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
앤디 메리필드 지음, 남청수.김성희.최남도 옮김 / 이후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이 책을 잡게 된 동기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저술한 기 드보르를 검색하면서이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감독이며, 사상가며, 선동가이다. 그는 최후의 아방가르드운동의 마지막 주자였다. 그가 속한 KOBRA는 1970년대에 해체되면서 이 세계에서는 아방가르드 운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방가르드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입방정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으며, 스펙타클이란 용어는 심심하면 광고나 미디어 내의 쇼 프로그램이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등에서도 튀어 나온다. 생각하자면 정확한 의미나 용어를 모른 채 마구 이 단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드보르가 추구하던 상황주의자처럼 살아가지 않지만, 그가 제시한 상황주의적인 판단은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조차도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고리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말이다. spetacle이란 용어는 이미지가 매개가 된 사회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이 세상(그러니깐 하다못해 본인의 집에 나와 길가의 도로를 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은 그야말로 스펙타클이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 지역은 도시라는 거대한 문명과 산업이 밀집된 공간이다.

 

이제는 점차 바뀌어 도시는 산업화에서 탈산업화로 이양되고, 대신 금융과 서비스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화가 밀려난 비도시인 농촌지역이 서서 도시화가 되어가고 있다. 산업활동과 더불어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과 자연을 파괴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점을 염두 하면 앤디 메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도시와 인간, 그리고 그 곳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마르크스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야기로 통해 어떻게 우리가 도시를 생각해야하는지 알려준다.

 

먼저 이 책은 단순히 맑스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다루기보단 마르크스주의로서 도시라는 공간에 살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과 삶, 그리고 거기서 얻어낸 도시라는 기능과 현실을 알아가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정체된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과 도시를 비교하면, 도시는 정형적인 건축물과 시설물이 존재하는 곳이나, 그 도시 안에는 인간이란 유동적인 존재가 있다. 따라서 도시는 고정적인 존재고 인간은 유동적인 존재다. 하지만 고정적 존재는 유동적 존재를 담아두는 매체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동성을 고정성으로 바꾸어 버리고, 인간은 건축물이란 고정성이 존재하나 건축물의 양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켰다.

 

즉 고정성과 유동성이 서로 변화를 주는 변증법적인 요소에서 도시란 것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그들의 삶과 흔적을 찾는 저자와 다시 저자의 서적을 읽고, 그 서적을 보고 생각하는 나로 통하여 고정성과 유동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선 나는 최근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인간의 유동적인 흐름은 고정적인 지리와 자연에 영향을 주며, 그 영향을 받은 지리와 자연은 도시적 기능을 갖추면서, 인간 자체를 도시 안에 가두어 버린다. 내가 살던 곳은 섬과 육지로 교량으로 연결된 곳에서 육지와 많이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도로가 확장되면서 차량의 이동이 증가되고, 뒤쪽의 산을 밀게 되면서 아파트단지가 형성되며, 집 근처에 큰 가게가 생기면서 생활환경의 질이 하락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문화적 구조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 사회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을 보므로, 내가 살아가는 동네에 대한 변화는 결국 도시와 인간에 대한 관계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일상생활의 변화에 대해 내 자신이 느꼈다면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와 만나다> 역시 그런 변화를 당시 사람들을 지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만일 어떤 도시나 다른 국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3가지의 장소로 가보라고 했다. 장소 1개소는 기억나지 않으나, 1개소는 도서관이고, 다른 1개소는 시장(market)이란 곳이다.

 

흔히 시장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며,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시장의 공간성으로 통해 그 사회의 커뮤니티와 사람들의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이란 것은 누가 일부러 만들어준 곳보다는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의 집합장소다. 그렇기에 시장이란 곳을 알아가는 것은 그 사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치관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이며, 삶의 질까지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강력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예전에 읽어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이라는 도서였다. 호크 하이머와 아도르노, 하버트 마르쿠제 등 다양한 학자들이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인문학자로서 어떤 삶과 어떤 학문을 했는지 알려주는 가이드역할을 맡은 도서였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고대 카빌라의 신비와 마르크스주의를 합친 발터 벤야민을 보게 되었다. 벤야민은 이미 <문예이론>과 <모스크바 일기>로서 접한 인물이었다. 그가 본 도시의 환경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까? 특히 국내 미학자인 진중권 교수가 제일 먼저 미학으로서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벤야민이다. 기존에 예술적 대상이 사물 즉 조각상이나 그림이었다면, 영상복제가 일어난 시대부터는 영화로 바뀐 점과 그것이 아우라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한 점이다.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복제품들이 오히려 원래보다 더 원래 같은 느낌을 주는 simulace의 도래에 벤야민의 사상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읽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이던 라시스란 여성을 만나면서, 그녀에게 빠진 후에 그녀가 살던 모스크바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벤야민은 자신이 러시아에서 가면서부터 오기까지 일기를 적었으며, 그 중에 대부분이 라시스라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관찰과 감정이었지만, 한편으로 러시아의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도시의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가득했으며, 거기에는 러시아 전통인형과 장난감으로 가득했다. 벤야민은 그런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 취했으며, 어린이와 같은 감수성으로 러시아 전통인형과 장난감을 사서 가지고 가는 내용을 보았다. 물론 배고픔과 추위는 언제나 러시아 사람들에게 큰 걱정이었으나, 적어도 시장에는 인간의 생동감이 살아있는 것이다.

