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놀이로서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렵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농사문화에서 봐야할 것이다. 농사문화가 원래 힘들고 고된 노동이나 하루에 일정량만 노동을 하고, 계절적으로 겨울이 오면 더 이상 노동 대신 여가를 구사하게 된다. 단지 현대사회는 자본주의구조와 더불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1차 산업으로 해결할 수 없고, 자본주의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해도 1차 산업을 배제하면 살아날 수 없다. 우선 인간이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1차 산업이 대부분 식량과 관련된 산업이기 때문이다.

 

놀이와 관련하여 노동이 유희적 놀이로 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습관이나 취미를 넘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포스트모던 사회로 인해 서로간의 오프라인적인 인간관계 형성보다는 온라인적인 인간관계가 강하다. 비록 같은 학교 친구라고 해도 그들의 만남은 실존적으로 놀이터나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게임으로 이루어지고, 얼굴을 직접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을 이용한 문자, 전화, 카톡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통한 인터넷의 세계까지 잠식했다.

 

따라서 노동이 놀이로 되기 위해서는 개인과의 격차를 분리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여기에 대한 새로운 대안점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의 communist요소와 마르크스의 communist를 나쁘게 사용한 마오주의나 스탈린주의와 달린 마르크스는 미래의 노동은 놀이로 보자고 했다. 노동에서 해방되어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활동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것이다.

 

놀이와 관련하여 서양의 동굴벽화 중에 프랑스 라스코 동물벽화를 잘 생각해야 한다. 당시 인간은 1차 산업의 대표주자격인 농업과 축산업 대신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고 물고기를 잡은 원시적 경제활동이었다. 가령 문화인류학 도서를 보면 원시부족이 하루 3시간만 일해도 며칠은 놀 수 있는 것은 자연의 혜택이 존재한다는 점과 그들이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이로서 사냥은 한다. 의식을 치루고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춘다.

 

문제는 춤과 노래는 인간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활동이면서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대화라는 것이다. 인들에게 신이란 정말 신이 아니라 이들의 공동체사회에서 필요한 놀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예술에 대해 알베르 카뮈가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기에 그렇다고 한다. 예술이란 어떻게 보면 만드는 그 순간에 예술을 만들겠다는 것보다는 하나의 상징적 권위적 요소로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방가르드 이전의 예술들은 왕권, 귀족, 교회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많이 내세운다.

 

예술품이 지금에서 예술이나 당시로는 예술보단 하나의 상징이고 권위다. 우리가 보는 유명한 건축 중에서 왕궁의 웅장함과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이란 모두 상징적 권위다. 보기에 아름다우나 거기에 노동이란 인간착취가 숨어있다. 만약 건축에 대한 부분에서 노동이 아닌 놀이라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는 조금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미학은 예술의 파괴다. 그러나 예술을 파괴하려면 또 다른 예술이 대체되기에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상황주의 인턴내셔널의 해체와 끝으로 사라진다.

 

그런다고 아방가르드 역사에서 우리는 그것을 배제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가 손 놓고 멀뚱히 보던 속박적인 현실을 정면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로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이면서 전위적인 활동가다. 하지만 진실로 그가 전위적이기에 19685월 혁명 이후 그는 잠적을 감춘다. 자기 자신이 spectacle이란 존재로서 군림하지 않기 위해서다.

 

인간이란 자신의 노동에 속박을 갇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니나 기계가 되는 부분이다. 나의 관점에서 말할까? 아니면 어떻게 볼까? 유명한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지에서 그가 연기한 것을 보아라. 기계가 인간을 조종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물화(物化) 되어버린다.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보다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떨어지게 되는 점이다.

 

어제 주말 아버지와 나하고 대화하면서 조금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형제를 위해 계속 노동한다고 하는 아버지의 근무환경은 정말 철저하고도 잔인하게 낙후되었다. 인원이 적은데, 기계는 노후화되어 필요이상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동력이 있을 때가지 일을 해야지라고 말할 때 인간의 물화라는 것은 끔찍한 이야기다. 찰리 채플린의 기계는 수명완료에 따라 강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부품으로 교체되나, 인간의 육체는 교체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노동의 상실은 곧 인간의 수명의 상실이다. <자본>을 읽게 되면 지나친 노동착취로 인해 대부분의 국민들의 수명이 짧아짐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의료기술의 발달과 그때보다 노동력의 착취강도, 근무지역의 보건위생환경이 조금 우량해졌기 때문에 가능했으나, 계속 노동자의 죽음과 부상은 끊이지 않는다. 인간에게 노동을 해방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점은 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나둘 경우 인간에게 노동에서 놀이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노동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놀이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감성적 영역을 무디게 만들고, 이성적 판단력을 멈추게 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것이 된다. 창조적인 인간을 만들기에는 이런 사회적 구조에서 보이는 기계화는 우리는 반영구 기관조차 가지지 못한 기계로 전략한다. 단순히 놀이문화를 왜 추구하는가에서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상실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공간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한다. 4계절에서 겨울은 모든 것을 삼켜 생명을 앗아가는 것처럼 봄은 다시 희망과 삶을 부여한다. 삶과 죽음이 있기에 놀이가 가능하다. 놀이는 변화하는 자연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예술은 곧 놀이의 미학이다. 예전에 부천 만화규장각에서 제작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이란 도서에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의 인상 깊은 문구가 있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다.”

 

대중예술이 발견성은 곧 놀이라는 것이 예술이란 특정 계층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놀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적 변화와 인간이 그 속에서 어울리는 하나의 소통이다. 소통에서 문명화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의 상품 내지 도구로 보기에 인간 스스로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물화라는 가치로 통해 보기에 창조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인간 스스로가 기계가 되어 모든 것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놀이문화로서 단체생활 내의 창조성을 개발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인간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기계에서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오려면 인간의 기본인 유치찬란한 세계가 필수다. 문명화가 진행되고 세분화된 분류 속에서 인간에게 공통된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문명화에서 파편화된 취미와 취향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 속에 대부분 사람들의 취미는 대다수 비슷하다.

 

일단 취미를 말해보라고 하면 음악 듣기, 영화 보기,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취미라기보다는 일련의 삶이라고 보면 좋을 듯 하다. 왜냐하면 가령 음악이라고 하면 rock/metal, Jazz, blues, soul, hiphop 등 다양한 장르가 있으며, 음악 활동도 단순히 귀로 감상하는 것을 지나 라이브공연과 실제 자기가 연주자가 될 부분이 있다. 영화 역시 그렇다. 최근 극장가에 나온 인기몰이를 하는 영화나 혹은 신작영화에 영화관란 취미라고 하는 것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화라는 상품을 소비할 뿐이다.

 

현대사회의 spectacle적인 문화소비 형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이라기보단 레디-메이드처럼 똑같은 상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문화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창조성을 요구하기란 어려운 부분이다. 직접 음악을 하거나 직접 영화를 찍거나(혹은 연극을 하거나) 또는 그 이상의 프로듀싱도 좋다. 문화적 공간에 의해 창조성이 표현되는데, 표현주의 미학이 약한 한국으로서 이런 부분의 집단적 발전을 기여하는 것은 매우 난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그 조직과 그들이 하는 업무와 사업을 알지 못하면 매뉴얼을 할 수 없다. 단지 이 글에선 칸트 <판단력 비판>에서 기준을 설정하기 보다는 그 기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Kyoto Animation에서 만든 작품인 <K-on>에서 감독 야마다 나오코씨가 애니메이터 직원을 불러 이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그 때 그 시절로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넣어보세요!” 덕분에 작품은 흥행하고 관련 OSMU 사업까지 성공하여 상당한 이익을 Kyoto Animation에 안겨주었다. 21세기 사업은 바로 문화콘텐츠이고,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하는 것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여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게 아니다. 실제 <K-on>을 보다보면 미쟝센의 연출이 매우 독특하고, 작품 내 인물들의 인상이나 표현력이 매우 넘친다.

