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방영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을 감상하였다. 우선 나는 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을 보는 것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나의 비평을 적어보는 것을 매우 한쪽에 치우치는 것보다는 다양한 관점과 시선으로 통해 적어보려고 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나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많고 많은 담론과 그리고 그동안 우리 인간에게 전해온 이야기들이 어떻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말해주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여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나는 결론부분부터 차근차근 다시 되돌아보려고 한다. 그래야 진정 내가 생각하는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마도카가 마법소녀로 변신하여 세상 모든 마녀로 될 마법소녀의 절망을 치유한다. 그런 치유에서 마도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인 흐름에서 인간을 초월하였고, 공간적으로도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을 정도의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물론 전지전능할 수 있는 범위는 마법소녀가 마녀로 변하기 전에 예비마녀들의 절망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이 모든 마법소녀의 마녀의 기운을 모두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분명히 마법소녀가 마력을 소모하면 자신의 소울젬의 밝은 기운 대신 검은 기운이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검은 기운을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마녀를 처단하여 그 마녀로부터 나온 그리프시드에 마녀의 기운을 넣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큐베 즉 인큐베이터로 통해 보는 인간의 존재이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보면서 가장 욕을 많이 하는 존재는 큐베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큐베에 대해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큐베가 어린 소녀를 마법소녀로 변신하여 그들이 희망의 존재에서 시작하여 절망의 존재로 변화하게 유도하면서 이런 부당한 대우에 우리가 큐베를 얼마나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이다. 그것은 마법소녀라는 존재가 마녀라는 동전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점과 그 마법소녀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어떻게 세상에 비추어지는 것인가이다.

 

큐베는 마도카와 대화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자신은 인간과 같이 살아왔다고, 그리고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모두 벌거숭이 유인원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큐베는 그 존재로 보면 결코 악의 축이라 할 수 없고, 우주의 열역학적인 부분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큐베는 단지 인간이 가진 깊은 욕망에서 발생된 하나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것은 큐베가 마도카와 대화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너희 개인은 희생되더라도 우리 모두는 무사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것은 즉 어느 거대한 집단 속에 한 개인의 희생으로 통한 문명사회의 유지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은 마도카가 최후에 신적인 그러니깐 관념적인 존재로 되면서 절망에 빠진 소녀들을 구할 때의 모습에서 등장한다.

 

마도카가 마녀로 되려고 하는 마법소녀들을 구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조우하게 된다. 그녀는 바로 “잔 다르크”이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이라는 끔찍한 굴레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잔 다르크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지켰으나 최후에는 국가권력과 교회권력에 의해 화형에 처하게 된다. 그런 잔 다르크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전쟁 중에는 성녀(聖女)이었으나 끝나고 나서는 마녀(魔女)로 되었다. 결국 그녀는 희망을 가지고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운명은 무척이나 잔인하게도 그녀의 최후를 뜨거운 나무 위에 생채로 태워지게 만들었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운명의 굴레를 어떻게 보는가이다.

 

마법소녀와 마녀는 큐베의 말을 듣고 유추해보면 인류의 문명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인류의 문명들을 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이 많았다. 각종 전쟁, 테러, 분쟁, 질병, 광기 등등 결코 누구나 가지고 싶지 아니한 기억과 흔적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혹은 독일 철학자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인간이 문명을 가진 것으로 평등주의에서 신분제도로 변모한 것이다.

 

문명의 탄생은 곧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고, 그런 계급과 다양한 계급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누군가는 덜 가지고 못 가지고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난다. 그런 모습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문명의 흐름에서 알 수 있다. 인류는 자신들만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사람은 마법소녀였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이용가치가 있을 때에는 모두에게 칭송받을 존재였으나 이제는 필요가치를 잃게 되자 세상에서 지워야 할 마물로 된 것이다. 나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마법소녀들이 그리프시드로 통해 자신의 소울 젬을 정화할 때의 모습이 너무 소스라치게 무섭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그 상대방에게 자신의 추악함까지 건네줌에 따 그 마법소녀 자신은 더 강력한 마법소녀로 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소녀로 계속 남아 힘을 쓰는 건 결국 계속 처단해야할 마녀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마녀를 찾지 못해 결국 자신의 절망 안에 갇히면 자신 역시 마녀로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가 바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핵심이다. 왜 마도카가 마지막에 모든 절망을 자기가 가져가고 그 절망을 가져간 자신마저 왜 마녀가 되면 안된다는 것은 그런 타인에 대한 희생을 끊어야지 비로소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도카의 모든 것을 넘어선 형이상학적(마지막에 마도카가 신적인 존재로 되자 마도카가 인간이 아닌 관념적인 존재가 된다고 한다)인 윤리의식은 쉬운 결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샤아카로 통해 알 수 있다. 샤아카의 단짝 친구 쿄스케는 큰 사고로 인해 몸이 불구가 되었다. 샤아카는 거기에 대한 절망감에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히려 더욱 잔인한 절망으로 변하게 하여 샤아카 자신을 마녀로 변신시켰다.

 

샤아카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단짝 친구인 쿄스케를 회복하게 하여 바이올린까지 켜게 하였으나, 샤아카는 그런 희생을 통한 1가지 소망을 이루었으나 정작 자신을 위한 보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소망 대신 찾아온 것은 그녀가 소울젬이 없다면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샤아카의 친구 히토미가 샤아카에게 다가와서 쿄스케에게 고백한다고 한다. 그러나 샤아카는 자신이 먼저 고백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왜냐면 자신은 쿄스케에게 키스도 할 수 없고, 안아 달라고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샤아카는 자신의 1가지 소원으로 모든 것을 희생시킨 것이다. 결국 샤아카는 히토미와 대등한 여자가 아니라 대신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으로 통해 자신은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하게 되어 마녀로 변신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한다. 따라서 샤아카가 행하는 노동은 자신이 마법소녀로써 마녀를 잡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은 마녀와 마녀의 사역마를 잡더라도 그녀가 행한 노동의 대가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정당한 행동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마음에 상처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마도카는 자신의 노동을 증명하려는 그런 목적의식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도카는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소녀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보자면, 마미 선배가 마법소녀로 된 이유는 생존을, 호무라는 마도카의 우정을, 쿄코는 자신의 아버지를, 샤아카는 쿄스케를 위해 마녀가 된 것이었다.

