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원본과 사본의 차이가 없는 오히려 사본이 원본보다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그런 점에서 sub-culture에서 코스튬 플레이 문화는 원본이 사본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코스프레 다이어리>의 저자이면서도 아주 유명한 코스튬 플레이어인 키르아라는 사람을 보자. 그 사람의 본명은 박유송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순간 키르아라는 존재로서 연기하는 것이지 결코 박유송으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 연기 대상이 헌터헌터X에 나오는 캐릭터(키르아라는 이름이 여기서 연유)가 아니라 다른 캐릭터로 된다.

 

 

그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와 아스카가 될 수 있고, 마르크스의 란카나 쉐릴이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보면 실존적인 이름과 지어낸 가명이 실제적으로 코스튬 하는 시기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그 캐릭터라는 존재만이 여기에 존재한다. 그래서 코스튬 플레이야 말로 최근 한국에서 담론하려는 pata-phycisc와 가장 가까울 것이다. pata란 것은 meta 뒤에 나오는 것이다. 즉 mata-physics란 형이상학이란 것이다. 물리적인 피직스 너머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은 것인가?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 화학식에서 H20 구조를 가진 물을 실제로 수소와 산소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보통 공유결합과 다른 구조로서 물은 연결되어 있다. 물은 그저 물리적으로 보면 액체로 되어 있어 있고, 인간의 신체비율에서 약 70%에 가까운 물질이다. 그러나 물 안에 산소와 수소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안 것은 오래 되지 않은 사실이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더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산소와 수소는 전자와 중성자, 양성자와 같은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미립자 역시 또 다른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meta-physics로 본다면 과학은 고대에서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관계이나, 현대로 오면서 과학기술은 오히려 그것을 내파 즉 경계를 없앴다. 생물학에서 인간의 피부에 조직이 있고 세포가 있고, 세포 안에 핵이 있으며, 핵조차도 산소, 질소, 인, 탄소와 같은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meta-physics는 과학기술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고 meta-physics에서 철학 역시 시대적으로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역시 철학 서적이다.

 

 

코스튬 플레이와 meta-physics의 관계의 해석에서 코스튬 하는 대상이 현실 속의 존재가 아니라 가상 속의 존재이다. 그러나 가상이기에 그 너머에 있는 존재가 현실에서 현상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오로지 구현하는 것은 이미지의 연출이었다. 가령 고대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는 그림이나 혹은 지금 moe라고 하는 자신(들)만이 원하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상상의 대상을 그려 넣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욕망을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을 타인이 욕망하는 것이란 점이다.

 

 

코스튬 플레이가 왜 pata-physics 적인가? 그것은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현실에 존재할리 없는 존재가 존재해야 한다. 시뮬라크르 세계의 존재가 다시 현실에서도 시뮬라크르로서 재현되고, 심지어 그것을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으면 다시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은 본인인가? 아니면 본인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보면 실존적으로 본인이나 본인이 아니다. 분명 박유송이란 사람이 쉐릴을 연기하면 그것은 쉐릴이 되기 위함이지 박유송이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pata-physics의 코스튬 플레이 세계라도 결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함투성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sub-culture에서 코스튬만큼 놀이에 가까운 문화가 없다. 예술이란 것은 하나의 상징적 요소를 부여받기에 하나의 숭고함을 지니게 된다. 숭고함에서 인간은 자신을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집단의 가치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거대한 조류에 저항하기 위해 아방가르드란 반-예술이 태어났으나, 그것 역시 대중들에 의해 그저 대중문화로 소비되던지 혹은 숭고함을 부여받아야 했다. 

 

코스튬 문화에서 인간은 항상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고,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구조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소비문화가 맞물리게 된다. 지금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코스튬 자체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디메이드처럼 되었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을 보면 웃기기 그지 없다.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을 했는데, 그것을 예술품이라 올려놓다가 큰 소동이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방가르드 예술과 네오-다다에서 중요한 요건이 된다. 공장에서 찍은 생산품이 오히려 인간에게 가장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ART라는 예술은 상징적 요소로 보기보단 고대 그리스에선 하나의 테크닉인 기술이다. 과학적 실용성에서 오히려 예술이란 장인적 면모를 보았다.

 

 

생각해보면 고대시대의 예술품은 왠지 모르게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주로 실질적으로 왕이나 관료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또는 전장에서 휘두르는 칼과 방패 등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가끔 고대 내지 중세의 갑주나 칼, 방패가 발견되면 상당한 가치를 받는다. 당시로서는 그것은 장인이 만들어낸 생존의 도구다. 기사가 전장에서 죽지 않으려면 왜만한 무기에 견딜 수 있는 방패와 갑주가 필요하고, 적을 빨리 죽이기 위해서는 좋은 칼이 필요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장인이란 존재는 없고 공장이 등장한다. 1차 산업인 농업사회는 인간이 직접 수공예로서 생산했다면 2차 산업은 공장에서 돌아가고, 3차 산업인 정보화 시대는 2차 산업의 기반으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공장에서 나온 변기가 가장 흔해서 너무 잘 사용해도 고대 그리스처럼 인정받지 못할 물건이 되었다. 아마 고대 그리스에선 변기 하나도 장인이 손수 제작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공장에 나온 물건을 기술자가 그저 시멘트와 모르타르로 연결할 뿐이다.

 

 

똑같은 모습들이 나오니 그 차이점은 없다. 단지 차이점은 변기가격이 얼마나 비싼가? 혹은 얼마나 디자인에 신경 쓰고 있는가이다. 내가 이런 샘이란 주제로 코스튬 문화와 접목하는 이유는 지금의 코스튬 문화는 레디메이드의 천지이다. 인간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존재는 아니나, 현대사회의 인간은 직접적으로 조우하기보단 다른 방식으로 조우한다. 그것은 생산과 소비양식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인간의 거래관계에서 물물교환이 아니라 자본을 통한 매개교환이다.