 

벤야민이 이런 관찰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다시 돋보이는데, 내가 이때까지 접하지 못한 개념 이른바 파사주라는 것이 튀어나온다. 프랑스 파리의 19세기와 20세기에 존재하던 건축물 양식으로 거대한 유리천장을 거리를 둘러싸며, 그 거리 안에는 술집, 옷집, 아틀리에와 같은 상점이 입주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상업적인 흐름을 따라 가게만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녀와 포주, 그리고 불량배들이 함께 숨을 쉬던 곳이었다. 모든 인간들이 다양한 얼굴로서 돌아다니며, 파사주라는 공간은 마치 거대한 구경거리를 주는 재미난 공간이었다. 보들레르의 산보자라는 댄디처럼 산보자들은 거대한 구경거리를 지닌 이 파리의 파사주를 돌아다니면 인생의 낙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일단 파사주 안의 가게들은 상점과 더불어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원래 전통적인 수공업자 내지 또는 상점을 운영하는 가게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 안에 잠을 잘 수 있는 생활공간이 있었다. 즉 경제활동과 가정활동이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동일한 공간이었고, 생활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그 생활 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상가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간이 되었으며, 거리를 중앙으로 두고 양 옆으로 때로는 골목으로 이어진 상가들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주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보들레르의 산책이 이어지는 길가에서 자리 잡은 상가들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내지 혹은 18~19세기의 유럽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변혁되고 있었다. 토지가 대부분 몰수당한 농민, 대규모공장에 의해 몰락한 수공업자와 영세자본가, 그리고 도시에 사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의 자녀 등이 끊임없이 도시에 몰려들고 그 주변을 배회했다. 그래서 초반의 도시는 냄새로 가득하고 쓰레기가 즐비하며, 많은 사람들이 타락해갔다. 18세기 낭만주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그토록 동경하던 파리에 갔을 때 그에겐 열광과 희망의 이름 대신 실망과 회의감이었다.

 

인간의 생활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루소가 지적하다시피 사유에 대한 지나친 차이는 인간의 불평등을 초래하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에 억압을 준다고 했다. 물론 서적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이나,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의 발견자, 루소>처럼 루소는 마르크스의 사상적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만약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읽는 순간, 머리에서 번개가 내려꽂히는 기분을 것이다. 두 책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던 파리라는 도시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국에서 보던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는 독일 출신이나 그의 정치적 운동 때문에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추방되어 최후의 망명지인 영국 런던에 안주하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 있는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면서 <자본>을 집필하였으며, 도시라는 공간에서 노동자의 모습을 보았다. 도시라는 곳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권력자들의 왕궁이 있는 곳이라면 자본주의 이후로는 빈민과 창녀의 소굴이었고, 착취의 악마가 사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 매력은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문화적 인프라가 있었다는 점과 인간들의 밀집소란 점에서 새로운 모험이 있기도 한 곳이었다. 마르크스 친구인 엥겔스는 멘체스터의 밤을 돌아다니며, 도시의 역동성을 보았다.

 

도시는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병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생기도 있었다. 아무렇게 만들어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사람들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한국에서 소문난 맛 집과 유명한 가게는 대로변에 있는 곳이 아니라 대부분 골목 사이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했다. 그런 가게들이 대규모로 신축하여 큰 거리로 나오게 되면 그때의 그 맛이 사라지는 마술과 같은 일들이 생긴다. 인간의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은 단순히 음식재료와 조리방법으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골목들이 이어진 시장에서 인간의 다양한 문화가 생기고, 서민들의 이야기가 꽃 피운다.

 

그런 공간을 없애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공간을 없애는 것과 같다. 가령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는 전형적인 관료주의로서 프랑스를 통치한 독재자로서 그의 세력 중에 오스망 백작은 파리의 거리를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는데, 먼저 기존의 파리상가들을 철거하고 거기에 거대한 도로와 그 도로 주변에 거대한 건물, 공공시설, 상징물 등을 집어넣는다. 파리의 거리가 파리시민의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 상징적인 도시정비는 거리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을 변방으로 내몰게 되었고, 일을 하는 가게와 거주하는 가정을 분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현대에서도 가정이 상가와 같이 겸용하는 가구도 있지만,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실태다. 그런 이유는 대규모 자본유입으로 통한 공업화와 관계가 있다.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많은 집들이 필요했다. 그들을 가두는 것으로 통해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것은 어느 순간 노동자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 노동자로 통해 이윤을 내려고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감옥은 학교, 공장, 직장 등만이 아니라 주거시설도 역시 감옥이 되어야 했다.

 

대규모 단지 아파트를 가보면 인간이 사는 공간과 형식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같은 평수와 같은 방 구조, 같은 경치까지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집은 마치 죄수번호가 새겨진 감옥처럼 규격화되어 버렸다. 아파트라는 대규모 집단주거단지는 이웃이 옆에 있어도 이웃보다는 남으로 대해야 했다. 파사주처럼 거리의 건너편에 있는 가게사람을 볼 수 있는 낭만적 요소도 제거되었으며, 아파트 안을 보는 것은 개인의 영역에 대한 침해였다. 이런 감옥과 같은 아파트계획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좋은 공간이었고, 그들은 단순히 노동시간만 노동하는 게 아니라 노동시간 외에도 노동하게 되었다.

 

