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트 강의 7번째 내용은 미술시장이다. 내가 평소 미술작가와 작품은 잘 모르고, 단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고전주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인상주의 등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역사와 문화적 가치에서 인간이 남긴 유산은 그 시대의 흐름과 풍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점들이 미술시장의 감정평가 기준에서 미술사적인 요소로서 작용하는 것을 알았다. 미술시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나, 미술시장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은 정말 알기 힘든 영역이다. 미술 그 자체를 대중문화에서는 낯설고, 고급문화 차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속한 영역은 서브컬처 영역이다. 대중이 이용하는 mass culture와 다르게 서브컬처 역시 대중에게 낯선 존재다. 대중문화는 어느 특정대상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콘텐츠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공존을 파괴하는 것에서 대중문화 현실적 기만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강연자 큐레이터분이 설명하면서 생각했지만, 한국의 화랑 즉 그림을 사고 팔 수 있는 공간에서 갤러리리스트가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값 비싼 미술품이 사치품으로만 바라볼 뿐이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성과 예술성에서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성은 모순과 부조리를 만들고, 거기서 만들어진 여파는 누군가는 뒤집어쓰게 되는 또 다른 모순으로 이어진다. 미술시장은 예술가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시장으로 연결하여 문화의 풍부한 가치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90% 가량의 미술시장이 일부 30인 정도 작가에 의해 돌아가고, 나머지 10%를 약 25,000명 정도의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연간 대략 6천억의 금액에서 6백억을 25,000명에서 돌아간다 하지만, 실제 그 돈이 작가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예술에 대해 국가와 사회가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권력자들이 자신이 가진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사는 경우가 많다. 예술작품들의 매매시장이 1990년 전후로 갑자기 성장한 점에서 지하경제의 돈이 건설과 금융뿐만 아니라 미술시장에 진입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재벌이나 비리로서 돈을 상당히 모운 자들의 집이나 혹은 창고에 가면 미술품이 그리 많은 이유는 그때 그 시기의 시대적 흐름에 따른 처세술이라고 할까나? 한국의 처세술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따르기도 싫어하는 편이라 막상 그들 입장에서는 어느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여 먼 미래에 가격이 폭등하면 하나씩 팔거나 혹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과시욕구 자체에 대해 구매계기라 하여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문제는 그 지나친 과시욕인 것이다. 미술시장은 필요한데, 미술시장이란 말처럼 시장은 곧 자본의 이동과 축척, 잉여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란 예술적 가치를 논하면서도 한편으로 상품적 가치를 논해야 한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리게 되면 작가가 매장당하거나 혹은 매도당하는 상황이 된다. 한국의 미술시장의 문제는 단순히 미술세계만이 해결해야할 사항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으나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미술세계까지 파고들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안타까운 이유는 18~19세기 시작된 근대산업화가 서구에서 시작했다면, 20세기는 탈근대화로 인해 공업화 내지 산업화가 그 나라의 경쟁력이 아니라 문화적 수준이 경쟁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현대 한국의 대표적 망국병이 1970년대 사고방식을 고수하려는 것이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당시 한국은 물자가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시장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산업사회를 성장하는 것만이 우선사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은 과거와 비교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증대했다.

 

대량생산이 된 상품이 소비되지 않으면 공장운영자나 기업자들에게 부도라는 치명적인 악조건이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중심의 공업화를 지나 서비스유통 역시 그 한계성이 드러난다. 말로만 창조경제를 외치지만, 사실 그 이면은 인건비 절약이란 교묘한 수법만 숨어있다. 인건비의 감소는 결국 소비시장의 위축이고, 이것은 또 다른 경제적 악영향을 주는 모순의 순환고리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사람들에게 소비하도록 유도하고, 그 소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조건을 줘야 한다.

 

직업군에서 기계의 발전과 정보통신의 발달은 인간의 노동력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된다. 노동력을 감소하고 임금을 줄고 한다면 결국 생산과 소비의 관계성은 붕괴된다. 노동력을 감소하면 그 노동의 제공자들은 무직이 되어 다른 일을 찾아야 하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이 쉽게 나올 수 없다. 예술에서 보이는 문화적 가치란 바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하나의 방법이란 점이다. 미술시장의 규모가 작은 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미술가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거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팔지 않는다.

 

순수하게 미술을 하고, 미술품을 제공한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산업사회에서부터 그러하듯이 소비자일 수밖에 없다. 미술시장의 규모가 커지면 다른 관계 업종이 필요하고 거기에 따른 부수적인 경제적 효과를 올린다. 하지만 한국은 문화자본에 대해 투자는 하지 않으려 하면서 문화자본이 상품으로서 전시될 수 있는 미술관이나 전시관만 쓸데없이 크게 비싸게 만들려고 한다. 부산 영화의 전당을 보면서 저 비싼 땅에 쓸데없이 큰 건물만 짓고, 수요는 없고 전시용 행정으로 운영하면 결국 부산시민 세금만 날리는 셈이다.

 

중요한 부분은 그 전시나 공연 혹은 여러 콘텐츠를 올릴 수 있는 기반적인 인프라를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문화 위에 고급문화가 있듯이 그 아래에 서브컬처나 다른 문화권이 존재해야 한다. 기둥이 있어야 집을 세울 수 있지만, 기둥을 올리기 전에 기초공사와 지반공사부터 처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의 예술은 바로 이런 현실이다. 본인이 속한 세계는 분명 서브컬처 영역이나, 서브컬처에 대한 연구와 비평에선 다양한 학문과 결합한다. 가령 미술에서 서양화 내지 회화 계통, 영화와 문학도 포함된다.

