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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
앤디 메리필드 지음, 남청수.김성희.최남도 옮김 / 이후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이 책을 잡게 된 동기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저술한 기 드보르를 검색하면서이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감독이며, 사상가며, 선동가이다. 그는 최후의 아방가르드운동의 마지막 주자였다. 그가 속한 KOBRA는 1970년대에 해체되면서 이 세계에서는 아방가르드 운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방가르드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입방정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으며, 스펙타클이란 용어는 심심하면 광고나 미디어 내의 쇼 프로그램이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등에서도 튀어 나온다. 생각하자면 정확한 의미나 용어를 모른 채 마구 이 단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드보르가 추구하던 상황주의자처럼 살아가지 않지만, 그가 제시한 상황주의적인 판단은 나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조차도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고리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말이다. spetacle이란 용어는 이미지가 매개가 된 사회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이 세상(그러니깐 하다못해 본인의 집에 나와 길가의 도로를 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은 그야말로 스펙타클이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 지역은 도시라는 거대한 문명과 산업이 밀집된 공간이다.
이제는 점차 바뀌어 도시는 산업화에서 탈산업화로 이양되고, 대신 금융과 서비스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화가 밀려난 비도시인 농촌지역이 서서 도시화가 되어가고 있다. 산업활동과 더불어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과 자연을 파괴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점을 염두 하면 앤디 메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도시와 인간, 그리고 그 곳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마르크스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야기로 통해 어떻게 우리가 도시를 생각해야하는지 알려준다.
먼저 이 책은 단순히 맑스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다루기보단 마르크스주의로서 도시라는 공간에 살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과 삶, 그리고 거기서 얻어낸 도시라는 기능과 현실을 알아가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정체된 것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 인간과 도시를 비교하면, 도시는 정형적인 건축물과 시설물이 존재하는 곳이나, 그 도시 안에는 인간이란 유동적인 존재가 있다. 따라서 도시는 고정적인 존재고 인간은 유동적인 존재다. 하지만 고정적 존재는 유동적 존재를 담아두는 매체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동성을 고정성으로 바꾸어 버리고, 인간은 건축물이란 고정성이 존재하나 건축물의 양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켰다.
즉 고정성과 유동성이 서로 변화를 주는 변증법적인 요소에서 도시란 것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그들의 삶과 흔적을 찾는 저자와 다시 저자의 서적을 읽고, 그 서적을 보고 생각하는 나로 통하여 고정성과 유동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선 나는 최근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인간의 유동적인 흐름은 고정적인 지리와 자연에 영향을 주며, 그 영향을 받은 지리와 자연은 도시적 기능을 갖추면서, 인간 자체를 도시 안에 가두어 버린다. 내가 살던 곳은 섬과 육지로 교량으로 연결된 곳에서 육지와 많이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도로가 확장되면서 차량의 이동이 증가되고, 뒤쪽의 산을 밀게 되면서 아파트단지가 형성되며, 집 근처에 큰 가게가 생기면서 생활환경의 질이 하락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문화적 구조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 사회의 경제적, 환경적 조건을 보므로, 내가 살아가는 동네에 대한 변화는 결국 도시와 인간에 대한 관계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일상생활의 변화에 대해 내 자신이 느꼈다면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와 만나다> 역시 그런 변화를 당시 사람들을 지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만일 어떤 도시나 다른 국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3가지의 장소로 가보라고 했다. 장소 1개소는 기억나지 않으나, 1개소는 도서관이고, 다른 1개소는 시장(market)이란 곳이다.
흔히 시장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팔며,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시장의 공간성으로 통해 그 사회의 커뮤니티와 사람들의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이란 것은 누가 일부러 만들어준 곳보다는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의 집합장소다. 그렇기에 시장이란 곳을 알아가는 것은 그 사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치관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이며, 삶의 질까지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강력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예전에 읽어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이라는 도서였다. 호크 하이머와 아도르노, 하버트 마르쿠제 등 다양한 학자들이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인문학자로서 어떤 삶과 어떤 학문을 했는지 알려주는 가이드역할을 맡은 도서였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고대 카빌라의 신비와 마르크스주의를 합친 발터 벤야민을 보게 되었다. 벤야민은 이미 <문예이론>과 <모스크바 일기>로서 접한 인물이었다. 그가 본 도시의 환경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까? 특히 국내 미학자인 진중권 교수가 제일 먼저 미학으로서 드러내는 인물이 바로 벤야민이다. 기존에 예술적 대상이 사물 즉 조각상이나 그림이었다면, 영상복제가 일어난 시대부터는 영화로 바뀐 점과 그것이 아우라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한 점이다.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복제품들이 오히려 원래보다 더 원래 같은 느낌을 주는 simulace의 도래에 벤야민의 사상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읽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이던 라시스란 여성을 만나면서, 그녀에게 빠진 후에 그녀가 살던 모스크바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벤야민은 자신이 러시아에서 가면서부터 오기까지 일기를 적었으며, 그 중에 대부분이 라시스라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관찰과 감정이었지만, 한편으로 러시아의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도시의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가득했으며, 거기에는 러시아 전통인형과 장난감으로 가득했다. 벤야민은 그런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 취했으며, 어린이와 같은 감수성으로 러시아 전통인형과 장난감을 사서 가지고 가는 내용을 보았다. 물론 배고픔과 추위는 언제나 러시아 사람들에게 큰 걱정이었으나, 적어도 시장에는 인간의 생동감이 살아있는 것이다.