 

결국 표현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서 콘텐츠의 질이 높일 수 있다. 작품 제작에서 애니메이터들은 분명 노동을 했을 것이다. 그 노동에 대한 놀이적 유희를 투영할 수 있다면, 그들은 노동착취로 통한 스트레스보다는 놀이로서 노동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가이낙스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만든 만화책 부록에서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독특하다. 회의실 안에 에반게리온 프라모델이 있고, 오타쿠적인 요소가 다분한 점이다. 또한 연말 회식자리에서 가이낙스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 하나인 사에키 쇼지가 동물의상을 입고 코스튬 하던 모습이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가이낙스 대표이사 겸 애니메이션 감독인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이 2011PISAF에서 초청강연하는데, 이때 가이낙스 초반의 이야기를 해준다. 가이낙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말하는데, 이때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작화 쪽이었다. 가이낙스 대표적인 기법으로 우주전쟁이 매우 탁월하다. 그들의 셀이 여기저기 사용되는 점에서 안노 히데아키는 우주전쟁이나 폭발장면 전문가였다. 대신 사람의 얼굴을 잘 못 그리는 것이 단점에서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에서 한계성이 보인다.

 

안노 히데아키의 오타쿠적인 기질이 발동된 것은 1988OVA로 제작된 <건버스터>에서 각종 오마쥬와 패러디로 작품을 매우고, 특히 주인공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쥐고 뜯는 장면에서 여자의 가슴이 신체와 별도로 움직인 점에서 이때까지 미소녀 애니메이션에서 연출하지 못한 부분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거대한 여성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장면이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나, 그것을 획기적으로 만든 것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었다.

 

그러다가 1990<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에 이어 1995<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나왔다. 그들의 특징들은 오타쿠 기질이란 점이다. 남들과 다르기에 창조성이 있었다. 집단적 창조성의 발전에서 그들에게 오타쿠가 되라는 것은 아니나 오타쿠에 대해 뭔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최근 아키바계 소비주의적 오타쿠들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안타까우나 본래의 오타쿠 기질에서 한 곳을 집중적으로 빠져들어 거기에 매진하는 부분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단에서 그런 행위란 무척이나 어렵고, 그런 업무가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안노 히데아키는 그림만 그린 것을 매우 좋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왜 성공한 애니메이션 감독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다고 그가 반드시 애니메이션만 만든 것은 아니다. 여고생의 원조교제 문제를 다룬 <love and pop>, Re : 큐티 허니를 재각색하여 만든 영화 <큐티 허니>도 있었다. 인간의 내면의 고뇌를 다룬 <식일>이란 작품도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자들이 실사영상을 도전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실제 카메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상한 카메라로서 실사를 보려고 한 것이다. 덕분에 연출은 매우 신기하다. <love and pop>에서 장난감 프라모델 기차가 철로를 따라 가는 장면이 인상 깊은 부분 역시 그런 연출력이다. 애니메이션이란 표현주의 미학이므로, 상상하는 것에 대한 현상화에 큰 비중을 둔다.

 

놀이로서 통한 노동이 되려면 사람들이 스스로 시인이 되어야 하고, 가수가 되어야 하고, 작가도 되어야 한다. 단지 퀄리티가 다소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 것들로 통해 집단 내의 창조성을 꽃을 피울 수 있다. 집단 내에서 그것을 용인할 수 있는 것이란 정말 쉽지 않다. 왜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과 물화에 대해 논했을까? 이런 사회구조에 맺힌 관념의 틀이란 매우 벗어나기 힘든 굴레다. 물론 혁명과 쿠데타,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도 어디서는 계속 노동해야 한다. 혁명을 해도 쿠데타를 해도 밥은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며, 잠도 자야 한다.

 

인간은 문화를 만드는 존재에서 이제는 문화의 속박에 살아간다. 문화에 의한 속박과 물화된 인격에서 문화의 소비자에서 문화의 생산자로 가지 않으면 창조성이란 불가침의 영역이다. 게다가 특이성을 너무 추구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만큼 이질적인 존재가 된다. 문화콘텐츠라는 아이디어 상품에서 이런 한계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치 고장 난 기계부품처럼 되어 버려지는 인간이 당연한 세상에서 노동이 놀이로서 전환할 가능성이 낮다. 물론 어느 소규모 사회나 단체에서 가능해도 그들만 가능하면 그들의 상품이지 그 이상이 되기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자신들의 혁명이 성공해도 이것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만이 자유롭고 주변이 자유롭지 못하면 자신들의 자유에 대해 주변에서 방해하여 결국 우리의 자유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놀이라는 노동은 곧 자신들의 놀이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확대하는 것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되는 점을 배제하면 안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담론을 좋아해서일까? 글을 적은 것에 대해 그동안 생각해보면 대략 그런 느낌이 든다. 뭔가를 결론적인 부분만 언급하기 보다는 그 과정과 원인에 대해 해부를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의 내용이 화생방 훈련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는 기분일 것이다. 눈물, 콧물, 침까지 다 흘리는 현상을 만들려고 하니 그것을 보는 이에게 뭔가 뻥! 하고 뚫리는 기분과 함께 한편으로 뭔가 불편한 기분을 준다. 화생방 훈련실의 최루가스를 마시는 것은 비단 코가 막힌 사람보다 안 막힌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란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내용을 조금 정리한 느낌이었다. 이른바 한국에는 문화콘텐츠산업이 부실한 점과 거기에 대한 대안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 자유로운 사고가 없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사고는 이미 우리 교육에서 막은 지가 옛날이다. 착하고 바른 어린이의 기준은 학교와 학원 잘 가고, 집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다. 그 이상의 아이들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을 귀찮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굴레는 어찌 하면 좋으리까?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더 심각하게 변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감정의 폭은 중요하다. 감정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감각, 인간은 총 5가지 미각, 후각, 시각, 청각, 촉각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면 느낌의 육감일까? 사람이 몸으로 느낄 수도 없는 것을 관념의 세계에서 느낀다. 우리는 바로 그 관념의 세계가 말라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감각에서 보인다. 시각에서는 항상 회색 빌딩과 검은 아스팔트만 보고 푸른 숲과 강물은 보기가 어렵다. 특히 콘크리트가 발라진 강가에선 수변식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미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각에서부터 우리의 감정을 가뭄에 물 마르듯이 사라져간다. 청각은 어떤가? 숲의 소리, 벌레의 울음소리, 물의 흐름소리, 바람의 노래 등을 들어야 한다. 고전 이전의 시대에 신화가 자연과 마주한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물과 돌 심지어 풀까지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애니미즘 내지 샤머니즘, 토템이즘이란 것은 결국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심이다.

 

이제는 자연의 세계를 그런 신비의 눈으로 보는 외경심이 아니라 재앙의 대상이 되는 외경심이 되었다. 인간이 가진 심리적인 요소가 안정되지 않으니 뭔가 불안하게 된다.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는 이 많은 조건에서 인간 스스로가 돌파구를 찾지 아니하면 안 된다. 결국 그것은 정신의 파괴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된다. 가령 우리 주변에서 평범한 가정인데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울증에 걸린 주부, 성적에 시달리는 학생, 소외감에 시달리는 가장 등을 말이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나 역시 그다지 행복감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인간이다.