 

다양한 기반이 학문적 토대라면 그곳에 성곽을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미술시장보다 더 열악한 것인 서브컬처 시장이다. 한국에서 자체 생산하기보단 일본에서 수입을 하는 편이 많으며, 콘텐츠에서 자국은 열악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바닥에서 기어가고 있을 정도다. 미술세계에서 미술인들은 큐레이터나 미술관의 관장, 비평가만 하려고 하지 시장의 영역에 대해 깊이 고심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볼 때도 서브컬처 영역에서 전문가들은 교수, 비평가, 정치적인 입지만 신경 쓰지 막상 그 시장에 대한 역동성은 관심조차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문이 계속 남아있는 이유는 필요에 의해서이다. 필요한 조건으로 학문의 기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비효율적인 이유로 대학의 학문들이 폐쇄되고 통합되어 사라지는 경우를 본다. 이런 현상이 오히려 역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양성을 죽이는 것은 그 가능성을 죽이는 것이고, 새로운 아이템을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파괴한다. 서브컬처와 관련하여 대학교 내에 만화, 애니메이션학과가 개설되고 있으며, 미술대학은 오래전부터 계속 유지되었던 학문영역이다. 그런데 미술이나 서브컬처 시장이나 모두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수요의 문제도 있지만, 수요의 증대를 위해서는 문화적 전반적인 개선이 필요한데, 그 개선사안이 다양성의 공존이다. 다양한 관점이 사라지면 미술의 작품 수나 형태 그리고 그것을 작업하는 미술작가도 축소된다. 중국이 세계 미술시장의 반을 잡아먹는 이유도 경제적으로 큰 규모가 이르면 더 이상 공업 산업화가 확장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는 문화산업 밖에 없는 점이다. 서구사회 강대국들은 자신의 나라가 선진화되면 될수록 문화재를 보존하고, 문화영역에 대한 투자를 부여했다. 국제사회에서 자본의 유동은 중요하나, 자본의 운동이 단순히 기업의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람이 하루에 소비할 수 있는 물품은 한계가 있고, 시간적으로 누적되어도 그 한계성이 있다. 문화자본력은 입고, 먹고, 자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을 초점으로 두기에 새로운 시장형성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 프랑스에서 베르사유궁전과 루브르박물관의 문화상품은 주변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이에 대한 관광자원도 풍부하게 만든다. 전에 메르스 사태 이후 국내 경제를 활성화 한다는 명분으로 휴가일을 늘려 소비를 촉진한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문화와 특히 문화를 토대로 하는 관광산업은 일시적 효과로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지속적인 것인 문화산업이 계속 활성화하게 해주는 토대가 필요하다.

 

미술시장이나 혹은 서브컬처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문화산업이 한국이 부실한 이유는 이런 것들은 처음에 돈이 되지 않거나, 또는 이해하기 싫다는 점이다. 서브컬처 콘텐츠 비평에서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이 발전하지 않은 이유는 대중들이 그런 것들을 깔보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문화공존이 어렵다는 점이다. 문화산업으로 볼 수 있는 미술시장의 문제는 단순히 미술만의 문제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인간의 소유욕과 과시욕은 미술시장의 수요를 만들고 공급도 만들어 나가지만, 그 한계성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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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사랑을 그리다
유광수 지음 / 한언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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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대학교 은사님이 저술한 <고전, 대중을 엿보다>란 책을 읽었다. 고전이란 타이틀이 내걸 듯이 주로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였고, 조선시대가 아니라면 고려시대 정도가 적당할 정도다. 고전의 이야기에서 문헌이나 혹은 구술로 전해오는 과거의 인간들에서 우리들은 오랜 시간과 흐름이 서로 간의 벽이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들어다보고, 이야기의 주석을 따라 흘러가면 그들도 우리랑 많이 차이나지 않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단지 그 시대가 지금과 다르고, 왕이 있다는 점, 계급사회로서 양반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질 뿐이다.

 

단지 그런 시대적 흐름이 더더욱 이야기의 플롯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물론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장벽은 존재한다. 예전에는 그 장벽이 엄격하고 당연하기에 그저 불복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지금은 그 장벽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나 은밀하게 혹은 의외의 반응으로 우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누구나 알 듯 혹은 전혀 모르고 갈 듯 난해한 것이기에 그렇다. 고전에서 보이는 인간 역시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것 같기도 하나 때로는 아니다.

 

우리 인간은 뭐라 딱 하고 단정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런다고 어떤 때에는 어느 대상에 대해 정확한 관철과 표현되어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의 것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논리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사랑이란 단어를 보면 참 말로는 쉬워 보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 사랑해”라는 대사는 일상에서 가끔 볼 수 있고, TV 드라마에서 늘 십중팔구는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면 어떻게 그 개념을 정립해야 할지 난감하다. 사랑하던 남녀가 갑자기 마음이 돌변하여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으르렁댄다. 하다못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지난날의 모습조차 부정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성적으로 따라가기 어렵고, 감정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으며, 무의식적 성적본능으로만 따를 수가 없다. 진짜 사랑만큼 이성과 감정 그리고 무의식적 요소가 골고루 반죽되어야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류애는 이성적인 윤리적 가치관만 존재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길가다가 어려운 사람을 보고 돕거나, 매달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갑자기 구호를 보고 헌혈 정도 해주는 것도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다. 물론 그 기반에는 감정이란 것이 숨어 있다. 인간의 이성에서 판단할 수 있는 논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요소는 감정이 있기에 그렇다. 눈으로 보는 비참함, 귀로 듣는 신음소리가 인간적인 감정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에게 선의의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가언명령에서 정언명령은 가식 없이 윤리적 이성과 감정적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에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의 사랑은 조금 다르다. 무조건 사랑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보여주거나 혹은 감정의 기폭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평소 그렇게 연애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사랑이 이래저래 말하기는 우습다. 그런다고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뮤지션인 故 김현식의 “사랑 사랑 사랑”이란 가사를 들여다보면 사랑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것도 모두 사랑이라 한다.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는 꺼내기에 쉽고도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사랑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을 보면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닐까 싶다. 이런 말을 하면 내가 다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겠지만, 나는 나름 진보적이다. 사랑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긴다. 단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부터 생각한 게 우연히 이 책에서 나왔다. <고전 사랑을 그리다>의 저자분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입장에 대해 적은 게 있다. 단순히 그 글은 남녀관계로서만 다룬 게 아니라, 그보다 더 확장하여 우리의 인식과 역사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서 성적인 학대와 폭행 그리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다. 보통 사람들이 왜 이 문제에 그렇게 깊이 여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나는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그녀들은 모두 꽃다운 18세 전후에 강제로 차출되어 갔다. 일본에서 그녀의 도장을 받았다고 하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계약서 내용이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에서 모순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일본도 산업화나 우리나라의 산업화에서 시골에 막 올라온 아가씨가 취업알선센터에 가서 일자리 소개해준다고 말을 듣고 따라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윤락을 강요하던 업소였고, 그 아가씨는 미성년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그들의 강요와 폭행,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처지에 그 일을 맡았다. 그러면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위안부에 끌려간 그분들이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오고, 그것도 강제로 폭력적인 남자로부터 집단 성행위를 당하는 것에서 잦은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 것이라면 이게 정당한 일인가?