벤야민이 이런 관찰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에서 다시 돋보이는데, 내가 이때까지 접하지 못한 개념 이른바 파사주라는 것이 튀어나온다. 프랑스 파리의 19세기와 20세기에 존재하던 건축물 양식으로 거대한 유리천장을 거리를 둘러싸며, 그 거리 안에는 술집, 옷집, 아틀리에와 같은 상점이 입주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상업적인 흐름을 따라 가게만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녀와 포주, 그리고 불량배들이 함께 숨을 쉬던 곳이었다. 모든 인간들이 다양한 얼굴로서 돌아다니며, 파사주라는 공간은 마치 거대한 구경거리를 주는 재미난 공간이었다. 보들레르의 산보자라는 댄디처럼 산보자들은 거대한 구경거리를 지닌 이 파리의 파사주를 돌아다니면 인생의 낙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일단 파사주 안의 가게들은 상점과 더불어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원래 전통적인 수공업자 내지 또는 상점을 운영하는 가게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 안에 잠을 잘 수 있는 생활공간이 있었다. 즉 경제활동과 가정활동이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동일한 공간이었고, 생활공간이 있으면, 당연히 그 생활 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상가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간이 되었으며, 거리를 중앙으로 두고 양 옆으로 때로는 골목으로 이어진 상가들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주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보들레르의 산책이 이어지는 길가에서 자리 잡은 상가들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내지 혹은 18~19세기의 유럽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변혁되고 있었다. 토지가 대부분 몰수당한 농민, 대규모공장에 의해 몰락한 수공업자와 영세자본가, 그리고 도시에 사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의 자녀 등이 끊임없이 도시에 몰려들고 그 주변을 배회했다. 그래서 초반의 도시는 냄새로 가득하고 쓰레기가 즐비하며, 많은 사람들이 타락해갔다. 18세기 낭만주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가 그토록 동경하던 파리에 갔을 때 그에겐 열광과 희망의 이름 대신 실망과 회의감이었다.
인간의 생활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루소가 지적하다시피 사유에 대한 지나친 차이는 인간의 불평등을 초래하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에 억압을 준다고 했다. 물론 서적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이나,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의 발견자, 루소>처럼 루소는 마르크스의 사상적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만약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읽는 순간, 머리에서 번개가 내려꽂히는 기분을 것이다. 두 책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던 파리라는 도시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국에서 보던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는 독일 출신이나 그의 정치적 운동 때문에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 추방되어 최후의 망명지인 영국 런던에 안주하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 있는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면서 <자본>을 집필하였으며, 도시라는 공간에서 노동자의 모습을 보았다. 도시라는 곳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권력자들의 왕궁이 있는 곳이라면 자본주의 이후로는 빈민과 창녀의 소굴이었고, 착취의 악마가 사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 매력은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문화적 인프라가 있었다는 점과 인간들의 밀집소란 점에서 새로운 모험이 있기도 한 곳이었다. 마르크스 친구인 엥겔스는 멘체스터의 밤을 돌아다니며, 도시의 역동성을 보았다.
도시는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병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생기도 있었다. 아무렇게 만들어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사람들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한국에서 소문난 맛 집과 유명한 가게는 대로변에 있는 곳이 아니라 대부분 골목 사이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했다. 그런 가게들이 대규모로 신축하여 큰 거리로 나오게 되면 그때의 그 맛이 사라지는 마술과 같은 일들이 생긴다. 인간의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은 단순히 음식재료와 조리방법으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골목들이 이어진 시장에서 인간의 다양한 문화가 생기고, 서민들의 이야기가 꽃 피운다.
그런 공간을 없애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공간을 없애는 것과 같다. 가령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는 전형적인 관료주의로서 프랑스를 통치한 독재자로서 그의 세력 중에 오스망 백작은 파리의 거리를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는데, 먼저 기존의 파리상가들을 철거하고 거기에 거대한 도로와 그 도로 주변에 거대한 건물, 공공시설, 상징물 등을 집어넣는다. 파리의 거리가 파리시민의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 상징적인 도시정비는 거리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을 변방으로 내몰게 되었고, 일을 하는 가게와 거주하는 가정을 분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현대에서도 가정이 상가와 같이 겸용하는 가구도 있지만,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실태다. 그런 이유는 대규모 자본유입으로 통한 공업화와 관계가 있다.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많은 집들이 필요했다. 그들을 가두는 것으로 통해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것은 어느 순간 노동자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 노동자로 통해 이윤을 내려고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감옥은 학교, 공장, 직장 등만이 아니라 주거시설도 역시 감옥이 되어야 했다.
