 사람들이란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프레 등 한국에서 하위문화를 즐기는 부류다. 사실 이런 하위문화에 대한 연구가 1990년대부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국내 대학에서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과가 있다는 점에서 대중은 물론, 하위문화를 즐기는 사람들도 낯설어 한다.

 

그나마 최근에 TV에도 문화콘텐츠사업의 일환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인터넷에서도 마케팅전략으로서 웹툰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사용되기도 한다. 아마 그런 시대적 성향에서 가장 많이 개선한 것은 웹툰이 아닌가 싶다. 만화책이란 하나의 도서보단 인터넷으로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편리성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아니라면 웹툰이 일정기간에 작가가 인터넷 매체업체와 계약을 하여 작품을 올린 경우 수익을 얻는 점에서, 웹툰을 보는 독자나 인터넷 이용자들은 무료로 본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웹툰의 그런 특성 때문에 만화의 친화성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것은 웹툰의 성향을 고려하면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주제를 만들 수 있어도 우리나라 문화적 여건을 고려하면 다양한 작품이 나오더라도 다양한 장르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작품흐름 즉 Cliche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이다. 물론 문학과 영화 심지어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도 Cliche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Cliche 요소만 강조하는 것도 작품을 다양성을 떨어지게 만든다.

 

다양한 장르와 작품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가 필요한 점이다. 같은 연애물이라도 판타지나 전쟁, 정치, 사회적 문제 접근을 동시에 노릴 수도 있고, 학원물이라도 연애나 판타지 같은 것에 같이 만들어가기 보단 조금 더 순수하게 학원물로서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작품 내에 보이는 성향이 결국 대중의 입맛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작품이 대중의 입맛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경우 기존 작품과 다른 세계와 가치관으로 통해 제3세대 애니메이션 세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런 장르의 분류에서 내가 맨 처음에 제기한 논문 세 번째가 조금 생각난다. 당시 내가 제출한 논문은 최근 2010년 이후에 발매된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국내 애니메이션 수용자가 선호하는 특성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인터넷 카페에 최근 나온 애니메이션 몇 가지를 올려놓고 투표를 하여 어느 작품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작품은 특성은 무엇이고, 작품의 장르도 조사하는 내용이었다. 이때 선호도에 대한 연구이기에 장르의 분류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방영하는 사이트 내지 네이버 지식인에서 장르의 분류를 결정한 점에서 논문심사결과는 만족하지 못했다.

 

4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3명이 부동의이고, 1명은 부분 동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장르만화의 세계>를 읽어본 후에 조금 인용하여 작성했다면 약간 결과는 다르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2013년 BICOF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컴퍼런스 주제로서 장르 만화에 대한 발표가 있었는데, 발표하던 교수님의 파워포인트 강연과 그 주제에 대한 안내책자를 읽어보면서 박인하 교수님의 <장르만화의 세계>가 상당히 많이 인용된 것을 최근에 알았다. 만화의 장르를 나누고 결정하는 점에서 하나의 세분화를 만드는 것은 작가로서는 조금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으나, 만화의 장르를 조금 세분화 하는 점은 만화라는 것이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란 점이다.

 

가령 일본 만화책에서 닥터 노구치의 경우 일본 의사 노구치의 일생을 다룬 전기물이면서도 한편 의사라는 직업으로 통해 살아가는 노구치를 의학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는 초밥을 다루거나 음식을 다룬 작품이나, 보통 일반 대중들이 알 수 없는 전문분야를 작가가 작품 내의 주인공으로서 부드럽게 풀어가면서 이야기의 재미와 주제를 알리는 방법도 있다. 장르 만화의 효과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점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우리가 알기 어려운 부분이나 흥미로운 부분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 전에 내가 영화비평문으로 적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브의 시간>에서 이브라는 가게에 들어오는 로봇이 마치 인간처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 로봇에게는 인간과 같은 생명이 없으나, 그래도 로봇이기에 국가적으로 법률을 적용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로봇 법률”, 이 법의 조항에서 제1조는 “로봇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났다.”, 13조는 “로봇은 인간을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이다.

 

사실 <이브의 시간>에서도 로봇으로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로봇이 억지로 프로그램이 작성되어 실행하는 것보단 로봇 자체적인 판단과 감정으로서 실행하는 모습이 나온다. 주변에 존재하는 제도나 사물, 문화적인 조건도 장르만화에 차용될 수 있고, 그것이 하나의 작품의 진행에서 큰 전환점으로 될 수도 있다. 장르만화의 창작은 이야기 흥미를 유발시키면 무궁무진하게 진행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영화에서도 콘티가 필요하여 만화를 그릴 때가 있는데, 만화로 나온 그 작품 자체가 콘티가 될 수 있다.

 

장르만화는 단순히 만화로 머무는 게 아니라 허영만 화백의 <아스팔트 사나이> 내지 <식객>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레이스를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일반대중을 생각했을 때 조금 낯선 세계이고, <식객>의 경우 요리 자체가 인간 식생활과 연결되어 있으나, 요리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소재거리는 우리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특히 <타짜>와 같은 도박의 경우, 우리 일상생활에서 노출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든 점에서 흥미와 재미를 유발한다.

 

만화가 만화 안에서가 아니라 만화와 다른 매체나 문화의 접목은 만화가 가진 허구적 성향에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부여할 수 있다. 가령 <노다메 칸타빌레>과 같은 경우 클래식을 소재로, <신의 물방울>은 포도주를 소재로 했기에 작품의 이야기와 전개는 허구일지 몰라도 그 클래식 음악이나 포도주 자체는 실존하는 것을 차용했기에 키치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고, 또한 mania 세계에서 본다면 만화가 낯선 사람이라도 흥미를 유발하기가 좋다. 이전에 방영된 <이니셜 D>라는 만화책에서 나온 하치로쿠(86)라는 차량이 다시 자동차 회사에서 재생산되어 발매되는 점을 보면 장르만화가 판타지뿐만 아니라 현실적 요소를 잘 적용하여 일반 대중과의 교류나 정보제공에 큰 도움이 되는 점이다.

 

국내 만화책에 대해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중고등학생 위주의 청소년 내지 젊은 계층이 많이 찾는 점에서 학원물이 절대적으로 많이 나온다. 게다가 만화를 넘어 라이트노벨 시장이 일본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도 많은 라이트노벨 작가들이 나오는 점을 고려하면 장르만화는 만화책으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라이트노벨 시장까지 넘어보며, 만화와 라이트노벨을 각색하여 만든 애니메이션까지 염두를 두어야 한다.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의 박기수 교수님의 <애니메이션 서사구조와 전략>에서 강하게 지적한 것처럼 국내 만화애니메이션의 흥행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서사다. 서사의 탄탄한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으로서 가져야할 소재와 이야기 거리이다. 그런 점에서 장르만화는 국내에서 불황인 만화시장에서 조금 고려해야할 사항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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