 

모든 여자가 그런 부당한 계기로 선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여성에 대한 편향적 관점이 이런 사태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어느 날 기가 차는 뉴스를 들었다. 남자인 나라도 지나가는 여자 중에서 매력이 넘치면 성적욕망이 올라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런 감정을 느끼고, 내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것을 인지하여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성범죄와 관련되거나 혹은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진 남성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혹은 그것이 틀린 것인지도 모르는 게 많다.

 

뉴스에서 왜 충격을 받았냐? 자신의 어린 여자조카를 10년 넘게 성폭행한 가족이 겨우 징역 4년이란 것이다. 나라면 최소 20년 이상을 살게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성인여성에 대한 성폭행도 나쁘지만, 어린이나 청소년 게다가 친척이라면 인간의 얼굴이 가진 자라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벌의 강도가 낮고, 성폭행 사건에 대해 너무 안이한 대응이 아닐까 싶다. 어느 정치인은 골프를 치다가 보조원에게 자신의 손녀 같다면 가슴을 만졌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가 일본의 사과만큼 중요한 게 한국 내의 인식이다. 결국 저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일본의 망언이나, 그 망언이 나오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문제도 있다.

 

사랑에서 욕정과 욕망은 중요하다. 인간에 대해 성현들은 신과 짐승의 중간에 있다고 한다. 완전하지 못하나 그런다고 짐승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서 짐승은 본능에 가까운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능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에 본능만 있다면 단지 기계적인 성행위만 있을 것이다. 감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이성으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참 인상이 깊다. 여성이 남성의 말을 믿을 때는 성행위 중이 아니라 그게 끝나고 나서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매력이 외모와 육체도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연속성이다.

 

나는 이런 가치관에 매우 크게 공감한다. 단지 나라는 인간이 특이한 사고방식과 개성이 있기에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알아주는 인간에게 끌리는 법이다. 내 자신의 지나친 것을 너무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내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모순도 겪는다. 인간이 서로 만날 때 모두 자신의 좋은 모습, 포장된 자신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가려진 본심 내지 본질은 숨기고, 어느 순간 그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는 당신이 그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또는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라고 말이다. 어느 인간의 성질은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욕하거나 시비 거는 것은 장점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어느 사람의 개성과 매력이 반드시 좋은 법만은 아니다. 어느 한 쪽만 보고는 인간을 판단할 수 없으나, 인간이 사랑에 의해 상대방에 빠지면 그것을 놓치게 되고, 뒤 늦은 후회와 충돌이 일어난다. 사랑에 대해 이유는 필요한가에서 나는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저자가 제시한 것처럼 사랑이 처음에 불 같이 붙다가 단지 그 불에만 집중하면 불이 모두 꺼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나온 답이 아닌가?

 

사랑한다는 말은 쉽고 사랑한다는 일은 어렵다. 이상과 현실은 뭐든지 벽과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좀 더 봐주고, 알아가고, 진행형이란 말은 무척 공감한다. 사랑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사랑이 시작은 나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짝이 정해진 이상, 새로운 사랑이 생겨 날아갈 수 있다고 쳐도, 그 전의 사람과 쌓아온 신뢰와 시간을 배신하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앞에 만난 사람을 배신하여 새로운 사람에게 가버리면, 언젠가 그 새로운 사람마저 배신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전 사랑을 그리다>를 보면 저자는 언제나 극단적인 자세를 피하고, 상황적 전황과 조건적 요소를 붙인다. 인간이 하는 일이란 뭐든지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온갖 변수가 튀어 오르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생긴다. 최대한 시대적 상황적 배경적 요소를 참고하여 사랑의 대상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이 되지 않으면 무척 무관심하게 대한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누가 어떤 일들을 당해도 무관계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이 되면 앞과 뒤를 보지 못하고 날 뛰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보고 그 사람을 향하여 조롱과 비웃음을 날린다고 해도 그 비수의 칼날이 내 등 뒤로 꽂히지 않으란 법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 형성능력이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목적을 물어보면 모두 처음에 출세를 바란다. 돈과 권력을 향하여 아귀의 수라장처럼 몰려든다. 그러면 막상 그게 되면 무엇을 할 건인가? 인생은 즐기려고 한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거나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서 한다면? 인간이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혼자서 즐거움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골프 27홀을 혼자 빌려 며칠이나 친다면 지겨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혼자서 견딜 수 있는 부류는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부분에 대해 저자분이 설명한 것이 있으나, 조금 이 부분은 맥락을 약간 놓친 게 아닐까 싶다. 히키코모리가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에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가상의 대상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현실을 외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왜 외면하게 되었는지는 저자분이 조금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이 글을 적는 독자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캐릭터를 좋아한다.

