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놀이로서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어렵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농사문화에서 봐야할 것이다. 농사문화가 원래 힘들고 고된 노동이나 하루에 일정량만 노동을 하고, 계절적으로 겨울이 오면 더 이상 노동 대신 여가를 구사하게 된다. 단지 현대사회는 자본주의구조와 더불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1차 산업으로 해결할 수 없고, 자본주의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해도 1차 산업을 배제하면 살아날 수 없다. 우선 인간이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1차 산업이 대부분 식량과 관련된 산업이기 때문이다.

 

놀이와 관련하여 노동이 유희적 놀이로 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습관이나 취미를 넘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포스트모던 사회로 인해 서로간의 오프라인적인 인간관계 형성보다는 온라인적인 인간관계가 강하다. 비록 같은 학교 친구라고 해도 그들의 만남은 실존적으로 놀이터나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게임으로 이루어지고, 얼굴을 직접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을 이용한 문자, 전화, 카톡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통한 인터넷의 세계까지 잠식했다.

 

따라서 노동이 놀이로 되기 위해서는 개인과의 격차를 분리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여기에 대한 새로운 대안점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의 communist요소와 마르크스의 communist를 나쁘게 사용한 마오주의나 스탈린주의와 달린 마르크스는 미래의 노동은 놀이로 보자고 했다. 노동에서 해방되어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활동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것이다.

 

놀이와 관련하여 서양의 동굴벽화 중에 프랑스 라스코 동물벽화를 잘 생각해야 한다. 당시 인간은 1차 산업의 대표주자격인 농업과 축산업 대신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고 물고기를 잡은 원시적 경제활동이었다. 가령 문화인류학 도서를 보면 원시부족이 하루 3시간만 일해도 며칠은 놀 수 있는 것은 자연의 혜택이 존재한다는 점과 그들이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이로서 사냥은 한다. 의식을 치루고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춘다.

 

문제는 춤과 노래는 인간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활동이면서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대화라는 것이다. 인들에게 신이란 정말 신이 아니라 이들의 공동체사회에서 필요한 놀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예술에 대해 알베르 카뮈가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기에 그렇다고 한다. 예술이란 어떻게 보면 만드는 그 순간에 예술을 만들겠다는 것보다는 하나의 상징적 권위적 요소로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방가르드 이전의 예술들은 왕권, 귀족, 교회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많이 내세운다.

 

예술품이 지금에서 예술이나 당시로는 예술보단 하나의 상징이고 권위다. 우리가 보는 유명한 건축 중에서 왕궁의 웅장함과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이란 모두 상징적 권위다. 보기에 아름다우나 거기에 노동이란 인간착취가 숨어있다. 만약 건축에 대한 부분에서 노동이 아닌 놀이라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는 조금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미학은 예술의 파괴다. 그러나 예술을 파괴하려면 또 다른 예술이 대체되기에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상황주의 인턴내셔널의 해체와 끝으로 사라진다.

 

그런다고 아방가르드 역사에서 우리는 그것을 배제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가 손 놓고 멀뚱히 보던 속박적인 현실을 정면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로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이면서 전위적인 활동가다. 하지만 진실로 그가 전위적이기에 19685월 혁명 이후 그는 잠적을 감춘다. 자기 자신이 spectacle이란 존재로서 군림하지 않기 위해서다.

 

인간이란 자신의 노동에 속박을 갇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니나 기계가 되는 부분이다. 나의 관점에서 말할까? 아니면 어떻게 볼까? 유명한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지에서 그가 연기한 것을 보아라. 기계가 인간을 조종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물화(物化) 되어버린다.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보다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떨어지게 되는 점이다.

 

