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사랑을 그리다
유광수 지음 / 한언출판사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대학교 은사님이 저술한 <고전, 대중을 엿보다>란 책을 읽었다. 고전이란 타이틀이 내걸 듯이 주로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였고, 조선시대가 아니라면 고려시대 정도가 적당할 정도다. 고전의 이야기에서 문헌이나 혹은 구술로 전해오는 과거의 인간들에서 우리들은 오랜 시간과 흐름이 서로 간의 벽이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들어다보고, 이야기의 주석을 따라 흘러가면 그들도 우리랑 많이 차이나지 않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단지 그 시대가 지금과 다르고, 왕이 있다는 점, 계급사회로서 양반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질 뿐이다.

 

단지 그런 시대적 흐름이 더더욱 이야기의 플롯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물론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장벽은 존재한다. 예전에는 그 장벽이 엄격하고 당연하기에 그저 불복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지금은 그 장벽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나 은밀하게 혹은 의외의 반응으로 우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누구나 알 듯 혹은 전혀 모르고 갈 듯 난해한 것이기에 그렇다. 고전에서 보이는 인간 역시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것 같기도 하나 때로는 아니다.

 

우리 인간은 뭐라 딱 하고 단정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런다고 어떤 때에는 어느 대상에 대해 정확한 관철과 표현되어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의 것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논리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사랑이란 단어를 보면 참 말로는 쉬워 보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 사랑해”라는 대사는 일상에서 가끔 볼 수 있고, TV 드라마에서 늘 십중팔구는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면 어떻게 그 개념을 정립해야 할지 난감하다. 사랑하던 남녀가 갑자기 마음이 돌변하여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으르렁댄다. 하다못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지난날의 모습조차 부정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성적으로 따라가기 어렵고, 감정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으며, 무의식적 성적본능으로만 따를 수가 없다. 진짜 사랑만큼 이성과 감정 그리고 무의식적 요소가 골고루 반죽되어야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류애는 이성적인 윤리적 가치관만 존재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길가다가 어려운 사람을 보고 돕거나, 매달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갑자기 구호를 보고 헌혈 정도 해주는 것도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다. 물론 그 기반에는 감정이란 것이 숨어 있다. 인간의 이성에서 판단할 수 있는 논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요소는 감정이 있기에 그렇다. 눈으로 보는 비참함, 귀로 듣는 신음소리가 인간적인 감정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에게 선의의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가언명령에서 정언명령은 가식 없이 윤리적 이성과 감정적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에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의 사랑은 조금 다르다. 무조건 사랑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보여주거나 혹은 감정의 기폭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평소 그렇게 연애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사랑이 이래저래 말하기는 우습다. 그런다고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뮤지션인 故 김현식의 “사랑 사랑 사랑”이란 가사를 들여다보면 사랑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것도 모두 사랑이라 한다.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는 꺼내기에 쉽고도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사랑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을 보면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닐까 싶다. 이런 말을 하면 내가 다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겠지만, 나는 나름 진보적이다. 사랑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긴다. 단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부터 생각한 게 우연히 이 책에서 나왔다. <고전 사랑을 그리다>의 저자분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입장에 대해 적은 게 있다. 단순히 그 글은 남녀관계로서만 다룬 게 아니라, 그보다 더 확장하여 우리의 인식과 역사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서 성적인 학대와 폭행 그리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다. 보통 사람들이 왜 이 문제에 그렇게 깊이 여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나는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그녀들은 모두 꽃다운 18세 전후에 강제로 차출되어 갔다. 일본에서 그녀의 도장을 받았다고 하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계약서 내용이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에서 모순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일본도 산업화나 우리나라의 산업화에서 시골에 막 올라온 아가씨가 취업알선센터에 가서 일자리 소개해준다고 말을 듣고 따라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윤락을 강요하던 업소였고, 그 아가씨는 미성년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그들의 강요와 폭행,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처지에 그 일을 맡았다. 그러면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위안부에 끌려간 그분들이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오고, 그것도 강제로 폭력적인 남자로부터 집단 성행위를 당하는 것에서 잦은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 것이라면 이게 정당한 일인가?

 

모든 여자가 그런 부당한 계기로 선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여성에 대한 편향적 관점이 이런 사태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어느 날 기가 차는 뉴스를 들었다. 남자인 나라도 지나가는 여자 중에서 매력이 넘치면 성적욕망이 올라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런 감정을 느끼고, 내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것을 인지하여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성범죄와 관련되거나 혹은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진 남성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혹은 그것이 틀린 것인지도 모르는 게 많다.