 

물론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집착하지 않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현실에서 뭔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오늘날은 과거처럼 대가족이 이루는 시대가 아니라 핵가족에 어릴 때부터 모두 같이 지내는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을 경쟁상대가 되는 적으로 만드는 삶으로 만들었다. 그런 삶에서 비상구가 되는 의지가 옆에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있다. 사랑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세상도 되기도 한다. 조금 그 부분만 잘 착안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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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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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그리고 그와 대담한 선정우 역시 한국에서 유명한 문화평론가이다. 한일 양국의 문화평론가 거기에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보단 하위문화라고 불리는 서브컬처에 대한 연구자들이 대담하는 것이란 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이전에 일본 문화평론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된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보며 일본 하위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하위문화까지 지평을 넓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작가의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한다면 오쓰카 에이지의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한다>는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지식과 사유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판과 담론을 이어간다.

 

국내에서 하위문화 연구자로 선정우는 명성이 있는 분이다. 하위문화가 한국에서 그동안 탄압받고 규제되어 왔으며, 단지 아이들이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여겼다. 그러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서사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하나의 문학성을 인지하게 되면서 하위문화에 대한 다방면적인 검토가 가능했다. 하위문화적 특성 즉 오타쿠문화에서 보는 내 입지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대중사회를 거치면서 자신에게 언제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인간에게 자신의 취향과 성향 그리고 상황적 순간에 따라 그런 대중적 가치를 받아들이기도 하나 때론 거부하기도 한다.

 

인간의 성향과 취향은 모두 같을 수가 없지만, 대중문화 코드에서 언제나 일괄적이고 전체화된 문화적 요소를 대중에게 전달한다. 대중문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모든 주변인하고 다 잘 지낼 수는 없다. 스트레스, 강박관념, 무의식적인 욕구 등이 인간에게 하나의 집착을 보이게 하고, 그 집착이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오타쿠문화에서 잘 인지할 점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만족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길 원하는 점이다. 끊임없이 생기는 욕망은 현실에 대한 박탈감과 공허감이 자신들에게 창작 내지 생산적인 관점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과거 오타쿠문화는 그러했다. 일본 대표적 오타쿠이면서 현재 전 세계 오타쿠문화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있다. 그는 특촬물을 좋아했고, SF영화로 울트라맨 특촬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오타쿠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집착과 집중력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하위문화로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 대중문화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매우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크기 때문에 언제나 주제가 진부한 Cliche로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전에 사람들과 만화애니메이션 등 하위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최근 한국에서 방영되는 TV드라마조차도 기존 대중문화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위문화 콘텐츠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웹툰은 그렇지 않다. 다음과 네이버 심지어 웹툰전문 사이트까지 등장하여 웹툰은 이미 한국 대중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웹툰의 작가는 기본적으로 만화작가라는 점이고, 그들이 만화를 만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한국에서 만화작가와 웹툰작가는 동일선상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웹툰이 인터넷 매체에서 흥행되자 드라마 각본이 되는 모습이 보인다. <식객>이나 <미생>이 있고, 일본 만화원작인 <노다메 칸타빌레>도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 시나리오 제작에서 기존 드라마에서 제공되는 이야기는 흔한 주제에 흘러가고, 흔한 내용과 결말로 이어져간다. 대중들도 거기에 만족하기도 하나, 가끔 새로운 주제와 흐름 또한 재미를 요구한다. 하위문화에서 올라오는 이야기는 바로 대중문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새로운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 오타쿠문화가 한국에 오면서 많은 만화작가 및 애니메이터 또는 다른 문예계통 작업자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기존에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도전과 흐름이 하위문화에 숨어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거대서사에 의해 세계가 움직이고 개인이 그에 따라 움직인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도래는 개인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거대서사에서 작은이야기의 분할로서 매체가 발달된다. 대중문화는 작은이야기를 올리더라도 그 한계성은 거대서사에 맞추어진 작은이야기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처음에 색다른 이야기가 결국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것에 흘러간다. 단지 대중의 욕망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라는 점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다.

 

예전에 TV 드라마로 흥행한 삼순이 신드롬을 보자. 노처녀에 뚱뚱하고 잘 살지 못하는 삼순이가 재벌에 잘생긴 연하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새로운 자태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의 욕망을 보여준다. 과거에서는 계급에 따라 지위가 달라지지만, 현재는 자본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에 대한 욕망은 어느 자본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시야는 그 여성의 외모와 상관없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분은 김선아 씨고, 본래 그 분은 날씬한 미인이었다. 단지 연기를 위해 살을 찌우고 미녀로 꾸미지 않을 뿐이다.

 

드라마 종영 후에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미디어세계 즉 가상의 드라마에서 김선아 씨가 연기한 삼순이는 뚱보이나, 현실의 김선아 씨는 미녀연예인이다.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한계란 바로 저런 현실과 가상의 간격을 대중으로 하여금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위문화라고 모두 좋은 것만이 아니나, 적어도 하위문화에서는 대중문화와 다른 분리적인 요소를 공격하는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의 좋은 예처럼 마이너리티의 문화가 하위문화에 엄연히 존재한다. 예전에 재미있게 본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 시리즈는 일본의 대표적인 마이너리티 계층을 보여준다.