 

 

즉 화폐가 매개로 되어 인간의 가치를 나누는 것이다. 코스튬 문화에서 가장 악질적 부분이면서 한편으로 발전적으로 되는 부분이 바로 금전적인 투자이다. 코스튬의 질적 가치가 가끔 자본력이란 사실이 불편한 문제를 일으킨다. 자본력이란 사실만으로 문화가 물화되어 버린다. 물화되어 버린 인간관계에서 코스튬의 가치가 자본력이 되는 점은 코스튬 플레이어의 의상과 사진가의 사진기가 되어버린다. 물론 도구의 능력은 기계적 성능에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나 물화되어버린 관계는 분명한 것이다.

 

 

다시 레디메이드로 가보자. 코믹행사에 가면 너무 똑같은 존재가 많다. 마치 공장에서 찍은 옷을 입은 사람이 레디 메이드처럼 보인다. 단지 차이는 마르셀 뒤샹이 어느 변기에 서명을 함으로서 <샘>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서명을 부여받은 사람, 즉 자신의 아이디나 존재적 각인을 부여받은 인정받게 된다. 똑같은 모습과 의상이니 결국 차이점은 외모이다. 따라서 바비 인형에 가까운 존재일수록 가치를 부여받는다. 바비 인형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을 타자가 명령하는 것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멈춰있는 것처럼 큰 감화가 없다. 코스튬에서 플레이어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상이지, 그 대상의 겉만 묘사하고 일정한 주문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라 미적 감각을 판단하는 경우 외재적 미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외재적 미와 더불어 내재적 미가 공유하지 않으면 그것은 미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다.

 

 

너무 같은 존재들이 넘치면 인간의 시야에선 결국 외재적 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노출되고, 결국 외재적 미를 가진 자들이 레디메이드 세계에서 우위를 점지한다. 문제는 점지하더라도 같은 느낌만 나온다는 점이다. 만약 다른 역할의 부여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meta-physics에서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인상만 주지 않는다. 남에게 보기 좋은 떡만 찾는 것은 한계가 오는 점이다.

 

 

미의 미학이 아닌 추의 미학을 조금씩 건드려 보는 점에서 다양한 개성이 나온다. 혹은 기존의 모던의 미, 즉 일정한 요건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포스트모던의 미인 자신의 개인적 연출로 통해 새로운 연출이 좋은 연출인 것이다. 레디 메이드적인 연출은 개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죽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코스튬은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존재를 현실이고자 하는 pata-physics적인 놀이다. 즉 상상력이 우선이 되는 놀이라는 점이다. 상상력이야 말로 미래의 윤리학이란 것처럼 상상력을 죽이는 코스튬 문화는 인간의 개성을 죽이는 것에 동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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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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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이 책을 본 후에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나는 그다지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고, 게다가 소설 중에서 추리물은 더 읽지 않는다. 추리물이란 탐정물 내지 성룡이란 유명한 배우가 연기한 <폴리스스토리>라는 영화도 있다시피 결국 범인이 잡히든지 안 잡히든지 혹은 경찰이나 탐정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추리물이나 심리적인 요소가 강한 경찰이야기란 패턴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와 같은 것은 오히려 범인이 가려진 것보다 범인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범인이란 존재가 원래 있음으로 하여 범인 자체에 타켓을 맞추는 설정에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벽을 놓치게 된다. 이전에 우로부치 겐이란 아주 실력 좋은 소설가 겸 각본가의 명작인 <psycho-pass>를 보는 순간 말이다. 작품 내의 범인은 정신분석적인 스캐너에 의해 돌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위험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살인을 하고, 그 살인은 충동적이기보단 하나의 이성적인 자유에 의해서 실행된다. 자유라는 이성의 절대적인 의지는 결국 자유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진행되어 그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인 반응 내지 혹은 순간적인 행동은 결국 하나의 미학을 관찰할 수 없다. 미학적인 요소에서 이성이란 광기로 통해 하나의 승화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죄 없는 여자의 목의 대동맥을 베고, 그것도 모자라 살인을 옆에서 시키려는 그의 범죄가 말이다. 스노우맨도 마찬가지다. 스노우맨의 범죄는 상당히 미묘하다. 한국과 같이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보다는 포괄적 자유주의에서 더 나아가 한국식 자유주의가 존재한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아주 적합하더라도 솔직히 개인의 자유권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한국식 자유주의는 옆에서 오덕질을 하거나 코스프레를 하면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을 할 수 있는 신기한 자유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대다수 남들이 어느 특정인을 신나게 깔보고 놀릴 수 있는 자유를 말이다. 따라서 <스노우맨>에서의 한국식 자유주의는 참으로 어렵다. 근본적 이유를 생각하면 소설을 종점이 되어 다시 의미를 찾아가면 안다.

 

