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 - Seed Novel
온점 지음, 모밍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마법소녀라는 관념을 생각하자면, 1999년에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에서 발간된 <일본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 중 박인하(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학과 교수)의 ‘일본애니메이션 장르 연구 -마법소녀 물을 중심으로-’를 참고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소녀들은 소구대상으로 한 마법소녀물은 현실세계에서 소녀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제약과 한계들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소년들이 로봇만화를 통해 권력과 힘에 대한 대리만족을 경험하는 것처럼 소녀들은 마법소녀들을 통해 변신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켰다. 학교나 가정에서 성적차별에 시달리는 소녀들은 꿈을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되고 싶어 했다. 꿈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평범한 현실의 소녀에게 ‘힘’을 소유하는 소녀가 되고 방식으로 마법소녀물은 ‘마법’과 ‘변신’을 제안했다. 소녀들은 그 유혹을 받아들였고, 마법소녀물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마법소녀라는 것을 정의하자면 현실에 있는 소녀들이 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타파할 수 없으므로 마법소녀라는 힘을 얻어 결국 변신과 마력으로서 해결한다. 마법소녀들은 일반 소년만화처럼 “공적인 영역”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문제를 해결하므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착한 일”에 대해서만 가능했다. 결국 이런 부분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여성의 능력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환상은 아직 어린 소녀이기에 어른이 되면 해결이 가능할 것이란 착각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마법소녀물은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이나 <마법의 프린세스 밍키모모>의 경우 단순히 변신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전자는 실루엣 뒤편으로 보이는 누드가 남성에게 성적인 호기심과 환상을 제공하고, 밍키모모의 경우 어린소녀가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 성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마법이란 여성의 신체의 변화를 의미하고, 그 변화는 아직 어린 소녀가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고, 그것은 사회적인 능력을 스스로 가지기를 바란 게 아니라 우연의 행운을 바라는 점이다.

 

이번에 읽어본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기존에 등장한 상식을 깨고 나온 작품이었다. 이때까지 마법소녀물들이 제시한 담론과 규칙에 대해 완전히 해체하고, 대신 새로운 모습으로 나왔다. 물론 마법소녀에 대한 공식에 대해 해체적인 요소를 지닌 것은 사프트사의 신보 아키유키 감독이 제작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었다. 마법소녀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거나 혹은 선이 아닌 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진정한 악과 선의 차이는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작가인 온점의 글을 보고 난 후, 나는 작가가 그렇게 많은 철학적 지식이나 사유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직 1993년이란 점과 책을 2014년에 구매한 점에서 그의 나이가 이제 스물이 될 정도에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이란 라이트노벨을 저술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그의 서적에 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저술한 내용에서 나는 분명 그가 깊은 철학이나 사유가 없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던 것이다.

 

철학자와 철학자가 저술한 철학적 사상을 이해해야 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존의 철학자란 세계의 단지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므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 대해 철학적인 요소로 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미 여기서 철학적 요소는 등장했다. 왜 마법소녀가 그렇게 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하춘식은 왜 변신을 꺼리는지, 악이란 정말 무엇인지 등등을 말이다. 작가 분에게 그렇게 깊은 인문학적 배경이 없다는 것은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의 히로인이 분명 하춘식이어야 하나, 막상 표지의 일러스트에서는 주인공이란 인물이 히로인처럼 나온다.

 

주인공이 하춘식이 다니는 학교에 잠입하기 위해 의상을 구하는데, 이때 교복이 제일 좋았다. 교복을 입을 때 그는 남자이나 남학생 교복이 아니라 여학생의 교복을 입었다. 여학생의 교복을 입을 때 그의 ‘가느다란 허벅지와 종아리가 하이라이트’란 부분이다. 인체해부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키와 몸무게 조건이 같다면 누구의 다리가 날씬하고 각선미가 좋은가에서 남성의 다리가 훨씬 좋다. 여성의 골격구조는 골반이 기본적으로 넓기에 가느다란 허벅지와 종아리가 나오기가 어렵다.

 

여성의 다리가 일자형이 되는 것은 남성성 안의 여성성이란 무의식적 조건 즉 아니마라는 심리적인 요소에 의해서다. 그런 성적인 담론에서 이 라이트노벨의 재미요소를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처음 표지를 본다면 그것도 아무런 정보를 모른 채 단순히 출판사의 소개만 본다면, 하춘식이란 인물은 몽둥이리를 들고 드레스 복장으로 웃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그 뒤에 부끄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이가 악의 조직에서 활동하는 중간보스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이것은 단지 반전을 노린 것을 알게 된다.

 

마법소녀라는 여성이 오히려 남자 같고, 악의 조직의 중간보스인 남성이 오히려 여성 같이 보인다. 실제 말하는 투나 행동 역시 서로 간의 정체성에서 이탈했다. 생물학적인 성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외부로 보이는 이미지는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특히 주인공이 일하는 가게에서 많은 남자 손님들이 주인공의 외모를 보고 오고, 같이 일하는 선배도 주인공이 여자가 아닌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외적인 외모로도 남성성의 면모가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의상까지도 그렇다. 주인공의 의상은 체육복, 그러나 진짜 평상시의 의상은 여학생 교복이었다. 일하고, 살림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은 사회적인 여성적 모습까지 보인다.