드보르가 제시한 스펙타클처럼 TV나 미디어는 곧 대중문화로서 노동자들의 생활에 침투하고, 그들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만 생각하게 유도했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던 시장과 달리 아파트문화는 그렇게 획일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아파트단지 생활을 위해 대규모 마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시장은 대규모마트로 인해 점차 소멸되어가고, 대자본가들은 아파트단지로서 자신들의 노동자를 가두고, TV로서 사유의 전환을 막으며, 대규모점포로서 또 다시 이윤을 얻는다. TV라는 것은 상품이 이미지라는 것으로 통해 전달되므로 TV시청은 휴식이 아니라 단지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이런 프롤레타리아 부류가 도시중심에서 살다가 도시 외부로 추방되면서 부동산 경기는 치열하게 뛰어오르며, 부동산 투기로 한 몫을 노리는 부류도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부동산이 참 걱정인 이유는 보통 한국인들은 아파트를 전세 내지 구매하면 계속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 자신이 구매한 집의 평균 수명이 30년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30년을 살고 난 후에 집을 이동할 때 재건축계획에서 그 재건축되는 집과 자신의 집의 가격 차이를 보면 절대 100% 이내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도 주택을 소유하고 것은 70%가 되지 못한다. 최근에는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여전히 재건축현장은 늘어나는 추세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집은 늘어가는 반면 그 집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가는 것은 심각한 현상이다. 이른바 부동산에서 내 집은 비싸게 팔고, 남 집은 싸게 구매하려는 소비자의 심리가 계속 자극하면서 부동산에 동반되는 화폐유통은 엄청난 것이다. 이미 한 사람이 10년 동안 벌어도 집 구매가 어려운 현실에서 도시의 착취는 바로 주택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규모산업단지 있는 곳에 노동자를 오게 해놓고, 집을 안정적으로 제공하지 않을 경우 그 지역은 반드시 큰 문제점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지역의 산업단지가 사라져도 문제가 된다. 실직자의 대량생산은 그 지역의 상권을 모두 절멸시키는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것은 결국 유기적인 존재이나, 그 도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적 기능에서 도시계획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가? 그래서일까? 최근 환경경제학자의 강의를 듣는 도중 도시의 생태적 기능을 부여하고, 도시의 공간이 자연적인 요소를 되돌려 인간 커뮤니티를 발전시키는 도시계획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대단지 주택이나 자연적인 조경을 나두고, 건축배치는 직사각형으로 나열하여 도로로 중간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앙지역은 대규모 공원과 문화시설을 설치하고, 그 중심으로 원형으로 건축물을 배치하여 그 안에는 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공원과 문화공간을 향유하고, 부모들은 공동그룹을 구성하여 서로 음식을 구매하거나, 아파트단지를 운영하거나, 아이들의 학습과 놀이 프로그램을 개선하기도 한다. 기존의 도시에서 아파트라는 곳은 감옥과 같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도시적 기능을 다른 식으로 보완하여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협동조합이란 기능은 자신들의 주거지역만이 아니라 그 주거지역이 형성된 지역까지 확대되어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공간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런 일들이 국내에서 당장 실천되지 않지만, 그런 기능이 어느 정도 중요성을 보는 것 같다. 도시의 지역주민이 만든 커뮤니티는 그 지역사회의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특히 범죄나 사고로부터 예방해 줄 수 있으며, 생활환경의 개선대상은 소외된 이웃까지 혜택을 볼 수 있다. 삭막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둘러싼 도시에 인간의 마음 역시 삭막하게 변해간다. 인간의 비인간화, 그것을 눈치조차 챌 수 없게 하는 미디어, 드보르가 주장한 스펙타클처럼 도시의 잉여적 존재조차도 도시에서 당위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도시가 팽창하고 확장되며 건설되기 바란다. 이 책에서 (분명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서적이지만)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온 문구를 인용한다. “자신의 집이 불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점심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맞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잿더미 위에서 그 점심을 먹는다.”, 망각의 동물인지 아니면 현실을 볼 수 없는지 또는 보려고 하지를 않은 것인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적어도 가족주의라는 현실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그 가족주의가 자신의 아이의 목을 옭아매는 것은 이해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자본력을 가진 자들은 바로 그 가족주의야 말로 완벽한 사업의 밑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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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회사에서 휴가를 얻어 1박 2일로 서울 및 경기도 일원에 머물고 이제 집에 내려왔습니다. 휴가를 내어 서울로 간 이유는 2014년 SICAF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개회식은 화요일 22일에 개최되었으나, 사무실 업무 및 지방에 사는 이유로 23일 학술세미나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당일 서울로 올라 왔습니다. 이번 주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미래였습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미래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기존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국내 상황은 그저 아이들을 위한 오락이나 또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그런 취미생활과 여가생활에서 만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터넷에서 게재되는 웹툰, 문학적 요소와 만화적 요소를 합친 라이트노벨, 그리고 게임 등이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의 시대가 다가옴에 따라 수시로 웹툰을 즐길 수 있으며, 각종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스마트폰으로 게임도 즐깁니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는 기능에서 더 확장하여 카카오에서 게임을 실행하므로 우리 일상생활에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 및 웹툰은 깊숙하게 침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영상은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영상이므로 아무래도 21세기 만화 애니메이션의 영역은 커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시장형성과 소비자 및 대중의 인식, 그리고 정부의 법적 행정적인 규제가 총괄적인 문제가 있어서 개선이 더욱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조금 의미 있던 분야가 많았습니다. 애니메이션 부분에서는 앞으로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소비자의 실시간적인 교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발제자의 발표에서 제가 판단하기에는 발터 벤야민이 제기한 파사주적(술집, 아틀리에, 상점, 유흥가들 섞인 지붕이 연속적으로 연결된 건축물)인 파리의 거리를 말하며, 산보자란 유유히 거리를 돌면 그 거리의 즐거움을 즐긴 사람들이 앞으로 인터넷과 극장을 통해 유유히 삶의 유희를 즐긴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애니메이션이란 것이 단순히 만드는 사람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겠죠.

 

미디어라는 매체에서 애니메이션은 이미 영상과 소리를 동시에 내포하므로 이 멀티미디어적인 요소가 대중사회에 큰 역할을 하고, 실사영상과 애니메이션영상의 구분이 해체되면서 영화 자체가 애니메이션처럼 되는 사례가 허다하죠. 하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미디어라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이 반영되기에 하나의 프로파간다라는 선전행위로 이용될 수 있죠. 특히 애니메이션의 경우 과거 만화영화로 만들어질 때 <똘이 장군> 같은 매카시즘을 어린이에게 강제로 전달하는 방법이 있었기에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만큼 효과적인 매체는 없을 것이란 봅니다.

 


이런 점에서 폴란드 예술애니메이션 감독인 마리우스 빌친스키의 강의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분의 작품을 보며 너무 난해하고 어렵다고 느꼈지만, 기본적으로 느낀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의 이기심에 의해 희생되고, 그런 모습을 영화를 보고 나오는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영화로도 보면서도 각인하지 못하고 하나의 쇼로 여기는 스펙타클의 사회가 존재했습니다. 이미지가 매개가 되는 스펙타클의 의미처럼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역시 이미지로서 매개하니 그것이 대중사회에 큰 지배력은 주는 것 자체가 스펙타클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 만큼 실험적인 예술애니메이션은 기존 관성적 인식을 가진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새로운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마리우스 빌친스키 감독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추천하신 작품 중에 마르쟌 사트라피의 <페르세 폴리스>와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이더군요. 저는 전자의 작품은 만화책으로 보고, 후자는 애니메이션으로 보았습니다. <페르세 폴리스>는 이란 여성인 마르쟌 사트라피가 겪은 일을 보여주는데, 이란이란 국가가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중동전쟁과 구시대적인 이슬람문화로 인해 평화가 무참히 부서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바시르와 왈츠를>는 1982년 이슬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마리우스 빌친스키의 앞으로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바로 대중적 재미와 오락만이 아니라 위와 같은 우리가 생각해야할 점, 앞으로 세상의 문제점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술에서 만화는 제9의 예술이라는 것이고,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같이 제7의 예술이어야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SICAF 행사 이외에도 24일 오전에 방문한 단원미술관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특별기획전이 진정 예술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부산․경남지역만화작가 및 웹툰작가분들이 이번에 기획전에 투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안산은 처음이고, 안산에서 집에 오는 시간 역시 길었지만, 그 시간과 고생은 찾아간 보람을 생각한다면 매우 의미 있게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전시회 가면서 눈에 띈 것은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그림이기도 했으나, 박재동 화백과 조관제 화백의 작품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로 작가분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주셨고, 특히 박재동 화백께서는 세월호 희생자 학생의 얼굴을 그려주고, 그 옆에는 부모형제분들이 직접 편지로 적은 글이 새겨져 있더군요.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참 답답했습니다.