예전에 이슬람 문화권에서 어느 여자가 다른 남자와 풍문이 돌아 그 집안에서는 명예살인을 거행했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보면 남편 잃은 여편네에게 자살을 권고하여 열녀탄생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스노우맨>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당신의 아이에게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가 진짜 친부일 가능성은 15~20%일 것이다! 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친자소송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피가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저기 15~20%를 지나 0.15~0.2%도 힘들 것이다. 나하고 결혼하기 전에 어느 인간에게 그 다리를 벌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스운 사실은 내가 다른 여자의 다리에 들어가도 오케인 게 수컷의 본능이고, 남이 오는 것은 싫은 것 역시 수컷의 욕심이다. 소설에서 물범인가? 바다에 사는 포유류 육식동물이 자신의 새끼를 출산한 암컷을 죽이는 이유가 바로 암컷이 또 다른 수컷이란 교미를 한다는 점이다. 내 옆에 생물학 석사를 졸업한 동료를 입을 빌리자면, 인간도 역시 동물적 기관을 지니기에 동물이나 짐승이나 남자들은 같다고 한다. 단지 그 같다는 점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불안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에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나, 이성의 자유에서 이성 자체가 완벽한 이성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 중에 속한 것이다. 인간의 질투가 정당한 진리와 정의로서 철퇴를 내린다. 정의의 칼을 외치는 영화나 만화에서는 가능하나, 현실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최악의 쓰레기들이다. 그런 점에서 <스노우맨>은 최악의 쓰레기가 가장 도덕군자인척 하여 더러운 짓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버럴 잡지 사장놈이나 혹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른 남자하고 성행위로 자신이 태어난 이유로 살인마가 되는 합리적인 정신병자도 말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납득을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분리된 존재이나, 아들과 어머니는 본래 함께인 존재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였던 존재에 대한 배신과 분노에 모자라 자신에게 쏟아진 신체적 낙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책에서 정말 북유럽은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참으로 남자나 여자나 가볍게 성행위를 하고, 파티에서 그냥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와서 대화를 나누고, 여자가 남자 허벅지를 만진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이 소설은 한국의 정서에서 동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이를 죽일 생각도 없이 오히려 잘 키운다. 한국이라면 아마 낙태하거나 고아원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시점으로 따라가면 아마 Sex는 자유롭게 그러나 태어나는 애들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요나스의 아버지에서 요나스가 남의 씨앗으로 태어났으나, 그래도 요나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으로 키울 것을 맹세한다. 한국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보면 가치관이란 기준에서 한국은 가족을 혈연이라면 유럽은 친분인 것이 강할 것 같다.

 

이혼과 재혼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여자에게 사회적인 불리함도 없고, 남자도 아이가 있는 여자와 만나 그 여자의 아이들까지 같이 놀거나 친하게 지낸다. 작가 본래가 개방적인 인물인가?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음악적 지식이 필요하다. 슬립 낫이란 이름이 나올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LA메탈밴드에서 Gun's & Roses 멤버인 기타리스트 건이 속한 밴드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거기에 슬레이어 같은 스래쉬메탈, 레드제플린과 같은 브리티쉬하드락을 듣지 못한다면 그 느낌을 모른다.

 

섹시한 몸매를 지닌 카트리네 경관이 짝 달라붙는 가죽의상에서 스모키한 화장을 한 것을 보면 작가가 좋아하는 여자스타일이 그 경관이 분명하다. 물론 나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개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나름 지성을 갖춘 사람이기에 지성과 개성을 다 재미있게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가 뮤지션이고, 게다가 글을 보면 미국의 부시나 레이건을 싫어하는 느낌이 강하다. 1980년이나 혹은 2004년 부시나 레이건 대통령 당선을 왜 그렇게 왜치는가?

 

어째든 <스노우맨>은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추리적 요소에서 과학적 근거를 많이 인용한다. 어느 탐정물도 그러하나 사람의 혈액과 정액 그리고 타액들은 DNA라는 생물학에서 펼칠 수 있는 과학수사를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너무 의학적인 요소로 갔기 때문에 중간에 대략 범인이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란 스스로가 나라고 떠벌리지 않은 이상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 수사극이나 탐정극은 처음부터 끝이다. 아니라면 범죄의 추적으로 통해 국가나 사회의 병폐를 찾아 근본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스노우맨>은 그런 내용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자유로운 성행위를 인정하되, 그곳에서 자라나오는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여자의 부도덕만 잡는 게 아니라 그 부도덕은 혼자만 나온 게 아니라 합작이다. 어떤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가 저술한데로 모든 아이들의 부모는 모든 성인남녀다란 명제가 좋을지도 모른다. 대신 철인군주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공부와 운동, 때에 따라서는 동성애(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자면 아이가 태어나나 남자와 자면 지혜가 탄생한다고 하니)도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인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그 아이에게 더러운 창녀 같은 어머니는 필요 없다고 하나, 어머니 없는 아이는 매우 비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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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대중문화에 대한 주변의 압력을 불편하게 여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의 취향과 취미 그리고 판단력과 사유의 자유를 가지고 싶으나, 한국에서는 가지기가 어렵다. 가령 요새 무슨 영화를 하는데 본 적이 있느냐? 아니면 요새 어느 드라마가 잘 나가고, 배우가 나오고, 가수가 나오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의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진다. 조금 특이하거나 또는 괴짜, mania 세계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

 

한국에서 이른바 오타쿠라 불리는 자들에서도 속하는 나이지만, 그런다고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다. 나는 goods와 같은 상품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그 goods의 상품으로 나오기 전에 방영된 작품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담론을 펼치는 것을 좋아하기에 다소 현학적 요소가 많다. 사람들은 현학적인 요소에 대해 생각하기 싫으나, 그런다고 현학적인 요소가 없다고 하면 상당히 화를 낸다. 무식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도 무식함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 요새 사람들의 공통된 관점이다.

 

왜냐고? 1년에 책을 보는 것에서 과연 몇 권을 읽고, 그 책이라도 무슨 책을 보는가에서 대답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차라리 요새 유행하는 베스트셀러 연애소설까지도 보는 것도 제법 독서가이시군요.”라고 말이 튀어 나온다. 1권을 한 달에 보는 것도 어려운 사람들, 게다가 철학이나 사회학 같은 도서는 아예 취급조차 않는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깊은 지식보단 얇고 흔하고 흔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대중문화에서는 아주 흔하고 흔해 cliche가 넘치고 넘친다.

 

인간들은 패턴주의를 참 좋아한다. 새로운 것이라고 해도 결국 그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돌 여자가수들이 얼굴과 이름만 바뀌지 타켓이 되는 몸매와 의식은 돌고 돈다. 모두 남자가 당장이라도 성적 욕망만을 자극하기 좋은 것에 말이다. 그것이 코드라면 코드이고 흐름이라면 흐름이다. 문제는 가수 박지윤 씨가 성인식의 음란한 가사와 댄스를 원하지 않았으나 기획사의 압력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대중들은 열광하고, 그 당시 많은 여자들이 노래와 춤을 따라했다. 결국 대중문화란 기본적 명제와 상관없이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다. 문제는 거기서 이질감이란 존재가 있어도 어느 것은 받아들인 반면 그러지 못한 게 많다.

