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현재까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영도이다. 영도에 살아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나, 여기는 아직까지 지역명과 같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동네이다. 영도를 말하면 흔히 주변에서 영도구(影島區)라 하지 않고 영도시(影島市)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지방자치단체 관할기관에서 분명 영도구는 부산광역시 안에 포함된 지방자치단체이다. 그런데 영도를 두고 영도시라고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영도가 부산에서도 뭔가 조금 다른 지역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흔히 서울이나 또는 다른 지역에서 한강을 두고 강남지역하고 강북지역이 뭔가 다르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천이나 해안 혹은 산간지대를 사이로 기후가 대기기상학적으로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부산에서 그런 지역에 몇 군데가 있으니 그 중에 하나가 영도이다. 영도다리 하나를 차이로 뭔가 기상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영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싼 섬이다. 섬이지만 상당히 부지가 넓은 편이라 교량이 지금 4개를 두고 이래저래 왕래를 하고 있다. 영도(影島)라는 말에서 그림자 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장난으로 사람들은 Young Island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영도>를 영문으로 <Shadow Island>라고 정확히 적었다. 그림자의 섬, 왠지 태양을 빛이 보이지 않고, 태양빛 뒤로 가려진 그림자가 음영으로 가득한 곳이 영도라는 점이다.

 

영도지역에 대한 리얼리티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지만, 너무 지나친 감이 적지 않게 있었다. 영도에 거주하면서 방파제에 대낮부터 고등학생들이 담배 피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주택으로 둘러싼 공터에서 담배 피는 학생도 별로 없다. 옥상에 올라간 몰래 담배 피는 것이라면 몰라도 지나치게 미국 할렘의 모습이 생각났다. 뭔가 반은 맞은 것 같아도 반은 아닌 것 같았다. 영도가 과거에 조직폭력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영도와 남포동 중심으로 유명한 조직폭력단도 많았고, 동네 자체가 흉흉한 분위기도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다고 영화에서 스마트폰이 등장하는 점에서 과거만큼 동네의 치안이 위험하지 않은 점이다. 대낮부터 조직폭력배가 남항동이나 대평동 일대의 항구에서 사람들에게 찾아가 사기대출로 폭행을 휘두르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단지 영도다리 아래에 위치한 봉래동 일원에 보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종종 길을 가다 보면 스타렉스나 카니발 같은 차량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여자들이 내리는 것은 지나가다 본 적은 있다. 확실히 영도라는 지역을 모르는 부산 밖의 사람들이 보면 영도는 마치 범죄로 넘치는 고담시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라는 설정이 실사영상이란 점에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현실의 조건으로 따라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SF나 판타지장르가 아닌 이상 현실적 조건, 리얼리티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조건에서 리얼리즘으로 다가왔다고 해도 현실과 역사적인 맥락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어중간하게 리얼리티를 부여한 것이다. 사실 영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영도할매귀신 눈에 걸리지 않게 이사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영도할매귀신이란 말은 어째 보면 미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의 문화인류학적으로 신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가령 옛날 외국인들이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오면 항상 영도를 보게 된다. 밤에 유람선을 타고 온 외국인들이 영도를 보며, 부산이 엄청난 발전한 곳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아마 그때가 1960년대 이후일 것이다. 영도를 보면 높은 곳까지 불빛이 들어와 있는 장면에서 그들은 영도에 엄청나게 많은 고층빌딩이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사실 빌딩이 아니라 영도는 평탄한 섬이 아니라 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그 높은 곳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니 불빛이 고지대까지 보인다.

 

