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작성 글이지만, 2014년에도 유효한 것은 인간이 신화적 욕망을 탐하기 때문이죠.
안철수의 이름을 모르는 이 한국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안철수에 대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가 제조한 V3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은 모든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대국민적인 서비스를 안내해주고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이면서 의사이면서 매우 뛰어난 엘리트다.
그가 보여준 경력이나 지식을 보자면 대한민국에서 당연 손꼽을 인물이다. 그런 만큼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번 안철수 대선문제에 대해 나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이때까지 대통령으로 간다고 말한 적도 없으며, 딱히 정치를 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대신 그가 저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간 변호사 박원순 씨의 지지를 선고하는 바람에 그의 정치적 위치가 드러났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에도 대통령으로부터 정보통신부 장관의 자리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들었다. 그런 만큼 여태까지 정치에 대해 딱히 큰 입장을 보이지 않은 안철수가 작년에 서울시장의 여세에선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 이후 한국에는 4월 총선과 더불어 5년마다 큰 변화를 주는 대선이 눈앞에 두고 있다. 그가 대선으로 가는 길에 큰 딜레마로서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고로 나는 안철수의 생각을 읽어보지 않았다(2013년에 읽어봤습니다. 글쓴 기준이 2012년입니다). 단지 안철수의 생각이란 도서를 본 사람들의 글을 보았다. 정치적 내 입장에선 참여정부에 가깝지만, 적어도 참여정부 편이라고 하여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치에선 모든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것을 잡는가에서 정치적 판단이 달라진다. 안철수의 생각이 읽든 안 읽든 굳이 읽지 않아도 그의 서적이 말하고픈 것은 대략 짐작한다.
그것은 기존 한국 정치의 낡은 관행과 더불어 어려운 경제상황,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입장을 밝힌 도서다. 어떤 인물들이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내놓는데 있어서 현실 비판과 미래 대안을 추구하지 않겠는가?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읽지 않아도 그의 생각은 기존 한국 정치사회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것이다. 적어도 보통 사람 이상으로 이성적 능력이 탁월한 자라면 그런 서적은 충분히 만들고도 남는다.
한 주에 도서사이트에 가보면 정치사회 관련 도서가 수십 권 씩 쏟아진다. 사람들이 그런 책들을 찾아 너나 나나 할 것이 찾아보나, 그들에게 그 책들을 읽으면 그저 동의만 할 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그 생각은 쉬워도 그 실행은 어렵다. 안철수의 행보나 업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철수가 설사 대통령이 된다고 하던지 혹은 그 누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던지 대통령 이전에 생각하거나 계획하던 일들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화장실 나올 때와 들어갈 때와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변수가 생기는데, 국가라는 조직은 거대한 조직과 조직, 사회와 사회, 단체와 단체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외교의 여파는 상당히 민감하다. 미국과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동맹을 기본에다가 일본과 중국은 무역과 문화교류에서 매우 중요하며, 게다가 유럽사회와 소통도 중요하다.
오히려 그런 세계적인 흐름과 국내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우월한 자만이 대통령의 자리로 빛날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치100단이나 정치학은 노란 띠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치학은 정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철학, 문학,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등등 수많은 학문을 토대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이 서구사회의 문물을 받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도 그 미국이란 국가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 속에서 모순도 모르며,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아직도 자유와 평등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모순도 모른다.
한 마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쇼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관심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계몽적인 이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심리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신화적 존재로 형성된다. 안철수란 인물은 바로 그 신화의 인물이다. 신화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이 새로이 재생산 되는 것이다. 신화의 존재는 항상 억압과 욕망, 그리고 합리주의와 공리주의를 추구한다. 대신 그것에는 윤리나 이성은 없다.
본래 신화의 세계에는 비합리적 상황에서 인물들이 합리적으로 해결하고도 다시 비합리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길거리에서 어느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내는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그때 자신의 친부인 라이오스가 있었다. 또한 테베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스핑크스를 물리쳤지만, 그 과업의 대가는 테베의 왕녀와 결혼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오카스테였고, 오이디푸스의 친모였다.
이른바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인류의 죄악에서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합리를 추구했으나, 결국 비합리적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의 자식 4명 중에 2명의 아들은 서로 싸우다가 죽었고, 그의 딸인 안티고네 역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한탄하며, 죽기 전 두 눈을 칼로 찔러 장님이 되는데, 장님이 되는 것은 결국 보는 것은 중지하고, 듣는 것만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각과 청각 중에서 이성 판단력에 큰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눈이다. 눈으로 통해 사물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귀로 듣는 청각은 뇌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자극하기 쉽다. 결국 눈이라는 것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의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이성이란 예전처럼 합리와 비합리로 구분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난잡해졌다.