 

모두가 같아야 하고, 같은 모습이 아니면 모두가 무서워하거나 짜증내하거나 회피하기 시작한다. 이런 대중문화의 파시즘의 요소들은 나라는 사람의 얼굴을 상대방의 얼굴을 그대로 이식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의 얼굴을 보고 맞는지 틀렸는지 구분하지 못할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상은 정의라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정의라는 기본적 상황이 있다면 정의의 부재란 단어도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불가침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신성함은 그 누구도 범하지 못할 수준이다.

 

내가 왜 이런 대중문화와 파시즘,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Cliche를 언급했냐고? 최근에 노회찬 의원에 대한 일에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법정 심판에서 패소당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는데, 그 승소자가 삼성이란 대기업이다. 우리나라의 신화는 바로 삼성을 보면 딱 알 수 있다. 원래 삼성을 사카린 밀수를 하여 성공했고, 지금은 불굴의 대기업이다. 참고적으로 내 폰은 갤럭시라는 삼성에서 만든 핸드폰이고, 자가용은 2005년 수동 SM5 모델이다. 삼성자동차를 몰고 삼성폰을 사용한다.

 

내가 아예 삼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삼성에 대한 국민적 욕망과 신화적 은폐, 어리석은 현실의 외면에서 비웃고 싶다. 내 자가용이 SM 시리즈인데, 그 단어처럼 한국은 정말 SM의 관계가 삼성과 국민, 그리고 국민 내부의 SM이 존재한다. 왜 그런 것인가? 삼성은 자기 스스로 sadist가 된 게 아니라 국민들이 sadist가 만들어주었다. 곧 국민 자체들이 masochist로 되길 바란 것이다. 자 예를 들어볼까? 나는 누가 공부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든 대기업이든 연구소든 어딜 가도 자신의 노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기업과 국가적 시스템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상부조직이 있는 만큼 하부조직 역시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부경제가 돌아가기 위해 하부경제구조가 있어야 한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인류학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고의 모던걸은 지하경제라고 한다. 지하경제? 어디에 학술적 단어로 나온 단어인가? 그러나 다행히도 대중문화에 의해 철저한 하나가 된 파시스트적 민주주의에서는 가능한 발언이다.

 

말이란 어떻게든 갖다 붙이면 완성된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langue가 사회적 약속이 담긴 언어라도 푸코처럼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기에 권력에 의해 언어가 새롭게 생산되고 정립된다. 이 얼마나 언어적으로 생산력이 높은 나라인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황금을 캐기 위해 거위를 배를 갈라 황금 대신 살코기를 먹는 행위가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 masochist로 되기 바란다. 우리 집에 가족이 모르는 친구가 왔는데, 이 녀석이 공장이 많은 동네에 살았는데, 우리 엄마에게 그냥 공장서 일한다고 했다.

 

일은 다른 곳에서 일할 예정이고, 업종이 전혀 다르다. 공장이 많은 지역이라 어머니는 삼성에서 일하니? 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물론 아니라고 했으나, 속으로 어머니의 한심함에 짜증이 났다. 물론 부모님에 대해 공경하는 것은 맞으나 이런 속내를 가지는 한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참고적으로 그 녀석은 삼성보단 현대가 가깝다. 대략 짐작하겠는가? 어째든 삼성하면 모두가 가야할 곳이거나 가고싶은 곳이다. 내 고교 동창 녀석이 르노삼성에서 일하는데, 다른 고교동창 결혼식에서 만나 명함을 받아서 그것에 대해 이래저래 말하는 어머니의 한심한 작태가 바로 우리 국민들을 masochist로 만든다.

 

정말 웃긴 이야기는 골목상권이 죽어간다고 푸념하는 부모들이 우리 아이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삼성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E-mart, 홈플러스에 대해 욕하는가? 당신네들 자식들이 일할 곳은 그런 계열사들이 있는 곳이다. 본사에 갈 수 있는 인원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나라 국민들 착각들은 우리 자식 모두 삼성에 갈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가면 %? 가도 정규는 %? 정상적으로 퇴직 %? 그들이 노력해서 간 것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나, 가면 매일 야근과 주말 잔업에 업무성과에 시달린다. 지역이나 협력 혹은 말단직은 몰라도 정규직은 당연히 그렇지 않은가?

 

물론 비정규직 역시 만만치 않다. 삼성에서 감추는 백혈병 이야기, 사람이 죽는데, 그것이 감춘다고 해결될 부분이 아니다. 내가 회사 다른 부서의 부서장과 말다툼한 적이 있는데, 잔업할 게 있어서 내가 그만하자고 했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삼성이 우리를 먹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먹이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의 제일 한심한 작태는 소비자 주권의식이 없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내용을 정리하여 내가 다시 말하자면 근로자가 곧 소비자고, 소비자가 곧 근로자인 것이다.

 

우리가 만든 재화나 상품 등을 일부 계층이 아니라 모두 다른 직종의 일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한다. 가령 자동차공장의 근로자는 밥을 만들어먹는가? 음식점에서 먹거나 가게에서 재료를 사서 요리한다. 식당 종업원이 차를 만들어 타는가? 아니다. 공장에서 만들어 놓은 레디메이드를 이용한다. 그런 삼성이 먹여주는가? 아니면 소비자가 먹여주는가? 삼성이 우리 국민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상품을 팔아 월급을 나누어준다. 그래서 삼성에 대한 우리 국민의 권리행세는 당연하나, 삼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나오면 촉각을 밝히고, 삼성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누가 삼성제품 사용하지 말란 것도 아니고, 삼성에 들어가지 마란 것도 아니고, 삼성 망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에게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 라고 한 그 부서장의 말에서 자기 자식 삼성에 보내고 싶어 하나, 과연 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고, 그런 생각은 남들은 하지 않는가? 라는 것에서 결국 제로섬 게임을 즐기는 masochist로 된 것이다. 확률 구분상으로 1% 정도 갈 수 있는가? 아니 그 이하일 것이다. 내 자식만 가면 되라는 생각에 삼성이 마치 절대적인 군주로 받드는 게 아닌가?

