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소를 두고 괴테는 그로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독일 최고 문학가이자 세계적인 인물인 괴테에게 루소도 그러하고,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세계적인 작가 톨스토이 역시 루소가 새겨진 동전을 목에 걸고 다녔다. 루소의 영향은 18세기 <신엘로이즈>로 여성들의 마을을 흔들었고, 19세기 혁명의 시대에서 <사회계약론>은 혁명가들의 복음서였고, 20세기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자본주의사회와 문명사회에 자연주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주고, 21세기에 <에밀>은 교육문제에 파국으로 닥친 한국사회에 많은 것을 주고 있다.

 

루소를 다시 읽는 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인간인 루소이지만, 그의 책에는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맞이한 미래보다 더 먼 미래를 향하여 루소는 눈을 돌린 것이다. 인간에 대한 문구에서 <사회계약론>의 이 구절은 너무 유명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는데,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실 그들보다 훨씬 더 노예가 되어 있다.” 물론 출판사마다 다루게 번역되어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롭다. 그러나 도처의 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노예로 되어 있다.” 등으로 말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이 구절은 인간의 관념세계를 확장시키는 혁명적인 문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루소가 살던 18세기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된 1762년은 프랑스에서 왕정사회였기 때문이다. 루이14세의 절대왕권의 선언과 그 이후 부르봉왕가는 왕족, 귀족,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 자체에는 모든 게 자연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으로 다른 하나는 정치적, 도덕적 불평등이다.

 

태어나는 인간은 아직 어떤 능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저 타인의 도움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약자다. 그런 인간이 정치적인 조건에 따라 성장하여 그가 어른이 되면 불평등한 세계의 일원으로 완성된다. 불평등의 세계에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인간에게 악덕을 주는 오만한 학문과 불필요한 도덕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처럼 인간의 문명과 기술은 이미 인간에게 물질적 혜택을 주는 것 이상으로 불행과 고통을 선사한 것이다. 진보적인 사상가이면서도 반진보적인 가치를 가진 루소는 인간의 역설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살아가야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라면 누구라도 불평등하게 서로를 구속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라는 조직은 그저 우리 인간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야 할 계약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회라는 공간은 우리가 계약에 의해 존재된 것일까?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남김없이 고발한다. 마지막에 갈수록 그것은 자본에 대해 비판한다.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18세기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산업혁명과 동시에 가속화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소수의 거부인 부르주아와 그 밑에서 일하던 농민과 노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루소는 마르크스 시대 사람이 아니기에 자본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중심으로 삼지 않았으나, 루소 역시 자본가 존재에 대한 경제적 착취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 자본에 의해 혹사당하고 억압당하는 가난한 프랑스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루소가 자연적 인간을 추구한 이유는 문명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그 자연에 살고 있는 주민을 내모는 인클로저 현상을 목격한다. 빵을 만들 사람들이 빵을 구하러 도시에 가나, 그들에게 오는 것은 비참한 현실과 절망이다. 자연에서 살아가면 인간은 산속의 열매를 따먹고, 강가의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도시에서 심각한 노동착취에 의해 고생하고, 더러운 주거환경에 병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자연의 공간이 공유지에서 사유화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내쫓기게 된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도시로 가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저 거지처럼 구걸하거나 좀도둑처럼 물건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밖에 없다. 아니라면 아침부터 밤늦게 열악한 환경에서 심신을 소모하는 과격한 노동에 시달린다. 자연인으로 태어나 자연에서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이유는 적어도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억압도 없으며, 정신적으로 영혼에 병이 들지 않는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연인들을 볼 때 아마 볼테르와 많은 프랑스 사람들은 사람이 어찌 숲 속의 곰하고 같이 살 수 있을까라고 조소했을 것이다.

 

루소가 그것을 점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가 본 도시의 삶이란 척박했고, 민중의 삶은 고달픔으로 가득하여 서로의 이기심을 위해 불속에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 같았다. 숲 속에 사는 곰이 될 수 없고, 농사만 짓고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대 그리스사회는 이른바 폴리스를 형성하여 살았다. 폴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주인이 되어 결정하고 의결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시민들의 가치를 공공의 이익에 반영하여 그 의지를 일반의지 혹은 보편적의지로 삼은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바로 그런 의지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고, 그것으로 정치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책이다.

 

루소 이전에 법철학 서적이 있었지만, 귀족이나 왕족 중심이었지 일반 민중에게 법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 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초시라고 볼 수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은 21세기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대혁명을 만들고,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념적 가치가 되었다고 하나, 막상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잘은 모른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에서 지배하면서 다시 루소의 사상을 돌아보면 루소의 가치와 많이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팔정도로 너무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 오늘 우리 주변에 자신의 몸을 비참한 운명에 파는 인간이 너무 많다. 루소가 바라본 과거와 지금 내가 바라본 현실에 차이점은 그다지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공공성에 대한 의지성이 필요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에게 주권을 절대로 누군가에게 줄 수 없고, 파괴될 수 없으면, 인간의 주권이 파괴되는 것은 그 존재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21세기 민주주의에서 주권에 대한 의식에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 체계에서 직접이 아닌 간접적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루소는 당파의 존재는 필요할지 모르나. 그 파당의 이익에 대하여 정치적 입지가 갈리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이 일어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마치 성경 이상으로 여기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도 비극이 일어났다. 단순히 누군가 소수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계약론>을 읽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성에 대한 보편적 의지를 담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모두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려 훌륭하게 만들어간 나라는 거의 없었다. 루소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의론>을 읽은 후 <만민법>이란 책을 읽어보았다. 만민이란 시민도 되고 인민도 되는 책이다. 어느 특정지역에 살아가는 인간이기보단 만민은 전 세계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권하는 게 롤즈의 철학이다. 물론 롤즈의 철학이 칸트로부터 시작하고, 칸트는 루소의 영향을 받는다. 21세기가 와도 여전히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고, 세계와 개인도 존재한다. 그 사이에 인간은 타인과의 정치적 입장에서 늘 선택을 한다. 그러나 좋은 선택보단 잘못된 선택이 많을 때가 많다.

