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방영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을 감상하였다. 우선 나는 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을 보는 것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나의 비평을 적어보는 것을 매우 한쪽에 치우치는 것보다는 다양한 관점과 시선으로 통해 적어보려고 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나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많고 많은 담론과 그리고 그동안 우리 인간에게 전해온 이야기들이 어떻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말해주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여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나는 결론부분부터 차근차근 다시 되돌아보려고 한다. 그래야 진정 내가 생각하는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마도카가 마법소녀로 변신하여 세상 모든 마녀로 될 마법소녀의 절망을 치유한다. 그런 치유에서 마도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인 흐름에서 인간을 초월하였고, 공간적으로도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을 정도의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물론 전지전능할 수 있는 범위는 마법소녀가 마녀로 변하기 전에 예비마녀들의 절망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이 모든 마법소녀의 마녀의 기운을 모두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분명히 마법소녀가 마력을 소모하면 자신의 소울젬의 밝은 기운 대신 검은 기운이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검은 기운을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마녀를 처단하여 그 마녀로부터 나온 그리프시드에 마녀의 기운을 넣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큐베 즉 인큐베이터로 통해 보는 인간의 존재이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보면서 가장 욕을 많이 하는 존재는 큐베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큐베에 대해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큐베가 어린 소녀를 마법소녀로 변신하여 그들이 희망의 존재에서 시작하여 절망의 존재로 변화하게 유도하면서 이런 부당한 대우에 우리가 큐베를 얼마나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이다. 그것은 마법소녀라는 존재가 마녀라는 동전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점과 그 마법소녀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어떻게 세상에 비추어지는 것인가이다.

 

큐베는 마도카와 대화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자신은 인간과 같이 살아왔다고, 그리고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모두 벌거숭이 유인원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큐베는 그 존재로 보면 결코 악의 축이라 할 수 없고, 우주의 열역학적인 부분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큐베는 단지 인간이 가진 깊은 욕망에서 발생된 하나의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것은 큐베가 마도카와 대화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너희 개인은 희생되더라도 우리 모두는 무사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것은 즉 어느 거대한 집단 속에 한 개인의 희생으로 통한 문명사회의 유지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은 마도카가 최후에 신적인 그러니깐 관념적인 존재로 되면서 절망에 빠진 소녀들을 구할 때의 모습에서 등장한다.

 

마도카가 마녀로 되려고 하는 마법소녀들을 구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조우하게 된다. 그녀는 바로 “잔 다르크”이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이라는 끔찍한 굴레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잔 다르크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지켰으나 최후에는 국가권력과 교회권력에 의해 화형에 처하게 된다. 그런 잔 다르크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전쟁 중에는 성녀(聖女)이었으나 끝나고 나서는 마녀(魔女)로 되었다. 결국 그녀는 희망을 가지고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운명은 무척이나 잔인하게도 그녀의 최후를 뜨거운 나무 위에 생채로 태워지게 만들었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운명의 굴레를 어떻게 보는가이다.

 

마법소녀와 마녀는 큐베의 말을 듣고 유추해보면 인류의 문명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인류의 문명들을 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이 많았다. 각종 전쟁, 테러, 분쟁, 질병, 광기 등등 결코 누구나 가지고 싶지 아니한 기억과 흔적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혹은 독일 철학자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인간이 문명을 가진 것으로 평등주의에서 신분제도로 변모한 것이다.

 

문명의 탄생은 곧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고, 그런 계급과 다양한 계급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누군가는 덜 가지고 못 가지고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난다. 그런 모습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문명의 흐름에서 알 수 있다. 인류는 자신들만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사람은 마법소녀였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이용가치가 있을 때에는 모두에게 칭송받을 존재였으나 이제는 필요가치를 잃게 되자 세상에서 지워야 할 마물로 된 것이다. 나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마법소녀들이 그리프시드로 통해 자신의 소울 젬을 정화할 때의 모습이 너무 소스라치게 무섭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그 상대방에게 자신의 추악함까지 건네줌에 따 그 마법소녀 자신은 더 강력한 마법소녀로 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소녀로 계속 남아 힘을 쓰는 건 결국 계속 처단해야할 마녀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마녀를 찾지 못해 결국 자신의 절망 안에 갇히면 자신 역시 마녀로 되어 버리는 아이러니가 바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핵심이다. 왜 마도카가 마지막에 모든 절망을 자기가 가져가고 그 절망을 가져간 자신마저 왜 마녀가 되면 안된다는 것은 그런 타인에 대한 희생을 끊어야지 비로소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도카의 모든 것을 넘어선 형이상학적(마지막에 마도카가 신적인 존재로 되자 마도카가 인간이 아닌 관념적인 존재가 된다고 한다)인 윤리의식은 쉬운 결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샤아카로 통해 알 수 있다. 샤아카의 단짝 친구 쿄스케는 큰 사고로 인해 몸이 불구가 되었다. 샤아카는 거기에 대한 절망감에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히려 더욱 잔인한 절망으로 변하게 하여 샤아카 자신을 마녀로 변신시켰다.