 

그러니 E-mart 같은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안전사고 문제나 기본적인 근로수칙마저 어기고,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 어김없이 감시와 처벌이 따르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삼성편이다. 삼성에 대한 문제점을 굳이 일일이 나열할 생각도 없으나, 노회찬 의원에 대한 일을 보면 토크빌이 말한데로 그 나라의 정치의 수준은 그 국민들의 수준에서 볼 수 있으니 결국 자기 스스로 삼성의 개가 되는 masochist를 선택한다. 그들이 masochist를 선택한 이유는 sadist가 되기 위해서다.

 

실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이 삼성과 업무하면서 삼성에서 업무하는 태도가 속된 말로 양하치다. 그런 게 있지 아니한가? 금요일 오후 4시에 메일을 보내, 이 프로젝트 월요일 11시에 가지고 오세요. 그러면 상대 업체의 직원들은 퇴근하란 것인지 마란 것인지? 6시 퇴근하여 주5일제를 생각하면 그 프로젝트가 간단하면 모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라면 편안한 주말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양하치 짓거리를 많이 본다는 말에 우리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삼성에 일하면 사람들을 이렇게 구분한다. 삼성맨과 NO 삼성맨, 그들은 원래 masochist에서 sadist로 전환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삼성에 대해 masochist에 매달린 이유는 sadist로 되기 위한 과정이다. samsungsadist는 같은 S가 아닌가? M에선 masochistmass라는 대중인 것이다. 대중문화를 왜 언급했냐고? 삼성은 대중매체에 큰 힘을 싣고 광고와 이미지 마케팅을 한다. 삼성이 원래 사카린 밀수로 했는데도, 그 진실이 은폐되어 최고의 대기업이 되었다. 결론은 미디어의 은폐와 프로파간다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거기서 얽매인 masochist같은 mass, 다행히도 sadist 같은 samsung man이라도 되면 다행이나 그들은 과연 몇 %나 될까 모른다.

 

결국 이들은 삼성에 대해 masochist이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겐 sadist로 되고자 한다. 아직 현실에 대해 파악하지 않고, 언젠가는 될 것이란 메시아주의에 물 들은 것이다. 나는 항상 삼성 제품 사용하고, 삼성이 제대로 외국에서 활동하기 바란다. 삼성의 기업이 국내에 영향을 미치니깐, 그러나 그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소비자 주체자인 국민이란 사실을 놓칠 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바보가 될 것이다. 노회찬 의원이 삼성에 패소한 것은 소비자주권 수준이 17897월 프랑스 대혁명 이전보다 못한 한국인의 수준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 중고등학교 나오면 사회시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프랑스혁명 정도 배울 것이나, 그것이 국내외 헌법의 기초라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다. 모르면 모를수록 그들이 많으면 사실 대신 이상한 논리가 사실로 된다. 그러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들도 타인의 머리 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신화적 욕망이다. 바보 같으나 그렇게 될 확률은 너무 낮다는 점이다. 그렇게 영원히 SM 관계를 맺으면 된다. 대신 나는 SM5를 타고 출퇴근한다. 내 의지로 운전하고 싶기에 수동기어로 한다. 적어도 운전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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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11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주장하는 거지만, 삼성은 국민을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죠.
삼성 나부랭이 하나 망한다고 국가가 망한다고 하면
그런 나라는 차라리 망하는 게 낫습니다. 국가가 기업 하나와 비스무리하다는 것은
국가로써 수치죠. 삼성 비판할 때마다 듣는 소리가
삼성 망해서 좋을 거 뭐 있냐 ? 고 묻는데
아니 비판하는 것이 왜 삼성 망하라는 저주처럼 들리는지 이해가안갑니다.
노조 인정하고, 몇 가지 개선해라, 라는 게 왜 망하라는 논조인지.....

만화애니비평 2014-01-11 10:31   좋아요 0 | URL
멍청한 것들의 생각은 자신들은 절대로 그렇게 도태되지 않을 것이란 희망적인 망상이죠. 결국 소모품이 되는 것은 자신이지 남이 된다는 것만 보니깐요
 

도서관에서 진중권 교수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레퀴엠>을 읽고 있는데, 처음에 모더니즘에 대해 보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아방가르드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 많다. 예술로서의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예술이란 도구를 파괴하기 위한 도구인 아방가르드, 하지만 부정하는 테제에 걸린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아이러니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딜레마이리라.

 

예전에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책에서 러시아혁명과 트로츠키에 대한 글을 봤는데, 폭력이야 말로 위대한 해방의 출구면서도 또 다른 억압의 시초다. 러시아혁명 이후 차르체제의 백위군과 주변 열강의 견제에서 좌파적 성향에서 다시 우파적 성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소비에트연방이었다. 스탈린 집권 이전 그나마 레닌이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레닌 사후 그것이 금이 가고, 결국 스탈린은 좌파라는 이름을 빙장하여 견고한 수구체계를 만든다. 그것을 알고 있는가?

 

극좌는 극우와 별로 차이 없다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근본과 원인에 대한 고찰과 연구 개선이지, 절대적인 가치관 아래 무조건적 복종과 거기에 대한 불복종은 숙청이란 정치적 수단은 러시아의 1937~1938년 대숙청을 일어나게 한다. 수백만 명이 죽고, 대부분 머리에 총을 맞고 관통상으로 죽었다. 인간의 죽음에서 대부분 이들의 죽음과 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자는 죽음에 대해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여하지 않고 멀리서 손가락으로 지시한 자들이 문제다.