어제 주말 아버지와 나하고 대화하면서 조금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형제를 위해 계속 노동한다고 하는 아버지의 근무환경은 정말 철저하고도 잔인하게 낙후되었다. 인원이 적은데, 기계는 노후화되어 필요이상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동력이 있을 때가지 일을 해야지라고 말할 때 인간의 물화라는 것은 끔찍한 이야기다. 찰리 채플린의 기계는 수명완료에 따라 강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부품으로 교체되나, 인간의 육체는 교체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노동의 상실은 곧 인간의 수명의 상실이다. <자본>을 읽게 되면 지나친 노동착취로 인해 대부분의 국민들의 수명이 짧아짐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의료기술의 발달과 그때보다 노동력의 착취강도, 근무지역의 보건위생환경이 조금 우량해졌기 때문에 가능했으나, 계속 노동자의 죽음과 부상은 끊이지 않는다. 인간에게 노동을 해방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점은 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나둘 경우 인간에게 노동에서 놀이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노동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놀이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감성적 영역을 무디게 만들고, 이성적 판단력을 멈추게 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것이 된다. 창조적인 인간을 만들기에는 이런 사회적 구조에서 보이는 기계화는 우리는 반영구 기관조차 가지지 못한 기계로 전략한다. 단순히 놀이문화를 왜 추구하는가에서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상실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공간에는 죽음과 삶이 공존한다. 4계절에서 겨울은 모든 것을 삼켜 생명을 앗아가는 것처럼 봄은 다시 희망과 삶을 부여한다. 삶과 죽음이 있기에 놀이가 가능하다. 놀이는 변화하는 자연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예술은 곧 놀이의 미학이다. 예전에 부천 만화규장각에서 제작한 <한국만화비평의 선구자들>이란 도서에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의 인상 깊은 문구가 있다. “만화는 대중 예술이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이다.”

 

대중예술이 발견성은 곧 놀이라는 것이 예술이란 특정 계층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놀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적 변화와 인간이 그 속에서 어울리는 하나의 소통이다. 소통에서 문명화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의 상품 내지 도구로 보기에 인간 스스로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물화라는 가치로 통해 보기에 창조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인간 스스로가 기계가 되어 모든 것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놀이문화로서 단체생활 내의 창조성을 개발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인간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기계에서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오려면 인간의 기본인 유치찬란한 세계가 필수다. 문명화가 진행되고 세분화된 분류 속에서 인간에게 공통된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문명화에서 파편화된 취미와 취향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 속에 대부분 사람들의 취미는 대다수 비슷하다.

 

일단 취미를 말해보라고 하면 음악 듣기, 영화 보기,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취미라기보다는 일련의 삶이라고 보면 좋을 듯 하다. 왜냐하면 가령 음악이라고 하면 rock/metal, Jazz, blues, soul, hiphop 등 다양한 장르가 있으며, 음악 활동도 단순히 귀로 감상하는 것을 지나 라이브공연과 실제 자기가 연주자가 될 부분이 있다. 영화 역시 그렇다. 최근 극장가에 나온 인기몰이를 하는 영화나 혹은 신작영화에 영화관란 취미라고 하는 것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화라는 상품을 소비할 뿐이다.

 

현대사회의 spectacle적인 문화소비 형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이라기보단 레디-메이드처럼 똑같은 상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문화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창조성을 요구하기란 어려운 부분이다. 직접 음악을 하거나 직접 영화를 찍거나(혹은 연극을 하거나) 또는 그 이상의 프로듀싱도 좋다. 문화적 공간에 의해 창조성이 표현되는데, 표현주의 미학이 약한 한국으로서 이런 부분의 집단적 발전을 기여하는 것은 매우 난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그 조직과 그들이 하는 업무와 사업을 알지 못하면 매뉴얼을 할 수 없다. 단지 이 글에선 칸트 <판단력 비판>에서 기준을 설정하기 보다는 그 기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Kyoto Animation에서 만든 작품인 <K-on>에서 감독 야마다 나오코씨가 애니메이터 직원을 불러 이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그 때 그 시절로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넣어보세요!” 덕분에 작품은 흥행하고 관련 OSMU 사업까지 성공하여 상당한 이익을 Kyoto Animation에 안겨주었다. 21세기 사업은 바로 문화콘텐츠이고,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하는 것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여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게 아니다. 실제 <K-on>을 보다보면 미쟝센의 연출이 매우 독특하고, 작품 내 인물들의 인상이나 표현력이 매우 넘친다.