영화 <영도>에서 주인공 영도가 사는 곳은 영선동 산복도로가 있는 곳이다. 여기는 영화로 촬영하기 아주 좋은 장소다. 말 그대로 서민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고, 아파트 내에 공동화장실이 있고, 집마다 평수는 대략 12평 내외로 아주 작은 규모다. 이런 집은 영도 영선동 이외에 부산역에 있는 초량동 위로 올라가면 수정동이 있다. 거기 역시 부산의 산복도로 중에 유명한 곳이다. 과거 부산에 빈곤계층이 사는 곳이 상당히 많았는데, 점점 그런 주택형식은 줄어들고 있지만, 부산 영도 안으로 들어가 태종대가 있는 동삼2동에 가면 수세식이 아닌 푸세식 변기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영도할매귀신의 이야기는 결국 부산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에 하나가 영도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교통, 높은 지역, 삶의 주거가 안락하지 못한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이 많고, 그들이 계속 거기 사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제대로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산업근대화 시기에 많은 피난민과 구직자들이 몰려왔을 때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지대가 저렴한 영도로 몰렸던 것이다. 영화 <영도>에서 영화제목도 주인공의 이름이 영도라는 점, 형사들이 찾아와 영도에게 영도 이외에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영도라는 이름, 영도라는 지역, 영도라는 주박은 결국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영도는 태어나 어린 시절에 그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연쇄살인마였고, 도끼로 시체를 토막 내는 것도 모자라 인육을 먹었다. 살인마의 아들, 그것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로 다가왔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니지만, 자신에겐 괴물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억압을 당한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영도는 영도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에게 소외와 고독 그리고 차별을 선사했다.

 

그의 친구들은 2명만 나온다. 단짝 친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사촌형 아래서 자란다. 그러다보니 가정환경에 충실하지 못하여 비행을 저지르고, 학교생활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영도가 왜 불량해졌는가? 여기서 이 영화는 우리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낸다. 조직폭력단에 들어간 영도는 거기 두목에게 불려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목은 영도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가지고 영도를 가지고 조롱한다. 영도친구 꽁이 영도를 데리고 사촌형에게 가서 그 일을 이야기하자, 사촌형은 장어구이 식당에 가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다.

 

어둠에 사는 인간들이 사회의 문제와 인권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나, 거기서 엄청난 불평등을 볼 수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2가지의 불평등을 제기하는데, 하나는 신체적 자연적 불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사회적 불평등이다. 영도와 꽁에게 얻은 불평은 후자이다. 대부분 한국사회이든 혹은 루소가 18세기 프랑스를 살았든지 바로 2번째 불평등이 우리 인간사를 고통으로 내몬다. 영도는 처음부터 나쁜 인간이 아니라 나쁜 인간으로 되어야만 했다. 결국 나쁜 인간이 된 영도는 아버지에 의한 피해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로 인해 망가진 인생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것이 고민이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작중에서 영도는 성적 욕구도 거의 없었다. 물론 형 일도의 아내, 아니라면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부모를 잃은 미란에게 은근히 성적인 환상을 품지만, 이내 그 환상의 세계인 꿈은 악몽으로 변한다. 영도를 누운 채로 위에서 성행위를 하던 미란이 영도의 심장을 꺼내어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도가 성적인 욕구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범죄로 동네에서 제대로 살 수 없었다. 얼굴을 봐도 누구에게 얻어맞았고, 그때 영도의 형을 데리고 가출한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의 죄를 계속 이어받아간 영도에게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가 우연히 만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도라는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하다못해 어머니가 사는 곳을 찾아 서구로 가는데, 바다 넘어 영도 봉래산이 보인다. 영도를 나나도 영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운명론적인 비극이다.

 

이렇듯 영화 <영도>는 인간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에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을 계속 강조한다. 유일하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영도가 죽어야 가능했다. 안타까운 것은 영도는 방황과 고독 그리고 허무 속에 살아가다 마지막으로 삶의 목표를 찾아가려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미워했으나, 집 앞에 두고 간 커다란 곰 인형은 수배자로 도망치던 아버지가 나두고 간 것이다. 아버지의 죄에 고통스러운 인생이 되어도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하나의 그리움이 담겨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애인이던 술주정뱅이 노인을 폭행하던 이유도, 그 노인이 어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죄보다 더 분노로 다가온 것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무책임한 태도였다. 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결국 영도를 극단적 행동으로 이어간다.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을 조금 바꾸게 된 동기는 미란의 아이 미미 덕분이었다. 일도의 아내 미란은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영도의 심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도는 죽고, 미미는 남았다. 미란은 미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지켰다.