 

루소 이후 민주주의 철학은 발달하고, 사회적으로 발전을 계속해도 그 정치적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루소의 책은 18세기는 분명하나, 21세기에 읽어봐도 그렇게 부족하거나 시대적인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문명적 혜택은 분명 차이가 나겠지만, 인간 본래 존재적인 가치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 과거에 만든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는 이어져야갈 필요가 있다. 보편적 사고가 멈춘 곳에선 어느 모략을 가진 자가 나타나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만드는 과정과 방식보단 그것을 파괴하는 전제군주와 정치제이다. 루소의 책을 읽으면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이상적인 방향보다 오히려 그렇지 못할 경우 나타날 비참한 현실이 더 인상적이다. 모든 국민이 복종할 것은 오로지 법이지만, 독재자는 법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법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과 그 무리가 나타날 경우 시민들의 권리는 축소되어, 자유의 의지가 박탈된다. 전제군주라는 그 자체는 21세기에 거의 사라져도, 거기에 버금가는 자들은 많다. 그런 전제군주와 같은 사람이 판을 치는 곳에서 인간의 자유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사슬의 고리는 결국 자신의 원하지 않아도 묶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슬이 묶이게 되는 동기는 제공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라는 공간은 인간의 자연에서 빼앗아 온 곳을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인간의 공간인 문화라는 세계는 우리 인간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과 더불어 경쟁심을 만들었고, 문화 그 자체는 거대한 서사가 되어 주변의 작은 이야기까지 억압하고 무시하는 현 상태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그 개인으로서 자신의 세상이 존재하고, 그들만이 공간과 삶이 존재한다. 우리 삶에서 예술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면 참으로 결정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나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이상하고 어려운 말이다.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낯설어 보이는 대상으로 여기거나 때로는 뭔가 있어 보이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모두 정답인 셈이다.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예술이란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본다고 이야기한다.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고, 미학이란 예술을 철학의 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술이 쉬우면서도 왜 어려운가? 아마도 이중텐의 책처럼 예술은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 일상이 있기에 충분히 옆에 있는 것이고, 철학적 사유라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의존성으로 머나먼 세계로도 보일 수 있다.

 

예술에서 대부분 미술을 보면 예술가들의 관념적 세계를 표현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있는 공간도 시간도 존재도 없는 대상을 우리 눈앞에서 물질적 존재로 표현하여 전시한다. 그러면 전시라는 그 공간적 개념이 배경이 되어, 시간적으로 전시기간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본주의 경제시대에 도래하면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다. 우리에게 예술이란 개념이 생긴 시기가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밀접하다. 신이란 존재는 시간과 공간 그 밖의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영역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을 측정하는 수단이 되고, 신의 영역인 모든 세계에서 시간은 인간의 세계로 분리되었다.

 

시간의 척도는 결국 인간에게 하나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얼마나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지 그렇지 못하는지 말이다. 이런 세계에서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을 이해하고 혹은 예술가들의 삶을 이해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예술인은 낯선 존재이면서도 낯설지 말아야 할 존재다. 관찰하는 존재는 그 관찰되어야 할 세상에 반 정도 다리를 걸쳐야 한다. 너무 안에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사회가 움직이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대적 급류에 휘말려 자신의 나침판을 잃어버린다.

 

이와 다르게 밖에만 머물게 된다면 민중의 삶을 바라볼 수 없다. 예술인들이 과거 왕정사회에서는 직업적으로 예술인이 아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신과 왕을 위해 고용된 기술자에 불과하다. 위대한 신, 그리고 그 신에게 절대적 지위를 보장받은 왕, 왕권신수설과 절대주의시대에 만들어진 예술이란 바로 숭고와 경배로서 등장한다. 그것을 만든 자들은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하거나 신성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역사가로서 혹은 주술사로서 활동했다고 말하는 게 타당할지 모른다.

 

거대서사라는 계급적 이데올로기에 반영된 역사는 결국 그 주변에 있던 많은 농민, 상인, 노예 등과 같은 하부계층을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인간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는 존재다. 내가 이름을 남겨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비록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분명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죽어갈 것이다. 물론 장 자크 루소의 <에밀>처럼 농촌에 살아가는 순박한 농민들은 자연인으로 분류된다. 그들은 문명의 도시와 다르게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하고 삶도 죽음도 지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과연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문명의 인간은 다를 것이다. 그들은 자연인처럼 살아갈 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처럼 자신의 사회적 인정으로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행복의 추구에서 식욕, 수면욕, 성욕을 지나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누구에게 인정받는 삶,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아니라면 플라톤의 <향연>처럼 철학을 하여 지혜를 사랑하는 삶이라면 어떤 것인가? 이렇듯 우리는 우리의 삶에 결정할 수 있는 것조차 난해한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을 바라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비아트 5번째 강연에서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의 김경화 작가로 통해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미 시대는 거대서사에서 탈피하여 탈근대적인 사회로 진입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탈근대적 시대에 우리는 거대서사적인 요소 전부를 버릴 수는 없다. 그런다고 거대서사에 가려진 작은 이야기, 그리고 희생된 우리의 과거를 모두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다. 늘 내가 생각하지만, 인간의 삶은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나 이성보단 순간 자신의 마음에서 움트는 선택이 자신을 움직인다.