 

마이너리티의 모습은 대중문화에서 나오기란 어렵다. 그곳에는 현실에 존재하나 현실의 인간들이 외면하고 감추려 하는 모습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revolution Number3>에서 문제아 고교집단이 나온다. 거기에 재일한국인, 이혼가정, 오키나와 주민, 혼혈인 등 다양한 사회적 소외계층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일본에서 비주류고 어떻게든 엘리트집단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밑바닥을 오고가는 사회적 약자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자였다. 그들이 이길 수 없었던 사회는 모순과 부조리의 연속이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좀비들은 열성인자 유전자를 아가씨 학교학생과 연애하여 이어가려 한다.

 

우성인자라도 계속 머물면 도태되는 것처럼 교류 없이 정체된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타쿠문화는 각자에 대해 정체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적 속성이나 취향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많은 이야기와 흐름이 요동친다. 대중문화는 아주 넓은 호수가 있지만, 호수의 수심은 1m 안 되는 곳이고, 하위문화는 관로의 직경이 1000㎜ 된다. 단지 어떤 사회인지 조건에 따라 관로 안의 물탱크는 1㎥도 될 수 있고, 1000,0000,0000㎥도 될 수 있다. 드러난 것은 수도꼭지이고, 수도꼭지 아래에 숨어있는 물탱크는 미지수다.

 

보통 사람들이 미지수의 수원이 자리 잡은 하위문화를 접하면서 생각하는 점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하위문화 특성에서 오쓰카 에이지는 다른 작품들을 모르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과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좋은 작품으로 여기고 비평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기 비판적 태도이고, 어떤 주제에 대해 흔한 결말로 이어지는 Cliche를 벗어나고, 더 중요한 이유는 프로파간다를 벗어나 상상력을 우선 시하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TV판 25화와 26화는 신지가 인류보완계획 이후 자신의 의지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이코드라마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자기 안의 결단력을 세워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목표심이 생기자 주변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끝이 난다. 만약 이렇게 끝이 나면 서사의 완결은 갈등의 해결점, 어째 보면 카타르시스의 해소와 더불어 현실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가능하다는 회피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7년에 <Death & Rebirth>와 <End of Eva> 2편이 상영된다.

 

<Death & Rebirth>는 TVA 1~24화까지 축약하고 거기에 다른 장면을 추가로 집어넣고, <End of Eva>는 인류보완계획으로 모든 지구생물이 멸망하고 신지와 아스카가 남는 것으로 끝이 난다. <End of Eva>의 절망적인 결말은 주인공 파일럿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오직 고립만으로 현실의 상황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바로 이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보여주는 현실적 절망에 작품적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단절성을 보여주고, 거대서사로부터 벗어나 거기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런다고 모든 게 그렇지는 않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작품 <반딧불의 묘>처럼 일본과 한국에서 보는 관점도 다르고, 거기에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미도 보는 이에게 다르다. 최근 한국에서도 흥행한 <코드 기어스>도 한국에서 제국주의적인 요소로 비난당하고, 일본에서 극우세력에게 비난당하고, 미국에도 비난당한다. 자신들이 과연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오해가 있을지라도 보는 이에게 다른 관점을 주는 것이다. 작품을 만든 작가들은 의도하던지 혹은 의도하지 않던지 그 작품의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윤리성에서 작가에게 달린 것보다 소비자 즉 향유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 작품이 문제성을 보고 느끼는 것은 관중의 입장이지 제작자의 입장이 아니다. 제작자는 창의적인 사고에 의해 작품을 제작한다면 그것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향유자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관객이라면 작품에서 다가오는 이야기가 바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관객에게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던지 혹은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고 싶은 불편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제작자의 의지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현실의 대다수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을 심어주려 하지 않는다.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서 기존 일본인들이 피하고 싶은 것은 은근 집어넣는다.

 

하위문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넣을 수 있는 조건은 바로 상상력을 억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화에서 상상력에 대한 언급에서 나는 진중권 교수의 서적에서 본 말이 생각난다. 상상력이란 미래의 윤리라는 점을 말이다. 윤리적인 태도에서 상상력이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적 상황에서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만약이란 것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에 대한 사유와 판단을 하게 할 수 있다. 단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단순히 소비하고, 그 의미의 전후맥락을 놓친다면 단지 불편하게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불편한 것들에 대하 성찰은 내가 살아있는 현재를 말해준다. 하위문화는 바로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한편으로 단점도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문화는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여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신들의 소비와 향락에 침식당하는 것이다. 과거의 오타쿠는 아키하바라에서 모여 무언가를 만들고 활동한다면, 지금은 아키바계 상업적 비즈니스의 고객으로 변했을 뿐이다. 물론 소비의 영역에서 창작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나, 오로지 소비에만 치중하여 오타쿠 문화에 유입되는 부류는 현실에 불만족에 대해 자신이 만족할 것을 찾기보단, 그저 현실적 문제에 눈을 돌려 자신만의 세계 갇히게 된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갇혀있는 사람에 대한 비판성이라면, 그것이 오타쿠문화 3번째 혁명이란 점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거대서사 해체 후 작은이야기의 진입에서 모에요소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모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소비시장으로 계속 집중되고, 하위문화 향유자들은 현실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성보단 현실 그 자체의 부적응자에 의해 채워져 간다. 일본 넷우익이나 한국의 극우성향 사이트에서 애니메이션 소비자가 많다는 점은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기보단 그 현실적 문제를 자신과 사회적 구조보단 어느 다른 누군가로 전가시키는 점이다.

