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 휴 잭맨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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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의 상징성에서 보여주는 어두운 현실과 더불어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프랑스혁명을 찾아보면 총 5번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프랑스혁명은 1789년 7월 바스티유 감옥 함락과 더불어 앙시앵레짐(구체제)의 해체를 만든 프랑스대혁명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혁명은 더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일어난 것이 1830년, 이후가 1848년, 잔혹하고 안타까운 1871년 파리꼬뮌, 이후로 1968년 5월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사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사상과 20세기의 사상은 조금 차이가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혁명의 정신적 지주는 장 자크 루소였다면, 20세기의 프랑스혁명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승계자라고 보는 리오 담로시의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처럼 장 자크 루소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여와 더불어 프랑스라는 나라 그 존재성마저 기여한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영화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의 색에서 프랑스의 상징인 3가지 색이 블루, 화이트, 레드이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공화국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랑스공화국의 그 시초를 이룬 것은 역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이다. 이것을 읽지 않고 프랑스를 말하는 것조차가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삶의 철학까지 인간 그 자체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추구하기 위해 투쟁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그런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대한 투철한 반사의식이 보인다.

 

영화라는 2시간 조금 넘는 런닝타임에서 충분히 만끽할 수 없으나, 장발장이 감옥에 투옥되어 힘들게 살아온 것에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이미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불평등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다. 선천적인 것은 인종과 성별이란 생물학적 요소로 볼 수 있으나, 후천적인 요소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건 그리고 정치적 입장이다. 구체제에서 저술한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리고 이후에 나온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무척 위험한 도서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상에서 지금도 루소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루소가 물어보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비참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 레미제라블에서 레란 res라는 것으로 다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미제라블은 비참하다는 말이다. 레미제라블은 다시 비참해진다는 의미이다. 비참한 역사적 되풀이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역사는 2번 되풀이 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희극으로(소극으로), 희극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나, 루이 16세를 단두대 아래에서 하나를 이슬로 만들었던 프랑스가 다시 왕정군주제로 변모했다.

 

당초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하고, 국민공회를 설치하여 세계민주주의역사에서 큰 획을 긋은 자코뱅당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잠시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인해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죽음 이후 테르미도르당의 부패한 정치행위와 무능함은 결국 프랑스를 힘들게 만들었고,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루소에 대해 경배했거만, 추후에는 루소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레미제라블에서 황제가 있는 프랑스는 결국 나폴레옹이 집권시절이다.

 

그러나 주인공 장발장이 갇힌 것은 영화배경이 되는 1815년에서 19년 전에 잡힌 1796년이란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빵 하나를 훔친 것이 큰 죄가 된 것처럼 여전히 프랑스의 하층민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영웅에서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가 있으나, 결국 혁명의 원인은 대의를 가진 마리우스 같은 인물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빈곤한 농민과 피지배계층의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장발장이 가진 것은 처음에 오로지 분노였으나, 어느 성당의 신부님의 구원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도시의 시장이었고, 탁원한 공장의 운영자였다. 만약 신부님의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계속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혁명 시기나 혹은 장 자크 루소의 관련 서적을 봐도 프랑스 성직자의 부패와 비리는 여전했다는 점이다. 신의 운명에 점찍어 모든 것을 정하는 방식이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신의 은총을 내린 것은 장발장과 코제트, 마리우스라는 일부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든 소설이나 주인공 위주 서사는 결국 주인공만을 보게 되는 한계점에서 주변 인물의 운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한계성이 있다. 그래도 영화는 충실하게 그 비참한 서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일반적인 대사보다 오페라 내지 뮤지컬적인 요소로 통해 감정의 기복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에서 그런 진지한 요소는 처음에 장발장이 노예로서 죄수생활을 할 때 24601번으로 가석방 나오는 모습이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에게 깃발을 들고 오라고 한다. 깃발은 프랑스의 삼색기, 마지막에 장발장이 죽고 나서 그의 꿈은 역시 삼색기가 흔들리는 광장이다.