 

다른 사람에게 모두 거칠었던 영도이나, 미미를 건물 밖에 놀게 하고, 노래방에서 일당으로 일하던 미란을 억지로 붙잡아 영도는 자신의 집에서 잠재운다. 미란이 미미를 걱정하고 아끼던 모습에서 다른 어른들과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자신을 버린 여자 영도의 어머니 미미를 끝까지 지키던 미란). 후반부에 영도가 죽기 전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울려온다. 그 발신자는 미란, 영도는 형 일도가 죽은 후에 미란과 연락하고, 미미하고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던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큰 곰 인형을 산 이유는 자신이 가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미미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 목적은 무참하게 파괴된다. 자신의 저지른 죄의 대가가 끝까지 따라 붙은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쳐봐도 결국 그는 살 수 없었다. 이때까지 그런 비극적 인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앞으로는 거기서 벗어나 새 삶을 찾으려 해도 세상이 역시 그를 절망의 그늘로 데리고 간다. 영화 <영도>라는 제목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Shadow Island이다. <영도>라는 제목으로 영도에서 촬영하고 영도라는 주인공이지만, 영도는 꼭 반드시 부산에 있는 영도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쇠사슬은 언제나 우리를 짓누른다. 영도라는 말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은 인간 누구라도 가질 수 있고, 괴물은 처음부터 탄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과정의 연속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한 선택되어지는 게 비극이다. 영도는 가난과 고독 그리고 절망이란 운명에서 살아간다. 영도에서 살아가는 나도 영화 <영도>만큼은 절대로 될 수 없겠지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영도라는 운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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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2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둠에 가려져 있는 동네 영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문장 웃깁니다.
만애비 님 생각할 때마다 항상 뾰족구두 가지고 비오는 날 뛰어다니던 풍경이 떠오르는군요... ㅎㅎㅎ 요즘 왜 네버 블로그는 잘 안 하슈 ?

만화애니비평 2015-09-26 11:10   좋아요 0 | URL
그게 그래 웃기는 겁니까??ㄴㅋㅋㅋㅋ

진격의 오덕이 생각나는군요.요새 공부하다고 정신없어요...
 
망명 - 윤한봉 회고록
윤한봉 지음 / 한마당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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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재판에 대한 뉴스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에 대항하던 시민들의 유해가 가족 품으로 온 장면이었다. 자식과 형제 그리고 친구의 차가운 몸과 붉게 젖은 천을 바라보며 그들은 원통한 눈빛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으나, 군인이 민간인을 총으로 살해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국군이란 헌법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지켜야 하나, 때로는 권력자들의 눈빛을 따라 움직일 때도 있다. 이른바 충정훈련, 공수부대를 오랫동안 훈련시키면서 전투요원의 마음에 진압당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때려죽여야 하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5월 17일 그들의 작전이 시작되고, 18일부터 누군가의 지시 아래 총포가 울린다. 아직도 그 총포를 지시한 지휘관은 누구인지 그 윗선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만약 진짜 518사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총을 쏘게 한 지휘관은 누구고, 그 명령을 내린 상부기관과 상관의 이름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국가의 위기를 모면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라면, 분명 그것은 바른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35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 지시를 내린 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

 

만약 진짜 북한의 음모와 반국가적 폭동이라고 한다면 그 지휘관의 이름과 상관의 이름은 분명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인지 모르고, 그것을 전혀 밝혀들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518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전혀 다른 사건이란 점을 반증하게 된 것이다. 진짜 북한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희생자 중에서 임신한 여성이나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나, 어린 여중생들이 왜 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비논리와 비이성적 억척은 거짓의 논란과 위증의 말꼬리를 잡고, 그런 것 같더라 혹은 그랬다고 하네요. 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쏟아낸다. 518의 역사, 그리고 최근 정치권에서 광주중심으로 한 정당을 창당, 왠지 모르게 역사의 흐름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상황이 보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이번에 읽은 책이 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이 저술한 <망명>이란 책을 읽으면서다. 본래 <똥가방>이란 이름이란 책으로 발간했지만, 내용을 보충하고, 다소의 에필로그를 추가하여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윤한봉은 참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역사에서 빠질 수 없던 인물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대한민국 헌법은 권력자의 무력 앞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때부터 많은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나 군사정권은 고문과 감금 그리고 심지어 사법사형까지 일삼는 잔혹한 추태를 보였다. 윤한봉은 1970년대부터 유신에 대한 저항으로 체포되어 구형되었고, 출옥 후에도 계속 민주주의운동을 하였다.