 

감각이 마비되었는가? 그렇게까지는 아니나, 상당히 시니컬한 요소가 강한 것 같다. 주변에서 내가 제대로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웃는 모양이 마치 비웃음과 비뚤어진 성격이 드러나는 어설픈 웃음,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의 감정이란 결국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따분하고 지겹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최고의 해방구는 죽음이란 타나토스라고 하더라도 그건 역시 좋지 못한 방법이다. 동원되는 요건에서 고통과 공포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자신의 해방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 내면에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그 괴로움을 이기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하나의 이상적 세계, 이런 요소들이 어지럽게 버무려지고 상이하게 흘러가서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표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 이 글을 적기 위해 어제 아침부터 구상했다. 너무 짜증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항상 말하고 싶은데, 인간의 표현과 창의에 대한 부분에서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진짜 천재 혹은 뛰어난 자가 아니면 자신의 탁월한 세계를 보여줄 수 없다.

 

여전히 나에게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영화 <당통>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아내의 남동생의 대화가 생각난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본적이 있는가? 약간 다르지만 영화 <당통>에서 그 남자아이와 말과 대한민국 헌법과 비슷한 말이 나온다. 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어느 인간은 민주공화국이 자본주의다!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맛 들여서 토크빌처럼 그 나라 정치수준이 곧 국민수준이란 말을 실감하게 하는 매우 정확한 사례를 보여준다.)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영화 <당통>을 보면 이 말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대사가 흐릿하나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꼬맹이가 로베스피에르에게 한 말이고, 로베스피에르가 당통과 그 일행을 죽이는데, 자신 스스로가 패배자가 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헌법 제19조처럼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는 언론과 방송이 제일 선행되어야 가치관이다. 언론은 진실성보단 공정성이 우선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 제21조 제1항을 보면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적으려고 하는 담론인 만화, 그것이 참 문제로다. 보시다시피 만화라는 것은 분명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를 가질 언론과 출판물이란 점과 동시에 한편으로 법 제22조 제1항에서도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만화 역시 예술적 가치가 있고, 미학적 가치가 있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도 오히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과 같은 서브컬쳐의 발전을 주목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부분을 드러내기 좋은 것이 서브컬쳐다. 다양성의 공존에서 인간이 억지로 조성된 게 아니라 스스로 표출할 수 있는 것들이 좋은 문화콘텐츠 상품이다.

 

그런데 왜 내가 만화에서 암흑기인 만화분서갱유 시대를 말하려고 하는가? 아직도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도 구분하지 못하는 자기 바보인증 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헌법을 들고 나온 것은 모든 국법에서 헌법이 모법이고, 다른 법과의 마찰에서도 헌법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헌법의 전문으로 통해 그 정신을 볼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7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분명 항일정신과 민주주의 운동 그리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헌법이다. 그런데 유신헌법이 발동한 19721017일 이전에 만화분서갱유가 발생한다. 이때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정병섭이란 어린이가 197221일 당시 목을 매 숨진 사건이 발생한다. 정부와 언론은 이 문제를 모두 만화의 영향이라고 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지금 딱히 정치적인 비판이나 문제를 심각히 걸고 싶지 않으나 그 당시 정부의 만화정책을 주도한 자들이나 또는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만화정책을 건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에서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이 법은 주관하는 부서는 여성가족부이나, 발의한 자는 국회의원이다. 정치적으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법률을 발의하여 가반수가 넘게 되면 그 법이 통과된다. 그러니깐 여성가족부가 주관해도 이 법은 국회의원 누가 했는가가 중요하다. 만화산업을 짓밟는 행위가 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했는가? 이런 법이 용인되는 이유는 국내 교육체계에서 경쟁위주의 입시체제가 그렇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똑같은 것만 강요하기 그렇다. 전체주의적으로 국민들을 하나의 집합체를 만들면 그만큼 정치적 헤게모니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신문기사가 정병섭의 어린이의 죽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볼까나?

 

“31일 오후 55분경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34312호에서 졍병섭군(12, 신성국교 6)이 안방 높이 1.5m 되는 나무선반에 나일론 목도리로 목을 매고 죽어있는 것을 정군의 누나 영지양(15)이 발겨나, 경찰에 신고했다. 가족들에 의하면 정군은 평소 만화를 탐독하고 만화의 주인공 흉내를 잘내는 등 장난이 심했는데, 이날도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온 후 누나 영지양에게 만화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도 살아나더라. 나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영지양이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을 때 정군이 혼자 방안에 남아 목매달아 죽는 자살흉내를 내다가 아주 숨져 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동아일보197221일자).”

 

이 기사 이외에도 정군의 집 주변에 만화점이 10개소나 있어서 만화책이 어린 학생들을 유혹하여 파괴한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흉내라는 것을 보면 TV 드라마나 혹은 기타 방송국에 나오는 프로그램이 더 심각할 것이다. 지금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세세히 읽지 않으나 어떤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를 잡으려다 집을 태우는 것만은 분명하다. 1명의 어린아이가 사회적으로 파급적 효과를 만든 점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일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고문이나 의문사로 죽은 사람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너무 비교되는 현상이다.

 

당시 가수 이장희가 그건 너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가 금지곡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수많은 문화통제 속에서 만화 역시 피할 수 없는 통제대상이었다. 만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저속하고 주변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락물이나 그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주로 어린 학생이란 점과 만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로 표현력을 중시하는 점이다. 표현력을 중시한 만화작가에 대한 검열은 만화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고, 그 상실로 인해 만화가들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게다가 만화와 출판은 분리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만화탄압은 곧 언론과 출판탄압과 연결 짓게 된 것이다.

 

이때 나온 만화로는 일본에서 빼기는 것이나 혹은 순정, SF, 스포츠, 고전 등이다. 이때도 애니메이션이 나오니 바로 <똘이 장군>이다. 아마 나도 어린 시절 본 듯한 기억이 든다.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감추고 적군이나 혹은 적군에 대항하는 자국이나 모두 파시스트이나 그쪽의 파시스트는 더욱 심각한 존재로 만든다. 북한이 괴뢰정부는 맞으나 인간이 살고 있지 않고 돼지가 살고 있었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실제 북한군들이 인간이 아니라 돼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표현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좋으나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무엇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만화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이야기다. 뭐든 만들고 즐기고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는 그것이 어려웠다.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으로 피해를 받았으며, 심의구조 때문에 작가들의 상상력이 차압당했다. 기본적으로 만화는 욕구불만 내지 원하는 욕망에 대한 작가의 상상이 들어 가있기에 가끔 야한 장면이 안 나올 수가 없다. 특히 일본 만화의 경우 성적인 자극력이 매우 강하여 국민의 정부 시절 일본문화 전면개방 때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걱정했다. 그런다고 지금 특별한 문제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게임 샷다운 제도나 만화나 애니메이션 심의가 걸린다. 다양한 담론과 주제가 나오려면 작가들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모든 것에는 시나리오가 존재하기에 그 시나리오는 결국 상상력이다. 상상의 이야기가 무형의 존재인 캐릭터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생긴다. 그러나 헌법보단 이상하게 헌법 아래가 더 강력하다. 그리고 부처도 문제다. 사실 정부부처는 서로 견제하고 보완하는 기능이 있다.

