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인 <Revolution No.3>를 읽으면 웃음과 흥미가 유발되는 작품이다. 좀비스라고 불리는 삼류 고등학교 불량아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우리 사회의 일면의 모순을 불랙코미디적 요소를 보여준다. 진짜 옳고 그른 것은 단순히 겉이 아니라 그 안의 진실성이다. 그런 소설을 쓰는 가네시로가 반드시 유쾌한 글만 적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슴이 시리고 아쉬움만 전해오는 글을 적는다. 우연히 아는 동생 녀석에게 소개받은 소설 <연애소설>, 내가 알던 가네시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기본적인 그의 작품세계관의 맥락은 많이 연계되어 있었다.


가네시로의 작품이라 하여 재미를 기대한 사람이나, 그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그 흐름에 기대는 사람 모두 가네시로의 작품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소설 제목이 <연애소설>이니 이 책은 분명 연애에 대한 내용을 적고 있다. 나는 연애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지 좋고 아름다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애 운이 없는지 내 자신이 부족한지 모르나, 그저 씁쓸한 기분도 맛 봤을 뿐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날라 가거나 시작하려고 할 때 뒤통수를 맞던지 또는 잘 될 것 같았는데도 불발탄으로 그친 적이 많다.


게다가 성격이나 가치관도 일반인과 많이 동 떨어져 있다. 예전에 어느 사람에게 내 자신을 두고 "Little Comedian"이라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Rialto 밴드에 정규앨범이 아니 싱글앨범이 실린 곡으로 차분한 모던 락으로 노래를 듣는 순간, 뭔가 어눌하고 답답한 기분이 전해온다. 아무런 성과 없이 그저 노력하지만, 끝에는 스스로 체념해야 하는 Little Comedian처럼 내 자신이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정말 그런 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는 나만의 광대가 되었다.


연애, 그것은 사랑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이라 이야기해야할까? 말은 하기 쉬워도 인간의 감정을 쉽게 무너뜨리고 때로는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만든다. 가네시로의 <연애소설>에 나온 사랑이야기도 내가 느끼는 고독과 허무가 나온 것을 보았다. 주인공이 대학시절 옆에 동기이야기는 그야말로 끔찍한 고독과 허무다.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고, 최후에 사랑하던 여자도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준 여자를 만나 그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지 세상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이야기를 주인공 작가에게 말해주었다. <연애소설>이 일반적 연애소설과 다른 점은 죽음이란 세계를 항상 옆에 끼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연애소설”에선 주인공은 언제나 주변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두 번째인 “영원의 환”편의 주인공은 암을 선고받아 언제 죽을지 모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꽃”에서 주인공은 뇌질환으로 언제 지금 당장 죽을지 모를 운명이고, 그 주인공과 같이 드라이브를 떠난 변호사 도리고에는 암을 선고받은 초로의 남자였다.


모두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 앞에 있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이 죽기 전에 무엇이 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서 과연 글쎄 무엇일까?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라서 스피노자처럼 사과나무를 심으려 들판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결국 그 최종은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인간은 1번 태어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운명이다. 그 운명 안에서 어떻게 벗어나려 해도 답은 없다. 죽는 모습과 과정 그리고 시기는 달라도 죽고 나면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추모해주며, 그 사람들 마음에 내가 살아있다면,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사실 그 고통과 충격을 깊이 고민하는 것만으로 괴롭지만, 그보다 괴로운 것은 혼자 외롭게 고독과 허무 아래 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눈을 감는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연애소설>에선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이란 어떻게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거나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거나 느낄 수가 있다.


