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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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31일, 2014년 마지막 날에 내 사무실에 신해철 유고지 <마왕 신해철>이 도착했다. 퇴근시간이 다 되기 전 아주 아슬아슬하게 말이다. 신해철의 유고지가 도착하는 아침 나는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버스 안에서 왠지 가슴이 아리는 노래를 들었다. 전설적인 락뮤지션, 브리티쉬 하드락에서 절대영역인 Led Zeppelin의 노래였다. 그들의 4집인 stairway to heaven이란 곡이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신해철이란 이름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한 날, 6시 배철수 음악캠프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배철수 씨는 신해철의 죽음에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못한 채, stairway to heaven이란 곡 하나로 모든 심정을 답변하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그곳에 가는 방법은 황금이 있어야 하는가요?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영혼과 자연에 대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것은 결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에 갈 수 있는 영혼과 자연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해철의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가? 지옥으로 가는가? 아직 죽지 않아 뭐라 말할 수 없다. 아니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을 수 있어도 종교는 없다. 단 이것만 말하고 싶다. 그가 가는 곳은 그가 어린 시절 육교 위에 만난 작은 친구 병아리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곳으로 가는 곳만은 분명하다.

 

아니라면 그가 2달 동안 집안에서 은둔하며 술로 보내게 만들었던, Mr. Trouble의 곁에서 서로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소박하게 나누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솔직히 아팠다. 신해철과 마지막으로 같이 방송작업을 했던 진중권 교수가 신해철의 죽음을 듣고,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글을 남겼다. 진중권 교수가 죽은 자를 위해 저술한 도서로 몇 권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레퀴엠>,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이었다. 첫 번째 책에는 진중권 교수가 군대시절에 의무병으로 근무하면서 실제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진행된다. 죽은 병사의 사체, 그들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그의 입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욕이 나온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에서 2009년 5월 23일에 서거한 노무현이란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글은 참으로 침착한 글이었다. 물론 권력이란 피를 뿌리는 잔혹한 결말에서 역사적인 인용은 아직도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것처럼 노무현의 죽음은 아직도 야만적인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마왕 신해철>에서 보인 진중권 교수의 글은 상당히 인간적이었다. 2007년 신해철이 갑자기 진중권 교수에게 전화 와서 해철이라 인사하고, 서로 만나 의기투합하여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에서 두 사람은 과연 언제 친구가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였다.

 

그런 신해철의 죽음에서 진중권 교수의 글이 인간적 요소가 돋보이는 이유는 아마 인간 신해철이란 남자가 가진 진정한 맛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아련한 맛이 그의 글에서 나왔다. 하지만 왠지 신해철의 죽음은 너무 아련했다.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3년 동안 거의 폐인 비슷하게 지내다 3년이 지난 후 그의 추모앨범에서 <Goodbye, Mr. Trouble>이란 곡을 만들었다. 강헌 음악평론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 신해철이 <Goodbye, another Mr. Trouble>로 되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 2달 동안 술만 마시고, 그의 추모하는 공연에서 삭발을 하던 신해철은 카리스마를 모조리 증발한 것처럼 비참해 보였다.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에서 2003년 이라크 파병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싣는다. 신해철 역시 파병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2002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지지하고, 2009년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만 비추었다.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과 신해철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그 몫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신해철 그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뮤지션이고, 독설가다. 그의 방송인 고스트 스테이션, 마왕이란 별명, 넥스트 앨범과 싱글앨범 등은 어린 시절 나와 형의 추억이 담겨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도시인’이란 곡과 같이 회색으로 가득한 도시의 고독에서 내 인생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에게 쓰는 편지’처럼 내 자신이 원한 길과 미래 그리고 지금을 바라본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지금의 현실을 비판한다. 노래라는 것이 정말 시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혹은 거친 폭풍처럼 다가온다. 모든 신해철의 노래와 음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말하며, 언제나 같은 것만을 강요하는 대중음악의 틀을 돌파한다. 그런 점에서 음악이란 것만큼 그 사람에 대해 잘 나오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각적 효과보단 청각적 효과에 의해 더 자극된다.

