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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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예전에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김수정 작가의 <아기 공룡 둘리>는 내 어린 시절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에서 보통 30~40대 남녀 구분 없이 김수정 작가 작품을 만화로 보던지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것이다. <아기 공룡 둘리> 주제가 역시 추억이 담긴 노래이다. 그런 둘리라는 친숙한 이야기가 최규석 작가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었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둘리는 고철수와 고희동에게 이용당하는 모습만 나온다. 모두 어린 시절 순수하고 놀기만 좋아한 악동이었으나 커서는 악동이 아닌 악당 같은 모습도 나온다. 희동이는 다른 사람을 때리고, 철수는 자기 친구들을 이용해 먹는다. 또치는 동물원으로 팔려가고, 도우너 역시 외계인 연구가에게 팔려간다. 그나마 또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도우너는 해부를 당해야만 했다.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서로를 뒤통수를 날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어렸던 자신과 얼마나 많은 간격이 있는 것인가?

 

그나마 둘리는 그 옛날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모두가 변한 모습에 둘리의 좌절은 그야말로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 마법을 쓰지 못한 둘리에게, 단순히 둘리의 슬픈 오마주는 둘리를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우리 일상에서 존재하는 이방인이란 존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겉모습이 독특한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보다 차별과 조롱 속에서 살아간다.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현실에 대한 풍자와 슬픈 그리고 고뇌가 넘치는 것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단순히 둘리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규석 작가가 만든 작품들을 모운 하나의 단편선집이라고 볼 수 있다.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재학 혹은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그의 세상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본 <습지생태보고서>는 재미 속에 숨겨진 풍자라면, 이 단편선집들은 그야말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풍자한 것이다.

 

그나마 맨 처음에 인디애니메이션 <셀마와 단백질>에서 나온 <사랑은 단백질>부터 나와서일까? 자기 팔을 잘라 족발을 파는 돼지, 자기 아이를 구워 치킨을 파는 닭,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나, 작품에서 말하는 현실적 모순은 상당히 날카롭다. 대학 자취생조차 돼지저금통에 담긴 동전을 꺼내기 위해 칼로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른다. 돼지저금통은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한다.

 

병아리를 튀김 통닭집 아저씨 역시 고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난한 우리 소시민은 오늘 당장 먹고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미래를 버려야하는 비극적 요소를 풍자와 해학으로 보여준다. 최규석 작가 작품은 만화로 봐도 충분히 매력을 느끼나, <사랑은 단백질>은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이 매력적이다. 최규석 작가 작품을 보면 상당히 현실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담긴 웃음에 대한 미학은 아마 최근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현실에 대한 관찰에서 약자가 당하는 모습에서 정말 리얼리티 그 자체를 부여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모두 열광할 때를 대비하여 <연평해전>이란 영화도 나왔지만, 경기장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환경정화라는 슬로건 역시 문제다. 최근 <두 개의 문> 내지 <소수의견>에서는 자신의 터전을 잃는 것에 대해 공권력에 저항하다 무참히 밟혀버린 서민의 눈물이 나온다.

 

<선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과연 이성적으로 자유의지에 의해서일까? 아니라면 그것이 무시된 것일까?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에게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도 싫었었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그것을 종용토록 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의해 흙탕물에서 뒹굴 수 없는 약자의 눈물 그리고 분노, 좌절감이 보인다.

 

왜 만화가 예술로 될 수 있을까? 일반적인 대중매체에 이런 불합리적인 존재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영상매체 같은 경우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고, 이 자본으로 통해 이익과 효과를 노린 자들은 대부분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화는 누구나 그릴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화면 위로 나타낼 수 있다. 글로 적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 묘사와 상황을 글로 표현하려면 많은 고민이 되나, 그림은 당장 그려내어 볼 수 있다. 대신 그 조건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기반이다.

 

최규석 작가를 전에 가까이 만날 수 있을 기회가 있었다. 토크콘서트에 가본 것과 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사장의 게스트로 참석해서 옆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때이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서 그를 억압하는 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의식이 살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늘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선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 모습보단 그 모습 이면에 가려진 것들, 즉 광학적으로 틀어보는 눈빛이 그의 작품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면 다소 폭력인 장면이 많다.

 

사람의 목을 잘라내는 장면도 등장하고, 피가 흐르거나, 구타하는 장면 등등도 나온다. 만화의 문제점이 폭력성을 유발한다고 하나, 정작 사회의 폭력성에 무감각한 현실이 더 심각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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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5-08-1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심 이거보구 바로 인터넷에 쳐봤는데.. 내용장난아니네요... 정말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ㅜㅠㅠ

만화애니비평 2015-08-18 18:01   좋아요 0 | URL
작가님의 날카로운 그림이 장난이 아니죠.

카스피 2015-08-1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끼는 책중의 하나인데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5-08-20 08:39   좋아요 0 | URL
대단한 발상력이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