<연애소설>에서 사랑의 시작은 정말 우연이고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별의 슬픔과 죽음 역시 생각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만약 이런 운명 앞에 우리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혼자서는 되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면 안 될 것이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나는 그 사람을 왜 사랑하는가? 그 질문에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금방 사랑은 식어간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만큼 중요한 게 나는 왜 사랑하고 있는가이다. 아마 그 표현은 “꽃”편에서 가장 잘 보여준 것 같다. 가네시로 작가의 특유의 재미가 잘 나오지 않은 소설이라 해도 그의 인생가치관이 “꽃”편에 잘 나와 있다. 게이코는 남편과 28년 넘게 떨어져 살아왔지만, 남편이 살인범(그는 1970년대 일본에 살고 있는 사회적 약자 - 아마도 징용된 - 조선인의 후예였다)의 변호를 맡은 과정을 계속 찾아 정리하였다. 가난하고 소탈한 남편이나, 남편집안의 이야기인 '도리고에 가의 전설‘은 몇 번이나 들려 달라 했고, 그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남편의 할아버지는 관동대지진 때 억울하게 핍박받은 조선인과 중국인 친구를 변호하다가 얻어맞아 죽었다.


이에 반해 아내 게이코의 집안은 한국전쟁과 일본 대공업시기에 거부가 된 사람이다. 어울리지 않은 두 사람, 하지만 게이코가 남편 도리고에를 진정 사랑한 이유는 그만이 약한 자를 비웃지 않고 진정으로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바로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만남은 계단에서 떨어진 게이코를 보고 다정하게 감싸준 것처럼 게이코가 바라본 도리에고의 모습은 바로 다정함이다. 그 다정함은 게이코만이 아니라 ‘도리고에 가의 전설’처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내 자신의 이기심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거나(“연애소설”편), 아니라면 그 사람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각오가 있는지(“영원의 환”편) 아니라면 죽음만이 유일한 화해(“꽃”편)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꽃”편에 게이코는 남편과 죽은 아들의 묘비에 남긴 꽃은 물망초다. 물망초의 말뜻은 나를 기억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고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해주어 서로 마음이 아픈 일이 많더라도, 그것조차 넘을 수 있다면 멋진 사랑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비를 말하면 대부분 문관을 지망하던 사대부로 보겠지만, <논어사람을 말하다>에서 선비는 무관을 말하던 것이다.장기놀이하면서 왕을 지키는 작은 말 2개가 있는데그것이 바로 사()자이다즉 선비는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로부터 시작했다낮은 무장관료가 점차 문관으로 지향하면서 관료정치의 바탕이 된 게 선비였다삼국지를 읽어봐도 선비의 개념은 특별히 느끼지 못하나용맹한 무장은 단순히 용맹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우나 조운 같이 뛰어난 지혜를 가진 자들도 있었다.


선비의 기원인 무장들은 싸움의 기술만이 아니라 문장력과 정치력을 같이 동반해야 한 점이다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정치의 핵심은 양반 사대부로 이전되고양반은 무반과 문반을 지칭하는 말이다조선시대 대부분 공신들은 칼을 잡은 무관이었으나 점차 관직이나 행정기관에서 정치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많았다조선 시조 태종 이성계도 무장으로 시작했지만그 끝은 군주의 자리고군주는 나라는 다스리는 정치가이다정치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고인간의 도리를 위해서는 학문을 수행하는 것이 유학의 본질이다조선의 유학은 본래 유학자로 하여금 바른 정치를 선보여 백성의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 근본이다.