 

제3공화국 말, 윤한봉은 강제로 감옥에 끌려와 각종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1026사건 이후 출옥되자, 조만간 1212사건이 일어난다. 군부가 장악하던 시절, 윤한봉은 1980년 5월이 오기 전부터 신군부가 25일 전후로 광주에 유혈진압을 할 것이란 말을 한다. 모두 다 아닌 것 같다고 하나, 막상 18일이 되자 광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윤한봉의 친구와 동무들은 무참하게 진압부대의 총과 칼 아래 주검으로 변하고, 윤한봉은 수배자로 몰리자 주변의 의견에 따라 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미국으로 가는 배, 35일 동안 더운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배고픔, 외로운, 억울함, 죄책감으로 사무쳐 괴로워하며 표범(leopard)호에 탑승한다. 미국에 내릴 때 그는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고, 자유가 없는 고국을 떠나 낯선 타국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1981년대부터 시작하여 12여년을 타국에서 보낸 후 1993년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가난도 그런 것이지만,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한참 후이고, 미국정부와 미국 내 한국대사관의 공작으로 계속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미국에 한국청년연합회를 결성하여 미국 내 여기저기 흩어진 동포를 모우고 그들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망각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고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이 남영동 고문실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받는 것을 소식으로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보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그들이 자신의 망명 때문에 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 윤한봉은 자신이 감옥에 수감되고 나올 때, 아버지가 노환으로 사망한 것을 들었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점에서 그는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돌아간다 해도 무사할지 모르는 것이다. 벼랑이 언제나 눈앞에 있는 그의 운명에서 그는 불굴의 정신으로 미국 LA 한인사회를 차츰 변화시켰다. 지금의 미국 한인동포 모임에서 그가 남긴 업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미국에 온 이민자들, 고향을 잃은 사람과 고향을 등진 사람들, 그래도 한국은 우리의 고향이고 그리운 흙이 있는 곳이었다.

 

이 책을 보며 느끼지만, 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든 바르게 정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도 불리한 상황은 계속 압박하고 때에 따라서는 박해는 지속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억압하는 무리에 대해 다른 조직이나 사람들과 연대하겠지만, 그 연대하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명분이란 이름으로 숨기며 각종 특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 겨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여름의 더위와 외로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막상 어느 상자리가 차려질 것 같으면 어김없이 달려 들어와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518재단을 발기했을 때 윤한봉이 처음 공로가 많았지만, 막상 그 행사가 열린 당일에는 윤한봉을 시기하는 무리가 나와 묘소에 참배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 윤한봉이 했던 일 중에 아마 DJ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지자가 있더라도, 만약 지지자들의 비판이 있으면 그것을 듣고, 반성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호남권에서 DJ의 비판은 곧 적이 되어야 했고, 윤한봉은 그것을 바로 실시하던 사람이었다. 광주에서 518의 슬픔은 윤한봉 역시 크다. 그러나 그 슬픔의 공로를 정치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DJ정신의 계승에서 김대중 대통령 사망 이후 보이는 정치권의 행태는 왠지 참 안타까웠다. 2007년 윤한봉이 사망했으니 이미 그 전에 <망명>이란 책이 발간되었다. 그런데 벌써 그것을 예측하고 문제가 터졌다. 인간에 따라 공과 실은 나누어지나, 공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실책을 보고, 그것을 다시 반성하여 새롭게 나가는 게 바른 길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는 전혀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작년에 우연히 광주에 갈 일이 있어서 망월동에 있는 518묘지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다음에 갈 일이 있으면 윤한봉의 묘지 앞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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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2 08:43   좋아요 0 | URL
아~!
제 전공은 정치와 철학이 아닙니다.
저는 공대출신입니다. 전공이 환경인지라 환경 자체가 아주 조금 인류학이랑 관계가 있다보니 인류학쪽으로 관심을 돌리다가 이렇게 오게 되었군요.

오덕은 진화하는 겁니다!
 
나비의 노래 일본군 위안부 만화
정기영 지음, 김광성 그림 / 형설라이프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최근 일본 아베정권이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시키려는 정책을 시도하려 하고, 과거 다른 국가를 침략한 역사를 부정하려고 한다. 침략은 했으나 그것은 그 나라를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은폐하려 한다. 그렇기에 그 시대 일본이 저지른 행위를 진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다른 식으로 말한다. 일본에서 유네스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군함도, 그것은 완전히 지옥의 섬이었다. 조선에서 징용한 사람들을 강제로 노동하여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그것도 더위와 피로,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의료의 혜택조차 노동력의 징발여부만 가렸다.