 

결국 표현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서 콘텐츠의 질이 높일 수 있다. 작품 제작에서 애니메이터들은 분명 노동을 했을 것이다. 그 노동에 대한 놀이적 유희를 투영할 수 있다면, 그들은 노동착취로 통한 스트레스보다는 놀이로서 노동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가이낙스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만든 만화책 부록에서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독특하다. 회의실 안에 에반게리온 프라모델이 있고, 오타쿠적인 요소가 다분한 점이다. 또한 연말 회식자리에서 가이낙스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 하나인 사에키 쇼지가 동물의상을 입고 코스튬 하던 모습이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가이낙스 대표이사 겸 애니메이션 감독인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이 2011PISAF에서 초청강연하는데, 이때 가이낙스 초반의 이야기를 해준다. 가이낙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말하는데, 이때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작화 쪽이었다. 가이낙스 대표적인 기법으로 우주전쟁이 매우 탁월하다. 그들의 셀이 여기저기 사용되는 점에서 안노 히데아키는 우주전쟁이나 폭발장면 전문가였다. 대신 사람의 얼굴을 잘 못 그리는 것이 단점에서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에서 한계성이 보인다.

 

안노 히데아키의 오타쿠적인 기질이 발동된 것은 1988OVA로 제작된 <건버스터>에서 각종 오마쥬와 패러디로 작품을 매우고, 특히 주인공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쥐고 뜯는 장면에서 여자의 가슴이 신체와 별도로 움직인 점에서 이때까지 미소녀 애니메이션에서 연출하지 못한 부분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거대한 여성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장면이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나, 그것을 획기적으로 만든 것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었다.

 

그러다가 1990<이상한 바다의 나디아>에 이어 1995<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나왔다. 그들의 특징들은 오타쿠 기질이란 점이다. 남들과 다르기에 창조성이 있었다. 집단적 창조성의 발전에서 그들에게 오타쿠가 되라는 것은 아니나 오타쿠에 대해 뭔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최근 아키바계 소비주의적 오타쿠들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안타까우나 본래의 오타쿠 기질에서 한 곳을 집중적으로 빠져들어 거기에 매진하는 부분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단에서 그런 행위란 무척이나 어렵고, 그런 업무가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안노 히데아키는 그림만 그린 것을 매우 좋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왜 성공한 애니메이션 감독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다고 그가 반드시 애니메이션만 만든 것은 아니다. 여고생의 원조교제 문제를 다룬 <love and pop>, Re : 큐티 허니를 재각색하여 만든 영화 <큐티 허니>도 있었다. 인간의 내면의 고뇌를 다룬 <식일>이란 작품도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자들이 실사영상을 도전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실제 카메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상한 카메라로서 실사를 보려고 한 것이다. 덕분에 연출은 매우 신기하다. <love and pop>에서 장난감 프라모델 기차가 철로를 따라 가는 장면이 인상 깊은 부분 역시 그런 연출력이다. 애니메이션이란 표현주의 미학이므로, 상상하는 것에 대한 현상화에 큰 비중을 둔다.

 

놀이로서 통한 노동이 되려면 사람들이 스스로 시인이 되어야 하고, 가수가 되어야 하고, 작가도 되어야 한다. 단지 퀄리티가 다소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 것들로 통해 집단 내의 창조성을 꽃을 피울 수 있다. 집단 내에서 그것을 용인할 수 있는 것이란 정말 쉽지 않다. 왜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과 물화에 대해 논했을까? 이런 사회구조에 맺힌 관념의 틀이란 매우 벗어나기 힘든 굴레다. 물론 혁명과 쿠데타,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도 어디서는 계속 노동해야 한다. 혁명을 해도 쿠데타를 해도 밥은 먹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며, 잠도 자야 한다.

 

인간은 문화를 만드는 존재에서 이제는 문화의 속박에 살아간다. 문화에 의한 속박과 물화된 인격에서 문화의 소비자에서 문화의 생산자로 가지 않으면 창조성이란 불가침의 영역이다. 게다가 특이성을 너무 추구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만큼 이질적인 존재가 된다. 문화콘텐츠라는 아이디어 상품에서 이런 한계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치 고장 난 기계부품처럼 되어 버려지는 인간이 당연한 세상에서 노동이 놀이로서 전환할 가능성이 낮다. 물론 어느 소규모 사회나 단체에서 가능해도 그들만 가능하면 그들의 상품이지 그 이상이 되기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포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자신들의 혁명이 성공해도 이것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만이 자유롭고 주변이 자유롭지 못하면 자신들의 자유에 대해 주변에서 방해하여 결국 우리의 자유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놀이라는 노동은 곧 자신들의 놀이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확대하는 것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되는 점을 배제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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