 

이미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이란 제목부터 이 작품은 기존의 마법소녀물을 해체했다는 의미를 잘 알게 해준다. 마법소녀가 언매지컬이란 사실은 피지컬이란 의미다. 현실의 소녀가 환상으로 통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운에 의해 해결한다는 게 아니라 오로지 현실적 조건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면 마음속의 봉인을 스스로 푸는 장면에서 마법소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모습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법소녀보단 차라리 사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마법소녀란 무엇인가? 마법소녀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은 안타까운 것이 있다. 정의는 결국 어느 쪽의 관점과 입장, 그리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흔히 언론이란 사실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공정성이다. 사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정의라는 것은 결국 언론의 모습에서 보이는 조건이 따라 붙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악의 조직이면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조직은 악이라도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미 그런 담론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그런다고 니체를 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니체의 사상이 지금에 와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해 결국 세상의 법칙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악의 갈림에서 하춘식이 본 잔혹한 마법소녀의 정의라는 것은 과연 정의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정의는 무엇의 조건에 따라 실행되어야 하는가? 마법소녀라는 이름은 거대한 힘과 권력을 가진 하나의 상징이다. 그 상징성에 의해 실행되는 모든 것은 옳고 합당한 것인가?

 

정의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정의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큰 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만약 그것이 진짜 정의라면 그 정의에 대한 의구심과 합당한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가? 즉, 정의라는 것은 거대한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는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에 악이라고 부를 그 무엇에는 정말 순수하게 악으로 되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비밀이 숨어있는 하춘식의 과거와 주인공이 겪은 10년 전의 큰 소동은 분명 이 작품에서 하나의 모티프를 제공한다.

 

자세한 내막은 없어도 거대한 힘을 가진 자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여 이룩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고, 또한 딥 블루라는 은퇴한 마법소녀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인공이 속한 에프 킬러의 우두머리인 총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이다. 아직 1권만 보았기에 그와의 지난 일은 모르나, 총장에 대한 딥 블루의 표정은 살기나 적의 대신 오 히려 잘 지내고 있었냐는 눈빛이다. 10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마법소녀와 악의 조직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큰 파장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악의 조직인 에프 킬러는 과연 나쁜 악의 조직으로 볼 수 있는가? 상당한 미모와 몸매를 자랑하는 점장은 게임만 하는 은둔형 폐인이고, 게다가 낯선 사람만 보면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한다. 조나단은 머리에 양동이를 쓰는 단순한 변태에 길거리 포장마차 장사꾼이며, 중간보스인 주인공은 일만 열심히 하는 소년가장이다. 그런 자들이 악의 조직이라 하여 과연 악인인가? 처음부터 악의 조직이라고 불리는 에프 킬러에 들어온 주인공의 동기가 이상했다. 그가 본 사진에서 무엇을 위해 강화인간이 되어 고생을 하는가?

 

그의 나름대로 정의라는 이름이 있지 않은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면 단순히 힘의 논리나 또는 소수를 배제한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란 공리주의적인 요건을 볼 수 없다. 정의라는 것은 자신의 입장이 아닌 타인의 입장을 위해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당한 것으로서 사회적 규율인 법과 제도를 지키는 것을 떠나 그 이상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즉, 남에게 베풀지 않아도 되는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하나의 정의가 성립되는 것이다.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정의의 기준은 아주 모호하게 만들었다.

 

악의 조직에서 매일 근면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을 무자비하게 패는 하춘식이 정의의 사도인 마법소녀라기에는 애매하고, 그런다고 악의 조직인 ‘늪’을 보면 악의 조직이 에프 킬러만큼 약해 빠진 존재가 아닌 것을 안다. 정의라는 것은 위에서 내가 언급한 것처럼 사실성보다는 공정성이고, 공정성에 대해 그 상황에 대한 조건과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라면 이 작품에서 진정한 악을 하춘식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악의 조직은 은행이라니까. 은행.”

 

또한 다르게 생각하면 악의 조직이라고 하지만 동호회 수준에 불과한 에프 킬러 역시 제일 큰 적은 하춘식이란 마법소녀보다 생계조건이 더 큰 적이었다. 주인공은 하춘식에게 심하게 맞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일을 한 후에 나오는 급여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보이는 세견의 적이란 돈이 없이 그저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은 지나가다 누군가에게 언제 사기당해도 이상하지 않으며, 점장은 게임만 하여 세상물정을 모르며, 양동이를 쓰고 있는 조나단은 이미 자신의 얼굴을 가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은 존재와 드러낼 수 없는 존재, 드러내어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악의 조직인 에프 킬러의 현실이다. 악이라 불리는 자들은 과연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악인지 아니면 악으로서 규정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는지가 바로 이 작품에서 보인 세계관에 대한 내 판단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가장 동의하는 부분은 마법소녀가 언제 마법소녀로 되지 않는가이다. 그것은 바로 소녀가 소녀로서 있을 수 없을 때, 결국 마법소녀이란 작품의 최종적인 목적은 소녀가 어른으로 되는 것이다.