 

그런 과거의 행위가 왜 지금에 논란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누군가 그런다.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그것은 우리하고 상관이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일은 당장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정치적 형태가 자꾸 과거의 모습을 속이고, 군사적인 요소를 부각한다면 또 다시 저런 문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영향으로 100% 재현되지 않겠지만, 어디서 모른가 저런 비인간적인 행동까지는 아니나, 많은 인간들을 절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라는 것은 왜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계속 대화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만약 우리가 어느 위기에 빠지면 일본은 그때도 야욕을 보이며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고, 그 기억에서는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이 많다.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부담을 준다. 과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단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지 않는 꽃>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실재로 존재했던 일들, 영원히 지옥의 악몽에서 풀려날 수 없는 저주, 사실상 마음 깊이 담아두는 것만으로 상처가 깊은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란 상당한 고통이다. 한국사회는 여성에 대한 기준이 참으로 난감하다. 성폭행은 분명 나쁜 것이고, 성폭행은 당한 대상은 약자인 여성이 많으나, 그들의 피해사실을 제대로 말하기가 어렵다. 과거 형사나 경찰이 피해 진술과정에 대해 들어보면, 피해여성에게 상황묘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 해 달라고 한다. 그것은 피해자가 아주 두려워하던 순간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충격으로 인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진다.

 

예전에 성폭행 당해본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피해과정을 숨기거나 고소를 취하하던 이유가 바로 여기다. 재판과정에서 다시 그 상황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더 심각하게 찌르는 것과 같다. 위안부 할머니는 아마 그런 성폭행 피해여성에 비교하면 괴로움이 더 심할 것이다. 집단성폭행에다가 잔인한 고문과 살인위협에 항상 시달렸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 꽃>에서 처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할머니가 공장에 일하러 간다는 말만 믿고 따라가는데, 알고 보니 동남아 일본군 진영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으로 계속 패배를 겪고 있었고, 위안부의 공급은 패배의식에 짓눌린 일본군들의 사기를 충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남자의 성적인 욕구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한편으로 정복욕을 충족시켜주는 해결방안이었다. 전 근대적인 사회에서 전쟁이 나면 항상 승리한 침략자는 마을 안에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자신의 첩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전쟁에서 항상 전리품으로 다루어진 것이다(그런다고 여성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몰살당하는 남성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 위안부는 현지에서 약탈이 불가능한 일본군들이 강제로 약탈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행위이다.

 

작품에서 사병을 관리하고, 일본군의 복무신조를 지켜야 하는 장교가 오히려 위안부 처소 안으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다. 이미 전쟁에 의한 정신적 외상이 극으로 치닫고, 피해의식과 파시스트의 광적인 요소는 학살과 자살 등과 같은 만행으로 연결된다. 예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 16살의 꽃다운 소녀들이 끌려오면 얼마나 두렵고 괴로워했을까? 아직 몸과 마음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강제로 성노예로서 성폭행 당한 소녀들은 자신의 성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 강제로 칼로 성기부분을 찢은 만행을 들었다.

 

<지지 않는 꽃>에서도 그 내용은 나왔다. 다행히 더 끔찍한 장면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일본군들이 전투를 벌일 때 자신들의 병력피해를 줄이기 위해 위안부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일부러 진열의 앞에 서게 하여 적군들이 쏘는 총알을 대신 맞게 하는 총알받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한 많은 세상, 희망도 없이 그저 유린당한 채 죽어야 하는 그녀들의 운명에서 일본의 사죄는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패악을 저지른 자들은 현재의 자는 아니지만, 그것을 잊으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점이다.

 

독일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면서 많은 지탄이 되었는데, 그것은 인종차별로 이어지고, 인종차별의 극단성은 테러리즘으로 이어진다(물론 그걸 저지르는 광신자들은 정의라고 믿는다). 일본의 사과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망각하면 망언을 계속하고, 일반 국민들까지 그런 나쁜 정신이 유포되어 한일 양국 간의 우호가 나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조건 사과한다고 해서 사과 받는 쪽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와 용서로 통해 서로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행은 저지른 일본은 상당한 젊음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과 형, 친구들이 시체로 돌아오거나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으니, 피해자가 가진 피해의식만큼 가해자에 동조하던 자들의 주변인들도 피해의식을 가진다. 결국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인해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야 한 게 전쟁이란 허무이다. 국가정부의 오류로서 전쟁과 전투로 죽은 군인들은 죽을죄가 없이 죽어야 했던 희생자다. 물론 그들이 전쟁 중에 무고한 자를 죽였다면 죄는 된다. 단지 그 죄를 만들도록 한 자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그런 자들의 밑에서 이익을 챙기고, 이권을 이어받은 자들은 용납할 수 없다.