 

가령 환경부와 국토해양부에서 국토해양부는 국토개발을 해야하기에 건설사업이 주가 된다. 하지만 건설사업이 지나치게 주가 되면 환경이 파괴되기에 환경부가 제재를 가한다. 이른바 환경법규로서 개발행위에 대한 조건이 성립하기에 어느 정도 물과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낙동강 페놀사건을 기억하는가? 페놀이 인체에 들어가면 단백질을 침전시키므로 산모가 마실 경우 아이가 낙태되고, 실제 발생되었다. 공기와 같은 경우 황산이나 염산이 나와 기관지를 자극하고 산성비가 되어 토양과 산림, 강물을 오염시킨다.

 

또한 여성가족부와 대립되는 것은 국방부다. 여성문제와 군인문제가 나오는데, 헌법을 보면 군인들의 피해가 큰 것은 맞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라면 여성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남녀문제를 같이 다루어야 한다. 지금 여성가족부가 문제되는 것은 일부러 존치했다는 점이고, 그들이 하는 행위는 집에 아이들에게 공부만 강요하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만 보인다. 그들이 무사히 정치적으로 행위가 가능한 것은 주변 정부기관의 묵인 아래와 국민 내부적인 지지가 있었다. 여성가족부의 패악 질은 집에서 아이들보고 공부! 라고 소리를 지르는 부모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게다가 문화콘텐츠 사업을 죽인다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같은 부서가 어느 정도 중재를 나서야 하나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나 미국, 혹은 유럽국가에서 문화콘텐츠 사업을 국가 장기적으로 관리하며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산업이나 게임 산업 등의 문화콘텐츠사업에 대한 관리를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가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을 여성가족부가 간섭하는 게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중에서 문화콘텐츠산업을 주도하는 부서가 책임지는 것이 바르다. 그 외에도 문화예술, 미디어정책 등의 부서가 존재하고 있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문화콘텐츠산업이다. 이곳에는 문화산업정책과, 영상콘텐츠정책과, 게임콘텐츠산업과, 디지털콘텐츠산업과가 존재한다. 관련기관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이라든지 영상물등급위원회도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아동청소년 관련하여 콘텐츠를 여성가족부 주관하는 성보호법에서 문화산업 정책은 충분히 문화체육관광에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만약 견제적 역할이라면 모르지만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하는 행동들은 너무 소극적이다. 최근에 영상 및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 산업이 발달을 위해 전국 대학교에서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학과가 신설되고 있고, 심지어 고등학교 특성화에 따라 만화애니메이션고등학교 내지 예술고등학교 내의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신설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계열이 생긴 대학이 공주대학교라고 하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 중반가지 꾸준히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부와 고등학교가 늘어 가는데, 여성가족부 주관하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이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장관의 임명과 정부부처 개편은 국회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이란 점이다. 자꾸 여성가족부의 한국 콘텐츠산업에 대한 패악 질에서 여성가족부를 욕할 게 아니라 그렇게 정책적으로 위임한 사람이 문제라는 점이다. 이번에 도래할 정부에서는 해양수산부가 다시 재설치 되는데, 전의 정권에서는 해양수산부를 폐지하였고, 그 이전 정권까지는 해양수산부가 존재했다.

 

결국 국가기관 운영자에 의해 기관의 운영이 다르게 되는 셈이다. 최근 방송통신위원장의 문제점이나 TV방송국 종편에 따라 언론의 편파성에서 크게 실추되었다. 어느 정권이든지 자신의 유리한 요소를 내세우는 것은 할 수 없는 정치적 방법이겠으나, 그 범주라는 것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발생한 만화분서갱유를 일으킨 사람들과 그리고 사람의 위아래의 사람이 누군지, 또한 당시 국회의원을 잘 생각해보자. 분명히 말하지만 여당에서 법을 상정하여 국회통과할 때 누가 했고, 그들이 누구 옆에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변경되면서 2010년부터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청소년과 다문화 가족 등을 포함한 가족 기능을 여성부가 흡수하여 여성가족부가 되었다. 그 기능과 권한은 바로 여성가족부 내가 아니라 정부기관 설립, 통폐합을 추진할 수 있는 결재권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법률 시행 후에 시행령이 있어야 하는데, 시행령은 대통령이 결재권자라는 점이다. 결국 법률로 제정된 패악 적인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이라는 것은 결국 국회와 청와대의 공통작품이다. 여성가족부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은 시행규칙과 고시, 훈령, 공고 수준이다.

 

지침이라는 이른바 세세한 업무는 만들어도 기본적 합의나 운영에 대한 강한 규제성은 오로지 법률에서만 적용된다. 아직도 법을 모르면 법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찾아보면 될 듯하다. 이런 문제는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이용한 군중심리 자극이다. 프로파간다의 수준으로 봐서는 같은 정부기관의 운영에서 만약 여성가족부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이랑 어느 갈등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게 보인 적은 없었다. 정부가 대신 얻어맞아줄 끄나풀만 풀어놓은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가실 여성부의 기능만 하지 가족개념은 보건복지로 돌리고, 문화부분은 문화체육관광부로 이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대부분 좋은 대학교에 집에서는 높은 직에 계신 고급관료들에게 만약 집에 자녀가 있으 면 게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한다면 결코 긍정적인 방향이 될 수 없다. 차라리 문화콘텐츠를 다루는 문화체육관광부야 말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 국가운영 수단에 성이란 것은 항상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성적인 부분을 자꾸 위축하고 억압하고 숨기려 들면, 그만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진다. 세상에 인간들이 있으면 그 중에 반은 여성이고, 반은 남성이다. 당연히 인간이 살아가는데 생존의 에로스와 쾌락적 본능의 리비도는 피할 수 없다.

 

중학교까지 음란물을 안 봐도 고등학교로 올라간 남자아이들이 주변에 여학생을 보고 성적인 욕망에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인간이 가진 동물적 유전자는 피할 수 없는 본능이다. 문제는 그것을 해소할 수 있거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조건을 찾기보단 무조건 억압한다는 점이다. 왜 이것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기보단 아예 그 통로를 막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런 억압을 추구하던 세력의 과거를 보면 국민들에게 성적인 음란함을 막으면서 뒤에서는 양주마시면서 자신의 성욕을 마음껏 즐긴 사람과 그 주변인들이 있다. 그것을 아는가? 밤의 제왕이라고 말이다.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민주주의 조건의 그 사회는 결코 조용할 수 없다. 오히려 갈등이 표면이 드러나고 그것이 공론화되어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사회적 갈등을 강제적으로 배제하는 이상 민주주의의 가치란 없다. 예술로서의 표현에서 당연히 작가의 내부에 담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보는 눈도 있지만,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며 경멸스런 세계도 존재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아비뇽의 여인들의 그 괴이함은 결국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식이 담긴 것이다.

 

 

시대는 현대라도 예술이란 표현적 가치에서 중세 고전주의적 요소만 강조하는 헤게모니의 안에서도 충분히 자유로운 표현을 보일 수가 있다. 특히 만화와 같은 경우는 여러가지 방법에서 표현하기 매우 좋은 방법이다. 만약 그 누군가에게 가진 것이라곤 볼펜과 연필, 종이, 그 종이조차도 이면지나 신문지라도 충분하다. 어디든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또는 수업시간의 지겨움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교과서 끝에다가 만화를 그린 후에 연속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페이퍼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학생들, 그것 역시 창조적 활동이다. 유희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존재해야 예술의 현실성을 더욱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지금 우리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 속에 죽음을 기다리던 롤랑 부인의 대사인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처럼 우리는 자유라는 정의에 대해서 더욱 큰 부정의를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자유란 내 안의 자유와 우리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유가 보장될 때에만 비로소 나의 진정한 자유가 성립된다. 거기서 자신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표현력이란 매우 중요하다.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나 그것에 대한 스토리텔링으로 전환된 곧 예술과 문학으로서 승화되기 시작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동물농장>의 경우 얼마나 지독한 패러디와 암울한 미래가 보이는가?