 

진정 자신을 위해 싸운 것은 이 4명의 소녀에서 누구란 말인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싸운 마미 선배는 실수로 마녀에게 먹히고, 아버지를 위해 마법소녀가 되어 결국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파멸한 쿄코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주의자가 되고, 샤아카는 쿄스케를 위해 선택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타적인 인간관으로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호무라 역시 친구인 마도카의 죽음을 다시 교정하려다가 오히려 마도카를 인간 문명 이래 최고의 마녀로 만들 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무라는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에서 대마녀의 위압 앞에 마도카를 지킬 수 없었다. 작품 마지막에 가면 마도카가 매우 강력한 마법소녀로 변신하면서 인류가 시작한 인과의 법칙을 해체시킨다. 그런데 이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이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에 대해 조사하면서 위키백과의 체코 문화가 상당히 눈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누더기와 짚으로 만든 마녀 또는 (대가 긴) 빗자루만을 모닥불에 태워 겨울을 끝내는 의식을 치루는 부분이다. 본래 인간 문명과 관련하여 고대 원시국가 체계의 종교는 대부분 토테미즘 내지 샤머니즘이었다. 특히 인간이 신과 동일한 존재로 각인하는 샤머니즘의 경우는 인간 중에서 특이한 요소를 가진 인간은 신이란 존재가 형상화되었다고 믿었다.

 

가령 황금가지라는 인류학 도서를 참고하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신의 대리자인 어느 부족의 수장들은 막대한 권력을 가지나, 그 왕이 힘이 약해지거나 혹은 자연의 변화(가령 홍수, 가뭄,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그 부족의 수장을 죽인다. 그것은 늙고 약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젊고 튼튼한 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여 원시부족의 인간들에게 혜택이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꾸 새로운 왕이 죽게 되면서 이제는 왕을 천천히 죽는 방법을 택하고, 후에 왕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왕 대신 희생양을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소녀들이 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 대해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과거 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 페스트 등의 전쟁과 질병재앙으로 인해 국가적인 권력이 위기에 빠졌다. 그때 부패한 국가와 교회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부패함과 무능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끌여 들이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여자였고 또한 소녀들이었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기존 마법소녀 장르와 다른 점은 바로 소녀들이란 존재가 매우 약하고 약한 존재라는 점이고, 또한 큐베 역시 제2차 성징기를 가지는 소녀들이어야 말로 감정의 폭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결국 어린 소녀들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억압하고 속박하여 사회의 흐름을 유지시킨다는 일련의 희생제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마도카와 친구들이 중학교 2학년이란 점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때가 프로이트 이론적인 부분에서 가장 무의식적인 성적욕구인 즉 리비도가 강할 때이기 때문이다.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 라는 5가지 절차에서 중학교 2학년은 제2차 성징인 14세에 해당된다. 그러나 지금의 생식기는 초등학교 5,6학년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보통 14세라는 나이는 이런 어른과 아이의 중간적인 부분에서 어느 쪽에도 갈 수 없는 어중간한 형태이다. 가령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이카리 신지는 14세의 청소년이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증세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자신의 어머니의 육신과 정신이 깃든 에반게리온에서 매우 편안함을 느낀다. 게다가 자신의 동급생인 레이에게 무의식적으로 성적인 욕망을 품으며, 또한 레이 역시 사도와 자폭하기 전에 신지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닫는다(레이의 경우는 14세의 생식기 소녀이나 그녀는 생체실험으로 태어나서 아이를 가질 수 없으나 신지의 어머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신지에게 어머니라는 무의식적인 성적욕구를 가진다).

 

그런 14세의 소녀에게 가진 리비도는 직접적으로 작품 내에서 작용하지 않는다. 단지 14세라는 제2차 성징기에서 큐베는 마법소녀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어중간한 소녀가 희생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마법소녀라는 개념에서 우선 이 소녀라는 점이 중요하다. 소녀라는 점은 분명히 어른이 아닌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그렇지만 이때의 소녀들은 육체적인 성장이 발달되는 반면 대신 정신적인 성장을 뒤따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소녀들은 자신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들은 현실에서는 아무런 노동을 할 수 없으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에 현실 속에는 몸집만 다 자란 어린아이인 셈이다. 그래서 마법소녀라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이나 세계의 신화를 보면 여자가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 대부분 어린 소녀들이 흔하다. 이에 반해 남자들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나이가 어린 아이가 될 수도 있고 어른으로 될 수도 있다. 여자 중에서 그것도 어린 소녀가 신화의 주인공으로 되는 이유는 대부분 그녀들이 영웅의 임무와 과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희생당하기 위해 부여 받은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절망이 쓰러지고 희망을 찾아내는 존재들은 바로 이 14세의 전후의 어린 소녀들이다. 그들은 세계를 구하고 마녀를 처단한다는 엄청난 임무를 받았으나 결국에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채 죽는 그날까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가치가 필요 없어지거나 자신의 존재에 회의를 하는 순간 마녀로 변모한다.

 

결국 마법소녀는 자신의 희생 즉 어린 소녀로 통해 문명사회를 유지해야한다는 제물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마도카가 최후에 비는 소원은 그런 제물이 되는 소녀들을 모두 구원하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 만들어낸 각종 악의와 저주를 대신 받아들여 희생해야하는 죄 없는 소녀들을 말이다. 작품 마지막을 보면 호무라가 계속하여 마법소녀의 임무를 이행시키면서 이제는 마녀 대신 마녀가 아닌 이상한 괴기한 존재가 나온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욕심, 질투, 음모 등과 같은 추악함이다. 큐베가 지적하듯이 인간은 문명의 시작과 동시에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 욕구는 한 번의 해결로 해소되나 욕망은 한번 해결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구하는 독깨진 항아리이기 때문이다. 작은 욕망을 이루면 더 큰 욕망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욕망을 위해서라면 결국 타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마녀와 마법소녀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마도카는 그런 인과관계에서 어린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욕망 자체인 즉 근본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이 모두의 희망을 위해 절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 그 자체가 희망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마도카가 모든 절망을 받아들일 경우 자신의 절망을 가득하여 결국 발푸르기스의 밤에 등장하는 마녀 이상의 대마녀로 되어 세상을 파괴한다는 위험에서 말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이런 마도카의 선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호무라와 큐베, 마도카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큐베가 분명히 마도카에게 이 세상 최고의 그리고 유일무이한 마법소녀가 될 것이고 그리고 마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원인은 호무라의 시간을 조정하는 능력 때문이다. 원래 시간은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다. 그러나 호무라는 마도카를 살리기 위해 계속 시간을 되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몇 번이나 마도카는 마법소녀로 되어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마녀와 싸우고 죽고 죽어 마도카가 맡은 이 세상의 인과를 더욱 확대시키게 되었다.

 

결국 시간은 호무라가 되돌아가 가고 있었으나 그 중심에는 마도카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마도카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런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보자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루히의 중심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원치 않을 경우 무의시적으로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깨어지고 시간과 공간의 비틀림으로 인과관계가 바뀌게 된다.

 

특히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는 Kyon의 과거에 만난 하루히의 조우로 인해 자신의 현재가 바뀌게 되고, 그 바뀐 과거가 미래의 영향을 주었으나, 결국 그것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던 하나의 인과관계이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그 인과관계가 누적되었던 것이라면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에서는 미로와 퍼즐로 끼워 맞추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되풀이로 통하여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 Kyon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것은 Kyon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라면 마도카는 이 모든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운명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상황인 것이다. 다시 처음에 제기한 이야기처럼 왜 마도카는 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했을까?