 

아베정권이 오면서 일본전쟁범죄 가문의 후손들이 정계와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자국의 국민뿐만 아니라 타국의 국민들까지 위험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자신의 망상이 국가의 존립과 위엄이라 말한다. 피해자를 두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발뺌 하는 현실에서 <지지 않는 꽃>을 보는 것이란 바로 우리의 미래까지 지키는 것까지 연결된다. 꼭 위안부 할머니라 하여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소녀들이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일어나면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저래 당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보편적 조건에서 일어날 현실로서 접근한대도 그건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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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21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안부 할머님들 다큐 보니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연을 하고 난 뒤엔 끙끙 앓으시더군요. 잊으려했던 상처를 다시 꺼내 헤집으니 상처가 또 터지는 거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상태를 견디실 거라 생각하니....
시간이 약이 된다는 말, 아픔과는 상관없는 참 쉬운 말이라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9-21 09:31   좋아요 0 | URL
시간이 약인 것은 아픔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아픔을 망각하게 해주는 진통제일 뿐이죠. 진통제 맞는다고 병이 치유되는 게 아니니깐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는 마스다 미리의 <수짱의 연애>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다. 수짱이 카페 일을 그만두고, 보육원에 취업하여 우연히 쓰치다라고 하는 남자를 만난다. 쓰치다는 수짱이 카페 일을 할 때 그 건물 옆의 서점에서 일하고 있던 점원이었다. 성격을 보면 소탈한 면과 소심한 요소가 보이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과거의 일본과 달리 이제 일본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쓰치다의 한 달 월급 이야기나 나오는데, 그의 임금은 월 25만엔이라고 한다.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250만원이다. 이 책이 2012년 일본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쓰치다의 나이 32 전후로 그 정도 월급이면 무척 박봉인 점을 보여준다. 그의 성격과 더불어 그의 월급으로 나오는 숫자는 그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난다. 왠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현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현실이란 점이다. 마스다 미리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분명 심리적인 요소를 잘 보여주고, 상황에 대한 절묘한 묘사를 잘 나타내는 것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현실적 조건, 즉 리얼리즘이란 사실주의적인 요건이 들어간다.

 

보통 만화작가의 연애 장르에는 사실주의적 요소보단 오히려 낭만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낭만주의란 낭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점이다. 연애의 조건에서 현실의 일상적 모습보단 오히려 그 과정을 다루는 요소가 많다. 그래서 연애 장르에 큰 매력이 느끼는 것과 그렇지 못한 점은 현실적인 조건을 너무 무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박탈감과 욕망은 작품으로 하여금 신화적인 요소를 부여한다.

 

여자에게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지위가 낮은 여성 혹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여성이 부와 지위를 갖춘 남성을 원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 드라마와 영화의 주요 소재로 써먹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은 현실 안에서 가상의 이야기로 될 뿐이지, 일반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드물다. 물론 0.001%가 된다고 하여 안 되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은 분명하나, 나머지 99.999%는 분명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존재한다. 경제적 조건이 연애의 조건이 되는가에서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서 그것을 은연히 드러낸다.

 

수짱이 그동안 왜 남성과 사귀지 못했는가에서 그녀의 직장을 보면 남성이 없다는 점이 드러나고, 그렇다면 수짱이 카페와 보육원에 일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일본사회의 상류계층이 아니라 중하위계층에 가깝다는 점이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 보통 일본작가의 작품과 다른 이유는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이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도 쓰치다는 평소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소시민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집이나 회사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쓰치다 같은 경우 자신의 현실을 어렴풋이 잘 알고 있다. 월급이 적은 것과 그에 따라 연애도 힘들다는 점이다. 사랑은 돈과 관련 있는지 혹은 없는가에서 사랑의 조건에서 돈은 필요하다. 단지 돈으로만 인간을 대할 수 없기에 적당한 균형관계가 필요하다. 쓰치다 월급을 한국의 32살 남자와 비교하여 거의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남자와 비슷한 여건이다. 거기다 임대받아 사는 집세와 생활비를 제외하면 그가 한 달에 여유로 가질 수 있는 돈은 매우 적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건이 어려울 경우 일상생활에서 활동이 제한받는다. 그가 평소 계속 집과 회사 가끔 들리는 부모님 댁(명절)과 큰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은 그의 생활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평소 하는 것이랑 독서생활이다. 쓰치다가 서점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어릴 적 큰아버지 댁에 가서 장서에 꽂힌 책들을 보고 나서부터다. 일본 문학 소설 응모대회에서 상을 받은 작품을 다 읽을 정도이며, 그의 독서생활이 직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신 철학과 사회학보단 소설 위주란 점에서 그의 성격이 매우 감성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감성적인 남성들은 일반적인 여성과 조우하기 어렵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명확히 있기에 그것과 유사하거나, 혹은 자신의 감성적인 감각으로 왠지 느낌이 끌리는 대상에게 마음을 품는다.