 

뉴스에서 왜 충격을 받았냐? 자신의 어린 여자조카를 10년 넘게 성폭행한 가족이 겨우 징역 4년이란 것이다. 나라면 최소 20년 이상을 살게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성인여성에 대한 성폭행도 나쁘지만, 어린이나 청소년 게다가 친척이라면 인간의 얼굴이 가진 자라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벌의 강도가 낮고, 성폭행 사건에 대해 너무 안이한 대응이 아닐까 싶다. 어느 정치인은 골프를 치다가 보조원에게 자신의 손녀 같다면 가슴을 만졌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가 일본의 사과만큼 중요한 게 한국 내의 인식이다. 결국 저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일본의 망언이나, 그 망언이 나오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문제도 있다.

 

사랑에서 욕정과 욕망은 중요하다. 인간에 대해 성현들은 신과 짐승의 중간에 있다고 한다. 완전하지 못하나 그런다고 짐승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서 짐승은 본능에 가까운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능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에 본능만 있다면 단지 기계적인 성행위만 있을 것이다. 감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이성으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참 인상이 깊다. 여성이 남성의 말을 믿을 때는 성행위 중이 아니라 그게 끝나고 나서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매력이 외모와 육체도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연속성이다.

 

나는 이런 가치관에 매우 크게 공감한다. 단지 나라는 인간이 특이한 사고방식과 개성이 있기에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알아주는 인간에게 끌리는 법이다. 내 자신의 지나친 것을 너무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내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모순도 겪는다. 인간이 서로 만날 때 모두 자신의 좋은 모습, 포장된 자신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가려진 본심 내지 본질은 숨기고, 어느 순간 그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는 당신이 그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또는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라고 말이다. 어느 인간의 성질은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욕하거나 시비 거는 것은 장점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어느 사람의 개성과 매력이 반드시 좋은 법만은 아니다. 어느 한 쪽만 보고는 인간을 판단할 수 없으나, 인간이 사랑에 의해 상대방에 빠지면 그것을 놓치게 되고, 뒤 늦은 후회와 충돌이 일어난다. 사랑에 대해 이유는 필요한가에서 나는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저자가 제시한 것처럼 사랑이 처음에 불 같이 붙다가 단지 그 불에만 집중하면 불이 모두 꺼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나온 답이 아닌가?

 

사랑한다는 말은 쉽고 사랑한다는 일은 어렵다. 이상과 현실은 뭐든지 벽과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좀 더 봐주고, 알아가고, 진행형이란 말은 무척 공감한다. 사랑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사랑이 시작은 나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짝이 정해진 이상, 새로운 사랑이 생겨 날아갈 수 있다고 쳐도, 그 전의 사람과 쌓아온 신뢰와 시간을 배신하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앞에 만난 사람을 배신하여 새로운 사람에게 가버리면, 언젠가 그 새로운 사람마저 배신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전 사랑을 그리다>를 보면 저자는 언제나 극단적인 자세를 피하고, 상황적 전황과 조건적 요소를 붙인다. 인간이 하는 일이란 뭐든지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온갖 변수가 튀어 오르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생긴다. 최대한 시대적 상황적 배경적 요소를 참고하여 사랑의 대상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이 되지 않으면 무척 무관심하게 대한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누가 어떤 일들을 당해도 무관계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이 되면 앞과 뒤를 보지 못하고 날 뛰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보고 그 사람을 향하여 조롱과 비웃음을 날린다고 해도 그 비수의 칼날이 내 등 뒤로 꽂히지 않으란 법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 형성능력이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목적을 물어보면 모두 처음에 출세를 바란다. 돈과 권력을 향하여 아귀의 수라장처럼 몰려든다. 그러면 막상 그게 되면 무엇을 할 건인가? 인생은 즐기려고 한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거나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서 한다면? 인간이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혼자서 즐거움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골프 27홀을 혼자 빌려 며칠이나 친다면 지겨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혼자서 견딜 수 있는 부류는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부분에 대해 저자분이 설명한 것이 있으나, 조금 이 부분은 맥락을 약간 놓친 게 아닐까 싶다. 히키코모리가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에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가상의 대상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현실을 외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왜 외면하게 되었는지는 저자분이 조금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이 글을 적는 독자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캐릭터를 좋아한다.

 

물론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집착하지 않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현실에서 뭔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오늘날은 과거처럼 대가족이 이루는 시대가 아니라 핵가족에 어릴 때부터 모두 같이 지내는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을 경쟁상대가 되는 적으로 만드는 삶으로 만들었다. 그런 삶에서 비상구가 되는 의지가 옆에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있다. 사랑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세상도 되기도 한다. 조금 그 부분만 잘 착안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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