 

그것은 인류가 시작한 문명아래 이루어진 타인에 희생은 결코 끊을 수 없는 사슬의 고리다. 문명이 시작하면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면 결국 인간이 아닌 인간 이상의 존재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마도카는 인간이기 포기하고 모든 마법소녀의 절망을 끌어안은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마도카가 관념적인 신의 존재로 되었다는 증거는 결국 마도카는 자기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단지 마도카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때까지의 마법소녀와 다른 점은 기존에 있던 마법소녀들은 모두 마녀로 된 반면 마도카만이 마녀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도카는 다른 마법소녀에 비해 절망을 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도카는 모든 것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도카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지는 않는다.

 

결국 마도카는 자기 자신 이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심을 가진 존재다. 마도카와 달리 다른 마법소녀처럼 남을 위한다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다는 것을 단지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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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밤에 운전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다. 물론 대부분 운전대를 잡는 분들이라면 자신이 운전하는 도중, 안전운전을 고려하지 않으면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나도 그런 점을 잘 각인하고, 다소 운전을 터프하게 모는 편이나(중형차를 수동기어를 모는 점에서), 신호를 최대한 지키기, 2차선 좁은 도로에서 보행자가 있으면 횡단보도 앞에서 서행 및 멈추기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 비가 올 때 나는 운전 실수를 했다. 다행히 사고로 이어지지 않으나, 직진신호를 가깝스레 넘어간 후에 길이 왼쪽 커브길인데, 신호를 지난 후에 횡단보도가 미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켜진 상태서 지나가는데, 이미 차를 멈추기가 느린 상황에서 왼쪽을 보니 보행자가 내 차와 약 5m 간격으로 걸어온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날밤 나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보통 사람들은 신에게 감사라 하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단지 우연성과 사실성에서 보행자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횡단보도를 미쳐 생각하지 못한 상태서 지나가다가 순간 아차 하는 상황이라 나는 비상깜빡이를 켰지만, 기분은 시원하지 못했다. 그날 밤이란 게 중요한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비가 막 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비오는 날 가끔 운전하면 나는 앞의 거리를 순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아주 가끔 있고, 와이퍼로 빗물을 쓸어내려도 잘 안 보이는 경우 상당히 긴장한다. 아니 그런 긴장감에 의해 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역시 안전운전에 부담될 지 모른다. 



다른 하나는 토요일 책모임 분들과 막걸리 집과 맥주 집에서 술을 마실 때다. 이런 저런 책이야기가 나오고, 철학자 이름이 나오면서 칸트와 플라톤 역자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백종현, 박종현 교수의 이름이 거론되고, 플라톤 향연 내지 그리스비극역자로 천병희 교수의 이름이 나왔다. 어려운 외국도서는 번역자의 중요성이 얼마나 크나큰 영향을 주는지 깊게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철학과 교수들이 상당한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철학과 교수를 안 좋아하는 편이다.


철학이란 결국 인간의 인생과 그에 따른 삶의 가치를 논한다. 철학에서 윤리학, 논리학, 종교학 등 다양한 학문과 연결된다. 하지만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학이다. 내가 철학과 교수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은 철학자로서 정치적, 사회적 인간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책 속에 번역자로만 있는 게 아니라 서문과 중간 주해에 그들의 입장을 표명한다. 특히 내 입에서 순간 dog란 욕이 나오게 한 인물이 있었다.


그건 황경식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1988년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1987년 6월 항재 이후 민주화로 되면서, 롤즈의 철학이 한국 정치사상에 도움이 되기 바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사회정의론>이란 현재 <정의론>으로 나온 롤즈의 정치철학 걸작을 번역을 한 시기가 1977년이고, 당시 육군사관학교 재직 시절에 번역되고, 옮긴이의 말이 1985년에 나왔다. 만약 롤즈의 철학을 알고, 당시 국내 상황을 알고 이 번역자의 글들을 보는 순간 가식의 절정에 느낄 것이다. 


기본적으로 롤즈의 철학은 자유주의 철학이다. 그런데 칸트주의로서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선호했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시작한 시민의 권리를 중요시 했다. <만민법>을 읽으면 그의 칸트주의로서 완결을 볼 수 있다. 시민의 불복종,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생각하면 그가 육군사관학교나 이제 서울대학교에 강의하는 모습을 보면 앞뒤가 안 맞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철학과 교수를 싫어하는 것이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나, 적어도 자신이 번역한 도서에 머리말과 후기에 적는 것에서 현실적 전후관계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재학 중인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 자신의 학교 학생이 군부독재의 고문으로 죽었는데, 침묵하는 교수,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에 대해 롤즈를 소개하는 그의 교활함에 그저 한탄만 나온다. 그러다 보니 순간 입에서 욕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 추구에서 롤즈의 철학은 상당히 세련되고 발전된 자유주의철학이다. 철학이 결국 현실 정치학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요소에서 내 입에서 나온 욕은 과연 틀린 것일까 하나, 술자리에서 순간 입에서 욕이 튀어 나온 것은 반성해야 한다. 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그런 욕을 해도 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욕은 계속 나올 것 같아 보인다. 이래나저래나 인간은 무슨 행동에서 실수나 판단착오를 하면 후회를 하고 반성하고, 재발을 하려 하지 않으나 쉽지는 않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일뿐, 무의식과 감정에 휘말리기 더욱 쉽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조차 인식하고 인정하면 더 좋아지는 것은 분명하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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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0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인상을 잘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런데요...아인슈타인 특수 상대성 이론을 보시면...그날 사고의 위험성과 무의식-철학적 회피와 이율배반적인 어떤 이에 관한, 이 두 관점이 왜 모였을까. 다시 한번 생각하시게 될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모든 동시성들에 대한 조망으로...
일견 제가 하는 말이 저도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이런 말밖에는..

만화애니비평 2015-01-08 14:47   좋아요 0 | URL
누구나 자기 인생을 설명하기 어렵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게 되고, 그러나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하기가 곤란하고, 인생은 바로 그런 것 같에요. 바로 쉽게 간단히 나올리가 없죠. 단지 위와 같이 가식과 허영심은..차마...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를 읽으면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네미(Nemi)라고 하는 숲 속에 호수가 있는 곳으로 아주 황홀한 풍경을 내뿜는 전설 같은 곳이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호수 인근에 어느 미친 남자가 칼을 들고 눈이 붉게 충혈 되어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는 남자는 그 곳의 왕이면서도 신이면서도 또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 인류의 문명을 기원에서 인간은 처음에 자연에 대해 속박당한 존재였으나, 어느 순간 자연이 우리 인간에 의해 속박 당한다.