 

 


저는 아직 세월호 추모와 관련하여 추모하는 공간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현실의 모습과 단원미술관 하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 과연 이 문제가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전시한 그림 중에 인상 남는 것이 518의 비극을 차용한 그림이었습니다. 몽둥이로 어느 청년의 머리를 때리려는 군인, 이미 34년이 지났으나 그때의 악몽이 지금도 나타난다는 저 유령과 같은 모습에 소름이 끼치더군요.

 

올해 4월 저도 처음 광주 망월동에 가서 그 희생자들의 흑백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직 초등학교조차 가지도 못한 어린 아이의 흑백영정이 있었습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도 있었습니다. 2011년에 돌아가신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남영동>이란 수기를 읽어보면서 그때 광주의 비극을 보면서 무서웠습니다. 그런 기억이 그림 1장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듯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몇몇 방문자분들도 있었습니다. 옆에 계신 어느 여성분은 손수건을 눈물을 훔치며 보고 있었으며, 어떤 소녀는 그림과 그림 사이의 하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서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마 이번 희생자의 가까운 사람이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나 봅니다. 마리우스 빌친스키의 감독 말이 생각난 이유가 바로 애니메이션도 그렇지만 만화 역시 이런 사회적 문제를 다룬 것으로 만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장르가 하나의 예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었지요. 벽에 걸린 그림을 보러 가는가? 아니면 그림이 걸린 벽을 보러 가는가?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후자가 강하겠죠?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치 어린아이들 취급하거나 또는 시간 때우기 식으로 여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술이란 것은 삶을 빛이 굴절되는 것처럼 보기에, 현실의 비극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은 점에서 만화예술은 바로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강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든다고 여깁니다.

 

웹툰과 관련하여 최근에 생각나던 작품은 박운음 작가의 <노공이산>이었습니다(그 분이 디자인한 4주기 노란티를 입고 봉하마을에서 몇 번 일했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그분의 말씀처럼 자신은 우공이산을 노공이산처럼 칭한 것처럼 상당히 기억 남는 웹툰이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원진 레이온 사건을 잊을 수 없더군요. 신경이 마비되어 온 몸이 마비되어 가는 노동자 앞에서 무력한 그 분과, 그 분을 바라보는 노동자의 어린 딸, 웹툰이란 것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생각지도 못했지요. 5월의 아픔도 가시기 전에 4월의 비극은 너무나 충격적이더군요.

 

 



만화와 웹툰이 사실 단순히 재미를 넘어 그 표현적인 방법이 아주 탁월한 메시지를 주니 한편으로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라보며 참 답답하더군요. 어째든 세월호 추모 특별기획전 준비하신 분들 수고했고, 저번 부산만화연대 모임에 가서 만화가가 아니라서 적응하기 힘들었으나, 전시작품 중에서 제가 아는 분과 그 날 알게 된 분들의 작품을 보면서 많이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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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에서 서울 올라오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정말 만화 사랑은 만애비 님을 따를 자 없을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5 08:19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SICAF 교수님 중에 시계, 반지, 목걸이, 핸드폰 바탕화면과 엑세사리까지 디즈니이신 분도 있습니다. 연세가 60대인데 눈빛은 20대 청춘입니다!! 멋집니다!!
 

<꽃이 피는 첫 걸음>이란 작품은 본래 TVA로 나온 애니메이션으로 이번에 감상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꽃이 피는 첫 걸음>은 아직 킷스이소 여관이 폐관 이전에 일어난 일을 구성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주인공 오하나의 외삼촌인 시지마 에니시가 카와자리 타카코와 결혼 후에 일일 것이다. 시기적으로 킷스이쇼 여관이 폐관 이전에 일어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두사람의 결혼과 더불어 TVA에서는 어느 이벤트가 발생한다. 그것은 예전에 오하나의 외할머니집에서 나온 어머니 사츠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킷스이쇼의 일을 도와주던 때다.

 

TVA 마지막화를 보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서로 마음속으로 깊은 응어리를 맺고 있으나, 그 나름대로 서로를 이해해주는 모녀로서 등장한다. <꽃이 피는 첫 걸음>을 처음부터 보면 알겠으나, 오하나의 어머니인 사츠키는 집안일에 영 서툴며, 일이 바쁜 관계로 오하나를 혼자 내버려둔 채 계속 밖의 일에 몰두한다. 게다가 첫 화부터 사츠키의 애인이 빚으로 인해 오하나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어서 시골에 있는 킷스이쇼에 보낸다. 하지만 문제는 킷스이쇼에 있는 가족들은 오랫동안 서로 교류가 없었다는 점과 거기에 보내진 오하나는 여관주인의 귀한 외손녀가 아니라 그저 말썽만 일으킨 딸이 낳은 아이에 불과했다.

 

여관에 도착하자말자 오하나는 여관집의 손녀가 아닌 여관집의 종업원이 되어야 했고, 그 속에서 학교친구들과 같이 일하면서 근로소녀로서 살아간다. 작은 공간이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일상 속에 충분히 있을 법한 사람이다. 드라마적인 요소 즉 Drama라는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과 같이 오하나의 인생은 그저 평범한 편모집안의 여고생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이야기다. 물론 자신만이 아니라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민코, 가정 일을 도우면서 여관일을 하는 나코 같이 다들 일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킷스이쇼(하지만 애니메이션 작화에서는 모두 미소녀지만)이다.