 

내 귀를 자극하는 사운드에서 지금 들어도 좋은 그의 감각이 여기서 멈추어 버린 것은 나에게 큰 허탈감이다. 누구와 다른 생각과 삶 그리고 선택을 하던 신해철의 유고란 바로 독특한 한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 세상을 보는 것에서 진정 제대로 보는 인간들이란 그 사회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의 틀에서 벗어난 특이영역의 존재라고 한다. 세상의 법칙을 발견하는 자들은 대다수의 인간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로 방황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신해철의 음악은 방황적인 요소가 많다. 특히 넥스트 시절의 음악은 비판으로 가득한 대한민국 보고서라고 말할 수 있다.

 

부조리한 현실 모순으로 가득한 오늘, 그는 그런 것들을 노래로 표현했다. 사랑의 시작과 이별의 아픔이란 노래도 좋을 것이나,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예술이란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서 현실의 어긋남을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은 현실이라도 그것이 그로테스크한 것이란 사실은 알아야 한다. 신해철이 가진 신념은 그의 인생에서 보인다. 항상 뭔가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고, 그런 골 때리는 방식은 다르게 생각하면 그가 생각하는 바가 상당히 논리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는 어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의 원인에 대해 “왜?” 내지 “이게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싫어한다.

 

모두 꿀이 아닌 쓰디쓴 가루약을 억지로 삼킨 어린아이의 표정처럼 인상이 흩어져 있다. 게다가 핏대가 올라와도 다시 넣어야 한다. 가루약이 아무리 써도 다 삼키고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해철이 지적한 그런 내용들은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예전에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라는 주제에서 인간의 생존에 대해 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지만, 그만큼 필요한 것이 “장미”라는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장미”라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장미는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은 살 수 없다.

 

언제나 같은 일만 반복되고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지루하고, 그 자체만으로 고문이란 점이다. 삶의 여유나 의미 없이 아무런 목적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은 행복하지 못하다. 단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즐기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노는 것도 어느 정도 체력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다. 행복의 조건에서 러셀은 흥분이라 한다. 흥분의 조건은 여러 가지 조건과 동기부여가 존재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인간은 정체된 삶으로 살아갈 수 없다. 즐기는 것은 돈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단지 자기가 행복을 찾고 싶은가 아닌 것인가? 라는 점이다.

 

인간마다 주어진 행복의 조건은 다르다. 그러나 행복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른바 꼰대와 자잘한 관습에 얽매여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슬에 의해 우리를 옭아매고 있으며, 그런 사회를 바라는 꼰대들은 더 심각한 사슬로 묶여 있다. 되지도 않을 논리와 관습에 부조리는 하나의 정당성으로 지탱되며, 그것을 논하는 것은 강력한 터부로 되어 결국은 인습의 칼날이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따라서 신해철의 발언은 기존 사회의 터부에 대하여 강력한 반발을 보여준다. 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나,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 중세유럽 교회의 면죄부가 현대 한국의 기복신앙과 변태적으로 결합한 종교에서 재탄생되고 있다. 인간의 가치란 그저 돈과 권력에 휘말리고, 그 아래 있는 자들은 밟힌다. 그래서 그의 노래 중에 <money>가 있지 않은가? 또한 성적인 부분에 대해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남자인 나라도 부끄럽고 혹은 여자라도 생각할 점이 있다.

