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조지 오웰의 <1984>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다시 생각났다. <1984>의 해설을 적은 비평가의 글에서도 쾨슬러의 소설을 언급했지만, 사실 나는 <1984>의 마지막 모습에서 <한낮의 어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소비에트가 일국사회주의가 거의 완결될 됨 1936~1938년 대대적인 숙청기간이 지속된다. 모스크바재판의 4차례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남기고, 당시 스탈린에 의해 죽은 자가 수백만이란 말도 있고, 수천만이란 말도 있다. 러시아인구의 엄청난 비율이 당시 스탈린이 자행한 공포정치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 중에서 특히 많았던 것이 반() 사회주의자 내지 반() 볼셰비키주의자라는 점이다. 반대되는 세력이 자국에 있어서 스탈린과 그의 수하들은 부지런히 자신들의 적을 찾으러 다녔다. 문제는 그 많은 적들이 과거에 볼셰비키혁명에서 활동하던 자라는 점이다. 스탈린은 볼셰비키혁명 이전부터 레닌과 같이 활동했지만, 사실 그가 혁명 당시 관여한 것은 트로츠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혁명 이후 각종 상급기관의 위원회로서 참여했지만, 레닌이 죽고 나서부터는 서기장으로서 권위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자기에게 가시 같은 존재 혹은 가시처럼 될 수 있는 존재, 더 심하게는 자신에게 충성했으나 뭔가 자신하고 동질의식을 느낄만한 자는 모조리 죽이기 시작한다. 아서 쾨슬러의 소설인 <한낮의 어둠>은 회의적이고 암울한 사실적인 작품이다. 루바쇼프라는 볼셰비키혁명가는 볼셰비키 내에서 상당히 공적이 높았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하고, 차가운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 간수의 손에 죽게 된다. 그때 처형방법이 앞을 걸어가는 죄수의 목덜미에 권총을 사격하는 것이다.

 

<1984>를 예전에 읽을 때, <한낮의 어둠>을 읽기 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책을 읽은 후에 <1984>를 보면서 스미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스미스의 죽음은 영락없이 <한낮의 어둠>에서 나오는 루바쇼프의 죽음과 같게 나온다. 단지 차이는 루바쇼프는 변해버린 혁명적 가치를 보면서 회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신의 의지를 버리지 않은 반면, 스미스는 혁명적인 사고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빅브라더에 대한 환희를 가지고 마감한다. <1984>에서 스미스를 감시, 고문, 회유하는 오브라이언의 대사가 끔찍한 이유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마음에서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다.

 

오브라이언의 말과 스미스의 최후에서 스미스는 먼저 총살 전에 어리석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죽은 자들의 기록을 보면 다르다. 당시 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보다 가난과 부조리한 모순에 의해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교수형의 행어 앞에 갈 때, 도부수가 있는 처형대로 갈 때 그들은 자기의 불운한 인생을 이야기하고, 군중들은 거기에 호감을 보내고, 때로는 죄수를 구해내어 도주까지 시킨다. 죄에 대한 심판이 결국 그 죄에 대한 재판이 국가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론이 뒤따른다. 만약 국가의 심판이 틀리고, 세상의 여론과 하다못해 후대의 역사적 평가가 다시 재기되어 죽은 자의 명예가 되살아난다면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죄인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로서 죽게 된다.

 

그들의 죽음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결국 그 죽음은 잘 못된 것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틀리지 않은 것을 인정된다. 하지만 <1984>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애정부라는 고문과 처벌을 담당하는 기구는 스미스의 그런 정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끝까지 인정하여 그 사회와 국가, 심지어 군중들 사이에서 죄를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반항과 저항한 자가 잘못한 것으로 돌아가고, 그것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그 사회와 국가가 오히려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 후에 죽음은 국가도 개인도 사회도 군중도 비참하지 않게 다가온다.

 

