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를 읽으면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네미(Nemi)라고 하는 숲 속에 호수가 있는 곳으로 아주 황홀한 풍경을 내뿜는 전설 같은 곳이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호수 인근에 어느 미친 남자가 칼을 들고 눈이 붉게 충혈 되어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는 남자는 그 곳의 왕이면서도 신이면서도 또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 인류의 문명을 기원에서 인간은 처음에 자연에 대해 속박당한 존재였으나, 어느 순간 자연이 우리 인간에 의해 속박 당한다.
모든 인간은 처음에 자연인이었다. 장 자크 루소의 <emile>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인이란 자연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자연의 이치를 어기지 않고, 문명의 타락과 어둠에 물들지 않은 존재다. 문자문화가 도래 이전, 즉 르네상스 이전이나 혹은 르네상스 이후라도 수많은 인간들에게 문자라는 지식은 거의 제한된 영역이다. 마녀사냥이 일어난 배경에서 모든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있었지만, 자국의 언어로 되지 않았다. 성경을 아는 것은 교회와 국가의 권력관계에서 국가의 권력이 바로 교황에 의해 보장되는 셈이다.
종교라는 것은 결국 왕과 귀족, 혹은 지배계급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 종교적인 가치관이란 결국 당시 민중들로 하여금 신앙심 자체가 국가와 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어진다. 왕이란 존재는 바로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당연한 권력의 좌석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왕권신수설인 것이다. 절대주의 내지 봉건사회에서 왕과 귀족들이 단순히 백성들에게 권력을 행하는 것은 국가권력으로서 통치할 수 있는 지식과 무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첫 부분에 프랑스 루이15세 시대 궁정하급관리 다미엥에 대한 처벌이 나온다. 고문이 지나치다 못해 거의 예술적인(그로테스크적인) 모습으로 시체가 사라지는 벌을 받은 그의 모습에 근대사상 도래 이전의 인류의 무서운 권력을 알 수 있다. 왕이란 신체는 크게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생물학적인 신체로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늙고 병이 드나, 또 하나는 정치적인 존재로서 왕이란 존재는 그 자리에 위치한 것만으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의 경우 왕의 생물학적 육체에 대한 벌이 아니라 왕의 정치적 신체, 즉 신에 의해 보장된 신체를 손상하려 했다. 그것은 국가의 반역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반역이기도 하다. 다미엥의 죽음이 그토록 잔인한 이유는 종교적 권력이 뒷받침 되던 봉건사회의 잔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황금가지>와 다미엥의 죽음, 그리고 지금 적으려 하는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어떤 관계인가?
기본적으로 일본의 종교적인 형태를 분석하면 눈앞에 생명이 없는 존재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애니미즘(Animism)의 형태를 가진다. 작품 내에서도 학교에서 경례하는 사람은 선생님만 아니라 신수(神樹)도 포함된다. 신수라고 하여 조금 의아해 할지도 모르나, 우리나라의 경우 신단수(神檀樹)가 존재하는데, 단군신화에서 환웅을 찾아온 웅녀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단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신적인 영험을 가진 나무는 박달나무다. 단군(檀君)의 한자에서 박달나무와 신단수의 단자가 같은 한자다. 단이란 한자는 제단(祭壇)에 사용되는 한자어로 나무목과 흙토를 제외하면 같은 한자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의 전통신앙이 무속신앙에서 단군은 신의 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 정치인이기도 하다. 신의 아들로서 무당과 정치권력을 가진 군주라는 점에서 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바로 당시 고조선이 있던 시기가 청동기 시절이고, 한편으로 농경사회다. 농경사회에서 우리나라는 몬순기후로서 여름에 높은 기온과 다량의 강우를 가진 것으로 벼농사가 적합하다. 군주의 임무는 나라의 통치이기도 하나,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단순히 제의적 요소만이 있는 게 아니라 기상관측 내지 달력을 이용한 농경산업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Nemi호수는 어떠한가? 당시 고대국가 이전의 부족국가라면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삶을 유지하는 식량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들인 반인반신인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포도주라는 것은 인간을 미치게 만들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을 기분 좋게 만들고 한편으로 용기를 준다. 따라서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인들 모두가 사랑하는 신이다. 하지만 그의 힘은 인간에게 삶과 동시에 죽음을 준다. 포도주에 마신 사람들이 지나치면 순간적 충동에 의해 살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에 대한 수확이 필요하다. 포도를 수확하려면 농경사회의 산업구조를 가진다. 농사를 짓는 것은 자연에 대한 변화를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신이란 존재는 자연인 것이다. 단순히 나무, 돌, 물이 아니라 계절이 변화조차 신의 도래인 것이다. 다시 Nemi 호수로 가보자. 