 

오쓰카 에이지와 선정우 씨의 대담에서 계속 느끼나, 과거 내가 잠시 읽어본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의 내용과 상당히 일치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은 기존 소설이 몰락하고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하위문화 계통의 이야기들이 앞으로 흥행할 것이라 보았다. 근대성의 종언, 즉 모더니즘의 종료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에서 단절되어 기존에 없었던 것들의 탄생이다. 오타쿠문화는 거대서사에 대해 생각하면 대중문화 기류에서 분리된 존재다. 그런다면 대중들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대중들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없는 점과 그 새로운 이야기의 원천지는 하위문화일 수밖에 없는 점을 나는 위에 언급했다. 그렇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기에 극단적 행동도 불사하는 요소도 보인다. 과거 일본과 한국은 농경중심의 사회다. 가족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다. 결혼, 장례, 식사, 교육, 기타 수많은 문화적 유산이 가족들 안에서 해결되었다. 자급자족 사회에서 생산된 것이 교환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로 이환되면서 개인의 존재는 집단사회 즉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신의 정체성 및 자아에 대한 혼돈에서 캐릭터적인 요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어느 이야기를 보면 사회에서 보면 그 당사자는 매우 불합리적이고 악의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에서 그 인물 중심으로 전개될 경우 그만의 합리성과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윤리성의 영역하고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혹은 현실적인 부분과 괴리성이 생기는 원인도 된다. 하렘이나 미소녀연애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점에서 그것이 하나의 장르로서 이용하는 게 문제는 아니어도, 그 자체로 빠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남성은 왜소하고 특별한 것이 없지만, 어느 계기로 주변에 수많은 미소녀들이 모이고, 남자주인공 한 명을 두고 서로 질투하고 연애 공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력보단 자기 캐릭터를 합리화하기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들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대리만족으로 채워 나가고, 그 현실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한 이성적 판단력과 사회구조적 모순보단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는 것이다. 약자라는 존재가 자신의 피해자 심리를 두고, 주변에 다른 약자에게 적으로 간주하여 피해자 심리로서 가해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혔기에 그에 따라 보상 및 응징에 대한 대가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거대서사에서 응징의 용사는 가해자의 공격에 의해 피해를 봤기에 응징의 명분이 생성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응징은 실제의 피해를 주는 대상과 응징당해야 하는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캐릭터설정을 계속 부여한다. 하위문화는 대중문화와 다르게 억압된 것들이 표출되는 요소를 보여준다.

 

대중문화이든 하위문화이든 이제는 소비중심 사회로 이환되어 더 이상 사람들은 사고와 비판을 하지 않은 세상이 도래했다. 지나친 억압보단 오히려 지나친 물질적 쾌락에 길들여져 우리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응시하기 것보단 단지 현실에 안주한다. 당장 길거리에서 나가 투쟁하는 시기는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물질적 혜택과 재미라는 쾌락에 의해 그런 행위에 대한 반감만 불러올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모순과 부조리는 감지한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되고, 그 문제를 볼 수 없거나 보지 않는 사회라면 어두운 사회가 될 것이나, 하위문화는 바로 그런 사회를 비꼬거나 뒤돌아 볼 수 있게 만든다.

 

강풀의 <26년>이나 최규석 작가의 <100℃>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는 작품이다. 역사의 왜곡과 수정 그리고 은폐가 이루어지는 현실사회에서 어떻게든 그런 불만들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기억에 각인되고, 단절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려하는 욕망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탄생은 바로 저런 거대한 흐름과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간다. 그런 이야기들이야 말로 오타쿠의 문화의 특성이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잘 안 되는 게 현실이고, 그것을 밝혀내어 새롭게 해석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의문이 작품에 드러나도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단지 스쳐가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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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조지 오웰의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다시 생각났다. <1984>의 해설을 적은 비평가의 글에서도 쾨슬러의 소설을 언급했지만, 사실 나는 <1984>의 마지막 모습에서 <한낮의 어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소비에트가 일국사회주의가 거의 완결될 됨 1936~1938년 대대적인 숙청기간이 지속된다. 모스크바재판의 4차례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남기고, 당시 스탈린에 의해 죽은 자가 수백만이란 말도 있고, 수천만이란 말도 있다. 러시아인구의 엄청난 비율이 당시 스탈린이 자행한 공포정치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 중에서 특히 많았던 것이 반() 사회주의자 내지 반() 볼셰비키주의자라는 점이다. 반대되는 세력이 자국에 있어서 스탈린과 그의 수하들은 부지런히 자신들의 적을 찾으러 다녔다. 문제는 그 많은 적들이 과거에 볼셰비키혁명에서 활동하던 자라는 점이다. 스탈린은 볼셰비키혁명 이전부터 레닌과 같이 활동했지만, 사실 그가 혁명 당시 관여한 것은 트로츠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혁명 이후 각종 상급기관의 위원회로서 참여했지만, 레닌이 죽고 나서부터는 서기장으로서 권위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자기에게 가시 같은 존재 혹은 가시처럼 될 수 있는 존재, 더 심하게는 자신에게 충성했으나 뭔가 자신하고 동질의식을 느낄만한 자는 모조리 죽이기 시작한다. 아서 쾨슬러의 소설인 <한낮의 어둠>은 회의적이고 암울한 사실적인 작품이다. 루바쇼프라는 볼셰비키혁명가는 볼셰비키 내에서 상당히 공적이 높았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하고, 차가운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 간수의 손에 죽게 된다. 그때 처형방법이 앞을 걸어가는 죄수의 목덜미에 권총을 사격하는 것이다.

 

<1984>를 예전에 읽을 때, <한낮의 어둠>을 읽기 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책을 읽은 후에 <1984>를 보면서 스미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스미스의 죽음은 영락없이 <한낮의 어둠>에서 나오는 루바쇼프의 죽음과 같게 나온다. 단지 차이는 루바쇼프는 변해버린 혁명적 가치를 보면서 회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신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반면, 스미스는 혁명적인 사고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빅브라더에 대한 환희를 가지고 마감한다. <1984>에서 스미스를 감시, 고문, 회유하는 오브라이언의 대사가 끔찍한 이유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마음에서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다.

