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수이다. 그의 도서 중에서 <철학에 대하여>,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프랑스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의견과 더불어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새로운 방향이 나온 것에 대해 보았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는 분명히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사상가였다. 그런데 그의 저서 중에 이런 도서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마키아벨리의 가면>이란 도서를 말이다.

 

제목만 봤지, 실제 그것이 어떤 내용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후에 왜 그런가 싶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알튀세르가 <철학에 대하여>에 제기한 부딪힘에 대한 부분이었다. 관념론과 유물론, 그것이 어디서부터인가? 흔히 유물론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계몽주의 철학이 꽃피우던 18세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왜 마키아벨리에게 거슬러 갔는지 생각하면 그 해답이 있었다.

 

16세기 전후 피란체에서 거주하던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으로 적고, 또한 자신의 정치계에 복귀하기 위해 <군주론>을 집필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가 교황이 살았던 곳이고, 지금도 이탈리아 바티칸에는 국가는 없으나 국가를 초월한 세계의 지도자인 교황이 살고 있다. 교황이 지배하던 세기를 생각하면 중세유럽부터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에서 교황은 거의 신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자였다. 그런 신의 이름이 횡횡하던 시절에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선상에서 신이란 이름을 어떻게 보는가였다.

 

승리를 여신의 미소가 변덕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운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나, 그것과 더불어 인간의 노력과 근성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군주의 정치적 행보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운과 노력이 반반이라는 것은 운이라는 것이 신의 가호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이고, 인간의 노력과 업적이란 유물론적인 요소다. 르네상스 시대가 다가온다고 해도, 결국 당시 유럽은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신이란 이름을 가지고 지배하던 시기다.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내가 맡은 직업적 소양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넓은 평야에 엄청난 비가 내려 그곳이 물이 잠기는 것이라도 만약 제방이나 둑을 쌓을 경우, 그 물들은 범람하지 않거나 혹은 범람하더라도 둑과 제방으로 충분히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천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홍수량과 홍수위를 미리 예상하여 하천은 폭과 제방의 높이 그리고 둑의 넓이를 고려하여 홍수피해를 저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호우가 너무 심하게 내릴 경우 모든 피해를 막지는 못하지만, 최소한으로 막아 큰 타격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인간에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란 어떻게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사자와 여우를 모두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우의 민첩하고 예리한 사고력, 그리고 사자와 같은 강한 힘과 집행능력을 말이다. <군주론>을 읽다보면 분명히 이 책은 위험한 책일 수 있다. 절대적인 군주가 강한 통치력을 가지기 위해 갖은 모략과 전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딱히 위험하다고만 여길 수 없었다. 아쉽게도 <군주론>에선 군주가 견제해야할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명시했다.

 

그것은 자국을 위협하는 적국, 그 적국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일 때 같이 전쟁을 수행할 타국 원군과 용병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국가의 안전을 군주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 그것을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나 용병은 자신의 국가가 아니기에 최선을 다해 싸워주지 아니하며, 타국의 원군은 결국 자신의 국가가 아닌 자신들만의 국가의 주군을 위해 싸워주므로 최후에 승리할 경우 모든 승리의 전리는 원군이 좌우를 결정하는 셈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에서 왜국의 침입에서 명나라를 조선에 합류하도록 했으나 갖은 노략과 패악질만 부렸다. 또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국의 운명을 외국에 넘긴 셈이 되었다.

 

광복 이후 독립국가가 아니라 신탁통치에 의해 북과 남으로 갈리어 전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하면 그 나라의 권력은 남의 국가에 의해 결정되고, 자국민의 안전을 지키기가 곤란해진다. 설사 지킨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대가비용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문제를 이미 16세기에 지적을 했고, 로마의 공화정과 과두정, 혹은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비극이나 교훈을 찾아 <군주론>에 명시를 해놓은 것이다.

 

<군주론>에서 보이는 국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무엇인가? <군주론>을 읽는 순간, 마키아벨리의 서구정치철학사에서 <군주론>을 통해 정치에서 철학이 분리되었다고 본다. 이전까지 정치적 요건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라는 철인군주가 존재했었다. 철인군주는 강력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진 군주로서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전사, 그리고 철학자이어야 한다. 군주라는 존재는 철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완벽한 존재, 미적인 존재였다. 이와 달린 <군주론>은 군주는 완벽한 미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인 존재처럼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군주가 아니라 계략군주가 되어야 한다. 지금으로 봐서는 매우 잔혹하고 끔찍할 수 있다. <군주론>에선 가차 없는 공포와 처벌을 가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유럽사회에서는 유럽대륙 내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인접했기에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한 순간 국가는 패망하고, 적에게 잡힌 그 나라의 군주와 귀족들은 어김없이 저자거리에서 참수를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군주와 귀족은 죽더라도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그 나라에는 그냥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즉 국민들이 존재했다.