그 곳의 족장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위에서 고대국가나 부족국가의 왕은 신의 아들이고, 그런 요소는 중세유럽을 지나 루이왕정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인간이 수렵 이후 등장한 농경사회는 인간에게 자연적인 조건, 즉 계절적 변화에 따라 농경수확물이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농경수확물이 좋을 때는 모두들 기뻐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자연의 움직임이 하나의 신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면, 만약 신이 늙거나 원기가 부족하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런 방법이 바로 신을 대신할 인간을 세우는 것이다.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미친 남자는 단순히 미친 것이 아니라 칼을 들고 경계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만약 조금만 긴장을 늦추거나 또는 힘이 빠지면 칼을 가지고 온 남자들에게 암살당하기 때문이다. 왕이 죽으면 그 암살자는 새로운 왕이 되고, 그 왕은 또 다시 경쟁자와 싸워 이기면 목숨을 구제하고, 지면 죽는다. 이것이 바로 <황금가지> Nemi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숲의 비밀이다. 왕은 모두들 통치하는 인간이 된 신이나, 한편으로 인간들 손에 죽어주어야 하는 희생양이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가 일치한 제정일치 사회가 문명의 발달과 사회적 체계에 따라 분리된 것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그런 점을 본다면 제정일치가 아니라 제정분리의 사회다. 학교라는 공간은 선생님이 곧 정치적으로 통치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신수님이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 통치하는 곳이다. 제정분리의 사회라는 점에서 학교라는 곳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의 유우나를 비롯한 소녀들은 신수의 힘을 통해 이차원적 공간에서 괴수와 싸운다. 문제는 괴수가 정해진 패턴이나 형태를 가지고 침공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개체수와 모양새로 침투하며, 때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적 앞에서 대부분의 전대물 장르는 주인공들이 성장하거나 급격히 업그레이드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경험능력치를 쌓음으로 적을 무찔려 가나, 여기서는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 소녀라는 존재가 곧 꽃이다. 꽃이 피기 전의 꽃봉오리에 지나지 않은 소녀전사들이 만개(滿開)를 하면 곧 자연의 법칙에 따라 꽃은 지게 된다. 결국 능력을 눈을 뜨면 몸과 마음이 어딘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결국 어느 조직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하나의 신으로 등극한다.
결국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인간의 세계에서 문명의 유지가 소녀들의 희생양에 의해 존재했고, 그 적들은 지구라는 공간에 있는 외부의 적이다. 문제는 이 외부의 적들이 일본의 소녀들에 의해 저지되고, 게다가 피해공간은 유우나가 살고 있는 마을과 그 주변지역이다. 자신의 세계가 곧 모든 세계의 근본이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상당히 이 작품은 위험한 발상사고를 가지고 있다. 일본을 침공하는 외부의 적은 끊임없고, 소녀들이 결국 계속 막고 막아 희생되어 이루어진 공간이란 점이다.
일본 자기중심적 가치에서 토고의 행동을 잘 봐야 한다. 그녀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모두 일어나 거수경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노래는 군가라는 점이다. 토고의 집안은 전형적인 일본 우익의 가정이란 점을 강조하고, 그녀의 일본이란 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이 작품에서 외부의 적은 누구인가? 라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좁게 작품 내부에서 보자면 지구세계는 이미 단절된 공간에 늘 위기에 봉착해 외부의 적을 싸우는 것이고, 그 역할을 소녀들이 한다. 소녀들은 신이 되어야 하는 것만큼 한편으로 희생양으로 내몰린다.
그런데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 소녀들은 원래의 몸을 되찾고, 자신의 과업들은 다른 소녀들에게 물려준다. 잘못된 세계가 계속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점에 대한 부분에서 희망을 거는 점, 전체주의적 발상이 보이는 점이고, 토고가 모든 악연의 끊는 점에서 벽을 붕괴하는 점에서 일본을 억압하는 자신들의 딜레마를 부수고, 그 원흉을 모두 파괴하려 한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 이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자는 것은 결국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
외부에서 계속 적이 오는 것에서 신수를 파괴하는 것으로 토고는 해결하려 하나, 그것이 불가능하여 외부의 적을 끌고 오나, 결국 유우나 일행에 의해 저지된다. 자기 세계를 파괴하여 모든 것을 정리하려 하나, 그 이면에 보이는 유우나 일행의 행동은 외부의 적, 즉 일본의 적이 침공하면 거기에 대한 반격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의 재로 만들면서 그들을 용사라 하고, 전쟁사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묻혀 신으로 추앙받는 일본이란 국가를 생각하면,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어느 대상을 희생양을 만들어 하나의 신적인 존재로 부여하고, 그들조차도 자신의 희생 그리고 미래의 희생을 하나의 정당성으로 보고 있다.