하지만 유학이 유교라는 정치적인 학문보단 성리학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요소로 강조되면서 공자의 유학은 변질되었다.공자의 가르침엔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농사를 짓거나 농사를 짓는 기술을 전파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는 것이었다올바른 정치란 인간이 서로 모여 사회를 구성하여 그들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유학의 본질이다군주가 살던 시대에 공자가 살았기에 군주정에 대한 기초로서 유학을 만들었겠지만군주의 정치는 바로 철인(哲人)정치즉 군주나 군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철학으로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서양사회에서도 마키아벨리 이전에 정치라는 것은 철학과 연계되어 있지만, <군주론이후 정치와 철학은 분리된다그러나 21세기에서도 정치는 철학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정치하는 자가 철학이 없다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의()가 없다는 것이고의가 없는 정치는 명분이 없기에 무의미한 행위로 그친다그리고 그 명분이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이다내가 유학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을 버리고조금 다른 시선을 볼 수 있던 점은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책을 접하면서부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치의 근본은 백성이고백성을 다스릴 계책을 얻고 싶거든 길거리의 농민에게 물어보라 했다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그 사람은 우리가 다스리기 위해선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이다결국 소통과 대화가 먼저 이루어지는 게 정치의 핵심이다다산 선생이 곡산군수로 부임하면서 길 앞에 어느 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남정은 이계심이라 하여 마을관아에 반란을 든 용의자였다이계심이 다산 선생에게 나와 마을주민을 괴롭히는 조목을 설명하자 다산 선생은 이계심의 말을 받아주며오히려 이계심과 같은 사람이 많아야지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백성이 힘든 것을 지금으로 말하자면 힘이 약한 사람들의 입장을 말해주는 사람이 가장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다.유학의 근본이란 바로 다산 선생이 보여준 것처럼 사람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21세기에 기원전에 기록된 논어를 읽는 게 시대적 간극이 큰 것처럼 보이나그 바탕에는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옳다유학에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인()이다어질다는 의미를 가진 인이란 의를 실천하는 단어다어질다는 것은 무엇인가우리 인간은 자연적으로 매우 선한 존재이기도 하지만때로는 매우 악한 존재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과 동화되어 유유자적 살아가겠지만야만의 인간은 폭력과 무지로서 사람들을 대한다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처럼 제자 그러니깐 유학자가 가장 먼저 할 것은 사람을 모이게 한다그리고 그들을 편안하게 배부르게 해야 하고 나중에는 글을 배우게 해야 한다고 했다즉 인간의 최종완성은 문화적인 인간동물적으로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 이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인간이 가져야 할 도리로서 인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인간은 자신만 보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관계의 미학을 중시한다우리는 관계의 미학에서 내 가족만 챙기거나 또는 이익과 손실을 따져 친구를 사귄다물론 가족도 중요하고친구의 손익 관계도 중요하다하지만 내 가족이 소중하면 남의 가족도 소중하고친구의 관계에서 이익을 추가하는 것은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즐거움이다나를 알아봐주는 사람 하나 제대로 없다면 그것만큼 외롭고 쓸쓸한 일은 없다그래서 공자도 자신의 제자 안영이 죽을 때 그렇게 슬퍼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공자의 가르침이나 논어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자와 유학이 낯선 존재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보편적인 가치를 주고 있다단지 그 차이는 조금 더 예를 가지거나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자신의 밥은 초라하나 제사의 밥은 풍족히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지금이야 먹을 것이 풍부하나과거에 먹는 것이 부족한 시기에 배고픈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제사에 차려진 음식들은 귀신들이 먹는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의 입으로 들어간다그 많은 음식을 제사를 차린 제주가 다 먹을 수 없다자신의 집에 찾아온 친척과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제사문화의 특징은 단순히 허례허식만이 아니라 주변이웃에게 나눔과 베푸는 정을 주기 위해서이다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그래서 관계의 정치는 바로 그런 것이다하지만 이익을 기반으로 한 정치는 공자는 용서하지 않았다한국식 민주주의나 유교식 자본주의란 말은 공자가 강요한 적이 없다공자는 아버지는 아버지답게아들은 아들답게 해야 한다고 한다그러나 정치가란 무릇 백성에게 아버지와 같은 자이나아버지가 아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게 아버지의 도리는 아니다공자의 유학을 보고 한국식 민주주의를 마치 정치적 정의로 보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옛날 말에 임금은 하늘이 내리지만그 하늘은 백성이라 했다국가의 모든 시작점은 백성인 점에서 공자의 가르침 중에 이 말이 인상 깊다군주가 안보백성의 믿음경제 이 3가지에서 만약 먼저 버릴 게 무엇이냐에서 공자는 맨 먼저 안보를 택하고 다음으로 경제를 선택했다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안보와 경제를 주구 창창 외치는데정작 안보와 경제는 구멍만 나는 현실이다안보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복무를 하는 것은 국민이고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국민이나그 근본을 제대로 잡지 않고관료주의에 물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의 유학사상이라 하여 새로운 사상이나 정치이념이 들어와도 민심의 기우는 변하지 않는다제일 중요한 것은 정치이념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철학적 자세이기 때문이다공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광폭한 정치라고 했다가렴주구라는 말은 매우 잔혹했다조선후기 군역에 사내아이가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고 시아버지는 이미 죽어 백골이 되었는데도 군역에 올라가 세금을 내어야 했다다산 선생이 지은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는 부패한 관리가 판을 치는 나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글이다.


