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담론을 좋아해서일까? 글을 적은 것에 대해 그동안 생각해보면 대략 그런 느낌이 든다. 뭔가를 결론적인 부분만 언급하기 보다는 그 과정과 원인에 대해 해부를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의 내용이 화생방 훈련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는 기분일 것이다. 눈물, 콧물, 침까지 다 흘리는 현상을 만들려고 하니 그것을 보는 이에게 뭔가 뻥! 하고 뚫리는 기분과 함께 한편으로 뭔가 불편한 기분을 준다. 화생방 훈련실의 최루가스를 마시는 것은 비단 코가 막힌 사람보다 안 막힌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란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내용을 조금 정리한 느낌이었다. 이른바 한국에는 문화콘텐츠산업이 부실한 점과 거기에 대한 대안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 자유로운 사고가 없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사고는 이미 우리 교육에서 막은 지가 옛날이다. 착하고 바른 어린이의 기준은 학교와 학원 잘 가고, 집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다. 그 이상의 아이들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을 귀찮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굴레는 어찌 하면 좋으리까?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더 심각하게 변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감정의 폭은 중요하다. 감정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감각, 인간은 총 5가지 미각, 후각, 시각, 청각, 촉각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면 느낌의 육감일까? 사람이 몸으로 느낄 수도 없는 것을 관념의 세계에서 느낀다. 우리는 바로 그 관념의 세계가 말라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감각에서 보인다. 시각에서는 항상 회색 빌딩과 검은 아스팔트만 보고 푸른 숲과 강물은 보기가 어렵다. 특히 콘크리트가 발라진 강가에선 수변식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미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각에서부터 우리의 감정을 가뭄에 물 마르듯이 사라져간다. 청각은 어떤가? 숲의 소리, 벌레의 울음소리, 물의 흐름소리, 바람의 노래 등을 들어야 한다. 고전 이전의 시대에 신화가 자연과 마주한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물과 돌 심지어 풀까지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애니미즘 내지 샤머니즘, 토템이즘이란 것은 결국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심이다.

 

이제는 자연의 세계를 그런 신비의 눈으로 보는 외경심이 아니라 재앙의 대상이 되는 외경심이 되었다. 인간이 가진 심리적인 요소가 안정되지 않으니 뭔가 불안하게 된다.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는 이 많은 조건에서 인간 스스로가 돌파구를 찾지 아니하면 안 된다. 결국 그것은 정신의 파괴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된다. 가령 우리 주변에서 평범한 가정인데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울증에 걸린 주부, 성적에 시달리는 학생, 소외감에 시달리는 가장 등을 말이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나 역시 그다지 행복감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인간이다.

 

감각이 마비되었는가? 그렇게까지는 아니나, 상당히 시니컬한 요소가 강한 것 같다. 주변에서 내가 제대로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웃는 모양이 마치 비웃음과 비뚤어진 성격이 드러나는 어설픈 웃음,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의 감정이란 결국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따분하고 지겹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최고의 해방구는 죽음이란 타나토스라고 하더라도 그건 역시 좋지 못한 방법이다. 동원되는 요건에서 고통과 공포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자신의 해방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 내면에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그 괴로움을 이기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하나의 이상적 세계, 이런 요소들이 어지럽게 버무려지고 상이하게 흘러가서 하나의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표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 이 글을 적기 위해 어제 아침부터 구상했다. 너무 짜증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항상 말하고 싶은데, 인간의 표현과 창의에 대한 부분에서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진짜 천재 혹은 뛰어난 자가 아니면 자신의 탁월한 세계를 보여줄 수 없다.

 

여전히 나에게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영화 <당통>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아내의 남동생의 대화가 생각난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본적이 있는가? 약간 다르지만 영화 <당통>에서 그 남자아이와 말과 대한민국 헌법과 비슷한 말이 나온다. 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어느 인간은 민주공화국이 자본주의다!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맛 들여서 토크빌처럼 그 나라 정치수준이 곧 국민수준이란 말을 실감하게 하는 매우 정확한 사례를 보여준다.)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영화 <당통>을 보면 이 말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대사가 흐릿하나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꼬맹이가 로베스피에르에게 한 말이고, 로베스피에르가 당통과 그 일행을 죽이는데, 자신 스스로가 패배자가 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헌법 제19조처럼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는 언론과 방송이 제일 선행되어야 가치관이다. 언론은 진실성보단 공정성이 우선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 제21조 제1항을 보면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적으려고 하는 담론인 만화, 그것이 참 문제로다. 보시다시피 만화라는 것은 분명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를 가질 언론과 출판물이란 점과 동시에 한편으로 법 제22조 제1항에서도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 만화 역시 예술적 가치가 있고, 미학적 가치가 있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도 오히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과 같은 서브컬쳐의 발전을 주목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부분을 드러내기 좋은 것이 서브컬쳐다. 다양성의 공존에서 인간이 억지로 조성된 게 아니라 스스로 표출할 수 있는 것들이 좋은 문화콘텐츠 상품이다.