 

오브라이언의 말과 스미스의 최후에서 스미스는 먼저 총살 전에 어리석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죽은 자들의 기록을 보면 다르다. 당시 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보다 가난과 부조리한 모순에 의해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교수형의 행어 앞에 갈 때, 도부수가 있는 처형대로 갈 때 그들은 자기의 불운한 인생을 이야기하고, 군중들은 거기에 호감을 보내고, 때로는 죄수를 구해내어 도주까지 시킨다. 죄에 대한 심판이 결국 그 죄에 대한 재판이 국가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론이 뒤따른다. 만약 국가의 심판이 틀리고, 세상의 여론과 하다못해 후대의 역사적 평가가 다시 재기되어 죽은 자의 명예가 되살아난다면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죄인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 죽게 된다.

 

그들의 죽음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결국 그 죽음은 잘 못된 것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틀리지 않은 것을 인정된다. 하지만 <1984>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애정부라는 고문과 처벌을 담당하는 기구는 스미스의 그런 정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끝까지 인정하여 그 사회와 국가, 심지어 군중들 사이에서 죄를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반항과 저항한 자가 잘못한 것으로 돌아가고, 그것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그 사회와 국가가 오히려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 후에 죽음은 국가도 개인도 사회도 군중도 비참하지 않게 다가온다.

 

오히려 비참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비참한 현실이 되나, 그들은 비참하다는 개념조차 잊을 것이다. 분명 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그 일은 없었고, 다시 새롭게 조작되어 역사는 실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조작에 의해 탄생된다. 언어는 구어인 영어에서 신어로 전이되면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단어는 한정적으로 줄게 되고, 인간의 사고능력을 축소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군주, 그 중에서 참주는 대다수의 인민들의 빈곤과 비참함으로부터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1984> 역시 그 맥락을 유지한다.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권력을 위해서이며,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층민들의 가난과 무지로부터 시작된다. 가난하면 오로지 동물적 욕망에 의해 인간은 작동하고, 무지하면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문제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영국사회주의가 움직이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당내 직원들끼리 외설적인 행동을 못하게 하나, 그 나라의 85%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아주 값이 싸고 저급한 포르노를 풀어놓는다. 그들에게 동물적인 본능만 충족하게 하여 무지가 권력의 힘으로 가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이 되는 것은 언제나 적이 필요한 것은 누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을 계속 권력으로 이양되려면 외부의 적들을 만드는 것보다 내부의 적들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과학 역시 미개한 수준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지성을 확대하므로 인간의 예속은 곧 권력의 자유로 이전된다. 이런 폭력성과 억압이 모든 이유는 그 폭력과 억압이 목적이며, 이로 인해 권력을 여전히 권력만을 추구한다. 텔레스크린으로 통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그 감시체계는 텔레스크린만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이전된다. 땀 냄새가 진동되는 파슨스의 모습은 그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스미스는 의도적으로 타도! 브라더를 실천하려 했다면, 파슨스는 잠자는 도중 잠꼬대로 타도! 브라더를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은 결국 파슨스의 아이에게 전해지고, 그는 애정부에 끌려와서 스미스와 재회한다. 자식이 부모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사회, 빅브라더의 세계는 가족 관계조차 통제하고, 더 나아가 남녀 간의 사랑도 통제한다. 적어도 스미스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스미스의 아내는 키도 크고 제법 몸매가 있는 여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스미스는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적응하지 못한다. 부부 간의 성관계에서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한 채 아내는 치마를 올린 채 침대에 누워 마치 인형처럼 천장을 바라본다.

 

아내는 오세아니아의 정부에서 제시한 정치적 이념에 대해 충실하게 따랐으며, 그것은 스미스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게 만든 과거의 아픔이다. 7년 전에 스미스에게 정부의 감시가 체계적으로 붙은 이유는 아내의 이혼이 원인이다. 스미스 부부의 행동에서 빅브라더의 세계는 그를 고은 시선으로 볼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감정조차 하나의 과도기에 불과했다. 인간의 성적본능 악제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인체에 전기 자극을 주어 성적 욕망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권력자들은 피지배계층이 사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근원조차 거부한다. 그 사회는 애초부터 틀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틀린 현상이 있어도 이게 과연 틀린 것인지 아니면 옳은 것인지를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에서 오로지 사회라는 큰 구조에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생각할 것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미 며칠 전에 있었던 일상과 뉴스조차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끊임없이 조작된 역사와 현실에 살아간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는 날조되고, 현실은 왜곡되었으며, 미래는 조작되어간다.

 

게다가 구어의 등장으로 언어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언어의 상실은 개념의 상실이고, 개념의 상실은 사고의 상실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세계라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평등만이 존재한다. 모두가 권력 앞에서 복종하고 따르는 완벽한 평등이 말이다. 과도기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그 시대에 있었던 문제를 적어도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문과 심문에 의해 기억이 조작되고, 의지가 상실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했다는 사실을 존재한다. 단지 사실이 타인에게 역사적 사실로 이어질 수 없는 게 비극이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에서 루바쇼프를 심문하는 클레트킨은 이성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루바쇼프는 매우 이성적이고 지성이 넘치는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몰락이 필요한 이유는 그 사회에 지식인이 가진 재산인 지식 그 자체가 그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루바쇼프는 혁명가로 활동하던 지식인이었기에 스탈린의 눈에는 상당한 가시거리다. 지식인들은 그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왜 빅브라더와 오세아니아국가는 골드스타인와 형제단을 빌미로 하여 스미스를 자극했을까? 실제 과거에 있었을 골드스타인, 있지도 않을 형제단의 가치는 자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부의 적을 색출하게 만드는 미끼인 셈이다.