 

그것을 다룬 도서가 레퀴엠이다.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본 자크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에서 전쟁과 스펙타클은 공존한다. 전쟁터의 병사들은 자기의 의지로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정의의 사도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전장에 나가고, 결국 영화나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되는 게 아니라 한줌의 시체로 변한다. 이때까지 진중권 교수의 서적을 몇 권 읽어보았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아마 <네 무덤에 침을 뱉어주마!>까지 읽지 않으나, 그 책이라면 왠지 나올 만하겠다. 그러나 아직 읽지 않았기에 최근에 모던 걸의 열풍에 읽어보아야 할 서적이다. 일단 레퀴엠으로 가자. 레퀴엠이란 죽은 이를 위한 위로곡이다. 사실 위로라는 것은 죽은 자보다는 살아있는 자를 위한 곡이다. 레퀴엠 예전에 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에서 사실 그것은 죽은자 보다는 살아있는 자에 대한 위로다.

 

왜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로 하여금 스스로 위로 받아야 하는가? 우리 인간의 역사는 항상 투쟁의 역사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관계없는 자라도 누군가는 필요하다. 진중권 교수가 군대시절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이 교수의 인간적인 요소를 보았다. 물론 X자가 나오나 분명히 그것은 개였을 것이다. 사고로 죽은 병사가 어머니를 두고 먼저 떠나가면 그것을 보는 병사가 욕을 한 것이다. 그 병사에게,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고 죽다니 말이다.

 

생각하면 왠지 공감 가는 내용이다. 군대생활이야기다. 내가 대대본부에서 3년 동안 근무했기에 제법 일 잘하기로 소문났다. 물론 야근과 잔업, 사람들이 싫어하는 보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군인 주제, 시청과 구청, 환경부 관한 기관, 항공청(공군이므로), 공항공사(공군이자나!), 농촌공사 등과 같은 관공서 협의를 돌면서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대대본부에 내가 근무하는 부서 이외에도 다른 부서가 있었다. 이름은 영일이었던가? 아마 일병이었을 것이다. 다소 몸집이 작고 말이 많지 않은 사병이었는데, 내가 근무한 사무실에서 문을 열고 가면 20m 복도만 지나면 다른 대대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이 친구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유는 간질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의 흰자만 보인 채 숨을 거두었다. 평소 몸이 좋지 않았는데, 억지로 군에 왔다. 이때 생각하거만,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둘 한심한 것은 여성가족부 국방부 이야기할 때 군대 가는 이들은 대부분 특권층이 아닌 일반 국민이다. 자신들도 군대 가면서 그런 사회지도부의 비리나 부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여자만 욕하고, 여자들도 남자들을 욕하는 모습에 짜증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이 아닌 일부가 하나, 그 일부가 마치 전체인 것처럼 한다.

 

문제는 병사가 죽으면 누가 가장 슬퍼하느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 사병을 통증을 견디고 낳은 어머니란 점이다. 그러면 군인이 죽으면 남자가 슬퍼할까? 여자가 슬퍼할까?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가?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1장 병사들의 노래에서 고향에 좋아하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 흠모하는 여자를 나두고 온 병사들은 <릴리 마를렌>을 매일 밤 955분에 듣고 위로받는다.

 

이 책을 먼저 읽게 된 동기는 블로그 이웃 중에 고등학교에서 수험을 준비하는 분이 나에게 레퀴엠에 대해 인상 깊이 읽었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 진중권 교수의 서적에서 욕을 의미하는 글자가 나올 줄이야! 이 책을 보면 전쟁을 혐오한다고 한다. 평소 하워드 진이나 노암 촘스키 서적을 읽은 적이 있기에 전쟁 역시 나도 좋아하지 않는다. 총균쇠에서 1차 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총과 칼보단 화학전과 세균전으로 더 많이 죽었다는 내용에 경악했다. 따라서 전쟁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수도 아니면 그 이상일 수 있다.

 

러시아혁명사나 혹은 프랑스혁명사에서 외국군의 개입에서 전쟁의 수행은 필사적이니 말이다. 전쟁으로 통해 인간 투쟁의식만 불을 지피는 모습이 안타깝다. 담론을 잘 하고 좋아하는 진중권 교수가 서문에 매력적인 글을 남긴다. 늘 내가 생각하고 공감하는 내용이다.

 

전쟁에도 미학이 있을까? ‘전쟁의 미학이라 하면 두 가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을 그야말로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파시스트 미학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라는 현상을 미학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태도다. 이 책을 전쟁의 미학이라 할 때, 나의 것은 후자에 속한다.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드러난 곳은 충격과 공포라는 제목이 붙은 디에스 이레부분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얼마 전 현대인의 미적 감정이 숭고시뮬라크르의 상반되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내용의 책을 쓴 바 있다. 이번에 드러난 현대전의 양상이 마치 현대예술을 흉내라도 내듯이 동일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예전에 미소의 섬사라는 애니메이션인가? 시대는 일본 전국시대 정도인데, 러시아 금발의 거유여성이 6연발 매그넘 권총으로 적을 제압하는데, 살인하지 않은 점과 큰 가슴을 흔들면 가슴 사이에서 탄알이 나와 탄환 집에 총알이 들어간다.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이라고 할까나? 아무튼 어느 여행에서 유곽에 가는데, 그곳 주인은 원래 잔인한 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과 죽음에 대한 회의감에서 유곽을 차리고, 남자들을 오게 하여 무기는 해제하고 쾌락의 세계에 빠지자고 한다. 아직 책은 다 읽지 않으나 <레퀴엠> 마무리에 보면 다비드의 작품 중에 하나인 <사빈의 여인들>이란 작품에서 서로 전장에서 싸우려는 두 남자무리 사이에 여자들이 아이를 안고 중재를 한다.