 

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지 오웰이나 피카소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의 기본적 예술적, 문학적인 발상은 자신의 표현세계의 보장이다. 아무리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거기에 대한 사회적 인프라가 제공되지 않으면 이들을 한국에 있을 수가 없다. 아마 세계적 아티스트인 백남준 선생님의 경우 국내보단 외국에서 더 활동적이었다. 1984년에 발표했다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이 지난 우리에겐 왠지 낯설어 보이는 전경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킬라킬>이란 작품은 가이낙스에서 퇴사한 이마이시 히로유키를 비롯한 몇몇 스텝들이 만든 트리거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트리거에서 제작한 <킬라킬>의 모습에선 상당히 가이낙스적인 요소가 많다. 류코의 친구인 민간쇼쿠의 경우, 그녀가 누구에게 물리적인 충격을 받으면 거기에 의한 충격으로 인해 심각한 부상이나 또는 타격을 입는 것보단 차라리 테니스공처럼 팅겨 나가는 모습이 많다. 이른바 가이낙스에서 사용한 배치기 기법으로 주로 많이 사용된 작품은 <아베노바시 마법상점가>와 <프리크리>이다.

 

특히 <프리크리>의 요소가 다분한 기법이 많은데, 아마도 대부분 가이낙스가 한창 잘 나가던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인 인물들이 많을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를 제작하게 되면서 카라스튜디오로 새로 이전하면서 가이낙스에선 이미 내부적으로 기존의 가이낙스와 다른 경로를 가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킬라킬> 역시 가이낙스의 작품과 비교하여 2000년대 초반에 가까운 형태에 지니고 있고, 오히려 현재의 가이낙스에서는 배치기 기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격을 받게 되면 물리적 반응이 따른다.

 

<특례조지단체 스텔라 여학원 고등과 C3부>에서도 보여주다시피 서바이벌 게임에서 총알을 맞으면 그 물리적 반응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서바이벌 게임에 사용된 탄환이 살상용이 아니더라도 맞으면 약간의 통증에 반응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킬라킬>에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의 이마이시 히로유키의 작품에서 생각하면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에서도 그런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지금의 가이낙스에서는 그런 기법을 전혀 차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킬라킬>의 작품은 가이낙스가 아닌 시점에서 가이낙스의 고유의 기법을 차용한다. 가이낙스는 동화에서 주로 캐릭터에 주력을 쏟는 점이 많은 반면 배경에는 중점을 두지 않았으나, 2010년 <하나마루 유치원>과 2011년 <단탈리안의 서가>에서 배경에 더욱 부각을 주었다. 그러다가 사에키 쇼지의 <메다카 박스>에서는 다시 캐릭터 중심으로 갔으나, 그런다고 배치기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가이낙스는 지금의 모습이 가이낙스 예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종종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감독들을 보면 본래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감독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을 만든 감독들이 제작하는 경우다. 가이낙스 원래의 애니메이터들이 부족한 시점에서 <킬라킬>같은 작품들이 더욱 가이낙스 코드에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낙스를 알려고 하면, 가이낙스는 기존의 것들을 따라하기 보단 하나의 계보로서 계속 다르게 창출되는 점이다.

 

그러나 <킬라킬>이 가이낙스와 지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상징성에 대한 부분이다. <킬라킬>에서는 극제복이란 특수한 의복에 대해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일정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 별이 새겨진 옷을 입으면 필요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별은 1개부터 3개까지며, 류코가 다니는 혼노지학원에 모든 학생들이 입고 있다. 유일하게 입지 않은 사람은 류코의 친구인 마코와 학생회장인 사츠키다.

 

그런 마코와 류코, 사츠키를 제외한 학생들의 의복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의복이란 것은 하나의 계급이란 상징이 따른다. 왜 계급이 생겨나고, 그 계급의 원점을 어디서부터 보는 것이 좋은 것인가? <킬라킬>에서 사츠키의 어머니가 회사에서 강연하는 장면에서 찾아보면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옷을 입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에덴동산의 사과를 따먹어 신에게 화를 사서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자연의 세계에 있다가 문명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동기는 바로 노동이란 점이다.

 

아담이 에덴에 살던 시절에 식량이나 재화가 풍부했으나, 인구증가에 따라 문화인류학적인 견해로서 본다면 자신들이 잘 살던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 경우다. 본래 중동지역에 돼지를 먹지 않으나, 본래는 먹었다고 한다. 뼈나 고문서들이 발견되는 점에서 기후의 변화나 환경적 조건이 따르기에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과일채집이나 사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낯선 환경에 가면 추위나 더위, 그리고 병충해에 의해 생명이 위협에 처해진다. 의복이란 개념은 본래 하나의 상징적 신분보단 인간 신체적 생존에 위한 도구이다.

 

의복이 처음 생긴 것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갈 때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로 가렸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의 용도를 성경에서 의미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으나, 무화과나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로마에서는 바쿠스(Bacchus)라는 주신(酒神)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다산(多産)의 표지로 삼고 있다. 꽃말의 ‘다산’이란 뜻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아시아 서부에서 지중해에 걸쳐 자생한다. 한국(제주)에 분포한다.”라고 되어 있다.

 

쿠스라는 것은 포도주를 의미하고, 그것은 제우스의 아들 중에 하나인 디오니소스라는 신이다.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주는 이 자비로우면서도 무서운 신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이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있다고 소개한다. 결국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포도주는 남성의 성적욕망을 자극하여 다산(多産)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론으로(설마 진짜 누군가 의미를 해석했는지 알 수 없으나) 들어가자면 아담의 무화과나무로 가린 잎은 결국 다산의 상징이었다. 이브는 사과를 먹은 죄로 출산이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나가게 되고, 문명의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이다. 즉, 자연이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다. 노동력의 조건은 당연히 인력이다. 남자의 한문에서 남(男)은 밭전(田)자와 힘력(力)자로 이루어져있다. 남자는 결국 밭을 힘으로 가꾸는 사람이다.

 

노동력의 필요성에서 신은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을 아담에게 노동의 고통을 준 것은 그것이 하나의 문명의 시작이다. 무화과나무가 다산의 상징이고, 농업기반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중요한 요소다. <킬라킬>까지 노동력의 집중화된 농경사회라는 관계없어 보일지는 모르나 인류에 대하여 연구하는 인류학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프로세스에 해당된다. 문명의 발생은 결국 인간이 생계활동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적당한 인구로 유지할 수 있다면 문명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밀림의 우거진 곳에 가면 수 십 명으로 이루어진 원시부족의 삶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부족이 밴드라는 한 구성체를 이루고 일정한 영역에 만족하지 않으면, 충돌이 일어난다. 전쟁의 원인은 원초적으로 식량문제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처럼 식인의 원인은 바로 식량의 문제, 그리고 단백질의 공급이서다. 인간의 영양소에서 지방과 탄수화물은 에너지가 되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나, 단백질은 바로 에너지로 전환이 가능하다. 단백질은 에너지 보충과 면역력, 그리고 생존조건에 필요한 영양소의 근본이다.