 

분명 논리적으로 바르지도 않고 연결되지 않아도 비이성적인 행위나 상황에 몰리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논리란 단지 자신의 무의식적 혹은 감정적 에너지를 합리화하게 해주는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현실에 드러난다. 인간의 공간적 세계에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여 만든 것도 많으나 그렇지 못한 게 많다. 특히 부산이란 도시가 그렇다. 부산은 한국전쟁이란 동족상잔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다. 덕분에 부산의 군사기지는 항만, 철도, 공항 등 다양한 시설이 배치되어 있으며, 한국군만 아니라 미군기지가 계속 배치되어 있다.

 

이런 도시적 기능에서 부산 서면에 위치한 하야리야부대 이전은 아주 역사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강연자가 주장하듯이 100년 가까이 그곳은 한국의 땅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땅이 되어야 했다. 침략자에 의해 나라를 잃고, 침략자가 머물던 자리는 다른 강자가 왔다. 환경단체와 각종 시민단체의 이야기도 많고 탈도 많은 그 부대, 우리의 의지가 아닌 우연에 의한 상황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 문제는 그 도시가 변해가면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우리의 기억 속에서 다시 꺼내어 그 의미를 찾아가야 하나,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역사와 아픔을 돈으로서 은폐시키려했다.

 

하야리야부대는 부산시민공원으로 하여 꽃과 나무가 가득하다. 넓은 부지는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휴식공간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 공간적 의의는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퍼포먼스로서 그 부대에 100여개의 위패를 모신 후 과거시대의 아픔을 되새기는 것은 중요하다. 부산의 도시적 정체성을 묻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발자국을 찾아 가는 게 옳다. 부산의 도시적 기능은 세종시나 혹은 다른 신도시처럼 계획성이 아닌 무계획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낡은 판자촌부터 시작하여 콘크리트 도시로 변하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과 아픔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중의 이야기란 거대서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난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 삶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부산 초량 근대식 최초병원인 벽제병원이 있다. 그 옆에 있던 창고가 시에서 구매하려 했으나, 땅주인은 상품적 가치를 위해 그 건물을 철거하고 대신 대형마트가 들어왔다. 도시의 기능에서 가장 많이 변화하게 만드는 것은 부동산시장이다. 부동산투기는 그야말로 최악의 도시파괴자이다. 어지러운 미로처럼 골목길이 있는 마을은 도시개발사업과 산업단지개발로 형체조차 남길 수 없다. 공간의 상실이란 그 공간을 향유하던 사람들에게 기억과 추억을 부수는 것과 같다. 공간이 없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는 시간적 개념조차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을 살아가는 주민은 자신의 터전과 삶을 잃게 만드는 슬픔으로 이어진다. 부산 동광동, 거긴 원래 피난 이후 근대화시절 인쇄소로 활발히 활동되는 곳이다. 최근 대형 백화점의 입주와 주변지역의 급격한 변화, 대규모자본이 주변 상권을 장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곳이다. 우리의 이야기란 바로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점점 자본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광고와 드라마로 이끌려간다. 우리가 자본주의시대로 오면서 가장 변한 것은 이웃과의 소통이다.

 

이웃과 소통을 하는 것은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서로와 같이 즐기면서 살아가는 원하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의 단절, 분리된 자아, 그리고 거대한 시장화, 이 모든 게 우리 삶에서 많은 것을 주기보단 그 이상을 가져간다. 레드오션으로 강력한 제로섬인 한국 사회는 포화되어 그 방향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또따또가에서 내가 마음에 든 기획은 못 쓰는 물건을 재이용하는 방안이다. 환경오염은 자본주의 경제체계와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상품의 소비는 필요한 것은 맞으나 필요이상으로 소비하면 폐기물이 발생된다. 폐기물처리에 많은 인력과 부가적인 에너지와 자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을 최종 처리하는 과정에서 2차적인 오염물질이 발생된다.

 

필요 없는 것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우리 주변 환경은 더욱 피폐해진다.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을 재활용하는 것은 환경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우리가 상품시장에 길들여진 정신을 새롭게 보여준다. 단지 우리의 필요수단으로 물건이 소비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 사회성을 경제적 교환이나 노동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모든 것을 도구적 가치로 접하면 인간 역시 도구로 여긴다. 도구와 인간은 다를지 모르나, 도구에는 인간의 노동이 반영되어 있다. 노동에 의해 태어난 도구들이 그 노동한 사람들과 별개의 존재로서 소비자에게 간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우리 삶에서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이웃이다.

