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라킬>이란 작품은 가이낙스에서 퇴사한 이마이시 히로유키를 비롯한 몇몇 스텝들이 만든 트리거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트리거에서 제작한 <킬라킬>의 모습에선 상당히 가이낙스적인 요소가 많다. 류코의 친구인 민간쇼쿠의 경우, 그녀가 누구에게 물리적인 충격을 받으면 거기에 의한 충격으로 인해 심각한 부상이나 또는 타격을 입는 것보단 차라리 테니스공처럼 팅겨 나가는 모습이 많다. 이른바 가이낙스에서 사용한 배치기 기법으로 주로 많이 사용된 작품은 <아베노바시 마법상점가>와 <프리크리>이다.

 

특히 <프리크리>의 요소가 다분한 기법이 많은데, 아마도 대부분 가이낙스가 한창 잘 나가던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인 인물들이 많을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를 제작하게 되면서 카라스튜디오로 새로 이전하면서 가이낙스에선 이미 내부적으로 기존의 가이낙스와 다른 경로를 가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킬라킬> 역시 가이낙스의 작품과 비교하여 2000년대 초반에 가까운 형태에 지니고 있고, 오히려 현재의 가이낙스에서는 배치기 기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격을 받게 되면 물리적 반응이 따른다.

 

<특례조지단체 스텔라 여학원 고등과 C3부>에서도 보여주다시피 서바이벌 게임에서 총알을 맞으면 그 물리적 반응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서바이벌 게임에 사용된 탄환이 살상용이 아니더라도 맞으면 약간의 통증에 반응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킬라킬>에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의 이마이시 히로유키의 작품에서 생각하면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에서도 그런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지금의 가이낙스에서는 그런 기법을 전혀 차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킬라킬>의 작품은 가이낙스가 아닌 시점에서 가이낙스의 고유의 기법을 차용한다. 가이낙스는 동화에서 주로 캐릭터에 주력을 쏟는 점이 많은 반면 배경에는 중점을 두지 않았으나, 2010년 <하나마루 유치원>과 2011년 <단탈리안의 서가>에서 배경에 더욱 부각을 주었다. 그러다가 사에키 쇼지의 <메다카 박스>에서는 다시 캐릭터 중심으로 갔으나, 그런다고 배치기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가이낙스는 지금의 모습이 가이낙스 예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종종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감독들을 보면 본래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감독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을 만든 감독들이 제작하는 경우다. 가이낙스 원래의 애니메이터들이 부족한 시점에서 <킬라킬>같은 작품들이 더욱 가이낙스 코드에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낙스를 알려고 하면, 가이낙스는 기존의 것들을 따라하기 보단 하나의 계보로서 계속 다르게 창출되는 점이다.

 

그러나 <킬라킬>이 가이낙스와 지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상징성에 대한 부분이다. <킬라킬>에서는 극제복이란 특수한 의복에 대해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일정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 별이 새겨진 옷을 입으면 필요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별은 1개부터 3개까지며, 류코가 다니는 혼노지학원에 모든 학생들이 입고 있다. 유일하게 입지 않은 사람은 류코의 친구인 마코와 학생회장인 사츠키다.

 

그런 마코와 류코, 사츠키를 제외한 학생들의 의복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의복이란 것은 하나의 계급이란 상징이 따른다. 왜 계급이 생겨나고, 그 계급의 원점을 어디서부터 보는 것이 좋은 것인가? <킬라킬>에서 사츠키의 어머니가 회사에서 강연하는 장면에서 찾아보면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옷을 입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에덴동산의 사과를 따먹어 신에게 화를 사서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자연의 세계에 있다가 문명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동기는 바로 노동이란 점이다.

 

아담이 에덴에 살던 시절에 식량이나 재화가 풍부했으나, 인구증가에 따라 문화인류학적인 견해로서 본다면 자신들이 잘 살던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 경우다. 본래 중동지역에 돼지를 먹지 않으나, 본래는 먹었다고 한다. 뼈나 고문서들이 발견되는 점에서 기후의 변화나 환경적 조건이 따르기에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과일채집이나 사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낯선 환경에 가면 추위나 더위, 그리고 병충해에 의해 생명이 위협에 처해진다. 의복이란 개념은 본래 하나의 상징적 신분보단 인간 신체적 생존에 위한 도구이다.