 

그것이 부족하면 병에 걸리기도 하고, 생존에 치명적이다. 단백질의 공급은 결국 사냥이나 가축을 도축하는 방법이 있으나,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살이야 한다. 식인문화에서 점차 포로문화가 된 것은 처음에는 식량의 부족이나, 농경사회로 이전되면서 포로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생기고, 대신 포로는 노예로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노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고, 혹은 맛있는 고기로 될 수도 있다. 전쟁의 시작은 문명사회에서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부족의 원인이란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런데 만일 식량이 풍족해지거나 혹은 어느 특정세력만 많이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농경사회에서 농민이란 계급에서 점차 부족과 씨족사회를 벗어나 하나의 무리 내지 사회로 구성되게 된다. 그 중에서 지식을 가지거나 혹은 강력한 무력을 가진 자에게 권력이 오게 된다. 그런 점에서 권력자나 지식을 가진 자는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하나의 도구가 필요하다. 원시부족의 유품을 보면 주로 가면이나 머리장식, 그리고 의복에 의거한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권력적 관계를 하나의 상징성으로 통해 드러내는 점이다. 조금 우습게도 보일지도 모르나,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시점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나 예술품들은 그런 것에 의해 시작했다. 하이데거에 명명한 말 중에 “부정신학”이란 단어가 있는데, 가령 서양에 아주 오래된 교회나 성당이 있을 경우, 우리는 문화재로 여기나,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이고, 신적인 존재가 깃든 신성한 곳이다. 지금도 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종교적 신앙이 존재하겠으나, 기본적으로 문화재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고대시대의 왕족이나 지배계급들이 사용하던 물품이나 무덤 역시 그렇다. 당시에는 하나의 정치적 상징 내지 종교적 상징이라면 지금에 와선 문화재다. 경주의 천마총을 비롯한 많은 신라왕들의 무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을 신화 속에 등장하는 후손이라 하여 신의 후에가 잠든 장소보단 그저 역사적 가치가 있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킬라킬>에서 그런 상징적 요소에 왜 농경사회와 종교적인 부분 그리고 의복이 연계되는가?

 

결국은 의복이란 것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필요할 때는 추위와 더위, 병충해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하나의 권위를 상징하는 요소로 된 것이다. 계속 역사적인 조건에서 덧붙여 설명하면,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 혹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조차도 계급에 따라 의복이 다른 점이다. 왕이 입는 옷과 장식, 신하가 입는 옷과 장식, 평민이 입는 옷과 장식, 성별에 따라 입는 옷과 장식이 모두 다르다. 결국 옷이라는 것은 하나의 계급을 상징하는 요소이다. 농경사회와 전쟁에서 그 상징적 요소는 지배계급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의복이 계급에 따라 바뀌는 것이 고대사회라고 하나, 대신 <킬라킬>에서는 의복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나, <킬라킬>에서 의복의 권력화와 계급화는 전혀 근거 없는 모티프가 아니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상품이고, 상품이 이미지”라는 명제와 더불어 이미지가 가지는 기호에 따라 권력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킬라킬>에서 상품의 이미지에서 극제복에 새겨진 별의 개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별이 1개, 2개, 3개에 따라 계급이 다르게 되고, 거기에 대한 대우나 지위도 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본래 혼노지학원의 학생이 아닌 류코의 경우는 관계자 외부라는 속성이 따르고 있었고, 남은 것은 사츠키와 마코이다. 마코의 경우 원래 테니스부이나, 옷에 별이 없었다. 그녀는 학교 자체에 가는 것조차도 어려웠고, 다른 학생들과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른바 호모사케르라는 것으로 생물학적으로 존재해도,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녀에게 혼노지학원이란 학교라는 사회에 인정받지 못한 사회적 존재이다.

 

처음 류코가 올 때부터 테니스부원으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으며, 친구조차 없어서 류코가 처음 친구였던 것이다. 존재해도 존재할 수 없는 마코에게 그 상징성은 교복에 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가 류코가 부를 만들면서 2성의 극제복을 얻자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보이고, 어느 순간 혼노지학원의 보통학생처럼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의복이란 하나의 계급적인 상징과 더불어 사회적 존재성에서 <킬라킬>은 의복이 결국 권력이고 사회라는 점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회적 기능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언어는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을 언어를 다시 편성한다. 그런 점에서 극제복이 없는 자에게 살아있지 않은 호모사케르에서 죽은 사회성이고, 죽은 언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또 입지 않은 자가 있었다. 그것은 사츠키다. 문제는 사츠키는 제복 대신 다른 의복을 입고, 순결이란 의상을 입게 된다. 그것이 바로 호모사케르와 다른 노모스라는 법 위에 군림하는 자이다. 사츠키는 학생회장이면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사람이다.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으며,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다. 결국 사츠키 아래에서는 모든 학생은 같고, 단지 별의 개수에 따라 계급은 존재해도, 그 별의 개수가 차이나더라도 학교생활에 전혀 불편함은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혼노지학원의 극제복에 따라 학생들의 가족들의 생활의 혜택까지도 다르게 된다. 결국 모든 극제복을 입는 것은 혼노지학원 학생으로 학교교칙 앞에 평등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 평등을 결정하고 만들 수 있는 법위의 군림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노모스라는 의미고, 그 노모스는 바로 사츠키다. 사츠키가 극제복가 필요없다는 것은 극제복을 입는 순간 자신 역시 의복에 의해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밑의 4천왕을 비롯하여 학원 내의 모든 학생과 동일한 조건이 되는 점이다. 자신과 남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상징성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별이 없는 교복과 순결이란 점이다. 그리고 사츠키가 순결을 입든지 안 입든지 그녀는 혼노지학원 주인은 변하지 않는다. 혼노지학원의 수학여행에서 사츠키는 혼노지학원 안에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일본 전 지역에 군림하는 자로 되기 위해 나선다.

 

수학여행에 극제복을 보급받은 학생들이 모든 학원을 점거하여 모든 교복을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회사에서 나오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결국 의복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의 통제에 들어오게 되는 셈이고, 그것이 하나의 감시의 역할을 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프랑스 왕정시대의 열병행사에 대해 나오는데, 군인들이 의식 속에 그들은 모두 개인으로 생명은 소진하나, 그들이 속한 군부대는 영원하기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로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감시가 감시자에 의해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 스스로가 감시자 역할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의복과 같은 동작에서 개인성은 사라지게 된다. 사츠키의 행동에는 결국 의복을 통일하고, 같은 모습을 하는 점에서 모든 권력을 가진 자로서 숨은 감시자가 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사츠키는 판옵티콥이란 일망원형감시탑과 같으며, 그녀가 판옵티콘의 주인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의복의 상징성이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어도 오직 하나만 다르다는 점을 말이다. 그래서 선혈을 입고 온 류코에게 강력한 위기의식을 받은 것은 그런 이유다. 마코는 별이 없으나 학교교복의 기본적인 틀은 같지만, 류코는 기본적으로 교복모양조차도 달랐다.

 

그러나 선혈이란 교복이 지닌 힘은 매우 강력하며, 오직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학생은 류코라는 점이다. 또한 강한 이질적인 힘은 학원 내에서 큰 문제로 되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사츠키는 오히려 류코를 이용하여 극제복의 약점과 문제점을 보완하여 수정하며, 그것을 토대로 수학여행의 전투용 체육복을 만든다. 그렇다면 교복은 결국 전투복이고, 고대사회로 따지면 갑옷이 된다.

 

전투적 기능이 별의 개수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은 결국 불과 천 년 이전의 중세유럽사회의 전투에서도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갑옷, 무기 등 장비가 좋은 기사단이 부족한 무기체계를 가진 국가를 손쉽게 이긴다.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싸울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고, 싸우기 위해서 기사라는 자리가 결국 지배계급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중세유럽에서 기사는 전체 인구대비에 비해 많은 수가 아니었다. <킬라킬>에서는 전투요원은 오직 류코와 마코를 제외한 전 학생이다.