 

물론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장이 활성화가 되지 않아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블루오션으로 문화적 사업이 이렇게 필요한 것이다. 폐기물재활용 가치는 환경적으로 중요하나 사회적으로 중요하다. 이차적으로 다시 상품으로 활용하거나 교육, 사회, 경제적 가치를 보여줄 수 있다. 쓰레기를 모아 만든 예술작품도 제법 많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 일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예술로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술이란 바로 삶에 대한 탐구와 관찰 그리고 새로운 시도이다. 사용하지 않은 집에 콘크리트로 만든 비둘기와 토끼를 1년 동안 방치한 장면에서 그 동물은 동물로서 보여주기보단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자신의 장소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나 여전히 힘든 삶을 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장면은 장수하는 동물을 그린 12장생도와 책 걸이로 삼은 문방도구이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서구화로 인해 우리 전통문화를 등한시했다. 우리 전통문화를 마치 미개하고 미신의 세계로 매도했다. 서구의 문화도 이제 동양과 제3세계를 다르게 보고 있다. 여수에서 열린 엑스포대회에서 각국의 민족이 와서 다양한 전시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개최되는 축제나 행사에서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선보이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흐름에 새롭게 우리 문화를 도출하기보단 여전히 홀대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찾아가 그것을 인정하기보단 부정하고 은폐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더불어 성장했지만, 자본주의로 인해 우리의 모습은 없어졌다. 작가님이 말하는 문화적 행위는 우리사회에 원류에 있던 공동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공동체로 만든 여러 가지 작품이 예술이 되고, 우리 삶의 기억이 되는 것이다. 부산의 정체성을 찾자는 슬로건이 부산시청과 문화재단에서 내걸고 있으나, 그것은 관공서의 행정정책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인식을 계속 바꾸어야 그 가치가 실현된다. 작은 시작이 큰 변화를 줄 수 있다고 하는 말에는 크게 동의는 못하겠다. 그런 작은 시작 그 자체도 어려운 것도 있고, 시작되는 과정에서 소멸하는 경우도 많다.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작은 시작이 큰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시작들이 모여 큰 변화로 뭉치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과 함께 : 이승편 상.하 세트 - 전2권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과 함께> 이승편은 저승편을 이어 나온 작품이다. 저승편에서는 저승차사가 죽은 자를 불러오는 것과 저승에 가서 인간이 심판 받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와 달리 이승편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주이다. 옷과 집이 없으면 추위와 더위 그리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먹는 것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의식주의 해결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다. 만약 그것이 곤란한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신과 함께> 이승편은 상당히 씁쓸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은폐되거나 또는 조작되는 우리의 이웃을 볼 수 있다. 최근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전쟁 후 산업화 시대에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노년층으로 전략했다. 그들이 일할 때 농촌에서 나와 모두 도시로 이주했고, 전쟁 때 특히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도 많다. 그들은 이제 20세기 중반의 아픔을 겪은 후에 가정을 만들고 행복하게 살려고 했으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않다. 누구에게는 행복이 간다면 어느 누군가는 그 이상의 불행의 악운이 따른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차사 외에 살아있는 인간으로 서울 산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과 손자다. 노인은 연세가 오래되어 거동이 사실 불편하나, 종이폐지를 주워 하루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손자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가난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깐 손자의 아버지가 되는 자는 병으로 죽고, 그의 아내인 어머니는 밖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으며,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노환으로 죽었다. 할머니가 눈을 감을 때 아마 제대로 눈조차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부모보다 먼저 자식이 죽는 게 엄청난 불효라고 한다. 그것만큼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슬픔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의가 아닌 우연의 사건이므로 죽는 자나 살아가는 자 모두 비극이 된다. 인간의 인생은 과연 행복인가 불행인가? 가끔 생각하면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절망은 우리 인생에서 항상 반복되어 나타는 현상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도대체 내가 살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좌절되어 존재성마저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승편에서 아마 그런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같다. 가진 것 없이 가난하고, 매일 생계에 고민하는데, 몸은 이미 병들어 앞으로 살아갈 날조차도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을 말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도 응원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던 자였다. 인간이 무속신이 되어 그들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물론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나는 신이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신이란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관찰만 하는 존재, 즉 이신론(理神論)적인 가치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같은 경우 거대한 자연의 힘이 신과 같은 힘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나 각종 자연 파괴로 인해 인간은 이상기상현상에 재앙을 당하고, 공기와 물이 오염되어 인간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분명 우리 한국인은 자신이 사는 공간과 시간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새로운 집에 이주하거나 또는 자동차를 구매하면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음식물을 올린 제단을 앞에 나두고 절을 하여 앞으로 무사태평과 안전을 기원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행복한 일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단지 그렇게 더욱 간절히 자신이 바라는 것을 더욱 공고하게 하여 스스로의 암시를 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무생물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있는 나무도 베어내면 목재가 될 뿐이고, 돌과 시멘트, 각종 건축자재는 생명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집에 조상신이 온다거나 또는 가택을 지키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집터를 지키는 성주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등이 말이다. 우리 집은 신들이 지키므로 안전하다고 여긴 것이다. 아마 그것은 지금의 건축문화처럼 대규모자본이 대량생산 대량판매로서 가옥을 구축하는 게 아니라 모두 자기 손으로 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혹은 주변 사람들이 모여 집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의지가 집에 반영되어 있다. 집에 신이 거주하는 이유는 집에 사는 인간들이 집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집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신과 함께> 이승편은 가택신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조왕신, 성주신, 측신이 거주하는 한 주택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저승차사와 겨루고, 살아있는 철거업체 업주와 싸운다. 할아버지가 연로하여 이제 곧 강림도령에게 호명당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손자가 입학하여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가택신의 모습은 안쓰럽고 애처롭다. 이승의 신 가택신과 저승의 신 차사에서 직급은 가택신이 높다. 그러나 가택신들은 힘이 약하다. 저승과 이승을 다스리던 대별왕 소별왕 형제에서 대별왕은 공정하나, 소별은 공정하지 못하고 간사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이승을 통치하지 못해 이승의 세계는 언제나 불행과 슬픔이 넘치는 것이다. 늙은 할아버지고 고생하여 겨우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나, 아파트 재건축 투기열풍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강제로 토지를 매입당해 집이 철거당하니 말이다.