 

모든 인간은 처음에 자연인이었다. 장 자크 루소의 <emile>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인이란 자연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자연의 이치를 어기지 않고, 문명의 타락과 어둠에 물들지 않은 존재다. 문자문화가 도래 이전, 즉 르네상스 이전이나 혹은 르네상스 이후라도 수많은 인간들에게 문자라는 지식은 거의 제한된 영역이다. 마녀사냥이 일어난 배경에서 모든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있었지만, 자국의 언어로 되지 않았다. 성경을 아는 것은 교회와 국가의 권력관계에서 국가의 권력이 바로 교황에 의해 보장되는 셈이다.

 

종교라는 것은 결국 왕과 귀족, 혹은 지배계급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 종교적인 가치관이란 결국 당시 민중들로 하여금 신앙심 자체가 국가와 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어진다. 왕이란 존재는 바로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당연한 권력의 좌석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왕권신수설인 것이다. 절대주의 내지 봉건사회에서 왕과 귀족들이 단순히 백성들에게 권력을 행하는 것은 국가권력으로서 통치할 수 있는 지식과 무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첫 부분에 프랑스 루이15세 시대 궁정하급관리 다미엥에 대한 처벌이 나온다. 고문이 지나치다 못해 거의 예술적인(그로테스크적인) 모습으로 시체가 사라지는 벌을 받은 그의 모습에 근대사상 도래 이전의 인류의 무서운 권력을 알 수 있다. 왕이란 신체는 크게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생물학적인 신체로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늙고 병이 드나, 또 하나는 정치적인 존재로서 왕이란 존재는 그 자리에 위치한 것만으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의 경우 왕의 생물학적 육체에 대한 벌이 아니라 왕의 정치적 신체, 즉 신에 의해 보장된 신체를 손상하려 했다. 그것은 국가의 반역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반역이기도 하다. 다미엥의 죽음이 그토록 잔인한 이유는 종교적 권력이 뒷받침 되던 봉건사회의 잔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황금가지>와 다미엥의 죽음, 그리고 지금 적으려 하는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어떤 관계인가?

 

기본적으로 일본의 종교적인 형태를 분석하면 눈앞에 생명이 없는 존재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애니미즘(Animism)의 형태를 가진다. 작품 내에서도 학교에서 경례하는 사람은 선생님만 아니라 신수(神樹)도 포함된다. 신수라고 하여 조금 의아해 할지도 모르나, 우리나라의 경우 신단수(神檀樹)가 존재하는데, 단군신화에서 환웅을 찾아온 웅녀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단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신적인 영험을 가진 나무는 박달나무다. 단군(檀君)의 한자에서 박달나무와 신단수의 단자가 같은 한자다. 단이란 한자는 제단(祭壇)에 사용되는 한자어로 나무목과 흙토를 제외하면 같은 한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의 전통신앙이 무속신앙에서 단군은 신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 정치인이기도 하다. 신의 아들로서 무당과 정치권력을 가진 군주라는 점에서 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바로 당시 고조선이 있던 시기가 청동기 시절이고, 한편으로 농경사회다. 농경사회에서 우리나라는 몬순기후로서 여름에 높은 기온과 다량의 강우를 가진 것으로 벼농사가 적합하다. 군주의 임무는 나라의 통치이기도 하나,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단순히 제의적 요소만이 있는 게 아니라 기상관측 내지 달력을 이용한 농경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Nemi호수는 어떠한가? 당시 고대국가 이전의 부족국가라면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삶을 유지하는 식량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들인 반인반신인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포도주라는 것은 인간을 미치게 만들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을 기분 좋게 만들고 한편으로 용기를 준다.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인들 모두가 사랑하는 신이다. 하지만 그의 힘은 인간에게 삶과 동시에 죽음을 준다. 포도주에 마신 사람들이 지나치면 순간적 충동에 의해 살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에 대한 수확이 필요하다. 포도를 수확하려면 농경사회의 산업구조를 가진다. 농사를 짓는 것은 자연에 대한 변화를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신이란 존재는 자연인 것이다. 단순히 나무, , 물이 아니라 계절이 변화조차 신의 도래인 것이다. 다시 Nemi 호수로 가보자. 그 곳의 족장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위에서 고대국가나 부족국가의 왕은 신의 아들이고, 그런 요소는 중세유럽을 지나 루이왕정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인간이 수렵 이후 등장한 농경사회는 인간에게 자연적인 조건, 즉 계절적 변화에 따라 농경수확물이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농경수확물이 좋을 때는 모두들 기뻐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자연의 움직임이 하나의 신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면, 만약 신이 늙거나 원기가 부족하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런 방법이 바로 신을 대신할 인간을 세우는 것이다.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미친 남자는 단순히 미친 것이 아니라 칼을 들고 경계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만약 조금만 긴장을 늦추거나 또는 힘이 빠지면 칼을 가지고 온 남자들에게 암살당하기 때문이다. 왕이 죽으면 그 암살자는 새로운 왕이 되고, 그 왕은 또 다시 경쟁자와 싸워 이기면 목숨을 구제하고, 지면 죽는다. 이것이 바로 <황금가지> Nemi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숲의 비밀이다. 왕은 모두들 통치하는 인간이 된 신이나, 한편으로 인간들 손에 죽어주어야 하는 희생양이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가 일치한 제정일치 사회가 문명의 발달과 사회적 체계에 따라 분리된 것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그런 점을 본다면 제정일치가 아니라 제정분리의 사회다. 학교라는 공간은 선생님이 곧 정치적으로 통치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신수님이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 통치하는 곳이다. 제정분리의 사회라는 점에서 학교라는 곳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의 유우나를 비롯한 소녀들은 신수의 힘을 통해 이차원적 공간에서 괴수와 싸운다. 문제는 괴수가 정해진 패턴이나 형태를 가지고 침공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개체수와 모양새로 침투하며, 때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적 앞에서 대부분의 전대물 장르는 주인공들이 성장하거나 급격히 업그레이드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경험능력치를 쌓음으로 적을 무찔려 가나, 여기서는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 소녀라는 존재가 곧 꽃이다. 꽃이 피기 전의 꽃봉오리에 지나지 않은 소녀전사들이 만개(滿開)를 하면 곧 자연의 법칙에 따라 꽃은 지게 된다. 결국 능력을 눈을 뜨면 몸과 마음이 어딘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결국 어느 조직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하나의 신으로 등극한다.

 

결국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인간의 세계에서 문명의 유지가 소녀들의 희생양에 의해 존재했고, 그 적들은 지구라는 공간에 있는 외부의 적이다. 문제는 이 외부의 적들이 일본의 소녀들에 의해 저지되고, 게다가 피해공간은 유우나가 살고 있는 마을과 그 주변지역이다. 자신의 세계가 곧 모든 세계의 근본이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상당히 이 작품은 위험한 발상사고를 가지고 있다. 일본을 침공하는 외부의 적은 끊임없고, 소녀들이 결국 계속 막고 막아 희생되어 이루어진 공간이란 점이다.