이 전통일본식 여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주인공 오하나라는 존재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물론 킷스이쇼 여관이 과거의 산물이나, 그 과거 산물인 전통이란 이름을 지키기 위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세상에 따라 같이 동조하며, 지킬 가치는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가치는 받아들인 것으로서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전통이란 가치에서 우리 역사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조선이란 국가가 최후의 왕조국가이고, 전통문화이다. 하지만 조선 이전의 고려나 발해, 삼국시대나 고조선의 문화적인 유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한국의 제사문화를 비롯하여 묘소를 산으로 이장하는 것, 어업을 하는 어부가 용신굿을 하는 것은 한국의 전통문화가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이들 문화가 조선시대부터 있었을까? 조선시대는 유교문화이고, 특히 공자의 유학보다는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성리학에 의해 진행된 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화가 아직도 향교문화라는 것으로 전해지고, 제사문화 내지 전통문화가 조선시대 유교문화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런다고 해도 그 유교문화가 그대로 이어진다고 하면 21세기 민주주의국가사회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통문화는 그 자리에 고인 썩은 물처럼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물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물을 내보내야 한다. 즉 물 그 자체는 흘러도 물을 담는 그릇인 매체는 그대로 존재하는 법처럼 말이다. 아니라면 좀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도 있다. 그런 과정이 바로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보인다. 주인공이 오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나, 막상 킷스이쇼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만든 오하나의 외할머니 스이의 모습에서 킷스이쇼는 단순히 스이의 집착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모두의 꿈이 있는 곳으로 승화해버린다.

 

그러나 꿈이 있기에 그 가치가 있기에 마지막화에 킷스이쇼는 폐관하게 이른다. 스이라는 늙은 안주인의 꿈은 자신을 사랑해주던 그녀의 남편, 아니 오하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스이의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 스이를 위해 킷스이쇼를 열었으나, 병으로 인해 죽고 만다. 남은 것은 스이와 여관 종업원들, 그 공간에서 사츠키와 에니시는 마음의 궁핍을 느낀다. 오하나의 어머니 사츠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녀였고, 에니시는 누나 사츠키의 그늘에 가려진 마음이 여린 소년이었다. 어머니가 남매보다는 여관에 치중하자, 에니시를 돌보는 것은 사츠키가 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에니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사츠키가 가진 마음속 빈공간에 새로운 바람이 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꽃이 피는 첫 걸음> 극장판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TVA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은 바로 오하나의 아버지 마츠마에 아야토다. 그는 전문적인 사진작가로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킷스이쇼여관에 머물며, 주변의 경치를 한 폭의 사진으로 담는다. 거기서부터 사츠키의 운명은 변하고, 오하나의 탄생이 시작했다. 오하나가 일어로 보면 꽃님이겠지만, 이탈리어로 가족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가족의 탄생에서 꽃과 같은 오하나의 탄생에는 사츠키의 꿈과 눈물이 있던 것이다.

 

작품 초반에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츠키는 어머니 스이와 갈등을 빚고 있다. 언제나 여관 일만 치중하고, 사츠키 남매에게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어머니, 사츠키는 언제나 어머니에 대해 불만이었다. 공부한다고 하고선 시내에 가서 예쁜 속옷 세트를 사온 사츠키를 냉대하게 대하는 스이에게 사츠키는 자신은 이런 공간에서 그냥 묻히기는 싫고, 자신은 자신의 길을 찾아 빛나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망령을 쫓아가는 것이 어머니라는 말과 함께 사츠키는 여고생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 공간에서 아야토의 만남은 사츠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게 되었다.

 

사츠키는 이제 18세 소녀, 아직까지 그녀는 퍼스트 키스는 둘째치더라도 첫사랑조차 없었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아야토였고, 아야토가 떠나기 전날 기습 키스를 날린다. 그리고 자신은 사진작가인 아야토 옆에 당당히 서기 위해 편집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잠시, 아야토는 오하나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된다. 여기서부터 사츠키는 자신의 길이 어머니 스이와 겹치는 것을 알게 된다. 결코 질 수 없다는 심정을 말이다. 질 수 없는 그 무엇인가는 자신의 주변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스이는 남편이 죽은 뒤, 여관을 혼자 이끌어왔다는 것을 사츠키는 알고 있었다.

 

남편을 잃은 사츠키가 오하나를 친정에 맡길 때 바로 어머니 스이가 힘들어도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은 모습을 본 것이다. 덕분에 사츠키는 자기 자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오하나를 여자 혼자서 키우기로 한다. 남편 없는 여자가 혼자서 돈 벌고 아이 키우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물론 남자 혼자서는 더욱 힘들지만 말이다. 그런 어려운 여건에서 사츠키는 그 빛나고 싶은 것을 찾았고, 또 찾아가려고 했다. 사츠키가 빛나는 모습은 스스로 볼 수 없었듯이 그 빛나는 모습을 유일하게 발견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아야토였다. 그런 사츠키가 아야토가 죽어도 그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다는 것은 아야토의 가족으로부터 아야토의 사진을 발견한 것에 대해 전화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아야토의 예전 사진을 찾아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사츠키, 겉으로 보면 어머니로서 낙제점을 받았으나, 사츠키라는 사람으로서는 백점인 인생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빛을 찾게 해준 아야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하나를 얻었고, 편집자가 된 여자 사츠키였다. 그래서 사츠키는 자신의 어머니 스이가 여관운영에 만사를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사츠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그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있을 장소와 삶의 이유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그 정체성을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나 감정과 무의식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감정보다도 무의식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정립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이성적으로 애를 혼자서 키우기도 어려운 사츠키나 남편 없이 킷스이쇼를 운영하는 스이나 두 모녀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같은 얼굴을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지만 같은 공간에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같은 얼굴이기에 서로를 보면 자기 자신의 맨 모습을 다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하나가 과거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있었던 일을 알고, 외할머니가 만든 여관을 보면서 자신이 그 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에 분하게 여겼다.

 

자신이 스스로 가야할 길을 가지 않고, 오히려 그 길을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쭉 같이 지낸 남자친구인 코이치가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 오하나는 그 대답에 대해 성실하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사츠키와 할머니 스이는 자신이 오히려 그 길을 찾아간 것이다. <꽃이 피는 첫 걸음> 극장판 <홈 스위트 홈>은 인간 오하나로 통해 보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물론 여정은 오하나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하나의 회상으로 어머니 사츠키가 구성된다. 소녀인 사츠키는 자신의 어머니인 스이와 매우 닮아있다. 이와 다르게 오하나는 머리색은 어머니나 느낌은 왠지 아버지와 닮아 보인다.