 

딥 블루의 모습이 바로 마법소녀가 최종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이고, 그것은 성인여성이 누리는 행위에서였다. 마법소녀가 마법소녀로서 있는 이유가 최종적으로 사랑이란 것은 많은 작품에서 보이는 요소다. 자기가 품은 환상이 결국 환상이 아닌 현실일 때, 그들의 환상은 이미 깨져버린다. 대리만족으로 느끼는 것들이 결국 현실화로 되었다는 자체로 마법소녀의 임무는 완수다. 그때까지 마법소녀는 그 자신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딥 블루는 완벽한 마법소녀였고(현역시절 변신할 때의 실루엣으로 보이는 볼륨이 넘치는 몸매를 생각하면), 하춘식은 딥 블루와 다른 사신의 모습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간적인 모습이다. 불안정한 마법소녀 하춘식에서 <언매지컬 마법소녀 하춘식>은 작가가 어떻게 기존의 마법소녀의 이미지를 어떻게 해체하여 재미를 유도하는지가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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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수이다. 그의 도서 중에서 <철학에 대하여>,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프랑스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의견과 더불어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새로운 방향이 나온 것에 대해 보았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는 분명히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사상가였다. 그런데 그의 저서 중에 이런 도서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마키아벨리의 가면>이란 도서를 말이다.

 

제목만 봤지, 실제 그것이 어떤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후에 왜 그런가 싶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알튀세르가 <철학에 대하여>에 제기한 부딪힘에 대한 부분이었다. 관념론과 유물론, 그것이 어디서부터인가? 흔히 유물론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계몽주의 철학이 꽃피우던 18세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왜 마키아벨리에게 거슬러 갔는지 생각하면 그 해답이 있었다.

 

16세기 전후 피란체에서 거주하던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으로 적고, 또한 자신의 정치계에 복귀하기 위해 <군주론>을 집필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가 교황이 살았던 곳이고, 지금도 이탈리아 바티칸에는 국가는 없으나 국가를 초월한 세계의 지도자인 교황이 살고 있다. 교황이 지배하던 세기를 생각하면 중세유럽부터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에서 교황은 거의 신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자였다. 그런 신의 이름이 횡횡하던 시절에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선상에서 신이란 이름을 어떻게 보는가였다.

 

승리를 여신의 미소가 변덕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운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그것과 더불어 인간의 노력과 근성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군주의 정치적 행보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운과 노력이 반반이라는 것은 운이라는 것이 신의 가호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이고, 인간의 노력과 업적이란 유물론적인 요소다. 르네상스 시대가 다가온다고 해도, 결국 당시 유럽은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신이란 이름을 가지고 지배하던 시기다.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내가 맡은 직업적 소양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넓은 평야에 엄청난 비가 내려 그곳이 물이 잠기는 것이라도 만약 제방이나 둑을 쌓을 경우, 그 물들은 범람하지 않거나 혹은 범람하더라도 둑과 제방으로 충분히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천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홍수량과 홍수위를 미리 예상하여 하천은 폭과 제방의 높이 그리고 둑의 넓이를 고려하여 홍수피해를 저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호우가 너무 심하게 내릴 경우 모든 피해를 막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으로 막아 큰 타격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인간에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란 어떻게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사자와 여우를 모두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우의 민첩하고 예리한 사고력, 그리고 사자와 같은 강한 힘과 집행능력을 말이다. <군주론>을 읽다보면 분명히 이 책은 위험한 책일 수 있다. 절대적인 군주가 강한 통치력을 가지기 위해 갖은 모략과 전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딱히 위험하다고만 여길 수 없었다. 아쉽게도 <군주론>에선 군주가 견제해야할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명시했다.

 

그것은 자국을 위협하는 적국, 그 적국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일 때 같이 전쟁을 수행할 타국 원군과 용병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국가의 안전을 군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 그것을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나 용병은 자신의 국가가 아니기에 최선을 다해 싸워주지 아니하며, 타국의 원군은 결국 자신의 국가가 아닌 자신들만의 국가의 주군을 위해 싸워주므로 최후에 승리할 경우 모든 승리의 전리는 원군이 좌우를 결정하는 셈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에서 왜국의 침입에서 명나라를 조선에 합류하도록 했으나 갖은 노략과 패악질만 부렸다. 또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국의 운명을 외국에 넘긴 셈이 되었다.

 

광복 이후 독립국가가 아니라 신탁통치에 의해 북과 남으로 갈리어 전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하면 그 나라의 권력은 남의 국가에 의해 결정되고, 자국민의 안전을 지키기가 곤란해진다. 설사 지킨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대가비용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문제를 이미 16세기에 지적을 했고, 로마의 공화정과 과두정, 혹은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비극이나 교훈을 찾아 <군주론>에 명시를 해놓은 것이다.