인간의 눈이 가진 한계가 바로 착시현상이 존재하며, 가상과 현실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이른바 hyper-reality 극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령 실제로 범죄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는데도 언론에서 마치 사회 위험분자로 몰아 그 사람들을 사회적 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이런 행위들은 독재국가와 부패언론의 조합으로 많은 사례가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가 가진 눈이 TV나 신문으로 간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로 이성적 판단력으로 연계되는가는 미지수란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책만 듣고, 그 입장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인 etic에서 사람들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 정치적 입장과 사회과학적인 분별력, 인간의 의식을 알 수 있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없다면 어느 것이 진짜 현실성이 있는지 그 주장이 올바른지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안철수의 책에서는 그런 좋은 내용이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이 진실로 객관적 분석을 하는 행동인 emic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분명히 안철수 원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나,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위치로서는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낸 것도 아니고, 사회유명인사가 유명인물을 만나 이야기하거나 사회적 약자를 만나 소통을 하거나 또는 정치적 쓴 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대통령의 선택이라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이때까지 단 1번도 출마선언을 하지 않았다. 단지 주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국민들이 대통령을 하겠는데 라고 말할 뿐이다.
그 심리적인 상황을 보면 상당히 신화적인 것이다. 왜 안철수에게 신화가 몰리는 것일까? 인간은 언제나 위기나 상황이 닥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그 자유로움에서 책임의 회피를 꿈꾸는 도피의식까지 연결된다. 즉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데, 그 정의를 대신할 존재가 필요하고, 그 대상자가 잘 못될 경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취소하는 최선의 수단을 가진 것이다.
이때까지 국민들의 선거를 본다면 그것이 과연 이성과 합리적 판단에서 나온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전반을 위한 공리주의와 공공선의 추구인가? 라는 질문에서 그렇게 한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후보자들의 정책들에 대해 과학적 기준으로 보거나 합리적 의문을 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사람들의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한다. 그 합리(合理)적 요소는 이성적인 요건의 합리가 아니라 합리(合利)에 의해서다. 결국 이익에 따른 것이고, 그 이익은 정말 자신의 생활주변의 혜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익, 즉 자기만족이다.
그 자기만족은 심리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투표이다. 정치라는 것에서 이성적인 영역은 오로지 그리스 폴리스국가일 때만 가능했다. 하지만 그때는 단 10%의 성인남성만 가능한 제한적 직접민주주의였으며, 다르게 보면 귀족민주주의다. 그 뒤에 노예에 대한 학대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결코 윤리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국민을 토대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미국에 다녀오면서 토크빌의 책을 읽은 것처럼, 오히려 국민 대부분의 정치참여가 오히려 대중의 폭력성을 정치에 반영한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들이 합리적이라 여기나, 그 합리는 결코 합리적이지 못했다. 단지 자신을 합리적으로 만들어줄 뿐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비합리적 판단들이 합리적으로 변하는 순간 오이디푸스가 처한 신화의 세계에 이끌려간다. 결국 신화에서 비합리와 합리에서 어긋난 비합리가 합리로 변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합리를 삭제 내지 제거해야 한다. 사람을 치면 죽음이란 점이다. 광기라는 것은 결국 문명을 이루어온 인간의 비합리를 합리로 바꾸어온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번 안철수와 관련하여 대통령 출마할 경우 비밀을 폭로한다는 사실 역시 그런 신화의 연쇄에 맺힌 하나의 스캔들이다. 아직 결정된 바도 없이 자세를 유지하는 안철수 진영에 대한 비합리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합리를 추구했다. 안철수 측의 금태섭 변호사가 발표하고, 박근혜 측의 정준길 공보의원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 협박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상대방에게 그런 협박을 했다는 자체는 크나큰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이며, 만약 친구간의 농담이라고 한다면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그렇게 친구로서 대화라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어불성설이다.
만약 진짜 그것이 정준길 공보위원의 친구로서 농담이라면, 바로 공보위원 자리에서 물릴 이유는 없다. 이 또한 신화의 탄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화라는 서사는 희생제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한국의 무속신화(巫俗神話)는 단순히 무속(巫俗)이란 전통사회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차라리 오늘까지 이어오는 공시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신화의 영속성에서 가능한 것은 인간의 욕망과 억압과 해방의 미학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신화에서 누군가로 통해 이익을 보려는 개인이기주의의 집단화로 이어진다. 공리주의와 합리주의가 민주주의 사회에 근거가 된다고 하나, 그 이면에는 소수약자의 희생과 외면이란 하나의 희생제의가 따른다. 남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올라가는 신화적 욕망에서 그 희생의 주체자가 반사이익을 꾸준히 누리던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왜 조선 개국공신들을 태종 이방원이 주도 아래 죽어가야 했을까?
그들은 이성계를 도와 고려무신인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를 멸망하게 했다. 고려라는 아버지를 조선이란 아들이 거세한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성계의 주변 인물들은 태종의 정치권력과 그의 아들 세종에게 큰 벽이었던 것이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아버지에 대한 살해성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세종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었다. 아들이 거세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 충성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아버지에 대한 권위가 흔들릴 경우 다른 아들들이 위험에 빠지면 누군가를 희생을 내야 한다.
그 희생자는 온갖 비난과 비방, 의혹과 불문을 품고 정치의 뒤 무대로 사라진다. 그런다고 희생자가 모든 것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화제의에서 희생을 선택한 바리데기는 죽어가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은 후에 신이 되었다. 신화란 희생과 더불어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신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날 길은 계몽이나,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계몽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깨어나기이나, 한국에서는 억지로 주입하는 억압에 의해 신화가 깨어지고, 또 다른 신화로 메워진다. 안철수가 신화적 존재가 되는 것은 과연 누구 덕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