 

그런데 왜 내가 만화에서 암흑기인 만화분서갱유 시대를 말하려고 하는가? 아직도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도 구분하지 못하는 자기 바보인증 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헌법을 들고 나온 것은 모든 국법에서 헌법이 모법이고, 다른 법과의 마찰에서도 헌법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헌법의 전문으로 통해 그 정신을 볼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7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분명 항일정신과 민주주의 운동 그리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헌법이다. 그런데 유신헌법이 발동한 19721017일 이전에 만화분서갱유가 발생한다. 이때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정병섭이란 어린이가 197221일 당시 목을 매 숨진 사건이 발생한다. 정부와 언론은 이 문제를 모두 만화의 영향이라고 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다. 지금 딱히 정치적인 비판이나 문제를 심각히 걸고 싶지 않으나 그 당시 정부의 만화정책을 주도한 자들이나 또는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만화정책을 건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에서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이 법은 주관하는 부서는 여성가족부이나, 발의한 자는 국회의원이다. 정치적으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법률을 발의하여 가반수가 넘게 되면 그 법이 통과된다. 그러니깐 여성가족부가 주관해도 이 법은 국회의원 누가 했는가가 중요하다. 만화산업을 짓밟는 행위가 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했는가? 이런 법이 용인되는 이유는 국내 교육체계에서 경쟁위주의 입시체제가 그렇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똑같은 것만 강요하기 그렇다. 전체주의적으로 국민들을 하나의 집합체를 만들면 그만큼 정치적 헤게모니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신문기사가 정병섭의 어린이의 죽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볼까나?

 

“31일 오후 55분경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34312호에서 졍병섭군(12, 신성국교 6)이 안방 높이 1.5m 되는 나무선반에 나일론 목도리로 목을 매고 죽어있는 것을 정군의 누나 영지양(15)이 발겨나, 경찰에 신고했다. 가족들에 의하면 정군은 평소 만화를 탐독하고 만화의 주인공 흉내를 잘내는 등 장난이 심했는데, 이날도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온 후 누나 영지양에게 만화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도 살아나더라. 나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영지양이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을 때 정군이 혼자 방안에 남아 목매달아 죽는 자살흉내를 내다가 아주 숨져 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동아일보197221일자).”

 

이 기사 이외에도 정군의 집 주변에 만화점이 10개소나 있어서 만화책이 어린 학생들을 유혹하여 파괴한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흉내라는 것을 보면 TV 드라마나 혹은 기타 방송국에 나오는 프로그램이 더 심각할 것이다. 지금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세세히 읽지 않으나 어떤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를 잡으려다 집을 태우는 것만은 분명하다. 1명의 어린아이가 사회적으로 파급적 효과를 만든 점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일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고문이나 의문사로 죽은 사람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너무 비교되는 현상이다.

 

당시 가수 이장희가 그건 너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가 금지곡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수많은 문화통제 속에서 만화 역시 피할 수 없는 통제대상이었다. 만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저속하고 주변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락물이나 그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주로 어린 학생이란 점과 만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로 표현력을 중시하는 점이다. 표현력을 중시한 만화작가에 대한 검열은 만화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고, 그 상실로 인해 만화가들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게다가 만화와 출판은 분리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만화탄압은 곧 언론과 출판탄압과 연결 짓게 된 것이다.

 

이때 나온 만화로는 일본에서 빼기는 것이나 혹은 순정, SF, 스포츠, 고전 등이다. 이때도 애니메이션이 나오니 바로 <똘이 장군>이다. 아마 나도 어린 시절 본 듯한 기억이 든다.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감추고 적군이나 혹은 적군에 대항하는 자국이나 모두 파시스트이나 그쪽의 파시스트는 더욱 심각한 존재로 만든다. 북한이 괴뢰정부는 맞으나 인간이 살고 있지 않고 돼지가 살고 있었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실제 북한군들이 인간이 아니라 돼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표현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좋으나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무엇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만화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이야기다. 뭐든 만들고 즐기고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는 그것이 어려웠다. 사회적으로 왜곡된 인식으로 피해를 받았으며, 심의구조 때문에 작가들의 상상력이 차압당했다. 기본적으로 만화는 욕구불만 내지 원하는 욕망에 대한 작가의 상상이 들어 가있기에 가끔 야한 장면이 안 나올 수가 없다. 특히 일본 만화의 경우 성적인 자극력이 매우 강하여 국민의 정부 시절 일본문화 전면개방 때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걱정했다. 그런다고 지금 특별한 문제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게임 샷다운 제도나 만화나 애니메이션 심의가 걸린다. 다양한 담론과 주제가 나오려면 작가들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모든 것에는 시나리오가 존재하기에 그 시나리오는 결국 상상력이다. 상상의 이야기가 무형의 존재인 캐릭터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생긴다. 그러나 헌법보단 이상하게 헌법 아래가 더 강력하다. 그리고 부처도 문제다. 사실 정부부처는 서로 견제하고 보완하는 기능이 있다.