이게 과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와 같은 구조란 말인가? 물론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이기에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되나, 세계관 구성에서 일본 어느 지역 멸망은 지구세계의 멸망이란 확대사고방식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사고와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황금가지>의 연계성은 바로 그 소녀들이 희생되는 게 국가의 이념적인 측면에서 정당하게 만들고, 심지어 가족조차 거기에 승복한다. 결국 국가라는 조직을 위해 소녀들이 희생되는 것도 모자라 본인들조차 납득하는 것이다. <황금가지>에서 소녀들이 희생되는 이유는 그녀들이 가장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가 없기에 다른 자들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희생양이 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그녀들은 신으로 잠시 추앙되어 의식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신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위해 죽는다. 인간의 욕망이란 바로 무지와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이 하나의 사회적 도덕이 되어 법적인 제도적 요건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 것들이 <황금가지>에서 제의적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들이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되풀이 되는 점이다. Nemi호수 숲의 왕이나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의 소녀들이나 모두 같은 상황인 것이다.
계속 끊임없이 대체되는 인간의 신앙의식에 희생양은 모두에게 떠받들어지는 존재만큼 망가진다. Nemi의 왕은 모든 것을 가져 음식과 의상, 심지어 여자들까지 원하는 만큼 가진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이에 반해 거액의 돈을 토고에게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Nemi의 왕은 화폐가 없는 농경사회고,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화폐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자본주의 경제사회이다. 그러나 결국 왕이 된 남자나 용사가 된 소녀나 모든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아 거기에 대한 대가는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에 반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와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인가? 같은 것은 하나만 있다. 어느 소녀가 특수한 힘을 얻게 되자, 변신을 한 후 강력한 적과 싸운다는 점이다. 싸우는 소녀 이외엔 큰 동일지점이 없다. 우선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및 여러 도서에서 그의 이론은 “문화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인간의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 → 생산증강과정 → 생태환경의 파괴․고갈 →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란 공식을 내세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에서 인구의 증식이나 증강, 혹은 생산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현재의 상태에서 적과 싸우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인류의 문명이전부터 시작하여 기계 및 정보화 사회의 문명까지 계속 이어진다. 세계관에서 단순히 일본이 배경이라 일본만이 아니라 마법소녀의 영역은 전 세계적인 공간적,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연계가 되어 있다. 큐베라는 속성이 바로 외계인이라 하지만, 그는 인류의 문명에서 보여주는 인류의 욕망에 의한 이기심이다.
인류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자연적 존재에 가까운 인간이 문명의 세계에 가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력을 자연에 투하하고, 그 과정에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된다. 하지만 거대한 노동력이 투하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간들이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가 아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적 유산은 많은 인간들의 노동을 착취해서 생긴 것이다. 결국 인류문명은 인간의 착취로부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순히 수렵과 채취, 그리고 부족단위의 농경사회에서 인간은 거의 평등한 수평구조라면, 국가조직이 체계화되면서 인류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분리된 수직구조로 변경된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그런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고, 거기에 따른 혜택이 인류에게 올 때마다 그만큼의 반작용이 따랐다. 문제는 그런 반작용은 인간의 대부분의 이기심이 하나의 정의로서 작용한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는 공통의 이익을 생각하는 반면, 전체의지는 사사로운 이익만 생각하는 특수의지의 총화”라고 한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큐베는 인간들의 특수의지의 총화로서 어느 불특정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소수의 이익은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원인을 인간 본인들에게 찾는 게 아니라 마녀로부터 찾을 뿐이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문제 제공시점을 외부로 찾아가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오히려 내부에서 되찾는다. 따라서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동일한 작품으로 설정하는 것은 인류의 문명을 연구하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순전히 엉터리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투쟁의 대상이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는 내부가 아닌 외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외부가 아닌 내부다. 마도카가 신이 되어 모든 세상의 섭리를 교체할 때, 마녀와 마법소녀들은 사라져도, 마귀의 존재가 나타나 세상의 어둠을 가져가지 못했다.
<유우키 유우나는 용자다>나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나, 전자는 자신들(유우나의 용자부)의 문제만 해결하였고, 후자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소녀만 해결했다. 전자는 용사시스템의 되풀이과정에 참여한 것이라면, 후자는 인류의 문명발전에 따라 계속 확대되어 간다. 그런 점에서 이미 2작품을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가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문자문화 도래 이전에 인간은 신이란 존재가 현실에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문자문화인 이성 중심문화가 도래한 후 이제 다시 이미지의 세계로 환원되면서 애니메이션은 그저 오락물의 기능을 하는 콘텐츠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의 신화를 다시 이미지로서 보여주는 미디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