 

<군주론>에서 보이는 국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무엇인가? <군주론>을 읽는 순간, 마키아벨리의 서구정치철학사에서 <군주론>을 통해 정치에서 철학이 분리되었다고 본다. 이전까지 정치적 요건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라는 철인군주가 존재했었다. 철인군주는 강력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진 군주로서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전사, 그리고 철학자이어야 한다. 군주라는 존재는 철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완벽한 존재, 미적인 존재였다. 이와 달린 <군주론>은 군주는 완벽한 미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인 존재처럼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군주가 아니라 계략군주가 되어야 한다. 지금으로 봐서는 매우 잔혹하고 끔찍할 수 있다. <군주론>에선 가차 없는 공포와 처벌을 가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유럽사회에서는 유럽대륙 내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인접했기에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한 순간 국가는 패망하고, 적에게 잡힌 그 나라의 군주와 귀족들은 어김없이 저자거리에서 참수를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군주와 귀족은 죽더라도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그 나라에는 그냥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즉 국민들이 존재했다.

 

고대 중국에서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민(民)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명예롭게 보이기 위한 술책을 제공하나, 그것의 모든 시작점은 결국 국민이었다. 뒤로 갈수록 귀족과 국민에 대한 거리에서 귀족에게 환심을 사면서도 한편으로 국민에게 좋은 군주로 인식을 받아야 했다. 군주가 귀족에게 환심을 사야 하는 이유는 귀족이 자신만의 권력을 잡아 언제든 군주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국민에게 환심을 사야하는 것은 결국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존재는 타국의 원군도 용병도 설사 귀족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군주로 모셔주는 국민들에 의해서이다. 군주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점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고려하여 만든 서적이라고 한다. 이제 갓 운 좋게 독립을 한 자신의 나라에 언제 타국의 침입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그것이 단순히 왕족과 귀족 같은 정치적 권력자에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문제가 국민들에게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시하는 의견 중에 군주는 낭비를 삼가야 할 것이나, 만일 다른 나라의 국민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자국의 군인이나 국민에게 주는 것은 찬성한다.

 

생각하면 자신의 국가가 타국을 정복하는 것에 대한 이익을 생각한 만큼, 역으로 돌리자면 타국이 자국을 침입하면 자국의 국민들이 노략질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통해 이른바 마키아벨리주의를 만들게 한 인물이나, 그는 공화주의자란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공화주의자는 평화를 모두 조화롭게 나누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그런 자신이 엄격하고 교활한 군주를 앞세운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에게 정복당하여 비참한 삶과 심한 피해를 받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군주가 되는 인물은 무릇 그 자신의 보위를 위해 결국 나라의 보위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만큼 마키아벨리는 군대가 바르게 운영되어야 하고, 법이 바르게 되어야 하는 것을 원했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최근 국내에서 사병자살로 인해 위로금을 간부들이 착복하거나 또는 각종 성범죄나 의문사고로 인해 군부대가 바르게 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런 현실이 부딪히면 결국 군인이 되는 자, 그러니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은 국민인데, 그 국민들이 군인이 되어 적절한 관리를 받지를 못하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저하된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군주의 생명이 직결되는 것은 국민들에게 사랑이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다.

 

군주는 너무 난폭하거나 흉악할 경우 밑의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국민들에 의해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군주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도움이 되는 신하를 잘 뽑아야 하고, 그 신하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아이러니한 것은 마키아벨리는 거의 모든 인간에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결국 군주도 이기적이고, 국민도 이기적이라면, 신하 역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조건에서 신하의 충성을 위해 무엇을 바라는가? 군주는 무릇 신중하고, 현명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신하 소수 어느 대상에게 의존해서 안 되고, 너무 많은 신하에게 의존해서도 안 되면, 출세와 이권을 위해서만 올라오는 신하도 견제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정확히 선택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중간의 지점, 혹은 알튀세르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발생되는 우연처럼, 계속 부딪히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부딪히기 전에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전에 미리 계산하여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적 조건에 내몰릴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하는 운이 누군가에게 행운이고, 누군가에게 불운이다. 그렇다면 그 운에만 맡기지 못하기에 평소 행실에서 드러난다. <군주론>에서 중요한 정치적 공략과 혹은 분리되어도 끝까지 남아있는 철학적 윤리는 절대로 국민에 대한 재산과 부녀자 강탈을 하지 마라는 것이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는 순간 군주는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귀족의 견제와 더불어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것 자체가 바로 이것이다. 산업을 장려하고 농업을 흥행하게 하는 점은 바로 군주를 위한 최고의 방법이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것이다.

 

생각하면 <군주론>의 가치가 현실을 보면 조금 기분이 묘하다. <군주론>은 독재자의 것이 아니라 독재자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짜 군주로서 국민을 대하는 것이 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군주론>이 집필 시기는 중세유럽이고, 계급이 왕족과 귀족이 있어도 최하층의 농민이 있다는 생각하면, 정치적 판단력은 결국 일부에게 정해져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도시국가도 10%의 남자만 정치에 참여하고, 그들은 직접 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병사로서 싸웠다. 중세에서는 기사라는 직업이 농민과 다르고, 오히려 국민들은 기사보단 일개 보병으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국민에게 군주가 의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지켜줄 자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환심을 사는 것만이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는 셈이다. 지금에 와서 <군주론>이 통치자 하나에게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대중문화라는 군중심리를 생각하면 미디어에 대한 부분이 효과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군주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통치자와 그 주변의 관료들은 조금 자신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가장 조심할 주변인물로는 아첨꾼이다. 아첨꾼이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것만으로 국가의 손해인데, 그들이 탐욕스럽다면 더욱 어려운 형국이 될 것이다.