 

가령 환경부와 국토해양부에서 국토해양부는 국토개발을 해야하기에 건설사업이 주가 된다. 하지만 건설사업이 지나치게 주가 되면 환경이 파괴되기에 환경부가 제재를 가한다. 이른바 환경법규로서 개발행위에 대한 조건이 성립하기에 어느 정도 물과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낙동강 페놀사건을 기억하는가? 페놀이 인체에 들어가면 단백질을 침전시키므로 산모가 마실 경우 아이가 낙태되고, 실제 발생되었다. 공기와 같은 경우 황산이나 염산이 나와 기관지를 자극하고 산성비가 되어 토양과 산림, 강물을 오염시킨다.

 

또한 여성가족부와 대립되는 것은 국방부다. 여성문제와 군인문제가 나오는데, 헌법을 보면 군인들의 피해가 큰 것은 맞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라면 여성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남녀문제를 같이 다루어야 한다. 지금 여성가족부가 문제되는 것은 일부러 존치했다는 점이고, 그들이 하는 행위는 집에 아이들에게 공부만 강요하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만 보인다. 그들이 무사히 정치적으로 행위가 가능한 것은 주변 정부기관의 묵인 아래와 국민 내부적인 지지가 있었다. 여성가족부의 패악 질은 집에서 아이들보고 공부! 라고 소리를 지르는 부모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게다가 문화콘텐츠 사업을 죽인다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같은 부서가 어느 정도 중재를 나서야 하나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나 미국, 혹은 유럽국가에서 문화콘텐츠 사업을 국가 장기적으로 관리하며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산업이나 게임 산업 등의 문화콘텐츠사업에 대한 관리를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가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을 여성가족부가 간섭하는 게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중에서 문화콘텐츠산업을 주도하는 부서가 책임지는 것이 바르다. 그 외에도 문화예술, 미디어정책 등의 부서가 존재하고 있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문화콘텐츠산업이다. 이곳에는 문화산업정책과, 영상콘텐츠정책과, 게임콘텐츠산업과, 디지털콘텐츠산업과가 존재한다. 관련기관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이라든지 영상물등급위원회도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아동청소년 관련하여 콘텐츠를 여성가족부 주관하는 성보호법에서 문화산업 정책은 충분히 문화체육관광에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만약 견제적 역할이라면 모르지만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하는 행동들은 너무 소극적이다. 최근에 영상 및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 산업이 발달을 위해 전국 대학교에서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학과가 신설되고 있고, 심지어 고등학교 특성화에 따라 만화애니메이션고등학교 내지 예술고등학교 내의 만화애니메이션학과가 신설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계열이 생긴 대학이 공주대학교라고 하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 중반가지 꾸준히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부와 고등학교가 늘어 가는데, 여성가족부 주관하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이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장관의 임명과 정부부처 개편은 국회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이란 점이다. 자꾸 여성가족부의 한국 콘텐츠산업에 대한 패악 질에서 여성가족부를 욕할 게 아니라 그렇게 정책적으로 위임한 사람이 문제라는 점이다. 이번에 도래할 정부에서는 해양수산부가 다시 재설치 되는데, 전의 정권에서는 해양수산부를 폐지하였고, 그 이전 정권까지는 해양수산부가 존재했다.

 

결국 국가기관 운영자에 의해 기관의 운영이 다르게 되는 셈이다. 최근 방송통신위원장의 문제점이나 TV방송국 종편에 따라 언론의 편파성에서 크게 실추되었다. 어느 정권이든지 자신의 유리한 요소를 내세우는 것은 할 수 없는 정치적 방법이겠으나, 그 범주라는 것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발생한 만화분서갱유를 일으킨 사람들과 그리고 사람의 위아래의 사람이 누군지, 또한 당시 국회의원을 잘 생각해보자. 분명히 말하지만 여당에서 법을 상정하여 국회통과할 때 누가 했고, 그들이 누구 옆에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변경되면서 2010년부터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청소년과 다문화 가족 등을 포함한 가족 기능을 여성부가 흡수하여 여성가족부가 되었다. 그 기능과 권한은 바로 여성가족부 내가 아니라 정부기관 설립, 통폐합을 추진할 수 있는 결재권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법률 시행 후에 시행령이 있어야 하는데, 시행령은 대통령이 결재권자라는 점이다. 결국 법률로 제정된 패악 적인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이라는 것은 결국 국회와 청와대의 공통작품이다. 여성가족부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은 시행규칙과 고시, 훈령, 공고 수준이다.