 

의복의 시작이라고 하는 아담의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는 생식과 더불어 노동력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킬라킬>의 의복은 하나의 권력체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따지자면, 충분한 잉여자원 내지 특정계층에 대한 독점이다. 의복과 관련된 각종 옷과 장식들이 하나의 상징성이 되면서 의복은 생물학적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보단 사회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가령 조선시대까지 우리는 저기 지나가는 사람이 왕인지 양반인지 알 수 없으나, 단지 의복으로서 확인이 가능하다. 도포마루에 긴 갓을 착용한 사람이 양반계급인 점이다.

 

그것은 의복의 실용성에 의해 착용하기보단 의복의 상징성에 의해 착용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문명사회로 넘어가면서 계급의 분할로 피지배계층의 노동계급과 지배계층 분리에서 그것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의복이다. 의복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킬라킬>이 비록 단순히 교복에 의해 구분되나,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위에서 언급했다. 그것은 상표의 메이커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사는 의복은 실제 가격적인 가치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90%는 상표의 브랜드가격이다. 즉 이미지의 소비로 통해 하나의 기호를 획득한다.

 

남자들의 시계, 여자들의 가방은 실생활에 의해 필요하나, 그 필요의 이상으로 과다하게 소비된다. 그것이 바로 소비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권위다. 어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품의 브랜드가 바로 그 사람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위치를 알려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단지 <킬라킬>에서는 극제복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극제복을 입는 것은 권력과 사회성을 얻는 것이고, 입지 못하면 권력과 사회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을 파괴하고 다른 시스템이 구비된다면 그것은 곧 Revolution, 혁명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Salo Or 120 Days Of Sodom (살로, 소돔의 120일) (Criterion Collection) (한글무자막)(Blu-ray) (1975)
Criterion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드가 저술한 <소돔의 120일>에서와 달리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기본적으로 가학성을 띄고 있으나, 그 주제가 다른 것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1784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약 37일 동안 혼자 깨알 같은 글씨로 소설을 만든 것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사드가 저술한 도서를 영화로 각본하여 만든 것이다.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제작한 <살로소돔의 120일>은 분명 <소돔의 120일>에서 가지고 온 모티브나 등장인물 요소에서 유사한 점은 있으나 다른 점도 있다.

 

마장의 역할, 즉 4인의 무자비한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뽑은 성기가 아주 큰 남성이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선 도락자를 위해 선발이라면,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파시스트의 부하라는 점이다. 총을 들고 있어서 억울하게 잡힌 사람들에게 위협적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4인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기도 한다. 아니 그들도 즐기기도 한다. 소돔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부여받은 성적 윤리를 배신한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한 다소의 거부감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 역시 인간적 권리를 부여 받을 자격이 그들을 탓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관계없이 DNA, 즉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본인들도 힘겨워 하는 점이다. 적어도 그들은 타인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악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등장한 남색을 즐기는 4인방은 자기만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 대한 생명력을 인정하기보단 그 생명력을 부정하는 신적 모독에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가톨릭 내지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기에 딱히 무엇이라 말하기가 어려우나 적어도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국 정서적으로도 <소돔의 120일>과 <살로소돔의 120일>은 금기를 위반한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20대 아름다운 여성, 그들은 남자 4인방들의 딸들로 그 딸들은 그 상대 남자에 대한 아내로 삼아진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근친상간에 남색까지 인정되므로 어느 사회에서 금기로 다루던 인간의 윤리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민족과 국가에서는 딸이 아버지와 혹은 아들이 어머니와 성적관계를 갖는 것이 허용된다고 하나 보편적으로 근친상간은 크나큰 죄악이 성립된다. 동성연애라도 고대그리스도 <소돔의 120일>처럼 하지 않는다.

 

에로스란 단어가 사실은 남녀 간의 사랑보단 오히려 늙은 현학적인 남자와 그 남자를 흠모하는 젊은 소년이 같이 자리를 하는 것이다. 고대그리스 사회에서는 동성연애가 하나의 문화적인 권력의 유지인 셈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로스의 위치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고 또한, 에로스는 1968년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에선 하나의 생명력으로 폭발한다. 하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이란 서적을 봐도 그렇지만, 결국 에로스는 생명을 이어가려고 하는 생존욕구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에로스적인 욕구는 인간의 번식에 대한 요건도 중요하다. 생명의 연계성에서 에로스야 말로 우리 인류는 보존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Libido 즉 무의식적인 성적 에너지가 원천적이라고 하여도 에로스란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그 에로스라는 것을 모조리 부정한다. 그저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파괴의 향연을 즐기는 것이다. <소돔의 120일>나 <살로소돔의 120일>에서 귀족 역할을 한 포악한 자는 역시 어머니를 저주한다. 자신을 이 세상에 나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큰 죄고, 자신의 생명력은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관계로 통한 성적쾌락으로 만족했기에 보상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따라서 이미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창부보다 못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런 4인의 포악한 행위를 4명의 늙은 창부의 이야기로 통해 몰고 간다.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1부가 희생자들의 모아 저택에 가는 것과 2부는 변태적 성욕, 3부는 분비물과 고문에 대한 이야기, 4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소돔의 120일>은 성적쾌락을 위해 1부에서 4부까지를 다룬다면, <살로소돔의 120일>은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들은 파시스트에 대한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남색을 하고 어린 소녀의 순결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분뇨를 먹이거나 자기 얼굴에 소변을 뿌리라는 이상한 도락에서 벗어나 채찍질과 가학적인 폭력, 그리고 4부에서 보인 육체적인 가해는 영화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은 당시 루이16세 즉 앙시앵 레짐이란 구체제 속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감옥의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인물은 다미엥이다. 다미엥은 주군인 루이15세를 살해하려다 체포된 하급관리로 그의 사형은 물리적인 신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왕의 신성성을 내세워야 한다.

 

다미엥의 죽음은 그렇게 쉽지 않다. 상처를 내고 수은 같은 것을 붓고, 최후에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에도 매우 잔혹한 처벌방법이 있었다. 사드의 원작을 봐도 4부에 나온 잔혹한 고문과 처형방법은 프랑스에서 기존에 있던 방법이다. 4부를 보면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 성욕을 해결하는 미치광이 도락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그 4인방은 희생자를 대상으로 눈을 도려내거나 손톱과 발톱을 뽑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며, 최후에 팔과 다리를 자른다.

 

그들이 베어버린 사람의 몸이란 그저 자신들이 자연적으로 물러 받은 생명에 대한 고귀함을 부정하고, 오히려 자연적이란 죽음을 선사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로스가 아닌 타나토스, <소돔의 120일>의 미학적 요소는 바로 타나토스의 극치이다. 파괴와 죽음의 욕망을 희생자에게 전가하여 성적 쾌락을 느낀다. 물론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도 고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4인방은 성적욕망을 느낀다. 법원장은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만든 여자가 형을 집행 받는 순간 사정을 한다고 한다.

 

결국 생명을 부수는 것으로 성적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파괴적이고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쾌락을 추구함이 <소돔의 120일>이다. 그렇지만 <살로소돔의 120일>은 다르다. 그런 요소를 쾌락으로 즐기는 것도 있으나 오히려 파괴와 변태적인 가학으로 통해 파시스트의 미학을 추구한 점이다. 폭력의 미학이란 결국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파시스트이면서 본인이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폭력의 미학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정의의 미학으로 여길 것이다.