 

아무튼 <군주론>을 읽으면서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고, 그 중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과 타인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아마 그런 자들이 마키아벨리가 가장 경계하는 내부의 적일 것이다. 과연 <군주론>을 읽으면서 강한 군주란 무엇인지 다시금 볼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21세기와 어울리지 않았던 이유는 이때는 왕정시대고, 왕은 주로 무력을 직접 통솔하는 장군이었다.

 

그렇기에 주변의 국민들을 제대로 볼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통치자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않은 현실이다. 안 그러면 차라리 괴벨스와 같은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편이 오히려 정치적 이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사용하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다. 현실을 속일 수 있어도 현실의 문제점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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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 축구 이야기가 나왔는데, 외국 벨기에가 엄청난 축구강국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벨기에 선수들이 유럽의 명문강호에서 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들으면서 요새 생각해본 것이 경제성장이란 담론인데,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1차와 2차를 넘어 3차인 서비스직렬에서 공학 전공자인 나로서는 3차 서비스로서 엔지니어에 속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 내의 국토개발은 많이 이룬 것이고, 더 이상 국토개발로 통한 경제활동은 좋지 못한 것 같다. 

 

특히 환경을 파괴하여 만들어 놓은 지난 한국경제는 오히려 재난이나 물부족, 대기오염 및 수질오염, 소음진동 및 일조장해 등과 같은 환경오염이란 막강한 적이 들어왔다. 결국 2차에 의한 공장이나 혹은 개발사업에 의한 국내 경제활동은 한계가 있다. 결국 국토개발은 보전 및 복원이란 환경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예전처럼 친환경적 개발이란 이름만 붙은 개발사업이 아니라 복원적인 요소로 환경사업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하천정비나 숲가꾸기 사업은 콘크리트화 된 하천이나 또는 자연환경을 원상복원은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을 유로변경이나 준설, 숲에 있는 식물의 종을 멋대로 변경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이제는 자연을 파괴하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접어야 한다.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점이다.

 

최근 국가경제의 말에서 이미 1차 산업인 농업은 거의 경고를 지나 생존위기인듯하고, 2차 산업에서 공정단계가 상당히 발전한 점에서 2차 산업 공업도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보인다. 3차 산업인 서비스도 거의 한계점을 보인다. 주택가들이 밀집한 마을에 길가를 지나가면 주변에 피자, 통닭, 토스트, 커피가게다. 이제는 이런 사소한 물품들도 대기업 자본이 들어와서 기존의 영세업체도 밀리는 판국이다.

 

4차로 보면 정보디지털인데, 이미 한국은 인터넷 보급은 세계 최고이니 이 방면도 다 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컴퓨터 핵심부품과 운영체계를 만들 수 없기에 한계성이 있다. 디지털강국이라도 결국 정보매체는 떠돌아다녀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는 역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취약하기 작이 없다.

 

그런 5차라고 불리는 여가 및 취미는 어떨까? 내가 갑자기 잡담을 적는 이유는 바로 취미 및 여가의 활동으로 경제성장을 볼 수 있나다. 예전에 국민의 정부 시절, 대기업에서 1년 동안 파는 자동차보단 영화 쥐라기공원이 더 많은 경제활동결과를 낳았다. 문화산업이 결국 21세기의 갈 길이고, 젊은 취업준비생이나 혹은 실직자에게 좋은 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가시간이다. 한국은 여전히 일하는 시간이 많다. 누군가는 한국인이 일하는 시간을 너무 적게 주어 나중에 무엇을 할지 몰라 고민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낯설어 보이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최고의 인생은 자기의 여가시간을 내어 자기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취미라는 것이 딱히 좋게 볼 수 없고,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역시 취미가 예술적 요소를 기반한다고 하나, 지난 18세기에는 산업체계가 이미 농경사회라는 점과 농민의 집단적 노동이 놀이로서 형태를 드러난 바가 있다.

 

한국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이 모여 서로 노래를 만들어 같이 작업하거나 혹은 농악으로 축제를 열고 했다. 문제는 지금은 집단협력으로 통한 직업을 하는 게 아니라 분리된 공정과 조건으로 일을 하는 점이다. 아마 사무실에서 같은 팀에 있는 것보다 취미 생활로 모인 사람들이 더 많은 집단구성을 이룰 수도 있다. 취미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적 소비만이 아니라 능력개발, 자아발전, 사회유대관계도 확대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여가생활은 거의 최악이다. 개인적으로 TV 드라마 공화국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끔찍한데, TV 앞에 모여 드라마를 보고 마치 현실처럼 보이는 파생실재에 현실로서 받아들이거나 혹은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고 착각하는 중2병 내지 오타쿠보다 심각하다.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에 빠진다는 점은 점점 일원화적인 문화형태로 되어 결국 다양성을 만들지 못한다.