 

지침이라는 이른바 세세한 업무는 만들어도 기본적 합의나 운영에 대한 강한 규제성은 오로지 법률에서만 적용된다. 아직도 법을 모르면 법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찾아보면 될 듯하다. 이런 문제는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이용한 군중심리 자극이다. 프로파간다의 수준으로 봐서는 같은 정부기관의 운영에서 만약 여성가족부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이랑 어느 갈등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게 보인 적은 없었다. 정부가 대신 얻어맞아줄 끄나풀만 풀어놓은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가실 여성부의 기능만 하지 가족개념은 보건복지로 돌리고, 문화부분은 문화체육관광부로 이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대부분 좋은 대학교에 집에서는 높은 직에 계신 고급관료들에게 만약 집에 자녀가 있으 면 게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한다면 결코 긍정적인 방향이 될 수 없다. 차라리 문화콘텐츠를 다루는 문화체육관광부야 말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 국가운영 수단에 성이란 것은 항상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성적인 부분을 자꾸 위축하고 억압하고 숨기려 들면, 그만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진다. 세상에 인간들이 있으면 그 중에 반은 여성이고, 반은 남성이다. 당연히 인간이 살아가는데 생존의 에로스와 쾌락적 본능의 리비도는 피할 수 없다.

 

중학교까지 음란물을 안 봐도 고등학교로 올라간 남자아이들이 주변에 여학생을 보고 성적인 욕망에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인간이 가진 동물적 유전자는 피할 수 없는 본능이다. 문제는 그것을 해소할 수 있거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조건을 찾기보단 무조건 억압한다는 점이다. 왜 이것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기보단 아예 그 통로를 막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런 억압을 추구하던 세력의 과거를 보면 국민들에게 성적인 음란함을 막으면서 뒤에서는 양주마시면서 자신의 성욕을 마음껏 즐긴 사람과 그 주변인들이 있다. 그것을 아는가? 밤의 제왕이라고 말이다.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민주주의 조건의 그 사회는 결코 조용할 수 없다. 오히려 갈등이 표면이 드러나고 그것이 공론화되어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사회적 갈등을 강제적으로 배제하는 이상 민주주의의 가치란 없다. 예술로서의 표현에서 당연히 작가의 내부에 담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보는 눈도 있지만,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며 경멸스런 세계도 존재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아비뇽의 여인들의 그 괴이함은 결국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식이 담긴 것이다.

 

 

시대는 현대라도 예술이란 표현적 가치에서 중세 고전주의적 요소만 강조하는 헤게모니의 안에서도 충분히 자유로운 표현을 보일 수가 있다. 특히 만화와 같은 경우는 여러가지 방법에서 표현하기 매우 좋은 방법이다. 만약 그 누군가에게 가진 것이라곤 볼펜과 연필, 종이, 그 종이조차도 이면지나 신문지라도 충분하다. 어디든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또는 수업시간의 지겨움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교과서 끝에다가 만화를 그린 후에 연속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페이퍼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학생들, 그것 역시 창조적 활동이다. 유희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존재해야 예술의 현실성을 더욱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지금 우리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광기 속에 죽음을 기다리던 롤랑 부인의 대사인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처럼 우리는 자유라는 정의에 대해서 더욱 큰 부정의를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자유란 내 안의 자유와 우리만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유가 보장될 때에만 비로소 나의 진정한 자유가 성립된다. 거기서 자신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표현력이란 매우 중요하다.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나 그것에 대한 스토리텔링으로 전환된 곧 예술과 문학으로서 승화되기 시작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동물농장>의 경우 얼마나 지독한 패러디와 암울한 미래가 보이는가?

 

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지 오웰이나 피카소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의 기본적 예술적, 문학적인 발상은 자신의 표현세계의 보장이다. 아무리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거기에 대한 사회적 인프라가 제공되지 않으면 이들을 한국에 있을 수가 없다. 아마 세계적 아티스트인 백남준 선생님의 경우 국내보단 외국에서 더 활동적이었다. 1984년에 발표했다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이 지난 우리에겐 왠지 낯설어 보이는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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