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 세상을 읽는 4가지 방법 Great 인문학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소를 두고 괴테는 그로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독일 최고 문학가이자 세계적인 인물인 괴테에게 루소도 그러하고,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세계적인 작가 톨스토이 역시 루소가 새겨진 동전을 목에 걸고 다녔다. 루소의 영향은 18세기 <신엘로이즈>로 여성들의 마을을 흔들었고, 19세기 혁명의 시대에서 <사회계약론>은 혁명가들의 복음서였고, 20세기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자본주의사회와 문명사회에 자연주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주고, 21세기에 <에밀>은 교육문제에 파국으로 닥친 한국사회에 많은 것을 주고 있다.

 

루소를 다시 읽는 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인간인 루소이지만, 그의 책에는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맞이한 미래보다 더 먼 미래를 향하여 루소는 눈을 돌린 것이다. 인간에 대한 문구에서 <사회계약론>의 이 구절은 너무 유명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는데,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실 그들보다 훨씬 더 노예가 되어 있다.” 물론 출판사마다 다루게 번역되어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롭다. 그러나 도처의 사슬에 의해 묶여 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노예로 되어 있다.” 등으로 말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이 구절은 인간의 관념세계를 확장시키는 혁명적인 문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루소가 살던 18세기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된 1762년은 프랑스에서 왕정사회였기 때문이다. 루이14세의 절대왕권의 선언과 그 이후 부르봉왕가는 왕족, 귀족,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 자체에는 모든 게 자연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크게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으로 다른 하나는 정치적, 도덕적 불평등이다.

 

태어나는 인간은 아직 어떤 능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저 타인의 도움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약자다. 그런 인간이 정치적인 조건에 따라 성장하여 그가 어른이 되면 불평등한 세계의 일원으로 완성된다. 불평등의 세계에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인간에게 악덕을 주는 오만한 학문과 불필요한 도덕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처럼 인간의 문명과 기술은 이미 인간에게 물질적 혜택을 주는 것 이상으로 불행과 고통을 선사한 것이다. 진보적인 사상가이면서도 반진보적인 가치를 가진 루소는 인간의 역설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살아가야할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라면 누구라도 불평등하게 서로를 구속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라는 조직은 그저 우리 인간이 서로를 위해 만들어야 할 계약에 의해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회라는 공간은 우리가 계약에 의해 존재된 것일까?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남김없이 고발한다. 마지막에 갈수록 그것은 자본에 대해 비판한다.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18세기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산업혁명과 동시에 가속화된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소수의 거부인 부르주아와 그 밑에서 일하던 농민과 노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루소는 마르크스 시대 사람이 아니기에 자본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중심으로 삼지 않았으나, 루소 역시 자본가 존재에 대한 경제적 착취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 자본에 의해 혹사당하고 억압당하는 가난한 프랑스 국민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루소가 자연적 인간을 추구한 이유는 문명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그 자연에 살고 있는 주민을 내모는 인클로저 현상을 목격한다. 빵을 만들 사람들이 빵을 구하러 도시에 가나, 그들에게 오는 것은 비참한 현실과 절망이다. 자연에서 살아가면 인간은 산속의 열매를 따먹고, 강가의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도시에서 심각한 노동착취에 의해 고생하고, 더러운 주거환경에 병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자연의 공간이 공유지에서 사유화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내쫓기게 된다.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도시로 가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저 거지처럼 구걸하거나 좀도둑처럼 물건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밖에 없다. 아니라면 아침부터 밤늦게 열악한 환경에서 심신을 소모하는 과격한 노동에 시달린다. 자연인으로 태어나 자연에서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이유는 적어도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억압도 없으며, 정신적으로 영혼에 병이 들지 않는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연인들을 볼 때 아마 볼테르와 많은 프랑스 사람들은 사람이 어찌 숲 속의 곰하고 같이 살 수 있을까라고 조소했을 것이다.

 

루소가 그것을 점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가 본 도시의 삶이란 척박했고, 민중의 삶은 고달픔으로 가득하여 서로의 이기심을 위해 불속에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 같았다. 숲 속에 사는 곰이 될 수 없고, 농사만 짓고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대 그리스사회는 이른바 폴리스를 형성하여 살았다. 폴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주인이 되어 결정하고 의결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다면 결국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시민들의 가치를 공공의 이익에 반영하여 그 의지를 일반의지 혹은 보편적의지로 삼은 것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바로 그런 의지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고, 그것으로 정치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책이다.

 

루소 이전에 법철학 서적이 있었지만, 귀족이나 왕족 중심이었지 일반 민중에게 법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 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초시라고 볼 수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은 21세기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대혁명을 만들고,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념적 가치가 되었다고 하나, 막상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잘은 모른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에서 지배하면서 다시 루소의 사상을 돌아보면 루소의 가치와 많이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팔정도로 너무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 오늘 우리 주변에 자신의 몸을 비참한 운명에 파는 인간이 너무 많다. 루소가 바라본 과거와 지금 내가 바라본 현실에 차이점은 그다지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공공성에 대한 의지성이 필요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에게 주권을 절대로 누군가에게 줄 수 없고, 파괴될 수 없으면, 인간의 주권이 파괴되는 것은 그 존재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21세기 민주주의에서 주권에 대한 의식에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 체계에서 직접이 아닌 간접적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 루소는 당파의 존재는 필요할지 모르나. 그 파당의 이익에 대하여 정치적 입지가 갈리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이 일어났고,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마치 성경 이상으로 여기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도 비극이 일어났다. 단순히 누군가 소수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계약론>을 읽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성에 대한 보편적 의지를 담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모두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려 훌륭하게 만들어간 나라는 거의 없었다. 루소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예전에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의론>을 읽은 후 <만민법>이란 책을 읽어보았다. 만민이란 시민도 되고 인민도 되는 책이다. 어느 특정지역에 살아가는 인간이기보단 만민은 전 세계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권하는 게 롤즈의 철학이다. 물론 롤즈의 철학이 칸트로부터 시작하고, 칸트는 루소의 영향을 받는다. 21세기가 와도 여전히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고, 세계와 개인도 존재한다. 그 사이에 인간은 타인과의 정치적 입장에서 늘 선택을 한다. 그러나 좋은 선택보단 잘못된 선택이 많을 때가 많다.

 

루소 이후 민주주의 철학은 발달하고, 사회적으로 발전을 계속해도 그 정치적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루소의 책은 18세기는 분명하나, 21세기에 읽어봐도 그렇게 부족하거나 시대적인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문명적 혜택은 분명 차이가 나겠지만, 인간 본래 존재적인 가치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 과거에 만든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는 이어져야갈 필요가 있다. 보편적 사고가 멈춘 곳에선 어느 모략을 가진 자가 나타나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만드는 과정과 방식보단 그것을 파괴하는 전제군주와 정치제이다. 루소의 책을 읽으면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이상적인 방향보다 오히려 그렇지 못할 경우 나타날 비참한 현실이 더 인상적이다. 모든 국민이 복종할 것은 오로지 법이지만, 독재자는 법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법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과 그 무리가 나타날 경우 시민들의 권리는 축소되어, 자유의 의지가 박탈된다. 전제군주라는 그 자체는 21세기에 거의 사라져도, 거기에 버금가는 자들은 많다. 그런 전제군주와 같은 사람이 판을 치는 곳에서 인간의 자유는 과연 어떻게 될까? 사슬의 고리는 결국 자신의 원하지 않아도 묶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슬이 묶이게 되는 동기는 제공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