 

취미나 여가생활은 다양한 문화나 활동에 기반되어야 산업적인 요소가 된다. 이른바 스토리텔링화 한다는 문화산업에서 그것이 기반되는 콘텐츠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 교수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아주 좋은 말이 나온다. "상상력은 미래의 윤리"라는 점이다. 상상력이야 말로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문화산업의 기반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력이든 문화적이든, 스포츠든 여가공간이든 취미생활이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나 혹은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말해두고 싶은 게 있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20세기의 정신으로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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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이동언 지음 / 독립기념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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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것을 바친 분들에 대해 순국열사라고 한다. 순국열사라고 해도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판단해야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흔히 어느 자가 이런 말은 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라고 말이다. 흔히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는 말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흔히 전체주의적 요소를 지닌 파시스트들이 그런 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히틀러나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과 같은 침략 국가들도 그런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정말 그게 필요한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 그럴 때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을 때가 아니고 침략자에게 있을 때에 말이다. 지금을 생각하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란 말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조국을 위해서라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고, 민족을 위해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서란 말인가? 이 모순적인 2가지에 대한 명제에서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모순을 볼 수 있다. 국가를 위해서와 민족을 위해서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2가지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은 모두 비명횡사 내지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서평을 적는 순간, 삼일절 전을 맞이하고 있는데, 1919년 3월 1일에 그 운명을 넘어 하나의 민족적 존재성을 알리고자 하던 비운의 날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에 대한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예전에 천도교 활동에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요인들이 많았는데, 사실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부터 시작하여 천도교를 생각해보면 손병희 죽음과 최린계의 득세로 천도교는 일제 앞잡이 된 점을 생각하면, 불운한 형태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겠지만, 천도교 종교의례에서 일본 군국주의적인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나 각종 일제행사의 찬조 등을 생각하면 천도교의 오명이 참 크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을 대조하여 대종교에 대해 조금 조사하다보니,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이 수도 없이 나왔다. 그 중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내가 사는 지역에 백산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지난 과거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탕진하던 분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리지는 점에서 안타까우나 그 자리를 대신하여 엉뚱한 인간들이 오는 것도 이상하다. 독립운동 중에서 무장 투쟁한 분의 후손이라 주장한 분이 그분을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자들과 같이 있다는 점에서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진짜 독립운동 하던 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있는가? 아무튼 백산 선생에 대해 조금 책으로 보니 엄청났다.

 

모든 국가나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것은 인력이나, 그 인력을 운영하기 위한 참모진과 자본이다. 자본력이 없으면 식량과 무기, 기타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자금줄의 반 이상을 백산 안희제 선생이 했다는 점이다. 한국정부의 최초라고 볼 수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군의 전신의 광복군조차 그렇다. 백산 상회에서 운영한 상업 활동으로 자금이 독립운동에 사용하고, 언제 한 번 가족들이랑 경주에 나들이로 놀러갔을 때 최준이란 경주 최가 부자 댁에 가본 적이 있는데, 최준은 독립군을 위해 자금을 대어 주신 분인데 그가 안희제에게 건네준 돈과 독립 운동하는 분에게 전달된 돈의 액수가 같았다고 한다.

 

중간에 착복하거나 혹은 많은 변절자가 있던 시기, 그런 세상에 백산 선생은 위험을 무릎 쓰고 계속 활동을 했다. 보면서 참 치밀한 분이었던 것 같다. 변장을 하면서 일본의 옷을 입고 다닌 적이나, 술을 마시면 항상 일본여자를 옆에 끼고 마신다는 점이다. 감시가 살벌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경사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할 때 이름이나 조문들을 남기지 않고 오직 말로서 전달하여 그 누구에게 들키지 않고, 일제의 눈을 피했다. 비밀결사는 결사조직보다 결사운영이 더 힘들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산 선생의 활동을 보니 매우 철저하게 관리해온 점과 그 와중에도 부산경남지역의 힘없는 서민들의 어려움을 돕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일제강점기는 일제와 독립운동의 투쟁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자본력과의 투쟁도 있었다. 일본이 국내 상권을 잡아내기 위해 경제침략도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친일하던 자들은 조선총독부나 야쿠자, 경찰 등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조선 민중을 착취했고, 사기를 쳤다. 백산은 이런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대대적인 시위와 부당함을 알렸고, 여론을 통해 해결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집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도와주기도 했다.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어려운 동족의 어려움을 보살펴 준 것이다. 생각하면 국가란 땅, 국민, 무력이란 3가지 중에서 가장 무엇이 필요한 가에서 공자나 혹은 많은 정치철학자들은 국민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국가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 없으면 국가를 재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해임시정부 역시 주권을 상실해도 대한민국 정부의 전신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조직하여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독립군조차 모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로하여 별세하고, 인간의 천수도 누리기 전에 총칼에 맞고, 고문에 쓰러져 갔다. 그런 비탄의 시간조차 억울한데, 지금의 현재시간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최근 일본의 극우행동에서 백산 선생님이 힘들게 기울인 노력이 그저 물거품이란 사실은 허무한 사실이다. 진심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과 국가의 자유와 평화를 바란 분들은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대신 그들을 업신여기고 일본과 결탁한 자들은 떵떵거리는 모습은 씁쓸하다.