 

샤아카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단짝 친구인 쿄스케를 회복하게 하여 바이올린까지 켜게 하였으나, 샤아카는 그런 희생을 통한 1가지 소망을 이루었으나 정작 자신을 위한 보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소망 대신 찾아온 것은 그녀가 소울젬이 없다면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샤아카의 친구 히토미가 샤아카에게 다가와서 쿄스케에게 고백한다고 한다. 그러나 샤아카는 자신이 먼저 고백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왜냐면 자신은 쿄스케에게 키스도 할 수 없고, 안아 달라고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샤아카는 자신의 1가지 소원으로 모든 것을 희생시킨 것이다. 결국 샤아카는 히토미와 대등한 여자가 아니라 대신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으로 통해 자신은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절망으로 가득하게 되어 마녀로 변신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한다. 따라서 샤아카가 행하는 노동은 자신이 마법소녀로써 마녀를 잡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은 마녀와 마녀의 사역마를 잡더라도 그녀가 행한 노동의 대가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정당한 행동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마음에 상처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마도카는 자신의 노동을 증명하려는 그런 목적의식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도카는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소녀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보자면, 마미 선배가 마법소녀로 된 이유는 생존을, 호무라는 마도카의 우정을, 쿄코는 자신의 아버지를, 샤아카는 쿄스케를 위해 마녀가 된 것이었다.

 

진정 자신을 위해 싸운 것은 이 4명의 소녀에서 누구란 말인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싸운 마미 선배는 실수로 마녀에게 먹히고, 아버지를 위해 마법소녀가 되어 결국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파멸한 쿄코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주의자가 되고, 샤아카는 쿄스케를 위해 선택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타적인 인간관으로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호무라 역시 친구인 마도카의 죽음을 다시 교정하려다가 오히려 마도카를 인간 문명 이래 최고의 마녀로 만들 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무라는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에서 대마녀의 위압 앞에 마도카를 지킬 수 없었다. 작품 마지막에 가면 마도카가 매우 강력한 마법소녀로 변신하면서 인류가 시작한 인과의 법칙을 해체시킨다. 그런데 이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이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에 대해 조사하면서 위키백과의 체코 문화가 상당히 눈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누더기와 짚으로 만든 마녀 또는 (대가 긴) 빗자루만을 모닥불에 태워 겨울을 끝내는 의식을 치루는 부분이다. 본래 인간 문명과 관련하여 고대 원시국가 체계의 종교는 대부분 토테미즘 내지 샤머니즘이었다. 특히 인간이 신과 동일한 존재로 각인하는 샤머니즘의 경우는 인간 중에서 특이한 요소를 가진 인간은 신이란 존재가 형상화되었다고 믿었다.

 

가령 황금가지라는 인류학 도서를 참고하면 자연의 변화에 따라 신의 대리자인 어느 부족의 수장들은 막대한 권력을 가지나, 그 왕이 힘이 약해지거나 혹은 자연의 변화(가령 홍수, 가뭄,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그 부족의 수장을 죽인다. 그것은 늙고 약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젊고 튼튼한 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여 원시부족의 인간들에게 혜택이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꾸 새로운 왕이 죽게 되면서 이제는 왕을 천천히 죽는 방법을 택하고, 후에 왕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왕 대신 희생양을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소녀들이 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 대해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과거 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 페스트 등의 전쟁과 질병재앙으로 인해 국가적인 권력이 위기에 빠졌다. 그때 부패한 국가와 교회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부패함과 무능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끌여 들이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여자였고 또한 소녀들이었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기존 마법소녀 장르와 다른 점은 바로 소녀들이란 존재가 매우 약하고 약한 존재라는 점이고, 또한 큐베 역시 제2차 성징기를 가지는 소녀들이어야 말로 감정의 폭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결국 어린 소녀들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억압하고 속박하여 사회의 흐름을 유지시킨다는 일련의 희생제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마도카와 친구들이 중학교 2학년이란 점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때가 프로이트 이론적인 부분에서 가장 무의식적인 성적욕구인 즉 리비도가 강할 때이기 때문이다.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 라는 5가지 절차에서 중학교 2학년은 제2차 성징인 14세에 해당된다. 그러나 지금의 생식기는 초등학교 5,6학년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보통 14세라는 나이는 이런 어른과 아이의 중간적인 부분에서 어느 쪽에도 갈 수 없는 어중간한 형태이다. 가령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이카리 신지는 14세의 청소년이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증세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자신의 어머니의 육신과 정신이 깃든 에반게리온에서 매우 편안함을 느낀다. 게다가 자신의 동급생인 레이에게 무의식적으로 성적인 욕망을 품으며, 또한 레이 역시 사도와 자폭하기 전에 신지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닫는다(레이의 경우는 14세의 생식기 소녀이나 그녀는 생체실험으로 태어나서 아이를 가질 수 없으나 신지의 어머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신지에게 어머니라는 무의식적인 성적욕구를 가진다).