오히려 비참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비참한 현실이 되나, 그들은 비참하다는 개념조차 잊을 것이다. 분명 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니 그 일은 없었고, 다시 새롭게 조작되어 역사는 실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조작에 의해 탄생된다. 언어는 구어인 영어에서 신어로 전이되면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단어는 한정적으로 줄게 되고, 인간의 사고능력을 축소된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군주, 그 중에서 참주는 대다수의 인민들의 빈곤과 비참함으로부터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1984> 역시 그 맥락을 유지한다.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권력을 위해서이며,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하층민들의 가난과 무지로부터 시작된다. 가난하면 오로지 동물적 욕망에 의해 인간은 작동하고, 무지하면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문제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영국사회주의가 움직이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당내 직원들끼리 외설적인 행동을 못하게 하나, 그 나라의 85%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아주 값이 싸고 저급한 포르노를 풀어놓는다. 그들에게 동물적인 본능만 충족하게 하여 무지가 권력의 힘으로 가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이 되는 것은 언제나 적이 필요한 것은 누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을 계속 권력으로 이양되려면 외부의 적들을 만드는 것보다 내부의 적들을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과학 역시 미개한 수준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지성을 확대하므로 인간의 예속은 곧 권력의 자유로 이전된다. 이런 폭력성과 억압이 모든 이유는 그 폭력과 억압이 목적이며, 이로 인해 권력을 여전히 권력만을 추구한다. 텔레스크린으로 통해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그 감시체계는 텔레스크린만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이전된다. 땀 냄새가 진동되는 파슨스의 모습은 그 사회의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스미스는 의도적으로 타도! 브라더를 실천하려 했다면, 파슨스는 잠자는 도중 잠꼬대로 타도! 브라더를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은 결국 파슨스의 아이에게 전해지고, 그는 애정부에 끌려와서 스미스와 재회한다. 자식이 부모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사회, 빅브라더의 세계는 가족 관계조차 통제하고, 더 나아가 남녀 간의 사랑도 통제한다. 적어도 스미스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스미스의 아내는 키도 크고 제법 몸매가 있는 여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스미스는 그녀와의 결혼생활을 적응하지 못한다. 부부 간의 성관계에서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한 채 아내는 치마를 올린 채 침대에 누워 마치 인형처럼 천장을 바라본다.

 

아내는 오세아니아의 정부에서 제시한 정치적 이념에 대해 충실하게 따랐으며, 그것은 스미스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게 만든 과거의 아픔이다. 7년 전에 스미스에게 정부의 감시가 체계적으로 붙은 이유는 아내의 이혼이 원인이다. 스미스 부부의 행동에서 빅브라더의 세계는 그를 고은 시선으로 볼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스미스의 감정조차 하나의 과도기에 불과했다. 인간의 성적본능 악제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인체에 전기 자극을 주어 성적 욕망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권력자들은 피지배계층이 사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근원조차 거부한다. 그 사회는 애초부터 틀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틀린 현상이 있어도 이게 과연 틀린 것인지 아니면 옳은 것인지를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에서 오로지 사회라는 큰 구조에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생각할 것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생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미 며칠 전에 있었던 일상과 뉴스조차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끊임없이 조작된 역사와 현실에 살아간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는 날조되고, 현실은 왜곡되었으며, 미래는 조작되어간다.

 

게다가 구어의 등장으로 언어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언어의 상실은 개념의 상실이고, 개념의 상실은 사고의 상실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세계라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평등만이 존재한다. 모두가 권력 앞에서 복종하고 따르는 완벽한 평등이 말이다. 과도기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그 시대에 있었던 문제를 적어도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문과 심문에 의해 기억이 조작되고, 의지가 상실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했다는 사실을 존재한다. 단지 사실이 타인에게 역사적 사실로 이어질 수 없는 게 비극이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에서 루바쇼프를 심문하는 클레트킨은 이성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루바쇼프는 매우 이성적이고 지성이 넘치는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몰락이 필요한 이유는 그 사회에 지식인이 가진 재산인 지식 그 자체가 그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루바쇼프는 혁명가로 활동하던 지식인이었기에 스탈린의 눈에는 상당한 가시거리다. 지식인들은 그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왜 빅브라더와 오세아니아국가는 골드스타인와 형제단을 빌미로 하여 스미스를 자극했을까? 실제 과거에 있었을 골드스타인, 있지도 않을 형제단의 가치는 자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내부의 적을 색출하게 만드는 미끼인 셈이다.

 

그런 미끼가 있기에 여전히 빅브라더는 강력한 힘이 있더라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항하는 적이 있다는 것을 군중에게 알려준다. 증오 2, 증오주간에서 골드스타인은 솔직히 아무 힘 없는 노인으로 나오나, 오세아니아 정부에 일하는 당원들에게 그보다 더한 무서움은 없는 것처럼 나온다. 골드스타인이 만들었다는 그 책, 원래 토대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1984>를 읽기 전에 다시 정독했다. 스탈린과 소비에트정부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밝히는 이 책에서 빅브라더가 가장 적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밝히려는 자들이다.

 

물론 빅브라더의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많은 독재자와 독재자의 마인드를 가진 자들이라면 골드스타인과 스미스를 가장 예의주시할 것이다. 오웰은 프롤에게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무지는 힘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 역시 무지가 힘을 넘어 정의로 다가온다. <1984> 같은 세계는 되기는 어렵지만, 그런 세계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주변에 도청과 감청, 조작과 은폐 같은 일들이 넘치므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