 

친일하던 자들의 후손이 일제에게 받은 재산을 국가에 반납되지 않기 재판을 하는 모습에서 과연 인간이라면 부끄러움이 없는지, 최근에는 자기 조상이 친일한 것을 자랑하는 인간이 있다고 들었고,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은 한국이 독립하지 않아야 했다는 말도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만약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그런 만화와 애니메이션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군국주의가 유지되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서다.

 

우리나라 독립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이 놀라는 점은 한국인만을 아니라 일본의 국민조차도 염려한다는 점이다. 죄 없는 일본국민들을 다른 다라의 국민을 괴롭히는 범죄자를 만든 것도 모자라 전쟁의 위기에 몰아넣어 그들을 죽음의 땅으로 집어넣는 것조차 말이다. 아직도 그런 망언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무리를 볼 때마다 요새 정말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점에서 백산 선생은 임오교변(1942년) 사건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43년 8월 순국한다.

 

백산 선생이 유언으로 내리기를 “앞으로 2년 후면 일본은 패망할 것이요. 오방은 독립될 것이다. 너희 형제들이 앞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였을 때에는 너희 등의 양심에 물어 처신하라. 고상의 각 공지 산에 과목을 심으라.”

 

백산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지식인이며 경제인이었다. 경제활동으로 민족의 위해 독립운동을 했고, 어려운 민중을 도움을 주었다. 지금의 경제활동은 제로섬 게임과 같이 승자독식과 패자멸망이란 아쉬운 기로를 생각하면 백산 선생이야 말로 우리가 존경해야할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경제인이다. 근대화라는 것과 근대철학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근대철학이란 근대화의 기본정신이 되었지만, 근대화는 근대철학을 완수하지 못했다. 근대철학은 계몽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산 선생의 계몽정신은 합리주의를 넘어 합당한 것을 추구하는 민족의 근대 지식인의 참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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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책만드는집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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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란 작품은 작가 본인의 작품 중에 상당히 초반에 만든 작품이다. 그 이후에 나온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도련님>은 장편의 소설보단 중편의 소설에 가까운 분량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몇 권을 읽으면 생각하지만 그의 소설은 등장인물이나 주변 배경적 조건이 복잡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보통 주인공과 그 주변의 가족, 그리고 몇 몇의 주변인물 정도이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인물과 공간에서도 그의 소설은 상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작은 세계만을 다루는 것 같으나, 사실 그가 다루는 소설은 그렇게 작은 세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도련님>이란 작품은 청일전쟁 전후 시대에 어느 한 남자가 물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타지의 학교의 수학교사로 부임 받아 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야기를 보면서 기차가 생긴 것이나, 혹은 학교 미술교사가 마돈나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 일본에 서양의 근대문물이 막 도입되던 시기에서의 냉철한 그의 눈썰미도 보인다.

 

우선 작품 내에서 주인공인 도련님은 진짜 도련님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절 매우 말썽을 많이 피우고, 장난을 많이 쳤으며, 장난의 도가 지나치다 못해 자기 손가락에 칼을 베게하거나 장기를 두다가 형을 때리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집안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히고, 아버지로부터는 의절선언까지 들었다. 도중에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 역시 도련님의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라고 원망을 듣기도 했다.

 

삶의 목표나 자신의 길을 찾는 것보다 오로지 장난치며 시간을 보내던 도련님은 중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별 생각도 없이 물리전문학교를 진학하고, 졸업하여 수학교사로 부임되면서 그저 주변 상황이나 시대적 흐름과 관계없이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처럼 나온다. 그래도 이상하게도 도련님에게도 유일한 아군이 있었다. 도쿠가와 에도시대의 고귀한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귀족가문이 몰락하면서 도련님 집에서 하인으로 고용된 기요가 있었다.

 

늙은 할머니인 기요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련님에 대해서는 아주 지극정성이다.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고, 필요할 때는 용돈과 간식도 주었다. 도련님을 무엇을 할 때마다 칭찬을 해주었고, 옛날에 태어났다면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격려해준다. 겉으로 본다면 마치 철없는 아이를 두고 오냐오냐 하면서 길러주는 할머니 같은 인물이 기요였다. 그래서 도련님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기요 만큼에 대해 매우 특별히 생각하였고, 시코쿠 쪽의 중학교에 가면서 기요를 두고 갈 순간, 만약 거기 간 뒤에 언제 기요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도 했으며, 가는 날 우는 기요를 뒤로 한 채 떠날 때에도 혼자 마치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한 도련님, 오직 기요에게만 사랑받은 도련님, 이제는 고향의 품을 떠나 낯선 곳에 가서 혼자만의 삶을 꾸려야 했다. 도련님의 새로운 인생에서 그가 살아온 행실은 전혀 좋지 못한 것이기에 잘 지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코쿠에 있는 중학교에 오면서 도련님은 어느 평범한 부임 교사처럼 행동하기보단 다른 행동을 보였다. 튀김우동을 먹고, 경단을 먹으며, 억지로 누군가 같이 할 것을 권하면 응하지 않고, 혼자 원하는 것을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좋은 인상을 줄 리가 없다. 직설적인 행동과 남의 눈치를 억지로 맞추지 않아 그는 학교 내의 선생이나 학생들에게 좋지 못한 인물로 찍혀 있었다. 특히 잠자고 있는 방에 학생들이 집단으로 장난친 것과 학생들의 장난을 억지로 잡아 해결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평범한 학교선생이 아닌 것으로 나왔다. 또한 같은 수학교사인 센바람에 대해 처음에 잘 지내는 것 같더니, 하숙집의 주인인 이상한 골동품을 강매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하자 하숙집 주인의 앙심으로 처음 소개해주었던 센바람에게 집에서 쫓겨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도 했다.