 

쓰치다가 마음이 약한 남자라는 것은 작품 내에서 큰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할 때 큰어머니가 쓰치다보고 큰아버지의 병환으로 우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나중에 진짜 큰아버지가 병환으로 죽자, 가족들 중에서 쓰치다만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집으로 온 큰아버지의 유품을 보며 쓰치다는 혼자 서럽게 운다. 남들에게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쓰치다는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소개팅에서 잘 보여준다. 서점 동료와 그 동료의 여자지인은 야요이, 야요인 친구까지 4명이서 자리를 마련한다.

 

야요이 친구와 독서취향이 비슷하나, 그녀는 애인이 있었고, 결혼도 준비하려던 사이다. 소개팅을 나오고 말고는 자유지만, 결혼을 앞두고 소개팅에 나온 것은 조금 치사한 게 아닌가 싶다. 애인 없는 사람이 있기에 만든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재미 반으로 나온 것이라면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쓰치다는 야요이와 사귀게 된다. 야요이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과 사귀려고 했던 것조차도 쓰치다는 상상할 수 없었다. 가령 나도 군대전역 후 학원에 다니다 같은 수업을 받던 사람들과 친해지다가, 그중 한 여성과 친해져서 소개팅을 부탁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주선한 여성이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성격차이와 기호적 차이(나는 기관지가 좋지 않아 담배연기를 싫어한다)로 인해 깨졌지만,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 많이 놀랐다. 마스다 미리 작가가 여성이고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남성의 심리를 잘 보여주었다. 대신 조금 더 추가했으면 좋을 부분은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사와코의 심리를 여성이 아닌 남성에 대해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와코는 나이가 40이 되지 결혼에 대한 문제도 그렇지만, 자신이 27살 이후로 남자와 사귀지 않아, 늙어가면서 자신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상실할까 겁이 났다.

 

여성의 매력에 대한 사와코의 자신감은 떨어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성적으로 욕구불만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32살 전후인 쓰치다에게 그런 욕구불만을 조금 반영했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부드럽고 성향의 남자를 초식계라고 하는데, 최근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 유형은많이 등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쓰치다는 초식계 남성의 전형적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남성에게도 욕구불만 요소는 있다는 점이다. 작중에서 쓰치다가 얼떨결에 야요이에게 자고 갈래?” 물어본 장면에서 조금 억지스럽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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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의 연애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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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의 연애>는 마스다 미리 작품에서 수짱 시리즈 4번째 마지막편이다. 이번 편에서 수짱은 나이가 37살이 되었다. 이미 30대 후반을 향한 수짱에게 현실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단지 전에 카페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남자들이 왔으나 보육원에 오고부터는 남자성인 대신 남자 꼬마들만 넘친다. 그나마 같이 일하는 분이신 원장님이 남자지만, 사모님이 조리사로 계시고, 그 조리사로 일하는 사모님의 나이가 일흔이라 한다. 일흔이면 노인에 해당되는 나이다보니 수짱에게 연애의 기회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수짱에게 고민이 오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단지 매일 하루를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해 요리도 하고, 농장도 일꾸며, 같이 놀아준다. 수짱다운 성격인지 매사 꼼꼼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 그런 일상에 묻힌 수짱은 자신의 처지를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와코를 만나도 혹은 결혼하여 아이를 대동하는 마이코를 만나도 뭔가 고민이 풀리는 것보다 단지 그 순간 잊어질 뿐이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서점에 가서 쓰치다를 만나게 된다. 쓰치다는 수짱이 카페에서 근무할 때 가끔 점심식사를 하러 온 손님이었다. 수짱이 카페에서 일할 때 그가 가끔 올 수 있었던 것은 쓰치다의 근무하는 곳이 수짱의 카페 옆에 있었다. 쓰지다의 업무는 서점에서 근무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수짱의 나이가 37일 때 쓰치다의 나이는 33세이었다. 수짱의 나이가 4살이 더 많았던 것이다.