 

어떻게 보자면 어미니 사츠키와 할머니 스이의 대립성 즉 변증법적인 요소로서 오하나로 인물이 탄생한 게 아닌가 싶다. 오하나는 딱딱한 할머니와 공격적인 어머니보다는 밝고 다정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바쁜 이유로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으나, 사실 사츠키 역시 오하나를 사랑하나, 자신의 무책임한 일상으로서 오하나와의 일상을 지키려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하나는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해하면서 어른이란 공간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오하나만 아니라 오하나의 친구인 민치로도 알 수 있다.

 

민치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만 만들지만, 정작 어린 손님이나 노인 손님이 오면 그들의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으로서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요리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코는 계속 부모님을 돕기 위해 집안일을 챙기고(가계부를 나코가 작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생들을 돌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부담에 힘겨워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착한 딸이지만, 나코의 여동생 마나가 집에서 가출할 때, 나코는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마나의 소풍에 제발 따라가 달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타인의 입장만 보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힘든 부분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어른의 일이기도 하다. 그런다고 인간은 그렇게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보여준 것처럼 쉽게 어른이 되어가지 않는다(물론 작품 내 주인공은 힘들겠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에겐 어렵지 않다). 단지 보여줌으로서 일상 속에 머무는 우리에게 빛나는 순간이 있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힘들다는 점이고, 그 과정을 넘어도 여전히 힘든 일은 다가온다. 어른이 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단지 어른이 되어가고 어른이 되는 것은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았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고, 그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걸어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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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황봉모.박진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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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너무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 그의 저서엔 <게공선>은 1930년 실제 게잡이 공선의 일을 토대로 계속 연구하고 조사하여 만든 소설이다. 그 안에서 누구의 이름은 없다. 오로지 아사카와라는 감독이란 이름만 나온다. 몽둥이를 들고 혹은 권총을 들고 무력으로 선원들을 잡아대는 무법자, 그런 무법자는 자신에게 밀어준 권력에 빌붙어 마치 자신이 제왕으로서 군림한다. 그는 제왕보다는 그저 독재자고, 폭력만 추구하는 불한당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세계에선 이런 불한당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된다. 여러 곳에 글을 적을 때마다 하는 말이나 나는 개인적으로 정의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정의실현, 정의를 위해라는 슬로건만큼 쓰레기 같은 것은 없다. 정의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나 모든 것을 다 외면하고 박대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의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편할 때 얼마든지 우려먹을 수 있는 좋은 단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수재들에게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존 롤즈의 <정의론>을 읽는 순간 정의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정의는 오히려 상대적인 가치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가치란 즉 상대편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을 넘어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가치가 무너지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보통 나는 베스트셀러라는 도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무나 읽고, 소장하여 그 책의 본심과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찾을 수도 없는 책에 얽매이는 부류에 대하여 그냥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이 책 <게공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일본에서 150만부가 팔린 이 도서, 처음 나오던 때도 3만 이상 팔린 이 도서가 베스트셀러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것은 이 책이 그만큼 잘 만든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에 보이는 색깔은 전혀 밝은 빛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비참한 분노를 보여주는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이외에 그의 다른 서적이 읽고 싶어졌다. 그의 책에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전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분노에 찬 작가의 본인이었다. 후기를 읽어봐서 더욱 심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자신과 친하게 지낸 동료들이 경찰서에 가서 무척이나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심한 고통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 <게공선>이 <게잡이공선>으로 나온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 제1권은 그야말로 악의가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 보인다.

 

<방설림>이란 작품을 보면 모든 것을 잃은 겐키치의 분노도 선하고, <1928년 3월 15일>에는 고문취조실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운동가들의 비명소리도 들린다. <게잡이공선>은 순수하게 게를 잡아 가공하는 배에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방설림>은 삿포르에 떠난 연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아버지가 일꾼 땅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는 겐키치의 분노가 보였다. <1928년 3월 15일>에는 일본에서 군군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다나카가 총리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들에게 반대되던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이 나온다.

 

안 그래도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적으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 성우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유키노 사츠키라고, 40대의 여자성우가 있다. 한국에서 흔히 <이누야사>라는 작품의 카고메나 <풀메탈패닉>의 치도리의 목소리로 유명하다. 그 성우가 일본의 유사법제라는 것이 2003년에 일본 국회에서 통과할 때 치안유지법에서 국가총동원법이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글을 찾으면서 국가총동원법은 일본이 1938년에 만든 법으로 일본에서 가장 부끄럽고 더러운 역사인 위안부 및 강제징용의 근거가 되는 법이었다.

 

일본에서도 그런 암울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 시대에 대한 반민주적 반평화적 반자유적인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일본 역시 그런 문제가 되는 법에 대한 심각성을 잘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다. 바로 그러한 것이 <1928년 3월 15일>이란 작품에서 저런 내용이 생각나는 문구가 있었다. 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류키치가 순사에 의해 잡혀갔을 때 하던 이야기가 인상 깊다.

 

‘류키치는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보라구 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 헌법에 말이다. - 일본 신민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심문,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말이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정신 법률 수속을 밟아 체포, 감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나? - 이 속임수와 순 거짓말!”

 

실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사실적이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고문 기술자나 또는 고문을 하는 기술이 마치 독립군을 고문하던 일본 순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얼굴표정이 마치 내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 오는 기분이었다. 고문에 대한 이야기에서 얼마나 심하게 구타했으면, 정신상태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었고, 고문을 할 때 사람의 목을 졸라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비단 우리만 아니라 일본의 자국민까지 이어지고, 특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이어진 것이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책을 보는 순간 그들과 왠지 모를 공감이 형성되었다. 암울한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비참함에 시달렸나? 우리나라에서 산업화의 일꾼이라고 하던 자들은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시간과 끔찍한 근무환경에 병들었다. 잠도 못자고 일하다 재봉틀 바늘이 손가락에 찔린 여공, 프레스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에 왠지 모르게 송곳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기서도 안타까운 내용이 소설에 나온다. 작가가 괜히 아픈 신음소리를 내며 만든 소설이 아닌 이유는 롤링에 2사람이 끼여 배출구에 나온 사람들은 아주 얇은 쥐포처럼 나온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하나, 그 소설 자체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인간에게 철학이란 말은 여기서 바로 나오는 것 같았다. 일본의 1920~30년대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1960~70년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해 외국의 문물을 본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일본의 30년 후의 모습을 우리가 밟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깐 지금 우리는 1980년대의 일본이라고 할까나?