 

의복이 처음 생긴 것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갈 때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로 가렸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의 용도를 성경에서 의미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으나, 무화과나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로마에서는 바쿠스(Bacchus)라는 주신(酒神)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다산(多産)의 표지로 삼고 있다. 꽃말의 ‘다산’이란 뜻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아시아 서부에서 지중해에 걸쳐 자생한다. 한국(제주)에 분포한다.”라고 되어 있다.

 

쿠스라는 것은 포도주를 의미하고, 그것은 제우스의 아들 중에 하나인 디오니소스라는 신이다.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주는 이 자비로우면서도 무서운 신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이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있다고 소개한다. 결국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포도주는 남성의 성적욕망을 자극하여 다산(多産)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론으로(설마 진짜 누군가 의미를 해석했는지 알 수 없으나) 들어가자면 아담의 무화과나무로 가린 잎은 결국 다산의 상징이었다. 이브는 사과를 먹은 죄로 출산이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나가게 되고, 문명의 조건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이다. 즉, 자연이 문명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다. 노동력의 조건은 당연히 인력이다. 남자의 한문에서 남(男)은 밭전(田)자와 힘력(力)자로 이루어져있다. 남자는 결국 밭을 힘으로 가꾸는 사람이다.

 

노동력의 필요성에서 신은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을 아담에게 노동의 고통을 준 것은 그것이 하나의 문명의 시작이다. 무화과나무가 다산의 상징이고, 농업기반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중요한 요소다. <킬라킬>까지 노동력의 집중화된 농경사회라는 관계없어 보일지는 모르나 인류에 대하여 연구하는 인류학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프로세스에 해당된다. 문명의 발생은 결국 인간이 생계활동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적당한 인구로 유지할 수 있다면 문명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밀림의 우거진 곳에 가면 수 십 명으로 이루어진 원시부족의 삶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부족이 밴드라는 한 구성체를 이루고 일정한 영역에 만족하지 않으면, 충돌이 일어난다. 전쟁의 원인은 원초적으로 식량문제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처럼 식인의 원인은 바로 식량의 문제, 그리고 단백질의 공급이서다. 인간의 영양소에서 지방과 탄수화물은 에너지가 되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나, 단백질은 바로 에너지로 전환이 가능하다. 단백질은 에너지 보충과 면역력, 그리고 생존조건에 필요한 영양소의 근본이다.

 

그것이 부족하면 병에 걸리기도 하고, 생존에 치명적이다. 단백질의 공급은 결국 사냥이나 가축을 도축하는 방법이 있으나,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살이야 한다. 식인문화에서 점차 포로문화가 된 것은 처음에는 식량의 부족이나, 농경사회로 이전되면서 포로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생기고, 대신 포로는 노예로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노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고, 혹은 맛있는 고기로 될 수도 있다. 전쟁의 시작은 문명사회에서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부족의 원인이란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런데 만일 식량이 풍족해지거나 혹은 어느 특정세력만 많이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농경사회에서 농민이란 계급에서 점차 부족과 씨족사회를 벗어나 하나의 무리 내지 사회로 구성되게 된다. 그 중에서 지식을 가지거나 혹은 강력한 무력을 가진 자에게 권력이 오게 된다. 그런 점에서 권력자나 지식을 가진 자는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하나의 도구가 필요하다. 원시부족의 유품을 보면 주로 가면이나 머리장식, 그리고 의복에 의거한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권력적 관계를 하나의 상징성으로 통해 드러내는 점이다. 조금 우습게도 보일지도 모르나, 현대 우리가 살아가는 시점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나 예술품들은 그런 것에 의해 시작했다. 하이데거에 명명한 말 중에 “부정신학”이란 단어가 있는데, 가령 서양에 아주 오래된 교회나 성당이 있을 경우, 우리는 문화재로 여기나,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이고, 신적인 존재가 깃든 신성한 곳이다. 지금도 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종교적 신앙이 존재하겠으나, 기본적으로 문화재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고대시대의 왕족이나 지배계급들이 사용하던 물품이나 무덤 역시 그렇다. 당시에는 하나의 정치적 상징 내지 종교적 상징이라면 지금에 와선 문화재다. 경주의 천마총을 비롯한 많은 신라왕들의 무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을 신화 속에 등장하는 후손이라 하여 신의 후에가 잠든 장소보단 그저 역사적 가치가 있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킬라킬>에서 그런 상징적 요소에 왜 농경사회와 종교적인 부분 그리고 의복이 연계되는가?