 

중앙에 보인 어느 한 여성의 옷의 실루엣에 유두가 비친다. 다소 에로티즘한 느낌이 없지 않아 보이나, 중요한 것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고대는 지나친 출산 역시 전쟁의 원인은 맞는 것은 분명하나, 그런다고 죽은 자가 불쌍할까? 산자가 불쌍할까? 객관적으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나, 그 끝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 결론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전쟁은 예술인가? 파시스트에게 파괴의 미학이고, 다시 만들고 싶은 자에겐 기회의 예술이다. 그러나 일단 목숨이 가능해야 가능하다. 죽으면 무슨 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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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11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퀴엠은 너무 짧다는 한계 ( 분량이 ) 가 있습니다.
전 이상하게 일단 책은 두꺼워야 함... ㅋㅋㅋㅋㅋㅋ.
글구 보니 전 처음 진중권 책을 읽은 게 바로 네 무덤'이었네요.
도서관에서 제목이 하도 특이해서... 옛날에 유명한 야시시한 영화 제목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가 생각나서 그냥 진중권이란 이름도 모른 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4-01-11 10:33   좋아요 0 | URL
재미있고도 조금 가슴 시리는 책이었죠
진 교수가 그래 분량이 적은 도서를 적는 양반이 아니니 말이죠
적나라한 표현과 제목 좋아요. 교수님이.ㅎㅎㅎ
저도 예전의 글을 발췌해 곰곰발까지는 아니나 생각할 거리
만드는 사람으로 등단을...ㅎㅎ
1년 안에 거의 알라디너 세계에서 상당히 올라갔더군요.축하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1-11 14:59   좋아요 0 | URL
알라딘 마을이 워낙 좁아서 그렇죠... 뭐... 허허...
 

2012년 작성 글이지만, 2014년에도 유효한 것은 인간이 신화적 욕망을 탐하기 때문이죠.

 

 

안철수의 이름을 모르는 이 한국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안철수에 대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심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가 제조한 V3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은 모든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대국민적인 서비스를 안내해주고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이면서 의사이면서 매우 뛰어난 엘리트다.

 

그가 보여준 경력이나 지식을 보자면 대한민국에서 당연 손꼽을 인물이다. 그런 만큼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번 안철수 대선문제에 대해 나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그가 이때까지 대통령으로 간다고 말한 적도 없으며, 딱히 정치를 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대신 그가 저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간 변호사 박원순 씨의 지지를 선고하는 바람에 그의 정치적 위치가 드러났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에도 대통령으로부터 정보통신부 장관의 자리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들었다. 그런 만큼 여태까지 정치에 대해 딱히 큰 입장을 보이지 않은 안철수가 작년에 서울시장의 여세에선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 이후 한국에는 4월 총선과 더불어 5년마다 큰 변화를 주는 대선이 눈앞에 두고 있다. 그가 대선으로 가는 길에 큰 딜레마로서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고로 나는 안철수의 생각을 읽어보지 않았다(2013년에 읽어봤습니다. 글쓴 기준이 2012년입니다). 단지 안철수의 생각이란 도서를 본 사람들의 글을 보았다. 정치적 내 입장에선 참여정부에 가깝지만, 적어도 참여정부 편이라고 하여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치에선 모든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것을 잡는가에서 정치적 판단이 달라진다. 안철수의 생각이 읽든 안 읽든 굳이 읽지 않아도 그의 서적이 말하고픈 것은 대략 짐작한다.

 

그것은 기존 한국 정치의 낡은 관행과 더불어 어려운 경제상황,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입장을 밝힌 도서다. 어떤 인물들이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내놓는데 있어서 현실 비판과 미래 대안을 추구하지 않겠는가?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읽지 않아도 그의 생각은 기존 한국 정치사회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것이다. 적어도 보통 사람 이상으로 이성적 능력이 탁월한 자라면 그런 서적은 충분히 만들고도 남는다.

 

한 주에 도서사이트에 가보면 정치사회 관련 도서가 수십 권 씩 쏟아진다. 사람들이 그런 책들을 찾아 너나 나나 할 것이 찾아보나, 그들에게 그 책들을 읽으면 그저 동의만 할 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그 생각은 쉬워도 그 실행은 어렵다. 안철수의 행보나 업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철수가 설사 대통령이 된다고 하던지 혹은 그 누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던지 대통령 이전에 생각하거나 계획하던 일들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화장실 나올 때와 들어갈 때와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변수가 생기는데, 국가라는 조직은 거대한 조직과 조직, 사회와 사회, 단체와 단체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외교의 여파는 상당히 민감하다. 미국과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동맹을 기본에다가 일본과 중국은 무역과 문화교류에서 매우 중요하며, 게다가 유럽사회와 소통도 중요하다.

 

오히려 그런 세계적인 흐름과 국내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우월한 자만이 대통령의 자리로 빛날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치100단이나 정치학은 노란 띠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치학은 정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철학, 문학,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등등 수많은 학문을 토대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이 서구사회의 문물을 받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도 그 미국이란 국가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 속에서 모순도 모르며,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아직도 자유와 평등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모순도 모른다.

 

한 마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쇼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관심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계몽적인 이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심리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신화적 존재로 형성된다. 안철수란 인물은 바로 그 신화의 인물이다. 신화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이 새로이 재생산 되는 것이다. 신화의 존재는 항상 억압과 욕망, 그리고 합리주의와 공리주의를 추구한다. 대신 그것에는 윤리나 이성은 없다.

 

본래 신화의 세계에는 비합리적 상황에서 인물들이 합리적으로 해결하고도 다시 비합리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길거리에서 어느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끝내는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그때 자신의 친부인 라이오스가 있었다. 또한 테베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스핑크스를 물리쳤지만, 그 과업의 대가는 테베의 왕녀와 결혼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오카스테였고, 오이디푸스의 친모였다.

 

이른바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인류의 죄악에서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합리를 추구했으나, 결국 비합리적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의 자식 4명 중에 2명의 아들은 서로 싸우다가 죽었고, 그의 딸인 안티고네 역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한탄하며, 죽기 전 두 눈을 칼로 찔러 장님이 되는데, 장님이 되는 것은 결국 보는 것은 중지하고, 듣는 것만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각과 청각 중에서 이성 판단력에 큰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눈이다. 눈으로 통해 사물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귀로 듣는 청각은 뇌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자극하기 쉽다. 결국 눈이라는 것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의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이성이란 예전처럼 합리와 비합리로 구분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난잡해졌다.