 

부동산 투기와 버블경제로 인해 침체된 서민경제, 그리고 국가는 부유하나 국민은 가난하며, 여전히 권력은 못사는 사람을 위해가 아니라 못사는 사람을 쥐어짜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설림>에서 겐키치의 연인이던 오요시의 죽음은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삿포르에 일하러갔으나 처음에 일을 하려고 했으나 어느 부자 아들의 애인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임신하자 버림받았다. 집에 와서도 제대로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고, 만삭의 배로 추운 겨울 창고에서 잠을 청하다 산통이 오자 이내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의 편지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겐키치를 떠나온 그녀는 삿포르 도시에서 부자 아들에게 있는 그대로 다 버림받은 것도 한이 맺히나 자신이 사랑하던 겐키치와 결혼하지 못한 것이 더 한이었다는 점이다. 삿포르를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입을 챙길 수 있는 가정형편이 못 된 것이었다. 훗카이도의 무서운 추위를 이기고 개척하러 간 농민들이었으나, 그 농민이 만든 땅을 모두 지주가 채가고, 그들의 지주의 농노로 전락했으며, 이제 그 소작조차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심지어 강가의 연어조차 모두 독차지한 장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어떻게 그 상황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푸성귀에 된장을 넣고 끓인 국은 먹다가 토할 것 같고, 쌀은커녕 감자와 호박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들의 식단,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해지는 그 시간까지 일만 하는 농민들의 얼굴을 까맣게 타들어가고, 손은 소나무 껍질보다 더 거칠었다. 가지지 못한 자에게 어디에 가서 호소할 수 없는 것만큼 더 서러운 것은 없었다. <게공선>도 그렇고 <방설림>도 그렇다. 선원과 농민이 있는 힘을 다해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비참한 생활일 뿐 더 나은 미래는 없었다. 단지 일하고 일해 오직 해방되는 순간은 죽음이란 말처럼 너무 끔찍했다.

 

<1928년 3월 15일>에서 개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강가에 빠져죽을지 알면서도 향한다고 한다. 그 미래를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희생하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얼마나 한이 맺힐까?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암울한 상황과 거기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아무리 고문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노동운동가들은 실제 일본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역사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 인간의 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피로 끝난다.

 

물론 그 당시보단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비정규직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2개 내지 3개를 하는 바이트족도 생겼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이며, 그렇게 일하는 자리도 서로 경쟁자가 몰리는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게공선>이나 <방설림>에서 그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 가혹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흘러온다는 사실이다.

 

당장에는 국가적으로 부를 축척하고, 기업가들에겐 큰 이익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나라에는 미래와 희망을 죽이고, 스스로 살을 깎는 일로 되는 것이다. 단지 살이 깎는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는가? 아니면 덜 폭력적으로 해결하는가이다. 물론 비폭력적이라고 해도 그 상황에서 처한 약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국가에서 국민은 헌법 위에 있어야 하나 헌법이든 인간이든 모두 돈이 위에 있다는 점에서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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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변증법을 다룬 내용이 기억난다. 양이 일정량에 도달하면 질로 변화하는 것을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물론적으로 사회적 현상을 하나의 과학적인 연구로서 접근했다. 바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분야는 매우 크며, 사회과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다소 마음속으로 꺼리는 말일 수 있으나 사회과학은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심리학, 지리학, 법학 등이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이란 단어는 결코 낯선 단어는 아니나, 마르크스의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회과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사회라는 인간이 모인 공간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인 논리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도 나온다. 그런 요소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이다. 예전에 내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던 중, 공장법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령 영국에서 하루에 노동자에게 권고하는 노동시간은 10시간이나, 사실 실제 노동시간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이고, 때에 따라서는 9시를 넘고, 더 심하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일을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깐 아침 7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다.

 

사람이 하루 노동시간을 두고 말할 때 과연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까? 참고로 이 소설의 토대가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하쿠아이호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게공선이란 이름처럼 게를 잡아 가공하는 이 선박은 해양관련법규나 또는 공장관련법규에 전혀 저촉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2가지 법에 해당되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중간으로 빠져 나갔다. 이런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법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근무하는 장소가 육지가 아닌 바다라는 점이다. 바다에서 근무하게 되면 교통수단의 문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누가 어쩌다 죽게 되어도 그저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사고사 내지 의문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멈추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게공선>처럼 어류를 잡는 선원이 아닌 화물을 나르는 선원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을 넘을 경우도 있고, 선박이 워낙 노후 되어 가스배관에서 연기가 새어나와 일과를 마치고 나서 정리할 쯤에 세수하다보면 코에는 그을음이 생기고, 목은 가래로 가득하다. 게다가 악독한 노동환경으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고, 온 몸에는 상처와 화상이 가득하다. 이것이 내가 본 우리나라 노동자 1명에 대한 시선이다.

 

그만큼 선박에 타고 있는 노동자, 선원들은 매우 가혹한 환경에서 일을 한다. 허먼 멜빌이 만든 소설 <모비딕>을 보면 알겠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버림 받거나 또는 갈 곳이 없어서 몰려든 사람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비참함을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심한 노동 뒤에 아무리 대가가 온다고 해도 과중한 노동에 의한 육체적 손상, 기계적인 일상과 비인간적 대우는 인간의 가치관을 긍정적이지 못하게 바꾼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부조리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까울 분이다.