 

오히려 폭력으로 실행되는 의지가 오히려 정의라는 명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폭력의 이면에는 진실의 은폐와 권력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렇다. 파시스트가 추구하는 폭력성에서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누가 직접 고문과 살해했는지 모르나, 아마 4인방이 직접 할 가능성이 높으나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에서는 마장을 비롯한 파시스트 군대가 직접 그 행위를 돕는다. 그 의미는 그들의 폭력성에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폭력의 무질서야 말로 오히려 질서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정치적 의미를 목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도락자 내지 미치광이 변태들이 성직자, 귀족, 상인들과 같이 당대 상류계층이란 것이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에서 당시 사드가 워낙 방탕한 생활을 공개적으로 즐긴 것을 생각해보면 사드는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뒤에서 변태적 성욕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을 비꼬는 것이다. 영화는 상류계층에 대한 비꼬는 것보단 오히려 파시스트들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마지막에 왜 살육의 현장을 망원경으로 보면서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폭력을 일으키는 자들이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면 조장하는 것이다. 폭력이어야 말로 오히려 정치적으로 정의를 두는 것이 파시즘에서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수단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공포이다. 상대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거나 혹은 폭력을 가해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만큼 큰 쾌락이 없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통한 공포로서 인간의 통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만들며, 그 공포의 정치로 지배할 수 있다는 하나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에서는 사디즘이란 성적 쾌락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타나토스의 미학이라면,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우월주의를 폭력이란 수단으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왠지 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 퍼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폭력이 정의라고 믿는 하나의 광기에서 그것이 곧 사회적 미학으로 이어지는 것이 파시스트적 요소다. 가십거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한 각종 폭력적 수단(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이 용인되기에 저런 영화가 지금 봐도 다소 공감되었다.

 

영화가 1975년에 제작된 점에서 최신영화와 비교하여 화질이나 카메라 앵글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도 영화배우의 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소돔의 120일>의 1부에서 이야기꾼으로 나오는 뒤클로 역을 바까리 부인이 맡았는데, 그녀를 비롯한 이야기꾼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춤도 춘다. 하나의 음률로 통해 마치 뮤지컬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4부에서 분위기가 조금 어두울 때 만담형식을 가진 이야기꾼의 재능은 그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맛인 것이다. 화면의 구도가 세련되지 못함에도 연기를 하는 배우의 연기력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추악하고 잔혹하고 변태적이며 불결한 요소를 어김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8세기 위대한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인류를 뒤흔드는 책을 창간했다. 하나는 <사회계약론>이고, 하나는 <에밀>이다. <사회계약론>이란 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을 중심으로 대한 정치체에 대한 서적이다. 민주주의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통용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사회계약론>을 고려하지 않음은 민주주의국가에서 담론조차 꺼내지 못할 수준이라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 정도로 삼권분할에서 입법, 행정, 사법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로운 존재였으나, 사회에 종속되면서 그 자유가 박탈되기에 자연주의자인 루소의 관점에서 인간의 인위적인 문명이야 말로 인류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다. 

 

그런 논리로 따지면 틀린 말이 아니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이익과 행복을 준 만큼 그 이상의 댓가를 치르게 했다. 전쟁이나 질병 그리고 환경오염은 늘 우리에게 생존위기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에밀>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과 동시에 그러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철학서적이고 교육학 도서이기도 하나, 그렇게 딱딱하지 않고, 하나의 소설처럼 꾸며진 책이다.

 

에밀이란 소년은 가상의 고아로 등장하며 글쓰이는 에밀의 가상의 후견인으로서 에밀을 어릴 때부터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 같이 동고동락한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누굴까? 에밀에겐 저자의 역할은 아저씨 정도나, 그 책에서는 제일 좋은 선생님은 아버지고, 그래 따지자면 부모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바로 가족과의 단절감이고, 인간이 인간으로 갖출 교양이 가정보단 학교라는 집단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집단주의적 성향이 인간을 하나의 부품처럼 만들게 된다.

 

문명의 사회라는 집단에서 지식을 가르쳐주는 학교는 지식만 가르쳐주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에밀>이란 서적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적는다. 자연에서 나무를 베거나 물고기를 낚거나 혹은 각종 물건을 만든다. 자신의 노동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매기는 점에서, 루소의 살던 시절인 유럽에선 사실 어린이란 어린이보단 작은어른에 가깝다.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노동의 시작은 결국 정식교육절차를 밟은 중고등학교 이상이란 점이다. 최근엔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들에게 노동의 시작은 20대 후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근대이전이나 혹은 근대라도 아이들은 일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생계의무를 부여했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을 했다. 어른의 1명의 노동량을 채우지 못해도, 노동의 1인이란 개념은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에밀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억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찾을 수 있게 한다. 사실 프랑스 절대왕정 사회에서 루이 16세는 루소에 대해 무척이나 비웃었으나, 루이의 아버지는 루이에게 열쇠와 자물쇠를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루이 16세는 자물쇠 만들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을 왕이란 계급에서도 루이의 자물쇠란 취미는 루소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루소의 교육철학의 소중한 부분은 모유의 수유다. 아이의 영양분을 어머니의 유방에서 나오는 젖이 아니라 유모나 혹은 우유에 의지하나, 사실 최근 의학계에서도 모유로 성장한 아이들이 튼튼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과학적 근거보다 하나의 교육철학관념인 <에밀>이나 우리의 교육철학에서 루소의 사상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가두는 게 아니라 스스로 땅을 달리고, 물을 헤치며, 하늘을 보며 자라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최근에 나온 <논논비요리>와 <은수저>는 루소의 교육철학과 부합된다. 고등학생이 노동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은 아니나 집안일이나 혹은 학교교육과정에서 이론적인 것보단 실제 농축산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보여준다. 학생 스스로가 농축산품을 만들어 팔기도 먹기도 하며, 그것을 토대로 가사일을 돕거나 이어간다.

 

<논논비요리>에서는 4명인 소녀들이 작은 학교에서 자연과 친구하며 보낸다. 도쿄에서 전학온 소녀가 시골에 와서 직접 자연과 체험하고, 산에 들나물을 캐어 그것을 먹는 것은 삶의 경험이란 교육이다. 지식과 소비에 의해서 우리는 먹는 음식물이 아니라 직접 생산과 생활에서 나오는 음식물이다. 삶의 자리에서 얻어지는 교육에서 인간의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타인의 교류를 활발하게 해준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모두와의 세상에서 말이다. 학교에서는 지식만 알려주고 좋은 학교에 가기를 원하지 어느 인간이 되고 어떻게 살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비겁하나 냉정하고 흉폭한 인간으로 키워지도록 만드는 하나의 시스템만 제공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 공장, 직장은 하나의 감시체제를 만든 통제기구라고 한다. 우리는 통제된 세상에 살며, 타인의 눈에 의지한다. 물론 타인과의 공존과 공감이 중요하나, 그것이 아닌 통제라는 공동적인 감시는 우리의 자율성을 떨어지게 한다. 타성에 젖은 시기에 <논논비요리>나 <은수저>와 같은 작품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익보단 모두의 즐거움을 바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아찾기도 있으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4-01-1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수저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데 예정대로라면 올해엔 개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런데 워낙 농사짓고 가축 사육하는 모습이 자세하여 이걸 어떻게 영상으로 담을지 염려되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1-15 21:50   좋아요 0 | URL
저도 참 기대되는 소식이군요. 가축을 키우는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하기 어렵겠죠. 말이 연기지만, 연기라도 기본이 있어야 하는법,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