 

원하지 않는 학교생활과 원만하지 못한 일상에서 도련님이 자신의 학교에 뭔가 있다고 여긴 것은 낚시하러 가면서다. 빨간 셔츠 교감과 미술교사 딸랑이와 같이 낚시하러 가면서 자신에 대한 험담과 더불어 센바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게다가 새로 이사 간 하숙집으로 가면서 끝물 호박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끝물 호박선생은 도련님이 학교 내에서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아니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하던 사람이었다.

 

끝물 선생은 집안이 쇠락하여 약혼녀와 결혼하지 못하게 되고, 억지로 다른 지역으로 부임까지 가야했다. 집안이 쇠락한 것도 모자라 약혼녀와 부임 문제에서 도련님은 그 내막을 알게 되고, 때마침 센바람도 골동품을 강매하려고 하던 하숙집 주인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알면서 다시 도련님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도련님은 처세술에는 매우 능하지 못한 인물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은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도 싫어하며 도리어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

 

기요가 말한 것이나 스스로 도련님이 귀족집안의 후예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 점에서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사회가 어떤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소문을 듣고 흘리고 남의 흉을 보는 좋아하고, 인간이 인간으로 가져야 하는 인간성에서 도련님으로 통해 본 사회란 위선이 가득한 곳이었다. 정규학사를 나온 사람들이 근대사회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었고, 기요와 같은 인물은 막부시대 귀족의 후손이나, 몰락한 이상 그저 하인에 불과했다. 근대문명의 유입과 더불어 메이지유신은 과거와 근대의 혼란 속에서 인간의 정신을 발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퇴화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교양인으로서 행동하기보단 오히려 어설픈 지식으로 잘난 척하고, 그것까지 좋다 하더라도 남이 곤란한 상황을 이용하거나 혹은 억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도련님이 있는 마을에서 큰 행사가 있었는데, 중학교와 사범학교 학생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싸움이 일어나면 교사들이 말릴 생각 없이 그저 도망치기 바쁘고, 오히려 말리던 도련님과 센바람이 중간에 맞으면서 싸움 말리던 사람들은 싸움을 끝을 내려고 했다. 덕분에 경찰에게 연행되어 간단히 취조 후에 풀려났다.

 

그런 상황에서 신문에서 도련님과 센바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2사람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이 문제로 센바람은 학교에서 강제로 사표를 쓰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의 싸움을 말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삼아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찍어 내는 행동에서 <도련님>의 소설에서는 시대가 변했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이기심과 질투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지식인이어야 할 이들이 지식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을 보고 <도련님>이란 소설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고, 사람들의 입이 싸다는 점, 타인을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짓, 남의 작은 행동에는 큰 망신을 주면서 정작 그 망신을 주려는 자들은 도덕적으로 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이때까지 자신의 뜻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는 도련님이 훨씬 인간다워 보인다. 끝물 호박선생이 다른 곳에 가면 자신의 월급이 올라가는데도, 그 돈을 받지 않는 점이나 혹은 끝물 호박선생을 궁지로 내몬 딸랑이와 빨간 셔츠를 골탕 먹인 것도 그렇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은 매우 작은 공간의 사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이야기가 사소하지 못하게 여기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도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도련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기저기 일어나는 것이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신시대의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할 도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히려 골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지금 만약 도련님이 현실에 있다면 더욱 곤란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 딱히 에도시대를 찬양한 사람은 아니나, 적어도 그의 글에서 에도시대의 삶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적어도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맞게 노력하려 했으나, 이제는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9세기 한국의 위대한 철학가이면서 정치인이던 다산 정약용 선생 역시 시대의 흐름에서 농민을 괴롭히고 착취하던 양반과 관료들의 특권의식을 비판했다. 그런 점의 그 분의 시조 한편을 보면 문구에 단군의 시대보다 못하다 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과거로 통해 보는 현실에서 보는 사회와 그 사회에서 보는 인간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은 잘 변하지 않은 존재라고 한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는 그런 시대의 변화에도 억지로 따라가도 거기에 묻히지 않으려 했다. 고집불통인 도련님과 같은 인물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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