대규모 단지 아파트를 가보면 인간이 사는 공간과 형식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같은 평수와 같은 방 구조, 같은 경치까지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집은 마치 죄수번호가 새겨진 감옥처럼 규격화되어 버렸다. 아파트라는 대규모 집단주거단지는 이웃이 옆에 있어도 이웃보다는 남으로 대해야 했다. 파사주처럼 거리의 건너편에 있는 가게사람을 볼 수 있는 낭만적 요소도 제거되었으며, 아파트 안을 보는 것은 개인의 영역에 대한 침해였다. 이런 감옥과 같은 아파트계획은 노동자를 수용하기 좋은 공간이었고, 그들은 단순히 노동시간만 노동하는 게 아니라 노동시간 외에도 노동하게 되었다.
드보르가 제시한 스펙타클처럼 TV나 미디어는 곧 대중문화로서 노동자들의 생활에 침투하고, 그들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만 생각하게 유도했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던 시장과 달리 아파트문화는 그렇게 획일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아파트단지 생활을 위해 대규모 마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시장은 대규모마트로 인해 점차 소멸되어가고, 대자본가들은 아파트단지로서 자신들의 노동자를 가두고, TV로서 사유의 전환을 막으며, 대규모점포로서 또 다시 이윤을 얻는다. TV라는 것은 상품이 이미지라는 것으로 통해 전달되므로 TV시청은 휴식이 아니라 단지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이런 프롤레타리아 부류가 도시중심에서 살다가 도시 외부로 추방되면서 부동산 경기는 치열하게 뛰어오르며, 부동산 투기로 한 몫을 노리는 부류도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부동산이 참 걱정인 이유는 보통 한국인들은 아파트를 전세 내지 구매하면 계속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 자신이 구매한 집의 평균 수명이 30년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30년을 살고 난 후에 집을 이동할 때 재건축계획에서 그 재건축되는 집과 자신의 집의 가격 차이를 보면 절대 100% 이내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도 주택을 소유하고 것은 70%가 되지 못한다. 최근에는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여전히 재건축현장은 늘어나는 추세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집은 늘어가는 반면 그 집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가는 것은 심각한 현상이다. 이른바 부동산에서 내 집은 비싸게 팔고, 남 집은 싸게 구매하려는 소비자의 심리가 계속 자극하면서 부동산에 동반되는 화폐유통은 엄청난 것이다. 이미 한 사람이 10년 동안 벌어도 집 구매가 어려운 현실에서 도시의 착취는 바로 주택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규모산업단지 있는 곳에 노동자를 오게 해놓고, 집을 안정적으로 제공하지 않을 경우 그 지역은 반드시 큰 문제점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지역의 산업단지가 사라져도 문제가 된다. 실직자의 대량생산은 그 지역의 상권을 모두 절멸시키는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것은 결국 유기적인 존재이나, 그 도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적 기능에서 도시계획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가? 그래서일까? 최근 환경경제학자의 강의를 듣는 도중 도시의 생태적 기능을 부여하고, 도시의 공간이 자연적인 요소를 되돌려 인간 커뮤니티를 발전시키는 도시계획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대단지 주택이나 자연적인 조경을 나두고, 건축배치는 직사각형으로 나열하여 도로로 중간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앙지역은 대규모 공원과 문화시설을 설치하고, 그 중심으로 원형으로 건축물을 배치하여 그 안에는 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공원과 문화공간을 향유하고, 부모들은 공동그룹을 구성하여 서로 음식을 구매하거나, 아파트단지를 운영하거나, 아이들의 학습과 놀이 프로그램을 개선하기도 한다. 기존의 도시에서 아파트라는 곳은 감옥과 같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도시적 기능을 다른 식으로 보완하여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협동조합이란 기능은 자신들의 주거지역만이 아니라 그 주거지역이 형성된 지역까지 확대되어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공간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이런 일들이 국내에서 당장 실천되지 않지만, 그런 기능이 어느 정도 중요성을 보는 것 같다. 도시의 지역주민이 만든 커뮤니티는 그 지역사회의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특히 범죄나 사고로부터 예방해 줄 수 있으며, 생활환경의 개선대상은 소외된 이웃까지 혜택을 볼 수 있다. 삭막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둘러싼 도시에 인간의 마음 역시 삭막하게 변해간다. 인간의 비인간화, 그것을 눈치조차 챌 수 없게 하는 미디어, 드보르가 주장한 스펙타클처럼 도시의 잉여적 존재조차도 도시에서 당위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도시가 팽창하고 확장되며 건설되기 바란다. 이 책에서 (분명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서적이지만)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온 문구를 인용한다. “자신의 집이 불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점심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맞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잿더미 위에서 그 점심을 먹는다.”, 망각의 동물인지 아니면 현실을 볼 수 없는지 또는 보려고 하지를 않은 것인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적어도 가족주의라는 현실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그 가족주의가 자신의 아이의 목을 옭아매는 것은 이해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자본력을 가진 자들은 바로 그 가족주의야 말로 완벽한 사업의 밑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