 

일본 자기중심적 가치에서 토고의 행동을 잘 봐야 한다. 그녀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모두 일어나 거수경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노래는 군가라는 점이다. 토고의 집안은 전형적인 일본 우익의 가정이란 점을 강조하고, 그녀의 일본이란 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이 작품에서 외부의 적은 누구인가? 라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좁게 작품 내부에서 보자면 지구세계는 이미 단절된 공간에 늘 위기에 봉착해 외부의 적을 싸우는 것이고, 그 역할을 소녀들이 한다. 소녀들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만큼 한편으로 희생양으로 내몰린다.

 

그런데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 소녀들은 원래의 몸을 되찾고, 자신의 과업들은 다른 소녀들에게 물려준다. 잘못된 세계가 계속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점에 대한 부분에서 희망을 거는 점, 전체주의적 발상이 보이는 점이고, 토고가 모든 악연의 끊는 점에서 벽을 붕괴하는 점에서 일본을 억압하는 자신들의 딜레마를 부수고, 그 원흉을 모두 파괴하려 한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 이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자는 것은 결국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

 

외부에서 계속 적이 오는 것에서 신수를 파괴하는 것으로 토고는 해결하려 하나, 그것이 불가능하여 외부의 적을 끌고 오나, 결국 유우나 일행에 의해 저지된다. 자기 세계를 파괴하여 모든 것을 정리하려 하나, 그 이면에 보이는 유우나 일행의 행동은 외부의 적, 즉 일본의 적이 침공하면 거기에 대한 반격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의 재로 만들면서 그들을 용사라 하고, 전쟁사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묻혀 신으로 추앙받는 일본이란 국가를 생각하면,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어느 대상을 희생양을 만들어 하나의 신적인 존재로 부여하고, 그들조차도 자신의 희생 그리고 미래의 희생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보고 있다.

 

이게 과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와 같은 구조란 말인가? 물론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이기에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되나, 세계관 구성에서 일본 어느 지역 멸망은 지구세계의 멸망이란 확대사고방식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고와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황금가지>의 연계성은 바로 그 소녀들이 희생되는 게 국가의 이념적인 측면에서 정당하게 만들고, 심지어 가족조차 거기에 승복한다. 결국 국가라는 조직을 위해 소녀들이 희생되는 것도 모자라 본인들조차 납득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에서 소녀들이 희생되는 이유는 그녀들이 가장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가 없기에 다른 자들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희생양이 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그녀들은 신으로 잠시 추앙되어 의식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신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위해 죽는다. 인간의 욕망이란 바로 무지와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이 하나의 사회적 도덕이 되어 법적인 제도적 요건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황금가지>에서 제의적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들이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되풀이 되는 점이다. Nemi호수 숲의 왕이나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의 소녀들이나 모두 같은 상황인 것이다.

 

계속 끊임없이 대체되는 인간의 신앙의식에 희생양은 모두에게 떠받들어지는 존재만큼 망가진다. Nemi의 왕은 모든 것을 가져 음식과 의상, 심지어 여자들까지 원하는 만큼 가진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이에 반해 거액의 돈을 토고에게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Nemi의 왕은 화폐가 없는 농경사회고,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화폐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자본주의 경제사회이다. 그러나 결국 왕이 된 남자나 용사가 된 소녀나 모든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아 거기에 대한 대가는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에 반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인가? 같은 것은 하나만 있다. 어느 소녀가 특수한 힘을 얻게 되자, 변신을 한 후 강력한 적과 싸운다는 점이다. 싸우는 소녀 이외엔 큰 동일지점이 없다. 우선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및 여러 도서에서 그의 이론은 문화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인간의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 생산증강과정 생태환경의 파괴고갈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란 공식을 내세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에서 인구의 증식이나 증강, 혹은 생산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현재의 상태에서 적과 싸우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인류의 문명이전부터 시작하여 기계 및 정보화 사회의 문명까지 계속 이어진다. 세계관에서 단순히 일본이 배경이라 일본만이 아니라 마법소녀의 영역은 전 세계적인 공간적,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연계가 되어 있다. 큐베라는 속성이 바로 외계인이라 하지만, 그는 인류의 문명에서 보여주는 인류의 욕망에 의한 이기심이다.

 

인류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자연적 존재에 가까운 인간이 문명의 세계에 가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력을 자연에 투하하고, 그 과정에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된다. 하지만 거대한 노동력이 투하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간들이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가 아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 유산은 많은 인간들의 노동을 착취해서 생긴 것이다. 결국 인류문명은 인간의 착취로부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순히 수렵과 채취, 그리고 부족단위의 농경사회에서 인간은 거의 평등한 수평구조라면, 국가조직이 체계화되면서 인류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분리된 수직구조로 변경된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그런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고, 거기에 따른 혜택이 인류에게 올 때마다 그만큼의 반작용이 따랐다. 문제는 그런 반작용은 인간의 대부분의 이기심이 하나의 정의로서 작용한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는 공통의 이익을 생각하는 반면, 전체의지는 사사로운 이익만 생각하는 특수의지의 총화라고 한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큐베는 인간들의 특수의지의 총화로서 어느 불특정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소수의 이익은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원인을 인간 본인들에게 찾는 게 아니라 마녀로부터 찾을 뿐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문제 제공시점을 외부로 찾아가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오히려 내부에서 되찾는다. 따라서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동일한 작품으로 설정하는 것은 인류의 문명을 연구하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순전히 엉터리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투쟁의 대상이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내부가 아닌 외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외부가 아닌 내부다. 마도카가 신이 되어 모든 세상의 섭리를 교체할 때, 마녀와 마법소녀들은 사라져도, 마귀의 존재가 나타나 세상의 어둠을 가져가지 못했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나, 전자는 자신들(유우나의 용자부)의 문제만 해결하였고, 후자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소녀만 해결했다. 전자는 용사시스템의 되풀이과정에 참여한 것이라면, 후자는 인류의 문명발전에 따라 계속 확대되어 간다. 그런 점에서 이미 2작품을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가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문자문화 도래 이전에 인간은 신이란 존재가 현실에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문자문화인 이성 중심문화가 도래한 후 이제 다시 이미지의 세계로 환원되면서 애니메이션은 그저 오락물의 기능을 하는 콘텐츠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신화를 다시 이미지로서 보여주는 미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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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5-01-06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카메가 벤다는 인상적이었지만 별로였어요. 로드 오브 만화애니님. 다른거 추천해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5-01-07 08:56   좋아요 0 | URL
인상적인 사실입니다만, 어느 장르나 소재를 원하시는지요?