 

남자들은 되는데, 여자들은 안 되는 이유에서 기존 조선시대 인조, 선조 머저리 왕들 옆에서 권력만 탐내는 사대부들의 썩은 유교정신이 아직도 이어진다. 뭐 한국은 조선의 후대이고, 나 역시 조선 사대부집안의 후손으로 본다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런 나쁜 것만 계속 유지한 채 조선 이전에 자유분방한 인간상들을 모조리 폐기한 것에서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과연 지키는 것인가? 그저 꼰대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은 여자의 몸을 만지면서 한다는 말이 딸처럼 보여서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어째든 치졸한 한국남자만큼 또한 속 좁은 여자들에 대해 지적도 좋았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수난당하고 계속 힘든 것은 맞으나, 남자도 당하고, 그 남자들도 힘없고 가진 게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여성들이 더 불쌍한 점은 인정한, 그런다고 힘없는 남자들이 힘들지 않았다는 식은 말하지 마란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 올 때, 갈밭마을 아낙네의 슬픈 비명과 눈물을 보았다. 아직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 이제 해골조차 남지 않을 것 같은 시아버지의 군포세를 내지 못한 이유로 자기들의 유일한 재산인 소가 관청으로 끌려갔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아이를 만든 자신의 죄를 탓하며 칼로 그의 남근을 베어낸다. 소나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불쌍타 하는데 하물며 우리 백성은 어떠랴?

 

나그네 글방에서 책을 읽는 것에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던 다산 선생님의 마음만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불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니라 불쌍한 입장에 놓인 사람이란 점이다. 종교시설에 가서 돈을 바치고 기도할 바엔 차라리 불쌍한 사람들이 모인 고아원이나 노인정에 가서 위로해주고, 혹은 기부금을 위탁하여 그들의 생활을 좀 더 개선해주는 게 인간의 덕목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강헌 선생님이 한국의 마지막 르네상스 뮤지션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렇다. 인문소양, 우리에겐 인문학적 지식, 그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 더 중요한 양심이 없는 게 비극이다.

 

신해철의 독설, 물론 100%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날린 비판은 우리 사회의 비틀림을 더 비틀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처가 골며, 상처를 찢어내어 고름을 짜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찢기 전에 만지는 것조차 불가하니 참 답답한 것이다. 뭔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주지 않은 나라, 억지로 등을 떠밀려 살아야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다시 자기들이 그런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나라, 연쇄적인 꼰대의 성향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절묘한 배합이라 말할 수 있다. 웃음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게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함의 성적표다. 그런데 우리는 웃음소리보단 근엄한 가면을 쓰기를 바란다.

 

우리의 마음을 솔직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질문은 “음악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음악 없이는 무슨 재미로 사냐?”라고 생각했다. 유행 따위 이미 접은 시기가 내 나이의 반 이상 넘었고, 사람 목소리보단 기타나 드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2014년 가요제에서 신해철 추모하는 자리에서 넥스트 밴드들의 연주를 듣다가 갑자기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으니 허무했다. 기타리스트 김세황의 기타 리프와 중간마다 사용하는 피킹 하모닉스를 들을 때마다 보컬을 맡은 가수들이 전혀 따라오지 못한 것을 보았다.

 

라이브 반주는 MR 테이프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같이 호흡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음악의 묘미란 바로 다양한 악기가 같이 어울려 한데 모여 강력한 에너지로 발산한다.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면 음악이 아니라 그저 노래만 하는 것이다. 신해철은 음악 없이는 살 수 있냐고 물었지, 노래가 없이는 못 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꼰대처럼 가면 쓰고 근엄한 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또 인상 남는 것은 신해철의 기준에 모두 맞은 것은 아니다. 그가 거론하는 것에는 그의 의도로 생각하면,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시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유도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생각을 100% 옳다고 여길 필요 없고, 물론 그런다고 하여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생각을 모아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가 느낀 한국의 꼴불견 남자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연애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단지 이에 도달할 정도로 아직까지 내 자신이 찌질군이란 점에서 말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만화이라면 가능할 터이나 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내가 찌질군에 아직 가까운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꼰대성에서 나는 찌질군으로 통용될 수밖에 없음에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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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2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02 23:21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야무님의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