 

고대 중국에서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민(民)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명예롭게 보이기 위한 술책을 제공하나, 그것의 모든 시작점은 결국 국민이었다. 뒤로 갈수록 귀족과 국민에 대한 거리에서 귀족에게 환심을 사면서도 한편으로 국민에게 좋은 군주로 인식을 받아야 했다. 군주가 귀족에게 환심을 사야 하는 이유는 귀족이 자신만의 권력을 잡아 언제든 군주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국민에게 환심을 사야하는 것은 결국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존재는 타국의 원군도 용병도 설사 귀족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군주로 모셔주는 국민들에 의해서이다. 군주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점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고려하여 만든 서적이라고 한다. 이제 갓 운 좋게 독립을 한 자신의 나라에 언제 타국의 침입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고, 그것이 단순히 왕족과 귀족 같은 정치적 권력자에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문제가 국민들에게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시하는 의견 중에 군주는 낭비를 삼가야 할 것이나, 만일 다른 나라의 국민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자국의 군인이나 국민에게 주는 것은 찬성한다.

 

생각하면 자신의 국가가 타국을 정복하는 것에 대한 이익을 생각한 만큼, 역으로 돌리자면 타국이 자국을 침입하면 자국의 국민들이 노략질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통해 이른바 마키아벨리주의를 만들게 한 인물이나, 그는 공화주의자란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공화주의자는 평화를 모두 조화롭게 나누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그런 자신이 엄격하고 교활한 군주를 앞세운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에게 정복당하여 비참한 삶과 심한 피해를 받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군주가 되는 인물은 무릇 그 자신의 보위를 위해 결국 나라의 보위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만큼 마키아벨리는 군대가 바르게 운영되어야 하고, 법이 바르게 되어야 하는 것을 원했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최근 국내에서 사병자살로 인해 위로금을 간부들이 착복하거나 또는 각종 성범죄나 의문사고로 인해 군부대가 바르게 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런 현실이 부딪히면 결국 군인이 되는 자, 그러니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은 국민인데, 그 국민들이 군인이 되어 적절한 관리를 받지를 못하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저하된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군주의 생명이 직결되는 것은 국민들에게 사랑이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다.

 

군주는 너무 난폭하거나 흉악할 경우 밑의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국민들에 의해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군주는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도움이 되는 신하를 잘 뽑아야 하고, 그 신하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아이러니한 것은 마키아벨리는 거의 모든 인간에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결국 군주도 이기적이고, 국민도 이기적이라면, 신하 역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의 조건에서 신하의 충성을 위해 무엇을 바라는가? 군주는 무릇 신중하고, 현명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신하 소수 어느 대상에게 의존해서 안 되고, 너무 많은 신하에게 의존해서도 안 되면, 출세와 이권을 위해서만 올라오는 신하도 견제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정확히 선택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중간의 지점, 혹은 알튀세르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부딪힘에서 발생되는 우연처럼, 계속 부딪히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부딪히기 전에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전에 미리 계산하여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적 조건에 내몰릴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측하지 못하는 운이 누군가에게 행운이고, 누군가에게 불운이다. 그렇다면 그 운에만 맡기지 못하기에 평소 행실에서 드러난다. <군주론>에서 중요한 정치적 공략과 혹은 분리되어도 끝까지 남아있는 철학적 윤리는 절대로 국민에 대한 재산과 부녀자 강탈을 하지 마라는 것이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는 순간 군주는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귀족의 견제와 더불어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것 자체가 바로 이것이다. 산업을 장려하고 농업을 흥행하게 하는 점은 바로 군주를 위한 최고의 방법이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것이다.

 

생각하면 <군주론>의 가치가 현실을 보면 조금 기분이 묘하다. <군주론>은 독재자의 것이 아니라 독재자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짜 군주로서 국민을 대하는 것이 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군주론>이 집필 시기는 중세유럽이고, 계급이 왕족과 귀족이 있어도 최하층의 농민이 있다는 생각하면, 정치적 판단력은 결국 일부에게 정해져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도시국가도 10%의 남자만 정치에 참여하고, 그들은 직접 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병사로서 싸웠다. 중세에서는 기사라는 직업이 농민과 다르고, 오히려 국민들은 기사보단 일개 보병으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국민에게 군주가 의존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지켜줄 자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환심을 사는 것만이 자기의 생존을 유지하는 셈이다. 지금에 와서 <군주론>이 통치자 하나에게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대중문화라는 군중심리를 생각하면 미디어에 대한 부분이 효과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면 <군주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통치자와 그 주변의 관료들은 조금 자신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가장 조심할 주변인물로는 아첨꾼이다. 아첨꾼이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것만으로 국가의 손해인데, 그들이 탐욕스럽다면 더욱 어려운 형국이 될 것이다.

 

아무튼 <군주론>을 읽으면서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고, 그 중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과 타인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아마 그런 자들이 마키아벨리가 가장 경계하는 내부의 적일 것이다. 과연 <군주론>을 읽으면서 강한 군주란 무엇인지 다시금 볼 필요가 있다. <군주론>에서 21세기와 어울리지 않았던 이유는 이때는 왕정시대고, 왕은 주로 무력을 직접 통솔하는 장군이었다.

 

그렇기에 주변의 국민들을 제대로 볼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통치자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않은 현실이다. 안 그러면 차라리 괴벨스와 같은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편이 오히려 정치적 이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사용하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다. 현실을 속일 수 있어도 현실의 문제점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