 

그런 점에서 <게공선>에서 보인 일본 게 낚시 선원들은 비참함을 넘어 죽음과 마주보고 있다. 선박의 환경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바닥은 언제나 악취로 가득하며, 감독이란 자는 고용주에게 직접 고용되었다는 것만 믿고 횡포를 부린다.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도가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흰색의 토끼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언제나 위험으로 가득하고, 특히 기상조건은 재해사고로 이어진다. 폭풍이 불어오면 배는 육지 근처에 정박하거나 혹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나 감독인 아사카와는 무리하게 배를 움직인다. 그리고 게공선에 달린 통통배를 보내어 그 배들이 폭풍에 휘말려도 배 안의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 대신 배들이 없어지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취급당하며, 그것도 고정적인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의 베어링 내지 벨트로 취급당하면 매우 심각해진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고 있다면 차 그 자체는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차 안의 타이어나 와이퍼는 쉽게 바꾸고 버릴 수 있다. 그런 자동차의 부품처럼 인간이 동원된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 상황에서 계속 인간은 참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증오를 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증오가 일정 라인을 돌파할 경우 인간은 자신의 인내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말하던 질과 양의 교환법칙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몰리면 성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단지 그 바뀌는 순간까지 관성의 법칙이라는 습성으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계속 비관하면서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착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되며, 그 상황은 다른 상황과 전재로 이어진다. <게공선>에서 잔혹한 노동착취로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진행시켜주지 않은 아사카와에 대한 분노가 결국 선박 내부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사카와가 해군전투함에 신고하여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두 번째는 파업이 성공하여 배가 다시 항구로 돌아오자, 파업을 하던 선원은 경찰서에 수감 후 풀려났으나, 아사카와와 그의 일당들은 돈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 결국 권력의 앞자리가 된 자 역시 그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버림 받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보면서 권력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권력에 충성하여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는 소수이고, 권력을 찾으러 오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찾으러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가는 실처럼 이어진 권력의 끄나풀을 잡기 위해 달려들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도 계속 인간들은 달려든다. 아니 오히려 그 끄나풀이 잘리면 그것을 대신할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는 아사카와 같은 인간들이 넘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권력에 아부하여 자신보다 불리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말이다. 작가인 코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노동자의 현실만 고발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고통 받는 대만과 한국도 같이 거론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겪는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기술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포인 일본인 중에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일본은 전쟁을 멈추고, 다른 민족을 자유로이 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데올로그가 결국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게공선> 내에서 처음 일본군함을 보던 선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외치나, 처음 아사카와 감독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일본군함에서는 무장한 일본수병을 보트로 태워 보내 파업을 주도한 9인을 체포하였다.

 

결국 군함이란 국가라는 권력은 약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게공선의 사장인 국회의원에게 협조한 것이다. 게공선의 선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훗카이도 위의 소비에트연방 국경으로 향하고, 일본군함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게공선과 같이 동행한 이유는 선박보호 차원도 있지만, 해양측량 및 기상관찰이란 명목으로 첩보를 펼친다. 결국 군함이 보호하는 것은 게공선의 선원이 아니라 게공선의 게가 든 통조림인 셈이다. 초반에 하쓰코호가 근처에 있던 다른 게공선이 선박이 너무 노후 되어 침몰하자, 하쓰코호에게 구조요청을 보내지만 아사카와 감독은 반대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악마 따위나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어이 도대체 이게 누구 배지. 회사가 돈 내고 빌린 배잖아. 뭐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회사대표 스다님과 여기 있는 나뿐이야. 당신, 선장이라고 잘난 척을 하는데, 그 까짓 건 똥간 종이만도 못해. 알기나 해. 그런 일에 상관하지 마. 일주일을 허비할 수 있어. 하루라도 늦기만 해봐. 게다가 지치부호는 과분할 정도로 큰 보험에 들어 있어. 다 낡은 배야. 가라앉으면 오히려 이익이야.”

 

생각하면 아사카와 감독이 타던 배도 매우 오래되어 언제 침몰 되도 이상하지 않은 배인데도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되는지 상관 없다와 오히려 그런 일로 보상금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왠지 요새 우리 사회를 보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착각에 빠진 게 우리 사회의 모순처럼 아사카와 같은 인간은 국가와 기업에 충성심에 빠져 그것을 망각한다. 물론 소실이지만 치지부호라는 게공선은 SOS가 닿지 않은 채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왠지 이 모습을 보면 2014년 대한민국 최고의 악몽인 세월호 사건이 생각난다. 아마 선장이나 선주 그리고 정부기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에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아사카와의 말로처럼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게공선의 하쓰코호를 만든 자들은 아직도 근엄하게 큰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억눌린 자들은 매일 힘들게 일을 하나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늘 병마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타락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고통과 착취가 가해지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시킨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바꾸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서 <게공선>에선 연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폭력적 방법으로 되어서도 안 되고, 그 자체도 불가능하다. 결국 작은 변화를 꾸준히 모아 해결갈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상징하는 인물로 의사가 있는데, 그는 아마 인도주의적인 자일 것이나, 결국에 현실의 모순을 바꿀 수 없었다.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법학자, 의사, 언론인 등과 같은 엘리트 들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에 속하는 이들의 인도주의는 번역가의 지적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인도주의자조차도 참 드물지 않나 싶다. 아직까지 인간이 대체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 도구가 없다면 사회조차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다. 재생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이길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변증법이란 질과 양의 관계처럼 단순히 한 번에 모든 것을 뒤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바꾸어 가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아야겠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거부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확신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일까? 매년 자살로 또는 산업재해로 또는 혼자 외로이 죽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현실에서 <게공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시라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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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 2014-07-2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작 중에 [게어선]이란 영화가 있어서 메모해 두고 있었는데 읽어보니 이 책이 그 원작이겠군요. 가능하면 책을 읽도록 해야겠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07-23 15:34   좋아요 0 | URL
게어선이면 딱 그렇군요

lmicah 2014-07-2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다룬 TV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이 책의 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호쿠사이의 작품에는 후지산이 등장하고 이 책의 표지에는 게공선이 등장하지요.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출간된 지 80년이 지난 책임에도 현실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책입니다. 리뷰도 기가 막히게 잘 쓰시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4-07-24 22:39   좋아요 0 | URL
호쿠사이의 그림이 저 책 표지로 사용하였지요. 리뷰는 다들 도움이 주시니깐 이렇게 적는 것이죠. 좋은 덧글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7-2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애비 님 직장을 어서 서울로 옮기시지요 !

만화애니비평 2014-07-25 08:19   좋아요 0 | URL
일자리가 없고, 집도 문제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