최근 국내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남자들이 결혼할 수 없고결혼해도 아이를 가질 수가 없어서 21세기형 애절양을 보여주고 있다자식을 놓은 자신의 남근을 원망하며 칼을 들어 그 남근을 도려낸 남정네자신의 남편의 남근을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낙네관아의 벽은 성문보다 높고 관아 문을 지키는 포졸은 염라대왕보다 더 무섭다공자가 보여주고 싶은 유학은 바로 이런 일을 없애기 위해서고아무리 부당한 현실이라도 잘못된 세상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공자의 유학이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모두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만든 것이다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이상보단 이익으로 돌아가고그럴수록 그들의 사상은 더욱 숭고한 가치를 보여준다논어가 비록 고전이라고 하나 그곳에 비수 같은 말이 여기저기 숨어 있다과거는 멀지 않은 미래와 같다는 말은 아마 이런 연유에서 나오는 것과 같았다인간의 과거를 보고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잘못된 관행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정치적 제도를 되돌려서 안 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다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반사교면을 삼기 위함이다그러나 그 인간의 도리를 아는 것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자신의 삶에 작은 실천이 큰 대의를 만드는 것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란 바로 작은 것부터 실천하여 커다란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쌩 2015-04-1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철학이 없이 통치만 하려드니 ,
정치가 효율성만 추구되고 권력의 시녀가 되는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4-14 22:28   좋아요 0 | URL
세월호 2주기가 모레이고, 다음달이 518항쟁 35주년이나 아직 발포명령자조차 잡아들이지 못하니, 정말 정치적 효율이 아니라 권력의 효율화만 되고 있습니다.
 

최근 핸드폰의 노후에 따라 새로운 핸드폰 하나를 구매했다. 핸드폰을 교체하면 반드시 거쳐야 할 작업이 기존 핸드폰을 정리하는 것이다. 기존 핸드폰에 있는 주소와 데이터를 새로운 단말기로 이전 후 초기화하여 최종 정리한다. 핸드폰 자료정리를 하려면 우리 일반인들이 할 수 없으니 자신이 구매한 단말기의 업체 서비스센터로 간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서비스센터 직원이 문제가 있다거나 서비스의 질을 따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장 보기가 불편하고 피곤한 감이 드는 것은 무조건 5점 만점에 5, 십점 만점에 십점 같은 평가제도다. 평가제도의 도입이 고객에 질 높은 서비스를 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필요 이상의 불편함과 부담감이 온다. 기본적으로 인성 쪽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손님이나 고객에게 큰 불편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게에 와서 행패부리는 유형도 다분하다. 핸드폰 단말기 교체하고 나가는 와중에 서비스센터 데스크에 앉아있는 안내원에게 괜히 트집잡는 아저씨를 보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떼를 쓰고 화를 내어도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오히려 시간을 지체시키고, 거기서 해결되지 않은 점에서 더 기분만 상할 뿐이다. 이런 모습에서 과연 서비스산업에서 고객의 눈에 맞추어 일을 하는 것은 맞겠지만, 그들은 필요 이상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것이다. 고객센터에 가면 행패부리는 인간은 정말 드문 케이스고, 특별히 업체의 실수가 아닌 이상 고객은 화를 내거나 쓸데없이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서비스평가를 요구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피곤한 일이다. 핸드폰 단말기를 교체하고 데이터 이송한 뒤에도 심지어 요금제 관련 변경으로 통신사 방문 때도 그렇다. 모두 직접 본사에서 확인전화가 오면 높은 점수를 달라는 것이다. 충분히 친절하게 업무를 했고, 그 업무에 대해 나는 불편함도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저 한 마디와 본사에서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은 무척 불편하다. 본사에서 오는 전화 한 통에 응답하는 시간은 30초 이내일 것이다. 30초에 목숨 걸 이유도 없고, 30초를 할애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다.