 

이 가난한 마을에는 유독 늙은 노인이 많았다. 노인의 친구는 오락실을 운영하던 주인이나, 자녀들이 제때 찾아와 돌봐주지 않아 혼자 외롭게 병과 굶주림에서 고독사 하였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게 노인들의 죽음이다. 예전 시대에는 노인이 죽으면 그 집에서 모든 장례절차를 밟았고, 시신도 집에서 모신 후 매장을 하였다. 이제는 시신은 병원영안실에 모신 후 화장을 한다. 하지만 가족도 없거나 제대로 봐주지 못할 경우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다. 죽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아마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은 점이다. 살아있었다는 그 자체도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철거업체에도 가난한 청춘이 등장한다. 가끔 용역업체에 등록금과 생계수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본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보단 현실의 상황에 이끌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약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면 후에 엄청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평소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언젠가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신과 함께>에서는 그런 한국의 민간신앙 요소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만큼 한국사회의 어두운 모습이 짙게 베여 있다는 점이다. <신과 함께> 전체를 읽으면 현실이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승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장담은 못하나, 만약 있다면 대부분 거기서 살아있을 때 저지른 죄 이상으로 벌을 받을 것이다. 물론 저승조차 없으면 불가능하고, 후대에서도 과거의 인물도 다른 식으로 포장이 가능하다. 힘없이 억압받는 입장이 놓인 일반 서민들에게 현실이 오히려 수라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과 함께>는 다소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승편에서 보이는 철저한 현실의 고통은 왠지 모르게 마음을 쓰리게 만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8-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8-10 09:01   좋아요 0 | URL
아! 네 감사합니다
 
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신과 함께>를 처음 접한 것은 신화편이었다. 신화편이 저승편과 이승편보단 먼저 앞의 세계를 다룬 것이고, 각 신마다의 이야기를 다룬 본풀이로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신과 함께>는 저승편부터 먼저 웹툰으로 연재되어 이승편과 신화편으로 연재되었다. 처음 신화편을 보면서 차사전이 비중이 높았는데, 차사의 비중이 높은 이유가 아마 이승편과 신화편에 등장하는 인물이 일직차사 해원맥, 월직차사 이덕춘, 강림도령이기 때문이다. 가끔 전설의 고향 내지 귀신을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를 보면 저승사자들의 복장은 과거 조선시대 선비들이 입는 의상과 흡사하다. 물론 얼굴은 혈색이 없으며 눈매는 날카로우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신과 함께> 저승편에 등장하는 저승사자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차사복장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검정색 양복을 입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화란 원래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작가 주호민이 개인적으로 상상력을 동원했어도 그것은 현대적인 인식과 상황에 근거하여 만든 것이다. 저승 가는 길은 보통 망자가 걸어가거나 혹은 배를 타고 간다. 그러나 현대의 망자들은 지하철을 타고 저승으로 향한다. 재미있는 설정은 지하철 이름이 바리데기호라는 점이다. 바리공주, 바리공덕이라고 하는 바리는 원래 부모에게 버림받은 공주다. 그녀는 저승에 가서 고난을 마친 후 자신을 버린 부모의 목숨을 살린다.

 

그리고 죽은 인간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무속신이 된 것이다. 바리공주 신화를 보면 불교적인 색이 강한 반면, <신과 함께>에서는 바리공주의 본풀이가 나오지 않는다. 바리공주보단 조선시대의 냄새가 강한 차사들의 활약이 높았다. 차사들의 이야기는 물론 <신화편>에 등장하나 그들의 복장과 신분을 보면 충분히 조선시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원맥이 죽게 만든 것을 토포사로 부임한 장군으로, 토포사란 조선시대 산적을 잡기 위해 만든 관직이다. 무속신화가 시대를 지나면서 계속 바뀌거나 추가로 반영되는 특징이 있다.

 

해원맥의 모습도 그런 것처럼 다른 존재도 역시 그렇다. 조선시대의 복장의 차사가 아니라 현대적인 모습의 차사도 역시 가능한 설정이다. 저승편에서 소개되는 것은 어느 한 기업에서 일하는 회사원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병으로 죽자 저승에 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진 것도 없고 가난하며, 직장에서 고생만 하다 저승으로 오자, 그의 심판이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염라대왕을 비롯한 명부시왕이 망자에 대해 재판을 하고, 그의 죄질에 따라 지옥에서 벌을 받게 하거나 또는 윤회되거나 천국으로 영원히 가게 되는 것을 결정한다.

 

재판과정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남자는 자신의 재판과정에 따라 각종 지옥을 구경하고, 지옥에서 벌을 받는 인간을 보게 된다.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짓을 한 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속이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이승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지옥에 남는 자리가 부족하고, 지옥 내에서 사람들은 다툰다. 사람들이 가진 이기심과 비인간성은 지옥에 와서 벌을 받아도 뉘우치지 못한 것이다. 이를 본 회사원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 대해 돌이켜보면서 재판과정을 임한다.