 

그런 14세의 소녀에게 가진 리비도는 직접적으로 작품 내에서 작용하지 않는다. 단지 14세라는 제2차 성징기에서 큐베는 마법소녀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어중간한 소녀가 희생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마법소녀라는 개념에서 우선 이 소녀라는 점이 중요하다. 소녀라는 점은 분명히 어른이 아닌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그렇지만 이때의 소녀들은 육체적인 성장이 발달되는 반면 대신 정신적인 성장을 뒤따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소녀들은 자신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들은 현실에서는 아무런 노동을 할 수 없으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에 현실 속에는 몸집만 다 자란 어린아이인 셈이다. 그래서 마법소녀라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이나 세계의 신화를 보면 여자가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 대부분 어린 소녀들이 흔하다. 이에 반해 남자들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나이가 어린 아이가 될 수도 있고 어른으로 될 수도 있다. 여자 중에서 그것도 어린 소녀가 신화의 주인공으로 되는 이유는 대부분 그녀들이 영웅의 임무와 과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희생당하기 위해 부여 받은 것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절망이 쓰러지고 희망을 찾아내는 존재들은 바로 이 14세의 전후의 어린 소녀들이다. 그들은 세계를 구하고 마녀를 처단한다는 엄청난 임무를 받았으나 결국에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채 죽는 그날까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가치가 필요 없어지거나 자신의 존재에 회의를 하는 순간 마녀로 변모한다.

 

결국 마법소녀는 자신의 희생 즉 어린 소녀로 통해 문명사회를 유지해야한다는 제물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마도카가 최후에 비는 소원은 그런 제물이 되는 소녀들을 모두 구원하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 만들어낸 각종 악의와 저주를 대신 받아들여 희생해야하는 죄 없는 소녀들을 말이다. 작품 마지막을 보면 호무라가 계속하여 마법소녀의 임무를 이행시키면서 이제는 마녀 대신 마녀가 아닌 이상한 괴기한 존재가 나온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욕심, 질투, 음모 등과 같은 추악함이다. 큐베가 지적하듯이 인간은 문명의 시작과 동시에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 욕구는 한 번의 해결로 해소되나 욕망은 한번 해결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구하는 독깨진 항아리이기 때문이다. 작은 욕망을 이루면 더 큰 욕망을 원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욕망을 위해서라면 결국 타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마녀와 마법소녀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마도카는 그런 인과관계에서 어린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욕망 자체인 즉 근본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이 모두의 희망을 위해 절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 그 자체가 희망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마도카가 모든 절망을 받아들일 경우 자신의 절망을 가득하여 결국 발푸르기스의 밤에 등장하는 마녀 이상의 대마녀로 되어 세상을 파괴한다는 위험에서 말이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이런 마도카의 선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호무라와 큐베, 마도카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큐베가 분명히 마도카에게 이 세상 최고의 그리고 유일무이한 마법소녀가 될 것이고 그리고 마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원인은 호무라의 시간을 조정하는 능력 때문이다. 원래 시간은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인 존재다. 그러나 호무라는 마도카를 살리기 위해 계속 시간을 되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몇 번이나 마도카는 마법소녀로 되어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마녀와 싸우고 죽고 죽어 마도카가 맡은 이 세상의 인과를 더욱 확대시키게 되었다.

 

결국 시간은 호무라가 되돌아가 가고 있었으나 그 중심에는 마도카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마도카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런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보자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루히의 중심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원치 않을 경우 무의시적으로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깨어지고 시간과 공간의 비틀림으로 인과관계가 바뀌게 된다.

 

특히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는 Kyon의 과거에 만난 하루히의 조우로 인해 자신의 현재가 바뀌게 되고, 그 바뀐 과거가 미래의 영향을 주었으나, 결국 그것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던 하나의 인과관계이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그 인과관계가 누적되었던 것이라면 <스즈미야 하루히>시리즈에서는 미로와 퍼즐로 끼워 맞추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되풀이로 통하여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 Kyon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것은 Kyon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라면 마도카는 이 모든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운명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상황인 것이다. 다시 처음에 제기한 이야기처럼 왜 마도카는 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했을까?

 

그것은 인류가 시작한 문명아래 이루어진 타인에 희생은 결코 끊을 수 없는 사슬의 고리다. 문명이 시작하면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면 결국 인간이 아닌 인간 이상의 존재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마도카는 인간이기 포기하고 모든 마법소녀의 절망을 끌어안은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마도카가 관념적인 신의 존재로 되었다는 증거는 결국 마도카는 자기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단지 마도카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때까지의 마법소녀와 다른 점은 기존에 있던 마법소녀들은 모두 마녀로 된 반면 마도카만이 마녀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도카는 다른 마법소녀에 비해 절망을 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도카는 모든 것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도카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지는 않는다.

 

결국 마도카는 자기 자신 이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심을 가진 존재다. 마도카와 달리 다른 마법소녀처럼 남을 위한다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다는 것을 단지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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