뷰리풀말미잘 2015-01-08 10:53   좋아요 0 | URL
장르나 소재는 가리지 않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08 14:48   좋아요 0 | URL
그러면 사이코 패스(보였을 것 같기도)를 추천합니다. 제레미 벤담과 미셀 푸코의 판옵티콘 개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혹은 마음 편하게 보려면 <천체의 메소드>도 좋고요. 아~ 노엘 귀엽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서적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본 책이다. 그런 책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 것은 2013년에 개봉영화 <변호인>에서 나오면서 부터다. 저자 E.H. 카, 정식이름은 에드워드 헬리트 카라는 사람이었다. 본래 영국에서 정식으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역사연구가로 명성을 날린 사람이다. 그의 학교출신인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정식으로 대학의 어디에 졸업했는지 모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영국의 대표적인 학술기관으로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자 에릭 홉스봄이 재직한 곳이다. 아무래도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세계의 대학교라고 하면 보통 미국의 하버드를 비롯한 동부권 대학교를 생각하겠지만, 진실한 학문을 추구한 곳이라면 바로 영국이다.

 

영국의 대학교에서 이미 E.H 카와 같이 역사학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얼마 전에 타계한 에릭 홉스봄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마라크스주의로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기존 전 근대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근대사상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것과 같다. 카의 경우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찰과 그리고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탄생시킨 헤겔의 변증법으로 통하여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단순히 발굴 장소에서 발견된 화석덩어리가 아니라 그의 유명한 명언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라고 밝힌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내리기가 어려울 경우가 많다. 가령 루이15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프랑스궁전에서 일하던 다미엥이란 하급관리는 그의 군주인 루이15세를 암살을 기도하다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처분은 가혹한 고문과 고문으로 이어진 사형이었고, 엄청난 고통의 통증과 죽음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다미엥은 결국 모든 육체가 재로 변하는 것으로 그의 몸은 사라졌다. 대신 정식적인 기억에 의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맨 앞장에 선두하게 되었고, 카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구조주의 사상가의 대표도서에 거론되었다.

 

그렇다면 다미엥이란 사람이 시도한 암살은 분명 그 당시에는 엄청난 파급을 일으킨 반란행위고, 일반적으로 당시 인간이라면 다미엥은 무조건 용납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루이15세가 지배하던 시기는 중앙집권화가 계속 이루어진 상태서 재정상태가 계속 악화되었으며, 그것은 결국 백성들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라는 책을 보면, 다미엥의 암살미수에서 처벌받기까지 심문 도중 다미엥의 공범자로서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에밀을 내기 전에 이미 프랑스 파리에서 유명인물이 되었고, 그가 다소 은둔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것과 인류의 역작이란 불릴 <인간불평등기원론>은 1755년에 나왔다. 1757년에 다미엥이 죽은 시점에서 이미 파리에서 루소가 상당한 화제로 된 인물로 본다면 다미엥의 죽음은 기존 구체제에 대한 반항이다.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죽기 전에 자신의 왕국을 멸망하게 만든 것은 루소와 볼테르 때문이라 했다. 그런 만큼 역사의 관점으로 보자면 루소와 볼테르는 봉건적인 왕국에 대해서는 크나큰 적이고, 이제 민주주의 국가로 향하는 국가에서 본다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현대 사회, 혹은 카가 살아가던 20세기는 이제 왕국이 해체되어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시기다. 지난 19세기는 아직까지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있었고, 물론 왕이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나 입헌군주제가 존재했다. 현재 영국에서 국왕과 여왕이 존재하고, 왕립기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다고 하여 영국은 왕이 주인으로 등극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체계라는 점이다.

 

오늘날 그런 국가적 형태와 정치적 체계에 따라 역사를 보는 것은 당연한 관점이다. 한국의 역사를 두고 보자. 그렇게까지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역사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겠지만, 역사적인 가치를 두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로서 과거 봉건왕국이던 사대부 중심이 아니라 1919년 3․1운동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4․19혁명을 정신을 계승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렇듯 역사라는 것은 단순히 어느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서 특정인물이 일으킨 사건에 치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지금 현재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해본다면 지금 사회에서 과거에서 비롯된 연결고리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저자인 카는 그런 시기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봉건사회와 프랑스대혁명 시기 이후 유럽에 널리 퍼진 혁명의 시대, 또한 나폴레옹의 제정프랑스, 비스마르크 수상, 파리 꼬뮌, 러시아혁명을 두루 성찰하며 역사에 대해 판단한다. 역사의 원동력에서 과거는 대부분 정치인들, 즉 영국이나 유럽의 경우 귀족과 왕족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의 정치적 이권과 충돌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종료다. 귀족들끼리의 권력다툼은 단순히 귀족만의 전쟁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싸움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가치관이 어느 특정 권력자에 의해 결부 짓는 것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 권력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민주주의 체계 아래 사회구성원으로 움직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럽에선 과거에 비추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명예혁명을 찾아가는 이유는 지금의 현실을 존재하게 만든 가치와 조건을 찾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인간, 국가, 사회 등의 그 존재성에 대한 근본이 되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그런 정체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프랑스에서 많은 기념일이 존재하겠지만, 7월 14일만큼 가장 거대하고 웅장한 날이 없을 것이다. 그날이 바로 프랑스대혁명이 시작되어 바스티유 감옥을 공략하려한 날이다. 최초로 지배계층이 아닌 피지배계층이 부당한 권력에 향하여 칼을 든 날이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바로 그 자신들의 명령에서 말이다. 결국 근대사상은 국가란 절대불가침한 존재가 아니라 국가라는 바로 개인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따르는 역사적 진보는 바로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진보적인 역사가 되려면 인간의 눈을 가리고 있는 무지의 장막을 제치고, 그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이성의 판단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카는 헤겔의 말을 빌려온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말이 나는 헤겔로부터 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든 나는 그런 관념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때, 헤겔이 그런 말을 한 것을 알았다. 결국 이성적인 것에 의한 현실적 사고방식, 그런 현실적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지성,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그것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대다수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지는 정말 무지하기 때문에 무지한 것보단 그 무지에 대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려 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무지의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적 모순에 대하여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국 현실적이지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이고, 현실에 대한 무비판성은 결국 자신의 무지를 하나의 당위성으로 연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지 생각하면 그런 무지의 대다수의 군중들이 하나의 운동에너지가 되어 모든 것을 움직일 힘이 된다는 것이다. 사건과 사고는 단순히 총성을 울리기 위한 격발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격발은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파괴와 혼돈의 시작점이 된다. 우리가 왜 역사를 제대로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자의 공간의 불일치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의 공간마저 타인에 의해 모든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결국 실존적인 요소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하나의 도구로 전환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철학에서 루소의 일반의지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의지다. 하지만 그 의지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 게다가 그 의지는 개별적 이익을 바라보는 전체의지로 되었다면 그 사회의 현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그에 따른 전체의지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합리성은 부여받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역사적인 흐름을 잡아나갈 것이다. 결국 역사란 자신과 혹은 그 자신에 반대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변증법이란 찬, 반, 정이란 관계는 헤겔의 가르침에서 자신들이 품은 모순, 혹은 지금 모순을 품은 자들이 느낀 현실적 모순에 대한 반발의식이 서로 부딪히면 부정의 부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은 후 주변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카는 여전히 근대사상, 즉 모더니즘을 신봉하는 사람이란 점이다. 최근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어 이제는 전 모더니즘으로 회귀하는 한국을 보면서 지식인들이 활보하던 시기가 사라지고 이제 대다수의 군중들이 역사의 무대로 나왔다고 해도, 이제 그 대다수의 군중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끝없이 표류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돌이켜본다면 근대사상과 철학적인 요소가 없이 그저 근대산업만 지나간 현재, 국민들에게 이성적 판단력을 제대로 정착된 되기에 너무 짧았다. 따라서 강신준 교수(카를 마르크스 <자본> 번역자)는 근대사상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도래로 통한 모더니즘이 정착되지 못한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그저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오히려 혼란을 유지시켜줄 뿐이다. 그런데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전 근대적인 현상, 이미지의 도래에서 결국 현실의 지배는 이성이 아닌 미디어라는 정치경제적인 권력에서 시작된다.