 

자유, 평등, 박애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릐메르 18일>처럼 공화국의 상징은 보평, 포병, 기병에 의해 무참히 밟힌다. 그래도 붉은 색의 깃발은 잊을 수가 없다. 검고 어두운 불운한 현실에서 붉은 색의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색이란 영화 중간에 혁명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들의 붉은 눈물처럼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나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들은 총과 칼을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 혁명의 기본적 문제에서 장발장과 코제트의 어머니 판틴처럼 그들은 현실이 아닌 미래를 잡아가길 원한 것이다.

 

장발장은 자기의 어린 조카가 굶주려서 빵을 훔쳤으나, 결국 수감되고, 조카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판틴은 어린 코제트를 살리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몸을 팔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그리고 비참한 인생의 종말은 죽음이었다. 희망이란 단어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박애정신만큼 위대한 정신이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에서는 개인적인 부분에서 존재할 수 있으나, 프랑스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가 군중에게 외친 것처럼 자유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유가 있어야지 자신의 자유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자유란 결국 박애정신이 되는 것이다. 마리우스 친구가 그렇게 죽어갔으나 삼색기와 더불어 붉은 색의 깃발을 흔든 것은 박애정신이다. 그 박애정신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냉혹한 자베르 경감마저 경의로서 자신의 훈장을 어린 소년에게 바친다. 그 소년의 모습이 동서출판사에 나온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서적표지와 어울리지 않은가?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틀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결국 1830년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혁명 이후 사라지는 별들이었으나, 위대한 민중들의 의지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레미제라블은 소설이므로 배경은 1832년으로 되어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바리케이트 너머라는 웅장한 노래처럼 그 너머를 향해 죽음이란 것을 택한 이들의 절대적 신념에 그저 가슴이 쓰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 친구들은 모두 죽으나, 마리우스가 장발장에 의해 구출되고, 후에 코제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문제는 마리우스는 귀족의 집안이란 점에서 프랑스혁명가로서 마리우스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남자인 마리우스만 성공한다. 영화에서 혁명은 실패해도 사랑은 성공했다는 스토리라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판틴이 죽어가는 장발장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에서 장발장의 영혼은 사랑에 대한 노래에서 혁명을 일으킨 민중들의 노래와 합류한다.

 

어찌보면 지금은 구체제에 순응할 수 없는 코제트(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와 마리우스이나, 언제가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것을 모두에게 전해주는 박애정신이 넘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후 제일 비참한 1871년 파리꼬뮌에서는 당시 몇 만명이 넘는 파리시민이 싸우다 전사하고, 포로로 잡혀도 살해당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3세는 결국 파리시민을 무참하게도 배반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잔혹하고 급박했을까? 13~14세 소년소녀들이 총과 대포를 나르고, 팔이 하나 없어져도 저항하는 모습이 나온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 코제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반복되는 구슬픈 이야기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게 아니라 죄를 계속 만들 수밖에 없는 비참한 환경을 말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을 무조건 지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역사의 뿌리인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3가지 체계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서 입법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오로지 잘못된 법을 바꾸는 것은 입법에서 가능하고, 민주주의는 입법에서 시작하는 점에서 말이다. 입법에서 잘못된 관례나 법규를 바꾸고 새로운 제도는 정비하는 것은 법이란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국가의 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한 것은 법이란 결국 힘이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 점이다. 자베르에게 자비를 베푼 장발장에서 민주주의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나, 그것의 기반은 박애정신이다. 자베르 경감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만의 정의라는 법이 결국 박애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처음 자베르경감이 장발장을 그저 죄인으로 보았을 뿐이었으나, 장발장이 누구보다 더 박애정신이 넘치는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죄인으로 보자니 그에게 받은 자비는 자신의 양심을 찌르고, 그를 인정하자니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존재적 의미에서 모순을 겪는다. 2명이 존재할 수 없다면 1명은 물러나야 한다. 결국 자베르경감은 자신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신이 주는 정의가 법인 자베르경감, 신이 주는 정의는 결국 사랑이란 장발장에서 현실은 자베르경감에 가까우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장발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쉽지 않다. 낭만주의 문학인 점에서 낭만주의란 목숨을 걸고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주인공에게 펼쳐진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 되는 소극이 된다. 물론 소극에서 당하는 자들은 비극이나 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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