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건달 (1disc)
조진규 감독, 박신양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의 저급한 3류틱한 조폭영화라는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3류 이상의 재미있는 요소와 학술적인 요소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론적인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점은 역시 3류는 그렇고 2류에 머물고 2류 중에서도 약간 떨어지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보이는 중요한 요소는 분명 있다. 그것은 건달이 하고 있는 박수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 고전이나 혹은 주요한 전통문화를 찾아가면 무속신앙에 대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神壇樹(신단수)라는 것에서 신단에 해당되는 나무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박달나무는 檀이란 단자이고, 한국의 최초 국가라는 고조선을 건립한 단군의 단자가 바로 박달나무이다. 그래서 한국의 최초의 왕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무당의 의미에서 현대에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나 미신의 세계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이유는 그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신앙 내지 문화에서 우리민족의 자화상 내지 존재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0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분으로 그의 저서인 <슬픈열대>와 더불어 명작인 <야생의 사고>를 읽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야만인을 대하는 어리석은 문명의 야만을 반성해야 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야만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 우리 문명인들은 알 수 없는 미스테리 내지 혹은 미신 내지 미개한 문화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오랫동안 살아온 문화의 소산이다.

 

오히려 야생의 사고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문명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도리어 미개인들이 훨씬 웃돌고 있을 수 있다. 린네가 발견한 식물분류법보다 더 세분화된 지식으로 알아보는 원주민들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원주민에서 문명의 식물학자와 원주민 중에서 누가 식물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으로 원주민들의 에믹의 요소보단 에틱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화유물론적인 요소에서도 물질이 문화를 구성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연적, 지리적, 기후적인 요소로서 문화를 이룩한 것이다.

 

박수건달이란 영화로 돌아보면 한국의 문화적, 자연적, 지리적 특성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박신양 씨는 작품에서 조폭건달로 나온다. 그런 그가 무병에 걸려 무당이 되는 것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부산의 어느 어촌마을의 어항을 이전하여 그 자리에 큰 건물을 세울 계획을 세운다. 지금도 부산의 어항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모여 용왕제를 열고 한다. 용왕제에 무당을 부르고 어민과 마을주민이 모여 한데 어울려 술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민중문화에서 굿이란 하나의 문화는 공동체적인 문화형성과 더불어 집단의 공동체 정신을 재확인 후에 더 견고하게 다지는 계기라는 것이다.

 

굿이란 것과 혹은 제사를 지낸 이유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무속신앙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이다. 위로를 하는 대상이 죽은 자에 대한 위로가 결국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인 것이다. 제사문화에서 한국의 정신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정신이다. 그런다고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아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그 소수의 부족과 씨족 혹은 마을주민이 어울리는 작은 공동체로 이루기 때문이다. 박수건달에서 무당이란 자는 결국 그런 의식행사를 진행하고 만들어주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제사장과 더불어 임금이란 군장을 맡는다. 그가 왕으로서 제정일치를 추구한 것은 왕권이 결국 주종관계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오이디푸스(거세공포와 더불어 죽은 아버지 죽음에 대한 위로와 슬픔, 살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적인 부자관계로서 국가와 부족을 이끈다. 기본적으로 한국이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고, 어민이라고 해도 100% 물고기를 잡지만은 않았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가축도 기른다. 농경문화의 자급자족인 생활요소가 결국 공동체의식을 키운 것이다.

 

놀이라는 문화가 노동이 수반되기에 특히 농민과 더불어 어민도 민요를 부르며 고기를 낚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기계의 발달로 좋은 장비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도, 결국 여러 사람들이 많은 배를 동원하여 집단으로 고기를 낚는 방법도 존재하고, 바다에 나가면 풍랑과 재해로 사고를 당할 수 있으므로 서로간의 연락망을 항시 유지하고, 그것을 위해 친분을 유지한다. 그래서 용왕제 굿판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좋은 볼거리라는 점이다. 작중에서 박신양 씨도 박수건달이 되어 최종적인 위기 전편이 굿판의 모험이다.

 

오이가 위에 떨어지는 바로 두 동강이 나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역에서 위기에 봉착하나, 무당의 신기로 그 위기를 모면한다. 현대과학기술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것이 칼 위에서의 무당의 춤이다. 본래 무당이란 용어에서 샤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샤먼은 미친듯이 춤을 추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초자아적인 세계에 보이는 현실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무당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망정, 그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인은 2가지로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하여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정이 있다. 그런 무의식적인 불안과 고민이 무당의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혼의 존재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기적의 이야기는 신화와 설화로서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당의 문제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그런 욕망의 대변인이란 점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또한 개인 대 개인으로서 보자면 어느 개인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주는 존재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우리 현대인이나 과거에 살던 사람이나 정신적 불안을 영원히 떨친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문명이 시작된 이래 말이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처럼 중세시대 유럽시대에 광인들이 나오면 그들을 분리하거나 제거하거나 혹은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억압이나 혹은 표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정신병원이 생긴 이래로 그런 자들은 더 이상 거리를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광인 중에서 물이 어는 추운 날에도 덥다는 말을 하고 속옷만 입는 자도 있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모두 무시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당 역시 현대에서 보면 그저 굿만 하고, 점만 치는 사람으로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에서 진정 무당의 존재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건달이고, 무당 남성은 박수라고 하기에 박수건달이란 작명은 분명 어울린다. 박신양 씨가 하는 행동을 보면 죽은 자가 빙의하여 살아있는 자를 만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살아있는 자가 안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억압되어 그것이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말을 표출하게 하거나 혹은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마음의 병이 있는 인물들은 박신양 씨의 이야기에 모두 울고 통곡을 한다. 하지만 박수건달인 박신양 씨도 같이 울고 통곡을 한다. 무당이란 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가는 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은 무의식적 공간에 깊숙하게 들어가 공유하는 자라는 것이다. 박수건달에서 보이는 한국인의 恨이란 것으로 통해 원래는 무속문화가 인간을 넓리 이롭게 하는 단군신앙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시작되나, 현실은 그저 자기만족에 취하려는 고객과 더불어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이 존재하는 게 대부분이다.

 

구복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무속신앙의 한계점이고, 지금은 기독교, 불교, 수많은 종교들이 대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천주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란 존재로 통해 넓리 사랑을 전파하는 박애사상이나, 혹은 불교의 부처님이 자비로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박애정신에서 종교의 시작과 교리 및 기타 문화적 조건을 달라도 철학적 베이스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급격하게 신격화 된다. 보살과 부처를 모신 무당의 집에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도 영원하다고 하여 그 무당은 예수님의 조각상을 보살과 부처님과 같이 모셨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살과 부처 이전에 무속신앙은 도교신앙과 결합하여 장군상과 신선, 동자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은 자신(들)만이 가지는 불안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미신이라 여기는 무속인에게 간다. 그리고 진짜 무속인을 만나면 그들은 울고웃고, 그저그런 무속인을 만나면 웃거나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박수건달이란 영화는 진짜 무당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항을 개발하려고 조폭을 투입하여 이전하고, 그러기 위해 굿을 했다는 점은 폭력조직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힘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래서 <박수건달>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재밌게 다른 점은 높게 인정하나, 그 전개가 한계라는 점이다.

 

집필시간 :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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