 

쓰치다를 거리에서 본 수짱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긴 것이다. 아침에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의 식단을 준비하려는 수짱이 갑작스레 쓰치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의 연락처나 메일 정도 알아보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항상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또는 고민해야 할 거리가 있어도 다른 잡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법이다. 수짱은 언제나 단조로운 일상에 뭔가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했다.

 

수짱이 우연히 도서를 구매하기 위해 예전에 자신이 근무한 카페 옆의 서점에 온 것이 아니라 사무실 근처 서점에 방문했다. 그런데 그곳에 쓰치다가 먼저 와서 책을 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수짱은 당황하나 의외로 그를 만난 것에 큰 호감을 느낀다. 수짱이 원하는 책을 위해 서로 이야기하다가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중에 같이 식사도 한다. 식사를 하고 난 후 쓰치다는 갈등에 빠진다. 쓰치다는 수짱이 아닌 원래 만나던 여자 친구 야요이가 있었던 것이다.

 

야요이와의 관계는 얼마나 신뢰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야요이를 밤에 만나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가는 쓰치다의 모습에서 뭔가 둘 사이의 벽이 시자된 것을 알 수 있다. 야요이는 쓰치다에게 집에 같이 가자고 말은 한다. 하지만 쓰치다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밤에 달이 뜬 상태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의 집에 같이 가자는 의미는 같이 침대로 올라가자는 의미다.

 

잠자리를 거부한 것이 단순히 업무적인 요소라고 핑계를 둘러대지만, 쓰치다의 마음 한편에 수짱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이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쓰치다는 여자 친구 야요이도 있고, 수짱은 자신보다 나이가 4살이 많았다. 일본은 연애관계에서 나이의 요소를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여자의 나이가 남자보다 어린 경우가 다분하다. 야요이는 쓰치다보다 2살 어린 31살, 한국에서 평균적인 나이일 것이다. 단지 차이점은 한국에서 남자는 군대를 강제로 복무를 해야 하는 법이 있기에 그런 상태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남녀가 같이 대학을 졸업하면 같은 조건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남녀의 나이에서 한국보다 덜 구속받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애 그 자체에서 상대방에게 이성의 연인이 있고 없고는 별개의 문제다. 쓰치다에게 야요이란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수짱에게 상당한 벽으로 다가왔다. 겨우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밥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했는데, 안타깝게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수짱의 처지가 가엾기도 했다.

 

왜 그때 카페에서 한 번 제대로 말을 걸어보지 않았을까? 왜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까? 기회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오더라도 상대방이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는지와 없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잘 어울리면 한 번 상대방에게 권유를 해볼 가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상대방이 배려의 차원인지 아니면 그저 그냥 그렇게 대해주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사람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쓰치다와 수짱은 서로에게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고, 안타깝게도 수짱이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여러모로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인연의 반쪽은 어디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나, 그것도 상황과 여건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렇게 적으면 너무 비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막상 그 중간에서 헤매야 하는 사람에게 그 자체가 현실이다. 현실의 속내를 거기에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울 부분이 많을 것이다. 수짱 시리즈에서 사와코가 독신생활을 하는 모습에서 40살 주변의 골드 미스 이야기가 등장한다. 왜 그녀들은 혹은 그녀들의 반려가 되어야 할 남자들은 왜 서로에게 도통 나타나지 않을까?

 

사회에서 나이가 많이 찬 미혼의 남녀에게 결혼문제 건으로 가끔 이런저런 쓴 소리를 한다. 그러나 정작 그런 말을 한다면 그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은 없다.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하고 있니? 끝나는 무책임한 발언보다 혹시 주변에 상대가 없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 볼 것이니 생각 있으면 이야기해주겠니? 라고 말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너무 불성실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타입이 아니라면 대체로 결혼하여 생활하는 것에 문제는 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그런 점을 알아주는 것인데 말이다. 알아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골키퍼가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짱은 그렇게 자신의 희망이 다시 현실의 우울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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