 

그는 그렇게 착하게 산 것도 아니나, 그렇게 나쁘게 산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힘없이 살아온 서민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최종선고는 지옥의 벌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이다. 살아생전 속기만 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한 그에게 왠지 모를 연민과 공감대가 느껴졌다. 저승에 와도 다른 사람도 있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 자신이 모은 돈을 남에게 베푼 할머니나, 이제 갓 태어났는데 저승으로 가는 아기, 남에게 거짓말만 한 정치인까지 나온다. 저승에 오는 사람들의 과거는 모두 다르지만, 저승의 심판은 공정했다. 인간의 삶에서 공정한 순간이 언제 제대로 있었던가?

 

공정함의 척도는 그 사람에게 얼마나 권력이 있는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저승편>에서 회사원 이야기가 진행될 때 한편으로 차사들의 활약이 나온다. 차사들이 망자를 저승으로 이송해야 하는데, 어느 귀신 하나가 거기서 탈출한다. 그 자는 총기사고로 죽은 군인이었다. 매년 군대에서는 총기 및 기타 사고로 죽는 군인이 많으며, 그들의 죽음에서 원인조차 규명되지 않은 의문사도 많다. 이번 <저승편>도 마찬가지로 휴가를 앞둔 말년 병장의 죽음은 그냥 단순히 총기사고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고의적인 방치로 인한 타살로 이어졌다.

 

분명히 응급처치와 적절한 대응만 있었으면 살릴 수 있었지만, 지휘관의 진급과 부대가 소란스러운 것을 막기 위해 억지로 죽음을 위장한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웨툰이나 만화에 나올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과거 군사정권 시절 많은 군의문사가 있었으며, 아직도 그 원인이 판명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심지어 시체도 장례식을 치루지 못한 채 꽁꽁 얼어붙은 채 영안실에서 영혼의 명복조차 찾아가지 못했다. <신과 함께> 저승편에서 등장하는 망자들은 현실에서 고난을 받거나 억울하게 죽은 자가 중심이다.

 

차사들은 그들을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복수를 하지 못했다. 대신 강림은 병장의 죽음을 보고 분노하여 그 병장을 죽게 만든 지휘관이 저승에 오면 중벌에 처해지도록 주문을 건다. 현세는 공정하지 못하기에 그 죄 값을 저승에서 확실히 받고자 하는 것이다. 저승세계도 나름 현실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과거 삼도천을 지나던 경로는 3가지로 각 경로마다 특징이 있었지만, 하천정비사업 이후 하천이 직선화하여 물의 유속이 빨라졌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면서 강물의 흐름을 보니 마치 4대강 사업을 하던 것에 대한 풍자도 보였다.

 

<신과 함께>에서 등장하는 차사들과 신들은 인간이 살아생전 부와 명예를 누리던 자들의 편이 아니라 그 아래서 핍박받고 고통 받던 자들의 편이다. 거기에 어려운 이웃을 돕던 사람은 저승의 신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우를 받는다. 진짜 인간이 죽으면 사후세계인 저승으로 가는지 안 가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이승의 세계에 살면서 너무 부조리하고 억울한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저승에서 명부시왕의 재판인 걸까? 저승의 이야기를 다루는 <신과 함께> 저승편을 완독할 순간, 씁쓸한 감정을 느낀다. 착하게 사는 게 정말 바보 같은 짓일까? 아니면 정말 옳다고 여기고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5-08-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만화 왜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학습만화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05 15:20   좋아요 0 | URL
재미보단 왠지 모를 시대적인 감정이 녹아있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개미처럼 일하고, 술에 찌들린 남자가 죽는 최후란..
한편으로 보면 재미보단 그냥 일생학습만화인듯

만화애니비평 2015-08-05 15:40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저는 8월14일 부천에 갑니다.
부천에 만화축제 세미나 듣고 그날 만화영상진흥원에서 일하는 분과 저녁일정이 있고
나머지 일정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있는데, 아마 저는 월요일 정도 내려가려 합니다.
토요일에 아는 동생놈과 맥주와 감자튀김하자 했지만, 만약
곰곰발님이 생각나시면 어떻습니까? 다음주말?
 

 

1. 들어가면서

19세기 서구사회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경제의 성장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 등 다양한 문명을 발전해왔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서구문명은 팽창하게 되면서 기존의 서양사회가 아닌 동양을 비롯한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서구사회의 문명은 합리주의를 토대로 정치적 이념과 사회경제적 요소들을 비서구권에 적용시키려 했다그 과정에서 서구는 기존 동양문화가 서구문명보다 우월하지 못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탄생하게 되었다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의 관점은 동양사회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체계적인 요소가 부족하므로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겼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 서구에 비해 미개하고 열등하므로서구인들은 동양인들을 계몽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이것은 서구사회가 동양을 침략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서구의 침략은 기존 영토노동력자원뿐만 아니라 동양사회의 문화까지 침범했다동양문화에서 다양한 문화에서 가장 심하게 훼손당하는 것은 종교 내지 신앙이었다서구사회의 지배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동양권에 대하여 근대화가 진행되었고그 결과 기존 동양사회에서 전통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했다한국사회 역시 20세기에 도래하면서 전통문화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21세기가 도래하면서 서구사회화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 세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이 도래하면서 기존 서구사회의 편견과 억압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동양문화권 및 제3세계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世界化)라는 슬로건은 획일화된 국가의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유하게 되었다한국사회는 근대문명 및 민주주의 도래로 서구화를 진행시켰으나세계화를 위한 문화적 정체성에서 그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서구화 과정에서 많은 전통문화가 해체되었고그중에서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민간신앙이나 민속종교 등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쇠퇴했다.