 

미디어라는 것은 역사라는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선 어느 시기에 어느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상황에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전반적인 전후관계가 상실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실이 되는 단지 OOOO년 O월 O일 OO시 OO분 XX시 XX동에 누가 무엇을 했다는 이제는 의미가 혼선을 빚게 된다. 있지도 않은 사실, 혹은 가정조차 되지 않을 조건이 하나의 fact로 되는 것이다. fact라는 것은 만들어진 사실이다. 원래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뒤에 조작된 사실이란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그때 벌어진 일은 분명 조작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것이 가진 의미, 사실성과 우연성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역사가가 가진 책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은 역사가가 가진 관점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결국 역사가라는 인물에게 부여된 양심과 지성 그리고 선택에 의한 노선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역사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적 가치에 대한 만남에서 자기에게만 좋을 선택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책을 만들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라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 의해 조성되는 게 아니라 이성적인 가치의 지속적 추구로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성이 마비된 세계란 진보는커녕 퇴보와 시대착오적인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란 과거와 현실의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는 상상하고, 미래는 기억한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대다수의 어리석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미래영구적인 기념을 위해 항상 상상하고, 그에 따른 부당한 권력을 남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멸할 때 미래의 판단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기억한다. 현실은 결국 과거에 의해 존재되고, 그 존재된 현실은 미래를 앞으로 향하여 달려간다. 오늘 내가 하는 행동에 훗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모르나, 그 행동 하나가 지금은 역사적 패배자가 되어도 훗날에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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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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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31일, 2014년 마지막 날에 내 사무실에 신해철 유고지 <마왕 신해철>이 도착했다. 퇴근시간이 다 되기 전 아주 아슬아슬하게 말이다. 신해철의 유고지가 도착하는 아침 나는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버스 안에서 왠지 가슴이 아리는 노래를 들었다. 전설적인 락뮤지션, 브리티쉬 하드락에서 절대영역인 Led Zeppelin의 노래였다. 그들의 4집인 stairway to heaven이란 곡이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신해철이란 이름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한 날, 6시 배철수 음악캠프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배철수 씨는 신해철의 죽음에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못한 채, stairway to heaven이란 곡 하나로 모든 심정을 답변하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그곳에 가는 방법은 황금이 있어야 하는가요?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영혼과 자연에 대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것은 결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에 갈 수 있는 영혼과 자연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해철의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가? 지옥으로 가는가? 아직 죽지 않아 뭐라 말할 수 없다. 아니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을 수 있어도 종교는 없다. 단 이것만 말하고 싶다. 그가 가는 곳은 그가 어린 시절 육교 위에 만난 작은 친구 병아리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곳으로 가는 곳만은 분명하다.

 

아니라면 그가 2달 동안 집안에서 은둔하며 술로 보내게 만들었던, Mr. Trouble의 곁에서 서로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소박하게 나누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솔직히 아팠다. 신해철과 마지막으로 같이 방송작업을 했던 진중권 교수가 신해철의 죽음을 듣고,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글을 남겼다. 진중권 교수가 죽은 자를 위해 저술한 도서로 몇 권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레퀴엠>,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이었다. 첫 번째 책에는 진중권 교수가 군대시절에 의무병으로 근무하면서 실제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진행된다. 죽은 병사의 사체, 그들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그의 입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욕이 나온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에서 2009년 5월 23일에 서거한 노무현이란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글은 참으로 침착한 글이었다. 물론 권력이란 피를 뿌리는 잔혹한 결말에서 역사적인 인용은 아직도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것처럼 노무현의 죽음은 아직도 야만적인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마왕 신해철>에서 보인 진중권 교수의 글은 상당히 인간적이었다. 2007년 신해철이 갑자기 진중권 교수에게 전화 와서 해철이라 인사하고, 서로 만나 의기투합하여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에서 두 사람은 과연 언제 친구가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였다.

 

그런 신해철의 죽음에서 진중권 교수의 글이 인간적 요소가 돋보이는 이유는 아마 인간 신해철이란 남자가 가진 진정한 맛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아련한 맛이 그의 글에서 나왔다. 하지만 왠지 신해철의 죽음은 너무 아련했다.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3년 동안 거의 폐인 비슷하게 지내다 3년이 지난 후 그의 추모앨범에서 <Goodbye, Mr. Trouble>이란 곡을 만들었다. 강헌 음악평론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 신해철이 <Goodbye, another Mr. Trouble>로 되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 2달 동안 술만 마시고, 그의 추모하는 공연에서 삭발을 하던 신해철은 카리스마를 모조리 증발한 것처럼 비참해 보였다.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에서 2003년 이라크 파병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싣는다. 신해철 역시 파병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2002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지지하고, 2009년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만 비추었다.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과 신해철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그 몫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신해철 그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뮤지션이고, 독설가다. 그의 방송인 고스트 스테이션, 마왕이란 별명, 넥스트 앨범과 싱글앨범 등은 어린 시절 나와 형의 추억이 담겨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도시인’이란 곡과 같이 회색으로 가득한 도시의 고독에서 내 인생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에게 쓰는 편지’처럼 내 자신이 원한 길과 미래 그리고 지금을 바라본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지금의 현실을 비판한다. 노래라는 것이 정말 시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혹은 거친 폭풍처럼 다가온다. 모든 신해철의 노래와 음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말하며, 언제나 같은 것만을 강요하는 대중음악의 틀을 돌파한다. 그런 점에서 음악이란 것만큼 그 사람에 대해 잘 나오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각적 효과보단 청각적 효과에 의해 더 자극된다.

 

내 귀를 자극하는 사운드에서 지금 들어도 좋은 그의 감각이 여기서 멈추어 버린 것은 나에게 큰 허탈감이다. 누구와 다른 생각과 삶 그리고 선택을 하던 신해철의 유고란 바로 독특한 한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 세상을 보는 것에서 진정 제대로 보는 인간들이란 그 사회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의 틀에서 벗어난 특이영역의 존재라고 한다. 세상의 법칙을 발견하는 자들은 대다수의 인간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로 방황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신해철의 음악은 방황적인 요소가 많다. 특히 넥스트 시절의 음악은 비판으로 가득한 대한민국 보고서라고 말할 수 있다.