 

단지 그 30초의 통화에 각각 한 사람들의 평판이 결정되고, 그들은 고객의 확인전화 후에 희()는 없고 단지 비()만 올 뿐이다. 세상은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오로지 비만을 생각하고 업무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이 직업에 매개에 의해 하나의 평가대상이 되는 것은 도구로 되는 것과 같다. 직원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와 초조함, 고객에겐 불편함을 안겨주는 친절함은 조금 잘 못되어가는 우리 모습 같다.

 

게다가 고객에게 이런 평가를 강요하는 것도 고객에게도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고객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찾아와 그 목적에 대한 합리적인 결과를 평가하고 싶은 것이지, 자신을 응대하는 직원을 평가하고 싶어 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판결을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이루어진다. 감정노동이 이젠 새로운 노동문제로 볼 때이다. 감정노동에 육체적으로 변화가 없어 보이지는 않으나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어 생리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서비스센터직원과 손님의 시작은 인간과 인간이지 주인과 자본의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세상은 자본의 노예를 손님과 직원에게 강요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진중권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술이란 무엇인가?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예술적이야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막상 보통 사람들과 예술에 대해 논하는 순간, 그들이 말하는 예술에 대하여 논하는 순간 당황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예술이란 단지 세간의 흐름이나 조류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세간의 평가 역시 중요하나, 문제는 그 평가를 본인들이 정확히 인지하는지 혹은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두고 흔히 이렇게 말을 한다. “미술관에 가는 이유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기 위해서인지? 아니라면 그림이 걸린 벽을 보러 가기 위해서인지?”

 

예술 중에서 역사가 오래되고, 다양성이 넓은 미술은 더욱 그런 모순에 빠지게 된다. 가령 미술에 대한 평에서 지난 19~20세기는 혁명과 전쟁으로 세계가 요동치던 시기다.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 갔으며, 이들을 위해 많은 혁명가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21세기에 오면서 더 이상 세계를 바꾸려하는 혁명가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20세기 말 소비에트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진영으로 혁명가란 단어는 무색하게 만들었다. 물론 소비에트연방이 19172월과 10월 혁명에 의해 탄생했지만,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혁명은 실패한 것으로 돌아갔다.

 

오히려 혁명을 주장하던 볼셰비키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다.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흐름에 예술에 무슨 영향을 주는가에서 바로 이런 역사적 순간들이 예술을 탄생하게 만든다. 예술은 그 시대의 모습이고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 또는 그 현실에서 절망하는 비극에서 예술은 탄생하게 된다. 20세기 최고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경우 그는 평생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프랑스 공산당으로 활동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파시스트를 저항한 파블로를 두고 우리는 그를 배척하는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미술품은 대부호들의 수집품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예술이 어느새 시대정신과 저항의식이 반영된 세계가 아니라 상품으로 전략한 신세다. 이런 세계에 도래하면서 예술이란 무엇이고 그 예술을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은 우리 시대 대표적 예술가를 만나고 정리한 내용이다. 진중권 교수가 창비라디오에서 문화다방에 늘 새로운 게스트를 2회에 걸쳐 대화를 나누고 녹음을 한다. 평소 진보논객이나 정치적인 활동보단 문화평론가 및 미학자로서 이 책이 나온 것이다.

 

물론 문화평론이나 미학에서도 정치적인 요소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어떤 사회적 활동이 정치적이다. 심지어 내 자신이 정치에 관심 없다거나 혹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선전 역시 정치적인 발언이다. 문화를 파헤치기 위해 사회과학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필요하고, 미학을 한다는 것은 철학에 관여된다. 미학과 관련하여 공부한다면 미학 그 자체를 배우는 게 아니라 철학 관련 도서를 찾아보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 미학은 철학이란 칼로서 예술을 파헤쳐 보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에서 항상 갈등하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보거나 또는 그런 공간을 꿈꾸는 경우 예술을 창조하게 된다.

