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메모리즈>를 본다는 것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현재 인류의 수명은 대략 80세 이후로 증가했다. 인류의 생명이 증가한 만큼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등장한 인간형 사이보그 기프티어는 인간과 달리 수명이 94개월 정도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처음 태어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이고, 짧은 시간도 아니지만 그런다고 긴 시간도 아니다. 어중간한 수명시간에 기프티어를 구매한 인간은 난해한 입장이 놓인다.

 

기프티어는 외모와 인격, 설사 에너지가 되는 요소도 인간과 거의 유사하다. 인간이 아닌 자가 차와 과자를 먹는다는 것은 거의 인간과 같은 식문화를 가진 것과 같다. 그들은 인간과 같은 인격과 삶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에 비해 더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다. 우리 인간은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당장 삶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과 닮은 그 무엇인가를 보고, 그 대상이 같으면서도 다르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어디가 같으며 다를까?

 

기프티어의 모습을 보면, 인간 같이 생긴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움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보여주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에게 기프티어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된 것이다. 기프티어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그들은 인형과 같을 것이다. 인형이라 하여 가만히 멈추어진 인형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인형을 말이다. 이점에 대해 과거의 인형이 가진 존재성과 상당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주) 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생긴 것이 있다면 인간은 섬뜩한 느낌을 느낀다. 언캐니 효과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공각기동대>이다. 특히 2기 이노센스의 경우 섹스로이드의 움직임과 모습, 영화포스터에서 부서진 인형들은 언캐니의 섬뜩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거나 또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죽어있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언캐니한 요소들은 공각기동대 이후 변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핸드 메이드 메이> 같은 경우 사이보그 여성 메이가 주인공과 최후에 연인이 되는 것이나, <이브의 시간>에서는 인간과 기계인간의 공감대까지 등장한다. 특히 <이브의 시간>에서 남자주인공 리쿠오는 피아니스트로 등장하나, 어느 공연장에서 기계인간이 자신보다 더 깊고 훌륭한 연주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덕분에 피아노를 제대로 칠 수 없게 되고, 기계인간에 대한 알 수 없는 낯선 감정과 거부감이 들었다.

 

그 감정은 다시 자신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사미라는 여성형 기계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기계인간은 단지 기계라고 생각하는 리쿠오의 누나, 이에 반해 리쿠오는 사미에게 흥미를 가지면서 기계인간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언캐니한 대상을 언캐니하지 않게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극단적인 요소로 드러난다. 과거 순정물인 <쵸비츠>의 경우 인간과 기계인간의 사랑은 모호한 관계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면, <플라스틱 메모리즈>는 그 과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단지 조건은 기존의 기계인간들은 반영구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기계인간 상태에 따라 이성적 판단능력이 달라질 뿐이다. <플라스틱 메모리즈>는 기존의 기계인간과 다르게 신체적 능력이 월등하지 않고, 이성적 능력도 그 신체에 맞추어 잘 조절되어 있다. 프로그래밍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이기보단 그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능동적으로 활동한다. 기계인간은 수명이 보통 인간에 비해 다 짧지만, 그 존재 자체는 인간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고방식이 애니메이션에 보여주는 것인가? 우선 작품 1화만 보면 알겠지만, 기프티어를 수거하러 가는 고객의 집을 가면 알 수 있다. 회수요원이 고객의 집에 방문하면 그 집안의 가족들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 자녀가 없는 노부모 등과 같은 인간이다. 가족의 구성은 남녀의 결합과 더불어 자녀를 출산하면서 그 구성원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가족이란 관계가 현대로 갈수록 혈연적 관계가 점점 멀어지며, 커뮤니티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과 기프티어는 처음부터 가족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족적인 관계였다. 가족의 관계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의 대체는 인간의 입양보다 기프티어라는 점에서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다. 기프티어는 인간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편리한 관계로서 가족이다. 가족구성원을 형성하는 점에서 최근 일본이나 한국 모두 저출산 시대에서 자녀 없는 가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가족을 가지지 않은 것이 의도적인지 혹은 비의도적인지는 상황적으로 다르나,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플라스틱 메모리즈>에서 기프티어의 존재란 인간은 어떤 삶을 받아 들이야 것이고, 결국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고, 혼자가 싫어도 누군가 있어도 다시 이별의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이별의 순간을 참을 수 없어 혼자만의 고립을 추구하면 인간은 고독과 허무에 의해 살아가는 원동력을 잃고 만다. 기프티어의 회수는 회수되는 기프티어 본인에게도 슬픔이고, 기프티어를 떠나보내는 가족 역시 슬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받아 들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으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은 자신을 두고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감정 없는 인간은 마치 인형 같다고 말한다. 인형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곁에 인형을 두는 인간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밟지 않았다면 인간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 슬픔을 느끼지 못한 것만큼 더 슬픔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주1)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구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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