 

인간의 눈이 가진 한계가 바로 착시현상이 존재하며, 가상과 현실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이른바 hyper-reality 극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령 실제로 범죄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는데도 언론에서 마치 사회 위험분자로 몰아 그 사람들을 사회적 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이런 행위들은 독재국가와 부패언론의 조합으로 많은 사례가 있었다. 그런 만큼 우리가 가진 눈이 TV나 신문으로 간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로 이성적 판단력으로 연계되는가는 미지수란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책만 듣고, 그 입장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인 etic에서 사람들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 정치적 입장과 사회과학적인 분별력, 인간의 의식을 알 수 있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없다면 어느 것이 진짜 현실성이 있는지 그 주장이 올바른지 그리고 그것으로 통해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안철수의 책에서는 그런 좋은 내용이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이 진실로 객관적 분석을 하는 행동인 emic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보자. 나는 분명히 안철수 원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나,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위치로서는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낸 것도 아니고, 사회유명인사가 유명인물을 만나 이야기하거나 사회적 약자를 만나 소통을 하거나 또는 정치적 쓴 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대통령의 선택이라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이때까지 단 1번도 출마선언을 하지 않았다. 단지 주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국민들이 대통령을 하겠는데 라고 말할 뿐이다.

 

그 심리적인 상황을 보면 상당히 신화적인 것이다. 왜 안철수에게 신화가 몰리는 것일까? 인간은 언제나 위기나 상황이 닥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그 자유로움에서 책임의 회피를 꿈꾸는 도피의식까지 연결된다. 즉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데, 그 정의를 대신할 존재가 필요하고, 그 대상자가 잘 못될 경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취소하는 최선의 수단을 가진 것이다.

 

이때까지 국민들의 선거를 본다면 그것이 과연 이성과 합리적 판단에서 나온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전반을 위한 공리주의와 공공선의 추구인가? 라는 질문에서 그렇게 한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후보자들의 정책들에 대해 과학적 기준으로 보거나 합리적 의문을 품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사람들의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한다. 그 합리(合理)적 요소는 이성적인 요건의 합리가 아니라 합리(合利)에 의해서다. 결국 이익에 따른 것이고, 그 이익은 정말 자신의 생활주변의 혜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익, 즉 자기만족이다.

 

그 자기만족은 심리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투표이다. 정치라는 것에서 이성적인 영역은 오로지 그리스 폴리스국가일 때만 가능했다. 하지만 그때는 단 10%의 성인남성만 가능한 제한적 직접민주주의였으며, 다르게 보면 귀족민주주의다. 그 뒤에 노예에 대한 학대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결코 윤리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국민을 토대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미국에 다녀오면서 토크빌의 책을 읽은 것처럼, 오히려 국민 대부분의 정치참여가 오히려 대중의 폭력성을 정치에 반영한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들이 합리적이라 여기나, 그 합리는 결코 합리적이지 못했다. 단지 자신을 합리적으로 만들어줄 뿐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비합리적 판단들이 합리적으로 변하는 순간 오이디푸스가 처한 신화의 세계에 이끌려간다. 결국 신화에서 비합리와 합리에서 어긋난 비합리가 합리로 변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합리를 삭제 내지 제거해야 한다. 사람을 치면 죽음이란 점이다. 광기라는 것은 결국 문명을 이루어온 인간의 비합리를 합리로 바꾸어온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번 안철수와 관련하여 대통령 출마할 경우 비밀을 폭로한다는 사실 역시 그런 신화의 연쇄에 맺힌 하나의 스캔들이다. 아직 결정된 바도 없이 자세를 유지하는 안철수 진영에 대한 비합리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합리를 추구했다. 안철수 측의 금태섭 변호사가 발표하고, 박근혜 측의 정준길 공보의원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 협박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상대방에게 그런 협박을 했다는 자체는 크나큰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이며, 만약 친구간의 농담이라고 한다면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그렇게 친구로서 대화라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어불성설이다.

 

만약 진짜 그것이 정준길 공보위원의 친구로서 농담이라면, 바로 공보위원 자리에서 물릴 이유는 없다. 이 또한 신화의 탄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화라는 서사는 희생제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한국의 무속신화(巫俗神話)는 단순히 무속(巫俗)이란 전통사회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차라리 오늘까지 이어오는 공시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신화의 영속성에서 가능한 것은 인간의 욕망과 억압과 해방의 미학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신화에서 누군가로 통해 이익을 보려는 개인이기주의의 집단화로 이어진다. 공리주의와 합리주의가 민주주의 사회에 근거가 된다고 하나, 그 이면에는 소수약자의 희생과 외면이란 하나의 희생제의가 따른다. 남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올라가는 신화적 욕망에서 그 희생의 주체자가 반사이익을 꾸준히 누리던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왜 조선 개국공신들을 태종 이방원이 주도 아래 죽어가야 했을까?

 

그들은 이성계를 도와 고려무신인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를 멸망하게 했다. 고려라는 아버지를 조선이란 아들이 거세한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성계의 주변 인물들은 태종의 정치권력과 그의 아들 세종에게 큰 벽이었던 것이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아버지에 대한 살해성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세종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었다. 아들이 거세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버지에게 충성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아버지에 대한 권위가 흔들릴 경우 다른 아들들이 위험에 빠지면 누군가를 희생을 내야 한다.

 

그 희생자는 온갖 비난과 비방, 의혹과 불문을 품고 정치의 뒤 무대로 사라진다. 그런다고 희생자가 모든 것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화제의에서 희생을 선택한 바리데기는 죽어가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은 후에 신이 되었다. 신화란 희생과 더불어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신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날 길은 계몽이나,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계몽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깨어나기이나, 한국에서는 억지로 주입하는 억압에 의해 신화가 깨어지고, 또 다른 신화로 메워진다. 안철수가 신화적 존재가 되는 것은 과연 누구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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