 

예술의 시작은 이 책에서 이외수 작가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따온 말처럼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예술을 우리 인간이 계속 추구하는 이유는 인간은 빵(식욕)과 고기(성욕)만으로 살아가기 없기 때문이다. 뭔가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잠재적 의식, 또는 지루함과 한가함의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시도, 이런 것들이 예술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물론 예술이라 하여 아름다운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기존의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려는 것에 대해 철저히 파괴하려는 반() 미학적인 아방가르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동일할 수 없고, 모든 인간은 목적이 정해진 어느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기준을 파괴하고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모더니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약자와 비주류의 이야기도 대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는 윤리성의 부재라는 한계점이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새로운 예술적 조류는 모더니즘 사조에 계몽주의적 정신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포스터모더니즘의 세계에서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예술이란 바로 그렇게 새로운 흐름을 찾아가거나 또는 그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지 유행이란 이름처럼 공장사출기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소통과 공감, 더 나아가 사유와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예술이란 것을 대중적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이상이어야 하는가이다. 대중적인 예술이 없다면 보통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흐름을 전해줄 수 없고, 예술이 너무 대중의 취향에 부합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문화적 상품에 불과하다. 게다가 예술가들은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원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생계를 마련해야 하는 노동자들이다.

 

생계의 기로에서 그들은 독특한 자신들의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대중의 기호로 넘어가면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예술을 만들 수 없기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대중의 세계에 나아가지 않으면 자신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현대에서 예술가들의 모습이다.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에서는 한국 대표 예술가 7인을 소개한다. 그 중에서 아는 얼굴도 있지만, 모르는 얼굴이 더 많을 것이다.

 

우선 사진으로 구본창, 건축으로 승효상, 배우로 문성근, 미술가로 임옥상, 소설가 이외수, 음악평론으로 강헌, 시각디자이너로 안상수, 미디어 아티스트로 박찬경이 있다. 내가 이중에서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건축가 승효상, 배우 문성근, 소설가 이외수, 음악평론 강헌이었다. 박찬경은 예전에 내가 보고 싶던 영화 <만신>의 감독이었다. 아마 일반인이라면 배우 문성근이나 소설가 이외수는 잘 알겠지만 그 외에의 인물은 모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자신의 한글프로그램을 실행하여 글꼴을 찾아보면 안상수라는 이름이 정확하게 나온다.

 

그런 점에서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을 읽는다면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하여도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은 어디서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냥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보단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그들이 무슨 의미로 만들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더 좋다. 알면 알수록 새로운 맛이 베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맛을 우리가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밥만 먹고, 잠만 자고, 일만 하고, 성행위만 하고 살아갈 수 없다. 생리적 동물성과 사회적 동물성으로 우리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문화에 대하여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문화를 즐기고 싶은데 막상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문화는 즐기기보단 오히려 낯선 세계처럼 다가올 것이다. 다양성이 존재하고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라면 우리는 늘 새로운 즐거움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 예술가라면 우리 역시 예술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도 좋다. 예술은 우리에게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것만큼 가까이 존재할 수 있는 문화양식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스틱 메모리즈>를 본다는 것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현재 인류의 수명은 대략 80세 이후로 증가했다. 인류의 생명이 증가한 만큼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등장한 인간형 사이보그 기프티어는 인간과 달리 수명이 94개월 정도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처음 태어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이고, 짧은 시간도 아니지만 그런다고 긴 시간도 아니다. 어중간한 수명시간에 기프티어를 구매한 인간은 난해한 입장이 놓인다.

 

기프티어는 외모와 인격, 설사 에너지가 되는 요소도 인간과 거의 유사하다. 인간이 아닌 자가 차와 과자를 먹는다는 것은 거의 인간과 같은 식문화를 가진 것과 같다. 그들은 인간과 같은 인격과 삶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에 비해 더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다. 우리 인간은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당장 삶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과 닮은 그 무엇인가를 보고, 그 대상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어디가 같으며 다를까?