 

부조리한 현실 모순으로 가득한 오늘, 그는 그런 것들을 노래로 표현했다. 사랑의 시작과 이별의 아픔이란 노래도 좋을 것이나,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예술이란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서 현실의 어긋남을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은 현실이라도 그것이 그로테스크한 것이란 사실은 알아야 한다. 신해철이 가진 신념은 그의 인생에서 보인다. 항상 뭔가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고, 그런 골 때리는 방식은 다르게 생각하면 그가 생각하는 바가 상당히 논리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는 어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의 원인에 대해 “왜?” 내지 “이게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싫어한다.

 

모두 꿀이 아닌 쓰디쓴 가루약을 억지로 삼킨 어린아이의 표정처럼 인상이 흩어져 있다. 게다가 핏대가 올라와도 다시 넣어야 한다. 가루약이 아무리 써도 다 삼키고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해철이 지적한 그런 내용들은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예전에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라는 주제에서 인간의 생존에 대해 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지만, 그만큼 필요한 것이 “장미”라는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장미”라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장미는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은 살 수 없다.

 

언제나 같은 일만 반복되고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지루하고, 그 자체만으로 고문이란 점이다. 삶의 여유나 의미 없이 아무런 목적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은 행복하지 못하다. 단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즐기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노는 것도 어느 정도 체력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다. 행복의 조건에서 러셀은 흥분이라 한다. 흥분의 조건은 여러 가지 조건과 동기부여가 존재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인간은 정체된 삶으로 살아갈 수 없다. 즐기는 것은 돈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단지 자기가 행복을 찾고 싶은가 아닌 것인가? 라는 점이다.

 

인간마다 주어진 행복의 조건은 다르다. 그러나 행복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른바 꼰대와 자잘한 관습에 얽매여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슬에 의해 우리를 옭아매고 있으며, 그런 사회를 바라는 꼰대들은 더 심각한 사슬로 묶여 있다. 되지도 않을 논리와 관습에 부조리는 하나의 정당성으로 지탱되며, 그것을 논하는 것은 강력한 터부로 되어 결국은 인습의 칼날이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따라서 신해철의 발언은 기존 사회의 터부에 대하여 강력한 반발을 보여준다. 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나,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 중세유럽 교회의 면죄부가 현대 한국의 기복신앙과 변태적으로 결합한 종교에서 재탄생되고 있다. 인간의 가치란 그저 돈과 권력에 휘말리고, 그 아래 있는 자들은 밟힌다. 그래서 그의 노래 중에 <money>가 있지 않은가? 또한 성적인 부분에 대해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남자인 나라도 부끄럽고 혹은 여자라도 생각할 점이 있다.

 

남자들은 되는데, 여자들은 안 되는 이유에서 기존 조선시대 인조, 선조 머저리 왕들 옆에서 권력만 탐내는 사대부들의 썩은 유교정신이 아직도 이어진다. 뭐 한국은 조선의 후대이고, 나 역시 조선 사대부집안의 후손으로 본다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런 나쁜 것만 계속 유지한 채 조선 이전에 자유분방한 인간상들을 모조리 폐기한 것에서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과연 지키는 것인가? 그저 꼰대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은 여자의 몸을 만지면서 한다는 말이 딸처럼 보여서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어째든 치졸한 한국남자만큼 또한 속 좁은 여자들에 대해 지적도 좋았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수난당하고 계속 힘든 것은 맞으나, 남자도 당하고, 그 남자들도 힘없고 가진 게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여성들이 더 불쌍한 점은 인정한, 그런다고 힘없는 남자들이 힘들지 않았다는 식은 말하지 마란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 올 때, 갈밭마을 아낙네의 슬픈 비명과 눈물을 보았다. 아직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 이제 해골조차 남지 않을 것 같은 시아버지의 군포세를 내지 못한 이유로 자기들의 유일한 재산인 소가 관청으로 끌려갔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아이를 만든 자신의 죄를 탓하며 칼로 그의 남근을 베어낸다. 소나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불쌍타 하는데 하물며 우리 백성은 어떠랴?

 

나그네 글방에서 책을 읽는 것에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던 다산 선생님의 마음만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불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니라 불쌍한 입장에 놓인 사람이란 점이다. 종교시설에 가서 돈을 바치고 기도할 바엔 차라리 불쌍한 사람들이 모인 고아원이나 노인정에 가서 위로해주고, 혹은 기부금을 위탁하여 그들의 생활을 좀 더 개선해주는 게 인간의 덕목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강헌 선생님이 한국의 마지막 르네상스 뮤지션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렇다. 인문소양, 우리에겐 인문학적 지식, 그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 더 중요한 양심이 없는 게 비극이다.

 

신해철의 독설, 물론 100%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날린 비판은 우리 사회의 비틀림을 더 비틀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처가 골며, 상처를 찢어내어 고름을 짜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찢기 전에 만지는 것조차 불가하니 참 답답한 것이다. 뭔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주지 않은 나라, 억지로 등을 떠밀려 살아야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다시 자기들이 그런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나라, 연쇄적인 꼰대의 성향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절묘한 배합이라 말할 수 있다. 웃음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게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함의 성적표다. 그런데 우리는 웃음소리보단 근엄한 가면을 쓰기를 바란다.

 

우리의 마음을 솔직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질문은 “음악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음악 없이는 무슨 재미로 사냐?”라고 생각했다. 유행 따위 이미 접은 시기가 내 나이의 반 이상 넘었고, 사람 목소리보단 기타나 드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2014년 가요제에서 신해철 추모하는 자리에서 넥스트 밴드들의 연주를 듣다가 갑자기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으니 허무했다. 기타리스트 김세황의 기타 리프와 중간마다 사용하는 피킹 하모닉스를 들을 때마다 보컬을 맡은 가수들이 전혀 따라오지 못한 것을 보았다.

 

라이브 반주는 MR 테이프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같이 호흡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음악의 묘미란 바로 다양한 악기가 같이 어울려 한데 모여 강력한 에너지로 발산한다.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면 음악이 아니라 그저 노래만 하는 것이다. 신해철은 음악 없이는 살 수 있냐고 물었지, 노래가 없이는 못 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꼰대처럼 가면 쓰고 근엄한 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또 인상 남는 것은 신해철의 기준에 모두 맞은 것은 아니다. 그가 거론하는 것에는 그의 의도로 생각하면,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시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유도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생각을 100% 옳다고 여길 필요 없고, 물론 그런다고 하여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생각을 모아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가 느낀 한국의 꼴불견 남자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연애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단지 이에 도달할 정도로 아직까지 내 자신이 찌질군이란 점에서 말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만화이라면 가능할 터이나 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내가 찌질군에 아직 가까운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꼰대성에서 나는 찌질군으로 통용될 수밖에 없음에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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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2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02 23:21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야무님의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