 

결국은 의복이란 것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필요할 때는 추위와 더위, 병충해로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하나의 권위를 상징하는 요소로 된 것이다. 계속 역사적인 조건에서 덧붙여 설명하면,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 혹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조차도 계급에 따라 의복이 다른 점이다. 왕이 입는 옷과 장식, 신하가 입는 옷과 장식, 평민이 입는 옷과 장식, 성별에 따라 입는 옷과 장식이 모두 다르다. 결국 옷이라는 것은 하나의 계급을 상징하는 요소이다. 농경사회와 전쟁에서 그 상징적 요소는 지배계급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의복이 계급에 따라 바뀌는 것이 고대사회라고 하나, 대신 <킬라킬>에서는 의복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나, <킬라킬>에서 의복의 권력화와 계급화는 전혀 근거 없는 모티프가 아니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상품이고, 상품이 이미지”라는 명제와 더불어 이미지가 가지는 기호에 따라 권력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킬라킬>에서 상품의 이미지에서 극제복에 새겨진 별의 개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별이 1개, 2개, 3개에 따라 계급이 다르게 되고, 거기에 대한 대우나 지위도 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본래 혼노지학원의 학생이 아닌 류코의 경우는 관계자 외부라는 속성이 따르고 있었고, 남은 것은 사츠키와 마코이다. 마코의 경우 원래 테니스부이나, 옷에 별이 없었다. 그녀는 학교 자체에 가는 것조차도 어려웠고, 다른 학생들과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른바 호모사케르라는 것으로 생물학적으로 존재해도,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녀에게 혼노지학원이란 학교라는 사회에 인정받지 못한 사회적 존재이다.

 

처음 류코가 올 때부터 테니스부원으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으며, 친구조차 없어서 류코가 처음 친구였던 것이다. 존재해도 존재할 수 없는 마코에게 그 상징성은 교복에 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가 류코가 부를 만들면서 2성의 극제복을 얻자 새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보이고, 어느 순간 혼노지학원의 보통학생처럼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의복이란 하나의 계급적인 상징과 더불어 사회적 존재성에서 <킬라킬>은 의복이 결국 권력이고 사회라는 점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회적 기능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언어는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을 언어를 다시 편성한다. 그런 점에서 극제복이 없는 자에게 살아있지 않은 호모사케르에서 죽은 사회성이고, 죽은 언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또 입지 않은 자가 있었다. 그것은 사츠키다. 문제는 사츠키는 제복 대신 다른 의복을 입고, 순결이란 의상을 입게 된다. 그것이 바로 호모사케르와 다른 노모스라는 법 위에 군림하는 자이다. 사츠키는 학생회장이면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사람이다.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으며,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다. 결국 사츠키 아래에서는 모든 학생은 같고, 단지 별의 개수에 따라 계급은 존재해도, 그 별의 개수가 차이나더라도 학교생활에 전혀 불편함은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혼노지학원의 극제복에 따라 학생들의 가족들의 생활의 혜택까지도 다르게 된다. 결국 모든 극제복을 입는 것은 혼노지학원 학생으로 학교교칙 앞에 평등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 평등을 결정하고 만들 수 있는 법위의 군림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노모스라는 의미고, 그 노모스는 바로 사츠키다. 사츠키가 극제복가 필요없다는 것은 극제복을 입는 순간 자신 역시 의복에 의해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밑의 4천왕을 비롯하여 학원 내의 모든 학생과 동일한 조건이 되는 점이다. 자신과 남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상징성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별이 없는 교복과 순결이란 점이다. 그리고 사츠키가 순결을 입든지 안 입든지 그녀는 혼노지학원 주인은 변하지 않는다. 혼노지학원의 수학여행에서 사츠키는 혼노지학원 안에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일본 전 지역에 군림하는 자로 되기 위해 나선다.