 

기프티어의 모습을 보면, 인간 같이 생긴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움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보여주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에게 기프티어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된 것이다. 기프티어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그들은 인형과 같을 것이다. 인형이라 하여 가만히 멈추어진 인형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인형을 말이다. 이점에 대해 과거의 인형이 가진 존재성과 상당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주) 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생긴 것이 있다면 인간은 섬뜩한 느낌을 느낀다. 언캐니 효과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공각기동대>이다. 특히 2기 이노센스의 경우 섹스로이드의 움직임과 모습, 영화포스터에서 부서진 인형들은 언캐니의 섬뜩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거나 또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죽어있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언캐니한 요소들은 공각기동대 이후 변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핸드 메이드 메이> 같은 경우 사이보그 여성 메이가 주인공과 최후에 연인이 되는 것이나, <이브의 시간>에서는 인간과 기계인간의 공감대까지 등장한다. 특히 <이브의 시간>에서 남자주인공 리쿠오는 피아니스트로 등장하나, 어느 공연장에서 기계인간이 자신보다 더 깊고 훌륭한 연주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덕분에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없게 되고, 기계인간에 대한 알 수 없는 낯선 감정과 거부감이 들었다.

 

그 감정은 다시 자신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사미라는 여성형 기계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기계인간은 단지 기계라고 생각하는 리쿠오의 누나, 이에 반해 리쿠오는 사미에게 흥미를 가지면서 기계인간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언캐니한 대상을 언캐니하지 않게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극단적인 요소로 드러난다. 과거 순정물인 <쵸비츠>의 경우 인간과 기계인간의 사랑은 모호한 관계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면, <플라스틱 메모리즈>는 그 과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단지 조건은 기존의 기계인간들은 반영구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기계인간 상태에 따라 이성적 판단능력이 달라질 뿐이다. <플라스틱 메모리즈>는 기존의 기계인간과 다르게 신체적 능력이 월등하지 않고, 이성적 능력도 그 신체에 맞추어 잘 조절되어 있다. 프로그래밍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이기보단 그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활동한다. 기계인간은 수명이 보통 인간에 비해 다 짧지만, 그 존재 자체는 인간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고방식이 애니메이션에 보여주는 것인가? 우선 작품 1화만 보면 알겠지만, 기프티어를 수거하러 가는 고객의 집을 가면 알 수 있다. 회수요원이 고객의 집에 방문하면 그 집안의 가족들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 자녀가 없는 노부모 등과 같은 인간이다. 가족의 구성은 남녀의 결합과 더불어 자녀를 출산하면서 그 구성원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가족이란 관계가 현대로 갈수록 혈연적 관계가 점점 멀어지며, 커뮤니티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과 기프티어는 처음부터 가족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족적인 관계였다. 가족의 관계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의 대체는 인간의 입양보다 기프티어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 기프티어는 인간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편리한 관계로서 가족이다. 가족구성원을 형성하는 점에서 최근 일본이나 한국 모두 저출산 시대에서 자녀 없는 가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가족을 가지지 않은 것이 의도적인지 혹은 비의도적인지는 상황적으로 다르나,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기프티어의 존재란 인간은 어떤 삶을 받아 들이야 것이고, 결국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고, 혼자가 싫어도 누군가 있어도 다시 이별의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이별의 순간을 참을 수 없어 혼자만의 고립을 추구하면 인간은 고독과 허무에 의해 살아가는 원동력을 잃고 만다. 기프티어의 회수는 회수되는 기프티어 본인에게도 슬픔이고, 기프티어를 떠나보내는 가족 역시 슬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받아 들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으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은 자신을 두고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감정 없는 인간은 마치 인형 같다고 말한다. 인형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곁에 인형을 두는 인간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밟지 않았다면 인간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 슬픔을 느끼지 못한 것만큼 더 슬픔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주1)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구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