신화(神話)는 어느 특정한 국가와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가진 무의식적인 집단 심리이다신화를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고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성을 확립하는 것이다한국 신화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한국 신화를 어떤 매체로 통해 전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한국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영화나 드라마 등과 같은 대중매체보단 만화애니메이션웹툰 등과 매체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따라서 본 논문은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만화애니메이션 작품을 소개하고작품에 등장하는 한국 신화에 대해 연구하였다.

 

2. 한국 신화의 특성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는 단군신화(檀君神話)이다. 단군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는 정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으로 다스리기 시작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에게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기고, 인간 세상에 삼백 예순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다가와 자신을 인간이 되길 바라자,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양식 삼아 동굴에서 100일 동안 견디라고 한다. 호랑이는 인내력이 부족하여 굴에서 뛰쳐나온다. 곰은 환웅과 약속을 지켜 인간의 여성이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웅녀였고, 웅녀는 환웅과 혼인을 맺은 후 단군왕검을 출산한다. 단군왕검은 고조선(古朝鮮)을 설립하고 한국인의 국가 시조가 된다. 단군은 고조선을 1,500년 정도 다스린 후 1,908년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국가 시조인 단군왕검이 홍익인간 정신으로 만든 고조선이란 국가를 설립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군신화의 특징은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점이고, 신이 인간으로 변신(출산)하여 지상에 살다가 다시 신으로 돌아가는 점이다. 단군신화 이후 한국의 고대국가 건국신화를 보면 신적인 존재가 하늘에서 강림하거나 또는 알에서 나와 최후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변신하는 모습으로 이야기도 등장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단군신화는 단순히 신화로서가 아니라 전통종교로서 그 흐름이 이어져있다. 한국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것으로 본다. 단군신화는 한국 최초의 건국신화이기도하나 한편으로 무속신화(巫俗神話)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왕검(王儉)은 국가의 지배자인 군주를 의미하나, 단군(檀君)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수명이 다하여 사망할 경우 넋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천(歸天)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국인의 시조인 단군은 신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의 군주가 되어 다시 신으로 돌아간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서양사상의 토대가 되는 플라톤의 사상에서는 신과 인간은 분리된 존재고, 인간이 죽으면 저승세계인 하데스의 궁으로 가게 된다. 플라톤의 사상에서 신은 완벽한 존재이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신에 대한 경건함을 가짐으로서 신과 이어지려고 했다. 현재 서양의 문화적으로 자리 잡은 크리스트교 역시 신과 인간은 완벽하게 분리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신화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서양의 사상과 달리 한국 사상의 토대가 되는 한국 신화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분리보단 일체형으로 보여준다.


신과 인간이 일체적 요소라는 점은 단군신화만 아니라 다른 한국 신화에서 보여준다. 한국의 신화는 크게 2가지로 나눈다. 1가지는 단군신화와 같이 건국영웅들이 출현하여 국가를 세우는 건국신화이고, 다른 1가지는 건국신화처럼 기록으로 전승되는 게 아니라 민간에서 구비 전승되는 무속신화이다. 무속신화는 간의 생활에서 민중들을 보살피는 민간신앙의 신들에 다룬 이야기다. 그래서 무속신화는 민중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며,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를 보여준다. 건국신화는 신적인 존재가 인간세계의 왕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라면, 무속신화는 인간적 존재가 신격으로 화하게 되어 인간사를 관장하는 주요 신들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무속신화의 신은 역사 내지 기록으로 전승되는 건국신화처럼 고정되는 게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같이 변화한다.


단군신화가 가진 샤머니즘(shamanism) 요소와 더불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도교(道敎), 불교(佛敎), 성리학(性理學) 유교(儒敎) 등이 민간신앙에 흡수되어 계속 반복적으로 변천되었다. 무속신화에서 다루는 신은 같으나 이야기의 구조나 인물, 배경 등이 지역에 따라 다르며, 시기적으로 또한 변한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변화하는 무속신화의 특징은 인간들의 상상력으로 재생산되므로 이야기가 끊임없이 생산되므로, 스토리텔링으로 그 가치를 지녔다. 근대문물이 유래되고 서구화의 도입은 한국 무속신화를 해체시켰으나, 최근 전통문화의 문화적 가치와 보전을 위해 무속인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한국의 전통문화는 단순히 문화재로서 관리하기보단 스토리텔링의 기능을 발휘하여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에서의 한국 신화

일반 대중들이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방법으로 영화, 드라마, 연극 등과 같은 대중매체로 접할 수 있지만, 이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과 같은 서브컬처 콘텐츠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그리고 상황들은 카메라 내지 실사영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림 위에 그려놓는 만화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이 더 재현성이 좋다. 게다가 애니메이션(Animation)은 생명이 없는 존재에 대해 혼을 불어넣어 생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Animate란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애니메이션의 특성에 따라 신화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예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1988, 스튜디오 지브리),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 1997, 스튜디오 지브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尋神隠, 2001, 스튜디오 지브리) 등이 있다. <이웃집 토토로>는 나무에 사는 정령을 소재로 한 작품이고, <모노노케 히메>는 재앙의 신과 신의 숲이 등장하는 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일본의 다양한 신과 요괴들이 등장한다. 생명이 없는 존재에 대해 영적인 존재를 불어넣는 애니미즘(Animism)적 요소에 일본의 전통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일본 신화와 전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존재를 작품 내 등장인물로 내세운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일본 내에서만 아니라 한국과 전 세계의 나라에서 흥행하여 작품성과 재미를 인정받았다.