 

그런 미끼가 있기에 여전히 빅브라더는 강력한 힘이 있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항하는 적이 있다는 것을 군중에게 알려준다. 증오 2, 증오주간에서 골드스타인은 솔직히 아무 힘 없는 노인으로 나오나, 오세아니아 정부에 일하는 당원들에게 그보다 더한 무서움은 없는 것처럼 나온다. 골드스타인이 만들었다는 그 책, 원래 토대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1984>를 읽기 전에 다시 정독했다. 스탈린과 소비에트정부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밝히는 이 책에서 빅브라더가 가장 적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밝히려는 자들이다.

 

물론 빅브라더의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많은 독재자와 독재자의 마인드를 가진 자들이라면 골드스타인과 스미스를 가장 예의주시할 것이다. 오웰은 프롤에게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무지는 힘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 역시 무지가 힘을 넘어 정의로 다가온다. <1984> 같은 세계는 되기는 어렵지만, 그런 세계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주변에 도청과 감청, 조작과 은폐 같은 일들이 넘치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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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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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예전에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김수정 작가의 <아기 공룡 둘리>는 내 어린 시절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에서 보통 30~40대 남녀 구분 없이 김수정 작가 작품을 만화로 보던지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것이다. <아기 공룡 둘리> 주제가 역시 추억이 담긴 노래이다. 그런 둘리라는 친숙한 이야기가 최규석 작가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었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둘리는 고철수와 고희동에게 이용당하는 모습만 나온다. 모두 어린 시절 순수하고 놀기만 좋아한 악동이었으나 커서는 악동이 아닌 악당 같은 모습도 나온다. 희동이는 다른 사람을 때리고, 철수는 자기 친구들을 이용해 먹는다. 또치는 동물원으로 팔려가고, 도우너 역시 외계인 연구가에게 팔려간다. 그나마 또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도우너는 해부를 당해야만 했다.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서로를 뒤통수를 날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어렸던 자신과 얼마나 많은 간격이 있는 것인가?

 

그나마 둘리는 그 옛날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모두가 변한 모습에 둘리의 좌절은 그야말로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마법을 쓰지 못한 둘리에게, 단순히 둘리의 슬픈 오마주는 둘리를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우리 일상에서 존재하는 이방인이란 존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겉모습이 독특한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보다 차별과 조롱 속에서 살아간다.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현실에 대한 풍자와 슬픈 그리고 고뇌가 넘치는 것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단순히 둘리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규석 작가가 만든 작품들을 모운 하나의 단편선집이라고 볼 수 있다.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재학 혹은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그의 세상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본 <습지생태보고서>는 재미 속에 숨겨진 풍자라면, 이 단편선집들은 그야말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풍자한 것이다.

 

그나마 맨 처음에 인디애니메이션 <셀마와 단백질>에서 나온 <사랑은 단백질>부터 나와서일까? 자기 팔을 잘라 족발을 파는 돼지, 자기 아이를 구워 치킨을 파는 닭,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나, 작품에서 말하는 현실적 모순은 상당히 날카롭다. 대학 자취생조차 돼지저금통에 담긴 동전을 꺼내기 위해 칼로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른다. 돼지저금통은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한다.

 

병아리를 튀김 통닭집 아저씨 역시 고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난한 우리 소시민은 오늘 당장 먹고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버려야하는 비극적 요소를 풍자와 해학으로 보여준다. 최규석 작가 작품은 만화로 봐도 충분히 매력을 느끼나, <사랑은 단백질>은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이 매력적이다. 최규석 작가 작품을 보면 상당히 현실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담긴 웃음에 대한 미학은 아마 최근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현실에 대한 관찰에서 약자가 당하는 모습에서 정말 리얼리티 그 자체를 부여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모두 열광할 때를 대비하여 <연평해전>이란 영화도 나왔지만, 경기장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환경정화라는 슬로건 역시 문제다. 최근 <두 개의 문> 내지 <소수의견>에서는 자신의 터전을 잃는 것에 대해 공권력에 저항하다 무참히 밟혀버린 서민의 눈물이 나온다.

 

<선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과연 이성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해서일까? 아니라면 그것이 무시된 것일까?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에게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도 싫었었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그것을 종용토록 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의해 흙탕물에서 뒹굴 수 없는 약자의 눈물 그리고 분노, 좌절감이 보인다.

 

왜 만화가 예술로 될 수 있을까? 일반적인 대중매체에 이런 불합리적인 존재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영상매체 같은 경우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고, 이 자본으로 통해 이익과 효과를 노린 자들은 대부분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화는 누구나 그릴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화면 위로 나타낼 수 있다. 글로 적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 묘사와 상황을 글로 표현하려면 많은 고민이 되나, 그림은 당장 그려내어 볼 수 있다. 대신 그 조건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기반이다.

 

최규석 작가를 전에 가까이 만날 수 있을 기회가 있었다. 토크콘서트에 가본 것과 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사장의 게스트로 참석해서 옆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때이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서 그를 억압하는 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의식이 살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늘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선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 모습보단 그 모습 이면에 가려진 것들, 즉 광학적으로 틀어보는 눈빛이 그의 작품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면 다소 폭력인 장면이 많다.

 

사람의 목을 잘라내는 장면도 등장하고, 피가 흐르거나, 구타하는 장면 등등도 나온다. 만화의 문제점이 폭력성을 유발한다고 하나, 정작 사회의 폭력성에 무감각한 현실이 더 심각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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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5-08-1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심 이거보구 바로 인터넷에 쳐봤는데.. 내용장난아니네요... 정말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ㅜㅠㅠ

만화애니비평 2015-08-18 18:01   좋아요 0 | URL
작가님의 날카로운 그림이 장난이 아니죠.

카스피 2015-08-1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끼는 책중의 하나인데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20 08:39   좋아요 0 | URL
대단한 발상력이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