 

수학여행에 극제복을 보급받은 학생들이 모든 학원을 점거하여 모든 교복을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회사에서 나오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결국 의복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의 통제에 들어오게 되는 셈이고, 그것이 하나의 감시의 역할을 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프랑스 왕정시대의 열병행사에 대해 나오는데, 군인들이 의식 속에 그들은 모두 개인으로 생명은 소진하나, 그들이 속한 군부대는 영원하기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로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감시가 감시자에 의해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 스스로가 감시자 역할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의복과 같은 동작에서 개인성은 사라지게 된다. 사츠키의 행동에는 결국 의복을 통일하고, 같은 모습을 하는 점에서 모든 권력을 가진 자로서 숨은 감시자가 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사츠키는 판옵티콥이란 일망원형감시탑과 같으며, 그녀가 판옵티콘의 주인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의복의 상징성이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어도 오직 하나만 다르다는 점을 말이다. 그래서 선혈을 입고 온 류코에게 강력한 위기의식을 받은 것은 그런 이유다. 마코는 별이 없으나 학교교복의 기본적인 틀은 같지만, 류코는 기본적으로 교복모양조차도 달랐다.

 

그러나 선혈이란 교복이 지닌 힘은 매우 강력하며, 오직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학생은 류코라는 점이다. 또한 강한 이질적인 힘은 학원 내에서 큰 문제로 되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사츠키는 오히려 류코를 이용하여 극제복의 약점과 문제점을 보완하여 수정하며, 그것을 토대로 수학여행의 전투용 체육복을 만든다. 그렇다면 교복은 결국 전투복이고, 고대사회로 따지면 갑옷이 된다.

 

전투적 기능이 별의 개수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은 결국 불과 천 년 이전의 중세유럽사회의 전투에서도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갑옷, 무기 등 장비가 좋은 기사단이 부족한 무기체계를 가진 국가를 손쉽게 이긴다.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싸울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고, 싸우기 위해서 기사라는 자리가 결국 지배계급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중세유럽에서 기사는 전체 인구대비에 비해 많은 수가 아니었다. <킬라킬>에서는 전투요원은 오직 류코와 마코를 제외한 전 학생이다.

 

의복의 시작이라고 하는 아담의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는 생식과 더불어 노동력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킬라킬>의 의복은 하나의 권력체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따지자면, 충분한 잉여자원 내지 특정계층에 대한 독점이다. 의복과 관련된 각종 옷과 장식들이 하나의 상징성이 되면서 의복은 생물학적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보단 사회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가령 조선시대까지 우리는 저기 지나가는 사람이 왕인지 양반인지 알 수 없으나, 단지 의복으로서 확인이 가능하다. 도포마루에 긴 갓을 착용한 사람이 양반계급인 점이다.

 

그것은 의복의 실용성에 의해 착용하기보단 의복의 상징성에 의해 착용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문명사회로 넘어가면서 계급의 분할로 피지배계층의 노동계급과 지배계층 분리에서 그것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의복이다. 의복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킬라킬>이 비록 단순히 교복에 의해 구분되나,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위에서 언급했다. 그것은 상표의 메이커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사는 의복은 실제 가격적인 가치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90%는 상표의 브랜드가격이다. 즉 이미지의 소비로 통해 하나의 기호를 획득한다.

 

남자들의 시계, 여자들의 가방은 실생활에 의해 필요하나, 그 필요의 이상으로 과다하게 소비된다. 그것이 바로 소비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권위다. 어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품의 브랜드가 바로 그 사람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위치를 알려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단지 <킬라킬>에서는 극제복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극제복을 입는 것은 권력과 사회성을 얻는 것이고, 입지 못하면 권력과 사회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을 파괴하고 다른 시스템이 구비된다면 그것은 곧 Revolution, 혁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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