신화의 상상력을 작품에 반영하여 일본 특유의 문화를 통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한 장면을 다른 문화권에서도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국 내 존재하는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화애니메이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화는 단군신화이고, 그 신화에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환웅이다. 환웅이 웅녀를 선택한 모티브를 활용하여 만든 만화로 주간만화집지 소년챔프에서 연재 완료된 <사신전>이란 작품이 있었다. <사신전>의 시놉시스는 인간 세상에 내려온 환웅은 웅녀와 힘을 합하여 성품이 난폭한 호랑이족을 사해로 추방한다.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자 호랑이족이 다시 인간계를 침범하고, 평범한 고교생으로 환생한 환웅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미소녀 사신(四神)을 만나 각성하는 것에서 작품은 종결난다. <사신전>은 단군신화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요소에서 사신이란 영물(靈物)적인 존재를 등장시켜 도교적 요소를 작품 내 반영하였다.


또한 단군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라이트노벨 및 만화로 출간된 <나와 호랑이님>이 있다. 환웅이 웅녀와 결혼했는데, 그럼 남은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모티브를 부여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와 호랑이님>의 시놉시스는 주인공 소년이 호랑이와 웅녀의 후예 사이에서 연애를 다루고 있는 러브코미디 장르로 전개되며, 작품 내 추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보다는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요괴들이 등장한다. <사신전>은 기존 세계가 붕괴되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건국신화의 요소를 반영하였고, <나와 호랑이님>은 단군신화를 이야기가 시작되는 설정으로 삼아 민담과 전설의 요소를 반영하였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의 주제와 흐름이 서로 다른 방향을 전개되나. 기본적으로 단군신화를 소재로 하여 만든 작품인 점에서 한국인에게 익숙한 점과 더불어 작품의 독특한 설정과 개성을 보여준다.


무속신화를 소재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으로 만화 및 웹툰 작가 주호민의 <신과 함께> 신화편이 있다. <신화 함께> 신화편은 인간세상에서 저승이 만들어진 계기와 저승에서 죽은 인간을 관장하는 무속의 신들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는 대별소별전으로 하늘의 신 옥황상제가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에게 저승과 이승의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시험한다. 인품과 성격으로 형인 대별왕이 뛰어났지만, 지식과 계략은 동생 소별왕이 뛰어났다. 동생 소별왕은 속임수로 이승의 왕이 되었고, 형인 대별왕은 저승을 주관하는 왕이 된다. 이 점에서 무속신화에 등장한 인간사는 이승은 부조리한 반면 저승은 공정하다고 여기는 부분에서 무속신앙은 당시 살아가는 민중의 억압된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대별왕이 저승의 왕이 되어 죄를 지은 인간을 벌을 내리는 염라대왕 및 저승 시왕(十王)을 임명하고, 염라대왕은 죽은 인간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차사를 임명하기 위해 차사전강림전이 나온다.


그리고 서천 꽃밭을 관리하는 사라도령과 그의 아들 할락궁이를 이야기인 할락궁이전과 집터와 집을 수호하는 신의 이야기인 성주전녹두생이전이 있다. 작가가 창작으로 만든 지장보살전칠융전도 있지만, <신과 함께> 신화편에 등장하는 신들은 본래 신이 아니라 인간에서 시작된 점이 특징이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인간이던 시절, 부조리한 현실을 이겨내어 신이 된 점에서 제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무속신화를 소재로 개봉된 작품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고스트메신저>가 있다. <고스트메신저>21세기에 도래하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죽은 자를 관리하는 저승이 디지털화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저승세계를 묘사하였다. 무속신화가 고정된 이야기로 전승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하여 변화하는 것처럼, 한국 신화는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에서 계속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 마무리하면서

세계화에 따라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상으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확립하고 있다. 다양한 부류의 국가와 민족이 모여 공감대 이상으로 상대방의 개성과 특징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화의 정신은 다양성과 상호공존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한국과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세계로 향하여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문화적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매체가 필요하고 그 매체는 영상매체가 탁월하다. 그동안 한국은 서구화로 인해 자국의 전통문화를 크게 훼손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이것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영상매체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사라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한국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으로 제작하고, 더 나아가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지컬 등과 같은 대중문화로 제작하여 많은 소비자들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신화는 그 민족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며, 그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구조이다. 만화애니메이션은 상상력으로 가득한 매체이며,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매체다. 신화가 만화애니메이션에게 전해주는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무속신화가 종교적으로 무속신앙으로서는 쇠퇴했지만, 무속문화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성묘나 제사를 지낼 경우 산신제를 올리고, 집과 자동차를 새로 구매할 때 고사(告祀)를 지낸다. 어촌지역의 어민들은 선원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뜻에서 무속인을 불러 용왕제(龍王祭)라는 굿판을 벌인다. 무속문화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야기의 모티브는 항상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특정지역과 상징물을 아는 것보다 한국인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신화는 그 문화집단의 보편성을 잘 보여주는 점에서 한국인의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신화를 이용한 만화애니메이션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